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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14:2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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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준우 목사 |
참고 : | 새길교회 2002. 5. 26 주일설교 |
하느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통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은 우리가 이 예배를 통해, 우리의 무디어진 감수성을 회복하고, 잠자던 영혼이 깨어나고, 메말랐던 심령이 새로운 생명력을 얻게 되어, 기쁘게 우리의 생명을 찬양하며 하느님을 노래하게 되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일에 지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상처들과 생활의 염려와 욕심과 죄 때문에 우리 영혼이 메말라지고 때로는 돌덩이처럼 단단히 굳어진 모습이 되기 쉽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예배를 통해 우리의 영혼이 새롭고 부드럽게 되어, 기뻐 춤추게 되기를 원하신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느님 앞에 모인 것은 우리가 비록 진흙탕 같은 세상 속에서 때로는 스스로를 속이기도 하고 때로는 남도 속이면서 살아가지만, 본래는 우리가 거룩하신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거룩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이 거룩한 날인 것, 우리가 예배하는 이 날이 아브라함 요수아 헷셀의 말처럼 "시간 속의 지성소"인 것은 우리가 마음의 어둠과 거짓을 씻어내고, 하느님의 거룩하신 형상을 우리의 영혼 속에 되살려냄으로써, 우리가 거룩한 사람으로 살아가기로 새롭게 결단하는 날이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교회가 "거룩한 장소"인 것은 우리가 죄를 고백하고 용서함받아, 항상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느님의 생명력을 우리의 온몸 가득히 채우고, 또한 여러 성도님들과 함께 그 생명력을 나누는 곳이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성경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도망칠 때, 하느님께서 홍해바다를 갈라 길을 내신 기적을 통해 하느님의 백성들이 무사히 홍해바다를 건너간 사건으로서, 우리가 너무나 익숙하게 잘 알고 있는 본문입니다. 본문에 16절과 22절에 분명히 "마른 땅을 밟으며 지나갔다"고 고백되어 있지만, 문득 다시 생각해보면, 하느님께서 강한 동풍으로 바닷물을 뒤로 밀어내셔서, 바닷물이 갈라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다 가운데로 들어갔다면, 그들은 개펄 속을 걸었다는 말이 아닐까요?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서해안 같은 개펄 속을 헤치며 걷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분명한 사실은 백사장처럼 "마른 땅"이 아니라, 썰물이 빠진 다음의 해변처럼, 물기가 많고 미끌미끌은 진창길을 걸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1.
바로왕은 이집트의 특수병거 600대, 보병부대를 모두 이끌고 추격해서 바로 뒤까지 따라왔는데, 앞에는 바다가 가로막혀 있었습니다. 뒤에는 전차부대가, 앞에는 바다가 가로막혀 있으니, 정말로 미칠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날 수도 없는 진퇴유곡의 상황이었으며, 뒤에서 죽음이 쫓아오는데 앞에도 죽음이 기다리는 상황이었습니다.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14:10에는 "이스라엘 백성은 크게 두려워하며 주께 부르짖었다. 그들은 모세를 원망하였다"고 했고, 14:15에는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왜 부르짖느냐?'"(공동번역에는 "너는 어찌하여 나에게 부르짖기만 하느냐?")고 했습니다. 모세 역시도 정말로 애간장이 탔을 것입니다. 15절에는 하느님께서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여라"고 말씀하셨고, 16절에는 "너는 지팡이를 들고 바다 위로 너의 팔을 내밀어, 바다가 갈라지게 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앞으로 나아감이 먼저이고 기적은 다음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진퇴유곡의 상황에서 담대하게 앞으로 나아가면, 마지막 순간에 바다조차 갈라지게 하시는 하느님의 기적이 일어난다는 뜻이라고 믿습니다.
2.
이스라엘 백성들은 밤새도록 어두운 진창길을 헤치며 걸어야 했을 것입니다. 벗어날 길이 없다고 생각하던 때에, 기적적으로 바다 가운데로 길을 내어주신 하느님의 은혜로 앞으로 전진하였지만, 여전히 원수들은 뒤에서 쫓아왔습니다. 23절에는 "바로의 말과 병거와 기병이 모두 이스라엘 백성의 뒤를 쫓아 바다 한가운데로 들어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록 바다가 갈라져 그 속으로 도망치고 있지만 여전히 불안하고 초조했을 것입니다. 비록 구름기둥이 진 뒤로 가서 이스라엘 백성이 있는 쪽은 환하게 밝혀주고 있었지만, 한밤중이었고, 그들의 불안으로 인해 더욱 어두운 밤이었을 것입니다.
살다보면 우리의 인생에도 이처럼 밤새도록 진창길을 헤치며 애간장이 타는 때가 있습니다.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순간이 있습니다. 뜻밖에도 사고가 생겨서 밤새도록 진창길을 걷기도 합니다. 사업하는 분들은 때로 어음을 막지 못해 애간장을 태우기도 합니다. 아이가 가출한 채 연락도 없어 애간장을 태우는 부모님들도 있습니다. 병원 응급실에서 또는 수술실 밖에서 기다리며 애간장이 타는 경우도 있습니다. 진창길에서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발을 옮기지만, 어느새 나둥그러져 진창길에 처박히는 순간도 있으며, 한 발을 빼면, 또 다른 발이 빠져 한숨을 내쉬는 경우도 있습니다. 잠시 애간장을 태우는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정말로 이 어둠이 언제 끝날지 알지 못한 채, 발이 푹푹 빠지며 걸어야 하는 순간도 있습니다. 가족 가운데 심한 병에 걸린 사람이 있어서, 혹은 과거의 실수와 잘못 때문에 평생동안 진창길을 헤치며 걸어야 하는 경우도 있고, 인간관계가 뒤틀려서 아픔을 안고 밤새도록 진창길을 헤치며 걸어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요즘은 젊은이들 가운데도 직장을 구하지 못하거나 임시직으로 고용되어 고통을 겪는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진퇴유곡의 상황에서 앞으로 나아가지만, 여전히 어둡고 불안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들 개인의 삶 뿐 아니라, 우리의 역사도 진창길을 헤치며 걸어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22년 전 광주사태 때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하다 여기저기서 죽어간 많은 젊은이들의 사진을 보면, 참으로 우리가 정신 차리고 살아야 그분들의 피가 헛되지 않을텐데, 그 가족들, 부상자들의 씻을 수 없는 아픔을 배신하는 것이 되지 않을텐데 하고 생각하지만, 우리 사회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여전히 우리는 역사의 진창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3.
이처럼 우리가 개인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언제 끝날지 모를 진창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될 때, 어떻게 우리가 새로운 힘을 얻겠습니까? 유대인들의 주석에 루벤과 시몬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들은 밤새 홍해바다를 건너가며 불평만 계속했다고 합니다. 너무 어둡다고, 너무 미끄럽다고 말입니다. 그들에게 홍해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기적을 보지 못하고 불평만 하면,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고개를 들어 바다를 가르신 하느님의 기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비록 진창길 같은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할지라도 우리를 사망으로부터 건져내신 하느님의 기적, 우리를 살아있게 하신 하느님의 기적을 보라는 말입니다. 22절에는 "물이 좌우에서 그들을 가리는 벽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걸었던 길 양옆 바다 속에는 아름다운 산호초, 진주조개, 물고기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저 자신이 지난 10년 동안 한국에서 가장 착취당하는 직업이라는 대학 시간강사를 하면서, 진창길이 무엇인지 잘 경험했습니다. 10년을 어떻게 견뎌냈느냐고요? 매일 아침마다 눈을 뜨면, 의식적으로, 어제밤에 목성에서 이민을 왔다고 생각하며 눈을 크게 뜨고 잠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 없는 목성에서 살다가, 생명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목성에서 살다가 어제밤에 지구로 이민을 왔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이 기적이었습니다. 하루하루 살아있다는 것이 감격 자체였습니다. 아침마다 대금산조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출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다석 유영모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기독교는 "벽돌 담 안의 종교"라고 말입니다.
그 말씀을 제 나름대로 해석하기로는, 망원경을 통해 밤하늘을 즐겨 바라보셨다는 유영모 선생님은 기독교가 불교처럼 無와 空을 이야기하지 않고, 그리스 철학의 영향 때문인지, 있는 것들만 생각하는 종교, 그래서 이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는, "벽돌 담 안의 종교"라는 점에 대한 비판의 말씀으로 생각합니다.
몇 년 전 내셔널 지오그래픽사가 만든 우주지도에는 우주의 반지름이 7천5백만 광년이었습니다. 그 안에 천 억개의 갤럭시가 있고, 그 가운데 하나인 은하계만도 지름이 10만 광년이라는 것이지요. 그 끝도 없이 아득한 우주 공간에서, 모든 존재란 기적입니다. 특히 생명이란 기적 자체입니다. 늘어선 가로수며, 참새 한 마리조차 이 우주 안에서는 기적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IMF 사태는 왜 겪어야 했습니까? 정경유착과 경제 적자만이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정신적 적자, 영적인 적자 때문이었지요. 모두들 돈만 쫓느라 눈이 벌개지니, 양심도 없어지고, 정의도 사라지고, 이웃과 민족도 없어지고 나라가 부도가 나게 된 것 아니었나요? 생명의 신비와 감격을 상실한 것이 가장 근원적인 적자였던 것이지요. 지금은 어떻습니까? 유치원 다니는 아이들부터 어른들까지, 도시고 시골이고 가릴 것 없이, 온통 더욱 더 돈과 출세와 자기과시에 미쳐 돌아가는 세상이 된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입니까? 초등학교 3학년만 되면, 더 이상 아무것도 신비한 것이 남아 있지 않게 되는 것 때문에, 정신적으로 황폐해지고, 영적으로 적자를 일으키는 것 아닙니까? 생명의 신비와 우주의 기적, 삶의 감격을 보지 못하면, 우리는 진창길을 불평 속에 걷게 되고, 우리의 삶이나 우리의 역사에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무리 배가 고프고 헐벗었어도, 저 들의 백합화와 저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고, 모든 존재가 하느님의 넉넉한 은혜 속에 살아가는 기적이라고 가르쳐주십니다 . 우리의 인생과 역사가 이 우주 안에서 기적 자체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감수성을 회복할 수 있고, 우리 앞에 놓인 진창길을 마른땅으로 바꾸는 기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곧 시작되는 월드컵 16강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명이 기적 자체임을 깨닫는 것이며, 월드컵 우승보다 더욱 감격적인 것은 우리가 매일 아침 목성에서 이민 온 감격으로 하루를 감사하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우리가 거룩하신 하느님 앞에 모인 것은 우리가 비록 진흙탕 같은 세상 속에서 때로는 스스로를 속이기도 하고 때로는 남도 속이면서 살아가지만, 본래는 우리가 거룩하신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거룩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이 거룩한 날인 것, 우리가 예배하는 이 날이 아브라함 요수아 헷셀의 말처럼 "시간 속의 지성소"인 것은 우리가 마음의 어둠과 거짓을 씻어내고, 하느님의 거룩하신 형상을 우리의 영혼 속에 되살려냄으로써, 우리가 거룩한 사람으로 살아가기로 새롭게 결단하는 날이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교회가 "거룩한 장소"인 것은 우리가 죄를 고백하고 용서함받아, 항상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느님의 생명력을 우리의 온몸 가득히 채우고, 또한 여러 성도님들과 함께 그 생명력을 나누는 곳이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성경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도망칠 때, 하느님께서 홍해바다를 갈라 길을 내신 기적을 통해 하느님의 백성들이 무사히 홍해바다를 건너간 사건으로서, 우리가 너무나 익숙하게 잘 알고 있는 본문입니다. 본문에 16절과 22절에 분명히 "마른 땅을 밟으며 지나갔다"고 고백되어 있지만, 문득 다시 생각해보면, 하느님께서 강한 동풍으로 바닷물을 뒤로 밀어내셔서, 바닷물이 갈라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다 가운데로 들어갔다면, 그들은 개펄 속을 걸었다는 말이 아닐까요?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서해안 같은 개펄 속을 헤치며 걷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분명한 사실은 백사장처럼 "마른 땅"이 아니라, 썰물이 빠진 다음의 해변처럼, 물기가 많고 미끌미끌은 진창길을 걸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1.
바로왕은 이집트의 특수병거 600대, 보병부대를 모두 이끌고 추격해서 바로 뒤까지 따라왔는데, 앞에는 바다가 가로막혀 있었습니다. 뒤에는 전차부대가, 앞에는 바다가 가로막혀 있으니, 정말로 미칠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날 수도 없는 진퇴유곡의 상황이었으며, 뒤에서 죽음이 쫓아오는데 앞에도 죽음이 기다리는 상황이었습니다.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14:10에는 "이스라엘 백성은 크게 두려워하며 주께 부르짖었다. 그들은 모세를 원망하였다"고 했고, 14:15에는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왜 부르짖느냐?'"(공동번역에는 "너는 어찌하여 나에게 부르짖기만 하느냐?")고 했습니다. 모세 역시도 정말로 애간장이 탔을 것입니다. 15절에는 하느님께서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여라"고 말씀하셨고, 16절에는 "너는 지팡이를 들고 바다 위로 너의 팔을 내밀어, 바다가 갈라지게 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앞으로 나아감이 먼저이고 기적은 다음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진퇴유곡의 상황에서 담대하게 앞으로 나아가면, 마지막 순간에 바다조차 갈라지게 하시는 하느님의 기적이 일어난다는 뜻이라고 믿습니다.
2.
이스라엘 백성들은 밤새도록 어두운 진창길을 헤치며 걸어야 했을 것입니다. 벗어날 길이 없다고 생각하던 때에, 기적적으로 바다 가운데로 길을 내어주신 하느님의 은혜로 앞으로 전진하였지만, 여전히 원수들은 뒤에서 쫓아왔습니다. 23절에는 "바로의 말과 병거와 기병이 모두 이스라엘 백성의 뒤를 쫓아 바다 한가운데로 들어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록 바다가 갈라져 그 속으로 도망치고 있지만 여전히 불안하고 초조했을 것입니다. 비록 구름기둥이 진 뒤로 가서 이스라엘 백성이 있는 쪽은 환하게 밝혀주고 있었지만, 한밤중이었고, 그들의 불안으로 인해 더욱 어두운 밤이었을 것입니다.
살다보면 우리의 인생에도 이처럼 밤새도록 진창길을 헤치며 애간장이 타는 때가 있습니다.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순간이 있습니다. 뜻밖에도 사고가 생겨서 밤새도록 진창길을 걷기도 합니다. 사업하는 분들은 때로 어음을 막지 못해 애간장을 태우기도 합니다. 아이가 가출한 채 연락도 없어 애간장을 태우는 부모님들도 있습니다. 병원 응급실에서 또는 수술실 밖에서 기다리며 애간장이 타는 경우도 있습니다. 진창길에서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발을 옮기지만, 어느새 나둥그러져 진창길에 처박히는 순간도 있으며, 한 발을 빼면, 또 다른 발이 빠져 한숨을 내쉬는 경우도 있습니다. 잠시 애간장을 태우는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정말로 이 어둠이 언제 끝날지 알지 못한 채, 발이 푹푹 빠지며 걸어야 하는 순간도 있습니다. 가족 가운데 심한 병에 걸린 사람이 있어서, 혹은 과거의 실수와 잘못 때문에 평생동안 진창길을 헤치며 걸어야 하는 경우도 있고, 인간관계가 뒤틀려서 아픔을 안고 밤새도록 진창길을 헤치며 걸어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요즘은 젊은이들 가운데도 직장을 구하지 못하거나 임시직으로 고용되어 고통을 겪는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진퇴유곡의 상황에서 앞으로 나아가지만, 여전히 어둡고 불안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들 개인의 삶 뿐 아니라, 우리의 역사도 진창길을 헤치며 걸어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22년 전 광주사태 때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하다 여기저기서 죽어간 많은 젊은이들의 사진을 보면, 참으로 우리가 정신 차리고 살아야 그분들의 피가 헛되지 않을텐데, 그 가족들, 부상자들의 씻을 수 없는 아픔을 배신하는 것이 되지 않을텐데 하고 생각하지만, 우리 사회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여전히 우리는 역사의 진창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3.
이처럼 우리가 개인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언제 끝날지 모를 진창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될 때, 어떻게 우리가 새로운 힘을 얻겠습니까? 유대인들의 주석에 루벤과 시몬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들은 밤새 홍해바다를 건너가며 불평만 계속했다고 합니다. 너무 어둡다고, 너무 미끄럽다고 말입니다. 그들에게 홍해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기적을 보지 못하고 불평만 하면,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고개를 들어 바다를 가르신 하느님의 기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비록 진창길 같은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할지라도 우리를 사망으로부터 건져내신 하느님의 기적, 우리를 살아있게 하신 하느님의 기적을 보라는 말입니다. 22절에는 "물이 좌우에서 그들을 가리는 벽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걸었던 길 양옆 바다 속에는 아름다운 산호초, 진주조개, 물고기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저 자신이 지난 10년 동안 한국에서 가장 착취당하는 직업이라는 대학 시간강사를 하면서, 진창길이 무엇인지 잘 경험했습니다. 10년을 어떻게 견뎌냈느냐고요? 매일 아침마다 눈을 뜨면, 의식적으로, 어제밤에 목성에서 이민을 왔다고 생각하며 눈을 크게 뜨고 잠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 없는 목성에서 살다가, 생명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목성에서 살다가 어제밤에 지구로 이민을 왔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이 기적이었습니다. 하루하루 살아있다는 것이 감격 자체였습니다. 아침마다 대금산조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출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다석 유영모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기독교는 "벽돌 담 안의 종교"라고 말입니다.
그 말씀을 제 나름대로 해석하기로는, 망원경을 통해 밤하늘을 즐겨 바라보셨다는 유영모 선생님은 기독교가 불교처럼 無와 空을 이야기하지 않고, 그리스 철학의 영향 때문인지, 있는 것들만 생각하는 종교, 그래서 이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는, "벽돌 담 안의 종교"라는 점에 대한 비판의 말씀으로 생각합니다.
몇 년 전 내셔널 지오그래픽사가 만든 우주지도에는 우주의 반지름이 7천5백만 광년이었습니다. 그 안에 천 억개의 갤럭시가 있고, 그 가운데 하나인 은하계만도 지름이 10만 광년이라는 것이지요. 그 끝도 없이 아득한 우주 공간에서, 모든 존재란 기적입니다. 특히 생명이란 기적 자체입니다. 늘어선 가로수며, 참새 한 마리조차 이 우주 안에서는 기적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IMF 사태는 왜 겪어야 했습니까? 정경유착과 경제 적자만이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정신적 적자, 영적인 적자 때문이었지요. 모두들 돈만 쫓느라 눈이 벌개지니, 양심도 없어지고, 정의도 사라지고, 이웃과 민족도 없어지고 나라가 부도가 나게 된 것 아니었나요? 생명의 신비와 감격을 상실한 것이 가장 근원적인 적자였던 것이지요. 지금은 어떻습니까? 유치원 다니는 아이들부터 어른들까지, 도시고 시골이고 가릴 것 없이, 온통 더욱 더 돈과 출세와 자기과시에 미쳐 돌아가는 세상이 된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입니까? 초등학교 3학년만 되면, 더 이상 아무것도 신비한 것이 남아 있지 않게 되는 것 때문에, 정신적으로 황폐해지고, 영적으로 적자를 일으키는 것 아닙니까? 생명의 신비와 우주의 기적, 삶의 감격을 보지 못하면, 우리는 진창길을 불평 속에 걷게 되고, 우리의 삶이나 우리의 역사에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무리 배가 고프고 헐벗었어도, 저 들의 백합화와 저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고, 모든 존재가 하느님의 넉넉한 은혜 속에 살아가는 기적이라고 가르쳐주십니다 . 우리의 인생과 역사가 이 우주 안에서 기적 자체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감수성을 회복할 수 있고, 우리 앞에 놓인 진창길을 마른땅으로 바꾸는 기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곧 시작되는 월드컵 16강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명이 기적 자체임을 깨닫는 것이며, 월드컵 우승보다 더욱 감격적인 것은 우리가 매일 아침 목성에서 이민 온 감격으로 하루를 감사하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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