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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9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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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서창원 목사 |
참고 : | 새길교회 2002. 1. 6주일설교 |
새해 2002년을 맞이하면서 누구나 새로운 희망과 비전(vision)을 추구합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새로운 마음을 다짐해야 합니다.
산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선택의 자유를 느끼면서 생명의 날을 경축하는 것입니다. 생명은 기계적 작용을 넘어서는 영적인 성품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물질과 정신세계의 관심을 넘어서 영성을 이해하고 관심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 생활은 영성의 문제와 관계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생활도 삶에 의미를 주고 삶을 원초적으로 지탱해주는 영적인 차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궁극적인 관심은 삶의 실존적 중심이 됩니다. 이 궁극적 관심은 물질적 관심, 정신적 관심을 초월하는 영적인 문제입니다. 이 궁극적인 관심은 초월적 세계와의 인격적 대화에서 이루어집니다. 초월적 세계를 인격적으로 이해하게 될 때 초월자 또는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성서의 증언에 따르면 이 살아계신 하느님은 우주 삼라만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이 창조한 세계는 궁극적으로 진실하고 정의롭고 아름다운 세계입니다.
이 시대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새로운 영성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와 생존추구에서 새롭게 발견된 기독교 영성의 핵심이 바로 창조 중심의 영성입니다. 이 전통은 지금까지 기독교 중심의 영성이었습니다. 타락/속량 영성보다 더 오래된 기독교의 핵심적 영성입니다. 타락/속량 영성은 성 어거스틴(354-430) 이후 형성된 영성입니다. 이 영성은 하느님을 자연이 아니라 개인영혼에서 찾아왔습니다. 이 전통은 큰 공헌이 있었지만 지나치게 한 면에 치우쳐 온 것이 사실입니다. 메튜 폭스에 의하면 서양기독교에서는 창조 중심 전통이 거의 완전히 잊혀져 왔다고 합니다. 이 창조 중심의 영성을 새 시대를 위해서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창조 중심의 영성을 타락/속량 영성과 대조하여 그 핵심을 정리해 보면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줍니다. 창조영성은 가부장적 성격을 벗어나 여성론적이며, 금욕적이라기보다 심미적입니다. 또 황홀과 열정을 기꺼이 받아드리며 고통을 죄의 대가가 아니라 우주의 해산의 고통으로 이해합니다.
우주의 이해에 있어서도 원리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원복(原福)을 강조합니다. 이 우주는 죄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력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핵심도 자아 중심성을 넘어서 생태론적이며 우주적입니다. 중요한 것은 몸을 의심하는 어거스틴의 입장처럼 혼이 몸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에카르트처럼 몸을 환영하며 혼은 몸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이 영성은 타락/속량 영성처럼 특정인에게 관련되는 엘리트주의가 아니라 많은 이에 열려 있는 보편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십자가를 이해(via negativa)하면서도 부활을(via positiva) 통한 영의 강림과 공동창조를 강조합니다. 따라서 이 영성은 힘 있는 이들의 영성을 넘어서 힘없는 이들을 위한 아나윔의 영성을 통해 인간 역사상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열정적 호소에 귀 기울이는 영성입니다.
예를 들면 인간의 존엄성을 유린하는 것에 우리가 분노할 수 있는 것은 원래 인간은 자기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게 창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창조성을 억압하는 것이 슬픈 까닭은 인간이 창조적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고통의 기억은 기쁨과 창조의 원복(original Blessing)의 기억을 전제할 때에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새해를 맞으며 우리는 새로운 영성을 추구합니다. 성서는 새로운 시대를 위해 하느님의 영을 새롭게 힘입어야 진정한 새 시대가 도래한다고 가르칩니다. 삶의 진정한 동기가 되며 궁극적 관심을, 용기를 가지고 추구하게 하는 사랑의 힘은 '영성'에 있습니다. 기독교의 오랜 영성의 맥을 지니고 있는 창조의 아름다움에서 뻗어 내려오는 '창조의 영성'을 새롭게 힘입어야 합니다. 온 우주 삼라만상을 창조하신 살아 계신 하느님의 사랑의 입김, 이것이 창조의 영성의 요체입니다.
지금까지 회개와 비관적 통제중심의 영성에서 희망과 변화의 돌파구를 열어가는 하느님의 창조의 영성에로 초대합니다. 새해, 새아침, 성도의 공동식탁이며 하느님의 축제의 잔치인 이 성찬의 식탁에서 우리는 진정한 생명의 특징인 참여와 다양성과 개방성을 경축합시다. 주님의 몸과 피를 함께 먹고 마시면서 우리는 우리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神(성찬)을 먹고, 神(창조실현)처럼 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에토스는 창조의 영성입니다.
새해 우리의 삶과 신앙공동체의 활동 가운데 창조의 영성이 늘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산다는 것은 요한네스 메츠가 말하는 것처럼 수난의 기억에서 대안적 역사를 복원하는 것입니다. 이 대안적 역사 창조가 가능한 것은 원복(原福)의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성찬에 함께 참여하면서, 원복이 상실된 현실을 아파하면서 원복이 복원되어 하느님과 인간이 그리고 역사와 세계가 창조의 기쁨과 즐거움을 향유하는 그 날을 꿈꿉시다. 그리고 이러한 날을 미리 앞당겨 예행적으로 축하하는 식사가 성찬입니다.
다같이 흙, 풀, 벌레 그리고 모든 생명의 창조의 세계를 묵상하면서 이 진실하고 정의롭고 아름다움의 세계가 오늘의 현장에 다시 도래할 것을 희망의 기다림에서 꿈꿉시다.
새해, 만복이 늘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산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선택의 자유를 느끼면서 생명의 날을 경축하는 것입니다. 생명은 기계적 작용을 넘어서는 영적인 성품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물질과 정신세계의 관심을 넘어서 영성을 이해하고 관심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 생활은 영성의 문제와 관계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생활도 삶에 의미를 주고 삶을 원초적으로 지탱해주는 영적인 차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궁극적인 관심은 삶의 실존적 중심이 됩니다. 이 궁극적 관심은 물질적 관심, 정신적 관심을 초월하는 영적인 문제입니다. 이 궁극적인 관심은 초월적 세계와의 인격적 대화에서 이루어집니다. 초월적 세계를 인격적으로 이해하게 될 때 초월자 또는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성서의 증언에 따르면 이 살아계신 하느님은 우주 삼라만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이 창조한 세계는 궁극적으로 진실하고 정의롭고 아름다운 세계입니다.
이 시대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새로운 영성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와 생존추구에서 새롭게 발견된 기독교 영성의 핵심이 바로 창조 중심의 영성입니다. 이 전통은 지금까지 기독교 중심의 영성이었습니다. 타락/속량 영성보다 더 오래된 기독교의 핵심적 영성입니다. 타락/속량 영성은 성 어거스틴(354-430) 이후 형성된 영성입니다. 이 영성은 하느님을 자연이 아니라 개인영혼에서 찾아왔습니다. 이 전통은 큰 공헌이 있었지만 지나치게 한 면에 치우쳐 온 것이 사실입니다. 메튜 폭스에 의하면 서양기독교에서는 창조 중심 전통이 거의 완전히 잊혀져 왔다고 합니다. 이 창조 중심의 영성을 새 시대를 위해서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창조 중심의 영성을 타락/속량 영성과 대조하여 그 핵심을 정리해 보면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줍니다. 창조영성은 가부장적 성격을 벗어나 여성론적이며, 금욕적이라기보다 심미적입니다. 또 황홀과 열정을 기꺼이 받아드리며 고통을 죄의 대가가 아니라 우주의 해산의 고통으로 이해합니다.
우주의 이해에 있어서도 원리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원복(原福)을 강조합니다. 이 우주는 죄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력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핵심도 자아 중심성을 넘어서 생태론적이며 우주적입니다. 중요한 것은 몸을 의심하는 어거스틴의 입장처럼 혼이 몸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에카르트처럼 몸을 환영하며 혼은 몸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이 영성은 타락/속량 영성처럼 특정인에게 관련되는 엘리트주의가 아니라 많은 이에 열려 있는 보편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십자가를 이해(via negativa)하면서도 부활을(via positiva) 통한 영의 강림과 공동창조를 강조합니다. 따라서 이 영성은 힘 있는 이들의 영성을 넘어서 힘없는 이들을 위한 아나윔의 영성을 통해 인간 역사상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열정적 호소에 귀 기울이는 영성입니다.
예를 들면 인간의 존엄성을 유린하는 것에 우리가 분노할 수 있는 것은 원래 인간은 자기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게 창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창조성을 억압하는 것이 슬픈 까닭은 인간이 창조적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고통의 기억은 기쁨과 창조의 원복(original Blessing)의 기억을 전제할 때에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새해를 맞으며 우리는 새로운 영성을 추구합니다. 성서는 새로운 시대를 위해 하느님의 영을 새롭게 힘입어야 진정한 새 시대가 도래한다고 가르칩니다. 삶의 진정한 동기가 되며 궁극적 관심을, 용기를 가지고 추구하게 하는 사랑의 힘은 '영성'에 있습니다. 기독교의 오랜 영성의 맥을 지니고 있는 창조의 아름다움에서 뻗어 내려오는 '창조의 영성'을 새롭게 힘입어야 합니다. 온 우주 삼라만상을 창조하신 살아 계신 하느님의 사랑의 입김, 이것이 창조의 영성의 요체입니다.
지금까지 회개와 비관적 통제중심의 영성에서 희망과 변화의 돌파구를 열어가는 하느님의 창조의 영성에로 초대합니다. 새해, 새아침, 성도의 공동식탁이며 하느님의 축제의 잔치인 이 성찬의 식탁에서 우리는 진정한 생명의 특징인 참여와 다양성과 개방성을 경축합시다. 주님의 몸과 피를 함께 먹고 마시면서 우리는 우리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神(성찬)을 먹고, 神(창조실현)처럼 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에토스는 창조의 영성입니다.
새해 우리의 삶과 신앙공동체의 활동 가운데 창조의 영성이 늘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산다는 것은 요한네스 메츠가 말하는 것처럼 수난의 기억에서 대안적 역사를 복원하는 것입니다. 이 대안적 역사 창조가 가능한 것은 원복(原福)의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성찬에 함께 참여하면서, 원복이 상실된 현실을 아파하면서 원복이 복원되어 하느님과 인간이 그리고 역사와 세계가 창조의 기쁨과 즐거움을 향유하는 그 날을 꿈꿉시다. 그리고 이러한 날을 미리 앞당겨 예행적으로 축하하는 식사가 성찬입니다.
다같이 흙, 풀, 벌레 그리고 모든 생명의 창조의 세계를 묵상하면서 이 진실하고 정의롭고 아름다움의 세계가 오늘의 현장에 다시 도래할 것을 희망의 기다림에서 꿈꿉시다.
새해, 만복이 늘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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