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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역사

사도행전 한인철 목사............... 조회 수 2155 추천 수 0 2008.08.07 07:5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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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4:1-22 
설교자 : 한인철 목사 
참고 : 연세대학교 교목 / 새길교회 2002. 3.31 주일설교 
I.

저는 오랫동안 부활절 아침 설교를 들을 때마다 소외감을 느끼곤 했습니다. 목사님은 부활절 때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고 격앙된 목소리로 외치시는데, 저에게는 예수가 부활했다는 말이 공허하게 들리고 별다른 느낌을 주지 못했습니다.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식이 과연 좋은 소식인지도 모르겠고, 또 설사 좋은 소식이라 해도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사도행전 초반에 나오는 베드로의 변화과정을 보면서 부활의 역사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조금씩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이것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II.

흔히 예수의 부활사건은 예수 한 개인에게서 일어난 객관적인 사건으로 이해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초반을 잘 읽어보면, 부활은 예수의 부활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제자들의 부활이라는 것을 곧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 특별히 베드로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되살아나는 경험 없이 예수의 부활을 말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의 부활과 제자들의 부활은 사실상 하나의 부활사건의 양면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III.

예수께서 유대인의 왕을 자처했다는 반역의 죄목으로 십자가에 처형되고 상당한 기간이 지났을 때의 일입니다. 예수가 체포되는 순간 모든 제자들은 이미 예수를 버리고 지하로 잠적했습니다. 체포된 예수의 뒤를 따르던 어떤 젊은 제자는 자기를 체포하려 하자, 둘렀던 홑이불을 벗어 던지고 맨몸으로 도망갔다고 합니다(막 14:51-52). 모두가 예수를 버릴지라도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던(막 14:29) 베드로 역시도, 예수와 한 패가 아니냐고 묻는 대제사장 하녀의 물음에 세 번씩 부인하고는, 예수가 처형된 골고다 현장에는 얼굴조차 내밀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지하로 모습을 감추었던, 보다 정확히 말해 예수와 한 패라는 사실 때문에 자신들에게 불어닥칠지 모를 위험을 피해서 도망갔던, 바로 그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일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때는 오순절, 베드로와 제자단 120여명이 예수의 십자가 처형 이후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모인 자리에서, 베드로가 연설을 합니다. 저는 이 날의 연설을 "오순절 성명서"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베드로의 오순절 연설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관련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처음으로 공식 천명한 요즈음의 성명서와 비슷한 성격을 갖는다는 말입니다. 베드로의 요지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죽인 것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리기는 했지만, 바로 자기 자신들이었다는 것(행 2:23),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 예수를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다시 살려내셨다는 것(행 2:36), 그래서 우리들은 이제 회개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후, 죄를 용서받아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2:38). 이 설교는 형식상 청중을 향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실상 베드로 자신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순절 연설로서 베드로는 이미 이전의 베드로가 아닌, 전혀 달라진 새 사람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참된 변화는 그 후에 일어난 한 사건에서 현저하게 드러납니다. 오순절 연설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예수의 이름으로 일으킵니다. 이러한 기적은 예수가 이미 행했던 일이었지만, 이 사건이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얼마 전 유대인의 왕을 사칭한 반역죄로 십자가형에 처해진 그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졌다는 것입니다. 청중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둘러싸자, 베드로가 청중들을 향해 말합니다. "여러분은 일찍이 그를 넘겨 주었고, 빌라도가 그를 놓아 주기로 작정했을 때에도, 여러분은 빌라도 앞에서 그것을 거부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거룩하고 의로운 그를 거절하고 살인자를 놓아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증언하는 증인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예수의 이름이, 여러분이 지금 보고 있고 또 잘 알고 있는 이 사람을 낫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의 이름을 믿는 믿음에 힘입어서 된 것이니, 예수로 말미암아 그 믿음이 이 사람을 여러분 앞에서 이렇게 완전히 성하게 한 것입니다."(3:13-16) 베드로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당신들이 예수를 죽였는 데, 하느님께서는 그를 살리셨고, 다시 사신 예수가 지금 앉은뱅이를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즉석 연설은 여러 가지 점에서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우선은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는 행위를 통해 예수의 치유행위를 계승하고 있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노출시켰다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자신의 치유행위를 반역죄로 처형된 예수의 이름으로 행했다는 점입니다. 셋째는 로마총독부와 헤롯과 예루살렘 성전 당국이 반역죄로 처형한 예수를 거룩하고 의로운 자로 지칭했다는 점입니다. 이것으로서 베드로는 예수에 대한 자신의 관계와 입장과 정체를 분명히 했고, 그럼으로써 당연히 따라오게 될 위험 앞에 자신을 완전히 노출시켰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모습은 당국자들이 죽인 예수가 베드로의 가르침과 삶을 통하여 완전하게 되살아났다고 볼 수 있는 아주 단적인 증거였다고 생각합니다.

드디어 베드로와 요한이 치유하고 설교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제사장들과 성전 수위대장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현장에 나타났고, 급기야 그들을 체포했습니다. 죄목은 "예수의 부활을 내세워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선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행 4:2). 일상적으로 말하면, 부활은 누구에게나 기쁜 소식입니다. 누구라도 죽음으로 인생이 끝나는 것은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을 체포한 사람들에게 있어 예수의 부활소식은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분명 불길한 소식이었습니다. 예수가 육체적으로 부활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의 부활 선언은 이미 그것 자체로서 충분히 불길한 소식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공모하여 반역죄로 죽인 예수가 지금 제자들 가운데서 살아서 그 영향력을 강력히 행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 안나스와 대제사장 가문에 속한 고위 제사장들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묻습니다. "그대들은 대체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였소?"(행 4:7) 얼핏 들으면 궁금해서 묻는 듯 하지만, 이것은 일종의 취조에 해당합니다. 예수의 권세와 예수의 이름으로 이 모든 일을 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체포되고 처벌될 충분한 사유가 될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합니다. "우리가 오늘 신문을 받는 것이,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과, 또 그가 누구의 힘으로 낫게 되었느냐 하는 문제 때문이라면, 여러분 모두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람이 성한 몸으로 여러분 앞에 서게 된 것은,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하나님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서 된 것입니다. 이 예수는 '너희, 집 짓는 사람들에게는 버림받은 돌이지만,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입니다. 예수 밖에는, 다른 어떤 이에게서도 구원은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이름은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들 가운데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는 달리 없습니다."(행 4:9-12)

베드로는 예수를 죽인 것은 바로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단이요, 자신은 바로 그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일으켰다고 당당하게 주장합니다. 제사장단이 베드로의 부활선포를 불길하게 여기고 두려워했던 것은 부활한 자가 다름 아닌, 자신들이 공모하여 십자가에서 죽인 예수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죽인 그 예수가 지금 다시 살아나서, 치유의 역사가 그의 이름으로 계속된다면, 그것은 십자가형이라는 극약처방으로 예수를 제거하고 그 집단을 붕괴시키려는 그들의 전략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예수를 왕을 사칭한 내란음모자로 십자가형에 처했는 데, 베드로와 요한은 지금 그러한 자신들 앞에서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 밖에는 없다"고 당당하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위험천만한 행동이지만, 얼마나 의연하고 당당합니까? 흔히는 이 구절을 타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배타성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지금 이렇게 말함으로써 제사장단이 내란음모자로 몰아 죽인 예수와 자신들이 하나임을 주장함으로써 비장한 각오로 순교를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었던 제자들이 다시 살아나는 위대한 역사의 한 장면입니다. 이어지는 4장 13절에 보면,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본래 배운 것이 없는 천한 사람인 줄 알았는 데, 이렇게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했습니다. 얼마 전 예수의 체포와 심문과정 속에서 보여준 이들의 나약하고 비굴했던 행동을 생각한다면, 이들의 말과 행동은 정말 깜짝 놀랄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깜짝 놀랄 일은 계속됩니다. 제사장단이 이들을 가둘 명분을 못 찾아 앞으로는 누구에게도 예수의 이름으로는 절대 말하거나 가르치지 말라고 훈계하고 훈방조치하려 하자, 이들은 한술 더 떠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가를 판단해 보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행 4:19-20) 제사장단이 한국사람이었다면, 이 말을 듣고 틀림없이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겁대가리없는 놈들, 조금만 기다려라. 조직의 뜨거운 맛을 보여주마." 풀려난 두 사도는 곧바로 다른 사도들에게 사건과정을 설명해주고 모여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사실,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가 이방 사람과 이스라엘 백성과 한패가 되어, 이 성에 모여서, 주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대적하여, 주님의 권능과 뜻으로 미리 정하여 두신 일들을 모두 행하였습니다. 주님, 이제 그들의 위협을 내려다보시고, 주님의 종들이 참으로 담대하게 주님의 말씀을 말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주께서 능력의 손을 뻗치어 병을 낫게 해주시고, 주님의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표적과 기적이 일어나게 해주십시오."(행 4:27-30)

예수를 반역죄로 십자가에 처형한 장본인들이 아직 버젓이 살아있고, 그들이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단에게서 빌미를 찾고있는 상황에서, 예수를 거룩하고 의로운 분으로 지칭하고, 그의 이름으로 예수의 치유행위를 계승한다는 것, 그러면서 너희들은 예수를 죽였지만, 하느님은 그 예수를 다시 살리셨고 그 예수가 우리 가운데 우리와 함께 한다고 선언하는 일은 가히 순교를 각오하는 용기가 없고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위협이 엄연히 현존하고 있는 바로 그 곳에서, 이에 굴하지 않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면서, 그 한가운데로 나아갑니다.

니이체는 기독교에 예수 이 외에 기독교인은 단 한 사람도 없다고 단언했지만, 저는 또 한 사람 베드로를 추가하고 싶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베드로는 후에 체포되어 십자가형이 주어졌을 때, 너무 송구스러워 자청하여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고 합니다. 예수가 체포되어 처형되는 순간에는, 정말로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던 그 예수가 이제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의 당당한 삶과 죽음의 모습을 통해 부활한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와 예수는 둘이 아니요 하나가 된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 그리스도인됨의 참된 비의가 있다고 봅니다.

IV.

흔히는 베드로의 오순절 사건을 성령체험 사건으로 설명합니다. 그것 자체는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체험이 단순히 방언을 말하는 체험으로 치부되는 것은 분명한 언어도단입니다. 제자들이 방언을 말하는 현상을 놓고 사람들이 "새 술에 취했다"(2:13)고 말한 것은 중요한 암시를 제공합니다. 이들은 분명 새 술에 취했습니다. 술은 사람들에게 일상적으로 가질 수 없는 삶의 용기를 제공합니다. 제자들이 갖게 된 새로운 용기는 방언을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과 삶을 계승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예수의 가르침과 삶을 계승한 것 때문에 닥쳐오게 될 죽음조차도 예수와 함께 나눌 수 있는 용기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기 전에도 훌륭한 제자였습니다. 그는 예수의 가르침과 삶뿐만 아니라, 죽음조차도 나눌 준비가 되어있는 위대한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직면한 베드로는 더 이상 예수의 제자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와 죽음을 나눌 자세는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 죽음을 나눌 용기는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가 어떤 분인지도 알고 그의 가르침과 삶이 옳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예수와 함께 하느님 나라의 비젼을 지키기 위해 죽을 수 있는 용기는 없었습니다. 베드로의 준비된 자세에 용기를 더해주고, 베드로의 지식을 행동과 실천으로 옮기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수의 부활경험이었던 것입니다. 저만치 멀리 있던 예수,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예수가 베드로의 삶 속에서 다시 사는 경험을 통해 베드로는 비로소 완전한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흔히 기독교는 예수의 부활에 터를 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이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단순한 객관적 사실에 터를 둔다고 이해한다면, 충분한 이해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의 부활은 동시에 제자들의 부활이고, 우리들의 부활입니다. 저만치 멀리 있던 예수가 바로 우리들 안에서 살아나심으로, 우리 자신이 예수의 하느님 나라의 가르침과 삶과 죽음을 함께 나누는, 그래서 우리 자신이 예수가 되는 사건이 바로 부활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바로 이러한 시각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저만치 멀리 두고 높이기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안에 있는 나이고, 내 안에 있는 예수입니다. 베드로가 그러했듯이, 비겁하여 예수의 가르침과 삶과 죽음에 동참하지 못했던 사람이 용기를 가지고 예수의 그것들에 동참하는 사람, 예수가 옳은 줄은 알았지만 예수처럼 말하거나 행동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위협을 무릅쓰고 굴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오늘의 기독교인들은 바로 이러한 부활의 역사에 동참하는 성숙한 기독교인이 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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