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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9:28-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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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나현숙 전도사 |
참고 : | 새길교회 2001.8.12 주일설교 |
오늘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말씀의 주제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왜 해야 하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기도 행위"를 통하여 살펴 보고자 합니다.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누가복음에는 기도에 대한 예수의 관심이 상당히 부각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 하면 보통 십자가를 지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신 일 정도만을 기억하기 쉽지만 누가복음을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께서는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마치실 때까지 기도를 쉬지 않으신 것으로 나타납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몇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먼저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받고 성령받으시는 장면을 살펴보면,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누가복음에는 예수께서 세례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눅 3:21-22). 즉, 예수께서 공생애에 나가시기 전에 성령을 받으신 것은 세례받으실 때가 아니라 '기도하실 때'였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성령이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지는 은사라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생각은 사도행전으로도 이어집니다(행 4:31;8:15-17).
또한, 문둥병자를 고치신 사건을 자세히 보면, 예수께서 문둥병자를 고치신 후에 한적한 곳으로 가신 이유가 다른 복음서에 나타난 것처럼 유대정결법에 따라 예수 자신이 부정해졌거나 또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 아니라 누가복음에는 바로 '기도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눅 5:16).
열두 제자들을 선택하실 때도 예수께서는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고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날이 밝으매 제자들을 부르사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눅 6:12-13). 사도행전에도 맛디아와 일곱 지도자의 선택 당시에는 먼저 기도가 있었음을 강조합니다(행 1:24;6:6).
한편, 신약에는 주기도문에 관한 기사가 두 군데 나오는데, 마태와는 달리 누가는 주기도문을 소개하기 전에 예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
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눅 11:1). 기도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먼저 강조한 후 기도하시는 예수의 모습에 감동받은 제자 중의 하나가 예수께 나아와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주기도문은 기도하는 자의 모델이었던 예수께서 주신 모델 기도문인 되는 셈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이 늘 하시던 일을 그대로 가르치신 것이 바로 주기도문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묻기 전에도 예수께서는 따로 기도하신 것으로 나타나고(눅 9:18), 베드로에게 자신이 수난당하실 것과 그가 세 번 부인할 것을 예고하기 전에도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셨습니다(눅 22:31-32). 훗날 베드로가 회개하고 초대교회 성장에 큰 기초가 된 것은 바로 예수님의 기도 덕분이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누가는 자신만이 특수 자료들을 통하여 기도에 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밤중에 찾아온 친구 비유'(눅 11:5-8), '과부와 재판관 비유'(눅 18:1-8),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눅 18:9-14) 등은 누가복음에만 있는 기도에 관한 특수 자료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상에서의 최후의 기도, 즉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라든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눅 23:46) 등의 기도는 누가복음에만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매우 진지하게 기도하신 반면 제자들은 옆에서 잠에 빠져 있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모습을 가장 실감나게 묘사한 복음서 기자도 누가입니다. 누가의 증언에 의하면 예수님은 무릎을 꿇고 힘쓰고 애써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았다고 증언하였는데, 이러한 자세한 묘사는 누가만의 것입니다(눅 22:41-44).
그러한 예수의 모습은 옆에서 자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과 대조를 이룹니다. 그리고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는 명령과 함께 진지하게 예수 자신이 기도하는 자의 모델로 제자들에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인 변모의 기적은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 일어난 것입니다. 한편 옆에서 졸고 있던 제자들은 갑자기 깨어나 예수의 영광스러운 모습만을 목격하고는 초막 셋을 짓고 그곳에서 예수의 경험을 공유하고 싶은 조급한 욕망을 드러냅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33절). 초막이라는 것은 초막절에 짓는 것으로 하늘의 영원한 축복 가운데 의인들에게 주어질 영원한 장막이나 거처를 상징합니다. 초막을 짓고 그곳에 주저앉겠다는 말은 베드로의 신앙적인 몰이해를 잘 보여줍니다. 예수께서 가야할 고난과 죽음의 길을 이해하지 못하고 성급하게 현재에 주저앉아 천국의 축복을 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하며 영원한 장막에 거하려고 하면 고난과 죽음의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베드로는 이 진리를 통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재미있는 것은 베드로와 두 제자가 산에 오르자마자 피곤하여 졸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조느라고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의 죽음에 관하여 대화한 내용을 놓치고, 갑자기 깨어나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서 있는 장면만을 목격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산에 오르자마자 조는 모습은 예수께서 산에 오르시자마자 기도하신 것과 대조를 이룹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3년을 동고동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도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영적 무지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에게 무슨 이론이나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영성의 부족, 점 더 좁은 의미로는 기도의 부족에서 기인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예수께서 기도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고 자신을 아버지께 온전히 의탁할 때 제자들은 항상 옆에서 졸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바로 기도하는 예수 옆에서 곤하게 졸고 있는 제자들과 같다고 생각됩니다. 고난과 죽음의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 안일하게 하늘의 영광을 맛보고자 하는 잘못된 신앙을 보여 주었습니다. 전반적으로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하나님 뜻에 합당한 기도를 가르치지 않았으며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정의와 평화를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 나 자신을 포기하는 기도, 십자가에 나 자신을 못박는 기도는 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철저하게 자기를 비우시고 인류를 위해 죽음을 택하신 예수의 고귀한 영성을 닮지 못한 것입니다. 삶의 의지와 고백이 일치하지 않는 신앙을 보여주고 말았습니다.
얼마전 저의 어린 딸아이의 일기장을 뒤적거리는데 이런 대목이 나왔습니다. '우리 교회는 새길교회다. 새길로 간다는 뜻이다' 그 아이는 아마도 우리교회가 왜 새길교회인가 곰곰히 생각해 보았던 모양입니다. 새길로 간다는 것은 다른 길이 아닌 바로 예수의 길로 간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철저히 예수의 영성을 닮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의 영성의 기초는 '하나님 뜻에 합당한 기도'였다는 사실, 예수가 기도 없이는 그의 사역을 끝까지 감당하지 못하였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누가를 기도의 복음기자라고 부르며 누가복음을 기도의 복음으로도 부릅니다. 예수께서는 구원사의 중요한 순간마다 기도하셨고 초대교회의 지도자들 또한 그러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특히 기도는 성령을 받아들이는 주요한 수단이 되고 있습니다.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인간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바로 성령이라는 사실입니다.
누가의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예수처럼 항상 기도하여 깨어있어야 할 것이며(눅 21:36),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여 성령에 충만해짐으로써 계속 전개되어 나가는 하나님의 역사에 힘있게 동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란 결국 '내가 죽는 것'이 아닐까요? 나의 혈기와 탐욕과 또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욕망을 십자가에 못박는 행위일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라는 고백을 통하여 그의 삶이 매일 십자가를 지는 삶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요나가 들어갔던 물고기 뱃속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우리 어린아이들은 이 신화같은 이야기를 참 재미있어합니다. 요나에게 있어서 물고기 뱃속은 자신을 정화시키고 하나님의 뜻에 접근해가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일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생이 다하도록 계속되어져야 사건일줄로 생각됩니다. 우리는 매일 죽었다가 살아나야 합니다. 나만의 물고기 뱃속이 반드시 있어야 할 줄로 생각됩니다. 그곳에서 시시때때로 나 자신을 비우고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개인 개인의 깊은 영성이 모아져서 그것이 밑거름이 될 때 우리 새길교회는 점점 더 큰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교회가 이 땅의 어둠을 지워나가는 등불이 되어야 한다면 그 불을 타오르게 하는 기름은 바로 우리의 기도가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기도하실 때에'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고 놀라운 모습으로 변모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능히 고난의 쓴 잔을 받으시고 인류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변모한 예수의 이미지를 닮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 저희에게 깊은 신앙과 넓은 신학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기도의 영을 부어 주사 날마다 신앙의 깊은 경지로 들어가 주님의 뜻을 깨닫게 하옵시고, 우리가 소유하는 넓은 신학은 이 땅의 고통받는 영혼에게로 가까이 나가는 도구가 되게 하옵소서. 아멘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누가복음에 나오는 몇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먼저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받고 성령받으시는 장면을 살펴보면,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누가복음에는 예수께서 세례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눅 3:21-22). 즉, 예수께서 공생애에 나가시기 전에 성령을 받으신 것은 세례받으실 때가 아니라 '기도하실 때'였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성령이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지는 은사라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생각은 사도행전으로도 이어집니다(행 4:31;8:15-17).
또한, 문둥병자를 고치신 사건을 자세히 보면, 예수께서 문둥병자를 고치신 후에 한적한 곳으로 가신 이유가 다른 복음서에 나타난 것처럼 유대정결법에 따라 예수 자신이 부정해졌거나 또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 아니라 누가복음에는 바로 '기도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눅 5:16).
열두 제자들을 선택하실 때도 예수께서는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고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날이 밝으매 제자들을 부르사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눅 6:12-13). 사도행전에도 맛디아와 일곱 지도자의 선택 당시에는 먼저 기도가 있었음을 강조합니다(행 1:24;6:6).
한편, 신약에는 주기도문에 관한 기사가 두 군데 나오는데, 마태와는 달리 누가는 주기도문을 소개하기 전에 예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
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눅 11:1). 기도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먼저 강조한 후 기도하시는 예수의 모습에 감동받은 제자 중의 하나가 예수께 나아와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주기도문은 기도하는 자의 모델이었던 예수께서 주신 모델 기도문인 되는 셈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이 늘 하시던 일을 그대로 가르치신 것이 바로 주기도문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묻기 전에도 예수께서는 따로 기도하신 것으로 나타나고(눅 9:18), 베드로에게 자신이 수난당하실 것과 그가 세 번 부인할 것을 예고하기 전에도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셨습니다(눅 22:31-32). 훗날 베드로가 회개하고 초대교회 성장에 큰 기초가 된 것은 바로 예수님의 기도 덕분이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누가는 자신만이 특수 자료들을 통하여 기도에 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밤중에 찾아온 친구 비유'(눅 11:5-8), '과부와 재판관 비유'(눅 18:1-8),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눅 18:9-14) 등은 누가복음에만 있는 기도에 관한 특수 자료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상에서의 최후의 기도, 즉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라든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눅 23:46) 등의 기도는 누가복음에만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매우 진지하게 기도하신 반면 제자들은 옆에서 잠에 빠져 있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모습을 가장 실감나게 묘사한 복음서 기자도 누가입니다. 누가의 증언에 의하면 예수님은 무릎을 꿇고 힘쓰고 애써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았다고 증언하였는데, 이러한 자세한 묘사는 누가만의 것입니다(눅 22:41-44).
그러한 예수의 모습은 옆에서 자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과 대조를 이룹니다. 그리고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는 명령과 함께 진지하게 예수 자신이 기도하는 자의 모델로 제자들에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인 변모의 기적은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 일어난 것입니다. 한편 옆에서 졸고 있던 제자들은 갑자기 깨어나 예수의 영광스러운 모습만을 목격하고는 초막 셋을 짓고 그곳에서 예수의 경험을 공유하고 싶은 조급한 욕망을 드러냅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33절). 초막이라는 것은 초막절에 짓는 것으로 하늘의 영원한 축복 가운데 의인들에게 주어질 영원한 장막이나 거처를 상징합니다. 초막을 짓고 그곳에 주저앉겠다는 말은 베드로의 신앙적인 몰이해를 잘 보여줍니다. 예수께서 가야할 고난과 죽음의 길을 이해하지 못하고 성급하게 현재에 주저앉아 천국의 축복을 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하며 영원한 장막에 거하려고 하면 고난과 죽음의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베드로는 이 진리를 통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재미있는 것은 베드로와 두 제자가 산에 오르자마자 피곤하여 졸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조느라고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의 죽음에 관하여 대화한 내용을 놓치고, 갑자기 깨어나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서 있는 장면만을 목격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산에 오르자마자 조는 모습은 예수께서 산에 오르시자마자 기도하신 것과 대조를 이룹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3년을 동고동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도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영적 무지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에게 무슨 이론이나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영성의 부족, 점 더 좁은 의미로는 기도의 부족에서 기인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예수께서 기도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고 자신을 아버지께 온전히 의탁할 때 제자들은 항상 옆에서 졸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바로 기도하는 예수 옆에서 곤하게 졸고 있는 제자들과 같다고 생각됩니다. 고난과 죽음의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 안일하게 하늘의 영광을 맛보고자 하는 잘못된 신앙을 보여 주었습니다. 전반적으로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하나님 뜻에 합당한 기도를 가르치지 않았으며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정의와 평화를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 나 자신을 포기하는 기도, 십자가에 나 자신을 못박는 기도는 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철저하게 자기를 비우시고 인류를 위해 죽음을 택하신 예수의 고귀한 영성을 닮지 못한 것입니다. 삶의 의지와 고백이 일치하지 않는 신앙을 보여주고 말았습니다.
얼마전 저의 어린 딸아이의 일기장을 뒤적거리는데 이런 대목이 나왔습니다. '우리 교회는 새길교회다. 새길로 간다는 뜻이다' 그 아이는 아마도 우리교회가 왜 새길교회인가 곰곰히 생각해 보았던 모양입니다. 새길로 간다는 것은 다른 길이 아닌 바로 예수의 길로 간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철저히 예수의 영성을 닮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의 영성의 기초는 '하나님 뜻에 합당한 기도'였다는 사실, 예수가 기도 없이는 그의 사역을 끝까지 감당하지 못하였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누가를 기도의 복음기자라고 부르며 누가복음을 기도의 복음으로도 부릅니다. 예수께서는 구원사의 중요한 순간마다 기도하셨고 초대교회의 지도자들 또한 그러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특히 기도는 성령을 받아들이는 주요한 수단이 되고 있습니다.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인간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바로 성령이라는 사실입니다.
누가의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예수처럼 항상 기도하여 깨어있어야 할 것이며(눅 21:36),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여 성령에 충만해짐으로써 계속 전개되어 나가는 하나님의 역사에 힘있게 동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란 결국 '내가 죽는 것'이 아닐까요? 나의 혈기와 탐욕과 또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욕망을 십자가에 못박는 행위일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라는 고백을 통하여 그의 삶이 매일 십자가를 지는 삶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요나가 들어갔던 물고기 뱃속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우리 어린아이들은 이 신화같은 이야기를 참 재미있어합니다. 요나에게 있어서 물고기 뱃속은 자신을 정화시키고 하나님의 뜻에 접근해가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일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생이 다하도록 계속되어져야 사건일줄로 생각됩니다. 우리는 매일 죽었다가 살아나야 합니다. 나만의 물고기 뱃속이 반드시 있어야 할 줄로 생각됩니다. 그곳에서 시시때때로 나 자신을 비우고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개인 개인의 깊은 영성이 모아져서 그것이 밑거름이 될 때 우리 새길교회는 점점 더 큰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교회가 이 땅의 어둠을 지워나가는 등불이 되어야 한다면 그 불을 타오르게 하는 기름은 바로 우리의 기도가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기도하실 때에'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고 놀라운 모습으로 변모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능히 고난의 쓴 잔을 받으시고 인류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변모한 예수의 이미지를 닮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 저희에게 깊은 신앙과 넓은 신학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기도의 영을 부어 주사 날마다 신앙의 깊은 경지로 들어가 주님의 뜻을 깨닫게 하옵시고, 우리가 소유하는 넓은 신학은 이 땅의 고통받는 영혼에게로 가까이 나가는 도구가 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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