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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3:51-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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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채수일 목사 |
참고 : | 한신대학교 신학과 교수 /새길교회 2002. 8. 4 주일설교 |
1.
오늘의 말씀은 오랫동안 '온고지신'의 시각에서 해석되어 왔습니다. 훌륭한 율법학자, 또는 교사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과 낡은 것을 꺼내는 집주인'처럼, 전통과 새로운 변화를 균형 있게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끌어낸 것이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전통에만 얽매어 시대의 새로운 변화를 받아드리지 않으면 고리타분하고, 그렇다고 새 것만 쫓으면서 전통을 배우지 않으면 생각의 뿌리를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의 비밀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이 말씀을 전후한 상황을 고려하면 우리는 곧바로 이 말씀의 비밀은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마치자마자 예수님은 고향 나사렛에서 배척을 받고 떠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마 13, 57). 까닭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달갑지 않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곧이어 세례 요한이 처형당한 이야기가 뒤따르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이 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임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의 비밀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전통과 새것 사이의 균형을 이룬 지식인으로 만들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핵심은 예수님이 자신의 제자들, 곧 갈릴리 출신의 어부, 농부들을 '하늘 나라를 위하여 훈련받은 율법학자'로 규정했다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것이 율법학자들, 곧 교육받은 율법교사들을 격분시킨 것입니다. 제대로 교육도 못 받은 천한 신분의 제자들을 정식 교육을 받고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있는 높은 신분의 율법학자들과 대립시킨 예수님의 태도가 사뭇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말씀의 비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하늘나라를 위해 훈련받은 율법학자'로 규정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늘나라를 위해 훈련받은 율법학자들은 다른 율법학자들과 어떻게 다를까요?
2.
이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하고싶습니다. 제가 1970년에 신학공부를 시작했을 때, 큰 감동을 준 책 한 권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현주 목사님이 번역한 '춤추는 신'이 그 책입니다. 저자는 당시 하바드 대학교 신학대학 교수였던 '샘 킨'(Sam Keen) 입니다. 그 때까지 저는 한번도 하느님이 춤을 추실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춤을 추기는커녕 온 몸에 깁스를 한 것처럼 경직되어 있고 엄숙하기만 한 분이 하느님이라고 생각해 온 저에게 샘 킨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고 또 춤도 함께 추시는 분이심을 깨닫게 해 준 것입니다. 샘 킨은 당시 새로운 신학을 주도한 잡지를 편집하면서 이름을 알린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이 이름이 신학의 지평에서 사라졌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그가 하바드 대학 교수직을 버리고 아메리카 대륙을 방랑하면서 인디언들, 흑인들, 소수 민족들과 함께 어울려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랫동안 그의 삶을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가 세상을 떠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2000년 1월 신문에 눈을 돌리다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오래 전에 아마도 세상을 떠났으리라고 생각했던 그의 책이 광고된 것입니다. 신학생 시절, 저를 감동과 흥분으로 몰아넣은 '춤추는 신'의 저자인 샘 킨이 빙그레 웃으면서 저에게 다가오는 것 같았습니다. 샘 킨이 '공중을 나는 철학자'라는 책으로 다시 살아 돌아온 것입니다. 이 책에서 저는 그가 두 번의 이혼과 오랜 기간의 방황 끝에 작은 대학 강단에서 신학과 철학을 가르치다가 은퇴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책, '공중을 나는 철학자'는 그가 평생 하고싶던 일, 그러나 하지 못하다가 은퇴한 후에야 시작할 수 있었던 일, 곧 '공중 그네 타기'를 배운 과정을 성찰한 책이었습니다.
70의 나이에 '공중 그네 타기'를 배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샘 킨은 '공중 그네 타기'를 시작합니다. 그는 힘든 일에 도전함으로써 늙는다는 것이 쓸모 없다는 말과 동의어가 아님을 증명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는 공중 그네 타기를 배우면서 '노인이 되었기 때문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있으면 노인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높은 곳에 올라 갈 때마다 두려웠습니다. 두려움과 공포가 엄습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놀랍게도 세계 정상의 선수들도 공중그네를 탈 때마다 두려워한다는 것을 듣습니다. 그는 서서히 '두려움을 없애기보다는 매일 용기를 북돋우는 연습을 함으로써 공중을 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끔 참을 수 없는 것은 마음의 변화였습니다:
'위대한 공중 공예사들과 나보다 잘하는 동료 곡예사들의 화려한 묘기와 과감한 동작을 보면 감탄을 금할 수 없다. 하지만 가끔 내 안에서 사악한 마법이 일어나, 이들의 완벽한 기술과 나의 보잘 것 없는 동작을 비교한다. 그러면 나는 금새 우울해진다. 이들의 굉장한 묘기에 찬사를 보내기보다는 시기하는 마음이 생기면서 절망에 빠진다.
비교가 사람을 불쾌하게 만든다는 것을 힘든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스스로를 열등하다고 생각한지 채 며칠도 안되어 마음이 완전히 바뀌면서 나는 자신을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카도나 만큼은 못하지만 뚱보 클루츠 막스보다는 내가 훨씬 그네를 잘 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공중그네를 연습하며, 비교하고 판단하는 것이 바보짓이라는 것을 계속 깨닫게 되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을 평가할 때, 자신을 열등하거나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럼으로써 자신의 유일성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높음과 낮음, 우월감과 열등감, 가학성과 피가학성 사이에서 계속 흔들린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오직 타인과의 비교 속에서만 존재하게 된다.
하느님은 나에게 다른 사람이 되라고 말하지 않는다. 만약 하느님이 열한 번째 계명을 주신다면 바로 이것일 것이다: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말라'.
'공중 그네 타기'를 배우면서 샘 킨은 제일 먼저 그네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물 위로 떨어지는 것부터 배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모든 배움은 사실 높이 올라가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엄청난 사교육비를 들여가며 자녀 교육을 시키는 이유는 일류 대학이 좋은 직장과 높은 소득을 보장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교육은 오직 신분상승, 그에 상응한 소득상승, 곧 올라가기 위해서 있습니다. 그런데 '공중 그네 타기'는 먼저 떨어지는 법을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떨어지기 위해서 올라가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직 올라가기 위해서만 살아온 사람이라도 또 정상에 도달한 사람이라도 언젠가는 내려와야 합니다. 세상에 올 때는 순서가 있었지만 세상을 떠날 때에는 순서가 없는 법입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나이가 된 샘 킨, 그는 다가오는 죽음을 의식하며 살아갈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까지는 그네를 놓는 것보다 잡는 것을 더 잘했지만 마지막 묘기를 완성하기 위해 나는 우아하게 떨어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3.
다시 오늘의 말씀으로 눈을 돌리겠습니다. 마태복음 13장 51절에서 53절의 말씀은 1절부터 시작하는 일련의 비유 말씀의 대단원입니다.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1-9),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24-30),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31-33), 하늘 나라에 대한 세 가지 비유(44-50)를 마무리하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이것들을 모두 깨달았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를 위하여 훈련을 받은 율법학자는 누구나 자기 곳간에서 새 것과 낡은 것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유대교에서 율법학자는 '랍비' 곧 '위대한 사람', '수수께끼 같은 말씀의 숨겨진 의미를 연구하고, 비유의 수수께끼에 몰두하는 교사'(집회서 39,3)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의 율법학자들을 '하늘 나라를 위하여 훈련을 받은 율법학자', 곧 그의 제자들과 대칭 시킵니다. 유대교 율법학자들은 자신이 갈릴리 출신의 촌뜨기, 변두리 사람들과 동일시되는 것이 불쾌했습니다. 그래서 수군거립니다: '이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이고, 그의 아우들은 야고보와 요셉과 시몬과 유다가 아닌가? 또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와 같이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 사람이 이 모든 것을 어디에서 얻었을까?'(마 13,54-57).
일류 대학은커녕 제대로 학교도 다니지 못했을 목수의 아들이 어디서 이런 지혜와 놀라운 능력을 얻었는지 그들은 놀랐습니다. 아니 예수가 못마땅했습니다. 율법학자들의 배움과 지식이 그들의 신분을 상승시켜주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지식에는 지혜와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대교 율법학자들은 교사가 되기 위해 배우거나 지도자가 되기 위해 배웁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를 위해 배우는 사람은 섬기기 위해서 배우는 사람입니다. 유대교 율법학자들에게는 지식의 축적이 중요하지만, 하늘나라를 위해 배우는 사람에게는 지혜와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4.
오늘 날 흔히 배운다는 것은 지식의 양적 축적과 개인적 실력, 혹은 능력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실력지향적 배움이 경쟁사회에서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받아쓰기와 모방과 암기만 허락하고 창조성과 참여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깨달음은 정보의 수집에 기초한 배움이 아니라 경험에 기초한 배움입니다. 지식의 축적에는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깨달음은 참여적입니다. 가르치는 이와 배우는 이 모두가 서로에게서 배웁니다.
지식은 사람 사이의 경계를 높이지만 깨달음은 경계를 허뭅니다. 국경과 민족과 출신 성분, 성의 차이, 개인이나 집단의 능력이나 잠재력도 초월합니다.
깨달음은 실천 지향적입니다. 정보의 전달에 머물지 않고 깨달은 사람을 실천에로 움직입니다. 깨달음은 의식의 변화만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를 지향합니다.
레스터 서로우가 말한 것처럼 우리 시대의 지식은 '지배'를 지향합니다. 그러나 지혜와 깨달음은 변화와 '공생'을 목적으로 합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을 패러디화해서 말한다면, '정보와 지식과 지혜, 이 세 가지는 언제나 있겠지만 그 가운데 으뜸은 지혜입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새길 교회가 지혜의 근본이신 하느님을 배우고 깨닫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한국 교회의 새로운 길을 여는 교회, 새로운 길을 가는 교회, 그리하여 마침내 새로운 길 자체가 되는 새길교회가 되길 기원합니다.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오늘의 말씀은 오랫동안 '온고지신'의 시각에서 해석되어 왔습니다. 훌륭한 율법학자, 또는 교사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과 낡은 것을 꺼내는 집주인'처럼, 전통과 새로운 변화를 균형 있게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끌어낸 것이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전통에만 얽매어 시대의 새로운 변화를 받아드리지 않으면 고리타분하고, 그렇다고 새 것만 쫓으면서 전통을 배우지 않으면 생각의 뿌리를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의 비밀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이 말씀을 전후한 상황을 고려하면 우리는 곧바로 이 말씀의 비밀은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마치자마자 예수님은 고향 나사렛에서 배척을 받고 떠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마 13, 57). 까닭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달갑지 않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곧이어 세례 요한이 처형당한 이야기가 뒤따르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이 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임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의 비밀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전통과 새것 사이의 균형을 이룬 지식인으로 만들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핵심은 예수님이 자신의 제자들, 곧 갈릴리 출신의 어부, 농부들을 '하늘 나라를 위하여 훈련받은 율법학자'로 규정했다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것이 율법학자들, 곧 교육받은 율법교사들을 격분시킨 것입니다. 제대로 교육도 못 받은 천한 신분의 제자들을 정식 교육을 받고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있는 높은 신분의 율법학자들과 대립시킨 예수님의 태도가 사뭇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말씀의 비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하늘나라를 위해 훈련받은 율법학자'로 규정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늘나라를 위해 훈련받은 율법학자들은 다른 율법학자들과 어떻게 다를까요?
2.
이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하고싶습니다. 제가 1970년에 신학공부를 시작했을 때, 큰 감동을 준 책 한 권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현주 목사님이 번역한 '춤추는 신'이 그 책입니다. 저자는 당시 하바드 대학교 신학대학 교수였던 '샘 킨'(Sam Keen) 입니다. 그 때까지 저는 한번도 하느님이 춤을 추실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춤을 추기는커녕 온 몸에 깁스를 한 것처럼 경직되어 있고 엄숙하기만 한 분이 하느님이라고 생각해 온 저에게 샘 킨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고 또 춤도 함께 추시는 분이심을 깨닫게 해 준 것입니다. 샘 킨은 당시 새로운 신학을 주도한 잡지를 편집하면서 이름을 알린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이 이름이 신학의 지평에서 사라졌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그가 하바드 대학 교수직을 버리고 아메리카 대륙을 방랑하면서 인디언들, 흑인들, 소수 민족들과 함께 어울려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랫동안 그의 삶을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가 세상을 떠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2000년 1월 신문에 눈을 돌리다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오래 전에 아마도 세상을 떠났으리라고 생각했던 그의 책이 광고된 것입니다. 신학생 시절, 저를 감동과 흥분으로 몰아넣은 '춤추는 신'의 저자인 샘 킨이 빙그레 웃으면서 저에게 다가오는 것 같았습니다. 샘 킨이 '공중을 나는 철학자'라는 책으로 다시 살아 돌아온 것입니다. 이 책에서 저는 그가 두 번의 이혼과 오랜 기간의 방황 끝에 작은 대학 강단에서 신학과 철학을 가르치다가 은퇴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책, '공중을 나는 철학자'는 그가 평생 하고싶던 일, 그러나 하지 못하다가 은퇴한 후에야 시작할 수 있었던 일, 곧 '공중 그네 타기'를 배운 과정을 성찰한 책이었습니다.
70의 나이에 '공중 그네 타기'를 배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샘 킨은 '공중 그네 타기'를 시작합니다. 그는 힘든 일에 도전함으로써 늙는다는 것이 쓸모 없다는 말과 동의어가 아님을 증명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는 공중 그네 타기를 배우면서 '노인이 되었기 때문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있으면 노인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높은 곳에 올라 갈 때마다 두려웠습니다. 두려움과 공포가 엄습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놀랍게도 세계 정상의 선수들도 공중그네를 탈 때마다 두려워한다는 것을 듣습니다. 그는 서서히 '두려움을 없애기보다는 매일 용기를 북돋우는 연습을 함으로써 공중을 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끔 참을 수 없는 것은 마음의 변화였습니다:
'위대한 공중 공예사들과 나보다 잘하는 동료 곡예사들의 화려한 묘기와 과감한 동작을 보면 감탄을 금할 수 없다. 하지만 가끔 내 안에서 사악한 마법이 일어나, 이들의 완벽한 기술과 나의 보잘 것 없는 동작을 비교한다. 그러면 나는 금새 우울해진다. 이들의 굉장한 묘기에 찬사를 보내기보다는 시기하는 마음이 생기면서 절망에 빠진다.
비교가 사람을 불쾌하게 만든다는 것을 힘든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스스로를 열등하다고 생각한지 채 며칠도 안되어 마음이 완전히 바뀌면서 나는 자신을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카도나 만큼은 못하지만 뚱보 클루츠 막스보다는 내가 훨씬 그네를 잘 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공중그네를 연습하며, 비교하고 판단하는 것이 바보짓이라는 것을 계속 깨닫게 되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을 평가할 때, 자신을 열등하거나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럼으로써 자신의 유일성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높음과 낮음, 우월감과 열등감, 가학성과 피가학성 사이에서 계속 흔들린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오직 타인과의 비교 속에서만 존재하게 된다.
하느님은 나에게 다른 사람이 되라고 말하지 않는다. 만약 하느님이 열한 번째 계명을 주신다면 바로 이것일 것이다: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말라'.
'공중 그네 타기'를 배우면서 샘 킨은 제일 먼저 그네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물 위로 떨어지는 것부터 배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모든 배움은 사실 높이 올라가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엄청난 사교육비를 들여가며 자녀 교육을 시키는 이유는 일류 대학이 좋은 직장과 높은 소득을 보장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교육은 오직 신분상승, 그에 상응한 소득상승, 곧 올라가기 위해서 있습니다. 그런데 '공중 그네 타기'는 먼저 떨어지는 법을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떨어지기 위해서 올라가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직 올라가기 위해서만 살아온 사람이라도 또 정상에 도달한 사람이라도 언젠가는 내려와야 합니다. 세상에 올 때는 순서가 있었지만 세상을 떠날 때에는 순서가 없는 법입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나이가 된 샘 킨, 그는 다가오는 죽음을 의식하며 살아갈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까지는 그네를 놓는 것보다 잡는 것을 더 잘했지만 마지막 묘기를 완성하기 위해 나는 우아하게 떨어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3.
다시 오늘의 말씀으로 눈을 돌리겠습니다. 마태복음 13장 51절에서 53절의 말씀은 1절부터 시작하는 일련의 비유 말씀의 대단원입니다.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1-9),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24-30),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31-33), 하늘 나라에 대한 세 가지 비유(44-50)를 마무리하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이것들을 모두 깨달았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를 위하여 훈련을 받은 율법학자는 누구나 자기 곳간에서 새 것과 낡은 것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유대교에서 율법학자는 '랍비' 곧 '위대한 사람', '수수께끼 같은 말씀의 숨겨진 의미를 연구하고, 비유의 수수께끼에 몰두하는 교사'(집회서 39,3)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의 율법학자들을 '하늘 나라를 위하여 훈련을 받은 율법학자', 곧 그의 제자들과 대칭 시킵니다. 유대교 율법학자들은 자신이 갈릴리 출신의 촌뜨기, 변두리 사람들과 동일시되는 것이 불쾌했습니다. 그래서 수군거립니다: '이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이고, 그의 아우들은 야고보와 요셉과 시몬과 유다가 아닌가? 또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와 같이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 사람이 이 모든 것을 어디에서 얻었을까?'(마 13,54-57).
일류 대학은커녕 제대로 학교도 다니지 못했을 목수의 아들이 어디서 이런 지혜와 놀라운 능력을 얻었는지 그들은 놀랐습니다. 아니 예수가 못마땅했습니다. 율법학자들의 배움과 지식이 그들의 신분을 상승시켜주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지식에는 지혜와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대교 율법학자들은 교사가 되기 위해 배우거나 지도자가 되기 위해 배웁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를 위해 배우는 사람은 섬기기 위해서 배우는 사람입니다. 유대교 율법학자들에게는 지식의 축적이 중요하지만, 하늘나라를 위해 배우는 사람에게는 지혜와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4.
오늘 날 흔히 배운다는 것은 지식의 양적 축적과 개인적 실력, 혹은 능력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실력지향적 배움이 경쟁사회에서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받아쓰기와 모방과 암기만 허락하고 창조성과 참여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깨달음은 정보의 수집에 기초한 배움이 아니라 경험에 기초한 배움입니다. 지식의 축적에는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깨달음은 참여적입니다. 가르치는 이와 배우는 이 모두가 서로에게서 배웁니다.
지식은 사람 사이의 경계를 높이지만 깨달음은 경계를 허뭅니다. 국경과 민족과 출신 성분, 성의 차이, 개인이나 집단의 능력이나 잠재력도 초월합니다.
깨달음은 실천 지향적입니다. 정보의 전달에 머물지 않고 깨달은 사람을 실천에로 움직입니다. 깨달음은 의식의 변화만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를 지향합니다.
레스터 서로우가 말한 것처럼 우리 시대의 지식은 '지배'를 지향합니다. 그러나 지혜와 깨달음은 변화와 '공생'을 목적으로 합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을 패러디화해서 말한다면, '정보와 지식과 지혜, 이 세 가지는 언제나 있겠지만 그 가운데 으뜸은 지혜입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새길 교회가 지혜의 근본이신 하느님을 배우고 깨닫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한국 교회의 새로운 길을 여는 교회, 새로운 길을 가는 교회, 그리하여 마침내 새로운 길 자체가 되는 새길교회가 되길 기원합니다.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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