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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0:7-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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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서창원 목사 |
참고 : | 새길교회 2002. 7.18 주일설교 |
기독교가 믿고 고백하는 궁극적 진리는 나사렛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의 실재가 인류 역사 속에서 경험되어 모든 이들에게 열려진 것이다. 이에 대한 진리의 증언이 성서에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기독교가 선포하는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체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존 S. 스퐁에 의하면 예수의 하나님 체험을 다음의 세 가지 관점에서 말하고 있다.
첫째, 예수의 경험은 사랑의 경험이었다. 이 사랑은 생명을 긍정하는 강력한 실재였다. 모든 인간의 장벽을 제거하고 모든 사람의 편견을 없애버릴 사랑의 힘이었다. 예수의 생애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성격은 엄청난 무제약적 사랑이었다. 예수가 체험하고 증거한 사랑은 인간의 영혼과 심성을 근원적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었다. 이런 사랑이 불러일으키는 것은 개방성, 편견의 소멸, 전적으로 개방되는 인간성의 노출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의 사랑을 거룩하고, 깊이 꿰뚫어보는 통찰력, 생명을 주며, 마음을 열게 하고 황홀하게 하는 사랑의 성격으로 받아드린다. 그런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내용의 진수이다. 이에 성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리고 예수도 사랑이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 이것이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거룩한 경험의 근거이다.
둘째, 예수의 경험은 생명의 경험으로 온전한 생명을 말한다. 예수의 생애는 인생의 의미를 그토록 깊게 풍요하게, 그리고 너무도 완전하게 보여 주었기에 바로 생명의 근원이 그의 안에 나타난 것으로 보였다. 예수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데, 하나님은 우주에 생기를 주는 생명으로 나타나서 인간이 자의식에 이르도록 만들었고, 생명을 긍정하며, 충만한 삶, 과감히 열린 삶, 완전한 삶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현존하셨다.
셋째로, 예수의 경험은 존재(Being)의 경험이었다. 원래 고대 히브리어의 하나님의 이름이 야훼(YHWH)였다. 이 단어는 본시 그 뜻과 힘이 존재하다 (to be)라는 동사에서 왔다. 폴 틸리히가 하나님을 부르는 말로 존재의 근원 (the Ground of All Being) 이라고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예수는 자신의 삶으로 존재의 근원을 살아냈으며 자신의 사랑을 통하여 남들에게도 그들의 존재의 깊고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게 만들었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긍정하라는 부름이다. 자기 자신이 되는 용기를 갖는 일, 자기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능력,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힘있게 사는 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나사렛 예수 안에서 만나는 하나님 체험은 그리스도 체험이며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현존과의 만남이다. 성서의 복음은 이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체험을 증언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서를 통해서 만나지는 진리 인식도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체험의 추 (追) 체험이다. 그래서 진정한 기독교란 궁극적으로 깊은 인간성으로 귀결되며 풍성한 삶에로의 초청이며 실존의 증가를 불러온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오늘의 역사적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 체험 을 새롭게 추 체험하며 이 체험의 길을 따라 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오늘의 영성을 추구하는 길이다. 한국교회는 진정한 기독교의 신앙으로 거듭나기 위해 새로운 영성이 필요하다. 깊은 하나님 체험 이 필요하다. 이곳이 오늘의 영성의 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해 남미해방신학자 G. 구티에레쯔는 새로운 영성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우선 전통적인 영성 방법의 문제점을 두 가지 방향에서 비판하고 있다. 먼저 전통적 영성 추구의 길이 소수 층의 엘리트 계층에만 가능한 것으로 오해되었다는 것이다. 수도자, 은둔자, 또는 신비자들처럼 고도의 전문가들의 영성을 통하여 하나님 체험 이 가능한 것처럼 인식되어 온 것이다. 다음은 영성 추구의 길은 개인주의적 덕성 함양을 목표로 하는, 세계와 격리되어야만 가능한 것으로 오해되었다. 하나님 체험 의 영성의 길이 세상과 영성이라는 이원적 체계로 분리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구티에레쯔는 남미의 가난한 민중의 체험에서 만난 하나님 체험을 통하여 제3의 영성의 길을 강력하게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는 먼저 일상적 생활 속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먹고 입고 살아가면서 느끼는 좌절, 희망 때대로 찾아오는 기쁨의 일상적 생활의 지평에서도 하나님 체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일부 영적 엘리트 만에게 아니라 밑바닥에 있는 민중에게 하나님은 찾아오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본다. 하나님의 행동은 무시간적 초월적 공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의 갈등, 좌절, 때로는 알 수 없는 애매함의 현실 속에서 스스로 말씀하시며 자신의 현존을 증거 하신다. 이에 세계의 구체성과 분리되어 하나님과의 만남을 추구하는 영성은 근본적으로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남미의 가난한 사람들이 발견한 영성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자신들이 수세기 동안 공경해 왔던 하나님은 그들의 가난을 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을 죽음의 힘으로부터 해방시키기를 원하시면 모든 차원에서 생명을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인간역사 안에 개입하여 죽음의 힘이 세력을 떨칠 때마다 그 힘을 깨치고 생명의 힘으로 치유하시고 화해시키는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나타난다. 역사적 현실에서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는 구체적인 삶 가운데서 만나지는 하나님 체험이 진정한 오늘의 영성이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기쁜 소식은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소식이며 미움과 파괴, 착취, 억압이란 말들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힘으로 극복될 수 있다는 소식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부름은 사랑에로, 삶에로, 그리고 존재에로 초대하는 영원한 부름이다. 그것은 생명을 창조하는 모든 것을 위하여 일하고 생명을 왜곡하는 모든 제도, 태도, 사람들에게 맞서서 반대하는 일이다. 그것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고, 의식을 높여 주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험으로 깨닫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생명에 깊이 들어갈 때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가능하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가 경험한 그리스도를 말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 성서를 읽을 때 문자를 넘어 그런 문자들이 보여지게 된 경험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오늘의 우리의 체험을 통해서 추(追) 체험되는 하나님 체험이 중요하다. 물론 각 시대의 하나님 경험은 그 자체로 일관성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체험 지평에서 만나지는 하나님 체험이 없이는 성서의 살아 있는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게 된다. 우리의 체험 지평에서 전통적인 하나님 체험은 재해석되고 재진술되어질 때 오늘의 상황에서도 역사 변혁의 위력으로 나타난다.
성서를 우리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읽을 때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하나님 체험의 지평과 융합될 때 성서의 하나님을 체험하게 된다. 이 하나님을 체험하게 될 때 하나님은 우리 각자는 생명의 근원에 의하여 창조되고, 사랑 받고, 우리들의 진정한 자신이 되어 생명의 충만함에 이르도록 살라는 깨우침을 받는다. 이에 비인간화시키는 힘, 그리고 생명을 왜곡시키고 감소시키는 그 어떤 힘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심판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세계에서 밀려난 변두리를 돌아보면서 배척을 받은 희생자들에게 우리 자신을 열었을 때이다. 그런 변두리에도 예수는 현존하여 사랑하며, 사람을 안으신다.
오늘의 영성은 하나님을 체험하는 길에서 시작된다. 이 하나님 체험이 복음을 이해하며 구현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길,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0:10下) 하였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하나님이 사랑의 원천이고, 생명의 기원이며, 존재의 근원이신 것을 알리는 접촉점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오늘의 진정한 영성은 나사렛 예수가 체험한 하나님을 우리 삶 속에서 다시 체험하는 길이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과 공동체의 정체성과 진정성을 확보해 나가는 길이다. 예수의 하나님 체험은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 체험의 지평과 합칠 때 가능하다. 그 적합성은 그리스도 체험에 달려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체험한 하나님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이 길에서만 성령의 영감을 받아 복음을 살아갈 수 있다. 일상성과 현실성에서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살기로 투신해야만 이 경험을 할 수 있다.
이렇게 예수를 따르는 길에서 죽음과 생명의 변증법과 만나게 된다. 불의와 투쟁한다는 것은 생명을 위해 싸우는 것이며 이 일을 위해 연대를 창출하게 된다. 이 죽음과 생명의 변증법 안에서, 그리고 부활하신 분의 승리 안에서 희망의 하나님이 경험된다.
오늘의 하나님 체험 이 곧 진리의 인식이며, 우리가 의미 있는 인간이 되는 길이며, 보다 신적인 거룩함을 드러내는 길이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존 S. 스퐁에 의하면 예수의 하나님 체험을 다음의 세 가지 관점에서 말하고 있다.
첫째, 예수의 경험은 사랑의 경험이었다. 이 사랑은 생명을 긍정하는 강력한 실재였다. 모든 인간의 장벽을 제거하고 모든 사람의 편견을 없애버릴 사랑의 힘이었다. 예수의 생애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성격은 엄청난 무제약적 사랑이었다. 예수가 체험하고 증거한 사랑은 인간의 영혼과 심성을 근원적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었다. 이런 사랑이 불러일으키는 것은 개방성, 편견의 소멸, 전적으로 개방되는 인간성의 노출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의 사랑을 거룩하고, 깊이 꿰뚫어보는 통찰력, 생명을 주며, 마음을 열게 하고 황홀하게 하는 사랑의 성격으로 받아드린다. 그런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내용의 진수이다. 이에 성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리고 예수도 사랑이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 이것이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거룩한 경험의 근거이다.
둘째, 예수의 경험은 생명의 경험으로 온전한 생명을 말한다. 예수의 생애는 인생의 의미를 그토록 깊게 풍요하게, 그리고 너무도 완전하게 보여 주었기에 바로 생명의 근원이 그의 안에 나타난 것으로 보였다. 예수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데, 하나님은 우주에 생기를 주는 생명으로 나타나서 인간이 자의식에 이르도록 만들었고, 생명을 긍정하며, 충만한 삶, 과감히 열린 삶, 완전한 삶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현존하셨다.
셋째로, 예수의 경험은 존재(Being)의 경험이었다. 원래 고대 히브리어의 하나님의 이름이 야훼(YHWH)였다. 이 단어는 본시 그 뜻과 힘이 존재하다 (to be)라는 동사에서 왔다. 폴 틸리히가 하나님을 부르는 말로 존재의 근원 (the Ground of All Being) 이라고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예수는 자신의 삶으로 존재의 근원을 살아냈으며 자신의 사랑을 통하여 남들에게도 그들의 존재의 깊고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게 만들었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긍정하라는 부름이다. 자기 자신이 되는 용기를 갖는 일, 자기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능력,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힘있게 사는 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나사렛 예수 안에서 만나는 하나님 체험은 그리스도 체험이며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현존과의 만남이다. 성서의 복음은 이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체험을 증언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서를 통해서 만나지는 진리 인식도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체험의 추 (追) 체험이다. 그래서 진정한 기독교란 궁극적으로 깊은 인간성으로 귀결되며 풍성한 삶에로의 초청이며 실존의 증가를 불러온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오늘의 역사적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 체험 을 새롭게 추 체험하며 이 체험의 길을 따라 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오늘의 영성을 추구하는 길이다. 한국교회는 진정한 기독교의 신앙으로 거듭나기 위해 새로운 영성이 필요하다. 깊은 하나님 체험 이 필요하다. 이곳이 오늘의 영성의 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해 남미해방신학자 G. 구티에레쯔는 새로운 영성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우선 전통적인 영성 방법의 문제점을 두 가지 방향에서 비판하고 있다. 먼저 전통적 영성 추구의 길이 소수 층의 엘리트 계층에만 가능한 것으로 오해되었다는 것이다. 수도자, 은둔자, 또는 신비자들처럼 고도의 전문가들의 영성을 통하여 하나님 체험 이 가능한 것처럼 인식되어 온 것이다. 다음은 영성 추구의 길은 개인주의적 덕성 함양을 목표로 하는, 세계와 격리되어야만 가능한 것으로 오해되었다. 하나님 체험 의 영성의 길이 세상과 영성이라는 이원적 체계로 분리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구티에레쯔는 남미의 가난한 민중의 체험에서 만난 하나님 체험을 통하여 제3의 영성의 길을 강력하게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는 먼저 일상적 생활 속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먹고 입고 살아가면서 느끼는 좌절, 희망 때대로 찾아오는 기쁨의 일상적 생활의 지평에서도 하나님 체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일부 영적 엘리트 만에게 아니라 밑바닥에 있는 민중에게 하나님은 찾아오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본다. 하나님의 행동은 무시간적 초월적 공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의 갈등, 좌절, 때로는 알 수 없는 애매함의 현실 속에서 스스로 말씀하시며 자신의 현존을 증거 하신다. 이에 세계의 구체성과 분리되어 하나님과의 만남을 추구하는 영성은 근본적으로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남미의 가난한 사람들이 발견한 영성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자신들이 수세기 동안 공경해 왔던 하나님은 그들의 가난을 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을 죽음의 힘으로부터 해방시키기를 원하시면 모든 차원에서 생명을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인간역사 안에 개입하여 죽음의 힘이 세력을 떨칠 때마다 그 힘을 깨치고 생명의 힘으로 치유하시고 화해시키는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나타난다. 역사적 현실에서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는 구체적인 삶 가운데서 만나지는 하나님 체험이 진정한 오늘의 영성이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기쁜 소식은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소식이며 미움과 파괴, 착취, 억압이란 말들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힘으로 극복될 수 있다는 소식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부름은 사랑에로, 삶에로, 그리고 존재에로 초대하는 영원한 부름이다. 그것은 생명을 창조하는 모든 것을 위하여 일하고 생명을 왜곡하는 모든 제도, 태도, 사람들에게 맞서서 반대하는 일이다. 그것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고, 의식을 높여 주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험으로 깨닫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생명에 깊이 들어갈 때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가능하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가 경험한 그리스도를 말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 성서를 읽을 때 문자를 넘어 그런 문자들이 보여지게 된 경험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오늘의 우리의 체험을 통해서 추(追) 체험되는 하나님 체험이 중요하다. 물론 각 시대의 하나님 경험은 그 자체로 일관성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체험 지평에서 만나지는 하나님 체험이 없이는 성서의 살아 있는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게 된다. 우리의 체험 지평에서 전통적인 하나님 체험은 재해석되고 재진술되어질 때 오늘의 상황에서도 역사 변혁의 위력으로 나타난다.
성서를 우리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읽을 때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하나님 체험의 지평과 융합될 때 성서의 하나님을 체험하게 된다. 이 하나님을 체험하게 될 때 하나님은 우리 각자는 생명의 근원에 의하여 창조되고, 사랑 받고, 우리들의 진정한 자신이 되어 생명의 충만함에 이르도록 살라는 깨우침을 받는다. 이에 비인간화시키는 힘, 그리고 생명을 왜곡시키고 감소시키는 그 어떤 힘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심판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세계에서 밀려난 변두리를 돌아보면서 배척을 받은 희생자들에게 우리 자신을 열었을 때이다. 그런 변두리에도 예수는 현존하여 사랑하며, 사람을 안으신다.
오늘의 영성은 하나님을 체험하는 길에서 시작된다. 이 하나님 체험이 복음을 이해하며 구현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길,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0:10下) 하였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하나님이 사랑의 원천이고, 생명의 기원이며, 존재의 근원이신 것을 알리는 접촉점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오늘의 진정한 영성은 나사렛 예수가 체험한 하나님을 우리 삶 속에서 다시 체험하는 길이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과 공동체의 정체성과 진정성을 확보해 나가는 길이다. 예수의 하나님 체험은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 체험의 지평과 합칠 때 가능하다. 그 적합성은 그리스도 체험에 달려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체험한 하나님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이 길에서만 성령의 영감을 받아 복음을 살아갈 수 있다. 일상성과 현실성에서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살기로 투신해야만 이 경험을 할 수 있다.
이렇게 예수를 따르는 길에서 죽음과 생명의 변증법과 만나게 된다. 불의와 투쟁한다는 것은 생명을 위해 싸우는 것이며 이 일을 위해 연대를 창출하게 된다. 이 죽음과 생명의 변증법 안에서, 그리고 부활하신 분의 승리 안에서 희망의 하나님이 경험된다.
오늘의 하나님 체험 이 곧 진리의 인식이며, 우리가 의미 있는 인간이 되는 길이며, 보다 신적인 거룩함을 드러내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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