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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길 샘 곁으로 오신 분

창세기 김이곤 목사............... 조회 수 2370 추천 수 0 2008.08.08 17:4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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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16:7-11 
설교자 : 김이곤 목사 
참고 : 한신대학교 신학과 교수 / 새길교회 2002. 7.21 주일설교 
최근에 세계의 이목을 가장 집중시켰던 것은, 아마도, 뉴욕에 있는 세계 무역센타에 대한 이슬람 계열의 자살테러 공격과, 그리고 그 사건의 한 파장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이는 세계 초 강대국 미국의 급격한 극우화(極右化) 현상에 따른 새로운 양상의 "전쟁과 평화"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이 문제가 우리 한국으로서는 발등에 떨어진 불처럼 화급을 다투는 문제로 다가 오고 있다는 것은 미국의 강력한 평화전략의 대상이 이라크와 북한으로 좁혀 지고 있고 그 중에서도 외형상의 국제여론과는 달리 이라크에 못지 않게 북한이 또한 미국의 매우 중요한 요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한반도에서의 전쟁과 평화 문제는 매우 중요한 현안 문제가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급기야는 2003년 한반도 전쟁설이 심심치 않게 나돌아 우리 사회에 공포를 조성하면서 음산하기 짝이 없는 전쟁소문이 지식인들 사이에서 심심치 않게 회자(膾炙)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최근 북한의 서해안 침공사건을 통하여서는 더욱 현실성을 띄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또한 2002년 올해를 "전쟁의 해"로 선포한 미국의 우익화 현상에 의하여 더욱 고조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지구 역사가 전쟁으로 인하여 그 운명이 마감되어서는 결코 안된다는 것은 우리들 모두의 희망이요 믿음입니다. 특히, 6. 25 동란을 경험한 한국인에게 있어서는, 전쟁이란 우리로부터 가족과 재산과 모든 인간적인 희망을 모두 빼앗아 갔던 악마(惡魔)였었습니다. 전쟁은 평화파괴의 가장 구체적인 적(敵)입니다. 인류평화와 인류의 복지를 위하여서는 반드시 극복하여야 할 과제가 또한 전쟁(戰爭)입니다. 그러나,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우리 안에 구축하는 일이, 우리들 인간들의 공통된 희망이면서도, 그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평화를 원한다!" "우리는 평화를 사랑한다!"라는 구호는 사람이면 누구나 외치는 구호이지만, 정작, 평화를 실현하자고 하면 선뜻 나서는 사람은 매우 드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은 반평화적인 행동을 더욱 쉽게 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평화를 원한다고는 외치면서도 정작 그 인간 본성은 반 평화적이라는 그런 말입니다. 그리하여, 예언자 예레미야는 이렇게 외친 바가 있었습니다: "작은 자든 큰 자든 다들 탐욕을 부리며, 예언자이건 제사장이건 다들 거짓을 행함이라. 그들은 내 백성이 상처 투성이가 되어 전혀 평화롭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평화다' '평화다' 라고 하면서 거짓 평화를 말하는도다."(렘 6: 13-14)라고 외친 바가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평화에도 참 평화가 있고 거짓 평화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참 평화이고 무엇이 거짓 평화인 것이며, 어떻게 하여야 참 평화를 우리 안에 수
립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힘의 논리"가 그 해결책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이념논리"로 그 해결을 모색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가장 강력한 평화수립의 대안으로 늘 제시되어 왔던 것은 언제나 "힘의 논리"에 의한 평화수립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소위 로마의 힘의 지배 아래에서 온 세계가 누린다고 하는 "팍스 로마나" 논리나 미국의 힘의 지배 아래에서 온 세계가 평화를 누린다고 하는 "팍스 아메리카나" 논리가 바로 그것을 말해 준다 하겠습니다. 좀 더 통속적이고도 천박한 논리로 말한다면 "재미있는 동물의 세계에 나오는 약육강식의 논리"와 같은 것을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최근 우리에게 매우 생생한 충격으로 어프로치해 온, 이른 바, "세계무역센타"를 향하여 돌진해 온 "비행기 자살 테러"의 테러리즘적 힘의 논리 같은 것도 또한 이와 전혀 다르지 않는 동일한 범 주 속에 넣을 수 있으리라 봅니다.

실로, "힘의 논리"에 의한 평화추구가 마치 인류 평화정책의 유일한 대안인 것처럼 널리 인식되어 온 것이 사실이며 유엔의 평화 노력도 또한 어김없이 이러한 "힘의 평형 논리"라는 것으로 그 명맥을 유지해 왔던 것이 사실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세계역사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힘의 논리에 의한 평화추구는 거짓 평화논리다"라는 것이 우리가 경험한 바의 진리입니다. 바로 이러한 "힘의 논리에 의한 평화추구"가 다름 아닌 세계역사의 악순환(惡循環)의 바로 그 원흉(元兇)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계의 위대한 사상가들은 이러한 힘의 논리에 맞서서, 소위, "이념논리"라는 것을 만들어내게 되었습니다. 예컨대, 마르크스, 엥겔스 등에 의하여 체계화되고 레닌, 스탈린 등에 의하여 계승 실천되었다가 20세기 후반 동구권의 몰락과 더불어 이젠 거의 그 존재 의미가 상실되다시피 한, 소위, "공산주의" 이념이라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생산 수단의 사회적 공유를 토대로 하여, 계급없는 평등사회를 실현하기 위하여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되 계급투쟁을 통한 프롤레타리아 무산대중의 혁명을 주창하고 나온 소위 "공산주의" 이념도 또한 그 요란스러운 구호와 주의 주장 만은 그래도 어디까지나 "평화와 평등"이었다는 것은 널리 잘 알려진 사실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날 우리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 어느 누가 공산주의 이념이 평화건설의 최선의 대안이라고 믿는 자가 있는 것입니까?

뿐만 아닙니다. 자본가와 노동자, 이 둘 사이의 뚜렷한 계급을 전제로 하고, 그리고 그 생산활동은 전적으로 자본가의 이익 추구를 위하여 이루어 가는 사회이념인, 이른 바, 자본주의 이념 역시 공산주의 이념 이상으로, 비록 자유경쟁을 통한 활력에 넘치는 "평화사회(平和社會)"를 추구한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인간 상품화"라는 물질 만능주의적이고도 반(反)인간적인 반(反)평화사회를 생산해 내어서 온 세계로 하여금 "물질주의(物質主義)"라는 마법에 걸리게 하여 우리네 지구사회가 이토록 구제불능의 사경(死境)을 헤메도록 만들고 있는 것을 우리는 또한 목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극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양대 이념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하여 나타난, 소위, 사회 민주주의 또는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이념이 개인의 노동효율과 사회의 생산 분배를 잘 조화시키는 유토피아적 평화사회를 추구하며 인류역사의 지평 위로 등장은 하였으나, 그러나, 우리네 인간 사회는 그 체제가 전제주의이든 민주주의이든 그 어느 것 하나도 초기의 "힘의 논리"라는 원시적 먹이 사슬에서부터 자유하지는 못하였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것이 인간사회의 실상이었습니다. 힘의 평형 논리, 그것은 지금까지 인간 이성이 생각해 낸 최선의 평화정책 대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인류역사는 이 대안(代案)으로는! 인간사회에 평화를 진정으로 정착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만을 되풀이하여 증명해 왔을 뿐이었습니다. 실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평화"에 대한 대안(代案)은 없다는 말입니까? 성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실로, 성서의 대답은 천지창조 때부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비롯한 성서역사를 거쳐서, 마침내는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이르기까지 매우 분명한 오직 한가지의 대답 만을 되풀이 하여 왔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공존(共存), 함께 사는 것, 더불어 사는 것, 그것 만이! 인류평화의 유일한 대안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성서의 천지 창조 이야기에서는 매우 뚜렷한 언어로 이미 오래 전부터, 아마도, 약 2900여년 전부터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즉 창세기 2장 18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신 직후, 인간을 향하여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 하니 내가 그를 도와 줄 배필을 지으리라"라고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인간은 본질상 더불어 살아야 할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 혼자서만 잘 산다고 잘 살아지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 오히려 혼자 살려고 하면 할수록 인간은 더욱 살기 어려워지고 급기야는 분열과 분쟁과 싸움으로 스스로 파멸에 이르게 된다는 것" 그것을 성서는 인류 역사 처음부터 줄곧 말하여 왔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본문은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를 통하여 이 진리를 또 한번 더 확실한 언어로, 그리고 매우 드라마적인 언어로 외치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습니다. 본 부인은 "사라"라고 이름하는 히브리인 여인이었고 둘째 부인은 애굽에서 사라의 몸종으로 데려 왔다가 여주인 사라의 권유를 받아 아브라함의 아내가 된 "하갈"이라 이름하는 여인이었습니다. 비록 하갈은 그의 여주인이 아기를 낳지 못하기 때문에 "씨받이" 역할을 하기 위하여 그의 여주인의 남편인 아브라함의 첩이 되어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아 준 여인이었지만, 또 끊어질 아브라함 가문의 대를 이어 주는 이 엄청난 일을 단행한 희생적 여인이었지만, 그러나, 한 남자와 두 여인 사이의 갈등은 그러한 당시의 "가문의 대(代) 잇기 관습법"의 질서와 윤리라는 그런 수준 높은 사회이념으로서도 전혀 해결의 도움을 주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라와 하갈 사이의 갈등은 심화되고 마침내 정실부인 사라는 첩 하갈을 축출하는 데까지 발전해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공존관계(共存關係)"가 무너진 것입니다.

사라와 하갈의 갈라섬, 그것은 사라의 아들 "이삭"과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의 갈라짐의 원인이 되었고 그리고 이 이삭과 이스마엘의 갈라짐은 또한 오늘 날의 이스라엘과 이슬람 교도들 사이의 해결불가능의 인종분쟁, 종교분쟁, 영토분쟁, 그리고 이념분쟁의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은 지정학적으로 볼 때, 약속의 땅 가나안과 이방 나라 애굽 사이를 구분짓는 국경지역으로서 아랍인들의 조상인 이스마엘이 태어난 지역이요 오늘 날의 수많은 아랍인들의 정신적 고향으로 생각하는 멕카(Mecca)라는 도시 근방에 위치한 "술"이라 이름하는 지역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이 지역은 예루살렘과 맥카가 갈라지는 지역이며 이스라엘과 이슬람의 분기점(分岐點)이기도 합니다.

아니러니칼하게도, 사라에게서 쫓겨난 하갈이 임신한 몸을 이끌고 억울함과 분노의 눈물을 삼키며 도망치는 길, 이젠, 한 발자국만 더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약속의 땅 가나안과는 영원히 결별하는, 그리고 이스라엘인들과 아랍의 이슬람 신도들이 영원히 이를 갈며 증오와 갈등의 대립관계가 되어 원수관계로 헤어지는 그 중요한 순간의 길, 바로 이 "술"(수르) 지역의 노상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께서 나타나셨던 것 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사건이요 이외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께서 불경스럽기 짝이 없는 이방나라 아랍인들의 국경까지 오시다니요! 그것도 버림 받은 이방인 여인, 아브라함의 씨받이 첩인 "하갈"이라는 이 이방여인의 뒤를 따라 여기까지 오시다니요! 이야말로 민족주의 신앙의 세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욕적인 사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께서 아랍인들의 국경지역인 "술" 지역까지 그것도 "한 쫓겨난 이방여인", 즉 애굽에서 데려 온 씨받이 여종인 하갈의 뒤를 이토록 집요하게 뒤따라 오신 것일까요? 무슨 말씀을 하시기 위함일까요? 아브라함과 사라의 하나님 야훼께서 혹시 이방 신을 섬기는 애굽여인 이 "하갈"이 복수의 한을 안고, 이를 갈며, 마치 돌아온 외팔이 검객이나 돌아 온 애꾸눈 총잡이처럼, 발길을 돌려 서슬이 시퍼렇게 복수의 칼을 품고 선택받은 집안 아브라함과 사라의 집을 공격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시어서 이 "하갈"이라는 여인을 여기 멀고도 먼 아랍 국경지역까지 뒤따라 오신 것일까요? 성서의 이 보도는 오늘의 우리에게 도데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놀라웁게도, 하나님의 사자는 하갈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너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하갈의 대답은 고난받는 자가 자기 신을 향하여 울부짖는 호소 그대로였습니다: "저는 제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이 대화 속에는 일종 이스라엘인들과 아랍인들이 심각한 인종 충돌을 일으킬 것 같은 분위기 또는 야훼 신앙인들과 이슬람신도들이 힘의 논리에 의한 충돌을 일으킬 것 같은 긴장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습니다. 성서는 항상 이러한 시점에서는 매우 중요한 "하나 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복음을 선포하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서기자가 여기서 전하고자 하는 그 하나님의 말씀은 과연 무엇이었겠습니까? 우리의 본문 말씀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있었습니다: "하갈아, 너는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라. 그리고 그의 수하에 복종하라!"

독일의 대표적인 창세기 주석가인 클라우스 베스터만(Claus Westermann)이라는 학자는 이러한 대화가 사막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야훼의 사자가 하갈을 샬롬(Shalom)의 영역 안으로, 즉 평화의 영역 안으로 받아 들인 것이라고 주석하고 있었습니다만, 하갈의 이 응답이 깊은 신뢰가 담긴 화답인 것이 분명한 점에서 볼 때, 여기에는 그 무슨 도망치고 뒤쫓는 자의 반목적 긴장 관계 같은 것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자의 이 명령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특히, 히브리 원문이 말하는 바를 문자적으로 번역한다면, "사라의 수하에서 그녀로부터 받을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라"라는 의미를 분명하게 갖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면,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7-9절만 따로 떼어 놓고 보면, 이 말씀은 야훼 하나님이 "아브라함-사라"를 편애하는, 아니, 아랍계의 이방여인 "하갈"은 차별적으로 천대하는 대신 "아브라함-사라"는 편애하는, 일종의 "하나님의 편당논리" 같은 것을 의심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에 직결되는 10-11절 말씀은 그러한 의심을 일시에 불식시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갈아,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케 하여 그 수를 셀 수 없도록 많게 하리라.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야훼께서 네 고통을 들어 주시기 때문이니라" 실로, 대단한 축복사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서양 주석가들은 여기서 성모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메시아 수태 예고를 받으며 받았던 "아베 마리아"(Ave Maria)의 평화 축복사, 즉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라는 축복사의 그 뿌리를 여기 하갈을 향한 야훼의 사자의 축복사에서 찾고 있을 정도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야훼 하나님께서 사라와 하갈, 그리고 이삭과 이스마엘 사이에서 갈등하며 고뇌하는 인류를 향하여 "고통스 럽지만 공존(共存)이 곧 인간평화(人間平和)의 근본이다"라는 가장 원형적인 "평화선언문"을 선포하고 계시는 것이라고 결론 지울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더불어 사는 것, 그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이가 나쁜 고부가 함께 한 지붕 밑에서 한 솥 밥을 먹으며 함께 산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더불어 함께 사는 것"은 피하지 말아야 할 필수적인 "평화의 관문"이라는 것입니다. "아골 골짜기가 희망으로 가는 문이다" 라고 외친 예언자 호세아 처럼(호 2: 15), 이 "고통스러운 공존의 문"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 어떠한 길을 통하여서도 진정한 평화가 이룩될 수는 없다는 것을 우리의 본문은 증언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사라와 하갈 사이의 "벽"을 허물라고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의미심장하게도, "술"이라는 말은 "장벽" "담장"이라는 뜻을 갖고 있었습니다. 즉 야훼께서는 이스라엘과 아랍 사이를 경계짓는 장벽까지 오셔서 "술"이라는 장벽을 헐라고 말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어떠한 것이든, 그 어떤 이상적인 인간 이념이나 인간 종교이든 그것을 잣대로 하여 인간 사이를 갈라 놓고 "옳다 그르다"라고 판결하는 형식으로는 우리 사이에 참 평화가 이루어질 수는 없다는 것을 우리의 본문은 강력히 증언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고통스러운 공존의 문," 그러나, 그 문을 통하지 않고서도 도달할 수 있는 "평화"는 분명코 "거짓 평화"라는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은 이방 여인 하갈의 고통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시고 사라에게 내리신 축복을 하갈에게도 내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사라만이 하나님의 딸이 아니라 하갈도 하나님의 사랑하는 딸이라는 것입니다. 이삭 만이 하나님이 선택하신 아들이 아니라 이스마엘도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에게 주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못지 않게 "이스마엘"에게 주신 이름도 "엘 하나님이 들어 주신다" "엘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다"라는 뜻을 갖고 있는 매우 축복된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아랍 사람들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 입니다.

지난 해 말, 그러니까, 2001년 12월호의 National Geographic이라는 잡지의 표지에는 매우 인상적인 그림이 소개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세계 3대 종교가 공통으로 '신앙의 아버지'라고 추앙하는 아브라함"이라는 제목 아래, 아브라함이 그의 외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기 위하여 치켜 든 칼을 하나님께서 황급하게 제지함으로 칼이 아브라함의 손에서 떨어지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잡지는 표지해설을 위하여 40쪽에 달하는 긴 학술적 언어로 아브라함의 신앙순례를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유대교와 무슬림, 그리고 기독교가 모두 다 자기들의 믿음의 조상이라고 추앙하는 그 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그가 인간에게 바라시는 것은 오직 하나, 이삭 인신희생을 금하시는 것, 이른 바, 인간생명에의 존중과 인간생명에의 사랑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오직 한가지라는 것을 가르치시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이 표지 해설자는 그의 긴 논의를 끝내면서 "이 표지 그림은 인간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한분 만이 거기에 계신다는 것을 믿는 그런 근본적인 믿음에 대한 요구를 담고 있다. 바로 이 믿음이 이 세계를 영원토록 변화시켜 왔던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약의 히브리 종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 진리를 증언해 왔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히브리 종교는 결코 후대의 유대 종교와 같은 배타적 민족주의 신앙에 깊이 물든 율법주의 종교와는 달랐습니다. "돌아가라! 이웃과 고통을 나누며 함께 살아라!" 이것이 야훼 하나님의 진정한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이 계명이 모든 율법을 집대성한 하나님의 근본 뜻이라고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날의 모든 종류의 문화충돌, 종교충돌, 인간 충돌은 모두 성서의 하나님의 이러한 뜻을 역행하는 행위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힘의 논리를 가지고 사생결단 싸우는 오늘의 이스라엘과 아랍인들 사이의 갈등과 그리고 서구 기독교와 아랍계 이슬람교와의 싸움, 그것은 모두 기독교의 가르침과도 모순되고 이슬람교의 가르침과도 모순되는 이른 바, 야훼 하나님의 뜻과도 모순되고 알라 신의 뜻과도 모순되는 무신론적이고도 반(反) 평화적인 악(惡)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힘의 논리에 의한 평화수립은 영원한 "실패작"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술" 길 샘물 곁에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 "돌아가라. 그리고 네 이웃과 고통을 나누어 가지면서 함께 살아가는 그런 공존의 삶을 살아라!"라는 이 말씀 만이 진정한 의미의 평화실천에 관한 가르침일 뿐입니다.

오늘도 야훼 하나님은 우리들 사이에 이러한 방식으로 오십니다. 38선 남북 분단지역에도 오시고 동서독 분단 지역에도 오시고 백인과 흑인 사이의 갈등지역에도 오시고 사이 나쁜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도 오시고 경상도와 전라도가 접경하는 지리산 능선 위에도 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자녀들아, 돌아가서 함께 더불어 살아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고 고통을 함께 나누며 함께 더불어 살아라. 이것이 너희 하늘 아버지인 나, 하나님이 원하는 진정한 평화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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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9 설교자료 남서울 은혜교회 홍정길 목사의 설교 설교비평  정용섭 목사  2008-08-09 4078
1238 신명기 도피성과 현대교회 신19:1-10  김승곤 목사  2008-08-09 4679
» 창세기 술 길 샘 곁으로 오신 분 창16:7-11  김이곤 목사  2008-08-08 2370
1236 요한일서 황무지에 붉은 장미꽃 피고 요일3:14-15  권순구 목사  2008-08-08 2426
1235 출애굽기 축제도 고통도 함께 하는 공동체 출15:19-21  최만자 자매  2008-08-08 2458
1234 마태복음 조건 없는 사랑 마25:31-46  차옥숭 자매  2008-08-08 2850
1233 요한복음 놀이는 인생, 인생은 놀이 요3:16  길희성 형제  2008-08-08 2415
1232 출애굽기 진창길과 기적 출14:21-25  김준우 목사  2008-08-08 2316
1231 민수기 살듯이 죽기(In Death as in Life) 민20:1  최창모 교수  2008-08-08 2654
1230 고린도전 사랑, 그 난해한 수수께끼 고전13:11-13  차정식 교수  2008-08-08 2137
1229 마태복음 폭행 당하는 하늘나라, 꽃씨 뿌리는 예수 마11:12  정경일 형제  2008-08-08 2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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