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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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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경일 형제 |
참고 : | 새길교회2002. 5. 5 주일설교 |
(개역)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공동번역)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해 왔다.
그리고 폭행을 쓰는 사람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표준새번역)
세례자 요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힘을 떨치고 있다.
그리고 힘을 쓰는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한다.
며칠 전 한 초등학교 교문에 "우리 학교는 폭력이 없는 즐거운 학교입니다."라는 문구의 현수막이 걸려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마 안도감을 주기 위해 걸어놓았겠지만, 제게는 섬찟한 느낌으로 다가올 뿐이었습니다. 다른 학교에서는 폭력이 자행되고 있을 수도 있으며 또한 그 학교 역시 폭력에 노출되어 있음을 암시했기 때문이죠. "한국인에게는 폭력이 내면화되어 있다."는 박노자의 비판처럼, 폭력은 어린이들의 일상적 공간을 위협할 정도로 우리 삶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폭력이 내면화되었다는 것은 폭력을 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의 종교라고 자부해 온 기독교는 폭력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교회 역시 폭력의 내면화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오히려 종교적 명분으로 폭력을 정당화하여 사회적 지탄을 받기조차 합니다. 이처럼 기독교에 폭력이 내면화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을 오늘 읽은 본문에 대한 한국 교회의 태도에서 찾아보았습니다.
마태복음 11장 12절은 매우 난해한 구절입니다. 마태가 본문에서 사용한 헬라어 '비아제타이'는 수동태로 이해할 경우 "폭력에 의해 강탈되다."는 부정적 의미가 되고, 중간태로 이해할 경우 "힘차게 다가오다."는 긍정적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산상수훈의 평화정신으로 대표되는 마태의 신학적 맥락과, 부정적 용어로만 사용되는 '비아스타이(침노하는 자들)'가 본문 후반부에 사용된 것을 고려하면 이 본문은 폭력에 대한 규탄으로 읽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에 관한 한 개역성경이나 공동번역성서의 번역이 원문의 뜻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개역성서의 영향력 아래 있는 한국 교회는 "침노"를 신앙의 모범으로 삼아 열광할 뿐, 폭력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진지한 성찰을 하지 않았습니다. '침노(侵擄)'의 말뜻이 '불법적으로 쳐들어감'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침노를 긍정적 의미로만 수용해왔다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그 까닭은 군사주의 문화의 공격성을 신앙의 덕목으로 내면화한 탓이 아닐까요. 그래서 저는 교회 안에 내면화된 폭력의 자취를 제 '삶의 자리'에서 성찰해 보았습니다.
1. 단색(單色)의 횡포
내면화된 폭력의 첫 번째 양상은 신앙의 다양성을 부정하는 획일화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폭력인 까닭은 획일화에 포함되지 않는 이들을 부정하기 때문이죠. 고등학생 시절 친구들과 함께 방언으로 유명한 어느 기도원을 찾아갔습니다. '욕쟁이 목사'로 알려질 만큼 언어가 거칠었던 그곳 원장은 집회를 시작하면서 엄포를 놓았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방언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 방언을 못 받는 놈들은 모두 개다." 이상한 논리였지만 일제히 '아멘!' 하며 통성기도에 들어갔고 저도 목청껏 기도했죠. 하지만 좀처럼 방언은 터지지 않았고, 함께 갔던 친구들이 단상 앞에 나가 '합격!' 소리를 들으며 인간임을 입증하고 모두 돌아오기까지, 저는 그 자리에 앉아 있어야 했습니다. 결국 함께 간 스무 명 중 저만 방언 받지 못한 채 산을 내려왔고, 그 전까지 성실한 신자 축에 들었던 저는 방언을 못한다는 이유로 인간적 존엄성을 부정당했습니다. 그분의 분류기준대로라면 저는 아직도 인간이 아닙니다.
이런 극단적 경험은 신앙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교회 문화의 산물입니다. 지상가치가 되어버린 성장을 위해 교회는 군대식 시스템을 선호합니다. 다양한 개성을 존중하며 대화를 통해 합의에 이르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는거죠. 대신 교리, 제도, 의례를 획일화하여 그것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배제합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에는 넘치면 자르고 모자라면 억지로 잡아 늘이는 프로크루테스의 침대만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2. 경계짓기: 그들만의 놀이터
내면화된 폭력의 두 번째 양상은 경계짓기를 통해 이웃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어린이날인 오늘, 우리가 아이들을 축복하는 것은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십 년, 이십 년 뒤에도 지금의 육체적, 정신적 단계를 계속한다면 우리는 매우 근심할 것입니다. 아이들이 '내 장난감', '내 과자', '내 엄마'를 구별하여 고집하듯이, 종교적 울타리를 높여 그 바깥의 이웃을 배척하는 것은 '자라지 않는 아이'의 부자연스러움과 흡사합니다.
어린 시절 장교 가족들의 관사에서 생활한 적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백여 평 남짓의 놀이터가 있었는데, 가끔 마을 아이들도 놀러오곤 했죠. 그런데 어느 날 관사 아이들은 "여기는 우리 놀이터니 너희는 나가!"라며 동네 아이들을 내쫓았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우리는 개울가로 놀러갔다가 마을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수적으로 우세한 그들은 우리를 둘러싸고 "여기는 우리 땅이니 너희는 돌아가!"라며 위협했죠. 힘에 눌린 우리는 따질 생각도 못한 채 풀이 죽어 관사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들을 배척해서 작은 놀이터를 독점했던 우리는 대신 더 넓은 세상을 잃어버린거죠.
로버트 펑크(Robert Funk)의 지적처럼 기본적으로 배제의 논리인 교리와 종교적 제도를 이유로 교회 바깥의 이웃을 적대한다면, 우리는 작은 종교적 놀이터를 지킬 수 있겠지만 더 넓은 세계는 영영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일찍이 인도의 사상가 비베카난다(Vivekananda)는 제도화된 기독교의 외적 형식과 의례, 경직된 교리가 영적 성장을 저해한다고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충고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태어나는 것은 좋으나 교회 안에서 죽는 것은 나쁘다.
어린아이로 태어나는 것은 좋으나 어린아이로 머무는 것은 나쁘다.
교회들과 전례들과 상징들은 아이들에게는 좋으나
아이들이 성장하면 교회를, 혹은 자기 자신을 뛰쳐나와야 한다.
영원히 아이로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백여 년 전의 통찰이 오늘 우리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까닭은 예수님의 근본 가르침을 상기시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대교라는 종교적 놀이터에 머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라는 새로운 놀이터를 만들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세상이 정해놓은 계급, 민족, 종교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하나님나라의 희망을 전해주셨을 뿐입니다.
3. 정복자의 사랑법
내면화된 폭력의 세번째 양상은 군사주의적 공격성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선교를 '십자군', '영적전쟁', '교두보' 같은 군사용어로 표현하는데 익숙합니다. 인터넷의 한 선교 사이트는 해외선교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을 올려놓았습니다.
영적 전쟁의 공격 포인트:
바라나시-힌두신 시바가 거한다는 곳으로 힌두교에서 가장 성스러운 순례지
프라산띠 닐라얌-인도의 구루 사이바바의 공동체가 있는 곳
네츱 과 남걀 사원-달라이 라마가 거하는 사원
황금사원(암릿차르)-시크교의 성스러운 사원
다른 사이트는 태국에서 사역중인 한 선교사의 편지를 실어놓았습니다.
전쟁은 "특수부대" 요원들만 하는 것이 아니듯 선교도 "특정 선교사들"만 하는 것이 아니다.
큰 부대에 수많은 전문 병과가 있듯이
선교도 "중보기도팀", "재정팀", "네트워크팀", "정보분석팀", " 정보수집개발팀" 등
영적황무지를 기경하고 점령하기 위한 연합된 힘이 반드시 필요하다.
국내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개강 철을 맞이한 한 선교 사이트의 글입니다.
캠퍼스는 경쟁지가 아니라 전투지이다.
우리는 ... 사탄의 세력아래 있는 젊은이들을 구하는 전도단이며 구원의 십자군이다.
물론 이들이 사용하는 군사용어가 샤론이나 부시의 그것과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선교에 있어서의 군사적 발상은 실제 전쟁과 마찬가지로 '승리 아니면 패배'만을 예상하기 때문에 정복주의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본심은 사랑이라고 주장하겠지만, 영적 전쟁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중에 자신이 사랑 받고 있음을 자각하는 이들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국내만 보더라도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고, 장승을 찍어내고, 불상의 목을 자르고, '붉은악마' 응원단을 악마추종자로 몰아붙이는 모습에서 순수한 사랑을 감각하는 이들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랑받는 대상이 사랑을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귀찮아하고 괴로워하고 아파하는데도 사랑이라며 계속 돌진하는 것은 사랑일까요 폭력일까요?
4. 폭행당하는 하늘나라
이 모든 폭력성은 결국 하늘나라를 폭행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몇 달 전 새길교회를 소개한 기사를 보고 어떤 여자분이 전화하셨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본가로 제사 지내러 가는 길에 교통사고로 딸을 잃었습니다. 기독교인인 그녀는 제사 참석을 꺼렸지만, 가족의 화목을 바라는 남편을 존중해 따라나선 참이었죠. 사고로 딸이 세상을 떠나자 그녀가 다니던 교회 목사님과 신자들은 제사지내려 해서 하나님이 벌하신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심각한 혼란에 빠진 그녀는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빠르고 불안한 목소리로 자기 심정을 전해왔습니다.
맞죠? 제사지내려 해서 내 딸을 죽이신거죠? 맞을거에요. ...
어떡하죠? 남편을 어떻게 대해야 하죠? ...
교인들이 싫어요. 만나기도 싫어요. ...
아니에요. 난 벌받은거에요. 하나님이 벌주신거에요. 맞죠? 그렇죠?
저는 미어지는 가슴으로 말했습니다. "제사 지내려 했다고 하나님께서 아주머니의 딸을 죽이셨을까요? 그것이 사실이라면 ... 저는 그런 하나님을 믿지 않겠어요." 이처럼 한 가정의 참담한 아픔에 눈물과 침묵으로 참여하기보다는 "제사지내면 벌받는다."고 수군거리기 좋아하는 것이, 사랑이신 하나님, 사랑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으신 하나님을 잔혹한 살인마로 만드는 폭력이 아니고 무엇일까요?.
저는 지금도 방언을 못하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한 신비체험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토록 깊이 내면화된 폭력을 경험하고 목격하면서도 그리스도인으로 남아있다는 것은 신비에 가까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교회 안에 이토록 깊이 내면화된 폭력을 우리는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정말 그리스도인이기를 그만둬버릴까요? 아니면 더 강한 힘으로 지금의 교회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애써 볼까요?
'떠나는 것'도 '힘으로 제압하는 것'도 예수님의 가르침은 아닙니다. 우리가 성찰해야 할 것은 내면화된 폭력으로부터 우리 역시 자유로운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동안 한국 교회를 비판해 온 저의 마음상태는 분노에 가까웠습니다. 하늘나라를 폭행하는 자들을 '폭행하고' 싶어했던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을 때리고, 모욕하고, 심지어 십자가에 못박은 이들마저 사랑하셨고, 그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은 침노하는 이들, 폭행을 휘두르는 이들에게 돌을 던지는 대신 평화의 꽃씨를 뿌리셨습니다. 그들도 형제요 자매였기 때문이죠.
예수원의 대천덕 신부님은 "기독교권의 식민지배와 제 3세계의 빈곤"이라는 글에서, 한국의 교회는 서구 기독교권의 식민지배에 책임이 없다는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밖에 없다.
교회의 죄악은 우리의 죄악이다. 교회의 실수는 우리의 실수이다.
우리는 그러한 죄악과 실수에 대해 회개해야 하며
우리가 야기한 모든 고통에 대해 회개해야 한다.
즉 형제·자매들이 범한 오류를 우리의 잘못으로 참회하는 것이 교회의 태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지난 해 이웃종교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실상사 수경 스님이 해인사의 동양최대 불상건립 계획을 비판하자, 하안거 중이던 해인사 선방수좌 30여명이 "버릇을 고쳐놓겠다"며 몰려가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그러나 피해자였던 실상사 스님들은 장시간의 토론 끝에 문제의 본질은 불교계에 내면화된 폭력심이라는 결론에 도달했고, 해인사에 맞대응하는 대신 21일 참회 단식을 결행함으로써 폭력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우리 역시 교회의 폭력을 우리의 잘못으로 먼저 참회하고 나서, 예수님께서 살아 보이신 평화를 모방해야 하지 않을까요. 새길공동체 안에서 다양한 모양, 다양한 색채의 하나님 체험을 공유하면서 아름다운 신앙의 꽃밭을 가꿔 가는 것, 교회 안과 밖을 경계짓지 않고 세계를 교회 삼아 그저 사랑하는 것,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이들을 사랑하고 인내하며 관용으로 대하는 것, 그 길은 힘에 의존할 때보다 더 큰 용기를 요구할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처럼 매맞고, 십자가에 달릴 각오도 해야 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예수님께서 먼저 그 길을 가셨으니 우리는 그분을 따를 뿐입니다.
하나님.
우리는 사랑할 뿐입니다.
폭력이 우리를 해할지라도 우리는 사랑할 뿐입니다.
죽음으로 가르쳐준 그분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사랑할 뿐입니다.
이 사랑의 새 길을 당신의 나라로 이끌어 주십시오.
폭행당하면서도 사랑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공동번역)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해 왔다.
그리고 폭행을 쓰는 사람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표준새번역)
세례자 요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힘을 떨치고 있다.
그리고 힘을 쓰는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한다.
며칠 전 한 초등학교 교문에 "우리 학교는 폭력이 없는 즐거운 학교입니다."라는 문구의 현수막이 걸려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마 안도감을 주기 위해 걸어놓았겠지만, 제게는 섬찟한 느낌으로 다가올 뿐이었습니다. 다른 학교에서는 폭력이 자행되고 있을 수도 있으며 또한 그 학교 역시 폭력에 노출되어 있음을 암시했기 때문이죠. "한국인에게는 폭력이 내면화되어 있다."는 박노자의 비판처럼, 폭력은 어린이들의 일상적 공간을 위협할 정도로 우리 삶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폭력이 내면화되었다는 것은 폭력을 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의 종교라고 자부해 온 기독교는 폭력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교회 역시 폭력의 내면화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오히려 종교적 명분으로 폭력을 정당화하여 사회적 지탄을 받기조차 합니다. 이처럼 기독교에 폭력이 내면화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을 오늘 읽은 본문에 대한 한국 교회의 태도에서 찾아보았습니다.
마태복음 11장 12절은 매우 난해한 구절입니다. 마태가 본문에서 사용한 헬라어 '비아제타이'는 수동태로 이해할 경우 "폭력에 의해 강탈되다."는 부정적 의미가 되고, 중간태로 이해할 경우 "힘차게 다가오다."는 긍정적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산상수훈의 평화정신으로 대표되는 마태의 신학적 맥락과, 부정적 용어로만 사용되는 '비아스타이(침노하는 자들)'가 본문 후반부에 사용된 것을 고려하면 이 본문은 폭력에 대한 규탄으로 읽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에 관한 한 개역성경이나 공동번역성서의 번역이 원문의 뜻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개역성서의 영향력 아래 있는 한국 교회는 "침노"를 신앙의 모범으로 삼아 열광할 뿐, 폭력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진지한 성찰을 하지 않았습니다. '침노(侵擄)'의 말뜻이 '불법적으로 쳐들어감'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침노를 긍정적 의미로만 수용해왔다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그 까닭은 군사주의 문화의 공격성을 신앙의 덕목으로 내면화한 탓이 아닐까요. 그래서 저는 교회 안에 내면화된 폭력의 자취를 제 '삶의 자리'에서 성찰해 보았습니다.
1. 단색(單色)의 횡포
내면화된 폭력의 첫 번째 양상은 신앙의 다양성을 부정하는 획일화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폭력인 까닭은 획일화에 포함되지 않는 이들을 부정하기 때문이죠. 고등학생 시절 친구들과 함께 방언으로 유명한 어느 기도원을 찾아갔습니다. '욕쟁이 목사'로 알려질 만큼 언어가 거칠었던 그곳 원장은 집회를 시작하면서 엄포를 놓았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방언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 방언을 못 받는 놈들은 모두 개다." 이상한 논리였지만 일제히 '아멘!' 하며 통성기도에 들어갔고 저도 목청껏 기도했죠. 하지만 좀처럼 방언은 터지지 않았고, 함께 갔던 친구들이 단상 앞에 나가 '합격!' 소리를 들으며 인간임을 입증하고 모두 돌아오기까지, 저는 그 자리에 앉아 있어야 했습니다. 결국 함께 간 스무 명 중 저만 방언 받지 못한 채 산을 내려왔고, 그 전까지 성실한 신자 축에 들었던 저는 방언을 못한다는 이유로 인간적 존엄성을 부정당했습니다. 그분의 분류기준대로라면 저는 아직도 인간이 아닙니다.
이런 극단적 경험은 신앙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교회 문화의 산물입니다. 지상가치가 되어버린 성장을 위해 교회는 군대식 시스템을 선호합니다. 다양한 개성을 존중하며 대화를 통해 합의에 이르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는거죠. 대신 교리, 제도, 의례를 획일화하여 그것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배제합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에는 넘치면 자르고 모자라면 억지로 잡아 늘이는 프로크루테스의 침대만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2. 경계짓기: 그들만의 놀이터
내면화된 폭력의 두 번째 양상은 경계짓기를 통해 이웃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어린이날인 오늘, 우리가 아이들을 축복하는 것은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십 년, 이십 년 뒤에도 지금의 육체적, 정신적 단계를 계속한다면 우리는 매우 근심할 것입니다. 아이들이 '내 장난감', '내 과자', '내 엄마'를 구별하여 고집하듯이, 종교적 울타리를 높여 그 바깥의 이웃을 배척하는 것은 '자라지 않는 아이'의 부자연스러움과 흡사합니다.
어린 시절 장교 가족들의 관사에서 생활한 적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백여 평 남짓의 놀이터가 있었는데, 가끔 마을 아이들도 놀러오곤 했죠. 그런데 어느 날 관사 아이들은 "여기는 우리 놀이터니 너희는 나가!"라며 동네 아이들을 내쫓았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우리는 개울가로 놀러갔다가 마을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수적으로 우세한 그들은 우리를 둘러싸고 "여기는 우리 땅이니 너희는 돌아가!"라며 위협했죠. 힘에 눌린 우리는 따질 생각도 못한 채 풀이 죽어 관사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들을 배척해서 작은 놀이터를 독점했던 우리는 대신 더 넓은 세상을 잃어버린거죠.
로버트 펑크(Robert Funk)의 지적처럼 기본적으로 배제의 논리인 교리와 종교적 제도를 이유로 교회 바깥의 이웃을 적대한다면, 우리는 작은 종교적 놀이터를 지킬 수 있겠지만 더 넓은 세계는 영영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일찍이 인도의 사상가 비베카난다(Vivekananda)는 제도화된 기독교의 외적 형식과 의례, 경직된 교리가 영적 성장을 저해한다고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충고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태어나는 것은 좋으나 교회 안에서 죽는 것은 나쁘다.
어린아이로 태어나는 것은 좋으나 어린아이로 머무는 것은 나쁘다.
교회들과 전례들과 상징들은 아이들에게는 좋으나
아이들이 성장하면 교회를, 혹은 자기 자신을 뛰쳐나와야 한다.
영원히 아이로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백여 년 전의 통찰이 오늘 우리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까닭은 예수님의 근본 가르침을 상기시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대교라는 종교적 놀이터에 머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라는 새로운 놀이터를 만들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세상이 정해놓은 계급, 민족, 종교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하나님나라의 희망을 전해주셨을 뿐입니다.
3. 정복자의 사랑법
내면화된 폭력의 세번째 양상은 군사주의적 공격성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선교를 '십자군', '영적전쟁', '교두보' 같은 군사용어로 표현하는데 익숙합니다. 인터넷의 한 선교 사이트는 해외선교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을 올려놓았습니다.
영적 전쟁의 공격 포인트:
바라나시-힌두신 시바가 거한다는 곳으로 힌두교에서 가장 성스러운 순례지
프라산띠 닐라얌-인도의 구루 사이바바의 공동체가 있는 곳
네츱 과 남걀 사원-달라이 라마가 거하는 사원
황금사원(암릿차르)-시크교의 성스러운 사원
다른 사이트는 태국에서 사역중인 한 선교사의 편지를 실어놓았습니다.
전쟁은 "특수부대" 요원들만 하는 것이 아니듯 선교도 "특정 선교사들"만 하는 것이 아니다.
큰 부대에 수많은 전문 병과가 있듯이
선교도 "중보기도팀", "재정팀", "네트워크팀", "정보분석팀", " 정보수집개발팀" 등
영적황무지를 기경하고 점령하기 위한 연합된 힘이 반드시 필요하다.
국내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개강 철을 맞이한 한 선교 사이트의 글입니다.
캠퍼스는 경쟁지가 아니라 전투지이다.
우리는 ... 사탄의 세력아래 있는 젊은이들을 구하는 전도단이며 구원의 십자군이다.
물론 이들이 사용하는 군사용어가 샤론이나 부시의 그것과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선교에 있어서의 군사적 발상은 실제 전쟁과 마찬가지로 '승리 아니면 패배'만을 예상하기 때문에 정복주의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본심은 사랑이라고 주장하겠지만, 영적 전쟁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중에 자신이 사랑 받고 있음을 자각하는 이들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국내만 보더라도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고, 장승을 찍어내고, 불상의 목을 자르고, '붉은악마' 응원단을 악마추종자로 몰아붙이는 모습에서 순수한 사랑을 감각하는 이들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랑받는 대상이 사랑을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귀찮아하고 괴로워하고 아파하는데도 사랑이라며 계속 돌진하는 것은 사랑일까요 폭력일까요?
4. 폭행당하는 하늘나라
이 모든 폭력성은 결국 하늘나라를 폭행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몇 달 전 새길교회를 소개한 기사를 보고 어떤 여자분이 전화하셨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본가로 제사 지내러 가는 길에 교통사고로 딸을 잃었습니다. 기독교인인 그녀는 제사 참석을 꺼렸지만, 가족의 화목을 바라는 남편을 존중해 따라나선 참이었죠. 사고로 딸이 세상을 떠나자 그녀가 다니던 교회 목사님과 신자들은 제사지내려 해서 하나님이 벌하신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심각한 혼란에 빠진 그녀는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빠르고 불안한 목소리로 자기 심정을 전해왔습니다.
맞죠? 제사지내려 해서 내 딸을 죽이신거죠? 맞을거에요. ...
어떡하죠? 남편을 어떻게 대해야 하죠? ...
교인들이 싫어요. 만나기도 싫어요. ...
아니에요. 난 벌받은거에요. 하나님이 벌주신거에요. 맞죠? 그렇죠?
저는 미어지는 가슴으로 말했습니다. "제사 지내려 했다고 하나님께서 아주머니의 딸을 죽이셨을까요? 그것이 사실이라면 ... 저는 그런 하나님을 믿지 않겠어요." 이처럼 한 가정의 참담한 아픔에 눈물과 침묵으로 참여하기보다는 "제사지내면 벌받는다."고 수군거리기 좋아하는 것이, 사랑이신 하나님, 사랑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으신 하나님을 잔혹한 살인마로 만드는 폭력이 아니고 무엇일까요?.
저는 지금도 방언을 못하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한 신비체험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토록 깊이 내면화된 폭력을 경험하고 목격하면서도 그리스도인으로 남아있다는 것은 신비에 가까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교회 안에 이토록 깊이 내면화된 폭력을 우리는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정말 그리스도인이기를 그만둬버릴까요? 아니면 더 강한 힘으로 지금의 교회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애써 볼까요?
'떠나는 것'도 '힘으로 제압하는 것'도 예수님의 가르침은 아닙니다. 우리가 성찰해야 할 것은 내면화된 폭력으로부터 우리 역시 자유로운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동안 한국 교회를 비판해 온 저의 마음상태는 분노에 가까웠습니다. 하늘나라를 폭행하는 자들을 '폭행하고' 싶어했던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을 때리고, 모욕하고, 심지어 십자가에 못박은 이들마저 사랑하셨고, 그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은 침노하는 이들, 폭행을 휘두르는 이들에게 돌을 던지는 대신 평화의 꽃씨를 뿌리셨습니다. 그들도 형제요 자매였기 때문이죠.
예수원의 대천덕 신부님은 "기독교권의 식민지배와 제 3세계의 빈곤"이라는 글에서, 한국의 교회는 서구 기독교권의 식민지배에 책임이 없다는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밖에 없다.
교회의 죄악은 우리의 죄악이다. 교회의 실수는 우리의 실수이다.
우리는 그러한 죄악과 실수에 대해 회개해야 하며
우리가 야기한 모든 고통에 대해 회개해야 한다.
즉 형제·자매들이 범한 오류를 우리의 잘못으로 참회하는 것이 교회의 태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지난 해 이웃종교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실상사 수경 스님이 해인사의 동양최대 불상건립 계획을 비판하자, 하안거 중이던 해인사 선방수좌 30여명이 "버릇을 고쳐놓겠다"며 몰려가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그러나 피해자였던 실상사 스님들은 장시간의 토론 끝에 문제의 본질은 불교계에 내면화된 폭력심이라는 결론에 도달했고, 해인사에 맞대응하는 대신 21일 참회 단식을 결행함으로써 폭력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우리 역시 교회의 폭력을 우리의 잘못으로 먼저 참회하고 나서, 예수님께서 살아 보이신 평화를 모방해야 하지 않을까요. 새길공동체 안에서 다양한 모양, 다양한 색채의 하나님 체험을 공유하면서 아름다운 신앙의 꽃밭을 가꿔 가는 것, 교회 안과 밖을 경계짓지 않고 세계를 교회 삼아 그저 사랑하는 것,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이들을 사랑하고 인내하며 관용으로 대하는 것, 그 길은 힘에 의존할 때보다 더 큰 용기를 요구할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처럼 매맞고, 십자가에 달릴 각오도 해야 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예수님께서 먼저 그 길을 가셨으니 우리는 그분을 따를 뿐입니다.
하나님.
우리는 사랑할 뿐입니다.
폭력이 우리를 해할지라도 우리는 사랑할 뿐입니다.
죽음으로 가르쳐준 그분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사랑할 뿐입니다.
이 사랑의 새 길을 당신의 나라로 이끌어 주십시오.
폭행당하면서도 사랑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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