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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90: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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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길희성 형제 |
참고 : | 새길교회2001.9.23 주일설교 |
미국의 테러 참사 이후 모두가 불안 속에 들떠서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 지구가 다른 행성과 충돌이나 한 듯 온 세계가 큰 충격을 받아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 있으며, 다음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는 형편입니다. 누구나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어떻게 그런 일이?"라고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지만. 할리우드 영화의 한 장면보다도 더 공상적인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으며, 지금 세계는 이 참혹한 사건이 가져다 준 충격에서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이 사건이 비록 남의 나라에서 일어난 것이라 해도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전 세계에 그토록 충격을 준 이유는 단지 그 사건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참혹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더 충격적인 것은 그러한 참혹한 일이 다른 나라가 아니라 바로 미국 땅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평소 우리가 알기로는 적어도 국가 신뢰도와 안전도에서 가장 믿을만한 나라, 가장 안정된 사회, 가장 강력한 국가에서, 그것도 그 심장부에서 일어났다는 데에 그 사건이 주는 엄청난 충격과 파장이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사태수습과 해결책이 결코 쉽지 않을 것 같기에 세계는 더욱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이번 사건으로 이제 우리 인생에서 안전한 것, 확실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고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이든지 일어날 수 있는 매우 불안한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뚜렷이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그처럼 단단하게 보이던 한 나라의 토대(foundation)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모습을 우리는 보았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질서가 그렇게 안전하고 단단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구축해 놓은 질서라는 것은 저 세계무역센터의 건물들처럼 순식간에 무너져 뒤죽박죽 엉망진창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번 참사를 계기로 다시 한 번 우리 삶의 모습과 의미에 대해 성찰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사건의 도덕적 책임론도 중요하고 정치·경제적 결과에 대한 논의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에게는 바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 자체가 걸려 있는 중대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저는 오늘 이러한 신앙의 문제로서 이번 사건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우리 인생의 무너지지 않는 토대는 과연 무엇입니까? 저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은 누가 보상해 줄 것이며,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이런 엄청난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하시는 것입니까? 이 끔찍한 사건 속에서도 혹시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에게 어떤 무언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계시지는 않는지 우리는 묻게 됩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의 장점이자 치명적인 단점 가운데 하나는 이 세상에서 진행되고 있는 역사에 눈을 크게 뜨고 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영원을 위해 시간과 역사의 세계에 눈을 감아버리는 역사 도피적 신앙이 아닙니다. 역사가 아무리 괴롭고 아무리 부조리하고 아무리 이해할 수 없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주님이심을 믿기 때문에 역사의 현장에서 그 신앙적 의미를 물어야만 합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하나님을 만나야만 합니다. 이렇게 역사를 회피하지 않고 역사와 정면으로 씨름해야 하는 것은 정녕 괴로운 일이지만 성서적 신앙의 특징입니다. 역사가 너무 괴롭고 너무 무의미하게 보인다 해서 우리는 역사에 눈을 감아버리고 영혼의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외부의 현실 세계를 무시하고 내적 평안에 안주하는 것은 기독교의 신앙 전통은 아닙니다. 아무리 어둡고 절망적이어도 우리는 바로 역사적 현장 속에서 하나님의 빛을 보아야 하고 희망의 징표를 읽어내야만 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하나님과 역사는 불가분리입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에게는 역사의 알리바이나 역사로부터의 휴가는 있을 수 없고, 우리 기독교 신자들 역시 잠시라도 역사에서 눈을 돌릴 수 없습니다. 역사가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그 많은 아픔과 슬픔, 부조리와 고통을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지고 살아야 합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역사에 책임을 면할 수 없으며 이러한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의 신앙 또한 역사를 외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극적 사건을 대할 때마다 하나님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그러한 일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은 과연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그러한 명백한 악을 통해서도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은 과연 무엇인지, 아니 뜻이란 것이 도대체 있기나 한 것인지 말입니다.
나는 미국의 번영을 상징하듯 위용을 뽐내며 우뚝 서 있던 쌍둥이 빌딩이 순식간에 무너져 버리는 것을 보면서 언뜻 바벨탑의 붕괴를 연상했습니다. 세계무역센터가 바벨탑처럼 하늘에까지 이르려는 인간 교만의 상징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두 사건을 연계시키는 것은 억지이고 무리입니다. 더군다나 무고한 생명의 죽음을 놓고 하나님의 심판이나 징벌을 운운하는 것은 역겹고 불경스럽기까지 합니다. 무역센터 빌딩의 붕괴는 분명 잔악한 인간의 행위이지 결코 하나님의 징벌이 아니라고 저의 기독교 신앙은 믿습니다. 저는 그런 잔인한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큰 불행이 닥칠 때마다 신이 난 듯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을 들먹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미국의 유명한 Jerry Fallwell 목사 - 'moral majority'라고 하는 미국의 근본주의자들, 보수주의자들을 중심으로 기독교 우익 정치세력을 형성하여 한 때 미국 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람 - 가 이번 참사를 동성애자, 낙태 찬성론자, 마약 복용자들 등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말했다가 곤욕을 치르고 침이 마르게 사과하는 것을 몇 일 전 텔레비전에서 본 일이 있습니다. 벌주기를 좋아하는 잔인한 하나님, 증오와 징벌의 하나님을 그는 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의 3대 유일신 신앙은 종종 그러한 증오의 멘탈리티를 부추기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극한적 대립과 갈등의 뿌리라고 지탄받는 것입니다. 뉴욕과 워싱턴은 소돔과 고모라가 아니고, 세계무역센터는 바벨탑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고뇌는 더 깊어집니다. '왜'라는 물음에 대하여 단순한 대답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곤혹스러운 것입니다. 세계무역센터가 바벨탑이 아님은 너무나 분명한 데도 바벨탑이 연상되는 것은 어쩐 일입니까? 원자폭탄이 만들어 내는 버섯구름보다도 더 끔찍하게 보이는 그 시멘트 구름에서 저는 하나님의 진노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어느 개인이나 집단에 진노하셨다는 말이 전혀 아닙니다. 왜 누구 때문에 하나님이 진노하시는지 딱히 말할 수는 없는데도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 모두에게 몹시 화가 나신 것 같다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지으신 아름다운 창조의 세계를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인류문명 그 자체에 하나님께서 역정을 내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로'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정말 인간처럼 화를 내기라도 한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분명 하나의 메타포요 상징적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진노는 과연 무엇에 대한 상징이며, 그러한 표현 뒤에 숨은 실재는 무엇입니까?
저는 그 말이 표현하는 바는 인간들의 한 매친 분노가, 우리의 증오와 원성이 하늘에 닿았다, 우주에 가득 찼다는 뜻으로 풀이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말이 사랑이 단지 인간적 현상만이 아니라 영원하고 우주적인 힘임을 뜻하듯이, 하나님의 분노라는 말도 인간이 지은 악이 우주에 가득 찼고, 인간이 건설해 놓은 세계 질서와 화려한 문명의 뒤안길에서 쌓인 원한이 우주에 사무쳤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다름 아닌 우주에 충만한 우리 동료 인간들의 한과 절규요 미움과 증오라는 말입니다. 나는 이번 사건이 이러한 한이 그 한계 상황에 이르러 그만 폭발한 것이며, 바벨탑처럼 무너진 세계무역센터의 붕괴는 우리가 자랑하는 문명의 허구를 여실히 보여주는, 아니 화려한 문명의 그늘에 가려 있던 인간의 죄악성, 원한, 증오를 폭로하는 사건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실로 이번 참사에서 우리는 인간으로서는 갈 데까지 다간 악과 원한의 극치를 보며, 동시에 인간이 만들어 놓은 강자들의 질서와 문명의 허구를 동시에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들이 하는 모든 일과 성취가 허무하고 슬프고 무의미한 장난처럼 보였습니다. 번영의 상징인 바로 그 빌딩에서, 열심히 일하고 출세해서 한껏 능력을 발휘하는 바로 그곳에서 수많은 생명이 어이없이 무너져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올 더 많은 무의미한 폭력의 악순환이 두렵기만 합니다. 그런데도 마치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애써 이른바 '정상'을 되찾으려 안 간 힘을 쓰는 뉴욕 시민들과 미국 사람들의 모습이 안쓰럽게만 여겨집니다. 저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시편 90편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몇 가지 점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신 얼굴로만 우리에게 나타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무섭고 두려운 분노의 얼굴로, 선과 악이 공존하는 신비로운 존재로 체험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악은 온 우주에 가득 찬 바로 우리 인간들 자신이 저지른 악과 증오와 원한이며 하나님의 분노는 우리들의 악이 자아낸 우주적 차원의 한이라는 점입니다. 결국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셈입니다.
둘째,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길 없는 가련한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인 아랍인, 기독교인 무슬림, 이스라엘 사람 팔레스타인 사람, 부시 대통령이나 탈레반 모두가 제각기 자기가 옳다고 외쳐대고 자기만 선하다고 주장하지만, 이러한 인생들에게 하나님은 가끔씩 심하게 짜증을 내시면서 노한 얼굴을 내보이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침 이슬처럼 스러져버립니다.
셋째, 우리는 이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그저 말없이 머리를 숙일 뿐이며 누구를 탓하며 손가락질하기 전에 우리 스스로를 먼저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앞에 덧없이 스러질 인생이 취할 태도는 우리에게 주어진 날들을 세어 겸손하게 지혜의 마음을 구하는 일뿐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겨울 저는 학생들을 데리고 약 3주 동안 인도를 여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여행 중 어느 날 인도의 구자라트 지방에서 엄청난 규모의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정확한 숫자는 모르지만 적어도 10만 명 이상이 죽었으리라는 소문입니다. 불과 1년도 안 된 사건이지만, 지금은 까마득하게 잊혀진 듯 싶습니다. 당시 인도를 여행하던 나에게 이 엄청난 비극은 내내 하나의 풀 수 없는 화두가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토록 수많은 무고한 생명의 죽음을 허락하셨는가? 물론 이것은 기독교 신학에서 오래된 문제입니다. 이른바 신정론 혹은 변신론의 문제입니다. 선하고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어째서 죄 없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허락하는가?, 하나님은 선하지 않든지, 아니면 무고한 자들의 고통을 제거하실 능력이 없든지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따라서 선하시고 전지전능한 하나님은 있을 수 없다는 비판이며, 세계와 인생의 도덕적 의미를 도전하는 이러한 의문에 대하여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을 옹호하는 여러 가지 대응을 해 왔습니다. 저는 오늘 여기서 이 문제에 대하여 말씀드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기독교 전통이 하나님을 언제나 선하신 분, 사랑의 하느님으로만 표상해 왔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말한다고는 하나, 하나님은 언제나 악한 자는 벌주고 선한 자는 축복해주신다는 간단한 도식으로 믿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악과는 거리가 먼 존재이기에 악의 존재는 언제나 하나님의 존재와는 모순되는 것으로 이해되었으며, 따라서 이해할 수 없는 악이 발생하면 우리는 즉각 하나님의 능력과 존재를 의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신학자들은 이에 대해 열심히 하나님을 변호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힌두교의 전통은 좀 다릅니다. 힌두교에서 가장 중요한 신 가운데 하나가 칼리 여신인데, 그는 피에 굶주린 끔찍한 형상을 한 여신입니다. 피묻은 입으로 혀를 날름거리고 허리에는 해골바가지들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끔찍한 모습의 신입니다. 그는 시간의 신이요 죽음의 신, 파괴의 신입니다. 그는 마히사라는 악마를 무참하게 살해하는 신으로서 선하기도 하지만 잔인하기 그지없는 신입니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을 언제나 생명의 신, 창조의 신으로만 간주하지 하나님을 죽음의 신, 파괴의 신으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힌두교적 통찰에 의하면, 죽음과 파괴도 엄연한 인간의 현실이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신도 당연히 창조와 파괴, 축복과 진노, 삶과 죽음의 양면을 지닙니다. 힌두교에서는 선과 악, 행복과 불행, 축복과 진노,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 건강과 질병 등 모든 이원적 대립은 유한한 삶의 불가피한 모습이며, 이 세상과 인간사를 관장하는 신도 당연히 양면을 다 지닌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구원은 궁극적으로는 모든 이원적 대립을 초월하는 절대적 실재, 선악의 피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해탈이라 부릅니다.
힌두교 사상가들이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그들이 생의 불가피한 비극적 요소를 일찍부터 깨달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죽음, 질병, 우발적 사고, 다툼과 갈등으로 점철되는 인생의 불행은 불가피하며 우리가 악이라 부르는 것도 우리 인생의 불가피한 측면입니다. 우리는 이 불행을 피하려고 하나님께 매달려 호소하지만, 아무리 매달리고 피하려 해도 재난과 고난은 끊임없이 우리들을 찾아옵니다. 악인과 선인, 신자와 불신자를 가리지 않고 온갖 재난이 우리를 덮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행복은 구하고 불행은 피하려는 단선적 신앙보다는 행복과 불행을 모두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감싸 안는 신앙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선만을 도모하고 악은 물리치는 하나님보다는 선과 악 모두를 감싸되 궁극적으로 선악을 넘어서는, 선악의 피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선과 악이란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우리는 그것을 기준 삼아 하나님을 판단하고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의미에서 선악의 양면으로도 나타나고 선악의 피안에 있는 존재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왜 인생에서 자기가 책임지지 않을 불행이, 원인 모를 불행이 찾아오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번 참사에서 저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 원한 위에 구축해놓은 세계 질서와 문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얼굴을 보았다고 말씀 드렸습니다만, 왜 하필이면 하나님께서는 그 진노를 무고한 세계무역센터에 있던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는지 하는 질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그들은 억울합니다. 지난 9월 14일은 미국이 테러로 숨진 자들을 위한 기도와 추모의 날로 정한 날로서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각종 추모집회가 열렸습니다. 저는 그날 집에서 Washington National Cathedral에 미국의 주요 인사들이 전부 모여서 드린 추모예배를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보았습니다. 병약한 몸을 이끌고 그 날 설교를 맡은 Billy Graham 목사도 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솔직히 모른다고 했습니다. 성경만 찾으면 모든 문제의 답이 척척 다 적혀 있을 것처럼 확신에 찬 설교를 하는 그에게도 모르는 것이 있다는 말에 저는 그의 인간적인 면을 보는 것 같아서 매우 기뻤으며 안도했습니다. 괜히 이런 저런 궤변으로 무고한 자의 불행을 설명해 보아야 유족들에게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욥의 고난을 위로한답시고 찾아온 그의 세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기는커녕 그가 받은 고난을 정당화하려다가 욥의 화만 돋구는 셈이 된 것을 우리는 욥기에서 봅니다. 이유 없는 고난을 당한 자들에게는 인간의 어떠한 위로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결자해지'라는 말이 있듯이 오직 하나님만이 대답할 수 있습니다. 재앙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재앙을 해결하시는 분도 하나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끈질기게 당신의 정의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고늘어지던 욥이 입을 다물게 된 것도 그가 어떤 인간의 논리에 설득 당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모든 지혜와 자기주장, 인간의 언어와 논리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권능과 신비 앞에 무릎을 꿇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내가 너에게 물을 테니 네가 대답하여라"(욥기 38:1-3)하시면서 폭풍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거센 도전 앞에 욥은 더 이상 항의할 의사를 포기하고 피조물로서의 초라한 모습으로 입을 다물고 만 것입니다: "네가 나를 꾸짖을 셈이냐, 네가 나를 비난하니, 어디 나에게 대답해 보아라"(40:1-5)는 주의 말씀에 욥은"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42:5-6)라고 고백하면서 백기를 드는 것으로 욥기는 끝납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 동안 까닭 모를 고난에 직면합니다. 우리가 욥 만큼 의인은 아니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는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러한 일이 있어나는가 라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항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선한 얼굴로만 나타나시는 분이 아니라 가끔씩은 무시무시한 분노의 얼굴로도 나타나시는 분이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분노는 내가 지은 특정한 잘못과는 무관하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우리 인간들이 지은 죄, 그것으로부터 오는 원성과 원한이 하늘에 닿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죄는 너나 할 것 없이 우리들 모두의 집단적 죄악입니다. 우리 사회, 우리 문명, 우리 종교, 우리 세계 자체가 산출한 악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분노의 얼굴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들이 주장하는 나의 의로움과 억울함으로 하나님께 맞서야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의 의로움, 우리들의 선은 별 것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만한 미국인들, 이를 악물고 살겠다고 바둥대는 이스라엘 사람들, 절망하는 팔레스타인 민중들, 분노만 남고 힘은 없는 아랍 무슬림들, 그리고 절망과 증오 가운데서 육탄공격도 두려워하지 않는 테러리스트들, 다가올 재난을 아는지 모르는지 피난길에 나선 불쌍한 아프가니스탄의 민중들 모두가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며 각기 폭력을 정당화하려 하지만, 시편 기자의 표현대로 천년도 밤의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면 모두가 오십보 백보이며 우스운 존재들입니다. 가련하고 불쌍한 존재들입니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갈 데 없는 죄인들이고 하나님이 노하시면 스러질 존재들이며, 모두가 그의 자비를 필요로 하는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생명을 거두어 가시면 인생은 한 순간의 꿈일 뿐, 아침에 돋는 한 포기의 풀과 같을" 존재들인 것입니다. "주께서 노하시면 우리 삶이 끝이 나고, 주께서 노하시면 우리는 스러지고 맙니다. 주께서 우리 죄를 주님 앞에 내놓으시니, 우리의 숨은 죄가 주님 앞에 환히 드러납니다"라고 시인은 고백합니다.
인간사에서 잘잘못을 가리지 말자는 말은 아닙니다. 인간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우리 인간들은 여전히 상대적 차원에서 의와 불의를 따져야 할 것이며, 강자와 약자 사이에서 누구 편을 들지 선택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이라면 결코 하나님의 초월적 시각, 절대적 시각을 상실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죄인이며 죽을 존재들임을 항시 기억하며 우리의 의와 우리의 선이 별 것 아님을 알면서 따져도 따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우리는 욥과 같이 처음에는 따지고 항의하다가 끝내는 침묵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시편 기자와 같이 "우리에게 우리의 날 계수 함을 가르쳐 주셔서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최후의 심판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 때까지는 인생에 억울함이 그치지 않을 것이며 부조리한 역사는 계속될 것입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애써 피하려 하지 맙시다. 우리의 한과 증오, 우리가 지은 죄가 우리에게 되돌아 온 것입니다. 그 얼굴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지금은 이 진노의 하나님 앞에서 온 세계, 온 인류가 자성하고 자숙할 때입니다.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힘 자랑을 할 때가 아닙니다. 힘있는 자나 힘없는 자나 모두 폭력의 유혹을 물리칠 때입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 죽음의 모습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나의 의를 고집할 수 없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정의와 심판 앞에 감히 설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말할 수 없는 악 가운데서도 결국은 선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결코 마지막 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이 믿음이 심하게 도전 받고 흔들리지만, 그래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아는 우리들은 이 믿음을 굳게 지킵니다. 십자가는 부조리의 극치, 있어서는 안 될 의인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으로부터 부활과 영생이라는 선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대속이라는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졌습니다. 정말로 무고한 자들의 고난이 일어나는 곳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이 주어짐을 우리는 믿습니다. 저들의 고통은 저들 때문이 아니라 바로 우리 모두의 허물을 인함이요 우리들을 위한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버리지 않고 거두어 주실 것이다.
그렇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가끔씩 무서운 진노의 하나님으로 우리를 찾아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원망하고 항의합니다. 그러나 원망할지언정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안 계시는 것보다 낫습니다. 원망할 대상이 있는 것이 아무도 원망할 대상이 없는 쓸쓸하고 적막한 세상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뭐 달라질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안 계신다면 세상에 무고한 자가 고통을 받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항변의 근거 자체가 무너집니다. 우리가 항변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노한 얼굴을 거두실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만 합니다. 주께서 다시 우리에게 자비로운 얼굴을 비추실 날이 꼭 올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 다급했던 순간에도 한 탑승자는 휴대폰으로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사랑한다, 영원히 사랑한다"는 말을 남기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만이 멀리 떨어져 있는 자를 연결해주는 끈입니다. 죽음도 사랑하는 자들을 갈라놓지는 못합니다. 인간의 사랑이 이러할진대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하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로마서 8:38-39) 우리는 이 말씀 하나만을 믿고 오늘도 우리에게 느닷없이 닥쳐오는 인생의 온갖 시련을 견디어 냅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굳이 피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며 사랑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사랑만이 고난을 이길 힘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인생의 '최종 어휘' 라고 우리는 믿기 때문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이번 사건으로 이제 우리 인생에서 안전한 것, 확실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고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이든지 일어날 수 있는 매우 불안한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뚜렷이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그처럼 단단하게 보이던 한 나라의 토대(foundation)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모습을 우리는 보았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질서가 그렇게 안전하고 단단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구축해 놓은 질서라는 것은 저 세계무역센터의 건물들처럼 순식간에 무너져 뒤죽박죽 엉망진창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번 참사를 계기로 다시 한 번 우리 삶의 모습과 의미에 대해 성찰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사건의 도덕적 책임론도 중요하고 정치·경제적 결과에 대한 논의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에게는 바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 자체가 걸려 있는 중대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저는 오늘 이러한 신앙의 문제로서 이번 사건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우리 인생의 무너지지 않는 토대는 과연 무엇입니까? 저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은 누가 보상해 줄 것이며,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이런 엄청난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하시는 것입니까? 이 끔찍한 사건 속에서도 혹시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에게 어떤 무언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계시지는 않는지 우리는 묻게 됩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의 장점이자 치명적인 단점 가운데 하나는 이 세상에서 진행되고 있는 역사에 눈을 크게 뜨고 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영원을 위해 시간과 역사의 세계에 눈을 감아버리는 역사 도피적 신앙이 아닙니다. 역사가 아무리 괴롭고 아무리 부조리하고 아무리 이해할 수 없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주님이심을 믿기 때문에 역사의 현장에서 그 신앙적 의미를 물어야만 합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하나님을 만나야만 합니다. 이렇게 역사를 회피하지 않고 역사와 정면으로 씨름해야 하는 것은 정녕 괴로운 일이지만 성서적 신앙의 특징입니다. 역사가 너무 괴롭고 너무 무의미하게 보인다 해서 우리는 역사에 눈을 감아버리고 영혼의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외부의 현실 세계를 무시하고 내적 평안에 안주하는 것은 기독교의 신앙 전통은 아닙니다. 아무리 어둡고 절망적이어도 우리는 바로 역사적 현장 속에서 하나님의 빛을 보아야 하고 희망의 징표를 읽어내야만 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하나님과 역사는 불가분리입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에게는 역사의 알리바이나 역사로부터의 휴가는 있을 수 없고, 우리 기독교 신자들 역시 잠시라도 역사에서 눈을 돌릴 수 없습니다. 역사가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그 많은 아픔과 슬픔, 부조리와 고통을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지고 살아야 합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역사에 책임을 면할 수 없으며 이러한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의 신앙 또한 역사를 외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극적 사건을 대할 때마다 하나님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그러한 일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은 과연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그러한 명백한 악을 통해서도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은 과연 무엇인지, 아니 뜻이란 것이 도대체 있기나 한 것인지 말입니다.
나는 미국의 번영을 상징하듯 위용을 뽐내며 우뚝 서 있던 쌍둥이 빌딩이 순식간에 무너져 버리는 것을 보면서 언뜻 바벨탑의 붕괴를 연상했습니다. 세계무역센터가 바벨탑처럼 하늘에까지 이르려는 인간 교만의 상징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두 사건을 연계시키는 것은 억지이고 무리입니다. 더군다나 무고한 생명의 죽음을 놓고 하나님의 심판이나 징벌을 운운하는 것은 역겹고 불경스럽기까지 합니다. 무역센터 빌딩의 붕괴는 분명 잔악한 인간의 행위이지 결코 하나님의 징벌이 아니라고 저의 기독교 신앙은 믿습니다. 저는 그런 잔인한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큰 불행이 닥칠 때마다 신이 난 듯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을 들먹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미국의 유명한 Jerry Fallwell 목사 - 'moral majority'라고 하는 미국의 근본주의자들, 보수주의자들을 중심으로 기독교 우익 정치세력을 형성하여 한 때 미국 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람 - 가 이번 참사를 동성애자, 낙태 찬성론자, 마약 복용자들 등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말했다가 곤욕을 치르고 침이 마르게 사과하는 것을 몇 일 전 텔레비전에서 본 일이 있습니다. 벌주기를 좋아하는 잔인한 하나님, 증오와 징벌의 하나님을 그는 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의 3대 유일신 신앙은 종종 그러한 증오의 멘탈리티를 부추기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극한적 대립과 갈등의 뿌리라고 지탄받는 것입니다. 뉴욕과 워싱턴은 소돔과 고모라가 아니고, 세계무역센터는 바벨탑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고뇌는 더 깊어집니다. '왜'라는 물음에 대하여 단순한 대답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곤혹스러운 것입니다. 세계무역센터가 바벨탑이 아님은 너무나 분명한 데도 바벨탑이 연상되는 것은 어쩐 일입니까? 원자폭탄이 만들어 내는 버섯구름보다도 더 끔찍하게 보이는 그 시멘트 구름에서 저는 하나님의 진노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어느 개인이나 집단에 진노하셨다는 말이 전혀 아닙니다. 왜 누구 때문에 하나님이 진노하시는지 딱히 말할 수는 없는데도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 모두에게 몹시 화가 나신 것 같다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지으신 아름다운 창조의 세계를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인류문명 그 자체에 하나님께서 역정을 내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로'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정말 인간처럼 화를 내기라도 한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분명 하나의 메타포요 상징적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진노는 과연 무엇에 대한 상징이며, 그러한 표현 뒤에 숨은 실재는 무엇입니까?
저는 그 말이 표현하는 바는 인간들의 한 매친 분노가, 우리의 증오와 원성이 하늘에 닿았다, 우주에 가득 찼다는 뜻으로 풀이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말이 사랑이 단지 인간적 현상만이 아니라 영원하고 우주적인 힘임을 뜻하듯이, 하나님의 분노라는 말도 인간이 지은 악이 우주에 가득 찼고, 인간이 건설해 놓은 세계 질서와 화려한 문명의 뒤안길에서 쌓인 원한이 우주에 사무쳤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다름 아닌 우주에 충만한 우리 동료 인간들의 한과 절규요 미움과 증오라는 말입니다. 나는 이번 사건이 이러한 한이 그 한계 상황에 이르러 그만 폭발한 것이며, 바벨탑처럼 무너진 세계무역센터의 붕괴는 우리가 자랑하는 문명의 허구를 여실히 보여주는, 아니 화려한 문명의 그늘에 가려 있던 인간의 죄악성, 원한, 증오를 폭로하는 사건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실로 이번 참사에서 우리는 인간으로서는 갈 데까지 다간 악과 원한의 극치를 보며, 동시에 인간이 만들어 놓은 강자들의 질서와 문명의 허구를 동시에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들이 하는 모든 일과 성취가 허무하고 슬프고 무의미한 장난처럼 보였습니다. 번영의 상징인 바로 그 빌딩에서, 열심히 일하고 출세해서 한껏 능력을 발휘하는 바로 그곳에서 수많은 생명이 어이없이 무너져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올 더 많은 무의미한 폭력의 악순환이 두렵기만 합니다. 그런데도 마치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애써 이른바 '정상'을 되찾으려 안 간 힘을 쓰는 뉴욕 시민들과 미국 사람들의 모습이 안쓰럽게만 여겨집니다. 저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시편 90편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몇 가지 점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신 얼굴로만 우리에게 나타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무섭고 두려운 분노의 얼굴로, 선과 악이 공존하는 신비로운 존재로 체험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악은 온 우주에 가득 찬 바로 우리 인간들 자신이 저지른 악과 증오와 원한이며 하나님의 분노는 우리들의 악이 자아낸 우주적 차원의 한이라는 점입니다. 결국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셈입니다.
둘째,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길 없는 가련한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인 아랍인, 기독교인 무슬림, 이스라엘 사람 팔레스타인 사람, 부시 대통령이나 탈레반 모두가 제각기 자기가 옳다고 외쳐대고 자기만 선하다고 주장하지만, 이러한 인생들에게 하나님은 가끔씩 심하게 짜증을 내시면서 노한 얼굴을 내보이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침 이슬처럼 스러져버립니다.
셋째, 우리는 이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그저 말없이 머리를 숙일 뿐이며 누구를 탓하며 손가락질하기 전에 우리 스스로를 먼저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앞에 덧없이 스러질 인생이 취할 태도는 우리에게 주어진 날들을 세어 겸손하게 지혜의 마음을 구하는 일뿐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겨울 저는 학생들을 데리고 약 3주 동안 인도를 여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여행 중 어느 날 인도의 구자라트 지방에서 엄청난 규모의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정확한 숫자는 모르지만 적어도 10만 명 이상이 죽었으리라는 소문입니다. 불과 1년도 안 된 사건이지만, 지금은 까마득하게 잊혀진 듯 싶습니다. 당시 인도를 여행하던 나에게 이 엄청난 비극은 내내 하나의 풀 수 없는 화두가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토록 수많은 무고한 생명의 죽음을 허락하셨는가? 물론 이것은 기독교 신학에서 오래된 문제입니다. 이른바 신정론 혹은 변신론의 문제입니다. 선하고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어째서 죄 없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허락하는가?, 하나님은 선하지 않든지, 아니면 무고한 자들의 고통을 제거하실 능력이 없든지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따라서 선하시고 전지전능한 하나님은 있을 수 없다는 비판이며, 세계와 인생의 도덕적 의미를 도전하는 이러한 의문에 대하여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을 옹호하는 여러 가지 대응을 해 왔습니다. 저는 오늘 여기서 이 문제에 대하여 말씀드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기독교 전통이 하나님을 언제나 선하신 분, 사랑의 하느님으로만 표상해 왔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말한다고는 하나, 하나님은 언제나 악한 자는 벌주고 선한 자는 축복해주신다는 간단한 도식으로 믿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악과는 거리가 먼 존재이기에 악의 존재는 언제나 하나님의 존재와는 모순되는 것으로 이해되었으며, 따라서 이해할 수 없는 악이 발생하면 우리는 즉각 하나님의 능력과 존재를 의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신학자들은 이에 대해 열심히 하나님을 변호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힌두교의 전통은 좀 다릅니다. 힌두교에서 가장 중요한 신 가운데 하나가 칼리 여신인데, 그는 피에 굶주린 끔찍한 형상을 한 여신입니다. 피묻은 입으로 혀를 날름거리고 허리에는 해골바가지들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끔찍한 모습의 신입니다. 그는 시간의 신이요 죽음의 신, 파괴의 신입니다. 그는 마히사라는 악마를 무참하게 살해하는 신으로서 선하기도 하지만 잔인하기 그지없는 신입니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을 언제나 생명의 신, 창조의 신으로만 간주하지 하나님을 죽음의 신, 파괴의 신으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힌두교적 통찰에 의하면, 죽음과 파괴도 엄연한 인간의 현실이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신도 당연히 창조와 파괴, 축복과 진노, 삶과 죽음의 양면을 지닙니다. 힌두교에서는 선과 악, 행복과 불행, 축복과 진노,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 건강과 질병 등 모든 이원적 대립은 유한한 삶의 불가피한 모습이며, 이 세상과 인간사를 관장하는 신도 당연히 양면을 다 지닌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구원은 궁극적으로는 모든 이원적 대립을 초월하는 절대적 실재, 선악의 피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해탈이라 부릅니다.
힌두교 사상가들이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그들이 생의 불가피한 비극적 요소를 일찍부터 깨달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죽음, 질병, 우발적 사고, 다툼과 갈등으로 점철되는 인생의 불행은 불가피하며 우리가 악이라 부르는 것도 우리 인생의 불가피한 측면입니다. 우리는 이 불행을 피하려고 하나님께 매달려 호소하지만, 아무리 매달리고 피하려 해도 재난과 고난은 끊임없이 우리들을 찾아옵니다. 악인과 선인, 신자와 불신자를 가리지 않고 온갖 재난이 우리를 덮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행복은 구하고 불행은 피하려는 단선적 신앙보다는 행복과 불행을 모두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감싸 안는 신앙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선만을 도모하고 악은 물리치는 하나님보다는 선과 악 모두를 감싸되 궁극적으로 선악을 넘어서는, 선악의 피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선과 악이란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우리는 그것을 기준 삼아 하나님을 판단하고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의미에서 선악의 양면으로도 나타나고 선악의 피안에 있는 존재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왜 인생에서 자기가 책임지지 않을 불행이, 원인 모를 불행이 찾아오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번 참사에서 저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 원한 위에 구축해놓은 세계 질서와 문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얼굴을 보았다고 말씀 드렸습니다만, 왜 하필이면 하나님께서는 그 진노를 무고한 세계무역센터에 있던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는지 하는 질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그들은 억울합니다. 지난 9월 14일은 미국이 테러로 숨진 자들을 위한 기도와 추모의 날로 정한 날로서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각종 추모집회가 열렸습니다. 저는 그날 집에서 Washington National Cathedral에 미국의 주요 인사들이 전부 모여서 드린 추모예배를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보았습니다. 병약한 몸을 이끌고 그 날 설교를 맡은 Billy Graham 목사도 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솔직히 모른다고 했습니다. 성경만 찾으면 모든 문제의 답이 척척 다 적혀 있을 것처럼 확신에 찬 설교를 하는 그에게도 모르는 것이 있다는 말에 저는 그의 인간적인 면을 보는 것 같아서 매우 기뻤으며 안도했습니다. 괜히 이런 저런 궤변으로 무고한 자의 불행을 설명해 보아야 유족들에게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욥의 고난을 위로한답시고 찾아온 그의 세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기는커녕 그가 받은 고난을 정당화하려다가 욥의 화만 돋구는 셈이 된 것을 우리는 욥기에서 봅니다. 이유 없는 고난을 당한 자들에게는 인간의 어떠한 위로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결자해지'라는 말이 있듯이 오직 하나님만이 대답할 수 있습니다. 재앙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재앙을 해결하시는 분도 하나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끈질기게 당신의 정의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고늘어지던 욥이 입을 다물게 된 것도 그가 어떤 인간의 논리에 설득 당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모든 지혜와 자기주장, 인간의 언어와 논리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권능과 신비 앞에 무릎을 꿇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내가 너에게 물을 테니 네가 대답하여라"(욥기 38:1-3)하시면서 폭풍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거센 도전 앞에 욥은 더 이상 항의할 의사를 포기하고 피조물로서의 초라한 모습으로 입을 다물고 만 것입니다: "네가 나를 꾸짖을 셈이냐, 네가 나를 비난하니, 어디 나에게 대답해 보아라"(40:1-5)는 주의 말씀에 욥은"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42:5-6)라고 고백하면서 백기를 드는 것으로 욥기는 끝납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 동안 까닭 모를 고난에 직면합니다. 우리가 욥 만큼 의인은 아니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는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러한 일이 있어나는가 라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항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선한 얼굴로만 나타나시는 분이 아니라 가끔씩은 무시무시한 분노의 얼굴로도 나타나시는 분이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분노는 내가 지은 특정한 잘못과는 무관하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우리 인간들이 지은 죄, 그것으로부터 오는 원성과 원한이 하늘에 닿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죄는 너나 할 것 없이 우리들 모두의 집단적 죄악입니다. 우리 사회, 우리 문명, 우리 종교, 우리 세계 자체가 산출한 악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분노의 얼굴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들이 주장하는 나의 의로움과 억울함으로 하나님께 맞서야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의 의로움, 우리들의 선은 별 것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만한 미국인들, 이를 악물고 살겠다고 바둥대는 이스라엘 사람들, 절망하는 팔레스타인 민중들, 분노만 남고 힘은 없는 아랍 무슬림들, 그리고 절망과 증오 가운데서 육탄공격도 두려워하지 않는 테러리스트들, 다가올 재난을 아는지 모르는지 피난길에 나선 불쌍한 아프가니스탄의 민중들 모두가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며 각기 폭력을 정당화하려 하지만, 시편 기자의 표현대로 천년도 밤의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면 모두가 오십보 백보이며 우스운 존재들입니다. 가련하고 불쌍한 존재들입니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갈 데 없는 죄인들이고 하나님이 노하시면 스러질 존재들이며, 모두가 그의 자비를 필요로 하는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생명을 거두어 가시면 인생은 한 순간의 꿈일 뿐, 아침에 돋는 한 포기의 풀과 같을" 존재들인 것입니다. "주께서 노하시면 우리 삶이 끝이 나고, 주께서 노하시면 우리는 스러지고 맙니다. 주께서 우리 죄를 주님 앞에 내놓으시니, 우리의 숨은 죄가 주님 앞에 환히 드러납니다"라고 시인은 고백합니다.
인간사에서 잘잘못을 가리지 말자는 말은 아닙니다. 인간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우리 인간들은 여전히 상대적 차원에서 의와 불의를 따져야 할 것이며, 강자와 약자 사이에서 누구 편을 들지 선택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이라면 결코 하나님의 초월적 시각, 절대적 시각을 상실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죄인이며 죽을 존재들임을 항시 기억하며 우리의 의와 우리의 선이 별 것 아님을 알면서 따져도 따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우리는 욥과 같이 처음에는 따지고 항의하다가 끝내는 침묵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시편 기자와 같이 "우리에게 우리의 날 계수 함을 가르쳐 주셔서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최후의 심판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 때까지는 인생에 억울함이 그치지 않을 것이며 부조리한 역사는 계속될 것입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애써 피하려 하지 맙시다. 우리의 한과 증오, 우리가 지은 죄가 우리에게 되돌아 온 것입니다. 그 얼굴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지금은 이 진노의 하나님 앞에서 온 세계, 온 인류가 자성하고 자숙할 때입니다.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힘 자랑을 할 때가 아닙니다. 힘있는 자나 힘없는 자나 모두 폭력의 유혹을 물리칠 때입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 죽음의 모습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나의 의를 고집할 수 없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정의와 심판 앞에 감히 설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말할 수 없는 악 가운데서도 결국은 선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결코 마지막 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이 믿음이 심하게 도전 받고 흔들리지만, 그래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아는 우리들은 이 믿음을 굳게 지킵니다. 십자가는 부조리의 극치, 있어서는 안 될 의인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으로부터 부활과 영생이라는 선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대속이라는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졌습니다. 정말로 무고한 자들의 고난이 일어나는 곳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이 주어짐을 우리는 믿습니다. 저들의 고통은 저들 때문이 아니라 바로 우리 모두의 허물을 인함이요 우리들을 위한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버리지 않고 거두어 주실 것이다.
그렇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가끔씩 무서운 진노의 하나님으로 우리를 찾아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원망하고 항의합니다. 그러나 원망할지언정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안 계시는 것보다 낫습니다. 원망할 대상이 있는 것이 아무도 원망할 대상이 없는 쓸쓸하고 적막한 세상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뭐 달라질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안 계신다면 세상에 무고한 자가 고통을 받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항변의 근거 자체가 무너집니다. 우리가 항변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노한 얼굴을 거두실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만 합니다. 주께서 다시 우리에게 자비로운 얼굴을 비추실 날이 꼭 올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 다급했던 순간에도 한 탑승자는 휴대폰으로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사랑한다, 영원히 사랑한다"는 말을 남기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만이 멀리 떨어져 있는 자를 연결해주는 끈입니다. 죽음도 사랑하는 자들을 갈라놓지는 못합니다. 인간의 사랑이 이러할진대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하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로마서 8:38-39) 우리는 이 말씀 하나만을 믿고 오늘도 우리에게 느닷없이 닥쳐오는 인생의 온갖 시련을 견디어 냅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굳이 피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며 사랑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사랑만이 고난을 이길 힘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인생의 '최종 어휘' 라고 우리는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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