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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6:66-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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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서중석 목사 |
참고 : | 새길교회 2001.10.14 주일설교 |
오늘 본문 말씀은 베드로의 고백을 소개하고 있다. 예수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멀리 떠나가자,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려느냐하고 질문한다. 이때 제자들의 대표격인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한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 이신 줄 믿고 알았나이다."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요한복음서에만 나오는 이 말은 우리는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로 가지 않겠습니다 하는 결연한 의지를 반영해 주고 있다. 더구나 주님에게는 영생의 말씀이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는 얼듯 베드로의 이 고백에 감탄하기 쉽다. 그러나 요한에 나오는 베드로의 생애를 살펴보면 과연 그가 그러한 고백에 걸맞은 인물이었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요한 기자에 따르면, 제자를 선택하는 주도권은 예수에게 있다. 곧 요한이 본 예수는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15.16)고 말한다. 이러한 장면들은 모두 예수의 주도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와 베드로의 첫 대면에서 예수는 이러한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오히려 베드로가 안드레의 인도로 먼저 예수에게로 온다(1.42). 이것은 예수가 택한 사람들의 범위에 베드로가 들어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베드로의 고백의 내용 중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를 살펴 보면 베드로에 대한 우리의 불안감은 증폭된다. 베드로는 예수를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ho hagios tou theou)으로 고백한다. 이 고백을 독립시켜 이해한다면, 이것은 훌륭한 고백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이라는 칭호는 요한복음서에는 오직 이곳에서만 나타나고, 신약 전체를 통해 오직 마가에 한 번(막1.24), 누가에 한 번(눅4.34) 더 나온다. 마가와 누가의 경우, 그 칭호는 사탄의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 소개된다. 물론 표면상, 요한은 마가 8장33절에서 처럼 베드로를 사탄과 동일시하는 예수의 발언이 소개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이라는 칭호가 다른 두 곳 모두에서 사탄의 고백과 연결되어 있다. 그 칭호는 주후 첫 세기 원시 그리스도교인들 사이에서 의도적으로 회피되었던 칭호였다. "하나님의 아들"또는 "그리스도"(메시아)라는 칭호가 신약 전체를 통해 빈번히 사용된 것과 비교할 때,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이라는 칭호의 사용이 신약 전체에서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요한 기자가 원시 그리스도교인들이 의도적으로 피한 이 사탄의 고백을 베드로의 입에서 나온 것으로 처리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베드로의 활동을 사탄의 활동과 동일시하려는 작업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릴 것이라고 결연한 의지를 표명하나(13.37), 예수는 그가 닭 울기 전에 자신을 세 번 부인하리라고 예고한다(13.38). 베드로의 부인에 관한 예수의 예고는 결국 실현된다. 곧 베드로는 세 번에 걸쳐 예수를 부인한다(18.17, 25, 27). 한때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하며 예수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겠다고 당당하게 다짐했던(13.37) 베드로는 예수와 자신을 분리시킴으로써 비겁하게 목숨을 부지한다.
요한기자는 베드로가 한 때 당당하게 외쳤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하는 그 고백이 그의 일생을 살펴볼 때, 결국은 허구였음을 명료하게 밝힌다. 베드로는 예수에게로 가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갔다. 예수의 고난보다는 자신의 고난을 더 두려워했다. 예수의 목숨보다는 자신의 목숨을 더 소중하게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하는 결연한 자신의 고백이 말뿐인 고백이었음을 스스로 폭로한 셈이 되었다.
이 천년 전에 베드로가 한 이 고백은 지금도 그와 똑같은 형태로, 또는 변형된 형태로 도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하며, 자신들의 결연한 의지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그 분에게로 가고 있는가? 아니면, 결국은 그 분 대신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고 있는가? 그 분의 영광 만을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 분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대의 명분 속에서 기실은 자신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선, 교권을 살펴보자. 매년 크리스천의 최고 대표를 선출하는 각 교단 총회장 선거 때 마다 끊임없이 유포되고 있는 금품살포와 향응제공 시비는 무엇을 말해 주는가? 제비뽑기제도가 고육지책의 개선안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타락선거가 교계에 깊이 만연되어 있다는 뚜렷한 반증이 아닌가? 세속적인 황금만능주의와 물신숭배사상이 교회에 이미 깊숙이 침투해 들어온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또한, 평신도 크리스천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과연 어떤 경우에도 끝내 주님에게로 가겠다고 고백할 수 있겠는가? 예수 믿으면 물질적으로 큰 축복을 받는다고 하면 사람들이 몰려들지만, 예수 믿으면 좁은 길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라고 하면 하나 둘씩 떠나가는 것이 주도적인 현상이 아닌가? 이천년 전에도, 예수가 떡을 나누어 줄 때에는 사천 명, 오천 명씩 구름떼처럼 몰려들었지만, 예수가 체포되었을 때에는 모두 다 뒷걸음질 쳤다. 기적을 행하고, 병자를 고쳐 줄 때는, 예수와 가까이서 말 한 마디 나누기 힘들 정도로 사람들이 빽빽이 그를 둘러쌌지만, 십자가에 처형될 때는 앞을 다투어 모두 도망해 버렸다.
이제 우리 신앙인은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야 할 때가 되었다. 물질적인 축복을 못 받아도, 지금보다 더 못 살게 되는 일이 있어도, 계획한 일의 진척이 순조롭지 못해도, 병이 더 악화 되도, 그래도 주님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겠는가? 눈에 보이는 것을 다 빼앗겨도, 주님 때문에 모욕과 핍박과 오해와 수치를,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당하게 되도, 그래도 끝까지 주님에게로 가겠다고 할 수 있겠는가?
신앙의 길에 들어선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이미 그 길에 들어선 사람들이 그 행로를 유지한다는 것은 더욱 더 무서운 일이다. 화려한 성공과 창창한 미래가 보장된 길을 콧노래를 부르며 걷는 일이 아니다.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막14.31) 하고 맹세했으나, 그는 그 말을 한 바로 그 날 밤 그 맹세를 어겼다. 신앙의 길을 걷는 일이 무서운 것은 그것이 예수와 함께 쓴잔을 마셔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예수와 함께 몸이 부수어져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예수와 함께 죽어야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혹독한 길을 함께 걷도록 주변을 힘겹게 설득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에게는 크리스천이 되도록 권고하고, 정작 자신은 그 길에서 탈락하는 크리스천도 많이 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전2.2)고 선언하고, 평생 이 선언에 충실하였다. 그는 이 선언에 자신의 행동이 걸맞지 않을 경우가 발생할 것을 대비하여 항시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따라서, 바울이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라"(고전9.27)고 고백한 것도 이러한 철저한 자기 성찰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우리 크리스천은 예수에게로 가기로 작정한 사람들이다. 또한 그 길을 남에게 권유하기로 결단한 사람들이다. 예수의 십자가 보다 자기 자신의 사회적 권력과 야망이, 자신의 부와 명예가 더 크게 부각될 때마다, 우리의 몸을 쳐서, 다시 주님에게로 돌아가려고 애 써야할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우리 자신은 도리어 버림을 받는 허망한 사태가 일어나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이 고백은 우리의 확신이 굳건할 때 그 확신을 보다 더 강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확신이 붕괴되고 우리의 시선이 주님의 십자가 외에 다른 것에 고착될 때 더 걸맞은 고백이 될 것이다. 곧 이 고백은 우리의 영광 추구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에서 멀리 떨어져, 심리적인 자괴감으로 참담한 상황 속 처해 있으면서, 그래도 다시 주님의 십자가를 향해 마음을 추수리려 할 때, 한 줄기 빛이 될 것이다. 이 무섭고도 힘겨운 길에 이미 용기 있게 들어선 여러분의 장래에 주님의 은총과 가호가 항시 깃들기를 간절히 바란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요한복음서에만 나오는 이 말은 우리는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로 가지 않겠습니다 하는 결연한 의지를 반영해 주고 있다. 더구나 주님에게는 영생의 말씀이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는 얼듯 베드로의 이 고백에 감탄하기 쉽다. 그러나 요한에 나오는 베드로의 생애를 살펴보면 과연 그가 그러한 고백에 걸맞은 인물이었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요한 기자에 따르면, 제자를 선택하는 주도권은 예수에게 있다. 곧 요한이 본 예수는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15.16)고 말한다. 이러한 장면들은 모두 예수의 주도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와 베드로의 첫 대면에서 예수는 이러한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오히려 베드로가 안드레의 인도로 먼저 예수에게로 온다(1.42). 이것은 예수가 택한 사람들의 범위에 베드로가 들어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베드로의 고백의 내용 중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를 살펴 보면 베드로에 대한 우리의 불안감은 증폭된다. 베드로는 예수를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ho hagios tou theou)으로 고백한다. 이 고백을 독립시켜 이해한다면, 이것은 훌륭한 고백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이라는 칭호는 요한복음서에는 오직 이곳에서만 나타나고, 신약 전체를 통해 오직 마가에 한 번(막1.24), 누가에 한 번(눅4.34) 더 나온다. 마가와 누가의 경우, 그 칭호는 사탄의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 소개된다. 물론 표면상, 요한은 마가 8장33절에서 처럼 베드로를 사탄과 동일시하는 예수의 발언이 소개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이라는 칭호가 다른 두 곳 모두에서 사탄의 고백과 연결되어 있다. 그 칭호는 주후 첫 세기 원시 그리스도교인들 사이에서 의도적으로 회피되었던 칭호였다. "하나님의 아들"또는 "그리스도"(메시아)라는 칭호가 신약 전체를 통해 빈번히 사용된 것과 비교할 때,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이라는 칭호의 사용이 신약 전체에서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요한 기자가 원시 그리스도교인들이 의도적으로 피한 이 사탄의 고백을 베드로의 입에서 나온 것으로 처리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베드로의 활동을 사탄의 활동과 동일시하려는 작업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릴 것이라고 결연한 의지를 표명하나(13.37), 예수는 그가 닭 울기 전에 자신을 세 번 부인하리라고 예고한다(13.38). 베드로의 부인에 관한 예수의 예고는 결국 실현된다. 곧 베드로는 세 번에 걸쳐 예수를 부인한다(18.17, 25, 27). 한때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하며 예수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겠다고 당당하게 다짐했던(13.37) 베드로는 예수와 자신을 분리시킴으로써 비겁하게 목숨을 부지한다.
요한기자는 베드로가 한 때 당당하게 외쳤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하는 그 고백이 그의 일생을 살펴볼 때, 결국은 허구였음을 명료하게 밝힌다. 베드로는 예수에게로 가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갔다. 예수의 고난보다는 자신의 고난을 더 두려워했다. 예수의 목숨보다는 자신의 목숨을 더 소중하게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하는 결연한 자신의 고백이 말뿐인 고백이었음을 스스로 폭로한 셈이 되었다.
이 천년 전에 베드로가 한 이 고백은 지금도 그와 똑같은 형태로, 또는 변형된 형태로 도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하며, 자신들의 결연한 의지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그 분에게로 가고 있는가? 아니면, 결국은 그 분 대신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고 있는가? 그 분의 영광 만을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 분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대의 명분 속에서 기실은 자신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선, 교권을 살펴보자. 매년 크리스천의 최고 대표를 선출하는 각 교단 총회장 선거 때 마다 끊임없이 유포되고 있는 금품살포와 향응제공 시비는 무엇을 말해 주는가? 제비뽑기제도가 고육지책의 개선안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타락선거가 교계에 깊이 만연되어 있다는 뚜렷한 반증이 아닌가? 세속적인 황금만능주의와 물신숭배사상이 교회에 이미 깊숙이 침투해 들어온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또한, 평신도 크리스천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과연 어떤 경우에도 끝내 주님에게로 가겠다고 고백할 수 있겠는가? 예수 믿으면 물질적으로 큰 축복을 받는다고 하면 사람들이 몰려들지만, 예수 믿으면 좁은 길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라고 하면 하나 둘씩 떠나가는 것이 주도적인 현상이 아닌가? 이천년 전에도, 예수가 떡을 나누어 줄 때에는 사천 명, 오천 명씩 구름떼처럼 몰려들었지만, 예수가 체포되었을 때에는 모두 다 뒷걸음질 쳤다. 기적을 행하고, 병자를 고쳐 줄 때는, 예수와 가까이서 말 한 마디 나누기 힘들 정도로 사람들이 빽빽이 그를 둘러쌌지만, 십자가에 처형될 때는 앞을 다투어 모두 도망해 버렸다.
이제 우리 신앙인은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야 할 때가 되었다. 물질적인 축복을 못 받아도, 지금보다 더 못 살게 되는 일이 있어도, 계획한 일의 진척이 순조롭지 못해도, 병이 더 악화 되도, 그래도 주님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겠는가? 눈에 보이는 것을 다 빼앗겨도, 주님 때문에 모욕과 핍박과 오해와 수치를,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당하게 되도, 그래도 끝까지 주님에게로 가겠다고 할 수 있겠는가?
신앙의 길에 들어선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이미 그 길에 들어선 사람들이 그 행로를 유지한다는 것은 더욱 더 무서운 일이다. 화려한 성공과 창창한 미래가 보장된 길을 콧노래를 부르며 걷는 일이 아니다.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막14.31) 하고 맹세했으나, 그는 그 말을 한 바로 그 날 밤 그 맹세를 어겼다. 신앙의 길을 걷는 일이 무서운 것은 그것이 예수와 함께 쓴잔을 마셔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예수와 함께 몸이 부수어져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예수와 함께 죽어야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혹독한 길을 함께 걷도록 주변을 힘겹게 설득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에게는 크리스천이 되도록 권고하고, 정작 자신은 그 길에서 탈락하는 크리스천도 많이 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전2.2)고 선언하고, 평생 이 선언에 충실하였다. 그는 이 선언에 자신의 행동이 걸맞지 않을 경우가 발생할 것을 대비하여 항시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따라서, 바울이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라"(고전9.27)고 고백한 것도 이러한 철저한 자기 성찰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우리 크리스천은 예수에게로 가기로 작정한 사람들이다. 또한 그 길을 남에게 권유하기로 결단한 사람들이다. 예수의 십자가 보다 자기 자신의 사회적 권력과 야망이, 자신의 부와 명예가 더 크게 부각될 때마다, 우리의 몸을 쳐서, 다시 주님에게로 돌아가려고 애 써야할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우리 자신은 도리어 버림을 받는 허망한 사태가 일어나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이 고백은 우리의 확신이 굳건할 때 그 확신을 보다 더 강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확신이 붕괴되고 우리의 시선이 주님의 십자가 외에 다른 것에 고착될 때 더 걸맞은 고백이 될 것이다. 곧 이 고백은 우리의 영광 추구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에서 멀리 떨어져, 심리적인 자괴감으로 참담한 상황 속 처해 있으면서, 그래도 다시 주님의 십자가를 향해 마음을 추수리려 할 때, 한 줄기 빛이 될 것이다. 이 무섭고도 힘겨운 길에 이미 용기 있게 들어선 여러분의 장래에 주님의 은총과 가호가 항시 깃들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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