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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잃어버린 크리스챤

요한복음 박충구 목사............... 조회 수 2341 추천 수 0 2008.08.04 09:4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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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1:13 
설교자 : 박충구 목사 
참고 : 새길교회 2001.9.16 주일설교 
"예수를 잃어버린 크리스챤"-누가 테러리스트인가?

지난 주 유엔 인권위원회 회의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인권보호를 위한 안을 토론할 때 미국은 이스라엘과 함께 회의장을 퇴장함으로써 안을 무산시켰습니다. 그 일을 보면서 저는 덩치 큰 미국이 조그마한 이스라엘 등에 업힌 것과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며칠이 지나지 않는 금주 화요일(미국 시간으로 2001년 9월 11일 아침)에 우리는 대단히 충격적인 뉴스를 접했습니다. 비행기를 하이재킹한 아랍인들이 자살 테러를 감행하여 무고한 비행기 승객들이 탄 비행기를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맨해탄의 110층의 쌍둥이 빌딩에 충돌시켜 수천명의 생명을 무고하게 죽였는가 하면, 미국의 군사적 중추라 할 수 있는 펜타곤에도 추락하게 하여 200여명의 생명을 앗아가는 참사를 목격했습니다. 이번 사건은 미국의 언론사들을 통하여 세계적인 관심을 끌어 모으고, 급기야는 많은 이들의 분노와 보복심리를 자극하고 있습니다. 미국 의회 지도자들과 정치인들은 기도회를 열고, 정치권 주변의 목사들은 한결같이 하나님께서 이 시점에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지혜를 부시 대통령과 미국의 지도자들에게 주실 것을 간곡히 기도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보복의 윤리와 테러

아이러니칼하게도 미국의 오만한 대외정책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며, 피의 보복은 또 다른 피의 보복을 부른다는 관점에서 미국의 군사력에 의한 약소국가 국민들의 생명권을 빼앗으려는 기획은 하나님 앞에서 테러와 다를 바 없는 범죄라는 주장을 하는 교회들의 소리들은 우리에게 별로 들려오지 않습니다. 미국 아틀란타에서 공부하고 있는 제자에게서 온 메일을 읽으면서, 저는 미국 안에서 많은 크리스챤 공동체가 미국의 힘의 정치에 대하여 이견을 제기하며 범죄 당사자에 대한 징벌을 추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여도, 파키스탄의 가난한 백성들의 생명권을 훼손하는 것은 또 다른 인종차별이며, 범죄라는 인식을 나누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느 나라보다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공적 사적 영역에서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있는 미국은 어쩌면, 하나님 없이 하나님의 이름만을 사용하고 있는 기독교성을 대변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잔혹한 테러를 행한 18명의 테러리스트와 그들을 조정 후원한 세력을 찾아내어 정의의 심판을 내리는 것은 국가의 정당한 행위라 할 수 있지만, 이를 빙자하여 광범위한 사람들을 범죄자로 몰고, 피의 보복을 감행함으로써 스스로 권력의 강함과 위로를 얻으려하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기독교 신앙 안에서는 동의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만일 여러분들의 사랑하는 이들이 무참하게 죽임을 당했다면, 그 주검 앞에서 여러분들 또한 미국이 가지고 있는 태도와 유사한 모습을 보이겠지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삶의 자세에서는 기독교적인 삶의 태도를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작용하고 있는 내면의 논리는 보복의 윤리(ethics of retaliation)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이런 윤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 적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며 세울 수 있는 정의는 예수의 관점에서는 고려될 수도 없으며,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기독교의 이름으로 행하는 많은 일들은 우리에게 다시 한번 "크리스챤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 혹은 "내가 믿고 아는 예수는 어떤 예수인가?" 스스로 질문하게 합니다.

근본주의 자들의 테러

지난주간, 저는 미국의 테러 사건과 규모는 같지 않지만, 내용적으로 동일한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큰 감리교회를 자랑하는 교회의 목사님께서 우리 대학의 성서신학 교수이며 같은 교단의 목사인 한 분에 대하여 개인 이름을 공공연히 지목하며 "사탄의 종"이라 규정하면서 주일 설교를 한 본문이 저에게 전달되어 왔습니다. 몇 년 전에 저희 학교 두 교수를 교단재판에 회부시키고, 축출하는 데 앞장섰던 바로 그분이 또다시 신앙적 의분을 토로하며 설교하신 것입니다. 내용을 살펴보니, 기독교 초기 기독교 교리가 형성되기 이전의 예수는 철저히 하나님을 향한 그의 신앙이 많은 이들로 하여금 그를 따라 살게 했으나, 교리가 형성된 이후에는 예수에 대한 신앙이 하나님 보다 중요해져 우상 숭배적이라는 것이라는 요지를 가진 글에 대한 공격이었습니다. 삼위일체의 교리를 만들면서 예수를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로 만든 것은 사실 삼위일체 신론을 만들어 낸 신학자들의 작업이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그러한 신앙을 이해도 못했고 알 수도 없었습니다. 일련의 교권주의적인 학자들은 자신의 이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정치권력과 밀접하게 결탁하였고, 그러한 이들만이 교리싸움에서 승리를 거둘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과 지식을 몰안시하는 근본주의적 신앙의 지도자들은 기독교 신앙을 너무나 단순화한 나머지 정말 진짜 예수를 몰안시하는 종교적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난주간에 있었던, 또 하나의 사건은 제가 강의하고 있는 감리교신학대학교 신학부 학생들이 "동성애에 대한 교회의 입장"에 관한 심포지엄을 열었던 일과 관련이 되었습니다. 시카고 신학대학의 테드 제닝스 교수가 함께 참여한 이 심포지엄에서 저는 동성애자들의 현실을 이해하게 되었고, 또한 교회가 동성애자들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부정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남녀간에 성을 매개로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사는 것이 옳은 것이고, 그 이외의 것들은 비정상이라고 보는 거대한 사회적 편견아래 독신으로 사는 이들이나, 동성애자들이나, 혹은 이혼을 한 이들은 무의식적인 억압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동성애자들의 경우에는 그 도가 심하여, 거주지에서나, 직장, 학교, 교회에서 거의 추방을 당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특히 보수적인 성윤리를 가르치고 있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이혼은 죄악이며, 동성애는 악마적인 것이라고 가르침으로써 무수한 크리스찬에게 증오와 적개심을 가지도록 만드는 한편, 이혼하지도 않고, 동성애자가 아닌 것만으로 스스로를 의롭고 거룩한, 축복받은 존재로 여기게 하는 기이한 현상까지 불러오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와 생각이 다르고, 사는 모양만 달라도 동료들을 악마로 몰아가는 테러리스트 크리스챤들입니다.

여성을 향한 테러리스트

인류 역사 속에서 보편적 제도가 되어 버린 정치와, 경제, 그리고 결혼과 가정은 일면 인간의 자유를 박탈하면서 형성된 제도들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350만년 전 이 지구 위에 출현하면서 이러한 제도들을 가지고 나타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정치, 경제, 그리고 성과 결혼이라는 제도는 인간을 역사 속에서 가장 억압하고 고통스럽게 해 온 장치이기도 합니다. 저는 동성애자들이 주장하듯이 결혼이란 제도의 착취성과 억압적 관계가 마치 매춘의 구조와 유사한 틀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성을 매개로 하는 결혼 제도는 우리에게 있어서 기독교적 삶의 양태를 위태롭게 하는 요소가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우리는 결혼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적 관계에서도 성희롱과 성폭력의 구조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법조계나, 일반 학계는 아직도 가부장적인 남성 편의적인 성윤리를 통용시키는 논리와 구조를 정당하다고 보고, 여성의 인간으로서의 자기 결정권과 존엄성을 2등급으로 소홀히 취급하는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국제학생회(ISO)와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학 당국과 새로 온 외국인들이 문화적으로, 혹은 언어소통에 문제가 있을 경우 돕는 일을 했습니다. 하루는 대학원 부원장이 저를 찾는다하여 가보았더니 부끄러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박사과정 학위과정을 공부하러 오신 목사님들이 자신의 부인들을 구타하는 일이 지금가지 여러 번 있었는데 이것이 당신 나라의 관습이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너무나 잘생기고, 목소리도 너무 좋고, 기도도 감동스럽게 하시는 분이신데, 믿기 어렵게도 아내를 구타하는 버릇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아내를 구타하는 남자, 아내를 하대하는 남자, 그리고 여성을 언어나 몸으로 희롱하는 남자는 일맥상통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남자인 자신은 주인이고, 여자는 자신의 뜻과 생각대로 움직여 주어야 직성이 풀린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대부분 한국 남성들이 모인 자리면, 그곳이 노동자들이든, 회사원이든, 점잖은 학자들이 모인 자리이든, 혹은 거룩한 목사님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음담 패설과 여성을 비하하는 내용을 담은 농담들이 꽃을 핍니다. 이런 일을 잘하시는 분들은 인기가 있고, 또한 많은 이들을 즐겁게 하는 좋은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현상의 가장 깊은 이면에는 여성을 한 인간으로서 존엄성과 인격과 자율성, 그리고 자결권을 가진 존재로 보지 못하게 하는 오랜 습성에서 아직 계몽되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은 여성을 동료로 받아들이기를 꺼리고, 당황해 합니다. 그리하여 자신들의 권력구조 안에서 여성들의 진출을 교묘하게 막고 여성들의 삶의 의지와 희망을 무력화시키는 은밀한 테러리스트들이 됩니다. 이 분들이 교인이며, 스스로 크리스챤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그 분들은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는 예수와 다른 방향으로 길을 가고 있는 것이지요. 인간은 테러의 대상이 아닙니다. 희롱과 놀이의 대상도 아니지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고귀한 생명이라는 복음의 핵심을 비껴 아마도 한쪽으로 접어두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높은 자리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여성들이 동료로서 존재하기보다는, 여성들의 서비스를 받으면서 살고, 또한 여성들이 제외된 자리에서 권력을 누리는 이들은 남성들만의 편견에 깊이 오염되어 더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남성들의 세계는 거의 정치적 동성애자들 같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찌보면 인류의 반이나 되는 여성들에게 돌려주어야 할 당연한 여성의 몫인 권력까지 남성들이 독식하고 있는 구조가 우리 사회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억압의 문화의 유지자로서 살아가면서 스스로를 크리스챤, 예수를 따라 산다고 한다면, 무엇인가 잘못되어도 많이 잘못된 것입니다. 여성들의 인간으로서의 권리, 사회인으로서의 권리를 모두 빼앗아 자기 권력을 강화해 온 전통은 여성에 대한 테러의 역사를 낳았던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가진자 편에 서는 테러

이 일들 뿐 아니라,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삶의 한 부분은 물질과 관계되는 것일 겁니다. 사실상 돈 관계는 우리에게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노골적이고 너무 속보이는 행태는 염오를 불러일으키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띠지 않는 방식으로 치부를 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비난과 비판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소유를 많이 가질수록 능력이 있고, 위대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얼마 전 동료교수의 모친께서 세상을 떠나셔서 문상을 갔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강남의 유명한 교회 목사님께서도 문상을 오셨습니다. 그 분은 교회와 사회의 모진 비난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섬기던 교회를 아들에게 물려주는 데 성공하신 분이었습니다. 아들에게 교회를 넘겨주고 은퇴하신 이 목사님은 기사를 대동하고 장관급이나 타고 다닐 법한 최고급 자동차를 타고 오셨습니다. 아마 성공한 사람들이 그 성공에 버금가는 최상의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원칙을 자신에게도 적용했거나, 아니면 그 교회의 부유한 장로들은 당연히 자신이 타고 다니는 차보다 더 좋은 차를 목사님께서 타셔야 자신들이 덜 미안해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교회의 사이즈 못지 않게 풍요와 부요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인과 목사들이 있는 교회들이 한 두개가 아닙니다. 교회 세습에 대한 사회의 비난이 일어나니까, 장로교 대형 교회 목사들 역시 "함부로 말할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은근히 목사끼리 연대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저는 과연 이 분들이 경제적 정의에 대하여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처럼 청빈의 삶에 대하여 설교할 생각이라고 가지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이들은 청빈한 삶에서 평화와 사랑을 나눌 것을 명하셨던 예수도 젖혀놓고 예수와는 상관없는 교리적 구원만을 복음이라고 외치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 목사님들에게 신앙을 배운 이들은 자신이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그것을 축복으로 여기는 몰염치한 사람들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가난한 이들을 업신여기고 그들의 몫을 되돌리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렇듯, 한국 교회에는 예수를 잃어버린 목회자, 그 목회자로부터 예수 없이 신앙을 배우는 신도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니, 혹시 새 길을 가겠다고 나선 여러분들도 그러한 사고와 습성, 가치관에 익숙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주변에 신앙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동료와 이웃을 죄인으로, 악마로, 사탄의 자식으로 몰아대는 이상한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기독교 신앙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알라를 폭격할 수도 있고, 도끼를 들고 단군 신상도 때려부술 수 있고, 산골짜기마다 있는 사찰의 돌부처 이마에다 빨간 십자가를 긋고 신앙적 승리를 외치는 이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혼했다고 비하하고, 동성애자라고 해서 비인간 취급하며, 여성이라고 해서 동료로 보지 못한다면, 일면 이들은 더욱 광범위하게 산재되어 있는 테러리스트들입니다. 크게 보면, 미국이 자기 의에 가득 차 전쟁을 할 때마다 예배를 드리며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전쟁을 허락받은 것처럼 대중의 의식을 이끌어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주변의 약소국들과 그 국민들의 생명권과 자결권을 짓밟는 것도 어쩌면 테러보다 더 끔찍한 죄일 수 있습니다. 작게 보면, 차별과 편견으로 더불어 채워진 자신의 신앙을 스스로 의화하면서 나와 다른 이들은 죄인이며, 악마라고 규정하면서 미움과 증오를 정당화하는 이들은 결국 다른 이들의 생명과 자유를 유린하는 테러의 감행자가 될 기질이 많은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약자와 소수자들을 비하시킬 객관적 조건들을 찾는다면, 그 경우 그 확신이 더욱 강해지고, 성품이 강하면 강할수록 가해력도 커집니다.

강한 자들의 테러

며칠 전 교보문고에 갔다가 오늘의 설교를 준비하기 위하여 두 권의 책을 샀습니다. 하나는 두 권으로 묶여진 [기독교 죄악사]라는 책이고, 다른 하나는 캐나다의 오강남 박사가 쓴 [예수는 없다]라는 책이었습니다. 이 책들은 예수를 잃어버린 기독교의 오류가 어떤 것인지를, 그리고 예수를 잃어버린 한국교회의 현실이 어떤 것인지를 잘 설명해 주는 책들이었습니다. 그릇된 신앙적 교만으로 얼룩진 무서운 얼굴들, 풍요한 소수자에 속하기 위하여 이웃을 버리는 사람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을 모르던 기원전 철학자들도 보다 영원하고 지속적인 가치는 육체적 쾌락에 있지 않다고 보았던 것인데, 오늘날에 육체적 만족과 쾌락을 추구하는 이들은 아무래도 예수를 잃은 공허를 다른 것으로 채우려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를 잘못 믿는 것보다 차라리 아예 안 믿는 것이 났다."라는 오강남 박사의 메시지는 종교적 무지와 맹신에 사로잡혀서 교회에 세워둔 허수아비 예수를 붙잡고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비추어주고 있었습니다.

허수아비 예수를 믿으면 예수와 상관없이 자신이 강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을 추구합니다. 한국 교회는 소수의 교회를 제외하고 이런 성품을 키워내고 있습니다. 전투적인, 테러리스트적인 호전적 기독교인을 만들어 교회를 맹목적으로 섬기게 하는 대신 축복과 성공과 풍요와 번영을 중요한 신앙의 보상으로 가르쳐 왔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신앙교육을 받는 이들은 자신의 죄는 티끌 같고, 다른 이들의 죄는 대들보같이 보는 편견을 가지게 되고, 이러한 편견에 사로잡힌 교회의 교인들이 집단적으로 약한 자를 가해할 때에는 아무도 말릴 수가 없습니다. 그들 중에는 간혹 많이 배운 사람들도 있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이들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신앙을 가지기 위해서 지성적 사유를 포기한 무식함이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며, 거기다가 열심히 있고, 그 위에 믿음에 따른 확신까지 더해지면 아무도 말리지 못하는 과격한 신도들로 돌변합니다. 예수를 닮은 겸손한 덕을 가진 그리스도인들, 예수의 제자의 도리를 따라 청빈한 삶을 살아가는 좋은 목사님들을 만나기 어려운 우리 한국교회는 아무리 생각해도 오박사가 지적하는 대로 예수를 잃어버린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의 겸비, 청빈, 순결하고 거룩한 삶에 동참하는 것이 하나의 참된 신앙의 길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과 다릅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에는 그 내용이 막연하지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매우 구체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갔던 예수를 따라 사는 일에 참여하고, 그의 삶에 동의한다는 것이어야 합니다. 기독교의 첫 출발은 적어도 그랬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 때에는 교리도 없었고, 전문직종으로서의 목사도 없었습니다. 또 목사들의 생존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모이는 공동체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위한 교회를 위해서 헌금하고 봉사하지도 않았지요. 그들은 예수처럼 사는 것이 인간답고, 하나님의 선하신 거룩한 삶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의 삶에서 예수다움이 찾아지지 않고, 하나님의 선한 뜻을 모색함이 없다면, 그리고 거룩한 삶의 내용이 없다면, 그래서 그저 주어지는 대로 사람 따라서, 막연하게 살고 있다면 이름은 크리스쳔이라 할지라도 "예수를 잃어버린 크리스쳔"일 것입니다. 나는 예수의 삶은 겸비와 청빈 그리고 거룩한 삶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배와 교만과 강함보다는 겸비한 삶, 소수만이 누리는 부유함과 사치와 풍요를 지향하기보다는 청빈한 삶, 육체의 욕망을 따라 자기 중심의 쾌락을 도모하는 삶보다는 거룩하고 순결한 삶입니다. 이런 까닭에 처음 모였던 기독교 공동체들은 겸비와 청빈과 순결한 삶을 살아감으로써 예수의 부활을 자신들 속에서 이루어 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를 만나셨습니까? 아니면, 아예 예수를 찾을 생각도 하지 않고 교회를 다니십니까? 혹시 예수를 잃어버린 크리스쳔은 아닌지요? 요한 복음 1장 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두움이 빛을 이기지 못하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이기지 못합니다. 새벽 미명 빛이 어둠을 밀어내는 장관을 보신 기억들이 있으신지요? 빛이 있으면,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어둠이 아직 있다면, 우리는 아직 어둠 속에 있는 것입니다. 아직 빛이신 그리스도를 찾지 못한 사람들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말씀하셨던 그 분, 예수 그리스도를 정말 찾으러 길을 떠나셔야 합니다. 이 여정은 산골짜기나 바닷가로의, 혹은 수도원으로의 여정이 아니라, 우리 내면을 향한 여정입니다. 요한복음 1장 10절 말씀처럼, "세상이 저를 잘 구별하고 알아보지 못하는 그 분"을 향한 입니다. 그러나 빛이신 예수가 우리 안에 오시면 어둠이 물러나는 법입니다. 그 분을 만남으로써 우리 안에 증오와 미음이 사라지고, 시기와 질투가 소멸되며, 그 분을 만남으로써 여러분이 더 자기 주장을 안 해도 될 만큼 마음이 든든한 진리입니다. 그 분을 만나면, 탐욕으로 채우려던 삶의 의미보다는 맑고 깨끗하게 사는 것이 풍요하다고 믿게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사는 것은 보다 많은 이들과 평화하며 사랑을 나누는 길이라고 믿게 되어야 정상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에 이 세상이 우리에게 약속하는 즐거움에 비할 바 없는 삶의 의미를 얻게되고, 더 이상 삶의 무의미와 죽음의 공포가 가져오는 허무함에 시달리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진리를 소유함으로서 증오와 미움과 차별의 길로 내모는 테러리스트의 교사와 같은 그런 예수가 아니라, 미움과 증오를 버리고, 편견과 차별을 버리고 여러분의 이웃을, 그들이 세리이던지, 창기이든지, 아니면 타종교인이든 혹은 동성애자 이든지를 막론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한 하나님의 자녀로 바라보게 하는 예수를 되찾아야 합니다. 이 예수는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들은 예수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예수에 비추어 자신의 누추함을 깨닫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죄인이로소이다"(눅 5: 8)라고 부끄러움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예수는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언제나 바라보아야 할 삶의 이정표입니다. 이 분을 생각하고 바라보며, 기도하면서 우리는 그의 삶과 사상에 비추어 진리에 미달하는 자신을 끊임없이 깨달으며 겸손함으로, 청빈함으로, 그리고 거룩함으로 살아가는 길을 재촉해야 옳은 것입니다. 그런 예수를 만나신 분은 그 길을 계속 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아직 그런 예수를 만나지 못하셨다면, 이번 가을이 다지나가기 전에 그 분을 꼭 만나시기 바랍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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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5 요한복음 흔들리는 빌라도 요18:35-38  김이수 형제  2008-07-29 1690
1184 누가복음 그가 기도하실 때에 눅9:28-36  나현숙 전도사  2008-07-29 1759
1183 신명기 복 주시려고 신8:6  김남준 목사  2008-07-29 2058
1182 이사야 달콤한 연단 사48:10  김남준 목사  2008-07-29 2300
1181 시편 은을 단련함 같이 시66:10  김남준 목사  2008-07-29 3010
1180 사무엘하 아버지의 통곡 삼하18:33  김남준 목사  2008-07-29 1969
1179 에배소서 부모 공경과 순종 엡6:1-9  김남준 목사  2008-07-29 2867
1178 여호수아 먼저 내 부모를 구원하라 수2:1-21  김남준 목사  2008-07-28 1885
1177 에스겔 부모를 업신여긴 자의 결국 겔22:7  김남준 목사  2008-07-28 2103
1176 신명기 네 부모를 업신여기지 말라 신27:16  김남준 목사  2008-07-28 2178
1175 마태복음 가르치는 자의 정서 마9:35-38  강종수 목사  2008-07-27 1749
1174 창세기 가인의 표 창4:1-16  김이곤 목사  2008-07-26 2704
1173 마태복음 잃어버린 영혼 70년 마4:1-4  길희성 형제  2008-07-26 1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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