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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체험

시편 한완상............... 조회 수 1693 추천 수 0 2008.08.07 07:48:21
.........
성경본문 : 시137:1-4 
설교자 : 한완상 형제 
참고 : 새길교회 2002. 3. 3 주일설교 
시편 137:1∼4, 누가 4: 16∼30

새 천년을 맞이한 지 벌써 두 해, 세계적으로나 우리의 형편으로 보나, 기독교와 교회의 상태는 더욱 낡은 모습이요, 딱한 모습 같습니다. 그 낡음이 위기의 징후이기도 합니다. 위기의 겉모습, 곧 현상의 위기 징후만을 보아도 기독교와 교회가 이제 한계에 다다른 듯 합니다. 확장주의적 선교가 벽에 부딪힌 듯 합니다. 전투적 십자군식 전도와 선교는 심각하게 반성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간 양적 팽창 속에서 지속되어온 反지성적 교회풍토와 신자들의 기복적 신앙도 교회 위기의 징후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경직되고 불투명한 교회운영과 교회 지배 구조도 위기의 징후를 지속적으로 키워온 셈입니다. 이같은 현상은 한마디로 교회의 양적 성장 둔화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수 백년 간 서구 교회가 유령화 되어가면서 기껏해야 문화재로 남게 되는 과정을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하기야 한국교회는 문화재적 가치마저 전혀 못 갖고 있으며, 그 위기는 더욱 걱정스러운 수준이라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가 더욱 냉철하게 반성해야 할 위기는 현상적 위기와 그에 따른 양적 쇠락이 아닙니다. 그것은 보다 본질적 위기입니다. 전통적 교리와 기독교제도로부터 유배당한 현대 및 탈현대(post-modern)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겪게 되는 질적 위기입니다. 전통적 유신론의 개념과 그 준거틀(frame of reference)이 먹혀들지 않는 상황에서 기독교와 교회가 겪게 되는 위기입니다. 참으로 양심적이고 용기 있는 성공회 감독 Spong 박사는 바로 이같은 질적 위기를 직시하고,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기독교와 교회는 근본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은 주일학교의 tea party에 불과합니다.
21세기에서 기독교의 생존을 위해서는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지난 수 천년 간 기독교를 밑받침해온 초자연적 유신론의 틀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기독교가 변화되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음을 용기 있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까닭은 오늘의 기독교 신자들은 초자연적 유신론으로부터 추방당한 상황, 곧 그 틀에서 유배한 새로운 환경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유배지의 상황과 유배의 체험은 어떠한 것입니까?

유배지 체험과 그 처절한 상황의 원형은 유대인의 바벨론 포로 경험(B.C. 588∼586)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시 신흥강대국이었던 바벨론은 그때까지만 해도 난공불락으로 신성시되었던 예루살렘을 침공했습니다. 예루살렘을 점령당하고, 성지는 유린되었으며, 하나님의 집, 그 거룩한 지성소 성전은 이방군대에 의해 무참하게 짓밟혔습니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소중하게 여겼던 모든 것들이 처참하게, 휴지같이 구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총체적 정체성, 곧 종교·정치·사회·문화의 正體性(identity)이 허무하게 무너지는 아픔을 겪게 되었습니다.

특히 선민인 유대 민족을 그토록 도탑게 보호해주셨던 만군의 총사련관 야훼 하나님께서 그들의 비참한 처지에 대해 침묵하심에 대해 경악과 당혹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겠지요. 왕의 눈알이 빠지게 되고, 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이 굴비처럼 줄줄이 묶여 괴롭고 긴 포로의 길을 걸어가지 않을 수 없었던, 그 엄청난 민족적 수치를 당했던 것입니다. 포로로서 유배지 바벨론으로 끌려가면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수백번, 수천번 이렇게 처절하게 외쳤을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 만군의 야훼 하나님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출애굽의 하나님은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기에 이토록 우리의 처지에 대해 침묵하고 계십니까?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바벨론 군인들은 짖궂게 유대인 포로들을 놀려대면서 노래 한 가락을 불러보라고 윽박질렀습니다. 바로 이러한 정황을 오늘의 본문 시편 137편은 잘 증언해줍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여,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낯선 유배지에서, 그 뿌리뽑힌 처절한 이방인의 땅에서, 그것도 전통적 유대 부족신의 무력함을 온몸으로 겪고 있는 상태에서 어찌 즐겁고 신나게 이스라엘 수호신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겠습니까? 유대인들의 신, 곧 그들의 부족신(tribal God)의 죽음을 뼈저리게 체험했던 유배지 사람들은 불가피하게 새로운 방식으로 그들의 생존의 새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유배지 체험의 한 원형이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근대와 현대에 와서 우리가 겪게 되는 유배지 상황은 어떠한 것입니까? 다시 말해, 성서의 세계관과 그 준거틀에서 끈질기게 우리를 추방시켜온 근대적 경험은 어떤 것입니까? 성서에서 표현되는 하나님은 외부에 존재하는 막강한, 전지전능하신 분으로서, 밖으로부터 우리 속으로 개입하시는 신입니다(God as an external power and invasive deity). 이러한 초월적, 초자연적 힘으로서의 하나님을 무력화시키거나 쓸모 없는 존재로 격하시킨 근대적, 현대적 사건은 어떤 것들입니까?

몇가지만 열거해 보겠습니다. 먼저 코페르니쿠스의 발견이 성서의 〈3층우주구조〉우주관을 해체시켰습니다. 그러기에 코페르니쿠스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갈릴레오도 그러했지요. 코페르니쿠스를 정죄 했던 바티칸은 1991년 12월 18일에 와서야 너무나 뒤늦게 그 잘못을 시인했습니다. 이제 천당, 세상, 지옥이 3층을 이루고 있으면서 하나님은 2층에, 우리는 1층에, 죄인은 지옥인 지하 1층에서 산다는 생각은 낡아버린, 쓸모없는 세계관입니다.

뉴턴은 어떻습니까? 그는 개인적으로는 착실한 크리스쳔이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기 임무를 "자연이라는 책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분별하는 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연구 결과가 알려지면서 〈저 위에 계신 하나님〉또는 〈저 밖에 계신 하나님〉이 세계와 우주의 현상에 개입하시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자연 법칙에 따라 우주와 세계가 움직인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여기에 다윈과 프로이드의 발견을 덧붙이게 되면 성서의 유신론적 세계관은 더욱 타격을 입게 됩니다. 게다가 질병이 죄로 인해 생긴다는 성서의 이해도 이제는 부적절한(irrelevant)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개인의 일거수 일투족에 대해 일일이 도덕적 평가를 내려 점수를 메겨두었다가, 점수 낮은 사람을 질병으로 징벌하시는 초자연적 신은 이제 더욱 쓸모 없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근대와 현대를 거치면서 성서의 세계관으로부터 계속 유배당해온 셈입니다.

현대에 와서 가장 결정적인 역사적 유배 체험은 아마도 독일 나찌의 대학살(Holocaust) 사건이 아니겠습니까. 초월적이고, 초자연적이며, 전지전능하신 총사령관 하나님이 유대인들의 처절한 죽음에 개입하시지 않고 있음을 유대인들로 하여금 너무 뼈저리게 느끼게 한 사건이 바로 히틀러의 대학살 사건입니다. 이 때를 Wiesel(노벨 평화상 수상자) 박사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는 강제 수용소에서 생사람을 태워 죽이면서 뿜어내는 굴뚝의 연기를 보면서 "나의 믿음을 영원히 소멸시켜버린 그 불길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정말 처절하리만큼 정직한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나의 하나님을 살해하고 나의 영혼을 죽이고 나의 꿈을 티끌로 바꿔버린 그 순간들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나는 내가 비록 저주를 받아 하나님 자신만큼 오래 살게 된다 하더라도, 이런 일을 결코 잊을 수 없다. 결단코." 라고 그는 증언했습니다.

위젤 박사가 감금되어 있을 때, 강제수용소의 발전소가 폭파된 사건이 생겼습니다. 세 사람의 용의자가 체포되었습니다. 그중 소년도 있었습니다. 그는 슬픈 눈을 가진 천사처럼 아름다운 야윈 소년이었습니다. 두 어른은 교수대에서 곧 숨을 거두었으나, 이 야윈 소년은 몸이 가벼워서 교수대 줄에 목이 메어 매달린 채 30분 이상 몸부림쳤습니다. 그때 누구인가 이렇게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어디 계신가?" 이 외침은 B.C. 586년경 눈알이 빠진 채 굴비처럼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가던 유대인들이 외쳤던 정직하고 처절한 외침의 반복이기도 했습니다. 이때 위젤 박사는 자기의 깊은 곳에서 저절로 터져 나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바로 여기에 있지. 하나님은 지금 저 교수대에 매달려 버둥거리고 있지."

교수대에서 매달려 죽고 있는 하나님. 그는 바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이기도 합니다. 이 모습은 결코 만군의 사령관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만의 수호신은 부족신은 교수대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삭막한 유배지에서 살고 있습니다.

저는 저의 조그마한 유배지 체험을 나누고 싶습니다.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뒤 나는 천사처럼 순진한 한 동기생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한종수(韓宗洙)였습니다. 그는 불우했던 과거를 갖고 있었습니다. 고아처럼 자랐습니다. 그는 육손이어서 손을 항상 주머니에 넣고 다녔는데 악수할 때마다 어색한 아픔을 느끼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너무나 착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강의실에서는 강의 시작 전에 항상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대학 2학년이 되면서 가슴 벅찬 기쁨으로 항상 웃으면서 건강하게 살았습니다. 연세대 간호학과의 아리따운 여학생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육손이라 군대도 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미국 유학도 우리보다 더 빨리 갈 수 있었습니다. 당시 세계적 사회학자인 하바드 대학의 탈콧 파슨스(T. Parsons) 교수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하바드 대학에 유학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모두 기뻐하고 축복해주었습니다. 종수군의 지난날이 어둡고 을씨년스럽고 괴로웠다면, 그의 현재와 미래는 너무 밝고 신났습니다. 헌데 그가 미국으로 떠나기 며칠 전 강원도에 살고 있는 친척을 만나고 서울로 돌아오다가, 그만 청량리역에서 사고를 당했습니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기차 입구에 있는 손잡이를 잡고 몸을 앞뒤로 흔들다가 머리가 시멘트 교각에 부딪혔습니다. 시설이 열악했던 청량리 역 허름한 의원에 긴급 입원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우리는 병원에 달려가 보니 그는 철창 침대를 잡고 외마디 소리를 계속 지르면서 몸부림쳤습니다. 지금 같으면 그는 나았을 것입니다. 그가 부자였다면 좋은 병원에 가서 치료받아 완쾌되었을 것입니다. 너무나 억울한지, 그는 애타게 애인 이름을 부르기도 하고, 유학 얘기도 하는 듯 하면서 몸부림쳤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저는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왜 종수를 저렇게 죽게 내버려 두십니까?" 하고 외쳤습니다. 그의 시체를 승동교회 묘지에 우리 손으로 묻으면서 친구 넷은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찬송을 울면서 불렀습니다. 그때 내 신앙은 휘청거렸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종수군이 그토록 믿었고 매달렸던 하나님은 끝내 종수의 절규와 우리의 기도에 무응답으로 일관했습니다. 잔인하게 침묵하셨습니다.

이 체험은 저에게 조그마한 유배지 체험이 되었습니다. 그후 20년이 흘러 저는 정말 미국땅에 망명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유배지의 삶을 살면서 아내는 교회 전도사로 봉사했습니다. 이때 저희들은 미국이민국으로부터 추방청문회를 앞두고 나날을 불안하게 보내고 있었습니다. 삶의 출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러 곳에 취직을 알아보았으나 모두 실패했습니다. 이때도 저는 조그마한 유배지의 삶을 체험하며 살았습니다. 밖에서 안으로 개입하는 하나님의 무응답에 대해 곤혹스러워하면서 나의 삶
의 바로 유배지의 삶이었구나 하고 새삼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같은 유배지 상황에서 우리는 절망해야 합니까? 아니면 침묵하는 외부신, 초월신, 초자연적 신을 넘어서는 일은 가능한가요? 여기서 우리는 성서기자들이 비록 당시의 유신론적 관점에서 그들의 하나님 체험을 유신론적 언어로 표현했다 하더라도, 그 하나님 체험 자체는 참으로 소중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상황, 유배지의 상황에서 그들의 하나님 체험을 추체험(追體驗)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존재 깊숙한 곳에 이미 와 계신 하나님의 현존을 새롭게 체험해야 합니다. 특히 예수님의 하나님 체험과 바울의 그리스도 체험이 너무나 소중하기에 비록 그 체험에 대한 언어적 표현이 낡은 유신론적 옷을 입고 있다 하더라도, 오늘의 우리 상황(post-modern)에서 우리는 그 체험을 다시 체험해야 합니다. 먼저 예수님의 하나님 체험의 듯을 오늘 이 시대 우리의 상황에서 다시 한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전통적 부족신을 과감하게 해체하셨습니다. 온갖 부당한 장벽을 쌓아올리는 유대주의식 하나님을 거부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나님은 사랑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종족간의 벽, 계급간의 벽, 남녀간의 벽, 종교간의 벽을 예수는 허무셨습니다.

먼저 예수의 광야 체험을 보면, 그는 권력, 금력, 마력(초능력)의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권력신, 금력신, 마력의 신을 거부하신 것이지요. 이것들은 모두 잘못된 장벽들을 쌓는 힘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러합니다. 이 유혹을 성령의 힘으로 이기시고 예수님은 귀향하셨습니다. 성령의 힘은 예수님 안에 내재하시는 하나님의 힘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장벽을 허무는 힘이었습니다. 그래서 참된 공동체를 엮어내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귀향하신 예수님의 첫 말씀 증언은 이사야 선지자의 하나님 체험을 추체험하는 일이었습니다.(이사야 61:1∼2) 당시 로마 식민지 밑에서 유대인들은 로마의 도시화정책과 헬레니즘화 정책으로 시달렸습니다. 게다가 민중은 중과세 부담으로 신음했습니다. 몰락한 농민과 빈민, 가치관 혼란으로 방황하던 민중은 희망을 상실했습니다. 이러한 정황에서 예수님은 주변부로 밀려난 민중, 장애인, 빈민들에게 희망의 공동체를 비전으로 제시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서 61장 2절을 읽으시다가 잠시 주춤하신 듯 합니다. 원래 2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여기 신원의 날이란 원수갚는 날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 증언의 근거가 되는 본문에서,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라는 구절을 읽지 않고 넘어갔습니다. 이것은 확실히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입니다. 이사야의 하나님 체험을 추체험 하시면서 전통적인 유신론적 신, 곧 복수의 신을 거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하나님은 사랑의 힘이지 복수의 증오심이 아니었습니다. 복수는 또 다른 악순환을 촉발시키며, 또 다른 고통의 장벽을 세우는 것입니다. 예수의 하나님은 고통의 벽을 허물고 인간과 공동체를 온전케 하며 건강하게 만드는 분이십니다. 예수의 하나님은 생명의 원천이며 존재의 근거입니다. 사랑으로 그 존재를 확장시켜 주고, 사랑으로 생명을 더 온전케 하는 분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은 밖에서 개입하시기보다 안에서 뜨겁게 살아 계시는 분이십니다. 개인 속에서, 공동체 속에서 살아 움직이면서 인간존재와 생명을 더욱 맑고 밝게 확장시켜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하나님 체험의 증언을 들었던 고향 사람들은 처음에는 감동하여 놀랐으나, 곧 그를 경멸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복수하는 유대 부족신에 대한 예수님의 거부가 그들로 하여금 예수를 거부하게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더욱 단호하고 명료하게, 부족신의 이미지를 해체시킵니다. 예수의 하나님은 결코 〈팔이 안으로 굽는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존경했던 예언자 엘리야는 3년 반 동안 기근으로 백성이 시달릴 때,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그 많은 이스라엘 과부들을 제쳐두고 하필이면 이방지역인 사렙다의 과부를 돌보았음을 예수님은 상기시켰습니다. 또 다른 존경받았던 에언자 엘리사는 많은 유대인 문둥병 환자들을 돌보지 않고 이방인 장군 나아만의 문둥병을 치료해 주었음을 짐짓 상기시켰습니다. 고향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격분하여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예수님은 탈부족신(脫部族神) 곧 사랑의 하나님을 증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3脫〉의 삶을 소중한 삶으로 친히 사셨습니다. 탈고향중심주의, 탈가족중심주의, 그리고 탈소유중심주의였습니다. 이 세가지 '脫' 삶이 갖는 현대적 의미를 우리는 하나님 체험과 더불어 깊이 음미해 볼 가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체험이 얼마나 새로운 것이며 '과격한' 체험인지를 우리는 항상 새롭게 경탄하면서 깨달아야 합니다. 한 가지 보기만을 들어보겠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비유를 보면 예수님의 하나님은 파격적인 신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영생을 얻는 길인데,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에게 사마리아인은 이웃이 아니며, 또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에게 이웃 노릇해서도 안되었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간에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장벽을 허무셨습니다. 이 비유의 마지막은〈너도 가서 그렇게 하라〉 라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이 명령은 너희들 유대인들도 사마리아인처럼 행동하고, 사마리아인처럼 사고, 사마리아인이 되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영생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혁명적 발언이었습니다. 정말 그 발언은 유대인 제사장과 레위인의 입장에서 보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촉구하는 '불온한' 발언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나님 체험은 바로 사마리아인의 사랑 체험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초월자로서 외부에 계시면서 유대인만의 구원과 영생을 위해 현실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사마리아인의 사랑 실천의 삶 속에 이미 깊이 녹아 있는 內在神이라 하겠습니다.

이제 새길공동체는 열 다섯 살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새로운 다짐으로 새 길을 더욱 올곧게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첫째,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일종의 유배지 상황임을 정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유배지의 삶을 살면서 보다 정직하게, 보다 용기 있게 하나님을 체험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체험을 추체험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정직과 용기가 필요합니까? 그것은 낡은 교리로 무장한 기독교와 교회제도가 정직과 용기를 끈질기게 방해하고 박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계속 벽을 쌓아 올리기 때문입니다. 15년 전 새길공동체는 이 벽을 허물기 위해 태어났음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Robinson 감독의〈하나님에게 솔직히(Honest to God)〉정신이 더욱 저희들에게도 필요합니다. Funk 교수의 〈예수님에게 솔직히(Honest to Jesus)〉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 체험을 뜨겁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존재의 깊이 속에 이미 와 계심을 뜻합니다. 전통적 유신론의 틀을 벗어날수록 하나님 체험은 더욱 직접적 체험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직접 체험하는 것은 또한 남을 사랑하기 위해 스스로 비우는 빈 공간에 하나님께서 직접 즐겨 찾아오신다는 것을 체험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존재의 중심이 사랑으로 비워있을 때, 바로 그 빈곳에 항상 즐겁게 자리잡고 계신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시오, 예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 존재의 근거요, 우리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사랑이 작동할 때 존재와 생명은 더욱 확장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현존은 사랑 속에서 더욱 넓어지고 깊어집니다. 여기서 초월과 내재는 동전의 양면에 불과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체험과 그리스도체험은 시간 속에서 영원을 체험하게 합니다. 그것은 황홀한 체험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황홀함은 결코 탈역사적인 환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신비한 영원체험은 역사 속에 버티고 있는 온갖 구조적, 잘못된 장벽들을 허물어내는 실천적 효과를 가져옵니다. 마치 예수님의 성령이 그렇게 했듯이 말입니다. 즉 하나님 체험은 한편으로 영원으로 잇대어주는 황홀한, 초월적 경험이 되면서 동시에 그것은 역사적 변혁으로 이어집니다. 열 다섯 살 먹은 새길교회는 이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직접 체험하면서 그것이 역사적 변혁과 어깨동무한다는 진리를 새롭게 깨달아야 합니다. 열 다섯이 되면서 우리 공동체 안에 아직도 남아있는 장벽들이 무엇인지 찾아내어 그것을 제거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밖에 추악하게 버티고 있는 장벽들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아마다 가장 끈질기게 우리를 분열시켜온 장벽은 민족분단을 합리화해온 장벽일 것입니다.

이제 열 다섯 살 먹은 새길교회는 시간 속에서 살면서도 영원으로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의 길을 더욱 올곧게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낡은 교리와 제도의 틀을 깨고, 직접 하나님과 예수님을 체험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해야 할 것입니다. 이 체험을 통해 부당하게 갈라져서 병든 인간들과 집단들이 온전케 되어 하나님나라의 삶이, 곧 존재와 생명이 사랑으로 확장되는 공동체의 삶이 이뤄지길 바랍니다. 새길교회가 새 길을 걸어가려면 바로 직접 하나님을 체험하고, 예수의 하나님 체험을 끊임없이 추체험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따르미의 삶이란 다름 아니라 바로 이러한 삶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삶을 산다면 낡은 유신론의 개념과 틀, 그리고 그것이 근거한 교리는 무의미해지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그러한 삶은 하나님의 초월과 내재를 동시에 체험하게 하며 영원과 시간을 잇대어 살게 하며, 나아가 기도와 사랑, 실천을 항상 연결시키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유배지에서 보다 아름답게, 보다 보람있게 사는 크리스쳔의 삶일 것입니다. 새길공동체는 바로 그러한 삶을 바라며, 그러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시간 속에서 영원을 향해 오늘도 순례의 길을 걸어가게 하소서.
하나님의 현존을 느기며 기쁘게 순례의 길을 걸어갈 때,
가는 곳마다, 가는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가 확장되고
인간의 존재와 생명이 확장되는 사건이 펼쳐지게 하소서.
시간 속에 영원을 체험하면서
우리 존재 깊은 곳에 이미 와 계신 하나님을 체험하면서
우리 주변의 온갖 잘못된 장벽을 허무는 일에 앞장서는
새길공동체, 열 다섯 살 먹은 새길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저희들에게 항상 희망과 용기를 정직하게 알려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 아름답고 능력있는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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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5 출애굽기 축제도 고통도 함께 하는 공동체 출15:19-21  최만자 자매  2008-08-08 2462
1234 마태복음 조건 없는 사랑 마25:31-46  차옥숭 자매  2008-08-08 2853
1233 요한복음 놀이는 인생, 인생은 놀이 요3:16  길희성 형제  2008-08-08 2417
1232 출애굽기 진창길과 기적 출14:21-25  김준우 목사  2008-08-08 2321
1231 민수기 살듯이 죽기(In Death as in Life) 민20:1  최창모 교수  2008-08-08 2658
1230 고린도전 사랑, 그 난해한 수수께끼 고전13:11-13  차정식 교수  2008-08-08 2140
1229 마태복음 폭행 당하는 하늘나라, 꽃씨 뿌리는 예수 마11:12  정경일 형제  2008-08-08 2457
1228 요한복음 종교는 비우고, 사랑은 채워야 요2:1-12  한완상 형제  2008-08-08 2297
1227 창세기 나무 이야기 창2:8-9  박경미 교수  2008-08-08 2161
1226 마태복음 선과 악을 어찌할 것인가? 마5:43-48  길희성 형제  2008-08-08 2189
1225 사도행전 부활의 역사 행4:1-22  한인철 목사  2008-08-07 2158
1224 요한복음 어떤 시작 요6:8-11  김민웅 목사  2008-08-07 2682
1223 요한복음 아무런 기억을 지니지 않는 이들 요3:1-9  강남순 교수  2008-08-07 2267
» 시편 하나님 체험 시137:1-4  한완상 형제  2008-08-07 1693
1221 갈라디아 깨어질 수 없는 거울 갈5:1, 22-24  이정배 목사  2008-08-07 2051
1220 마태복음 봉사의 삶 마25:31-46  윤공부 목사  2008-08-05 2296
1219 에스겔 황금불상, 누런 가사, 킬링 필드 겔37:1-14  길희성 형제  2008-08-05 2332
1218 누가복음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눅18:8  민영진 목사  2008-08-05 3991
1217 시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하나님을 체험하다 시23편  한완상 형제  2008-08-05 2275
1216 누가복음 하나님 인식의 척도 눅7:36-50  박충구 목사  2008-08-05 1956
1215 고린도후 화해시키는 임무 고후5:17-19  김종일 형제  2008-08-05 1752
1214 시편 창조의 영성 시95:1-7  서창원 목사  2008-08-05 2011
1213 마태복음 임마누엘의 의미 마1:18-25  김준우 목사  2008-08-05 3149
1212 호세아 백발에는 염색을 [2] 호7:8-9  최창모 교수  2008-08-05 2306
1211 마태복음 예수따름이: 고정관념 깨기 마8:2-4  조혜자 자매  2008-08-05 2158
1210 마가복음 하느님의 꿈 막10:23-27  한인철 목사  2008-08-04 1914
1209 출애굽기 적을 위한 윤리가 필요한 시대 출21:23-25  최만자 자매  2008-08-04 1948
1208 마태복음 내 빚을 갚으라 마18:23-35  김광수 목사  2008-08-04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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