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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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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전13:1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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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차정식 교수 |
참고 : | 새길교회2002. 4.28 주일설교 |
신약성서에는 기념할 만한 두 개의 거울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야고보서 1장 23절의 거울입니다. 그 거울은 잊어버린 자기 모습을 비추어 주는 기억의 거울입니다. 나아가 그것은 그 기억을 떠올려주는 율법이라는 말씀의 거울입니다. 그 거울 앞에 서기만 하면 망각이 기억으로 되살아난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좀더 확대 해석해 보면 역사의 거울이고, 확고한 실천을 예비해주는 신념의 거울, 신앙의 거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렇게 확고하지도, 투명하지도 않은 거울이 오늘의 본문 고전 13장 12절에 나옵니다. 그것은 정반대로 희미한 거울, 수수께끼의 거울입니다. 좀 고상하게 표현하면 실존의 거울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희미하게'라는 말씀은 원문을 문자 그대로 풀면 '수수께끼 속에'(en ainigmati)라는 뜻입니다. 왜 그 거울이 수수께끼 속의 희미한 거울이라는 걸까요? 고고학적으로 그 이유를 해명하면 그것은 그 거울이 유리거울이 아니라 청동거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전체 맥락에서 보면 그것은 그 거울이 희미한 사랑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사랑의 시로 유명한 말씀의 일부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분열을 치유할 수 있는 최선의 원리로 사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은 말과 깨달음과 생각에 유치한 수준을 벗어나는 데서 시작된다고 합니다. 흥미롭고도 놀라운 것은, 그렇게 유치한 수준을 벗어나 장성한 수준의 사랑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장성한 자의 사랑조차 현재는 수수께끼 속의 거울 앞에 비친 모습을 보는 것처럼 희미하고 불투명하다는 사실입니다.
아직 온전한 그 날이 오기 전인지라, 우리는 충분히 성인으로 말하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랑에 관한 한, 여전히 난해하고 서툴다는 것이지요. 나아가 삶에 관한 한, 가장 잘 이해했다고 생각할 때조차 결국 수수께끼의 미로를 헤매고 있을 뿐이라는 겁니다. 이런 한계 속에서 바울은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확연한 지식의 미래, 온전한 사랑의 미래를 전망하고 있습니다. 그는 부활한 그리스도를 굳게 믿으면서 시간의 길 위에서 역사를 만들었고, 꾸준히 흔들리면서도 기동력 있게 움직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사랑에 관하여도 앞으로 뚫고 나아가야 할 머나먼 미로의 여정이 있다는 걸 냉철하게 자각한 분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야말로 그 삶의 축이 극과 극을 오가면서 사랑의 난해한 수수께끼를 온몸으로 체득한 분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해오셨는지요. 아니, 단 한 사람이라도 지속적으로 진실되게 사랑하는, 그 사랑의 황홀함에 젖어든 적이 있으셨는지요. 여러분들은 가장 큰 기쁨, 또는 가장 심한 고통을 준 사랑의 경험을 놓고 투명한 사랑학 개론을 읊으실 만한지요. 오히려, 우리의 경험은 그 사랑이 여전히 미완성이고 희미하고 난해한 수수께끼라고 속삭이고 있지는 않은지요.
오늘날 사랑이란 말은 너무 오염되었거나 흔해빠진 말이 되어버렸습니다. 인간이 결핍을 못 견뎌하는 체질인 터라 원래 없는 사랑을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는 주장도 나옵니다. 특히 낭만적 사랑의 허구, 감정적 사랑의 기만에 대해서는 요즘 신세대의 유행가 몇 소절만 들어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웬만큼 인생의 곡절을 거친 점잖은 분들은 정신적 사랑, 영적인 사랑을 강조하거나 또 다른 한편에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사랑으로 대가없는 나눔을 통한 형제애, 인간애의 실천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인간 사랑의 풍속도 속에서 우리가 소홀히 여기기 쉬운 단순한 전제는 사랑은 잘 되든, 잘못 되든, 여전히 미완성이고, 그 현실은 늘 희미하며, 그 행방은 묘연한 수수께끼와 같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면서 확실한 것, 선명한 것, 틀림없는 것을 추구하길 좋아합니다. 그 기준에서 벗어나면 의심 많은 신앙, 흔들리는 신앙, 시원찮은 신앙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유치한 수준을 벗어나 장성한 사람이 되고서도 사랑은 여전히 수수께끼 속에 있는 거울과 같이 희미할 뿐이라는 게 바울의 깨달음입니다. 어디 사랑만 그렇겠습니까. 우리의 지식과 예언이 그렇게 부분적이고 편견에 물들어 있다는 겁니다. 물론 모든 것이 온전해지는 종말론적 비전 속에서 바울은 지식과 예언의 가치에 비해 사랑의 가치를 영구적인 것으로 보고 있지만 그렇다고 지금 여기서의 사랑이 그렇게 온전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굳이 성서의 증거를 대지 않더라도 우리의 경험과 상식으로 알 수 있듯이 우리의 사랑 또한 치우치기 쉽고 부분적이며 가장 강렬한 확신을 주장할 때조차도 사실은 희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사랑의 지고지순한 가치를 기리며 노래할 수 있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하며 성내지 아니하고 아무리 역경 속에서라도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디는 이타적인 가치가 사랑 속에 담겨 있음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 사랑이 불의나 악을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기에, 불의와 악을 볼 때 분연히 일어나 그것을 물리치고 마치 예수처럼 분노할 줄 아는 것이 또한 사랑의 다른 측면이라는 것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을, 한 생명을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그런 찬미와 긍정, 그런 앎과 생각에도 불구하고 만만치 않다는 게 저의 판단입니다. 아무리 치밀하게 사랑을 기획하고 섬세하게 실천해도 우리의 사랑은 여전히 미진하고 서투르다는 걸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방법에도 정석이 있다고 별의별 설을 풀어도, 또 그 설대로 시행해도, 얼마나 펑크가 잘 납니까.
예컨대, 부모의 훈계를 잘 듣지 않고 말썽을 일으키는 아이를 사랑하는 방법상의 문제가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매를 아끼지 말라는 조언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끝까지 인내하면서 아이 편에서 생각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내리는 대강의 결론은, 상황에 따라, 형편에 따라 다르니 적절히 그때그때 지혜롭게 대응해야 한다는 식입니다. 이쯤 되면 그 방법은 더 이상 방법이 아니라 막연한 감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사랑의 방법은 '사랑의 미로'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그런 제목의 노래 가사에서도 '그토록 다짐을 하건만 사랑은 알 수 없다'는 것 아닙니까.
제가 국내에서 언론 문제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서 제 소신도 있었고 주변의 권유도 있던 터라 조선일보를 반대하는 '안티조선 지식인 서명운동'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서명을 한 뒤 얼마 후 조선일보 기자로 재직 중인 한 선배님과 만나게 되었는데, 10여 년만에 재회하여 함께 이런저런 화제로 대화를 나누며 제가 취한 태도는 참 기묘한 것이었습니다. 그 선배님 앞에서 저는 조선일보의 문제점에 대하여 전적인 침묵으로 일관했었거든요. 그 침묵은 과연 잘한 선택이었나, 그것이 그 선배에 대한 사랑의 좋은 방법이었나, 그렇지 않다면 조선일보에 속한 사람들을, 또 그 사람들이 만드는 신문을 좀더 전향적으로 사랑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개인과 집단을 사랑하는 방식이 다르고, 사주와 평기자들을 향한 사랑의 방식이 다르다면 그것은 어떻게 분별되고 또 실천될 수 있는 것인가..... 끊임없이 질문에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복잡한 상황은 신학적으로, 그것은 이 땅에 하나님의 의를 구현하는 것과 어떤 상관이 있는가, 그 하나님의 신적인 의는 내가 추구하는 인간적 의를 배제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의와 '나'의 인간적 의라는 것이 과연 그렇게 물과 기름처럼 쫙 갈라지는 것인가, 오히려 희미한 수수께끼 속의 거울처럼 희미한 풍경으로 뭉뚱그려져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깝지 않은가 등등의 또 다른 질문과 연계되어 어쨌든 사랑의 실천뿐 아니라 그 이해조차 그리 만만치 않음을 제게 깨우쳐주었습니다.
희미한 수수께끼의 거울 앞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보면 사랑뿐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것들이 뿌옇게 보일 겁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거울을 집어던지지 않고 그 거울과 함께 충분히 흔들리면서 가야 하는 것이 우리네 생인 것 같습니다. 그 남루한 거울을 못 견뎌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삶, 흠 없이 완전한 사랑을 갈구하겠지만, 그것은 앞으로의 소망으로만 존재하지 지금 여기서의 현실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지금 난해한 수수께끼 같은 사랑을 말하면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희미하며 툭하면 변덕을 부리는 모순된 길 위의 사랑, 그 사랑의 역설, 그 역설의 진실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흐르는 시간의 길 위에서 보면 사랑은 끊임없는 후회와 반성, 부지런한 자기 해체와 갱신의 활동에 다름 아닙니다. 그러나 이른바 확실한 믿음의 기초 위에서 보면 사랑은 성취가 되고 그 성취의 바탕 위에서 축조해 가는 성채가 되어버립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이 사랑을 위한 사랑이나 구호로서의 사랑처럼 느껴지는 것은 바로 그 사랑에 대한 신념이 너무 확고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혹이 생기는 겁니다.
이에 비해 마치 바람 부는 길 위에서 흔들리면서 추구하는 사랑이란 흠 많고 변덕스럽고 희미하며 서투르게 비칠지라도, 사랑의 이름으로 생명을 억압하지는 않습니다. 부족한 대로 넉넉하며, 희미한 대로 소망스럽고, 서투른 대로 더불어 즐길 만합니다. 사랑에 무슨 원칙이니 경계를 세우지 않기 때문에 좀 방만하고 자유스럽게 보이지만 그 자유스러움 덕분에 오래 지속됩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고린도교회의 균열을 치유하는 대안으로 아름다운 사랑의 시를 읊고 있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 교회 일부 사람들의 적대적 태도로 인하여 그 자신이 광분할 정도로 심리적 균열을 일으킵니다.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는지는 고린도후서 10-13장만 읽어봐도 대강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바울의 고린도교회 사랑이 치열하지 못했다, 그의 사랑 노래는 너무 낭만적이었고 그러기에 오히려 위선적이었다고 쉽사리 공격하기가 민망해집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장성한 자의 사랑조차 지식과 예언과 마찬가지로 부분적이고 희미한 거울을 보는 것과 같이 난해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또한 흔들리며 끊임없이 걷는 변화무쌍한 시간의 길, 역사의 길 위에 선 자였습니다. 그것이 그의 믿음을 오히려 더 탄력 있게 조율해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은 충분히 흔들리면서 뿌리가 깊어져 가는가 봅니다. 그러고 보면, 사랑은 딱딱한 확신이 아니라 허름하고 헐렁한 가슴에서 의심하고 반성하면서 조금씩 더 숙성해 가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한 사랑의 소박한 진실을 알아갈수록 사람을 사랑한다는 게 더 두려우면서도 즐겁게 느껴지는가 봅니다. 저는 사랑의 난해함을 배워가면서 이제 자신의 사랑을 맹목적으로 예찬하는 목소리에 점점 더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자신의 희미한 믿음을 의심할 줄 모르고 선명한 확신으로 과장되게 말하는 태도가 내심 불안해지기도 합니다. 자신의 학문적 실험을 끊임없이 의심하지 않는 학문이 생동하는 창조적 학문이 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입니다.
결론 삼아 시 한편을 낭독해드립니다.
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존경하는 새길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에게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그 사랑의 길이 유리거울처럼 선명하지 않고 청동거울처럼 희미하기에 그 길은 더 가치 있는, 고상한 길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수수께끼 같은 실존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의 길을 포기하지 맙시다. 앞서 읽어드린 시에서처럼 흔들리는 동시에 뿌리내리면서, 고단하고 서툰 대로 그 길을 열심히 걸어갑시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고, 눈과 눈을 마주치며, 모든 것을 온전히 알고 보고 깨닫는 그 날을 소망하면서 사랑으로 우리 앞에 은총의 선물로 주어진 시간의 밭을 일구어나갑시다. 역사를 개척하며 전진하십시다. 하나님께서 머잖아 상한 갈대와 같은 저와 여러분을 넉넉히 위로해주실 겁니다. 저는 충분히 흔들리며 살지만 적어도 그 정도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남은 여정에 하나님께서 넉넉히 힘주시길 기원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그런가 하면 그렇게 확고하지도, 투명하지도 않은 거울이 오늘의 본문 고전 13장 12절에 나옵니다. 그것은 정반대로 희미한 거울, 수수께끼의 거울입니다. 좀 고상하게 표현하면 실존의 거울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희미하게'라는 말씀은 원문을 문자 그대로 풀면 '수수께끼 속에'(en ainigmati)라는 뜻입니다. 왜 그 거울이 수수께끼 속의 희미한 거울이라는 걸까요? 고고학적으로 그 이유를 해명하면 그것은 그 거울이 유리거울이 아니라 청동거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전체 맥락에서 보면 그것은 그 거울이 희미한 사랑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사랑의 시로 유명한 말씀의 일부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분열을 치유할 수 있는 최선의 원리로 사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은 말과 깨달음과 생각에 유치한 수준을 벗어나는 데서 시작된다고 합니다. 흥미롭고도 놀라운 것은, 그렇게 유치한 수준을 벗어나 장성한 수준의 사랑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장성한 자의 사랑조차 현재는 수수께끼 속의 거울 앞에 비친 모습을 보는 것처럼 희미하고 불투명하다는 사실입니다.
아직 온전한 그 날이 오기 전인지라, 우리는 충분히 성인으로 말하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랑에 관한 한, 여전히 난해하고 서툴다는 것이지요. 나아가 삶에 관한 한, 가장 잘 이해했다고 생각할 때조차 결국 수수께끼의 미로를 헤매고 있을 뿐이라는 겁니다. 이런 한계 속에서 바울은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확연한 지식의 미래, 온전한 사랑의 미래를 전망하고 있습니다. 그는 부활한 그리스도를 굳게 믿으면서 시간의 길 위에서 역사를 만들었고, 꾸준히 흔들리면서도 기동력 있게 움직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사랑에 관하여도 앞으로 뚫고 나아가야 할 머나먼 미로의 여정이 있다는 걸 냉철하게 자각한 분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야말로 그 삶의 축이 극과 극을 오가면서 사랑의 난해한 수수께끼를 온몸으로 체득한 분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해오셨는지요. 아니, 단 한 사람이라도 지속적으로 진실되게 사랑하는, 그 사랑의 황홀함에 젖어든 적이 있으셨는지요. 여러분들은 가장 큰 기쁨, 또는 가장 심한 고통을 준 사랑의 경험을 놓고 투명한 사랑학 개론을 읊으실 만한지요. 오히려, 우리의 경험은 그 사랑이 여전히 미완성이고 희미하고 난해한 수수께끼라고 속삭이고 있지는 않은지요.
오늘날 사랑이란 말은 너무 오염되었거나 흔해빠진 말이 되어버렸습니다. 인간이 결핍을 못 견뎌하는 체질인 터라 원래 없는 사랑을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는 주장도 나옵니다. 특히 낭만적 사랑의 허구, 감정적 사랑의 기만에 대해서는 요즘 신세대의 유행가 몇 소절만 들어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웬만큼 인생의 곡절을 거친 점잖은 분들은 정신적 사랑, 영적인 사랑을 강조하거나 또 다른 한편에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사랑으로 대가없는 나눔을 통한 형제애, 인간애의 실천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인간 사랑의 풍속도 속에서 우리가 소홀히 여기기 쉬운 단순한 전제는 사랑은 잘 되든, 잘못 되든, 여전히 미완성이고, 그 현실은 늘 희미하며, 그 행방은 묘연한 수수께끼와 같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면서 확실한 것, 선명한 것, 틀림없는 것을 추구하길 좋아합니다. 그 기준에서 벗어나면 의심 많은 신앙, 흔들리는 신앙, 시원찮은 신앙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유치한 수준을 벗어나 장성한 사람이 되고서도 사랑은 여전히 수수께끼 속에 있는 거울과 같이 희미할 뿐이라는 게 바울의 깨달음입니다. 어디 사랑만 그렇겠습니까. 우리의 지식과 예언이 그렇게 부분적이고 편견에 물들어 있다는 겁니다. 물론 모든 것이 온전해지는 종말론적 비전 속에서 바울은 지식과 예언의 가치에 비해 사랑의 가치를 영구적인 것으로 보고 있지만 그렇다고 지금 여기서의 사랑이 그렇게 온전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굳이 성서의 증거를 대지 않더라도 우리의 경험과 상식으로 알 수 있듯이 우리의 사랑 또한 치우치기 쉽고 부분적이며 가장 강렬한 확신을 주장할 때조차도 사실은 희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사랑의 지고지순한 가치를 기리며 노래할 수 있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하며 성내지 아니하고 아무리 역경 속에서라도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디는 이타적인 가치가 사랑 속에 담겨 있음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 사랑이 불의나 악을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기에, 불의와 악을 볼 때 분연히 일어나 그것을 물리치고 마치 예수처럼 분노할 줄 아는 것이 또한 사랑의 다른 측면이라는 것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을, 한 생명을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그런 찬미와 긍정, 그런 앎과 생각에도 불구하고 만만치 않다는 게 저의 판단입니다. 아무리 치밀하게 사랑을 기획하고 섬세하게 실천해도 우리의 사랑은 여전히 미진하고 서투르다는 걸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방법에도 정석이 있다고 별의별 설을 풀어도, 또 그 설대로 시행해도, 얼마나 펑크가 잘 납니까.
예컨대, 부모의 훈계를 잘 듣지 않고 말썽을 일으키는 아이를 사랑하는 방법상의 문제가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매를 아끼지 말라는 조언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끝까지 인내하면서 아이 편에서 생각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내리는 대강의 결론은, 상황에 따라, 형편에 따라 다르니 적절히 그때그때 지혜롭게 대응해야 한다는 식입니다. 이쯤 되면 그 방법은 더 이상 방법이 아니라 막연한 감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사랑의 방법은 '사랑의 미로'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그런 제목의 노래 가사에서도 '그토록 다짐을 하건만 사랑은 알 수 없다'는 것 아닙니까.
제가 국내에서 언론 문제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서 제 소신도 있었고 주변의 권유도 있던 터라 조선일보를 반대하는 '안티조선 지식인 서명운동'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서명을 한 뒤 얼마 후 조선일보 기자로 재직 중인 한 선배님과 만나게 되었는데, 10여 년만에 재회하여 함께 이런저런 화제로 대화를 나누며 제가 취한 태도는 참 기묘한 것이었습니다. 그 선배님 앞에서 저는 조선일보의 문제점에 대하여 전적인 침묵으로 일관했었거든요. 그 침묵은 과연 잘한 선택이었나, 그것이 그 선배에 대한 사랑의 좋은 방법이었나, 그렇지 않다면 조선일보에 속한 사람들을, 또 그 사람들이 만드는 신문을 좀더 전향적으로 사랑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개인과 집단을 사랑하는 방식이 다르고, 사주와 평기자들을 향한 사랑의 방식이 다르다면 그것은 어떻게 분별되고 또 실천될 수 있는 것인가..... 끊임없이 질문에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복잡한 상황은 신학적으로, 그것은 이 땅에 하나님의 의를 구현하는 것과 어떤 상관이 있는가, 그 하나님의 신적인 의는 내가 추구하는 인간적 의를 배제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의와 '나'의 인간적 의라는 것이 과연 그렇게 물과 기름처럼 쫙 갈라지는 것인가, 오히려 희미한 수수께끼 속의 거울처럼 희미한 풍경으로 뭉뚱그려져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깝지 않은가 등등의 또 다른 질문과 연계되어 어쨌든 사랑의 실천뿐 아니라 그 이해조차 그리 만만치 않음을 제게 깨우쳐주었습니다.
희미한 수수께끼의 거울 앞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보면 사랑뿐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것들이 뿌옇게 보일 겁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거울을 집어던지지 않고 그 거울과 함께 충분히 흔들리면서 가야 하는 것이 우리네 생인 것 같습니다. 그 남루한 거울을 못 견뎌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삶, 흠 없이 완전한 사랑을 갈구하겠지만, 그것은 앞으로의 소망으로만 존재하지 지금 여기서의 현실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지금 난해한 수수께끼 같은 사랑을 말하면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희미하며 툭하면 변덕을 부리는 모순된 길 위의 사랑, 그 사랑의 역설, 그 역설의 진실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흐르는 시간의 길 위에서 보면 사랑은 끊임없는 후회와 반성, 부지런한 자기 해체와 갱신의 활동에 다름 아닙니다. 그러나 이른바 확실한 믿음의 기초 위에서 보면 사랑은 성취가 되고 그 성취의 바탕 위에서 축조해 가는 성채가 되어버립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이 사랑을 위한 사랑이나 구호로서의 사랑처럼 느껴지는 것은 바로 그 사랑에 대한 신념이 너무 확고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혹이 생기는 겁니다.
이에 비해 마치 바람 부는 길 위에서 흔들리면서 추구하는 사랑이란 흠 많고 변덕스럽고 희미하며 서투르게 비칠지라도, 사랑의 이름으로 생명을 억압하지는 않습니다. 부족한 대로 넉넉하며, 희미한 대로 소망스럽고, 서투른 대로 더불어 즐길 만합니다. 사랑에 무슨 원칙이니 경계를 세우지 않기 때문에 좀 방만하고 자유스럽게 보이지만 그 자유스러움 덕분에 오래 지속됩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고린도교회의 균열을 치유하는 대안으로 아름다운 사랑의 시를 읊고 있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 교회 일부 사람들의 적대적 태도로 인하여 그 자신이 광분할 정도로 심리적 균열을 일으킵니다.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는지는 고린도후서 10-13장만 읽어봐도 대강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바울의 고린도교회 사랑이 치열하지 못했다, 그의 사랑 노래는 너무 낭만적이었고 그러기에 오히려 위선적이었다고 쉽사리 공격하기가 민망해집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장성한 자의 사랑조차 지식과 예언과 마찬가지로 부분적이고 희미한 거울을 보는 것과 같이 난해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또한 흔들리며 끊임없이 걷는 변화무쌍한 시간의 길, 역사의 길 위에 선 자였습니다. 그것이 그의 믿음을 오히려 더 탄력 있게 조율해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은 충분히 흔들리면서 뿌리가 깊어져 가는가 봅니다. 그러고 보면, 사랑은 딱딱한 확신이 아니라 허름하고 헐렁한 가슴에서 의심하고 반성하면서 조금씩 더 숙성해 가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한 사랑의 소박한 진실을 알아갈수록 사람을 사랑한다는 게 더 두려우면서도 즐겁게 느껴지는가 봅니다. 저는 사랑의 난해함을 배워가면서 이제 자신의 사랑을 맹목적으로 예찬하는 목소리에 점점 더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자신의 희미한 믿음을 의심할 줄 모르고 선명한 확신으로 과장되게 말하는 태도가 내심 불안해지기도 합니다. 자신의 학문적 실험을 끊임없이 의심하지 않는 학문이 생동하는 창조적 학문이 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입니다.
결론 삼아 시 한편을 낭독해드립니다.
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존경하는 새길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에게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그 사랑의 길이 유리거울처럼 선명하지 않고 청동거울처럼 희미하기에 그 길은 더 가치 있는, 고상한 길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수수께끼 같은 실존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의 길을 포기하지 맙시다. 앞서 읽어드린 시에서처럼 흔들리는 동시에 뿌리내리면서, 고단하고 서툰 대로 그 길을 열심히 걸어갑시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고, 눈과 눈을 마주치며, 모든 것을 온전히 알고 보고 깨닫는 그 날을 소망하면서 사랑으로 우리 앞에 은총의 선물로 주어진 시간의 밭을 일구어나갑시다. 역사를 개척하며 전진하십시다. 하나님께서 머잖아 상한 갈대와 같은 저와 여러분을 넉넉히 위로해주실 겁니다. 저는 충분히 흔들리며 살지만 적어도 그 정도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남은 여정에 하나님께서 넉넉히 힘주시길 기원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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