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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23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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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완상 형제 |
참고 : | 새길교회 2002. 1.27 주일설교 |
지난해는 끔찍스러운 한 해였습니다. 장모님께서 수년간 병고로 고생하시다가 소천하셨는데 상중(喪中)에 교육부의 책임자로 임명받게 되었습니다. 취임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파상적인 공격의 물결이 닥쳐왔습니다. 임명장 받는 날 내가 맨 넥타이 색깔을 문제삼아 이른바 색깔 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공교육 붕괴, 교육이민 등의 문제를 정치쟁점화 하거나 事件化 시키면서 끈질기게 공격을 가해왔습니다. 작년 말에는 수능시험의 難度 문제와 석차 총점 문제로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열 차례 정도 태풍을 맞은 셈이지요.
이 같은 상황에서 저는 매일 지뢰밭을 걷는 심정으로 하루 하루를 보냈습니다.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느낌,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걷는 느낌, 때로는 죽음의 음산한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 같은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일년을 보내고 되돌아보면, 오늘의 저의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과 정신은 그 전보다 더 허약해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오히려 더 건강해진 듯 합니다. 多夕 선생의 표현대로 한다면, 을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그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면서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계신다는 느낌과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잘 견딜 수 있었습니다. 지난 일년간, 하나님의 現存과 臨在를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특히 시편 23편이 그러했습니다. 이제 시편 23편의 매력을 간증하고 싶습니다.
시편 23편은 아름다운 언어들의 표현 이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바로 우리 곁에 계셔서 숨쉬고 있는 모습을 깨닫게 해줍니다. 대체로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 신자들의 인식과 이해는 교리나 신조(creed)의 언어를 통해 이뤄집니다. 사도신경이 바로 그러한 보기가 되겠지요. 신조의 언어는 자유로운 질문과 느낌을 잘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시편은 저에게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느낌을 갖게 하고, 끝없이 하나님과 대화하고 가까이 하고 싶은 충동을 자유롭게 불러일으킵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사도신경에서는 감동을 얻지 못하면서도 이 시편에서는 언제나 신선한 감동을 잔잔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에 대한 시편 저자의 인식이 놀랍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불렀습니다. 저자 자신이 목동이었기에 그의 하나님은 너무나 친근한 존재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목자 하나님! 이것은 전통적인 유대인들의 유신론적 하나님과 너무나 다르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밖으로부터 개입하시는 신,
저 높은 곳에서 초월자로 계시면서 인간의 일거수 일투족의 잘잘못을 장부에 일일이 적고 있는 심판의 신
인간의 충성과 헌신을 독점하려는 질투의 신
특정 민족과 부족을 배타적으로 사랑하시는 부족신
양과 같은 동물을 번제물로 삼키시기를 즐기시는 신...
이 같은 신관과는 아주 다른 하나님 모습을 시편 23편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목자 하나님은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양떼를 인도하시되, 그 양들의 색깔과 겉모양을 보고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양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쉴 곳을 제공하실 뿐만 아니라, 시들어져 가는 영혼마저 싱싱하게 소생시켜 주는 총체적 목자, 곧 육과 영을 동시에 건강하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게다가 올곧은 길로 양떼를 인도하시되, 그 일을 흥미 삼아 하거나 부업으로 하시지 않고 하나님 당신의 명에와 존재를 거시고 하시는 참으로 성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목자이십니다. 그러기에 당신은 양을 잡아먹기는커녕 그 양을 보호하고 아끼고 인도하십니다. 힘이 빠진 양에게는 힘을 주십니다. 안위한다는 말은 힘을 나눠주면서 위로한다는 뜻(comfort)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목자신은 한 마리 튀거나 왕따 당한 양을 찾아 나서시는 분입니다.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실 뿐만 아니라, 양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시는 분(요한 10:14-15)이십니다. 바로 이점에서 양을 불에 구워 잡아먹는 신과 양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하나님과의 극명한 차이를 보게 됩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는 예수의 삶에서 너무나 뚜렷하게 보는 것 아닙니까.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 따르미가 되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 같은 목자 하나님의 현존을 가장 절박하게 느끼게 되는 때와 상황은 어떤 것일까요? 대체로 이러한 때인 줄로 압니다.
죽음에 대한 불안을 느낄 때: 시간의 한계를 느낄 때
적들로 포위되어 있을 때: 하이에나처럼 덤비는 세력으로 에워싸일 때
절망감이 다가올 때
를 걷고 있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목자 하나님을 갈망하게 됩니다. 시편 23편의 매력은 바로 이 같은 골짜기에서 빛나게 됩니다. 절망의 한계상황 속에서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주고, 괴로운 현재의 시간에서 영원을 사모하게 하는 힘을 주는 것이 바로 시편 23편입니다.
하기야 편안한 일상적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현존을 갈망하고 느끼며, 감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도사의 지경에 이른 분일 것입니다. 로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와이키키 해변에서 수평선에 붉게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 하나님을 느끼고, 푸른 파도가 끝없이 밀려오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느껴 눈물 흘릴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인간은 대체로 더디게 깨닫는 존재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비로소 절박하게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정말 현명한 사람은 평범한 삶 속에서 끊임없이 영원을 갈망하게 되지요. 그리고 편안한 일상성 속에서도 사망의 그늘을 미리 의식하면서 하나님을 찾게 되지요.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 눈물 흘리면서 "... 몇 년만 더 살수 있다면 더 값진 삶을 살수 있을 터인데..." 하고 아쉬워하는 그 아쉬움을 미리 앞당겨 해내는 사람은 참으로 현명한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사망이나 사망의 골짜기를 직접 체험하기 전에 앞당겨 그것을 느끼며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하려는 사람은 아름다운 삶을 사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사망의 골짜기에서 스스로를 드러내시기 좋아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스스로를 비우시기를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당신이 스스로 비우시는 힘에 있다 하겠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를 보내시면서, 모세의 질문에 하나님은 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나는 이것을 분으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고생하는 백성들에게 용기와 희망, 사랑과 정의, 그리고 평화를 가득 채워주기 위해 스스로를 비우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다석 선생께서 하나님은 이라고 한 것도 같은 뜻인 줄로 압니다. 자기를 비워 남을 채워주되, 사랑, 평화, 용기, 희망으로 채워주시는 분이 바로 목자 하나님이십니다. 자기비움과 남의 채움, 이것이 바로 사랑 아닙니까? 그러기에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본질을 이해한다면, 하나님이 즐겨 계신 곳은 사망의 음침한 계곡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남을 채워주기 위해 스스로 비운다면, 우리 속의 빈곳에 하나님은 재빨리 자리잡으십니다. 우리 속의 빈자리는 그러기에 경건한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그곳에 흐뭇하게 와 계시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보면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을 초청하는 초청장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우리 스스로를 비울 때, 그 비움은 하나님께 초청장으로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같은 자기비움을 해내기 힘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함께 공동체로 기도해야 합니다. 공동체로 회개해야 합니다. 공동체의 도움으로 홀로 있을 때보다 더 잘 스스로를 비워낼 수 있다면, 이 공동체야 말로 예수의 몸 된 교회가 아니겠습니까? 새길 공동체가 바로 그러한 공동체이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윗의 시 마지막을 이렇게 새롭게 해석하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실로 우리가 스스로 비워 남을 채울 때 여호와께서 나의 빈집에 영원히 거하시리이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이 같은 상황에서 저는 매일 지뢰밭을 걷는 심정으로 하루 하루를 보냈습니다.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느낌,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걷는 느낌, 때로는 죽음의 음산한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 같은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일년을 보내고 되돌아보면, 오늘의 저의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과 정신은 그 전보다 더 허약해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오히려 더 건강해진 듯 합니다. 多夕 선생의 표현대로 한다면, 을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그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면서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계신다는 느낌과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잘 견딜 수 있었습니다. 지난 일년간, 하나님의 現存과 臨在를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특히 시편 23편이 그러했습니다. 이제 시편 23편의 매력을 간증하고 싶습니다.
시편 23편은 아름다운 언어들의 표현 이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바로 우리 곁에 계셔서 숨쉬고 있는 모습을 깨닫게 해줍니다. 대체로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 신자들의 인식과 이해는 교리나 신조(creed)의 언어를 통해 이뤄집니다. 사도신경이 바로 그러한 보기가 되겠지요. 신조의 언어는 자유로운 질문과 느낌을 잘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시편은 저에게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느낌을 갖게 하고, 끝없이 하나님과 대화하고 가까이 하고 싶은 충동을 자유롭게 불러일으킵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사도신경에서는 감동을 얻지 못하면서도 이 시편에서는 언제나 신선한 감동을 잔잔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에 대한 시편 저자의 인식이 놀랍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불렀습니다. 저자 자신이 목동이었기에 그의 하나님은 너무나 친근한 존재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목자 하나님! 이것은 전통적인 유대인들의 유신론적 하나님과 너무나 다르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밖으로부터 개입하시는 신,
저 높은 곳에서 초월자로 계시면서 인간의 일거수 일투족의 잘잘못을 장부에 일일이 적고 있는 심판의 신
인간의 충성과 헌신을 독점하려는 질투의 신
특정 민족과 부족을 배타적으로 사랑하시는 부족신
양과 같은 동물을 번제물로 삼키시기를 즐기시는 신...
이 같은 신관과는 아주 다른 하나님 모습을 시편 23편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목자 하나님은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양떼를 인도하시되, 그 양들의 색깔과 겉모양을 보고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양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쉴 곳을 제공하실 뿐만 아니라, 시들어져 가는 영혼마저 싱싱하게 소생시켜 주는 총체적 목자, 곧 육과 영을 동시에 건강하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게다가 올곧은 길로 양떼를 인도하시되, 그 일을 흥미 삼아 하거나 부업으로 하시지 않고 하나님 당신의 명에와 존재를 거시고 하시는 참으로 성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목자이십니다. 그러기에 당신은 양을 잡아먹기는커녕 그 양을 보호하고 아끼고 인도하십니다. 힘이 빠진 양에게는 힘을 주십니다. 안위한다는 말은 힘을 나눠주면서 위로한다는 뜻(comfort)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목자신은 한 마리 튀거나 왕따 당한 양을 찾아 나서시는 분입니다.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실 뿐만 아니라, 양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시는 분(요한 10:14-15)이십니다. 바로 이점에서 양을 불에 구워 잡아먹는 신과 양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하나님과의 극명한 차이를 보게 됩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는 예수의 삶에서 너무나 뚜렷하게 보는 것 아닙니까.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 따르미가 되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 같은 목자 하나님의 현존을 가장 절박하게 느끼게 되는 때와 상황은 어떤 것일까요? 대체로 이러한 때인 줄로 압니다.
죽음에 대한 불안을 느낄 때: 시간의 한계를 느낄 때
적들로 포위되어 있을 때: 하이에나처럼 덤비는 세력으로 에워싸일 때
절망감이 다가올 때
를 걷고 있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목자 하나님을 갈망하게 됩니다. 시편 23편의 매력은 바로 이 같은 골짜기에서 빛나게 됩니다. 절망의 한계상황 속에서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주고, 괴로운 현재의 시간에서 영원을 사모하게 하는 힘을 주는 것이 바로 시편 23편입니다.
하기야 편안한 일상적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현존을 갈망하고 느끼며, 감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도사의 지경에 이른 분일 것입니다. 로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와이키키 해변에서 수평선에 붉게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 하나님을 느끼고, 푸른 파도가 끝없이 밀려오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느껴 눈물 흘릴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인간은 대체로 더디게 깨닫는 존재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비로소 절박하게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정말 현명한 사람은 평범한 삶 속에서 끊임없이 영원을 갈망하게 되지요. 그리고 편안한 일상성 속에서도 사망의 그늘을 미리 의식하면서 하나님을 찾게 되지요.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 눈물 흘리면서 "... 몇 년만 더 살수 있다면 더 값진 삶을 살수 있을 터인데..." 하고 아쉬워하는 그 아쉬움을 미리 앞당겨 해내는 사람은 참으로 현명한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사망이나 사망의 골짜기를 직접 체험하기 전에 앞당겨 그것을 느끼며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하려는 사람은 아름다운 삶을 사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사망의 골짜기에서 스스로를 드러내시기 좋아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스스로를 비우시기를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당신이 스스로 비우시는 힘에 있다 하겠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를 보내시면서, 모세의 질문에 하나님은 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나는 이것을 분으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고생하는 백성들에게 용기와 희망, 사랑과 정의, 그리고 평화를 가득 채워주기 위해 스스로를 비우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다석 선생께서 하나님은 이라고 한 것도 같은 뜻인 줄로 압니다. 자기를 비워 남을 채워주되, 사랑, 평화, 용기, 희망으로 채워주시는 분이 바로 목자 하나님이십니다. 자기비움과 남의 채움, 이것이 바로 사랑 아닙니까? 그러기에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본질을 이해한다면, 하나님이 즐겨 계신 곳은 사망의 음침한 계곡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남을 채워주기 위해 스스로 비운다면, 우리 속의 빈곳에 하나님은 재빨리 자리잡으십니다. 우리 속의 빈자리는 그러기에 경건한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그곳에 흐뭇하게 와 계시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보면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을 초청하는 초청장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우리 스스로를 비울 때, 그 비움은 하나님께 초청장으로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같은 자기비움을 해내기 힘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함께 공동체로 기도해야 합니다. 공동체로 회개해야 합니다. 공동체의 도움으로 홀로 있을 때보다 더 잘 스스로를 비워낼 수 있다면, 이 공동체야 말로 예수의 몸 된 교회가 아니겠습니까? 새길 공동체가 바로 그러한 공동체이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윗의 시 마지막을 이렇게 새롭게 해석하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실로 우리가 스스로 비워 남을 채울 때 여호와께서 나의 빈집에 영원히 거하시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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