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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21:23-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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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최만자 자매 |
참고 : | 새길교회 2001.11.25 주일설교 |
출애굽기 21:23-25, 마태복음서 5:38-45
엊그제 미국 서부에서 살고 있는 친구에게 편지를 받았습니다. 자녀들이 동부에서 공부하고 활동하고 있는데 추수 감사절 맞아 집에 오기로 되어 있는데 걱정이 태산이라는 것입니다. 9월 11일 이후 계속 긴장하고 있는데 11월 12일 다시 비행기 추락으로 공포와 불안이 사회를 휩싸고 있다 합니다. 탄저균에 대한 공포, 비행기 타는 것에 대한 공포, 모든 것이 불안과 공포에 싸여 지나게 된다고 합니다. 사실 미국인들은 물론이고 지구촌의 많은 사람들이 9.11테러는 반인류적 범죄라는 점에서 반드시 처벌해야 하고 이들을 처벌하는 보복전쟁을 제외한 마땅한 대안이 없으며, 국제 테러리즘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들까지 제거 할 수 있는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테러와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이해할 수는 있는 것이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지금 미국에서는 테러와의 전쟁에 반대하고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말을 하면 빨갱이로 몰릴 정도로 미국인들이 분노와 보복의 심정에 가득 차 있고 그래서 결국 아프가니스탄을 향한 대대적 폭격과 지상군 투입의 전쟁이 지금껏 진행되었습니다. 드디어 탈레반이 무조건 투항하고 있고 북부동맹군은 수도 카블을 점령하였고 미국은 이제 다음 정권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에 날카롭게 신경 쓰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 보복전쟁으로 평화가 이루어졌습니까?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 이후 미국내 소수민족들은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산다고 합니다. 미국의 이러한 불행과 재해의 원인을 소수민족에게 돌리려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100년간 이민은 금지해야 한다 든가 소수민족에게 불이익을 주어 문제 해결을 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습니다.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으로 의회를 통과한 반 테러 법안들이 겨냥하는 주요 대상인이 외국인 소수민족 이며 그 중에도 아랍인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부시가 11월 초 서명하여 효력이 발생된 '미국애국령'(USAPA)은 수사 영장 없이 심증만으로도 외국인을 불심 검문 할 수 있고 변호사와 피고인의 비밀대화까지 감청할 수 있다고 하며 테러혐의는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한답니다. 뉴욕타임스는 '아프카니스탄 전쟁 두달 째를 맞이해 (인권이 보장되고 민주주의가 시행되는 나라에서)민권 자유가 퇴색해 가고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중동 출신 유학생을 상대로 심층 면접하고 있는데 그 대상이 18-33세 남자로서 지난 1월 이후 입국한 5000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최근 46개 이슬람 관련 단체 회원들을 입국 금지 명단에 추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9.11 이후 고통의 극한을 당하고 있는 것은 아프간 민중들입니다. 아프간은 소련 침공에 의한 전쟁을 미국의 도움으로 치른 지 20년밖에 경과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지도자 중 나이가 제일 많은 이가 40대라고 합니다. 대부분 장애를 겪고 있으며 전쟁의 소용돌이에만 있어서 정신적으로도 기형적 상태라고 합니다. 무엇보다 아프간 민중들의 고통은 극심한 기아상태에서 또 전쟁을 겪고 있다는 것입니다. 필사적으로 아프간을 탈출하는 난민들의 참상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으며 그들의 기아 상태는 처참한 것입니다. 아프간 국민들 700-800만 명이 아사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한다. 이 기아 사태는 9.11 이전에도 심각했는데 농사 지을 땅도 파괴되고 물건을 만들어 팔 공장도 이미 파괴된 아프간은 다만 국제 원조에 의존해 기아를 면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미국 정부가 9.16일 아프간 민간 식량 구호품 전달 트럭 호송을 중단할 것을 파키스탄에 요구했고 유럽에서조차도 여기에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은 것은 수많은 사람들을 대량아사로 몰아넣는 일이 됩니다. 필사적으로 파키스탄으로 향하는 난민들은 절망의 한 단면을 묘사하고 있고, 오랫동안 지속된 아프간의 고통이 거대한 참사로 바뀌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유일한 탈출구인 파키스탄도 미국의 요구로 국경이 봉쇄되었습니다. 춈스키는 이를 대학살이라고 말합니다.
9.11 테러가 태평양 건너 미국 대륙 동부에서 일어난 일이고 미국의 보복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잘 알지도 못했던 아프간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해서 우리와 별 상관없는 남의 일로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미국에 의해 테러 지원국가로 묶여 있고 남한은 반테러 국제연합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증오와 대결을 청산시켜야 할 노력을 테러와의 전쟁으로 대신하는 미국 정부와, 일부 반미 테러리스트들의 잘못된 행위들이 우리 한반도에서도 그 역사적 오류를 일어나게 할 수 있기에 우리는 위기감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20세기 전쟁과 살상의 시간들이 끝나고 21세기에 평화를 갈망하던 인류의 소망은 산산이 부숴져 버린 것 같습니다. 21세기에도 야만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9.11 테러 이후 팔레스타인과 아프간 민중들이 겪고 있는 고통이 극한적이며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라는 어두운 현실 앞에서, 그리고 테러는 이슬람 민중의 고통을 씻는 방법이 결코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또한 직시하면서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전쟁현실과 민중의 고통 현실을 보면서 우리는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테러와의 전쟁을 바라보면서 증오와의 대결을 씻지 않고서는 어떠한 물리적 힘으로도 평화를 지킬 수 없다는 교훈을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21세기 역시 20세기와 큰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테러도 보복도 더 이상 인류를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 미국이 더 큰 윤리의식을 가지고 자신을 반성할 것을 요청하게 됩니다. 전쟁 수행을 통해 나라의 단결을 이루어 온 미국이 월남전 이후에는 군대대신 달러의 힘으로 세계를 재패 하고자 하였고, 이에 대한 약한 나라들 특히 이슬람이 가지고 있는 폭력적이기까지 한 증오심에 대해서 미국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한 나라를 폭격으로 패배시킬 수는 있지만 그것은 그들의 증오심을 증가시킬 뿐 패배시킬 수 없습니다.
독일의 언론가 프란츠 알트는 시대에 맞는 사상보다 더 큰 힘을 가진 것은 없다고 말합니다. 지금 이러한 전쟁과 테러로 상호 보복하는 세계 상황에서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는 삶의 방식은 어떤 것일까?를 생각하면서 저는 도날드 슈라이버 2세의 책 [적을 위한 윤리](Ethics for Enemy)를 우리가 함께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는 이 책을 "20세기에 치러진 전쟁들 속에서 죽어 간 1억 명의 인류를 기억하며 그들에게 바친다. 그들은 죽었으나 지금도 말하고 있다" 라고 책의 맨 앞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난 22일 연대에서 이 책의 출판기념과 강연회가 있었으나 저는 참석하지는 못했습니다. 이 책은 서로에게 큰 상처를 준 적들이 어떻게 다시 정치적 유대를 모색해 나갈 수 있는가에 관해 말하고 있으며 정치에서의 용서(Forgiveness in Politics) 라는 부제를 달고 있습니다.
세상에 나와 우리와 이웃을 위한 윤리는 얼마든지 있지만 '적을 위한 윤리'라는 말은 생소합니다. 그는 종교적 용어이고 구태의연한 개념인 용서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는데, 지극히 종교적이고 개인적인 윤리 영역으로 추방되었던 용서라는 개념을 과거에 저질러진 범죄와 갈등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정치 현실의 한 가운데로 가지고 들어옵니다. 그래서 '용서는 망각이 아니라 반대로 기억에서부터 시작하며, 용서는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지 않으나 복수를 포기 할 것을 요구하고, 용서는 적의 인간성을 이해함이 중요하며, 진정한 용서는 증오가 낳은 분열을 적극적으로 치유하여 인간 관계의 갱신을 목표로 한다'고 말합니다. 지난 20세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전쟁 사상자를 낸 세기였고, 그러므로 이러한 정치적 용서보다 21세기 인류의 삶에 더 실제적이고 긴급한 선물은 없을 것이라고 저자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구약성서가 복수 중심이 아니라 생명을 보존하려는 의도가 강했고 공동체의 화해와 용서의 모델을 보인다고 합니다. 창세기의 요셉과 그의 형들과의 이야기는 기원전 10세기 솔로몬 시대 이후 이스라엘이 두 개의 왕국으로 분열되었을 때 씌어졌는데 이 이야기를 민족의 화해와 공동체의 형성이라는 정치적 노력의 산물로 다시 읽을 수 있다고 합니다. 화해와 용서가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아예 존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카인의 이야기도 하나님은 카인을 죽이지도 않고 사회로부터 버림당하지도 않게 하는 것을 보면서 '카인의 표'이야기는 복수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예수의 용서의 가르침을 주기도문을 핵심으로 강조합니다. 그는 예수께서 우리가 서로 용서하지 않는 한 우리는 신에게 감히 용서를 구하지 못한다는 주기도문을 가르쳤는데, 이는 유대관습에 대해 매우 비전통적이고 급진적인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이 초대교회 윤리와 삶에 깊이 반영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로마제국의 종교가 된 후 1천년 동안 서구의 기독교에 정치 질서 안에서의 용서가 실종되었다고 개탄합니다. 용서는 교회의 공식적인 성례전에만 속하게 되고 전체 교인 앞에서 공적으로 행해지던 죄의 고백과 회개라는 전통은 사제와의 은밀한 개인적 관계로 축소되어 버려 결국 죄의 용서는 교권과 연계된 대단히 사적인 일로 전락하고 말고 고해성사라는 제도 속으로 구속되었다는 것입니다. 용서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영역으로 한정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말틴 루터는 '용서받는 죄인들의 회중'으로 새롭게 이해하기는 했으나 하나님의 왕국과 세상의 왕국을 분리하여, 용서와 자비의 책임은 교회의 것이고 처벌하는 정의의 의무는 국가의 것으로 나누어버렸고, 18세기 계몽주의 운동은 고립된 개인으로 축소시킴으로 용서의 사회적 중요성을 간과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역사적 자취들이 오늘날 왜 정치에서의 용서라는 개념이 비 종교인들에게는 종교적으로 들리고 종교인들에게는 신기한 이야기로 들려지는지의 이유라고 합니다. 저자는 미국인들이 이런 분리주의 문화의 덫에 걸려있고 민주주의의 요체가 이런 분리인 것으로 생각함을 문제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슈라이버가 제시하는 적을 위한 윤리는 '생명의 확언'이라는 최소한의 윤리적 합의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정치에서의 인간생명 보존의 법을 최우선적인 '법'으로 주장합니다. 20세기 이전 5천넌 동안의 전쟁에서 살해된 사람 수 보다 20세기 90년 동안 더 많은 사람이 살해되었다는 끔찍한 역사적 사실을 그는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인류가 죽음의 정치로부터 생명의 정치로 옮겨가야 한다는 것이 지금 우리의 가장 중요하고 긴급한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이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는 각국 정부들이 가지고 있는 거대한 상호 살상 능력을 우리가 어떻게 제어 할 수 있는가의 능력에 달려 있다고 보며, 윤리적 상대주의도 오직 우리가 인간의 생명 그 자체에 대해 상대주의적이지 않을 때에만 허용될 수 있는 것임을 저자는 분명히 말합니다. 그리고 보복의 유혹에 저항하면서 과거의 고통에 찬 역사를 기억하고 직면하는 정치에서 진정한 용서가 시작된다고 하며, 처벌하는 정의가 아니라 회복시키는 정의를 향하는 길에 정치인들의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종교는 개인적 죄의 문제에만 집착하지 말고 모두가 연결된 사회적 죄를 보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미국인에게 남아프리카 공화국 사람들이 어떻게 아파르트헤이트를 용서하고 용서받았는지를 배우라고 주문합니다.
저는 이 슈라이버의 적을 위한 윤리를 기억하면서 보복의 정치가 행여 구약성서의 동태복수법에 의존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에서 (이슬람, 유대교, 기독교가 모두 공통으로 의존하고 있는 경전) 구약의 동태복수법을 살펴보고, 이에 대한 반어적 새로운 법을 제시하는 예수의 원수사랑에 대하여 생각하고자 합니다.
오늘 읽은 구약성서 본문은 약자보호법의 틀 안에 있고 그 가운데 신체 상해에 관한법(21:18-36)입니다. 이 법은 보복을 어떻게 하는가에 중심을 둔 것이 아니라 가해자가 동태복수법에 의한 보응 응징을 받음으로 과실치사를 방지하고 인체의 피해 회복을 보장하려는 목적을 가진 법입니다. 특히 다음에 이어 나오는 노예에 대한 상해를 다루는 법에서 이스라엘의 동태복수법이 가지는 근본 정신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즉 노예에게 상해를 입혔을 때는 그 노예를 해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구약성서가 '노예도 인간이요 노예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므로 그의 생명의 성역을 침범하는 자는 누구나 그것에 대한 책임이 있고 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이른바 법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하다는 사회개혁적 정신과 생명중심 사상을 가졌음이 나타납니다. 더 주목할 것은 고대 중동의 법, 특히 함무라비 법과 힛타이트 법과 출 21장 26-27을 비교하면, 바빌론과 힛타이트에서는 노예에게 상해를 입혔을 때에는 금전적 보상(노예 몸값의 반액)만 지불하면 벌을 면할 수 있으나 이스라엘 계약법전에는 그 가해자는 피해자인 노예에게 가해의 보상으로 자유를 주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는(21장 26-27절) 차이를 보는 것입니다. 고대 중동에서는 노예는 재산 품목으로 만 간주하지만 이스라엘은 평등한 인간으로 간주하고 노예가 신체적 상해를 받으면 그 보상으로 자유인이 된다고 하여 인간의 자유추구를 목표합니다.
이어서 나오는 재물 침해를 다룬 법과 종교적 사회적 법규들에서도 그 정신이 약자보호에 근거함을 보게됩니다. 약자보호의 사회적 법규는 보호해야 할 약자로 이민자, 과부, 고아 그리고 채무자를 열거합니다. 여기서 이민자는 친족의 보호를 받지 못해서 쉽게 피해를 받는 자를 가리키고 과부와 고아 그리고 채무자는 남편이나 부모나 재산 후견인의 지지와 보호를 받지 못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단순한 인도주의적 배려가 아니고 오히려 그것은 그 약자들의 특별한 후견인이 바로 하나님이며 그래서 약자를 괴롭히지 말아야 할 그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약자 보호법의 제정 근거로서 등장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이 약자의 후견인이다'라는 선포와 이 법령을 받는 이스라엘이 과거 에집트에서 겪었던 이민자의 고난 경험이 더 우선적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계약 법전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새롭게 부딪히는 여러 상황 속에서 수립할 법질서를 그들이 갖고 있는 평등주의 사회 이념으로 수립하려는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계약법전의 이 약자보호와 평등이념 추구의 법 정신으로 미루어 볼 때, 계약법전은 왕조와 중앙집권화와 그리고 가나안적 생활영향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계약체제와 사회경제적 상황이 퇴폐화 될 위협을 받는 것에 대한 혁명적 반작용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동태복수법은 복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생명보호 약자보호의 정신을 그 근원으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눈은 눈으로'는 하나의 법규이고, 모든 법의 기초로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원래 이 말은 살인자에 대한 무제한적 복수를 제한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 발전 과정에서 주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음이 사실입니다. 예수 당시에 그 타당성이 논란되었고 그리고 실제 생활에서 보복은 그것에 상응하는 금전 배상으로 대치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반어법적으로 이 동태복수법에 대응하는 새 율법을 제시하여 새로운 복음을 줍니다. 이는 산상수훈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산상수훈은 시내산 율법의 완성으로 볼 수 있습니다.
39절에 보면 뺨을 때리는 행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랍비의 법에서는 손등으로 남을 치는 행위는 특별히 수치스러운 것으로 간주되며 이 행위에 대해서는 두 배의 벌이 가해진다고 합니다. 마태는 혹시 이교도라는 이유로 그렇게 맞은 제자들을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40절에는 속옷과 겉옷 이야기가 나옵니다. 겉옷은 밤에 입고 덮개로 사용하여서 압류가 안됩니다. 그런데 속 옷을 주라는 것은 예수는 모든 것을 내어주고 벗은 채로 살아가라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행한 자를 긍휼 여기시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바탕에 두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 길 안내자의 동행을 강요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는 로마의 수비대 권리에 대해 말하는 것인데 군사적, 정치적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이 경우는 개인에게 그러한 봉사를 요구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 로마 수비대에 대항하는 혁명적인 지하운동 곧 첼롯당이 요구하는 것과 정반대로 나타납니다. 예수는 그 청구권리의 정당함이나 부당함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는 다만 요구된 일 마일보다는 오히려 이 마일을 동행하도록 충고하고 있습니다.
원수사랑에 대한 내용에서 보면, 원수를 미워하라는 것이 실제로 구약에서 별로 없습니다. 이웃사랑은 같은 민족을 생각하며, 원수애에 대한 요구도 많이 있습니다(삼상 24장20, 출 23장 4,5, 잠언 25장 21,22). 랍비들도 인간사랑을 말합니다. 그런데 쿰란 공동체는 빛의 자녀는 사랑하고 어둠의 자녀는 미워하라로 이분합니다. 예수는 대립명제를 공격하며 이웃사람을 특정한 국가적인 종교적인 단체로 한정 지으려는 모든 한계를 제거합니다. 동태복수법적 보복의 가능성을 완전히 봉쇄하고 새로운 관계와 새로운 질서를 말하는 것이 예수의 원수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 원수 사랑은 기독교 역사에서 상당한 오해를 가져왔습니다. 이 본문이 비정치적으로 해석되는 데서 사악한 사람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으로 이용되어 왔다는 비판을 합니다. 이 마태복음의 원수는 누구이며 원수사랑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라는 질문이 계속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의 이 원수사랑의 내용을 당시 사회적 상황과의 관계에서 이렇게 볼 수 있다는 것을 참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곧 비대칭적 관계(강자와 약자의 대결 상황)에서 무력포기나 적에 대한 예상되는 행동은 3가지가 있는데 1) 하위자의 수동적 양도, 자신에게 더 나쁜 상태가 오지 않도록 영리하게 행동한다. 2) 굴복당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승리자의 대담한 복수포기가 있게 된다. 3) 불의로 인해서 고난 당하는 사람의 내적 존엄성과 강함이 표현될 수 있는데, 결국 외적으로 상위질서나 하위질서에 소속되는 것을 거부한다.
신약성서적 전승에서 원수사랑과 무력포기의 사회적 장이 어떤 것인가? 를 생각해 보면 마태는 하위자의 수동적 양도로서의 무력포기 라는 유형에 접근한다고 본다는 것입니다. 승리자의 원수사랑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에서는 위의 제3의 형태 곧 불의로 고난 당하는 사람의 내적 존엄성과 강함의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외적 참패를 내적 우월성을 통해서 처리 할 수 있었다는 경험을 말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단순 수동이 아니라 예수에게서 비폭력은 적과의 도전적 대화입니다. 그것은 적에게서 행동변화를 도출해 내려는 희망이며, 그것은 보복의 악순환이 중단 될 때 성립되는 놀라운 효과를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결국 살인을 억제하는 인간적 본성을 적에게서 일깨우려는 상당히 위험한 시도이며 이러한 비폭력의 실천으로 연관되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비폭력 무저항이 결국 상대의 인간성을 자극하고 생명에 대한 존엄을 일깨우게 된다는 적의 행동변화를 도출하는 노력임을 말합니다. 예수의 원수사랑은 기독교 전통에서 오해한 개인적인 내용이라기 보다는 정치적 차원을 가지는 것으로 해석되는 것입니다. 곧 비폭력 무저항의 정치적 태도가 인간생명 근원에서 정치차원과 개인차원을 연결짓게 됩니다.
로마제국에 대한 적대감으로 민족주의를 표현하는 당시의 상황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반민족주의자로 배신자로 지목 받을 수 있는 위험한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첼롯당이나 쿰란 공동체의 극단적 분열과 적대적 태도가 인간에게 생명을 준다고 생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45절이 대립명제의 결론이라고 보면, 모든 것은 창조를 지배하는 하나님에게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배워야만 참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강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독특한 상으로 하나님은 해를 선인과 악인에게 모두 비추고 불의한 자에게 모두 내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힘든 사랑의 실천을 위한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며 하나님 모방이 산상수훈의 주요 주제인 것입니다.
이 원수사랑에 대한 내용을 '원수'가 마태 공동체 내부의 분열을 말하고 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서중석 교수에 의하면 마태 공동체 내부가 유대인 크리스챤들과 이방인 크리스챤들 사이의 갈등과 대립, 그리고 유대인 크리스챤 사이의 갈등과 대립 등으로 상당한 분열이 있었고 원수사랑 그리고 용서에 대한 교훈은 그러한 내부 갈등을 극복하기 위하여 강조되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들끼리의 용서가 이루어 져야 하나님의 용서도 이루어진다고 하여 사람들끼리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에 앞장선다는 주장은 당시 사람들끼리의 용서가 얼마나 절박한 상태였는가를 보여준다고 합니다. 더 나아가 형제에게 분노하는 자는 누구나 심판을 받게 됨을 분명히 하여 용서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며, 종의 비유(18:23-35)의 결어에서 다시 한 번 이를 확인하게 합니다. 그리고 제단 앞에서 형제와 화해하지 않은 것이 생각나면 먼저 형제와 화해하고 예물을 제단에 드리라고 합니다. 우리의 행위가 더 우선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곧 무조건적이며 끝없는 용서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원수사랑 가르침에서 그것이 정치적 차원이거나 공동체 내부 대립이거나 간에 적대관계에 있는 상황이 어떻게 극복되어야 하는가를 말해주고 있음을 봅니다. 힘이 약한자의 적대관계 극복은 비폭력 무저항의 행위를 통한 인간성과 생명존엄의 본질을 일깨우게 하는 것이며, 공동체 내부적 갈등은 무조건적 용서에 있다고 함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빠진 것은 강자의 태도에 관련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적으로 강자는 자기 오만에 대한 회개를 하는 것에서 사랑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자의 자기 오만에 대한 회개가 없이는 대립의 극복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의 상황에서 미국이 자기 오만에 대한 회개를 할 것을 말하게 됩니다. 과거의 미국은 1814년 이후 아메리카 원주민을 상당수 죽였고 멕시코의 절반을 점령했고 카리브해와 중아메리카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파괴와 약탈을 일삼았다. 하와이를 점령하고 수십만 필리핀 사람을 죽이면서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2차대전 이후도 이런 범죄를 도처에서 행했습니다. 그러나 항상 미국인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이 죽고, 미국 땅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전쟁을 벌였고, 미국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이 학살을 당해 온 것입니다. 이러한 미국의 역사적 과정을 보면 9.11 테러에 대한 반미 국가의 반응은 이해할 만 한 것이 됩니다.
현재 세계가 치솟는 테러에 대한 공포와 잔흑함을 막을 수 있는 쉬운 길은 없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인류가 잠깐 숨을 고르고 고대와 현대의 지혜를 모으는 일에 모두 집중해야 할 시점입니다. 분단과 전쟁으로 두 동강나고 남남 갈등이라 불리우는 지역간의 적대감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우리의 불행한 역사앞에서 우리자신들을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새로운 회개의 문화가 요청되고 '생명의 보존'이 기준이 되는 정치가 되어야 함을 절감합니다.
저는 새길교회가 사회적 오피니언 리더로서의 책임이 있는 집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 적을 위한 윤리를 말하고 사회적 담론을 평화로 이끌어 나가는데 앞서야 할 책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의 원수사랑에 대한 정치적 차원의 해석을 제시하여야 할 때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엊그제 미국 서부에서 살고 있는 친구에게 편지를 받았습니다. 자녀들이 동부에서 공부하고 활동하고 있는데 추수 감사절 맞아 집에 오기로 되어 있는데 걱정이 태산이라는 것입니다. 9월 11일 이후 계속 긴장하고 있는데 11월 12일 다시 비행기 추락으로 공포와 불안이 사회를 휩싸고 있다 합니다. 탄저균에 대한 공포, 비행기 타는 것에 대한 공포, 모든 것이 불안과 공포에 싸여 지나게 된다고 합니다. 사실 미국인들은 물론이고 지구촌의 많은 사람들이 9.11테러는 반인류적 범죄라는 점에서 반드시 처벌해야 하고 이들을 처벌하는 보복전쟁을 제외한 마땅한 대안이 없으며, 국제 테러리즘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들까지 제거 할 수 있는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테러와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이해할 수는 있는 것이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지금 미국에서는 테러와의 전쟁에 반대하고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말을 하면 빨갱이로 몰릴 정도로 미국인들이 분노와 보복의 심정에 가득 차 있고 그래서 결국 아프가니스탄을 향한 대대적 폭격과 지상군 투입의 전쟁이 지금껏 진행되었습니다. 드디어 탈레반이 무조건 투항하고 있고 북부동맹군은 수도 카블을 점령하였고 미국은 이제 다음 정권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에 날카롭게 신경 쓰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 보복전쟁으로 평화가 이루어졌습니까?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 이후 미국내 소수민족들은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산다고 합니다. 미국의 이러한 불행과 재해의 원인을 소수민족에게 돌리려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100년간 이민은 금지해야 한다 든가 소수민족에게 불이익을 주어 문제 해결을 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습니다.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으로 의회를 통과한 반 테러 법안들이 겨냥하는 주요 대상인이 외국인 소수민족 이며 그 중에도 아랍인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부시가 11월 초 서명하여 효력이 발생된 '미국애국령'(USAPA)은 수사 영장 없이 심증만으로도 외국인을 불심 검문 할 수 있고 변호사와 피고인의 비밀대화까지 감청할 수 있다고 하며 테러혐의는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한답니다. 뉴욕타임스는 '아프카니스탄 전쟁 두달 째를 맞이해 (인권이 보장되고 민주주의가 시행되는 나라에서)민권 자유가 퇴색해 가고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중동 출신 유학생을 상대로 심층 면접하고 있는데 그 대상이 18-33세 남자로서 지난 1월 이후 입국한 5000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최근 46개 이슬람 관련 단체 회원들을 입국 금지 명단에 추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9.11 이후 고통의 극한을 당하고 있는 것은 아프간 민중들입니다. 아프간은 소련 침공에 의한 전쟁을 미국의 도움으로 치른 지 20년밖에 경과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지도자 중 나이가 제일 많은 이가 40대라고 합니다. 대부분 장애를 겪고 있으며 전쟁의 소용돌이에만 있어서 정신적으로도 기형적 상태라고 합니다. 무엇보다 아프간 민중들의 고통은 극심한 기아상태에서 또 전쟁을 겪고 있다는 것입니다. 필사적으로 아프간을 탈출하는 난민들의 참상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으며 그들의 기아 상태는 처참한 것입니다. 아프간 국민들 700-800만 명이 아사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한다. 이 기아 사태는 9.11 이전에도 심각했는데 농사 지을 땅도 파괴되고 물건을 만들어 팔 공장도 이미 파괴된 아프간은 다만 국제 원조에 의존해 기아를 면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미국 정부가 9.16일 아프간 민간 식량 구호품 전달 트럭 호송을 중단할 것을 파키스탄에 요구했고 유럽에서조차도 여기에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은 것은 수많은 사람들을 대량아사로 몰아넣는 일이 됩니다. 필사적으로 파키스탄으로 향하는 난민들은 절망의 한 단면을 묘사하고 있고, 오랫동안 지속된 아프간의 고통이 거대한 참사로 바뀌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유일한 탈출구인 파키스탄도 미국의 요구로 국경이 봉쇄되었습니다. 춈스키는 이를 대학살이라고 말합니다.
9.11 테러가 태평양 건너 미국 대륙 동부에서 일어난 일이고 미국의 보복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잘 알지도 못했던 아프간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해서 우리와 별 상관없는 남의 일로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미국에 의해 테러 지원국가로 묶여 있고 남한은 반테러 국제연합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증오와 대결을 청산시켜야 할 노력을 테러와의 전쟁으로 대신하는 미국 정부와, 일부 반미 테러리스트들의 잘못된 행위들이 우리 한반도에서도 그 역사적 오류를 일어나게 할 수 있기에 우리는 위기감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20세기 전쟁과 살상의 시간들이 끝나고 21세기에 평화를 갈망하던 인류의 소망은 산산이 부숴져 버린 것 같습니다. 21세기에도 야만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9.11 테러 이후 팔레스타인과 아프간 민중들이 겪고 있는 고통이 극한적이며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라는 어두운 현실 앞에서, 그리고 테러는 이슬람 민중의 고통을 씻는 방법이 결코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또한 직시하면서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전쟁현실과 민중의 고통 현실을 보면서 우리는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테러와의 전쟁을 바라보면서 증오와의 대결을 씻지 않고서는 어떠한 물리적 힘으로도 평화를 지킬 수 없다는 교훈을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21세기 역시 20세기와 큰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테러도 보복도 더 이상 인류를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 미국이 더 큰 윤리의식을 가지고 자신을 반성할 것을 요청하게 됩니다. 전쟁 수행을 통해 나라의 단결을 이루어 온 미국이 월남전 이후에는 군대대신 달러의 힘으로 세계를 재패 하고자 하였고, 이에 대한 약한 나라들 특히 이슬람이 가지고 있는 폭력적이기까지 한 증오심에 대해서 미국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한 나라를 폭격으로 패배시킬 수는 있지만 그것은 그들의 증오심을 증가시킬 뿐 패배시킬 수 없습니다.
독일의 언론가 프란츠 알트는 시대에 맞는 사상보다 더 큰 힘을 가진 것은 없다고 말합니다. 지금 이러한 전쟁과 테러로 상호 보복하는 세계 상황에서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는 삶의 방식은 어떤 것일까?를 생각하면서 저는 도날드 슈라이버 2세의 책 [적을 위한 윤리](Ethics for Enemy)를 우리가 함께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는 이 책을 "20세기에 치러진 전쟁들 속에서 죽어 간 1억 명의 인류를 기억하며 그들에게 바친다. 그들은 죽었으나 지금도 말하고 있다" 라고 책의 맨 앞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난 22일 연대에서 이 책의 출판기념과 강연회가 있었으나 저는 참석하지는 못했습니다. 이 책은 서로에게 큰 상처를 준 적들이 어떻게 다시 정치적 유대를 모색해 나갈 수 있는가에 관해 말하고 있으며 정치에서의 용서(Forgiveness in Politics) 라는 부제를 달고 있습니다.
세상에 나와 우리와 이웃을 위한 윤리는 얼마든지 있지만 '적을 위한 윤리'라는 말은 생소합니다. 그는 종교적 용어이고 구태의연한 개념인 용서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는데, 지극히 종교적이고 개인적인 윤리 영역으로 추방되었던 용서라는 개념을 과거에 저질러진 범죄와 갈등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정치 현실의 한 가운데로 가지고 들어옵니다. 그래서 '용서는 망각이 아니라 반대로 기억에서부터 시작하며, 용서는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지 않으나 복수를 포기 할 것을 요구하고, 용서는 적의 인간성을 이해함이 중요하며, 진정한 용서는 증오가 낳은 분열을 적극적으로 치유하여 인간 관계의 갱신을 목표로 한다'고 말합니다. 지난 20세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전쟁 사상자를 낸 세기였고, 그러므로 이러한 정치적 용서보다 21세기 인류의 삶에 더 실제적이고 긴급한 선물은 없을 것이라고 저자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구약성서가 복수 중심이 아니라 생명을 보존하려는 의도가 강했고 공동체의 화해와 용서의 모델을 보인다고 합니다. 창세기의 요셉과 그의 형들과의 이야기는 기원전 10세기 솔로몬 시대 이후 이스라엘이 두 개의 왕국으로 분열되었을 때 씌어졌는데 이 이야기를 민족의 화해와 공동체의 형성이라는 정치적 노력의 산물로 다시 읽을 수 있다고 합니다. 화해와 용서가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아예 존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카인의 이야기도 하나님은 카인을 죽이지도 않고 사회로부터 버림당하지도 않게 하는 것을 보면서 '카인의 표'이야기는 복수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예수의 용서의 가르침을 주기도문을 핵심으로 강조합니다. 그는 예수께서 우리가 서로 용서하지 않는 한 우리는 신에게 감히 용서를 구하지 못한다는 주기도문을 가르쳤는데, 이는 유대관습에 대해 매우 비전통적이고 급진적인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이 초대교회 윤리와 삶에 깊이 반영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로마제국의 종교가 된 후 1천년 동안 서구의 기독교에 정치 질서 안에서의 용서가 실종되었다고 개탄합니다. 용서는 교회의 공식적인 성례전에만 속하게 되고 전체 교인 앞에서 공적으로 행해지던 죄의 고백과 회개라는 전통은 사제와의 은밀한 개인적 관계로 축소되어 버려 결국 죄의 용서는 교권과 연계된 대단히 사적인 일로 전락하고 말고 고해성사라는 제도 속으로 구속되었다는 것입니다. 용서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영역으로 한정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말틴 루터는 '용서받는 죄인들의 회중'으로 새롭게 이해하기는 했으나 하나님의 왕국과 세상의 왕국을 분리하여, 용서와 자비의 책임은 교회의 것이고 처벌하는 정의의 의무는 국가의 것으로 나누어버렸고, 18세기 계몽주의 운동은 고립된 개인으로 축소시킴으로 용서의 사회적 중요성을 간과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역사적 자취들이 오늘날 왜 정치에서의 용서라는 개념이 비 종교인들에게는 종교적으로 들리고 종교인들에게는 신기한 이야기로 들려지는지의 이유라고 합니다. 저자는 미국인들이 이런 분리주의 문화의 덫에 걸려있고 민주주의의 요체가 이런 분리인 것으로 생각함을 문제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슈라이버가 제시하는 적을 위한 윤리는 '생명의 확언'이라는 최소한의 윤리적 합의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정치에서의 인간생명 보존의 법을 최우선적인 '법'으로 주장합니다. 20세기 이전 5천넌 동안의 전쟁에서 살해된 사람 수 보다 20세기 90년 동안 더 많은 사람이 살해되었다는 끔찍한 역사적 사실을 그는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인류가 죽음의 정치로부터 생명의 정치로 옮겨가야 한다는 것이 지금 우리의 가장 중요하고 긴급한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이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는 각국 정부들이 가지고 있는 거대한 상호 살상 능력을 우리가 어떻게 제어 할 수 있는가의 능력에 달려 있다고 보며, 윤리적 상대주의도 오직 우리가 인간의 생명 그 자체에 대해 상대주의적이지 않을 때에만 허용될 수 있는 것임을 저자는 분명히 말합니다. 그리고 보복의 유혹에 저항하면서 과거의 고통에 찬 역사를 기억하고 직면하는 정치에서 진정한 용서가 시작된다고 하며, 처벌하는 정의가 아니라 회복시키는 정의를 향하는 길에 정치인들의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종교는 개인적 죄의 문제에만 집착하지 말고 모두가 연결된 사회적 죄를 보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미국인에게 남아프리카 공화국 사람들이 어떻게 아파르트헤이트를 용서하고 용서받았는지를 배우라고 주문합니다.
저는 이 슈라이버의 적을 위한 윤리를 기억하면서 보복의 정치가 행여 구약성서의 동태복수법에 의존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에서 (이슬람, 유대교, 기독교가 모두 공통으로 의존하고 있는 경전) 구약의 동태복수법을 살펴보고, 이에 대한 반어적 새로운 법을 제시하는 예수의 원수사랑에 대하여 생각하고자 합니다.
오늘 읽은 구약성서 본문은 약자보호법의 틀 안에 있고 그 가운데 신체 상해에 관한법(21:18-36)입니다. 이 법은 보복을 어떻게 하는가에 중심을 둔 것이 아니라 가해자가 동태복수법에 의한 보응 응징을 받음으로 과실치사를 방지하고 인체의 피해 회복을 보장하려는 목적을 가진 법입니다. 특히 다음에 이어 나오는 노예에 대한 상해를 다루는 법에서 이스라엘의 동태복수법이 가지는 근본 정신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즉 노예에게 상해를 입혔을 때는 그 노예를 해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구약성서가 '노예도 인간이요 노예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므로 그의 생명의 성역을 침범하는 자는 누구나 그것에 대한 책임이 있고 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이른바 법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하다는 사회개혁적 정신과 생명중심 사상을 가졌음이 나타납니다. 더 주목할 것은 고대 중동의 법, 특히 함무라비 법과 힛타이트 법과 출 21장 26-27을 비교하면, 바빌론과 힛타이트에서는 노예에게 상해를 입혔을 때에는 금전적 보상(노예 몸값의 반액)만 지불하면 벌을 면할 수 있으나 이스라엘 계약법전에는 그 가해자는 피해자인 노예에게 가해의 보상으로 자유를 주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는(21장 26-27절) 차이를 보는 것입니다. 고대 중동에서는 노예는 재산 품목으로 만 간주하지만 이스라엘은 평등한 인간으로 간주하고 노예가 신체적 상해를 받으면 그 보상으로 자유인이 된다고 하여 인간의 자유추구를 목표합니다.
이어서 나오는 재물 침해를 다룬 법과 종교적 사회적 법규들에서도 그 정신이 약자보호에 근거함을 보게됩니다. 약자보호의 사회적 법규는 보호해야 할 약자로 이민자, 과부, 고아 그리고 채무자를 열거합니다. 여기서 이민자는 친족의 보호를 받지 못해서 쉽게 피해를 받는 자를 가리키고 과부와 고아 그리고 채무자는 남편이나 부모나 재산 후견인의 지지와 보호를 받지 못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단순한 인도주의적 배려가 아니고 오히려 그것은 그 약자들의 특별한 후견인이 바로 하나님이며 그래서 약자를 괴롭히지 말아야 할 그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약자 보호법의 제정 근거로서 등장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이 약자의 후견인이다'라는 선포와 이 법령을 받는 이스라엘이 과거 에집트에서 겪었던 이민자의 고난 경험이 더 우선적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계약 법전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새롭게 부딪히는 여러 상황 속에서 수립할 법질서를 그들이 갖고 있는 평등주의 사회 이념으로 수립하려는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계약법전의 이 약자보호와 평등이념 추구의 법 정신으로 미루어 볼 때, 계약법전은 왕조와 중앙집권화와 그리고 가나안적 생활영향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계약체제와 사회경제적 상황이 퇴폐화 될 위협을 받는 것에 대한 혁명적 반작용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동태복수법은 복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생명보호 약자보호의 정신을 그 근원으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눈은 눈으로'는 하나의 법규이고, 모든 법의 기초로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원래 이 말은 살인자에 대한 무제한적 복수를 제한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 발전 과정에서 주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음이 사실입니다. 예수 당시에 그 타당성이 논란되었고 그리고 실제 생활에서 보복은 그것에 상응하는 금전 배상으로 대치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반어법적으로 이 동태복수법에 대응하는 새 율법을 제시하여 새로운 복음을 줍니다. 이는 산상수훈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산상수훈은 시내산 율법의 완성으로 볼 수 있습니다.
39절에 보면 뺨을 때리는 행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랍비의 법에서는 손등으로 남을 치는 행위는 특별히 수치스러운 것으로 간주되며 이 행위에 대해서는 두 배의 벌이 가해진다고 합니다. 마태는 혹시 이교도라는 이유로 그렇게 맞은 제자들을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40절에는 속옷과 겉옷 이야기가 나옵니다. 겉옷은 밤에 입고 덮개로 사용하여서 압류가 안됩니다. 그런데 속 옷을 주라는 것은 예수는 모든 것을 내어주고 벗은 채로 살아가라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행한 자를 긍휼 여기시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바탕에 두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 길 안내자의 동행을 강요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는 로마의 수비대 권리에 대해 말하는 것인데 군사적, 정치적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이 경우는 개인에게 그러한 봉사를 요구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 로마 수비대에 대항하는 혁명적인 지하운동 곧 첼롯당이 요구하는 것과 정반대로 나타납니다. 예수는 그 청구권리의 정당함이나 부당함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는 다만 요구된 일 마일보다는 오히려 이 마일을 동행하도록 충고하고 있습니다.
원수사랑에 대한 내용에서 보면, 원수를 미워하라는 것이 실제로 구약에서 별로 없습니다. 이웃사랑은 같은 민족을 생각하며, 원수애에 대한 요구도 많이 있습니다(삼상 24장20, 출 23장 4,5, 잠언 25장 21,22). 랍비들도 인간사랑을 말합니다. 그런데 쿰란 공동체는 빛의 자녀는 사랑하고 어둠의 자녀는 미워하라로 이분합니다. 예수는 대립명제를 공격하며 이웃사람을 특정한 국가적인 종교적인 단체로 한정 지으려는 모든 한계를 제거합니다. 동태복수법적 보복의 가능성을 완전히 봉쇄하고 새로운 관계와 새로운 질서를 말하는 것이 예수의 원수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 원수 사랑은 기독교 역사에서 상당한 오해를 가져왔습니다. 이 본문이 비정치적으로 해석되는 데서 사악한 사람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으로 이용되어 왔다는 비판을 합니다. 이 마태복음의 원수는 누구이며 원수사랑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라는 질문이 계속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의 이 원수사랑의 내용을 당시 사회적 상황과의 관계에서 이렇게 볼 수 있다는 것을 참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곧 비대칭적 관계(강자와 약자의 대결 상황)에서 무력포기나 적에 대한 예상되는 행동은 3가지가 있는데 1) 하위자의 수동적 양도, 자신에게 더 나쁜 상태가 오지 않도록 영리하게 행동한다. 2) 굴복당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승리자의 대담한 복수포기가 있게 된다. 3) 불의로 인해서 고난 당하는 사람의 내적 존엄성과 강함이 표현될 수 있는데, 결국 외적으로 상위질서나 하위질서에 소속되는 것을 거부한다.
신약성서적 전승에서 원수사랑과 무력포기의 사회적 장이 어떤 것인가? 를 생각해 보면 마태는 하위자의 수동적 양도로서의 무력포기 라는 유형에 접근한다고 본다는 것입니다. 승리자의 원수사랑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에서는 위의 제3의 형태 곧 불의로 고난 당하는 사람의 내적 존엄성과 강함의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외적 참패를 내적 우월성을 통해서 처리 할 수 있었다는 경험을 말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단순 수동이 아니라 예수에게서 비폭력은 적과의 도전적 대화입니다. 그것은 적에게서 행동변화를 도출해 내려는 희망이며, 그것은 보복의 악순환이 중단 될 때 성립되는 놀라운 효과를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결국 살인을 억제하는 인간적 본성을 적에게서 일깨우려는 상당히 위험한 시도이며 이러한 비폭력의 실천으로 연관되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비폭력 무저항이 결국 상대의 인간성을 자극하고 생명에 대한 존엄을 일깨우게 된다는 적의 행동변화를 도출하는 노력임을 말합니다. 예수의 원수사랑은 기독교 전통에서 오해한 개인적인 내용이라기 보다는 정치적 차원을 가지는 것으로 해석되는 것입니다. 곧 비폭력 무저항의 정치적 태도가 인간생명 근원에서 정치차원과 개인차원을 연결짓게 됩니다.
로마제국에 대한 적대감으로 민족주의를 표현하는 당시의 상황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반민족주의자로 배신자로 지목 받을 수 있는 위험한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첼롯당이나 쿰란 공동체의 극단적 분열과 적대적 태도가 인간에게 생명을 준다고 생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45절이 대립명제의 결론이라고 보면, 모든 것은 창조를 지배하는 하나님에게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배워야만 참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강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독특한 상으로 하나님은 해를 선인과 악인에게 모두 비추고 불의한 자에게 모두 내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힘든 사랑의 실천을 위한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며 하나님 모방이 산상수훈의 주요 주제인 것입니다.
이 원수사랑에 대한 내용을 '원수'가 마태 공동체 내부의 분열을 말하고 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서중석 교수에 의하면 마태 공동체 내부가 유대인 크리스챤들과 이방인 크리스챤들 사이의 갈등과 대립, 그리고 유대인 크리스챤 사이의 갈등과 대립 등으로 상당한 분열이 있었고 원수사랑 그리고 용서에 대한 교훈은 그러한 내부 갈등을 극복하기 위하여 강조되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들끼리의 용서가 이루어 져야 하나님의 용서도 이루어진다고 하여 사람들끼리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에 앞장선다는 주장은 당시 사람들끼리의 용서가 얼마나 절박한 상태였는가를 보여준다고 합니다. 더 나아가 형제에게 분노하는 자는 누구나 심판을 받게 됨을 분명히 하여 용서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며, 종의 비유(18:23-35)의 결어에서 다시 한 번 이를 확인하게 합니다. 그리고 제단 앞에서 형제와 화해하지 않은 것이 생각나면 먼저 형제와 화해하고 예물을 제단에 드리라고 합니다. 우리의 행위가 더 우선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곧 무조건적이며 끝없는 용서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원수사랑 가르침에서 그것이 정치적 차원이거나 공동체 내부 대립이거나 간에 적대관계에 있는 상황이 어떻게 극복되어야 하는가를 말해주고 있음을 봅니다. 힘이 약한자의 적대관계 극복은 비폭력 무저항의 행위를 통한 인간성과 생명존엄의 본질을 일깨우게 하는 것이며, 공동체 내부적 갈등은 무조건적 용서에 있다고 함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빠진 것은 강자의 태도에 관련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적으로 강자는 자기 오만에 대한 회개를 하는 것에서 사랑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자의 자기 오만에 대한 회개가 없이는 대립의 극복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의 상황에서 미국이 자기 오만에 대한 회개를 할 것을 말하게 됩니다. 과거의 미국은 1814년 이후 아메리카 원주민을 상당수 죽였고 멕시코의 절반을 점령했고 카리브해와 중아메리카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파괴와 약탈을 일삼았다. 하와이를 점령하고 수십만 필리핀 사람을 죽이면서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2차대전 이후도 이런 범죄를 도처에서 행했습니다. 그러나 항상 미국인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이 죽고, 미국 땅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전쟁을 벌였고, 미국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이 학살을 당해 온 것입니다. 이러한 미국의 역사적 과정을 보면 9.11 테러에 대한 반미 국가의 반응은 이해할 만 한 것이 됩니다.
현재 세계가 치솟는 테러에 대한 공포와 잔흑함을 막을 수 있는 쉬운 길은 없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인류가 잠깐 숨을 고르고 고대와 현대의 지혜를 모으는 일에 모두 집중해야 할 시점입니다. 분단과 전쟁으로 두 동강나고 남남 갈등이라 불리우는 지역간의 적대감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우리의 불행한 역사앞에서 우리자신들을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새로운 회개의 문화가 요청되고 '생명의 보존'이 기준이 되는 정치가 되어야 함을 절감합니다.
저는 새길교회가 사회적 오피니언 리더로서의 책임이 있는 집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 적을 위한 윤리를 말하고 사회적 담론을 평화로 이끌어 나가는데 앞서야 할 책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의 원수사랑에 대한 정치적 차원의 해석을 제시하여야 할 때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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