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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3: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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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길희성 형제 |
참고 : | 새길교회 2002. 6. 2 주일설교) |
놀이는 인생, 인생은 놀이
요3:16
새길교회 2002. 6. 2 주일설교
좀처럼 오르지 않을 것 같았던 월드컵 열기가 후끈 달아올라 온 나라를 뜨겁게 달구고 있습니다. 지난번 영국과 프랑스와의 경기가 기폭제가 된 것 같습니다. 월드컵이 남의 잔치가 되지 않으려면 역시 우리 팀이 잘해야 신이 나는 법인가 봅니다. 월드컵 열기를 보면서 도대체 스포츠란 무엇이며, 축구가 무어기에 이처럼 온 나라가 난리인가 하는 생각을 누구든 해보게 됩니다. 세상에는 어떤 사물이 실제 이상의 허황한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이 많은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 둘을 꼽으라면 하나는 돈이고 다른 하나는 현대의 상업화된 스포츠입니다. 돈이란 단순히 종이쪽지일 뿐인데 엄청난 위력을 발휘합니다. 돈이 먹는 음식도 아니고 입는 옷도 아니며 들어가 사는 집도 아닌데, 이 종이쪽지가 사회적 합의와 관행에 따라 실물보다 엄청난 가치를 싣고서 통용되고 있습니다. 스포츠 또한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건강을 위해, 혹은 재미를 위해 하는 놀이일 뿐인데, 거기에 엄청난 무게가 실리면서 뻥튀기 됩니다. 프로 선수들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한 스포츠 행사에 온 나라의 명운이라도 달린 것 같은 부가가치가 부여됩니다. 축구에 별 관심 없는 어떤 여자가 말하기를 "저 공이 도대체 얼마짜린 데 저렇게 기를 쓰고 뺏으려 합니까?"라고 했다고 합니다.
축구는 가장 단순한 운동이라고 합니다. 공 하나에 적당한 공간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 할 수 있는 놀이입니다. 무언가를 발로 차고 싶은 충동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 본능이라고도 합니다. 축구는 일정한 규칙을 정해 놓고서 이러한 본능을 한껏 발휘하도록 하는 신나는 놀이임에 틀림없습니다. 어떤 사람의 표현대로 축구란 '떼거리 지어 공을 차는 행위'입니다. 이렇게 단순한 놀이인 축구가 어떻게 그처럼 엄청난 의미를 지니게 되었는지 생각해보면 기가 막힙니다. 프로 스포츠가 현대인의 종교이고 노동자들의 아편이라는 말은 들은 지 오랩니다. 또 축구가 국민들을 우민화하는 도구로 사용된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독재자들은 예외 없이 축구를 좋아한다고도 합니다. 오사마 빈 라덴도 축구를 몹시 좋아해서 세계무역센터 빌딩을 폭파한 다음 마치 알카에다가 미국을 상대로 축구에서 승리한 쾌감 같은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축구 때문에 실제로 전쟁도 일어났다고 합니다. 실제로 전쟁을 하는 것보다는 스포츠로 대리전쟁을 치르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편이 훨씬 낫겠지만, 축구가 조장하는 지역주의와 민족주의 등 집단주의의 폐해를 우리는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축구공 하나로 온 국민을 하나로 묶어준다지만, 이 하나됨은 자칫하면 그 하나 속에 들지 않는 사람을 배제하는 적대적 단결이 되기 쉽습니다. 한 집단만이 누리는 결속은 진정한 평화와는 거리가 멉니다.
여하튼, 이번 월드컵은 우리나라와 같이 작은 나라로서는 순수 민간 차원에서 치르기에는 버거운 행사이기에 처음부터 국가적 행사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단순 놀이로서의 스포츠 제전을 훨씬 넘어서 민족의 웅비와 재도약의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정부의 공공연한 입장이고 국민들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막대한 경제적 효과도 기대되고 국가 이미지도 제고되어 국운 상승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IMF로 세계의 망신을 사고 이미지가 실추되었던 나라가 전 세계를 향해서 "보라, 우리 이렇게 일어섰다!"는 것을 과시하는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스포츠는 어디까지나 스포츠입니다. 아무리 월드컵을 잘 치른다 해도, 혹시 일시적으로 경기가 반짝하고 관광수입이 좀 늘지는 몰라도, 낮은 과학기술이 갑자기 높아질 리 없고, 낮은 도덕 수준이 갑자기 올라갈 리가 없습니다. 부정부패가 만연한 나라가 갑자기 깨끗해질 리 없고, 무질서가 판치는 사회가 갑자기 질서정연한 사회가 될 리 없습니다. 마치 교실에서 난장판을 치고 놀던 학생들이 선생님이 들어오면 갑자기 조용해진 교실처럼, 외국 손님들한테 잘 보이려 일시적으로는 얌전해질 수 있겠지만, 옛날 버릇은 하루아침에 달라지지 않습니다.
광기에 가까운 월드컵 열기에 일반인은 물론이요 심지어 종교계까지도 무비판적으로 놀아나고 있습니다. 불교, 기독교 할 것 없이 월드컵 성공 법회니 기도회니 하고 떠들어댔습니다. 지난 4월 22일에 '붉은 악마' 라는 명칭을 변경하기 위해 기독교 내의 일부 보수 세력이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는데, 거기서 나온 목사님들의 발언이 가관이었습니다: "붉은 악마 응원단은 악마의 집단이다"; "악마라는 명칭을 고집하는 이상 16강은 불가능하다. 이름을 바꿔 하나님이 도우셔서 승리했다는 말이 나오게 하자." "독실한 신자였던 차범근 감독이 기도하는 것을 김용옥 교수가 비난하고, 붉은 악마 응원단이 설치면서 한국 축구가 급격히 무너졌다. 붉은 악마가 설칠 바에는 차라리 16강에 들지 않는 것이 낫다. 최근 개명운동을 하니까 축구대표팀이 조금씩 살아나고 있다." 등 정말 낯뜨거운 발언들이 목사님이라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거침없이 흘러나왔습니다. 한국 개신교의 한심하고 부끄러운 자화상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지난 부활절 연합예배에 설교를 맡은 분이 설교 중 한 말은 더욱 충격적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축구장을 지어서 하나님께 헌당하는 기분입니다."; "이곳에서 축구를 하면 한국팀은 반드시 승리할 줄 믿습니다"; "미국 팀에게는 미안하지만 자살골 한 골 먹으면 한국은 16강에 올라갈 것이다. 폴란드와의 경기에서 한국은 페널티 킥을 얻을 것인데 이때 골을 못 넣은 사람은 한강에 빠져죽어야 할 것이다."라는 발언까지 했다고 하니 귀를 의심할 정도입니다. 16강에 못 들면 그야말로 이제 핑계거리가 하나 생기게 된 셈이며, 목사님들은 자기들의 '예언 능력'을 뽐낼 것입니다. 다행이 16강에 들면, 그 분들이 무어라고 말할지 자못 궁금합니다.
한국 보수신앙의 정체를 이만하면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보수신앙, 이른바 복음주의 신앙의 문제점은 그들이 '보수'라는 것, 그들이 '복음'을 강조한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지켜야 할 것은 지키지 않고 엉뚱한 것을 지키는 것을 보수로 여긴다는 데에 있습니다. 진짜 복음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와 야합한 가짜 복음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일수록 한국이나 미국을 막론하고 독재정권을 위해 조찬기도회나 열고 무자비한 경제적 개인주의와 자본주의를 찬양하고 전쟁을 부추기고 세상의 체제와 권력과 쉽게 야합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파해야 합니다. 붉은 악마 명칭변경 운동과 월드컵 성공을 기원하는 예배와 기도에는 어쩌면 한국 개신교의 고질병 두 가지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답답한 문자주의요, 다른 하나는 맹목적 승리주의입니다. 응원 팀을 '악마'라면 어떻고 '깡패'라고 부른들 어떻겠습니까? 모두 애칭으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인데도, 문자적 의미에 매달려 마치 무슨 신앙의 본질이라도 놓고 싸우듯 날뛰니 우습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우리 팀이 이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식의 승리주의를 신앙이라고 예배 시간에 외쳐대고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크고 강한 것, 힘과 영광, 승리와 번영만이 신앙이고 작고 약한 것, 낮고 겸손한 것, 고난과 실패는 신앙과는 거리가 멉니다. 한국 기독교가 왜 이 세상에 존재하나마나 한 것이 되었는지 그 이유가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본래 거대한 관중이 지켜보는 스포츠 행사 혹은 운동 경기란 기독교와는 별로 인연이 없던 일이었습니다. 올림픽 게임을 비롯한 대형 경기장의 운동경기는 힘과 능력과 영광을 숭상하던 고대 그리스·로마의 이교도적 가치와 인생관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초대 기독교인들에게는 오히려 악몽과도 같은 행사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고대 로마 사람들은 로마뿐만 아니라 그들이 정복한 도시마다 거대한 원형경기장을 세워놓고 연극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데려온 노예들과 용사들에게 각종 잔인한 경기를 시키면서 즐겼습니다. 네로 황제가 기독교도들을 사자와 싸우도록 한 것을 우리는 쿼바디스 영화에서도 잘 보았습니다. 나는 미국에서 미식 추구를 보면서 가끔 로마 원형경기장의 모습을 상상하곤 했습니다. 거대한 몸집을 가진 미식축구선수들을 보면 사람 같지가 않고 로마 원형경기장에서 싸우는 야수들 같아 보였습니다. 힘을 자랑하고 숭상한다는 점에서 로마나 미국이나 실제로 다를 바 없습니다.
본래 기독교는 힘과 능력, 권력과 명예, 부와 승리를 숭상하던 고대 로마 세계에서 가치관의 일대 혁명을 일으킨 운동이었습니다. 가난과 겸손, 약함과 고난, 용서와 사랑의 종교인 기독교가 로마 세계를 정복한 일은 실로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어쩌면, 무신론자 니체가 누구보다도 기독교의 정체를 잘 간파한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과 용서, 가난과 겸손을 강조하는 기독교 윤리는 노예의 도덕으로서, 힘있는 자, 가진 자, 잘 난 자, 고귀한 자들에 대한 질시 혹은 적개심에서 나온 비꼬인 윤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힘없는 나약한 자들이 힘있는 자들에 대항하기 위한 교활한 전략이며, 도덕을 가장한 복수심의 발로요 솔직하지 못한 권력의 추구라는 것입니다. 뛰어난 고전학자요 고대 그리스 문명을 예찬하고 동경했던 니체에게서 나옴직한 말입니다. 사실 이것은 무서운 말이고, 만약 이것이 진실이라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우리들은 당장이라도 신앙을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그야말로 니체냐 예수님이냐를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놀이는 어디까지나 놀이로서 즐겨야 합니다. 그리고 월드컵과 같은 거대한 스포츠 제전에서 우리가 기독교인으로 놀이 이상의 의미를 찾는 다면, 이미 부풀려질 대로 부풀려진 그 부가가치에다 더 힘을 보태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정한 평화의 축전, 인류 화합의 한마당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는 일일 것입니다. 특히 이 좋은 기회에도 불구하고 북한 동포들이 함께 참여하여 민족의 화합을 이루지 못한 것을 심히 안타깝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가난한 나라에서 온 팀들, 약체 팀들을 응원하며 돌보아 주는 것도 그리스도인들이 월드컵에 임하는 태도일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엊그제 개막전은 참으로 신나는 잔치였습니다. 누가 봐도 상대가 되지 못할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습니다. 월드컵에 처녀 출전한 세네갈 팀이 세계 최강이자 옛 식민 종주국인 프랑스 팀을 격침시켰습니다. 세네갈 국민들은 '제 2의 건국'이라고 온통 축제의 기쁨을 만끽했습니다. 한 축구 칼럼니스트의 말이 감동적입니다: "축구의 신은 인간의 오만을 용서하지 않았다. 신은 '바벨탑의 신화'를 꿈꾸는 제국 프랑스를 희롱하기 위해 세네갈을 선택했다."
이번 대회의 자원봉사자들, 특히 가난한 나라에서 온 선수들을 돌보는 봉사자들과 그들을 응원해 주는 써포터들의 손길이 참으로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막대한 돈을 FIFA에 바치면서 월드컵 스폰서가 된 초국적 기업들이 돈을 벌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세계의 수만 명 어린아이들이 말할 수 없이 열악한 작업 환경 속에서 형편없는 임금을 받아가며 축구공을 만들기 위해 손이 부르트도록 가죽 조각들을 꿰매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욕망은 놀이마저도 집단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바꾸고 각박한 현실의 아귀다툼과 전쟁으로 만듭니다. 이기지 않으면 의미가 없고 재미가 없습니다. 푸른 잔디 위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하는 팔자 좋은 놀이인 골프를 쳐도, 내기를 하지 않으면 재미가 없다고 합니다. 스포츠가 현실을 대신하는 도피처나 아편이 되어서도 안 되고 무의미하고 공허한 삶의 위로요 구원이 되어서도 안 되지만, 그렇지 않아도 악착같은 인생살이에서 또 하나의 아귀다툼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에게 놀이뿐 아니라 인생 자체를 놀이로 즐길 것을 말합니다. 인생 자체를 놀이로서, 축제로서 살라고 합니다. 저는 오늘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에 근거하여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다시 한 번 새겨보면서, 놀이로 인생을 사는 신앙의 지혜를 얻고자 합니다. 우리가 세계와 인생을 긍정적으로, 낙관적으로 살 수 있는 근거가 요한복음 3장 16절에 있기 때문이며, 기독교 신앙의 요체가 여기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다 보면 세상이 못마땅하고 원망스럽고 절망을 느껴 세상을 도피하거나 혹은 포기하고 싶은 유혹조차 받습니다. 세상을 혐오하고 나 자신을 혐오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그럴 때 어떻게 합니까? 나는 그럴 때마다 주일학교 때 배운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신앙의 근본적 의미를 되새기며 마음을 달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인생을 가벼운 마음으로 기쁘게 살 수 있는지 그 비밀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기쁜 소식인 〈복음〉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선 우리에게 하나님이 자기 독생자를 내어줄 정도로 이 세상을 너무나('이처럼') 사랑하신다는 간단한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괴로워하고 절망하고 세상을 포기하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악마의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세상이라는 것이며, 우리도 세상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신뢰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계와 인생에 대한 사랑과 긍정,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입니다.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으로 인해 세상이 대립과 갈등으로 분열되고 미움과 질시로 얼룩지게 되었지만,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포기하지 않고 품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이 세상은 이런 사랑의 하나님이 주관하는 세계임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근본적인 믿음으로 즐겁게 이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안에서, 그의 품안에서 우리는 가볍고 즐거운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삶의 순간 순간 우리는 갑자기 앞이 안 보이고 답답해지며 짜증이 나고 절망을 느낄 때마다 우리는 이 세상이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주관하는 세상이라는 간단하면서도 심오한 진리를 거듭거듭 상기해야 합니다. 나 혼자서 무엇을 이루려 애쓰고, 세상을 바꾸려 투쟁도 해보지만, 잘 안될 때가 더 많고 좌절과 분노를 느끼기 일쑤입니다. 특히 요즘처럼 우리의 사회와 정치현실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때도 드뭅니다. 국민들의 피눈물로 이룩한 두 문민정부가 우리를 이렇게 실망시키는 것을 보며 우리는 무어라 할 말을 잊습니다. 오히려 군사독재 시절은 괴로웠어도 간절한 소망이 있었기에 요즘처럼 무기력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아무리 세상을 망치려 해도 하나님께서 세상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돌보신다는 사실, 이 세상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돌보시며 사랑하는 세상이라는 복음의 진리를 믿는 긍정적 믿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세상이 도저히 하나님이 사랑하는 세상처럼 보이지 않을 때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굴복하면 이 세상 모두를 주겠다고 호언장담하면서 예수를 시험했던 악마가 지배하는 세상처럼 보일 때가 한두 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존재하는지조차 의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이 사랑의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오늘 말씀에 의하면, 그 증거, 즉 하나님의 사랑의 징표가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사랑의 징표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 최고의 선물을 마다하고 하나님께 다른 것을 달라고 구한다. 사실, 한국 기독교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말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정작 구하는 것은 예수가 아니고 세상적 축복을 구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 예수 밖에 따로 줄 것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밖에 다른 것도 다 주실 수 있지만, 그런 것으로는 세상을 구원할 수 없고 우리에게 진정한 구원을 주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의 길, 곧 십자가와 부활의 길 이외에는 달리 이 세상을 구원할 길이 없다는 것을 복음서는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두 번째 요소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다는 것, 즉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첫째라면, 둘째는 이 사랑의 최고 징표요 선물은 곧 그리스도 예수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믿음은 불가분적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 것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상호 교환적이며 동시적이며 궁극적으로 하나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믿겠지만 예수는 못 믿겠다는 사람도 있고, 예수는 훌륭한 존재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못 믿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둘은 떼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 속에서 계시된 바로 그 사랑의 하나님을 믿고 사는 존재들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입니까? 왜 우리는 그를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하나님의 최고의 계시라고 믿습니까? 예수는 우리에게 사랑의 하나님을 여실히 보여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 자신과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 우리를 사정없이 추궁하고 벌주시는 존재가 아니라 죄 많은 우리들을 끝까지 덮어주고 감싸줌으로써 새로운 존재가 되도록 돌보아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임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죄 많은 우리들이 그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바로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임을 깊이 깨닫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를 알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몸소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시면서 우리도 그렇게 부르며 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이 악하고 상처받고 문제 투성이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악마가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이 주인이신 곳임을 그의 말씀과 행위로, 그의 십자가와 부활로써 증언하셨습니다. 빛이 어둠을 이기며 생명이 죽음을 이기는 세상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증오와 분열 대신 사랑과 평화를 심으신 예수님의 얼굴에서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 평화의 하나님의 얼굴을 그대로 발견합니다. 그는 사랑의 하나님을 너무나도 빼어 닮았기에 우리는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며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딸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충분히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기쁨으로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인생을 긍정하며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린아이들처럼 천진난만하게 놀면서 이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 가운데서 부모를 신뢰하면서 근심 걱정 없이 뛰어 노는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도 이 세상을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근심하고 걱정하며 살 존재가 아님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보여주셨습니다. 신앙은 근심, 걱정, 염려, 불안과는 거리가 멉니다. 세상에 대한 지나친 고뇌와 번민도 신앙과는 거리가 멉니다. 신앙은 우리 인생의 짐을 아빠 하나님께 맡기고 사는 편안함과 여유이며,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유희로서 삶을 사는 태도입니다. 세상을 원망하거나 저주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세상에 대하여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도 죄이며 절망하는 것은 더욱 더 큰 죄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상에 사셨던 예수님의 실제 모습을 우리는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적어도 그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사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노기를 띤 예수님의 얼굴을 상상할 수는 있어도 불안과 초조에 사로잡힌 얼굴이나 불평하고 짜증을 내는 예수님의 얼굴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고난 받는 예수님의 이미지 혹은 성전에서 환전상들을 쫓아내는 노기 어린 예수님의 얼굴을 생각하면서 그를 심각한 얼굴의 소유자로 상상하기 쉬우나, 그는 온화하고 인자한 사람이었으며 늘 편안하고 즐거운 얼굴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잘 먹고 잘 마시는 사람이었으며, 아마도 제자들과 농담도 잘 하셨을 것이라 생각됩니다(불행하게도 복음서에는 없지만). 그는 유대 민족의 험난한 시기에 태어나 척박한 환경 속에서 자라나시고 활동하셨지만, 언제부터인가 '아빠' 하느님을 깨달은 순간부터 단순 소박한 믿음으로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하고 즐겁게 낙천적으로 사셨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처럼 자유롭게, 들에 핀 백합화처럼 맑고 향기롭게 사셨으며 우리도 그렇게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한,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모시고 산 초대 교회 신자들 역시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근심 걱정 없이 매일 매일 감사와 찬송으로 기쁨에 넘치는 생활을 했습니다. 가진 것은 별로 없었으나 서로 나누면서 천국 백성답게 이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았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사랑으로 증오를 이기시고 생명으로 죽음을 이기신 주님, 세상을 이기신 주님을 그들은 가슴속에 모시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그늘을 안고 살면서도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영생을 맛보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삶의 모습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놀이로 인생을 사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이런 구원받은 자유로운 삶을 누리려면 독생자 예수를 받아들이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합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까지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나, 그를 믿고 영접하여 영생을 누리는 것은 우리들의 몫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그가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온 최고의 선물임을 믿고 그를 신뢰하고 그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일체의 행위를 뜻합니다.
복음서 기자는 이렇게 빛이 되신 분, 생명이 되신 분을 영접하지 않고 아글타글 사는 것 자체가 이미 지옥이라고 합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아빠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삶의 자유와 즐거움을 모르고 사는 것 자체가 이미 지옥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떠나서는 우리는 세상에 굴종하고 얽매인 노예와 종의 삶을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 그 자체이신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기쁨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빠 하느님과 함께 놀면서 사는 자녀들의 초월적 자유와 기쁨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자유롭게 놀이로 살지 못하면 우리는 결국 세상의 종이 되어 살게 됩니다. 놀이마저도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각박한 현실로 만듭니다. 즐거운 놀이가 다툼과 분열의 지옥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를 아빠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사는 자는 놀이는 물론이요 인생 자체를 놀이로 사는 기쁨을 누리면 삽니다.
이번 월드컵이 참다운 평화의 제전, 이긴 자와 지는 자가 모두 승리하는 훈훈한 인정이 넘치는 넉넉하고 여유 있는 놀이가 되도록 우리 모두가 힘쓰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인생을 놀이로, 축제로 살 수 있는 초월적 신앙의 지혜로써 세상의 대립과 갈등의 역사를 넘어 평화를 만드는 참 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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