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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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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20: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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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형선 형제 |
참고 : | 연세대학교 보건행정학과 교수 /새길교회 2002. 8.11 주일설교 |
흔히 "포도원 품꾼과 품삯에 관한 비유"로 명명되는 마태복음 2장 1절에서 16절까지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봅시다. 우선 등장인물로는 자기의 포도원에 일시킬 품꾼을 구하러 이른 아침부터 장터에 나가는 집주인이 나옵니다. 다음으로는 품꾼들이 나오는데 새벽부터 선택되어 일하는 사람과 각각 오전 9시(유대시간 3시), 낮 12시(유대시간 6시), 오후 3시(유대시간 9시)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후 5시(유대시간 11시)에 선택되어 일하는 사람으로 구분되어 등장합니다 (단순히 주인을 대신해서 품삯을 나누어주는 역할만 하는 청지기도 등장하지만 이 스토리에서는 의미 있는 역할은 아님). 스토리를 이루고 있는 본문의 16개 절은 확실하게 서론, 본론, 결론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서론에 해당하는 1절은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고용하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어떤 포도원 주인과 같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다음 2절에서 15절까지는 본론에 해당하는데, 각각 다른 시간에 일을 시작해서 같은 시간에 일을 끝낸 품꾼들에게 똑같은 한 데나리온의 품삯이 주어지고 이는 먼저 와서 일한 사람들의 불만을 야기하게 되며, 이에 대해 주인은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하고 일을 시킨 사람에게 자기는 약속한대로 주었기 때문에 잘못이 없고 마지막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은 내 마음이니 당신은 신경 쓰지 말라고 대답합니다. 마지막으로 16절에서 "이와 같이,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될 것이다"라고 하는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본문은 흔히 세상의 모습과는 다른 천국에 관한 비유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주인으로 상징되는 하나님, 데나리온으로 상징되는 구원, 그리고 품꾼으로 상징되는 구원받은 사람들에 관한 비유로 말입니다. 멋 옛날의 교부 Origen(185-254)은 아침 6시의 품꾼들을 아담부터 노아시대의 구원받은 사람들, 9시 품꾼을 그 이후 아브라함 시대까지의 구원받은 사람들, 12시 품꾼들을 그 이후 모세 시대까지의 구원받은 사람들, 오후 3시 품꾼들을 그 이후 여호수아 시대까지의 구원받은 사람들, 오후 5시의 품꾼들을 그 이후 그리스도 시대까지의 구원받은 사람들로, 즉 예수께서 이 말씀을 설파할 당시대까지의 구원받은 자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합니다. 현대의 신학자 Peter Burkruck의 조직신학에 관한 책자를 보니까 반대로 예수 후의 시대를 구분하여, 그리고 아예 연도까지 정해서, 이른 아침을 예수 후부터 AD500년까지, 오전 9시는 AD500에서 AD 1000년까지, 낮 12시는 AD1000에서 AD1500까지, 오후 3시는 AD1500에서 AD1900까지 그리고 오후 5시는 그 후 종말까지라고 주석을 달고 있더군요. 이렇게 작위성 짙은 해석까지 나가지는 않더라도 대부분의 신학자와 서적들은 - 서로 추후 주어지리라 기대되는 보상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 제자들에 대한 질타성 비유라는 해석 등 편차가 있지는 하지만 - 이 스토리가 구원 또는 천국의 상급에 관한 비유라는 것은 의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워낙 마태복음의 기자가 서론, 본론, 결론을 확실하게 맺어 놔서 다른 해석의 여지를 좁혀 놓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저는 마태복음 기자에 의해 기록되어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을 다시 보면서 갈릴리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설파하셨으리라 생각되는 이 스토리의 본래 의미를 찾아보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과연 이 스토리가 기존의 해석대로 저 천국에 들어가는 것에 관한 것일까요? 천국의 상급은 하나님에 대한 충성의 시간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니까, 하나님께 감사하고 인간의 공과를 서로 다투지 말아라 하는 취지에서 예수께서 이 말씀하셨을까요?
본문 1절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고용하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어떤 포도원 주인과 같다"는 구절이 대다수의 사람들로 하여금 이 이야기가 천국에 관한 얘기이구나 하는 선입관에 빠지게 하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애당초 예수의 사고 범위에 요한계시록에서 꿈꾸듯이 묘사되어 있는, "저 구름 위 어딘가에 있는,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각종 보석으로 꾸며진 천국" 식의 그림이 없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해야 할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장차 도래할 미래적 환희의 나라로 생각했지만, 예수는 이러한 종말론적인 천국관을 비판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으며 이 세상에서 완성될 궁극적인 영광의 나라임을 설파하고 있었습니다. 본문 1절은 마태복음 기자의 첨부이거나, 설령 역사적 예수께서 비슷한 말씀을 하셨더라도 종국적으로 도래해야 할 이 세상의 희망적인 모습을 얘기하는 의례적인 화법이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사실에 부합하리라고 봅니다. 즉, 역사적 예수께서 설파한 오늘 본문의 메세지는 후대의 마태복음의 기자나 당시의 신도들이 환상 속에 갈구하던 하늘 나라 (kingdom of heaven)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스토리는 문자 그대로 날품팔이 품꾼의 노동과 노동에 대한 대가에 대한 얘기입니다. '천국'이라는 신앙고백적인 후세의 환상을 사상해버리고 예수께서 팔레스타인 지방의 민중을 앞에 놓고 때로는 익살스럽게 때로는 흥분된 목소리로 2절에서 15절에 나오는 스토리를 얘기하시는 모습을 가만히 상상해봅시다. 예수님은 당시 팔레스타인 지방의 지지리도 가난하고 하루 품팔이 일해 먹고살기 바쁜 사람들에 관해 얘기하고 계십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방은 농번기에 소작이나 대농의 일을 하는 것으로는 먹고살기 힘들어서 농한기 등에는 '수고와 더위를 무릅쓰고'(본문 12절) 날품팔이 일을 하든지 해서 생계를 꾸려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임시·일용직 등 비정규직의 불완전 취업자이긴 합니다만, 국가의 구빈책이나 체계적인 사회보장제도가 없던 당시로서는 그나마 이러한 일이라도 없으면 굶어 죽을 수도 있는, 생계 상으로는 훨씬 절박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 비유는 바로 이러한 사람들, 길거리나 저자에서 일거리를 찾아 소일하다가 운 좋게 일이 있으면 생계가 유지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생계 유지가 막막한 갈릴리 지방의 "땅의 사람"(암 하레츠)들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2천년 전 팔레스타인 지방이라는 시대적, 지역적 배경을 염두에 두면서 본문을 다시 살펴봅시다.
우선, 노동시간입니다. 본문에서 볼 때, 팔레스타인 지방의 노동자들은 대체로 아침 6시경부터 오후 6시경까지 일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식사시간을 포함한 하루 전일 근무 시간이 12시간 정도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비유에서는 12시간을 온전하게 일한 날품팔이 품꾼과 9시간, 6시간, 3시간 일한 날품팔이 품꾼 그리고 1시간밖에 일하지 못한 날품팔이 품꾼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의 노동시간은 이렇게 서로 다르지만, 이러한 차이를 개인의 탓으로만 돌릴 수 없는 측면이 있습니다. 노동수요가 공급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상태, 일을 하고싶어도 일을 시켜주는 사람이 없는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의 일할 수 있는 시간이 거의 다 지난 오후 5시까지 저자에서 소일하고 있는 품꾼들에게 주인이 묻습니다. '왜 당신들은 온종일 이렇게 하는 일없이 빈둥거리고 있소?' 이에 그들이 대답합니다.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켜 주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일할 능력이 부족해서 적합한 일자리를 찾을 수 없는 사람도 있겠지만, 일할 의지는 있어도 일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사람에 관한 얘기입니다. 아니 일할 능력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일을 안 할 수 없는 상황, 딸린 식구는 물론 제 몸 하나 보존하기 어려워 일하기 싫고 말고 하는 것 자체가 사치인 사람들에 관한 얘기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계약된 賃金수준입니다.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아침부터 선택되어 온종일 일하게 된 사람들은 1 데나리온이라는 일당을 받기로 처음부터 합의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간부터 고용이 되어 하루 온전한 일을 할 수 없던 사람에게는 '상당하게' (개역성경) 내지 '적당한 품삯을' (표준새번역) 주리라는 약속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상당하게'(또는 '적당한 품삯을')는 고용주에게 임금수준을 상당부분 위임한, 어찌 보면 전근대적인 계약을 의미합니다. 선한 고용주라면 더 인간적인 대가를 받을 수 있지만 악한 고용주라면 임금을 착취당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즉, 고용주의 선의, 악의 여부에 임금수준을 맡기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제가 확인한 모든 번역판에서 '상당하게'에 해당하는 부분이 'whatever is right'라고 되어 있더군요. 여기서 what이라는 단어보다는 whatever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집주인은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만큼 충분히' 주겠다고 약속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정확할 것 같습니다. 즉 이 스토리에서 주인은 임금수준과 관련하여 형식상으로는 '전근대적' 계약방식을 통해서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인간적' 보상을 약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실제 지불된 임금입니다. 고용주는 실제로 모든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이라는 같은 일당을 지불했습니다. 서로 다른 노동시간에도 불구하고 같은 임금을 지불한 것이지요. 일을 더 한 사람과 덜 한 사람이 똑 같은 대가를 받은 것입니다. 일반 상식에 벗어난 지불보상입니다. 일한 시간에 따라 임금을 받는 것이 상식인데, 이 비유에 나오는 품꾼들은 '능력 내지 기회'에 따라 일을 했고 생계 유지를 위한 '필요'에 따라 대가를 지불 받았습니다. 앞서 말한 전근대적인 계약 형식에 따랐지만 '인간적'인 내용의 보상을 실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1절에 나오는 대로 이 스토리는 당시 세상의 상식이 아닌 새 세상의 상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새 세상의 지불보상입니다. 본문 1절이 마태복음 기자에 의한 첨부가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에 실제 있었던 것이라면, 예수 당신은 필요 최소한의 품삯이 지불되는 세상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나라'라는 얘기를 하시기 위해 그러한 서론을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모두들 알고 계시겠지만, 공관복음의 도처에 보이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는 가난하고, 억눌리고, 소외된 인간에 대한 배려와 부자와 압제자와 기득권층에 대한 질타가 일관되게 흐르고 있습니다. 예수는 가난한 자, 감옥에 있는 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라고 하고 있을 뿐 아니라 (마태 25:40),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어렵다고, 아니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처럼 불가능하다고, 어찌 보면 극언에 가까운 말씀을 합니다 (마태 19:24-25). 저는 오늘의 본문을 읽으면서 압제와 가난에 찌들인 팔레스타인 민중을 앞에 놓고 역설적인 스토리로 핵심에 접근하고 있는 예수의 모습을 상상합니다. 예수는 당시에 일반화된 소작인, 품꾼들 앞에서 그들에 관한 오늘 본문의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당신들이 일을 하기 싫어서 안한 것도 아니고, 일을 하고 싶어도 써주질 않는데, 고용되어 일한 시간이 적다고 그나마 한 데나리온의 품삯도 못 받으면 당신만 쳐다보고 살아가는 가족들은 어쩌란 말이오? 오늘도 또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잠을 청해야 하겠는가? 진정한 주인이라면 최소한의 품삯은 주려고 할 것이고 그들에게 최소한의 품삯을 준다고 해서 불평할 일은 아니지 않는가?"라고 말입니다.
대다수 민중이 압제와 가난에 찌들리던 2천년 전의 팔레스타인의 상황과 지금의 우리의 상황은 분명히 다릅니다만, 오늘의 본문에는 시대를 초월해서 일관하여 시사하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사회경제적 소외자에 대한 인간주의적인 접근'입니다. 사회의 주변부에서, 자기 권리를 주장하기보다는 그날 그날을 체념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기본적인 배려는 노동과 임금의 일반 상식과는 관계없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아니 최소의 배려야말로 상식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국가 사회보장제도의 한 축을 담당하는 사람으로서 예수의 이 메시지를 사회보장제도와 관련지어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오늘의 본문 스토리가 연관된 사회보장제도에 무엇이 있을까요. 크게 두 가지가 떠오릅니다. 우선 '최저임금제도'가 그것이겠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최저임금제도가 1988년부터 도입되었습니다. 최저임금 수준이 너무 낮고 (2002년 현재 월 47만5천원) 적용대상자가 미미해 사실상 '있으나 마나 한' 제도가 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기는 하지만, 제도의 원래 취지 자체로는 예수께서 희망적으로 설파하신 하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사회제도의 하나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또 하나의 제도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있습니다. 바로 보건복지부에서 제가 담당하던 제도입니다. 앞서 논한 최저임금제에 의해 보호되고 있는 근로자들은 그나마 상시고용의 상태에 있고 따라서 4대 사회보험의 적용대상이 되는 점을 고려할 때, 지금 말하는 생활보호대상자들이 예수께서 앞에 두고 말씀을 설파한 갈릴리의 민중, 본문의 소재가 된 날품팔이 품꾼의 상황과 더 가까울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스토리가 기초생활보장제도와 관련지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기초생활보장제도에 대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 제도는 평상시 보험료를 내고 필요시 급여를 받는 의료보험, 국민연금, 고용보험 등의 사회보험과는 구분되는 사회부조제도의 하나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산조사(means test)를 기초로 해서 가난한 사람에게 생계비 등을 지급하는 제도입니다. 보유자산이 미미하고 (재산기준), 수입이 작은데 (소득기준), 부양능력자가 없는 (부양자기준) 가구가 생계비 수급자가 되는데, 현재 전 국민의 약3%가 이에 해당합니다. 2000년도 이후 크게 바뀐 지금의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에서는, 국가에서 정한 최저생계비 규모(예, 2인 가구 57만원)에서 그 가구의 수입을 뺀 만큼이 생계비로 지원되는 됩니다. 즉, 수입이 많아지면 생계비지원은 그만큼 줄어들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을 보충급여 방식이라고 합니다. 2000년도 이전에는 수입에 관계없이 모든 생활보호 대상자에게 저액의 고정된 생계비를 지원하는 정액지원방식이었습니다. 따라서 같은 생활보호 대상자라고 해도 수입이 아주 없는 사람은 최저생계비에 도달하지 못하고 수입이 어느 정도 되는 사람은 최저생계비 이상을 확보할 수 있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두 방식에는 상당한 철학적 차이가 있고 어느 것이 좋은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편의상 하루 최저생계비가 1 데나리온이라고 합시다. 지금은 보충급여 방식을 적용하고 있기 때문에 임금수입이 1/2 데나리온인 가구는 1/2 데나리온의 생계비 지원을, 1/4 데나리온인 가구는 3/4 데나리온의 생계비 지원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하다보니까 많은 사람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1/4 데나리온만큼 일한 사람하고 1/2 데나리온만큼 일한 사람하고 생계비 지원을 포함한 총 수입이 (가처분소득이) 1 데나리온으로 똑같을 수 있겠냐고, 그러면 누가 1/4 데나리온 벌만큼만 일하지 1/2 데나리온 벌만큼 일하겠느냐고 말입니다. 형평성에 문제가 있지 않으냐는 것이지요. 당연하고 정당한 이의제기입니다.
모두 똑같이 1/2 데나리온만큼만 생계비 지원을 하는 것으로 했다고 합시다. 이렇게 하면 일한 정도에 따른 차별성을 유지해서 형평성은 도모되었습니다만, 1/4 데나리온만큼 번 사람은 생계비 지원을 포함한 총수입이 3/4 데나리온밖에 안돼 최저생계비 수준에 미달하게 됩니다. 이전의 생활보호법 하에서는 용납될 수 있었지만, 현행 국민기초생활법 체계 하에서는 - 최소한 법적으로는 - 최저생계비 이하인 가구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최저생계비에 모자라는 부분만큼을 생계비 지원으로 보충해 줄 것을 정부에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모두 1/4 데나리온의 생계비 지원을 하기로 했다 합시다. 1/3 데나리온의 임금수입이 있던 사람은 1 데나리온의 최저생계비가 보장된 반면, 1/2 데나리온의 임금수입이 있던 사람은 1과 1/4 데나리온의 총 수입이 생기게 됩니다. 최저생계비도 보장하면서, 형평성도 유지하게되었지 않습니까? 생계비 지원 예산만 충분하다면 이렇게 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산의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1 데나리온의 임금수입이 있어서 생활보호 수급자로 되지 않았던 사람의 입장에서 보니까 1/2 데나리온의 임금수입이 있는 가구가 1 데나리온의 임금수입이 있는 자기보다 총수입이 1/4 데나리온만큼 많아지게 된 것입니다. 이 어찌 불만이 아니겠습니까? 능력이 좀 더 나아서건, 더 열심히 일해서건 자기가 임금수입이 더 많은데도 자기보다 임금수입이 적은 사람이 정부의 생계비 지원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가처분소득을 올리다니 말입니다. 지금까지처럼 그들과 똑같은 가처분 소득을 갖게 된 것은 억울해도 참아주었지만 자기보다 더 많은 소득을 올리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원칙을 기본으로 할 것인가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만, 현행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일단 보충급여방식을 취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서 2000년도부터 시행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1 데나리온 이하의 임금(정확히는 수입)을 얻고 있다고 판정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선정해서, 이들에게는 생계비를 포함한 총 수입이 1 데나리온이 될 수 있도록 개인수입에서 모자라는 부분만큼을 생계비로 지원합니다. 수급자간의 형평성은 좀 떨어지더라도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모두가 최소한의 생계만큼은 보장받도록 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최저생계비 이하의 사람들의 생존과 관련된 문제인데 능력이 더 있고 덜 있고, 일 좀 더하고 덜하고 하는 차이를 따지기보다는 최소한의 삶이 가능하도록 해 주는 것이 우선이라고 하는 사고방식인 것이지요. 예수께서 본문에서 강조하신 인간주의적인 접근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근로능력자에게 근로를 조건으로 생계비를 지급하는 제도적 보완도 있습니다.)
저는 오늘 마태복음 본문의 스토리가 문자 그대로 오늘날의 삶과 제도를 규정하는 텍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현대의 사회제도는 이러한 인간주의적인 관점을 넘어선 보다 냉철하고 논리적인 사고를 필요로 합니다. 오히려 예수께서 강조한 인간주의적인 접근이 부각되어 사회보장의 기본원리로 제도화 되다보면, 장기적으로 볼 때 수혜자들이 빈곤의 함정에 빠지게 되는 폐단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인간주의적인 접근과 인간의 이기심을 고려한 제도화 사이에는 현명한 구분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의 스토리는 2천년 전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살았기에 당시의 시대적, 지역적 한계에 머물러 있던 인간 예수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시대적 배경을 고려한 메시지를 얻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통시대적인 말씀만 했으리라고 하는 환상은 버려야 할 것입니다. 예수 성육신의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의 경우에도 예수가 인간의 몸을 입고 있는 이상 인간의 한계 속에서 살았던 것마저 부인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예수께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기적을 행하셨다 하더라도, 최소한 당시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상대로 해서 시대적, 지역적 한계를 완전히 초월한 얘기와 행동으로 초지일관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사회의 기득권층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질책을 가하던 인간 예수의 언행을 보면, 예수께는 당시의 심각한 빈곤과 실업의 문제를 정확히 꿰뚫어 보는 직관적이고 체험적인 깨달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일이 없어서 놀 수밖에 없던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일을 하게 하고 대가를 지불하는데, 그리고 하루 품삯마저도 안주면 그 사람과 딸린 식구가 굶어야 하는 사람에 대한 품삯인데, 일을 많이 하고 덜하고 따질 것이 무언가! 먹고 살만큼은 받아야 살 수 있지 않은가! 이 얼마나 본질을 관통하는 호소입니까? 이 스토리는 이러한 절박한 날품팔이 노동자 내지 극빈층들의 '일'과 '처우'에 관한 압권의 일침인 것입니다. 예수는 이러한 간단한 이야기를 통해 어떠한 이론 전개보다도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흔히들 오늘의 본문을 종말론적인 천국의 비유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1절의 '하늘 나라'에 관한 언급이 예수의 메시지를 왜곡 전달한 측면이 있다는 점도 말씀드렸습니다. 공관복음의 저자들은 당대의 신앙적 필요에서 예수에 관한 구전전승을 기록으로 정리했으며, 이 과정에서 필요에 따라 전승설화를 취사선택했고 이야기 전개를 위해 적절한 손질을 하였으리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여타 공관복음에는 없고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오늘의 본문 또한 마태복음 기자의 개인적 필요 내지 당시대의 교회 상황의 필요에 따라 선택, 기록되어 우리에게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많은 성서 연구자들은 유대적 크리스천 공동체에 새로 들어오고 있는 이방인 크리스천들의 수용 문제와 이방인 선교 강화의 필요성 등이 마태복음의 전반에 강하게 배어 있다고 밝히고 있는데 오늘의 본문 또한 이러한 취지에서 선택, 활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될 것이다'는 본문 16절은 역사적 예수께서 팔레스타인 민중들을 앞에 놓고 설파하신 말씀에 있다고 보기에는 너무도 마태복음의 기자의 주관이 배어있는 구절입니다. 한마디로 천국은 하나님의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순서가 뒤바뀔 수 있는, 땅의 세계와 차원이 다른 곳이라는 해석입니다. 피조물의 겸손을 강조하는 마태복음 저자의 신앙고백적인 얘기입니다. 저는 이 16절의 결론 부분은 예수가 설파했던 이야기에 관한 전승에는 없었지만 마태복음 기자가 의도적으로 첨부한 것이리라고 강하게 믿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내용과는 맞지 않는 결론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본문의 이야기를 천국에 관한 비유로 이해하고 있는 성서학자들도 16절이 예수의 말씀에는 없었지만 마태복음 기자에 의해 삽입되었을 가능성을 여러 가지 다른 관점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바로 앞에는 고민하는 부자 청년의 얘기와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말씀이 나옵니다 (마태 19:16-30). 이 말씀은 마가복음에도 나오는데, 예수께서는 영생을 얻고자 고민하는 부자 청년에 대해 온전하고자 한다면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면서 부자는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는 파격적인 발언을 하십니다. 그리고는 이러한 파격적인 말씀에 놀란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예수 자신과 같은 길을 가기 위해 육신에 속한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자들은 세상이 새롭게 되었을 때에 영생을 얻으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이러한 말씀에 뒤이어 오늘 본문의 말씀을 전하면서 앞서 나온 구절과 대구(對句)적 관계에 있는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될 것이다'라는 수사(修辭)적 결론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서 기자의 상황적 필요성에 따른 취사선택, 해석 내지 첨삭은 마태복음만이 아니라 성서의 여러 곳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달리 생각해보면 마태복음 기자의 이러한 신앙고백적 해석이 있었기에 이러한 예수의 촌철살인의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달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마가, 누가복음이나 요한복음 등 다른 성서 기자들이 쉽게 이해하기 힘든, 당대의 상식에 벗어난 오늘 본문과 같은 예수의 말씀이 마태복음 저자에게는 받아들여져서 선정, 기록된 것도 이와 같은 마태복음적 해석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도 해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율법의 질곡과 힘든 노역에 신음하던 당시 민중들의 애환을 꿰뚫어본 선각자 예수를 다시 체험할 수 있었으며, 시대를 넘어서는 이러한 멋진 이야기를 감상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 기도 드리겠습니다.
▷ 오늘 예수님의 삶이 어떠했던가를 확인하고자 모인 예수따르미들 앞에서, 미천한 저로 하여금, 예수께서 팔레스타인 민중을 앞에 놓고 설파하시던 말씀과 표정을 마음껏 상상할 수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 하나님, 우리 같은 범인의 상상이 어찌 초월적 그대의 모습을 그리겠습니까? 하지만, 그대를 깨닫고 그 깨달음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노력한 역사적 예수를 이해하고, 이를 통해 신앙적 예수님을 가슴에 품으려는 우리 평신도들의 부단한 노력을 받아주십시오.
▷ 한계적 상황에 있는 계층들에 대한 최소한의 인간적인 처우를 강조한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말씀이, 환상적 천국의 별난 법칙으로서가 아니라 우리 현세의 인간의 삶에 관한 모든 사고의 기본 출발점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 지극히 작은 자와 스스로를 동일시하면서 이들에 대한 배려를 강조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뜻을 받들어 기도 드립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본문은 흔히 세상의 모습과는 다른 천국에 관한 비유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주인으로 상징되는 하나님, 데나리온으로 상징되는 구원, 그리고 품꾼으로 상징되는 구원받은 사람들에 관한 비유로 말입니다. 멋 옛날의 교부 Origen(185-254)은 아침 6시의 품꾼들을 아담부터 노아시대의 구원받은 사람들, 9시 품꾼을 그 이후 아브라함 시대까지의 구원받은 사람들, 12시 품꾼들을 그 이후 모세 시대까지의 구원받은 사람들, 오후 3시 품꾼들을 그 이후 여호수아 시대까지의 구원받은 사람들, 오후 5시의 품꾼들을 그 이후 그리스도 시대까지의 구원받은 사람들로, 즉 예수께서 이 말씀을 설파할 당시대까지의 구원받은 자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합니다. 현대의 신학자 Peter Burkruck의 조직신학에 관한 책자를 보니까 반대로 예수 후의 시대를 구분하여, 그리고 아예 연도까지 정해서, 이른 아침을 예수 후부터 AD500년까지, 오전 9시는 AD500에서 AD 1000년까지, 낮 12시는 AD1000에서 AD1500까지, 오후 3시는 AD1500에서 AD1900까지 그리고 오후 5시는 그 후 종말까지라고 주석을 달고 있더군요. 이렇게 작위성 짙은 해석까지 나가지는 않더라도 대부분의 신학자와 서적들은 - 서로 추후 주어지리라 기대되는 보상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 제자들에 대한 질타성 비유라는 해석 등 편차가 있지는 하지만 - 이 스토리가 구원 또는 천국의 상급에 관한 비유라는 것은 의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워낙 마태복음의 기자가 서론, 본론, 결론을 확실하게 맺어 놔서 다른 해석의 여지를 좁혀 놓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저는 마태복음 기자에 의해 기록되어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을 다시 보면서 갈릴리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설파하셨으리라 생각되는 이 스토리의 본래 의미를 찾아보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과연 이 스토리가 기존의 해석대로 저 천국에 들어가는 것에 관한 것일까요? 천국의 상급은 하나님에 대한 충성의 시간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니까, 하나님께 감사하고 인간의 공과를 서로 다투지 말아라 하는 취지에서 예수께서 이 말씀하셨을까요?
본문 1절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고용하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어떤 포도원 주인과 같다"는 구절이 대다수의 사람들로 하여금 이 이야기가 천국에 관한 얘기이구나 하는 선입관에 빠지게 하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애당초 예수의 사고 범위에 요한계시록에서 꿈꾸듯이 묘사되어 있는, "저 구름 위 어딘가에 있는,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각종 보석으로 꾸며진 천국" 식의 그림이 없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해야 할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장차 도래할 미래적 환희의 나라로 생각했지만, 예수는 이러한 종말론적인 천국관을 비판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으며 이 세상에서 완성될 궁극적인 영광의 나라임을 설파하고 있었습니다. 본문 1절은 마태복음 기자의 첨부이거나, 설령 역사적 예수께서 비슷한 말씀을 하셨더라도 종국적으로 도래해야 할 이 세상의 희망적인 모습을 얘기하는 의례적인 화법이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사실에 부합하리라고 봅니다. 즉, 역사적 예수께서 설파한 오늘 본문의 메세지는 후대의 마태복음의 기자나 당시의 신도들이 환상 속에 갈구하던 하늘 나라 (kingdom of heaven)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스토리는 문자 그대로 날품팔이 품꾼의 노동과 노동에 대한 대가에 대한 얘기입니다. '천국'이라는 신앙고백적인 후세의 환상을 사상해버리고 예수께서 팔레스타인 지방의 민중을 앞에 놓고 때로는 익살스럽게 때로는 흥분된 목소리로 2절에서 15절에 나오는 스토리를 얘기하시는 모습을 가만히 상상해봅시다. 예수님은 당시 팔레스타인 지방의 지지리도 가난하고 하루 품팔이 일해 먹고살기 바쁜 사람들에 관해 얘기하고 계십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방은 농번기에 소작이나 대농의 일을 하는 것으로는 먹고살기 힘들어서 농한기 등에는 '수고와 더위를 무릅쓰고'(본문 12절) 날품팔이 일을 하든지 해서 생계를 꾸려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임시·일용직 등 비정규직의 불완전 취업자이긴 합니다만, 국가의 구빈책이나 체계적인 사회보장제도가 없던 당시로서는 그나마 이러한 일이라도 없으면 굶어 죽을 수도 있는, 생계 상으로는 훨씬 절박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 비유는 바로 이러한 사람들, 길거리나 저자에서 일거리를 찾아 소일하다가 운 좋게 일이 있으면 생계가 유지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생계 유지가 막막한 갈릴리 지방의 "땅의 사람"(암 하레츠)들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2천년 전 팔레스타인 지방이라는 시대적, 지역적 배경을 염두에 두면서 본문을 다시 살펴봅시다.
우선, 노동시간입니다. 본문에서 볼 때, 팔레스타인 지방의 노동자들은 대체로 아침 6시경부터 오후 6시경까지 일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식사시간을 포함한 하루 전일 근무 시간이 12시간 정도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비유에서는 12시간을 온전하게 일한 날품팔이 품꾼과 9시간, 6시간, 3시간 일한 날품팔이 품꾼 그리고 1시간밖에 일하지 못한 날품팔이 품꾼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의 노동시간은 이렇게 서로 다르지만, 이러한 차이를 개인의 탓으로만 돌릴 수 없는 측면이 있습니다. 노동수요가 공급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상태, 일을 하고싶어도 일을 시켜주는 사람이 없는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의 일할 수 있는 시간이 거의 다 지난 오후 5시까지 저자에서 소일하고 있는 품꾼들에게 주인이 묻습니다. '왜 당신들은 온종일 이렇게 하는 일없이 빈둥거리고 있소?' 이에 그들이 대답합니다.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켜 주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일할 능력이 부족해서 적합한 일자리를 찾을 수 없는 사람도 있겠지만, 일할 의지는 있어도 일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사람에 관한 얘기입니다. 아니 일할 능력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일을 안 할 수 없는 상황, 딸린 식구는 물론 제 몸 하나 보존하기 어려워 일하기 싫고 말고 하는 것 자체가 사치인 사람들에 관한 얘기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계약된 賃金수준입니다.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아침부터 선택되어 온종일 일하게 된 사람들은 1 데나리온이라는 일당을 받기로 처음부터 합의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간부터 고용이 되어 하루 온전한 일을 할 수 없던 사람에게는 '상당하게' (개역성경) 내지 '적당한 품삯을' (표준새번역) 주리라는 약속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상당하게'(또는 '적당한 품삯을')는 고용주에게 임금수준을 상당부분 위임한, 어찌 보면 전근대적인 계약을 의미합니다. 선한 고용주라면 더 인간적인 대가를 받을 수 있지만 악한 고용주라면 임금을 착취당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즉, 고용주의 선의, 악의 여부에 임금수준을 맡기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제가 확인한 모든 번역판에서 '상당하게'에 해당하는 부분이 'whatever is right'라고 되어 있더군요. 여기서 what이라는 단어보다는 whatever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집주인은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만큼 충분히' 주겠다고 약속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정확할 것 같습니다. 즉 이 스토리에서 주인은 임금수준과 관련하여 형식상으로는 '전근대적' 계약방식을 통해서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인간적' 보상을 약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실제 지불된 임금입니다. 고용주는 실제로 모든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이라는 같은 일당을 지불했습니다. 서로 다른 노동시간에도 불구하고 같은 임금을 지불한 것이지요. 일을 더 한 사람과 덜 한 사람이 똑 같은 대가를 받은 것입니다. 일반 상식에 벗어난 지불보상입니다. 일한 시간에 따라 임금을 받는 것이 상식인데, 이 비유에 나오는 품꾼들은 '능력 내지 기회'에 따라 일을 했고 생계 유지를 위한 '필요'에 따라 대가를 지불 받았습니다. 앞서 말한 전근대적인 계약 형식에 따랐지만 '인간적'인 내용의 보상을 실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1절에 나오는 대로 이 스토리는 당시 세상의 상식이 아닌 새 세상의 상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새 세상의 지불보상입니다. 본문 1절이 마태복음 기자에 의한 첨부가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에 실제 있었던 것이라면, 예수 당신은 필요 최소한의 품삯이 지불되는 세상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나라'라는 얘기를 하시기 위해 그러한 서론을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모두들 알고 계시겠지만, 공관복음의 도처에 보이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는 가난하고, 억눌리고, 소외된 인간에 대한 배려와 부자와 압제자와 기득권층에 대한 질타가 일관되게 흐르고 있습니다. 예수는 가난한 자, 감옥에 있는 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라고 하고 있을 뿐 아니라 (마태 25:40),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어렵다고, 아니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처럼 불가능하다고, 어찌 보면 극언에 가까운 말씀을 합니다 (마태 19:24-25). 저는 오늘의 본문을 읽으면서 압제와 가난에 찌들인 팔레스타인 민중을 앞에 놓고 역설적인 스토리로 핵심에 접근하고 있는 예수의 모습을 상상합니다. 예수는 당시에 일반화된 소작인, 품꾼들 앞에서 그들에 관한 오늘 본문의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당신들이 일을 하기 싫어서 안한 것도 아니고, 일을 하고 싶어도 써주질 않는데, 고용되어 일한 시간이 적다고 그나마 한 데나리온의 품삯도 못 받으면 당신만 쳐다보고 살아가는 가족들은 어쩌란 말이오? 오늘도 또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잠을 청해야 하겠는가? 진정한 주인이라면 최소한의 품삯은 주려고 할 것이고 그들에게 최소한의 품삯을 준다고 해서 불평할 일은 아니지 않는가?"라고 말입니다.
대다수 민중이 압제와 가난에 찌들리던 2천년 전의 팔레스타인의 상황과 지금의 우리의 상황은 분명히 다릅니다만, 오늘의 본문에는 시대를 초월해서 일관하여 시사하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사회경제적 소외자에 대한 인간주의적인 접근'입니다. 사회의 주변부에서, 자기 권리를 주장하기보다는 그날 그날을 체념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기본적인 배려는 노동과 임금의 일반 상식과는 관계없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아니 최소의 배려야말로 상식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국가 사회보장제도의 한 축을 담당하는 사람으로서 예수의 이 메시지를 사회보장제도와 관련지어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오늘의 본문 스토리가 연관된 사회보장제도에 무엇이 있을까요. 크게 두 가지가 떠오릅니다. 우선 '최저임금제도'가 그것이겠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최저임금제도가 1988년부터 도입되었습니다. 최저임금 수준이 너무 낮고 (2002년 현재 월 47만5천원) 적용대상자가 미미해 사실상 '있으나 마나 한' 제도가 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기는 하지만, 제도의 원래 취지 자체로는 예수께서 희망적으로 설파하신 하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사회제도의 하나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또 하나의 제도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있습니다. 바로 보건복지부에서 제가 담당하던 제도입니다. 앞서 논한 최저임금제에 의해 보호되고 있는 근로자들은 그나마 상시고용의 상태에 있고 따라서 4대 사회보험의 적용대상이 되는 점을 고려할 때, 지금 말하는 생활보호대상자들이 예수께서 앞에 두고 말씀을 설파한 갈릴리의 민중, 본문의 소재가 된 날품팔이 품꾼의 상황과 더 가까울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스토리가 기초생활보장제도와 관련지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기초생활보장제도에 대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 제도는 평상시 보험료를 내고 필요시 급여를 받는 의료보험, 국민연금, 고용보험 등의 사회보험과는 구분되는 사회부조제도의 하나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산조사(means test)를 기초로 해서 가난한 사람에게 생계비 등을 지급하는 제도입니다. 보유자산이 미미하고 (재산기준), 수입이 작은데 (소득기준), 부양능력자가 없는 (부양자기준) 가구가 생계비 수급자가 되는데, 현재 전 국민의 약3%가 이에 해당합니다. 2000년도 이후 크게 바뀐 지금의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에서는, 국가에서 정한 최저생계비 규모(예, 2인 가구 57만원)에서 그 가구의 수입을 뺀 만큼이 생계비로 지원되는 됩니다. 즉, 수입이 많아지면 생계비지원은 그만큼 줄어들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을 보충급여 방식이라고 합니다. 2000년도 이전에는 수입에 관계없이 모든 생활보호 대상자에게 저액의 고정된 생계비를 지원하는 정액지원방식이었습니다. 따라서 같은 생활보호 대상자라고 해도 수입이 아주 없는 사람은 최저생계비에 도달하지 못하고 수입이 어느 정도 되는 사람은 최저생계비 이상을 확보할 수 있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두 방식에는 상당한 철학적 차이가 있고 어느 것이 좋은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편의상 하루 최저생계비가 1 데나리온이라고 합시다. 지금은 보충급여 방식을 적용하고 있기 때문에 임금수입이 1/2 데나리온인 가구는 1/2 데나리온의 생계비 지원을, 1/4 데나리온인 가구는 3/4 데나리온의 생계비 지원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하다보니까 많은 사람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1/4 데나리온만큼 일한 사람하고 1/2 데나리온만큼 일한 사람하고 생계비 지원을 포함한 총 수입이 (가처분소득이) 1 데나리온으로 똑같을 수 있겠냐고, 그러면 누가 1/4 데나리온 벌만큼만 일하지 1/2 데나리온 벌만큼 일하겠느냐고 말입니다. 형평성에 문제가 있지 않으냐는 것이지요. 당연하고 정당한 이의제기입니다.
모두 똑같이 1/2 데나리온만큼만 생계비 지원을 하는 것으로 했다고 합시다. 이렇게 하면 일한 정도에 따른 차별성을 유지해서 형평성은 도모되었습니다만, 1/4 데나리온만큼 번 사람은 생계비 지원을 포함한 총수입이 3/4 데나리온밖에 안돼 최저생계비 수준에 미달하게 됩니다. 이전의 생활보호법 하에서는 용납될 수 있었지만, 현행 국민기초생활법 체계 하에서는 - 최소한 법적으로는 - 최저생계비 이하인 가구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최저생계비에 모자라는 부분만큼을 생계비 지원으로 보충해 줄 것을 정부에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모두 1/4 데나리온의 생계비 지원을 하기로 했다 합시다. 1/3 데나리온의 임금수입이 있던 사람은 1 데나리온의 최저생계비가 보장된 반면, 1/2 데나리온의 임금수입이 있던 사람은 1과 1/4 데나리온의 총 수입이 생기게 됩니다. 최저생계비도 보장하면서, 형평성도 유지하게되었지 않습니까? 생계비 지원 예산만 충분하다면 이렇게 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산의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1 데나리온의 임금수입이 있어서 생활보호 수급자로 되지 않았던 사람의 입장에서 보니까 1/2 데나리온의 임금수입이 있는 가구가 1 데나리온의 임금수입이 있는 자기보다 총수입이 1/4 데나리온만큼 많아지게 된 것입니다. 이 어찌 불만이 아니겠습니까? 능력이 좀 더 나아서건, 더 열심히 일해서건 자기가 임금수입이 더 많은데도 자기보다 임금수입이 적은 사람이 정부의 생계비 지원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가처분소득을 올리다니 말입니다. 지금까지처럼 그들과 똑같은 가처분 소득을 갖게 된 것은 억울해도 참아주었지만 자기보다 더 많은 소득을 올리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원칙을 기본으로 할 것인가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만, 현행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일단 보충급여방식을 취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서 2000년도부터 시행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1 데나리온 이하의 임금(정확히는 수입)을 얻고 있다고 판정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선정해서, 이들에게는 생계비를 포함한 총 수입이 1 데나리온이 될 수 있도록 개인수입에서 모자라는 부분만큼을 생계비로 지원합니다. 수급자간의 형평성은 좀 떨어지더라도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모두가 최소한의 생계만큼은 보장받도록 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최저생계비 이하의 사람들의 생존과 관련된 문제인데 능력이 더 있고 덜 있고, 일 좀 더하고 덜하고 하는 차이를 따지기보다는 최소한의 삶이 가능하도록 해 주는 것이 우선이라고 하는 사고방식인 것이지요. 예수께서 본문에서 강조하신 인간주의적인 접근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근로능력자에게 근로를 조건으로 생계비를 지급하는 제도적 보완도 있습니다.)
저는 오늘 마태복음 본문의 스토리가 문자 그대로 오늘날의 삶과 제도를 규정하는 텍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현대의 사회제도는 이러한 인간주의적인 관점을 넘어선 보다 냉철하고 논리적인 사고를 필요로 합니다. 오히려 예수께서 강조한 인간주의적인 접근이 부각되어 사회보장의 기본원리로 제도화 되다보면, 장기적으로 볼 때 수혜자들이 빈곤의 함정에 빠지게 되는 폐단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인간주의적인 접근과 인간의 이기심을 고려한 제도화 사이에는 현명한 구분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의 스토리는 2천년 전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살았기에 당시의 시대적, 지역적 한계에 머물러 있던 인간 예수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시대적 배경을 고려한 메시지를 얻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통시대적인 말씀만 했으리라고 하는 환상은 버려야 할 것입니다. 예수 성육신의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의 경우에도 예수가 인간의 몸을 입고 있는 이상 인간의 한계 속에서 살았던 것마저 부인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예수께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기적을 행하셨다 하더라도, 최소한 당시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상대로 해서 시대적, 지역적 한계를 완전히 초월한 얘기와 행동으로 초지일관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사회의 기득권층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질책을 가하던 인간 예수의 언행을 보면, 예수께는 당시의 심각한 빈곤과 실업의 문제를 정확히 꿰뚫어 보는 직관적이고 체험적인 깨달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일이 없어서 놀 수밖에 없던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일을 하게 하고 대가를 지불하는데, 그리고 하루 품삯마저도 안주면 그 사람과 딸린 식구가 굶어야 하는 사람에 대한 품삯인데, 일을 많이 하고 덜하고 따질 것이 무언가! 먹고 살만큼은 받아야 살 수 있지 않은가! 이 얼마나 본질을 관통하는 호소입니까? 이 스토리는 이러한 절박한 날품팔이 노동자 내지 극빈층들의 '일'과 '처우'에 관한 압권의 일침인 것입니다. 예수는 이러한 간단한 이야기를 통해 어떠한 이론 전개보다도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흔히들 오늘의 본문을 종말론적인 천국의 비유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1절의 '하늘 나라'에 관한 언급이 예수의 메시지를 왜곡 전달한 측면이 있다는 점도 말씀드렸습니다. 공관복음의 저자들은 당대의 신앙적 필요에서 예수에 관한 구전전승을 기록으로 정리했으며, 이 과정에서 필요에 따라 전승설화를 취사선택했고 이야기 전개를 위해 적절한 손질을 하였으리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여타 공관복음에는 없고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오늘의 본문 또한 마태복음 기자의 개인적 필요 내지 당시대의 교회 상황의 필요에 따라 선택, 기록되어 우리에게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많은 성서 연구자들은 유대적 크리스천 공동체에 새로 들어오고 있는 이방인 크리스천들의 수용 문제와 이방인 선교 강화의 필요성 등이 마태복음의 전반에 강하게 배어 있다고 밝히고 있는데 오늘의 본문 또한 이러한 취지에서 선택, 활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될 것이다'는 본문 16절은 역사적 예수께서 팔레스타인 민중들을 앞에 놓고 설파하신 말씀에 있다고 보기에는 너무도 마태복음의 기자의 주관이 배어있는 구절입니다. 한마디로 천국은 하나님의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순서가 뒤바뀔 수 있는, 땅의 세계와 차원이 다른 곳이라는 해석입니다. 피조물의 겸손을 강조하는 마태복음 저자의 신앙고백적인 얘기입니다. 저는 이 16절의 결론 부분은 예수가 설파했던 이야기에 관한 전승에는 없었지만 마태복음 기자가 의도적으로 첨부한 것이리라고 강하게 믿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내용과는 맞지 않는 결론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본문의 이야기를 천국에 관한 비유로 이해하고 있는 성서학자들도 16절이 예수의 말씀에는 없었지만 마태복음 기자에 의해 삽입되었을 가능성을 여러 가지 다른 관점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바로 앞에는 고민하는 부자 청년의 얘기와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말씀이 나옵니다 (마태 19:16-30). 이 말씀은 마가복음에도 나오는데, 예수께서는 영생을 얻고자 고민하는 부자 청년에 대해 온전하고자 한다면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면서 부자는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는 파격적인 발언을 하십니다. 그리고는 이러한 파격적인 말씀에 놀란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예수 자신과 같은 길을 가기 위해 육신에 속한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자들은 세상이 새롭게 되었을 때에 영생을 얻으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이러한 말씀에 뒤이어 오늘 본문의 말씀을 전하면서 앞서 나온 구절과 대구(對句)적 관계에 있는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될 것이다'라는 수사(修辭)적 결론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서 기자의 상황적 필요성에 따른 취사선택, 해석 내지 첨삭은 마태복음만이 아니라 성서의 여러 곳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달리 생각해보면 마태복음 기자의 이러한 신앙고백적 해석이 있었기에 이러한 예수의 촌철살인의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달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마가, 누가복음이나 요한복음 등 다른 성서 기자들이 쉽게 이해하기 힘든, 당대의 상식에 벗어난 오늘 본문과 같은 예수의 말씀이 마태복음 저자에게는 받아들여져서 선정, 기록된 것도 이와 같은 마태복음적 해석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도 해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율법의 질곡과 힘든 노역에 신음하던 당시 민중들의 애환을 꿰뚫어본 선각자 예수를 다시 체험할 수 있었으며, 시대를 넘어서는 이러한 멋진 이야기를 감상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 기도 드리겠습니다.
▷ 오늘 예수님의 삶이 어떠했던가를 확인하고자 모인 예수따르미들 앞에서, 미천한 저로 하여금, 예수께서 팔레스타인 민중을 앞에 놓고 설파하시던 말씀과 표정을 마음껏 상상할 수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 하나님, 우리 같은 범인의 상상이 어찌 초월적 그대의 모습을 그리겠습니까? 하지만, 그대를 깨닫고 그 깨달음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노력한 역사적 예수를 이해하고, 이를 통해 신앙적 예수님을 가슴에 품으려는 우리 평신도들의 부단한 노력을 받아주십시오.
▷ 한계적 상황에 있는 계층들에 대한 최소한의 인간적인 처우를 강조한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말씀이, 환상적 천국의 별난 법칙으로서가 아니라 우리 현세의 인간의 삶에 관한 모든 사고의 기본 출발점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 지극히 작은 자와 스스로를 동일시하면서 이들에 대한 배려를 강조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뜻을 받들어 기도 드립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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