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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마태복음 길희성............... 조회 수 2620 추천 수 0 2008.08.09 23:5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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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4:1-4 
설교자 : 길희성 형제 
참고 : 새길교회 2002. 8. 25 주일설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한중 수교 10주년을 맞아 방송 3사에서는 제각기 개혁개방 이후 급격히 변화한 중국의 모습을 다루는 기획 프로그램들을 제작하여 방영하고 있습니다. 돌이켜보건대,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우리나라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은 급속히 감소되어, 근 100여 년 간 우리나라와 중국은 다른 길을 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냉전의 해체와 더불어 1992년 외교관계를 수립한 후 두 나라 사이의 관계는 급속히 가까워져, 이제 서로 무역규모 2, 3위를 가를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제 다시 과거 수 천년의 역사와 같이 우리의 운명은 중국과 뗄 수 없는 관계로 재 진입한 것입니다.

지난달 나는 종교 유적을 탐방하기 위해 약 2주일간 중국을 다녀왔습니다. 찾아가기 힘든 곳도 여러 곳을 방문했습니다. '중국'과 '종교'라는 단어는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말처럼 들립니다. 인도라면 몰라도 중국에 무슨 종교를 보러간단 말인가, 스스로 생각해도 뭔가 잘 못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우선, 사회주의 50여 년의 종교 억압정책에다 그 끔찍한 문화혁명의 광풍을 겪은 나라. 그리고 지극히 현실주의적, 실용주의적인 중국인들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중국은 종교와는 거리가 멀다는 인상이 보편적입니다. 사실, 별로 볼 것도 없는 힘든 곳을 고생스럽게 찾아가는 우리들을 보고 여행 안내원도 처음에는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습니다. 중국에 볼 것이 얼마나 많은데, 하필 이런 후진 곳에 오느라 시간을 허비한단 말인가 하는 표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의 관심은 '종교' 못지 않게 중국인들이 사는 모습을 보는 데 있었습니다. 막연한 질문이지만, 13억 중국인은 지금 무엇을 추구하며 사는지, 무엇이 그들의 삶의 의미이며 주된 관심이 되는지 하는 물음이었습니다. 사실 종교란 것도 별 것 아니며, 바로 이러한 인생의 궁극적 관심에 대하여 묻고 답하는 것입니다.

우선, 중국은 국가적으로는 여전히 사회주의 국가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개혁개방 이후 자본주의의 도입으로 어느 자본주의 국가보다 더 자본주의적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받고 있는 나라지만, 중국은 여전히 공산당이 사회를 지배하고 운영해 나가는 나라입니다. 파란만장한 현대사의 우여곡절 끝에 중국은 결국 사회주의에서 민족이 살길을 발견했습니다. 중국 현대사에서 사회주의는 중국인들에게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궁극적 진리로 받아들여졌으며, 중국의 전통 종교와 신앙, 특히 유교적 세계관과 사회질서를 대체하는 이념으로 수용된 일종의 세속주의 종교, 대안적 종교라 해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중국 사회주의는 지금 나라의 지배 이데올로기로서는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3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개혁개방과 더불어 도입된 과감한 자본주의의 실험으로 인해 빈부의 격차가 엄청나게 벌어져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도농간의 격차, 그리고 내륙지방과 해안지방과의 경제적 격차는 실로 엄청나다고 합니다. 여기에다 시장경제로의 전환으로 인한 대량 실업사태가 큰 사회문제로 등장했습니다. 지금 중국인들의 관심은 온통 돈 버는 일에 쏠려 있습니다. 이로 인해 삶의 의욕이 넘치는 매우 활기찬 사회로 보이지만, 사회주의가 해결하려고 나섰던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와 정의로운 사회의 건설은 빈 구호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특히 농민해방의 구호로 농민들의 호응을 얻어 집권한 중국 공산당이 아직도 농민들에게 평등의 문제도 가난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셈입니다. 과연 중국이 앞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갈지 주목됩니다. 이왕에 우선 부강한 나라가 되고 보자는 이른바 선부론(先富論)을 앞세웠으니, 빠른 경제 성장을 통해 성장의 열매가 속히 모두에게 돌아가도록 하는 길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과연 중국 민중이 그 동안을 참고 기다려 줄 것인지가 문제입니다.

둘째, 개혁개방의 급류를 타고 이제 중국에도 많은 사람이 경제적 풍요를 누리면서 이념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각종 정치구호가 난무하지만, 중국 인민들, 특히 상류층은 이제 이념이고 역사고 정치고 사회정의고 별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나 하나, 내 가족 잘 살면 된다는 개인주의적 사고가 팽배해 있고,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인 소비문화, 향락주의, 부정 부패, 범죄와 무질서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옛날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진퇴양난의 처지로 빠져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셋째, 보다 근본적으로는, 냉전의 종식과 더불어 사회주의 이념의 퇴조는 말할 것 없고, 중국을 위협할 제국주의 세력 또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사회주의는 이제 이념으로서 효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의 커다란 이념적 공백, 정신적 위기가 엄습하고 있습니다. 본래 중국이 사회주의로 가게 된 역사적 배경도 사회주의 자체의 사상적 매력보다는 그것을 통해 중국이 서양과 일본의 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내고 민족의 자주성을 되찾으려는 데에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반제국주의와 민족주의의 일환으로 사회주의가 수용된 것입니다. 중국 공산당은 실제로 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내고 나라의 주권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중국 공산당이 지금껏 자랑할 수 있는 유일한 공적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 중국을 위협하는 제국주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중국은 어디로 갈 것입니까? 무엇으로 중국 인민을 하나로 묶을 것입니까?

크게 보아 세 가지 선택이 있어 보입니다. 하나는 서구식 민주주의와 다원사회로 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도 중국인들의 심성과 삶의 관습에 남아 있는 유교 전통을 본격적으로 부활시키는 길입니다. 아니면 어떤 식으로든지 사회주의를 고수하는 길입니다. 문제는 앞의 두 선택은 당분간 현실성이 없어 보이며, 사회주의는 사회주의대로 위기를 맞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미국을 제국주의적 위협으로 보는 시각이 엄연히 존재하고, 가끔 미국과 긴장을 초래하는 사건이 터지면, 중국인들의 민족주의적 감정이 거세게 일기도 하지만, 이것 역시 사회주의 이념 때문이기보다는 민족주의, 애국심 때문이며, 인민의 신뢰를 상실하고 있는 공산당 정권이 이를 이용하는 면도 있습니다. 아직도 사회주의 이념을 충실히 신봉하며 높은 개인적 도덕성을 묵묵히 실천하는 충실한 당원들이 없지는 않지만, 지금 중국이 실제로 신봉하는 이데올로기는 사회주의라기보다는 중화민족주의, 그리고 강대국이 되기 위한 경제발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제 사회주의가 정의롭고 더 좋은 것이기 때문보다는 중국이 소련 연방과 같은 무질서한 해체의 운명을 맞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이 당분간은 필요하다는 것이 중국 지성인들과 외국에서 중국을 바라보는 대다수 사람들의 생각인 것 같습니다.

중국을 많이 돌아본 것은 아니지만, 6개성을 돌아다니면서 불교, 도관(도교 사원), 유교 서원 등을 방문해서 받은 인상은 한 마디로 중국 종교는 죽었다는 느낌이며, 아마도 앞으로도 본격적으로 부활할 것 같지는 않다는 느낌입니다. 절이나 도관, 서원들이 1980년대 이후 많이 보수되고 중창되기도 했지만, 대부분 관광 진흥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그것도 주로 대만, 홍콩 싱가포르 화교들 혹은 일본인들이 돈을 대서 한 것입니다. 앞으로 과연 중국인들 스스로가 주머니를 털어 절이나 도관을 중수할지 지극히 의문입니다. 장수와 부귀를 바라는 기복신앙이 워낙 강한 중국인들이라, 절과 도관을 찾는 향객들의 발길은 끊이지는 않을 것이며 앞으로 더 늘어날 가능성도 있지만, 목숨을 걸고 수련에 몰입하는 수행자들을 찾아보기는 어려우니, 중국 불교나 도교는 종교로서 생명력을 이미 상실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돈 벌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는 중국인에게도 역시 정신적 공허감과 영적 갈망은 어찌 할 수 없는 모양입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법륜공이라는 일종의 명상과 건강법을 겸한 운동이 대중들 사이에서 선풍적 인기를 끈 사실을 보면, 인간은 영적 갈망을 가진 종교적 존재라는 일반적 진리가 중국인에게도 예외는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더 이상 현실성도 없는 사회주의의 너울을 쓰고서 엄청난 사회적 변화를 겪고 있는 중국인들에게 대중 종교운동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기독교 신자가 늘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중국인들이 경험하는 사회적 불안감, 박탈감, 이념적 공백과 영적 공허감은 그야말로 불을 붙이기만 하면 금방 활활 타오를 마른 장작과도 같다고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법륜공이 예기치 못하게 급속히 확산되자 당혹감과 위협을 느낀 공산당은 결국 법륜공을 사이비 종교로 매도하고 금지했습니다. 사회주의 이념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중국인의 영혼을 지배해서는 안 되며, 공산당에 대응하는 그 어떤 조직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인 조처였습니다. 아직은 사회주의가 중국인들의 이념적 좌표요 종교이며, 공산당이 그들의 교회인 것입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중국 지도자들도 사회주의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아는지 최근에는 '정신문명'이라는 것을 중요시하게 되었고, 특히 유교의 가치를 재평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유교를 타파해야 할 과거 봉건 사회의 낡은 제도요 사상이라는 종전의 부정적 태도에서 이제는 유교를 적어도 중국의 문화 전통으로 재평가하고 있으며, 가족을 중시하는 유교 윤리와 도덕 교육을 사회 안정에 기여하는 유익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유교는 성직자들의 집단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기독교의 교회와 같은 조직의 힘이 있는 것도 아니니, 공산당의 지배체제에 위협이 될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중국 지도층의 관심은 국가발전, 경제발전, 그리고 체제 유지와 사회안정에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점점 심각해지는 도덕적, 정신적 공백을 메울 방도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중국 지도층이나 지식인들이 막연한 민족주의나 애국심 이외에 방황하는 중국인의 영혼을 붙잡을만한 뾰족한 방도를 찾지 못하고 있으며 이런 문제를 가지고 심각히 고뇌하는 사람도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중국 하남성에 있는 고도 낙양이라는 도시에서 경험한 일입니다. 늦은 저녁을 먹고 일행 몇이서 구경 삼아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는 광장을 찾았습니다. 어느 새 3명의 청소년이 우리가 앉아 있는 곳으로 다가와서는 영어로 말을 건넸습니다. 내가 영어로 대꾸하니까 영어가 통하는 것을 안 그들은 신이 나서 말을 건넸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광장은 일종의 영어 특구 같은 곳이어서 외국인들이 산책 나오면 아무나 붙잡고 영어 연습을 하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중국에 영어 열풍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합니다. 낙양 뿐만 아니라 웬만한 도시마다, 그리고 대학마다 이런 영어 특구 같은 곳이 있다고 하며, 최근에는 외국이라고는 한 번도 나가 본 일이 없는 어떤 토종 중국인이 개발한 Crazy English라는 영어학습법이 선풍을 일으키면서 그가 가는 곳마다 수천, 수만 명 군중이 모여든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온 3명 가운데서 14살 난 남학생이 나에게 강한 인상을 남겨주었습니다. 중국 여행 중 나에게 가장 놀라운 경험은 안겨주었습니다. 3가지가 놀라웠습니다.

첫째, 14살 난 아이, 그러니까 우리나라 중학교 2학년 정도치고는 영어를 썩 잘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학교에서만 배웠냐고 물어보니까 역시 학원에서도 배웠다고 하지만, 놀라울 정도의 영어 실력이었습니다.

둘째, 어린 학생이지만 세계 물정에 대한 상식이 매우 풍부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놀란 것은 한국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대단했다는 점입니다.

셋째, 그가 나에게 던진 마지막 한 마디는 나에게 문자 그대로 충격을 주었습니다. 헤어질 무렵 내가 누군가 궁금했던지 무엇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습니다. 서울에 있는 한 대학의 종교학 교수라고 했더니, 대뜸 그의 입에서 "Science is my religion."이라는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이처럼 심각한 말이 그토록 쉽게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것은 이미 오랫동안 그의 의식 혹은 잠재의식 속에 담겨 있던 생각, 아니 '사상'으로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정말 14살 소년의 말이라고는 믿기 어려웠습니다. 그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그 어린 나이에 이미 하나의 뚜렷한 인생관 같은 것이 정립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더 놀라웠습니다.

광장에서 돌아오는 길, 아니 나머지 여행 내내, 이 학생이 잊혀지지 않았고 그의 마지막 뱉은 말은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첫째, 이것은 단지 그 아이 하나만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 중국 사회 전체의 정신적 현주소를 반영하는 현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회주의 이념이 더 이상 중국인의 내면을 지배하지 못하게 되자, 이제 중국인들은 무엇인가를 붙잡아야 하는데, 이 학생에게는 누가 가르쳐 주었는지는 몰라도 과학이 종교로, 아니 신으로 그의 내면에 자리잡게 된 것입니다.

사실, 돌이켜 보면, 유교 전통에 철저한 단절을 선언한 1910년대의 5·4운동 이후, 과학과 민주주의는 중국인들에게 새로운 종교로 우상화되었습니다. 1920년대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요 교육사상가인 죤 듀이나 영국의 철학자 버트란드 럿셀 같은 사람도 중국에 가서 민주주의와 과학을 중국의 살길로 제시한 일이 있었는데, 이것이 80년을 지난 오늘도 여전히 중국인의 화두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러셀은 중국을 매우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1920년대에 쓴『중국의 문제들』이라는 책에서 중국인의 낙천적인 문화와 소박하고 관조적인 삶의 태도를 매우 높이 평가하면서 서구문명의 맹목적인 역동성과 행동주의, 끝을 모르는 팽창주의와 호전성, 그리고 맹목적인 진보와 효율성의 숭배를 비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중국이 서구 제국주의의 위협 앞에서 스스로를 방어하려면 어쩔 수 없이 서양의 과학을 배우고 산업화를 달성해야 하고 이와 더불어 질서 있는 민주적 정부와 교육이 중요하다는 점을 역설했습니다.

80년이 지난 오늘에서 돌이켜 볼 때, 민주주의는 중국식 사회주의로 해결 아닌 해결을 본 셈이고 그것을 통해 일단 외세를 물리치고 나라의 주권을 지켰습니다. 이제 과학과 산업화, 그리고 교육을 통해 부강한 나라가 되고자 매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전통과 정신적 유산의 장점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통째로 부정한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은 러셀의 충고와는 거리가 멀게, 중국 문화와 서구 문화의 좋은 점들을 조화롭게 융합시키는 대신 서구문명 본 받기 일변도로 치닫고 있습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진정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모르고 서구의 맹목적인 역동성을 그대로 모방하며 한 수 더 뜨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나의 생각을 사로잡은 것은, 그렇다면 과연 중국인들을 진정으로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명색이 기독교인이요 종교학 교수인 내가 그 어린 학생의 당돌하기까지 한 말을 듣고서 가만히 있었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나도 모르게 금방 훈계조의 대꾸가 나왔습니다: 과학은 인간의 삶에 중요하고 유용한 것이다. 그러나 과학주의(scientism)는 안 된다. 과학을 숭배하지는 말아라. 인간은 영적 존재(spiritual being)라고 나는 말해주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대꾸를 하지 않았고 나의 이 즉흥적인 훈계에 약간 놀라는 듯, 계면쩍어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기야 별것도 아닌 훈계였지만, 그 학생이 중국 어른들 누구한테서 그런 얘기를 들어봤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나의 의문은 계속되었습니다. 과연 나의 훈계는 옳은 것이었을까? 아니, 나 스스로가 얼마나 진지하게 내가 한 말을 믿고 있는가? 과학과 빵을 간단하게 동일시하면 안 되겠고, 과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큰 모독이 되겠지만, 현실적으로 과학이 오늘날 그렇게 위력을 떨치는 이유는 진리에 대한 사랑 혹은 순수한 앎에 대한 욕구라기보다는 과학기술이 가져다 주는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이익, 즉 돈벌이와 물질적 풍요 때문임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정말 빵으로만 살 수 없다는 것이 내가 한 말인 셈인데, 나 스스로가 정말 그렇게 믿고 사는가? 허위의식은 아닌가? 기독교인이니까, 종교학 교수니까 할 수 없이 한 마디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셋째, 그러면 우리 한국사람들은 어떤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 아이의 생각이 중국의 현재 정신적 상황을 단적으로 나타낸다고 가정할 때, 우리나라 청소년들, 한국인들은 그러면 과연 다릅니까? 중국보다 사상의 자유가 있으며, 중국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종교의 자유가 있고 종교가 번창하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과연 우리가 돈독이 올랐다고 손가락질하는 중국인들보다 빵을 덜 사랑하고 더 영적입니까? 곳곳에 교회가 있고 절이 있고 종교가 번창한다고 해서 한국인들이 중국인들보다 더 영적이고 정신적 가치를 숭상하는 사람들입니까? 아니 좀 더 범위를 좁혀서, 우리 청소년들에게 물어봅시다. 그들이 진정으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이 자기들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할 것이며 그들의 인생을 구원으로 이끈다고 생각하는지, 아니, 도대체 우리 아이들이 이런 질문이라도 하고 사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 중국 소년은 적어도 과학이 자기 종교라고 자신 있게 말했는데, 그 나이에 이런 대답을 할 아이들이 우리나라에 몇이나 될까요. 솔직히 말해서, 나는 우리 청소년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아마도 전형적인 우리 부모들 세대를 보면서 유추해보건대, 우리 아이들의 가치관도 별 차이 없을 것입니다. 결국 '잘 먹고 잘 사는 것' 이상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종교도 신앙도, 기독교도 불교도 하나 같이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기복신앙이며,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지, 인생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그리고 이런 문제로 아이들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부모가 얼마나 있는지 의문입니다. 학교는 인간교육은커녕 입시 학원, 그것도 형편없는 입시학원으로 전락한지 오래고, 아이들이 보고 듣는 것은 온통 감각적 문화와 소비문화, 향락문화 뿐이 아닌가요?

나는 오늘 결코 중국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중국을 거울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자는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이야기입니다. 40일이나 금식하신 예수님의 약점을 잘 아는 마귀는 예수님에게 돌로 빵을 만들라고 유혹합니다. 예수께서는 신명기 8장 3절의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말씀으로 응수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 입성을 앞에 두고 있을 때 모세가 그들이 광야에서 겪은 온갖 시련을 상기시키면서 그 의미를 해석해 주는 말입니다. 광야 40년에 겪은 시련은 이스라엘을 겸손하게 하는 하나님의 훈련이며 거기서 먹은 은총의 빵 만나의 의미도 빵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들어가 살게 될 물질적 풍요의 땅 가나안에서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모세는 백성들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의 방황을 40일의 금식으로 몸소 겪으신 새로운 모세 예수께서도 이제 자기 백성을 새로운 가나안으로 인도하기 위한 사역의 시발점에서 또 다시 이 모세의 말씀을 인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시는 이 말씀은 이제는 더 이상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 한국 사람, 중국 사람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을 위한 말씀이 되었으며, 이스라엘에 들어갔다가 다시 쫓겨나게 될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한 말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시는 말씀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시작하기 직전에 다시금 이 말씀으로 자기의 나아갈 길과 자기 백성이 진정으로 살 길을 제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런 것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시지만, 우리는 교회 문 밖을 나서는 순간 그 말씀을 까마득히 잊고 세상과 한 통속이 되어 아귀다툼을 하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하시는데, 우리는 이 말을 건성 듣고 넘기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는 정말로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의 생명이며, 바로 그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 자신의 말씀을 생명의 말씀으로 믿고 실천하고 있는지 묻게 됩니다.

한 나라의 건강, 한 나라의 살 길은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들려지며 그 말씀을 청종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나는 믿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말씀의 진리에 몸을 던지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그 사회에 존재하는가가 그 사회의 건강과 구원의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사회주의든 자유민주주의든 이런 사람들의 살아 있는 사회는 살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회는 죽을 것입니다. 탐욕과 거짓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해서 선포되는 곳, 그리스도의 빛을 발하는 작은 불빛이 꺼지지 않는 사회,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으로 하늘나라의 소망을 키우는 사람들이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곳, 그런 사회가 희망이 있는 사회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져서 싹이 트고 자랄 수 있는 옥토가 어딘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땅, 날카로운 양심과 의식이 살아 있는 신자들과 종교인들이 소수지만 마지막 남은 자로 지키고 서 있는 땅, 그런데서 우리는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새길교회는 바로 이러한 옥토를 가꾸고 지키기 위해 나름대로 애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의 샘이 마르지 않는 곳, 생명의 말씀이 멈추지 않고 들려지는 곳, 그리하여 세상의 소리가 우리의 영혼을 완전히 덮어버리지 못하는 곳에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어떤 것입니까? 우리 안에 마지막 남은 우상까지 여지없이 파괴하고 한 점의 허위의식 없이 우리를 벌거벗겨 하나님을 대면하게 하는 것, 그런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대면하기 싫은 자신의 추한 모습과 허상을 여지없이 폭로하며,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고 약한 자를 일으켜주시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문자로 씌어진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숨결을 타고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정신을 억압하고 증오를 조장하는 근본주의자들의 도구가 아니라 사람을 한없이 자유롭고 겸손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잘못 이해하면 사람을 살리기는커녕 사람을 잡습니다. 한국교회, 특히 개신교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신자들의 자유와 인격을 파괴하고 비인간화 시켰는지를 생각해보면 실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개신교의 맹점 가운데 하나가 성경문자주의, 성경숭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여 마치 하나님이 인간처럼 말을 한다고 생각하거나, 이른바 축자영감설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의 문자적 의미와 단순 동일시함으로써 성경의 영적 진리를 말살하는 근본주의야말로 한국 개신교 최대의 병폐요 족쇄요 저주입니다.

성경은 간단한 책이 아닙니다. 잘못 읽는 것보다는 차라리 안 읽는 편이 났습니다. 신학적 배경이 없거나 그릇된 신학을 가지고 읽으면 성경은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말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우리를 죽입니다. 그리스도교 2,000년 역사 동안 대다수 신자들은 성경을 한 줄도 읽지 않고 신앙생활을 해 왔다는 명백한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 한 줄 읽어보지 못했다고 그들이 모두 엉터리 신자였다는 말입니까? 일반 신도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말틴 루터의 종교 개혁 이후의 일이며, 아직도 개신교는 가톨릭이나 동방 교회에 비하여 소수 종교일 뿐 아니라 개신교 신자라 해서 다 성경을 읽는 것도 아닙니다. 유독 우리 한국 교회가 성경 읽기에 열심이나, 이는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한둘이 아닙니다. 제멋대로 하는 엉터리 해석으로 인해 그야말로 각종 이단과 이상한 교파들이 난립하고 저질 무인가 신학교들이 난립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문자가 아닙니다. 바울 사도의 말씀대로, 문자는 인간을 죽이고 영은 살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인들을 윽박지르는 부흥사들의 고함보다는 고요한 침묵 속에서 들려오는 영혼의 음성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40일 간 광야에서 금식하며 기도와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을 받았다고 떠들어대는 시끄러운 방언보다는 남모르는 형제자매의 아픔을 위로해 주는 사랑의 언사야말로 인간을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때로는 무신론자들의 냉혹한 말이 직업적 교역자들의 웅변적 설교보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본주의 자유민주주의 사회라고 더 잘 들리고 사회주의라고 반드시 안 들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처럼 이른바 종교의 자유가 있어 종교가 번창한다고 잘 들리고 종교가 억압받는 땅이라고 안 들리는 것도 아닙니다.

흉측하게 파헤쳐진 산과 더렵혀진 강들의 신음소리에서, 소리 없이 피고 지는 한 송이 들꽃과 주고받는 말없는 대화 속에서, 그리고 발언권을 빼앗긴 약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한숨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실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들을 귀만 있다면 언제 어디서나, 어느 나라 어느 사회에서든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들려옵니다. 이 다양한 소리들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희망이 있고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9·11 테러 이후 흥분하다 못해 전쟁의 구실만을 찾아 광분하고 있는 미국 지도자들에는 지금 이러한 말씀이 들리지 않으며, 지난날 서구 열강으로부터 받았던 수모를 되 갚기나 하려는 듯 강대국이 되려는 일념에 사로잡힌 중국 땅에도 이러한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인간은 진정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지 물을 겨를도 없이 어른은 어른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정신 없이 뛰고 있는 이 땅에서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까? 있다면 어디서 들리는지 조용히 귀기울여 보아야 할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이야기책에서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 일을 걱정함으로 살아가는 줄 알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심어 놓은 사랑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요한 1서의 말씀대로, "사랑 안에 사는 자는 하나님 안에 살고, 하나님은 그 안에 계신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본래 인간과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그 사랑을 지향하고 증언합니다. 말씀의 근원과 목적은 사랑입니다. 말씀은 태초의 말씀이신 로고스로부터 나오며, 그 말씀의 육화(incarnation)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증언합니다. 인간에게 사랑과 자유를 주는 이러한 진리의 말씀이야말로 진정으로 인간을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는 이 말씀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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