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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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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민영진 목사 |
참고 : | 새길교회 2002. 2. 3 주일설교 |
우리에게 가까이 있는 시인 문종수는 가끔 말하곤 합니다. "사람이 편견과 무지로 무장하면 천군천사도 당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편견을 거룩한 믿음이라고 착각하는 소위 "믿음이 좋다"는 사람에게서 학을 떼거나 호되게 덴 경험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한 말입니다.
최근에 이성복 시인의 산문집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했는가} (문학동네, 2001)를 읽다가 이것과 비슷한 말이 적힌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철면피한 삶과 막무가내의 믿음이 감쪽같이 닮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으로 희한하다고 적고 있습니다. 설명을 더 들어보니까, 삶이 삶을 반성하지 않으니까, 믿음이 믿음을 반성하지 않으니까 이런 현상이 일어나더라는 것입니다. 철면피한 삶이나 막무가내의 믿음은 다같이 "자기 자신 외에 다른 지반을 갖지 않는 무한한 자기 증식 체계"라고 말합니다 (124 쪽). "자기 자신 외에 다른 지반을 갖지 않는다"는 말을 저는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자신의 삶이나 믿음을 비추어 반성해 볼 어떤 거울을 갖지 않았다거나 아예 반성이라는 감각 장치가 없는 그러한 삶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무한한 자기 증식 체계"라는 말은 어쩌면 억제할 수 없이 증대하는 생체 조직, 자신이 기생하는 몸을 죽이고서야 증식을 멈추는 암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께서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사두개파 사람들을 혹독하게 비난하신 적이 있는데, 예수께서 바로 그들의 이러한 특징, 곧 그들의 구별되지 않는 철면피한 삶과 막무가내의 믿음을 두고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께서 유대인들의 감정을 한껏 건드린 대목이 생각납니다. 예수께서 평소 유대인들에게 가지고 계셨던 심한 불신의 감정을 그대로 나타내신 말씀이 있습니다. 당신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누가복음서 18:8b)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이 종교로 가득 찰지는 몰라도 "믿음"을 찾아보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임을 미리 내다보신 관찰입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계시는 동안에도 당신을 따르는 이들의 "믿음 없음"을 자주 나무라신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할 때도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마 6:30)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믿음이 적은 것"을 나무라셨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바다의 풍랑과 같은 자연의 급격한 변화를 보고서 두려워할 때도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잔잔하게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왜들 무서워하느냐?"고 나무라시면서, 그들의 "믿음이 적은 것"을 탓하셨습니다 (마 8:26).
예수께서는 당신께서 사시던 당대(當代)를 일컬어 "믿음이 없는 세대"(막 9:19)라고도 하셨고 심지어 "믿음이 없고 패역(悖逆)한 세대"라고도 하셨습니다 (마 17:17). 그리고 드디어 당신께서 세상에 다시 오시는 날, 과연,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누가복음서 18:8)고 한탄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이것을, 예수께서 유대인만을 두고서 하신 말씀이라고만 생각하진 마십시오.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는 팔레스타인에 다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다시 올 때 믿음을 볼 수 있겠느냐?"라고 하신 이 말씀은, 그렇기 때문에, 바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의 믿음에 대한 심판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나름대로 믿음에 자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유대교인이 아니다.
이슬람교인도 아니다.
불교인도 아니다.
나는 타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기독교인이다.
부패한 카톨릭교인이 아니라 종교개혁 이후에 생겨난 개신교 교인이다.
기독교의 이단 사상은 단연코 배격한다.
사도신경은 곧 나의 신앙고백이다.
이밖에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자랑할 수 있는 교조적인 항목은 얼마든지 더 첨가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믿음"을 말씀하실 때 이러한 여러 가지 항목들은 예수님의 관심 밖이었습니다. 만일 이런 것이 믿음의 기준이라면 예수께서는 결코 "내가 세상에 다시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 이 말씀 못하십니다. 이 세상은 교회로 가득 차고 이러한 고백으로 가득 찰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러한 것들이 믿음이라면, 예수님 당대의 유대교인들을 향해서 "믿음 없는 세대여"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라고 말씀 못하셨을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은 유대교로, 유대교의 정통신앙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세상에 다시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하신 이 말씀은 우리의 믿음을 반성하게 합니다. 예수께서는 도대체 어떤 믿음을 말씀하신 것입니까? 놀라지 마십시오. 마음 상하지 마십시오. 이상하게도, 참으로 이상하게도 예수께서는 이방인들, 혹은 이방 종교를 믿는 이들에게서 믿음을 보십니다. 유대인에게서 볼 수 없는 믿음을 이방인에게서 자주 확인하십니다. 이 말은 그대로 예수께서는 우리 기독교인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믿음을 비기독교인이나 타종교인에게서 확인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가버나움에 한 이방인 백부장(百夫長)이 있었습니다. 백부장은 백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있는 장교입니다. 그가 예수께 다가와서, 자기 하인이 중풍으로 집에 누워서 몹시 괴로워하고 있다고 여쭙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에게 가셔서 그를 고쳐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 이 이방인 백부장이 자기는 주님을 자기 집에 모셔들일 만한 자격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저 자기 종이 낫도록 말씀만 해주시면 된다고, 그러면 자기 종이 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고서, 무척 놀라십니다. 그래서 이 이방인을 두고서, 예수께서는 자기를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는 어느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마 8:10).
예수께서 하신 이런 말씀은 믿음이 돈독하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정통파 유대교인들에게는 참으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여기 우리 교회에 이방 사람이 와서 혹은 타종교를 가진 이가 와서 예수님과 무슨 말씀을 나누다가 예수께서 그의 믿음을 보고 놀라셔서 우리를 보시고서 내가 너희들 가운데서는 어느 누구에게서도 일찍이 이러한 믿음을 본 일이 없다고 말씀하시면 우리는 얼마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한 술 더 떠서 오히려 믿음을 지키고 있다고 자부하는 유대교인은 끝내는 구원을 받지 못하고, 반대로, 율법을 지킬 수 없어서 믿음을 인정받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이방인은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역설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만일 예수께서 우리 교회에 오셔서 우리를 보고, 기독교인은 끝내는 구원을 받지 못하고, 반대로, 타종교를 믿는 이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면 우리가 어떻겠습니까?
예수께서는 또 세상 끝 날에 많은 이방 사람들이 동양과 서양에서 하늘나라로 몰려 와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하늘 나라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지만, 이 나라 곧 유대 나라 백성은 하늘나라의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서, 거기에서 울며 원통해 할 것이라고 (마 8:11-12) 하셨는데, 예수께서 우리를 향해, 세상 끝 날에 많은 사람들이 동양과 서양에서 타종교인들이 하늘나라로 몰려 와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하늘 나라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지만, 기독교인들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서, 거기에서 울며 원통해 할 것이라고 하신다면 우리가 어떻겠습니까?
"내가 세상에 다시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하신 이 말씀은 우리의 믿음을 반성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끝없는 자기 반성이 믿음인데, 많은 경우, 반성의 끝이 믿음이 되어 버립니다. 정도(正道)를 찾는 끝없는 추구가 믿음인데, 흔하게는 추구의 끝이 믿음이 되어 버립니다. 끝없는 자기 성화(聖化)의 과정이 믿음인데, 성화의 중단이 믿음이 되어 버립니다. 끝없는 의존, 절대적인 의존이 믿음인데, 그런 순수한 믿음을 갖기에는 너무나도 풍부한 믿음의 유산을 물려받아 이 유산 외에 더 이상 의지해야할 대상을 상실한 것이 믿음이 되어 버립니다. 이렇게 하여 믿음이 단단한 바위처럼 굳어져 버리면, 사람들은 그렇게 굳어버린 믿음을 "도타운 믿음", 곧 "돈독(敦篤)한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이 아닌 것, 믿기를 포기해 버린 것, 가장 큰 불신(不信)이, 그리고 편견과 막무가내의 주장이 믿음의 옷을 대신 걸치고 나타나서 사람을 현혹시킵니다. 돈독한 믿음을 가진 신도들에게서 믿음의 부재를 쉽게 확인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내가 세상에 다시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하신 이 말씀은 우리에 대한 주님의 기대와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우리들에게서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확인하고싶어서 하신 말씀입니다. 한 편으로는 우리가 미덥지 못해서,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는 우리를 못 잊으셔서 하신 말씀이십니다.
어떤 대상이 미덥지 못한 것과 그를 잊을 수 없다는 감정이 함께 섞여 있는 대중 가요 하나를 인용하는 것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본문 이해에 결정적인 도움이 되는 자료이기 때문에 인용합니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
언덕 위에 초가 삼간 그립습니다
자주고름 입에 물고 눈물 흘리며
이별가를 불러 주던 못 잊을 사람아
같은 노래가 버전에 따라서는 끄트머리가 서로 다릅니다. "못 잊을 사람아"가 아니라 "못 믿을 사람아"라고 되어 있기도 합니다. 작사자인 김영일 씨가 처음에 어떻게 작사를 했는지 그 본래의 본문을 찾는 것을 일반 문학에서는 "본문비평"이라고 합니다. 최초의 원문을 찾는 작업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두 개의 버전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인용한 이 노래의 경우입니다. 작사자가 두 표현이 택일하기에 아쉬워 두 버전을 동시에 유포시켜 보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는 원문을 찾는 노력은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작사자의 복합적인 마음을 두 버전에서 읽어야 합니다. 택일이 아니고 동시에 보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께서 우리말 번역 성서를 보실 때 난외주에 "혹은 ...."하고 번역을 달리 한 것들이 있는데, 이것들 중에 더러가 바로 두 본문 중에 한 본문은 본문 안에 넣고 다른 한 본문은 난외주에 넣은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다시 올 때 너희가 내가 바라는 그런 믿음을 한결같이 보여줄 수 있겠느냐고 물으시는 것은, 내가 어찌 너희를 잊겠느냐는 황송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늘 신실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사랑의 신실성을 재어 보는데는 구태여 하나님에게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연인 사이의 사랑, 부부 사이의 사랑, 친구 사이의 사랑 등에서 그 사랑의 한계를 보고서도 얼마든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이런 사랑을 받고 싶어하십니다. 우리의 부서지기 쉬운 연약한 믿음마저 받고 싶어하십니다.
하나님이 반역한 백성을 사랑하시다
1 이스라엘이 어린 아이일 때에,
내가 그를 사랑하여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냈다.
2 그러나 내가 부르면 부를수록,
이스라엘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갔다.
짐승을 잡아서 바알 우상들에게 희생 제물로 바치며,
온갖 신상들에게 향을 피워서 바쳤지만,
3 나는 에브라임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었고,
내 품에 안아서 길렀다.
죽을 고비에서 그들을 살려 주었으나,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4 나는 인정의 끈과 사랑의 띠로
그들을 묶어서 업고 다녔으며,
그들의 목에서 멍에를 벗기고
가슴을 헤쳐 젖을 물렸다.
5 이스라엘은 이집트 땅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다. 그들이 나에게로 돌아오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6 전쟁이 이스라엘의 성읍을 휩쓸고 지나갈 때에, 성문 빗장이 부서질 것이다. 그들이 헛된 계획을 세웠으니 칼이 그들을 모조리 삼킬 것이다.
7 내 백성이 끝끝내 나를 배반하고,
바알을 불러 호소하지만,
그가 그들을 일으켜 세우지 못할 것이다.
8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원수의 손에 넘기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처럼 버리며,
내가 어찌 너를 스보임처럼 만들겠느냐?
너를 버리려고 하여도,
나의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구나!
너를 불쌍히 여기는 애정이
나의 속에서 불길처럼 강하게 치솟아 오르는구나.
9 아무리 화가 나도, 화나는 대로 할 수 없구나.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망시키지 않겠다. 나는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너희 가운데 있는 거룩한 하나님이다. 나는 너희를 위협하러 온 것이 아니다.
({표준새번역} 호 11:1-9)
우리가 미덥지 못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를 잊지 못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믿음은 끝없는 자기 반성입니다. 믿음은 정도(正道)를 찾는 끝없는 추구입니다. 믿음은 끝없는 자기 성화(聖化)의 과정입니다. 끝없는 의존, 절대적인 의존이 믿음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살아 있는 생명이어야 합니다. 믿음이 단단한 바위처럼 굳어져 버리면 그 믿음은 죽어 불신의 시체로 남습니다. 불신(不信)이 믿음을 가장하듯, 진정한 믿음은 연약해 보이고, 늘 믿음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흔히들 말하는 믿음 없는 사람들, 믿음을 포기해 버린 사람들이란, 많은 경우, 믿음으로 가장한 바위 같은 불신의 성도들에게 짓눌려서 질식한 사람들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늘 "우리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십시오!"하고 비는 믿음입니다.
명상
여러분은 믿음이 약한 이를 받아들이고, 그의 생각을 시빗거리로 삼지 마십시오. (표준새번역 롬 14:1)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약한 사람들을 얻으려고,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모든 것이 다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가운데서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표준새번역개정판} 고전 9:22)
여러분은 자기가 믿음 안에 있는지를 스스로 시험해 보고, 스스로 검증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모른다면 여러분은 실격자입니다. ({표준새번역개정판} 고후 13:5)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최근에 이성복 시인의 산문집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했는가} (문학동네, 2001)를 읽다가 이것과 비슷한 말이 적힌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철면피한 삶과 막무가내의 믿음이 감쪽같이 닮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으로 희한하다고 적고 있습니다. 설명을 더 들어보니까, 삶이 삶을 반성하지 않으니까, 믿음이 믿음을 반성하지 않으니까 이런 현상이 일어나더라는 것입니다. 철면피한 삶이나 막무가내의 믿음은 다같이 "자기 자신 외에 다른 지반을 갖지 않는 무한한 자기 증식 체계"라고 말합니다 (124 쪽). "자기 자신 외에 다른 지반을 갖지 않는다"는 말을 저는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자신의 삶이나 믿음을 비추어 반성해 볼 어떤 거울을 갖지 않았다거나 아예 반성이라는 감각 장치가 없는 그러한 삶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무한한 자기 증식 체계"라는 말은 어쩌면 억제할 수 없이 증대하는 생체 조직, 자신이 기생하는 몸을 죽이고서야 증식을 멈추는 암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께서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사두개파 사람들을 혹독하게 비난하신 적이 있는데, 예수께서 바로 그들의 이러한 특징, 곧 그들의 구별되지 않는 철면피한 삶과 막무가내의 믿음을 두고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께서 유대인들의 감정을 한껏 건드린 대목이 생각납니다. 예수께서 평소 유대인들에게 가지고 계셨던 심한 불신의 감정을 그대로 나타내신 말씀이 있습니다. 당신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누가복음서 18:8b)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이 종교로 가득 찰지는 몰라도 "믿음"을 찾아보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임을 미리 내다보신 관찰입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계시는 동안에도 당신을 따르는 이들의 "믿음 없음"을 자주 나무라신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할 때도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마 6:30)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믿음이 적은 것"을 나무라셨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바다의 풍랑과 같은 자연의 급격한 변화를 보고서 두려워할 때도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잔잔하게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왜들 무서워하느냐?"고 나무라시면서, 그들의 "믿음이 적은 것"을 탓하셨습니다 (마 8:26).
예수께서는 당신께서 사시던 당대(當代)를 일컬어 "믿음이 없는 세대"(막 9:19)라고도 하셨고 심지어 "믿음이 없고 패역(悖逆)한 세대"라고도 하셨습니다 (마 17:17). 그리고 드디어 당신께서 세상에 다시 오시는 날, 과연,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누가복음서 18:8)고 한탄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이것을, 예수께서 유대인만을 두고서 하신 말씀이라고만 생각하진 마십시오.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는 팔레스타인에 다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다시 올 때 믿음을 볼 수 있겠느냐?"라고 하신 이 말씀은, 그렇기 때문에, 바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의 믿음에 대한 심판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나름대로 믿음에 자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유대교인이 아니다.
이슬람교인도 아니다.
불교인도 아니다.
나는 타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기독교인이다.
부패한 카톨릭교인이 아니라 종교개혁 이후에 생겨난 개신교 교인이다.
기독교의 이단 사상은 단연코 배격한다.
사도신경은 곧 나의 신앙고백이다.
이밖에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자랑할 수 있는 교조적인 항목은 얼마든지 더 첨가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믿음"을 말씀하실 때 이러한 여러 가지 항목들은 예수님의 관심 밖이었습니다. 만일 이런 것이 믿음의 기준이라면 예수께서는 결코 "내가 세상에 다시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 이 말씀 못하십니다. 이 세상은 교회로 가득 차고 이러한 고백으로 가득 찰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러한 것들이 믿음이라면, 예수님 당대의 유대교인들을 향해서 "믿음 없는 세대여"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라고 말씀 못하셨을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은 유대교로, 유대교의 정통신앙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세상에 다시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하신 이 말씀은 우리의 믿음을 반성하게 합니다. 예수께서는 도대체 어떤 믿음을 말씀하신 것입니까? 놀라지 마십시오. 마음 상하지 마십시오. 이상하게도, 참으로 이상하게도 예수께서는 이방인들, 혹은 이방 종교를 믿는 이들에게서 믿음을 보십니다. 유대인에게서 볼 수 없는 믿음을 이방인에게서 자주 확인하십니다. 이 말은 그대로 예수께서는 우리 기독교인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믿음을 비기독교인이나 타종교인에게서 확인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가버나움에 한 이방인 백부장(百夫長)이 있었습니다. 백부장은 백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있는 장교입니다. 그가 예수께 다가와서, 자기 하인이 중풍으로 집에 누워서 몹시 괴로워하고 있다고 여쭙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에게 가셔서 그를 고쳐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 이 이방인 백부장이 자기는 주님을 자기 집에 모셔들일 만한 자격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저 자기 종이 낫도록 말씀만 해주시면 된다고, 그러면 자기 종이 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고서, 무척 놀라십니다. 그래서 이 이방인을 두고서, 예수께서는 자기를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는 어느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마 8:10).
예수께서 하신 이런 말씀은 믿음이 돈독하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정통파 유대교인들에게는 참으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여기 우리 교회에 이방 사람이 와서 혹은 타종교를 가진 이가 와서 예수님과 무슨 말씀을 나누다가 예수께서 그의 믿음을 보고 놀라셔서 우리를 보시고서 내가 너희들 가운데서는 어느 누구에게서도 일찍이 이러한 믿음을 본 일이 없다고 말씀하시면 우리는 얼마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한 술 더 떠서 오히려 믿음을 지키고 있다고 자부하는 유대교인은 끝내는 구원을 받지 못하고, 반대로, 율법을 지킬 수 없어서 믿음을 인정받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이방인은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역설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만일 예수께서 우리 교회에 오셔서 우리를 보고, 기독교인은 끝내는 구원을 받지 못하고, 반대로, 타종교를 믿는 이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면 우리가 어떻겠습니까?
예수께서는 또 세상 끝 날에 많은 이방 사람들이 동양과 서양에서 하늘나라로 몰려 와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하늘 나라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지만, 이 나라 곧 유대 나라 백성은 하늘나라의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서, 거기에서 울며 원통해 할 것이라고 (마 8:11-12) 하셨는데, 예수께서 우리를 향해, 세상 끝 날에 많은 사람들이 동양과 서양에서 타종교인들이 하늘나라로 몰려 와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하늘 나라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지만, 기독교인들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서, 거기에서 울며 원통해 할 것이라고 하신다면 우리가 어떻겠습니까?
"내가 세상에 다시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하신 이 말씀은 우리의 믿음을 반성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끝없는 자기 반성이 믿음인데, 많은 경우, 반성의 끝이 믿음이 되어 버립니다. 정도(正道)를 찾는 끝없는 추구가 믿음인데, 흔하게는 추구의 끝이 믿음이 되어 버립니다. 끝없는 자기 성화(聖化)의 과정이 믿음인데, 성화의 중단이 믿음이 되어 버립니다. 끝없는 의존, 절대적인 의존이 믿음인데, 그런 순수한 믿음을 갖기에는 너무나도 풍부한 믿음의 유산을 물려받아 이 유산 외에 더 이상 의지해야할 대상을 상실한 것이 믿음이 되어 버립니다. 이렇게 하여 믿음이 단단한 바위처럼 굳어져 버리면, 사람들은 그렇게 굳어버린 믿음을 "도타운 믿음", 곧 "돈독(敦篤)한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이 아닌 것, 믿기를 포기해 버린 것, 가장 큰 불신(不信)이, 그리고 편견과 막무가내의 주장이 믿음의 옷을 대신 걸치고 나타나서 사람을 현혹시킵니다. 돈독한 믿음을 가진 신도들에게서 믿음의 부재를 쉽게 확인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내가 세상에 다시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하신 이 말씀은 우리에 대한 주님의 기대와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우리들에게서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확인하고싶어서 하신 말씀입니다. 한 편으로는 우리가 미덥지 못해서,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는 우리를 못 잊으셔서 하신 말씀이십니다.
어떤 대상이 미덥지 못한 것과 그를 잊을 수 없다는 감정이 함께 섞여 있는 대중 가요 하나를 인용하는 것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본문 이해에 결정적인 도움이 되는 자료이기 때문에 인용합니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
언덕 위에 초가 삼간 그립습니다
자주고름 입에 물고 눈물 흘리며
이별가를 불러 주던 못 잊을 사람아
같은 노래가 버전에 따라서는 끄트머리가 서로 다릅니다. "못 잊을 사람아"가 아니라 "못 믿을 사람아"라고 되어 있기도 합니다. 작사자인 김영일 씨가 처음에 어떻게 작사를 했는지 그 본래의 본문을 찾는 것을 일반 문학에서는 "본문비평"이라고 합니다. 최초의 원문을 찾는 작업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두 개의 버전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인용한 이 노래의 경우입니다. 작사자가 두 표현이 택일하기에 아쉬워 두 버전을 동시에 유포시켜 보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는 원문을 찾는 노력은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작사자의 복합적인 마음을 두 버전에서 읽어야 합니다. 택일이 아니고 동시에 보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께서 우리말 번역 성서를 보실 때 난외주에 "혹은 ...."하고 번역을 달리 한 것들이 있는데, 이것들 중에 더러가 바로 두 본문 중에 한 본문은 본문 안에 넣고 다른 한 본문은 난외주에 넣은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다시 올 때 너희가 내가 바라는 그런 믿음을 한결같이 보여줄 수 있겠느냐고 물으시는 것은, 내가 어찌 너희를 잊겠느냐는 황송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늘 신실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사랑의 신실성을 재어 보는데는 구태여 하나님에게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연인 사이의 사랑, 부부 사이의 사랑, 친구 사이의 사랑 등에서 그 사랑의 한계를 보고서도 얼마든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이런 사랑을 받고 싶어하십니다. 우리의 부서지기 쉬운 연약한 믿음마저 받고 싶어하십니다.
하나님이 반역한 백성을 사랑하시다
1 이스라엘이 어린 아이일 때에,
내가 그를 사랑하여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냈다.
2 그러나 내가 부르면 부를수록,
이스라엘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갔다.
짐승을 잡아서 바알 우상들에게 희생 제물로 바치며,
온갖 신상들에게 향을 피워서 바쳤지만,
3 나는 에브라임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었고,
내 품에 안아서 길렀다.
죽을 고비에서 그들을 살려 주었으나,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4 나는 인정의 끈과 사랑의 띠로
그들을 묶어서 업고 다녔으며,
그들의 목에서 멍에를 벗기고
가슴을 헤쳐 젖을 물렸다.
5 이스라엘은 이집트 땅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다. 그들이 나에게로 돌아오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6 전쟁이 이스라엘의 성읍을 휩쓸고 지나갈 때에, 성문 빗장이 부서질 것이다. 그들이 헛된 계획을 세웠으니 칼이 그들을 모조리 삼킬 것이다.
7 내 백성이 끝끝내 나를 배반하고,
바알을 불러 호소하지만,
그가 그들을 일으켜 세우지 못할 것이다.
8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원수의 손에 넘기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처럼 버리며,
내가 어찌 너를 스보임처럼 만들겠느냐?
너를 버리려고 하여도,
나의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구나!
너를 불쌍히 여기는 애정이
나의 속에서 불길처럼 강하게 치솟아 오르는구나.
9 아무리 화가 나도, 화나는 대로 할 수 없구나.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망시키지 않겠다. 나는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너희 가운데 있는 거룩한 하나님이다. 나는 너희를 위협하러 온 것이 아니다.
({표준새번역} 호 11:1-9)
우리가 미덥지 못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를 잊지 못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믿음은 끝없는 자기 반성입니다. 믿음은 정도(正道)를 찾는 끝없는 추구입니다. 믿음은 끝없는 자기 성화(聖化)의 과정입니다. 끝없는 의존, 절대적인 의존이 믿음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살아 있는 생명이어야 합니다. 믿음이 단단한 바위처럼 굳어져 버리면 그 믿음은 죽어 불신의 시체로 남습니다. 불신(不信)이 믿음을 가장하듯, 진정한 믿음은 연약해 보이고, 늘 믿음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흔히들 말하는 믿음 없는 사람들, 믿음을 포기해 버린 사람들이란, 많은 경우, 믿음으로 가장한 바위 같은 불신의 성도들에게 짓눌려서 질식한 사람들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늘 "우리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십시오!"하고 비는 믿음입니다.
명상
여러분은 믿음이 약한 이를 받아들이고, 그의 생각을 시빗거리로 삼지 마십시오. (표준새번역 롬 14:1)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약한 사람들을 얻으려고,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모든 것이 다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가운데서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표준새번역개정판} 고전 9:22)
여러분은 자기가 믿음 안에 있는지를 스스로 시험해 보고, 스스로 검증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모른다면 여러분은 실격자입니다. ({표준새번역개정판} 고후 13:5)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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