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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롬9: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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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최영실 교수 |
참고 : | 성공회대학 / 새길교회 2002. 9. 1 주일설교 |
" 나 자신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로마서를 읽으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놀랄 수밖에 없는 구절을 보게 된다. 그것은 바로 로마서 9장 2-3절의 말씀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게는 내 동족을 위한 큰 슬픔이 있고, 내 마음에는 끊임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나는 육신으로 내 동족 내 겨레를 위하는 일이면, 내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본래 열심있는 유대교인 중의 유대교인이었던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그가 핍박하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사건을 통해서, 이제는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이 되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이제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그 자신이 이전에 내세우며 자랑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까지 진술한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던 바울은 동족인 유대인들에 의해 매를 맞고 돌로 쳐 죽임을 당할 뻔도 하면서 말할 수 없는 핍박과 박해를 당했다. 그런데 지금 로마서에서 바울은 동족인 유대민족을 위하는 일이라면, 그 자신이 그토록 모든 것을 바쳐서 찾았던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저주를 받을지라도 달게 받겠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라 살려고 애쓰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분단된 우리 민족과 동족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바울은 자신을 핍박하던 유대 동족을 위해서라면 그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찾았던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도 좋다고 말하고 있는데, 우리는 도리어 그리스도의 이름과 교리와 법을 내세우며 내 동족 내 형제자매를 비판한고 비난하며 저주해 온 것은 아닌가? 사실 우리는 세계사의 역사를 통해 예수를 믿는다고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신봉하는 교리와 교설을 내세우며, 타종교인이나 이데올로기를 빌미로 무고한 많은 사람을 살해해 온 역사를 알고 있다. 십자군 전쟁의 역사와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미국의 부시가 자기들의 잣대로 '악의 축' 국가들을 규정하면서 그들에 대한 보복과 전쟁의 위협을 가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모든 행위는 바울의 복음에 비추어보면 결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참된 태도가 아니다. 아니, 그들은 결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오늘 우리는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이 사실을 분명히 하면서, 분단된 우리 민족의 현실에서 지금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올바로 규명해 보아야만 할 것이다.
2. 그리스도인이란?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들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구원 소식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다함을 받은 자들인, 그리스도인들이란 도대체 어떠한 존재인가? 하는 점이다. 실로 오늘날 종교간의 갈등이나 이데올로기 논쟁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사람들 중의 하나가 소위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로마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하나님의 의'(롬 1-3장)라는 주제를 통해서 상세히 밝히고 있다.
바울은 본래 이름은 사울인데, 그는 유대교의 열심 있는 율법학자였으며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사람이다. 그러나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후, 당시 유대교가 말하고 있던 구원교리와는 전혀 다른 그리스도교의 구원 소식을 전파한다. 당시 유대교에서는 인간이 의로운 율법적 행위를 통하여 먼 미래의 종말에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고 생명과 구원을 얻는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바울은 종말에 구원을 주는 '의'는 인간의 율법적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먼 미래가 아닌 지금 얻게되었다(롬 1-8장)고 선포한다.
바울은 이 사실을 증언하기 위하여 우선 로마서 1:18-32절에서 당시 이방인들이 자연을 통해서 모든 만물을 창조한 하나님을 깨달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리지 않을 뿐 아니라 온갖 불의와 악행을 저지름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었다는 점을 말한다. 그리고 2:1-3:8절에서는 이방인들이 저지르는 그런 죄를 자신은 전혀 저지르지 않았다고 자처하면서 자신의 의를 자랑하던 유대인들의 죄를 폭로한다. 유대인들은 다른 사람을 심판해서는 안 된다는 하나님의 법도를 알면서 다른 사람을 심판한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은 율법을 자랑하면서 겉모양으로만 지키고 사실은 하나님의 법도를 전혀 지키지 않는 사람이다.
그 때문에 바울은 로마서 3:9-20절에서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다 같이 죄 아래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결론적으로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롬 3:20)하고 말한다. 그런 후에 바울은 '율법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나타난 하나님의 의'(롬 3:21)에 관해서 설명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인 '복음'을 통해서 나타났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불의한 인간과 화목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 스스로 자신의 아들인 예수를 화목제물과 대속 제물로 내어줌으로써 인간에게 '의'를 선포해 주었으며, 그것이 바로 '인간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다.
바울은 인간의 의로운 행위 없이, 아니 그가 불의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아 심판을 피하고 생명과 의를 얻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당시 유대교에서 사용되던 제사 용법인 화목제물과 대속제물의 화법을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증언했지만, 사실상 이것은 바울 이전 초대교회의 가르침이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화목제물과 대속제물의 개념을 '하나님의 의'의 소식과 관련시키면서 그 사건을 독자적으로 새롭게 해석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그것은 바로 율법의 행위 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롬 3:24) 모든 불의한 사람을 조건없이 받아들이고 용서하며 자신의 자녀로 삼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과 은혜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로마서 4:4-5절에서 단적으로 말해준다. "일을 하는 사람은 그가 받는 품삯을 은혜로 받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당연한 보수로 행각합니다. 그러나 경건하지 못한 사람을 의롭게 하여 주시는 분을 믿는 사람은, 비록 아무 공로가 없어도, 그 믿음이 의로움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이 진술에 따르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불의한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믿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인간이 아무리 불의할지라도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내어주는 그러한 큰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공로 없이, 조건 없이 거저 은혜로 용서하고 사랑하며 받아들임으로써 의롭다고 여겨주시고 생명과 구원을 주셨음을 믿는 것이다(롬 5-8장).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의 특징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바울이 로마서 3장 27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자랑하지 않는' 존재자이다. 그는 오히려 하느님에 대하여 빚진 자로서, 자신의 몸 전체를 다른 사람의 종으로 바치며 사는 사람이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산 자로서, 이제부터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살지 않고 오직 자신을 죽음과 심판에서 구원하여 생명과 의를 선사해 준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위해 사는 자가 된다(롬 5-6장). 그는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면서, 자신을 다른 사람을 섬기는 종으로 선포한다(고후 4:5). 그는 자기의 유익이 아니라 이웃의 유익을 구하며, 원수까지 사랑하는 삶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이 모든 행위는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이나, 자신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의 의로운 행위없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의와 생명을 얻은 '빚진 자'로서의 행위일 뿐이다.
3. 그런데 "남의 종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바울이 로마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율법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 소식인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했는데, 그 목적은 당시 로마교회 안에서 일어났던 커다란 갈등과 분쟁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로마교회 안에는 이방인으로서 예수를 믿은 사람들과 유대인에서 개종하여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대계 그리스도인은 음식을 먹을 때에 채소만 먹고, 또 어떤 날을 더 존중히 여기면서 아직 율법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이방인계 그리스도인의 경우는 모든 것을 먹고, 모든 날이 다 같다고 생각하면서 자신들이야말로 '믿음이 강한 자들'(롬 14:1-6, 15:1)이라고 자처했다. 그리고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을 '믿음이 약한 자들'이라고 멸시하며 비판했다.
바울은 이러한 상황에서 그리스도를 통한 차별 없는 하나님의 의의 사건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 후에, 믿음이 강하다고 자처하며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은 믿음이 약한 이를 받아들이고, 그의 생각을 시비거리로 삼지 마십시오...하나님께서 그를 받아들이셨습니다. 우리가 누구이기에 남의 종을 비판합니까? 그가 서 있든지 넘어지든지, 그것은 그 주인이 상환할 일입니다. 주께서 그를 서 있게 할 수 있으시니, 그는 서 있게 될 것입니다"(롬 14:1-4). 바울은 또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는 형제나 자매를 비판합니까?...이제부터는 서로 남을 판단하지 마십시다. 형제자매 앞에 장애물이나 걸림돌을 놓지 않겠다고 결심하십시오...여러분 각자가 음식 문제로 형제자매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 그것은 이미 사랑을 따라 살지 않는 것입니다. 음식문제로 그 사람을 망하게 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좋다고 여기는 일이 도리어 비방거리가 되지 않게 하십시오"(롬 14"10-15:16).
여기에서 바울은 율법과 교리와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멸시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그리스도은 그들이 멸시하는 그 사람을 위해서도 죽으셨다고 말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차별하는 모든 종교적 교리나 이데올로기를 철폐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사실상 모든 차별과 갈등과 이데올로기와 종교적 교리의 벽을 허물어 버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자녀인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만물을 받아들이고 용서하며 사랑한 사건이다. 그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이, 모두 하나이다"(갈 3:28) 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로마교회 뿐 아니라 오늘의 현실에서도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오히려 타 종교인들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자신과 다른 견해나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 가혹할 정도로 비판하며 원수로 삼아 살해하면서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라고 자처하는 경우가 많다. 바울의 구원 소식은 분명히 타종교의 구원 교리와 다르다. 그러나 바울이 전한 구원 소식은 타종교인이나 이데올로기가 다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들도 모두 차별없이, 자기 아들을 내어주는 그 큰 사랑과 자비로 거저 용서하며 사랑하며 구원했다고 말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차별하는 종교적 교리와 이데올로기를 깨뜨리며 모든 사람을 포용하고 있다.
타종교인들, 이데올로기나 사상이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이 우리와 똑같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이것은 예수의 산상설교에서도 잘 드러난다. 하나님은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구별하지 않고 그들 모두에게 해를 떠오르게 하며 비를 내려주는 자비한 분이다(마 5:45).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를 판단하는' 그리스도인이야말로 다시 한번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자신들이 언제부터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그것은 자신들의 공로와 의로운 행위 때문이었는가?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에 심판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었고, 또 지금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그것으로 범죄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만들고 있는 불의한 자들이 아닌가? 그리스도는 의인이 아니라 모든 불의한 사람들에게 의와 생명을 주려고 죽으셨다. 그리고 자기의 종을 일으켜 세우고자 하면, 그는 서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남의 하인을 판단하고 있는 너희는 누구인가?"(롬 14:4).
4. "보복하지 말고 구하는 것을 주라"
바울은 이러한 관점에서 로마교회 안에서 믿음이 강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소위 그들이 볼 때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돌보아 주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해서는 안 되며, 자기가 아니라 자기 이웃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면서 이웃에게 유익을 주고 덕을 세우라고 권면한다. 바울은 '믿음이 강한 자'로 자처하는 이들에게 자기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일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비방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하게 말한다(롬 14:16).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비방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서로 평화를 도모하는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자(롬 14:17-19)고 말한다.
바울은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랑의 행위나 윤리적 계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받은 하나님의 자비함에 근거하여 그들도 자신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할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권면한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행동이야말로 그들이 드려야할 합당한 예배라고 말한다(롬 12:1). 바울은 로마서 12장-15장에서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그들도 하나님의 산 제물로 행해야 할 일들을 말해준다. 선을 행하면서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기를 먼저하며, 쓸 것을 공급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힘 쓸 뿐 아니라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라"(롬 12:17-18)고 권면한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핵심도 자기를 박해하는 사람들과 원수를 용서하며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는 산상설교를 통해서 보복에 대한 금지와 원수에 대한 사랑을 말한다. 그런데 보복의 금지와 원수 사랑의 이 요구는 흔히 오해해왔듯이 예수의 제자나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일종의 윤리적 도덕 계명도, 또 이 세상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유토피아적인 이상도 아니다. 보복의 금지와 원수 사랑의 요구는 주후 70년 유대전쟁 말기에 갈릴리의 독립 운동가들을 폭도와 살인자로 매도하면서 그들에 대한 미움과 보복을 부추기고 있던 예루살렘의 율법학자들을 향하고 있다. 유대전쟁이 일어나던 주후 67-70년 당시 유대민족은 실질적으로는 이미 북쪽 갈릴리 지방과 남쪽 예루살렘 지역으로 나뉘어진 채 서로 반목하고 있었다. 지배자인 로마 뿐 아니라 동족인 예루살렘 사람들로부터도 멸시와 착취를 당해오던 갈릴리 사람들은 주후 67년 유대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그런데 70년 전쟁 말기에 갈릴리의 열심당원들은 자신을 적국 로마에 폭도와 살인자로 밀고하여 살해하는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을 민족 반역자로 간주하여 단도로 살해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루살렘의 율법학자들은 본래는 극심한 보복을 금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탈리온의 법을 갈릴리 사람들에 대한 보복법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예수는 "악한 것으로 대응하지 말고,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라"고 말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보복하지 않는 것 뿐 아니라 "속옷을 가지려고 하면 겉옷까지 내어주고, 달라고 하면 주고, 꾸려고 하면 물리치지 말라"(마 5: 39-42)고 말한다. 말하자면 여기에서 예수는 가난과 굶주림 때문에 생존을 위한 투쟁과 민족 독립전쟁을 일으켰던 갈릴리의 동족을 폭도와 살인자로 매도하며 그들에 대한 보복심을 불러일으키던 예루살렘의 율법학자들을 향하여 보복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먼저 가난하고 굶주린 갈릴리의 형제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5.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용납하라!
마태복음 5장 43-48절을 보면 당시 예루살렘의 율법학자들은 구약성서에도 없는 계명을 만들어서 "네 이웃은 사랑하고, 네 원수는 미워하라"고 가르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예수는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 하여라"(마 5:443-44)하고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가 드려야 할 올바른 기도에 관해 듣게 된다. 예수는 자비와 정의를 행하지 않고 입술로만 주님을 부르짖는 유대인들의 위선적인 기도와, 내일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위하여 중언부언하는 이방인들의 기도를 모두 비판한다(마 6:5-34). 참된 기도란 '나의 이름, 나의 나라,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당신의 이름, 당신의 나라, 당신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 위하여 간구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원수를 사랑하며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함으로써 참된 평화와 사랑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다. 그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주셨듯이 우리도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기를 위해 간구해야 한다(마 6:14-15). 그래야만 미움과 보복의 악순환을 끊고 참된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8장 23-35절의 비유에 의하면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해 주지 않고 미워하며 보복하는 사람은, 마치 일만 달란트라는 큰 빚을 진 사람이 자비로운 주인에 의해 거저 탕감을 받은 후에 일백 데나리온이라는 아주 적은 돈을 빚진 사람을 만나 용서하지 않고 멱살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호통 치는 사람과 같다. 예수는 만일 하나님으로부터 큰 빚을 거저 탕감 받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결코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마 18:35)이라고 말한다. 예수가 선포한 원수 사랑의 요구는 바울의 경우 로마교회 안에서 교리 문제로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용서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요구되었다. 바울은 자신들을 '믿음이 강한 자'라고 자처하며 '믿음이 약한 자'를 비난하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용서를 받은 사람들답게 교리와 신념이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그의 생각을 시비거리로 삼지 말라'(롬 14:1)고 말한다. 또한 그들을 판단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그들 앞에 장애물이나 걸림돌을 놓지 않겠다고 결심하고(롬 14:13-14), 더 나아가서 자기 자신이 아니라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돌보아 주면서, 유익을 주고 덕을 세우라"(롬 15:1-2)고 촉구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믿음이 강한 사람들'이 비판하고 있는 그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죽으셨고, 그들을 조건 없이 이미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로마서 1장 8절에 의하면 로마교회 교인들은 이미 복음을 들었고, 그들의 믿음이 좋다고 알려진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복음의 참 뜻을 알지 못하고 교리 문제로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면서, 자기와 이념과 교리가 다른 이들을 전혀 용납하지 않고 있었다. 오늘날도 소위 '믿음이 좋다'는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교리와 이데올로기 문제로 타종교인이나 다른 사람을 비판하며 그들에 대한 저주와 보복과 살인을 정당화시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모든 사람을 거저 값없이 사랑하고,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준 그리스도를 믿는 행위가 아니다. 예수의 선포에 비추어보면 만일 우리가 종교적 교리와 이데올로기 문제로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용납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우리를 결코 용납하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미 사랑하고 용납한 그 사람을 조건 없이 받아들이고, 그들이 구하는 것을 주며 박해할지라도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올바로 나타내 보여주는 참된 승리의 길이다.
6. '자랑함이 없이' 맺어야 할 '열매'
그런데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복음의 기쁜 소식을 들은 그리스도인이 궁극적으로 맺어야 할 '열매'는 무엇일까? 바울은 로마교회 교인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정도였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복음을 받은 자들로서 맺어야할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바울은 그 자신이 로마에 가려고 한 이유에 대해서 몇 가지를 언급하면서, 그가 다른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거둔 것 같은 '열매'를 로마교회 안에서도 거두려고 했기 때문(롬 1:13)이라고 밝힌다. 바울이 말한 '열매'는 어떤 것일까? 사람들은 그것을 흔히 '전도'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로마서 15장 28절에 의하면 바울이 말하려는 '열매'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제금을 보내는 일로 제시된다. 그러나 구제금을 보내는 일로 제시되는 그 '열매'는 결코 하나의 자선 행위나 단순한 '나눔'의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도리어 그리스도인이 '빚진 것'을 되갚는 행위로서의 '열매'이다.
바울은 로마서 15장 22절 이하에서 자신이 여러해 전부터 로마교회를 방문하려고 했으나, 지금은 성도들을 돕는 일로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말한다. 그는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에게 보낼 구제금을 기쁜 마음으로 내었다고 말하며, 이방인들은 사실상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빚을 진 사람들'로서 그들에게 봉사할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서 신령한 복을 나누어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사람들이 헌금한 '열매'를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전해준 후에 로마교회에 가서 그들의 후원을 얻어서 다시 스페인으로 가려고 한다고 말한다.
성서적 관점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선행이나 사랑의 행위는 결코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이나, 칭송받을 만한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아무런 자랑도 할 수 없는 '빚진 자'로서의 행위일 뿐이다. 성서의 증언에 의하면 본래 땅과 땅의 소산물은 모두 하나님에게 속한 것으로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선물로 맡겨 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노예로 신음할 때, 큰 사랑과 자비로 자유와 해방을 주신 분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땅과 소산물이 많아질수록 하나님 대신 물질을 섬기며 신발 한 켤레 값으로 가난한 동족을 노예로 삼고 얹혀사는 이방 식객을 멸시하고 착취했다. 뿐만 아니라 남과 북이 분단된 채 부자와 권력자들은 강대국의 무력을 의존하여 동족을 착취하고 죽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언자들은 하나님이 요구하는 '희년법'을 선포하면서,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난 50년째에는 모든 것을 원 상태로 되돌려 주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그들에게 빚진 자들을 모두 탕감해 주고, 노예를 해방시켜주며, 땅을 쉬게 하라고 명한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은 사실상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희년법'이 요구하고 있는 것은 흔히 말하는 '나눔'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착취한 그 모든 것을 '되돌려 줌'이다. 삭개오처럼 '누구에게 강탈한 것을 네 배로 갚는'(눅 19:8)행위이며, 불의한 재판관에 의해 빼앗겼던 과부에게 그 권리를 되찾아 주는(눅 18:5-7)행위이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는 당시 유대인들이 위선적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들으려고 행하던 '자선'과 '기도', '금식' 행위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한 행위는 하나님의 칭송 대신, 도리어 그것에 상응하는 보응을 받을 뿐이다. 예수는 "너희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마 23장)하고 말한다. 예수가 볼 때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선행과 사랑의 행위는 모두, 밭에 나가서 일을 하고 돌아온 후에도 앞치마를 두르고 주인의 식사를 준비하면서도 아무런 공로도 내 세울 줄 모르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 하고 자신을 '쓸모없는 종'(눅 17:7-10)으로 말하는 자와 같아야 한다. 그리고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 그러한 일은 모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용서와 사랑을 받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빚진 자'로서의 행위일 뿐이다.
바울의 경우도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모든 사랑의 행위는 '빚진 자'로서 해야 할 일일 뿐 결코 자기의 의를 자랑하려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바울이 보는 바, 가장 큰 죄는 '하느님의 은례'로 살고있다는 사실을 거부하며 자기의 의로운 행위를 통해 살려고 하면서,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3장 21-26절에서 모든 불의한 사람을 차별 없이 의롭다고 여겨준 '하나님의 의'에 관한 소식을 전한 후에, 3장 27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면 사람이 자랑할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어떠한 법으로 의롭게 됩니까? 행위의 법으로 됩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4장 7절에서 자기를 자랑하고 있던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한다. "누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별다르게 보아 줍니까? 여러분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모두가 받은 것인데, 왜 받지 않은 것처럼 자랑합니까".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 12절에서 자신들이 받은 '영'은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어떤 신비적인 힘으로 말하지 않고,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이 자기의 공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임을 깨달아 아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사도행전 4장 32-35절에 의하면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은 남녀 신도들은 모두 '자기 소유를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 때문에 초대교회에서는 구약시대에는 완전히 이루어질 수 없었던 희년의 역사, 곧 자신의 땅과 집을 다 팔아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는 은혜의 역사가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빚진 자'로서, 기쁜 마음으로 필요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것을 되돌려주는 평화의 희년의 역사를 세워야만 한다.
7. "먼저 가서 화해하라"
구약성서 래위기에 의하면 땅과 소유를 되돌려주고, 노예를 풀어주며 빚을 탕감해주라는 희년법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축복과 저주를 주는 기준으로 제시되었다. 레위기 26장에서 하나님은 그가 제시한 희년법을 지키면 땅의 소출과 많은 열매와 곡식을 주고 평화를 주겠지만, 만일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들이 원수의 칼에 맞아 쓰러지고 곡식과 열매도 맺지 못하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준 땅도 이방 적국에 의해 모두 빼앗기게 될 것이라고 선언한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가난한 동족을 노예로 삼고 억압하며 착취하는 불의한 사람들로부터 그 자신의 소유인 땅과 소산과 모든 것을 도로 찾고, 다시 그들을 이방 적국의 노예가 되게 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상 이스라엘은 한번도 희년법을 올바로 지킨 적이 없었다. 예레미아서에 의하면 시드기야 왕 때 예루살렘이 바빌로니아 군대에 의해 공격을 받고 라기스와 아세가 성 만 남게 되었을 때 히브리 노예를 풀어준 적이 있었지만, 곧 마음이 바뀌어 다시 남녀 종들을 잡아다가 종으로 부렸다(렘 34: 8-11). 결국 하나님이 요구한 희년법을 지키지 않고 정의와 평화를 수립하지 못했던 이스라엘 민족은 남과 북이 모두 이방의 강대국에 의해 멸망하고 노예가 되고 말았다.
신약성서에서 누가복음 기자는 처음부터 나사렛 예수를 구약에서 예언되었던 종말적 평화와 희년의 성취자로 증언한다. 예수는 종말은 구원 은사인 '주의 영'을 받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며, 포로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눈먼 사람들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려고" (눅 4:18-19) 이 땅에 왔다. 그런데 '주의 은혜의 해'는 착취와 억압을 당하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은혜'와 '축복'의 해가 되지만, 불의를 저지르고 있던 부자와 권력자들에게는 '심판'과 '화'를 입는 시간이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자신을 통해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새 역사에 의해서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어버리고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비천한 사람들을 높이며 주린 사람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는"(눅 1:51-53)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고 찬양한다. 예수도 이제부터는 "지금 굶주리는 사람은 배부르게 되고, 지금 슬피 우는 사람은 웃게 될 것이며, 지금 배부른 사람은 굶주리며, 지금 웃는 사람을 슬퍼하며 울게 될 것" (눅 6:20-21)이라고 선포한다.
신약성서에서 예수가 말하는 '평화'는 결코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내면적인 평화나, 영지주의에서처럼 금식이나 금욕 등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초 신비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예수가 말하는 평화는 구약성서의 '샬롬'과 같이 이 사회 속에서 너와 나의 관계를 통해 정의를 수립함으로써 이루어지는 평화이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을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불의와 싸워 이기는 평화이다(요 14:27, 15:18-27, 16:33). 예수는 세상이 말하는 것과 같은 '거짓 평화'가 아니라, 모든 억압받는 사람들을 풀어주는 '참 평화'를 이루기 위해 불의한 권력자와 부자들에게 회개할 것과 참된 화해를 이룰 것을 촉구한다. 예수가 말하는 '회개'는 단순한 후회나 뉘우침이 아니다. 그것은 '회개'를 뜻하는 희랍어 '메타노이아'가 말해주는 것처럼, 전적으로 그 방향을 달리 하여 살아가는 것, 말하자면 불의를 버리고 정의를 수립하며 사는 삶을 뜻한다. 그리고 참된 '화해'란 약자를 멸시하고 착취한 불의한 강자들이 먼저, 그가 착취한 모든 것을 한 푼도 남김없이 되돌려주는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마 5:21-26).
참된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일, 이 일은 제단에 제물을 바치는 일이나 예배를 드리는 일보다 우선하여, 지금 시급히 해야만 하는 일이다(마 5:24).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억울함을 당한 약자들이 하늘을 우러러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할 것이고, 우는 자들의 기도를 들어주는 하나님은 저들의 호소를 결코 외면하지 않고 들으시며 불의한 자들을 속히 심판할 것이다(마 5:26, 18:10, 눅7-8). 그리하여 땅과 부를 자랑하던 자들은 그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고, 불의한 권력자와 종교가들로 말미암아 민족 전체가 이방 적국의 노예가 되며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성전과 성도 모두 무너지고 말 것이다(마 24:1-2, 눅 21:5-6).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값없이 용서받은 자로서 우리와 이데올로기가 다르고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 우리가 원수와 적으로 삼았던 사람들도 용납하고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독점하고 착취했던 것을 내어놓고, 서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은 나눔으로써 참된 평화와 화해를 이루어야 한다. 강대국의 이데올로기 논쟁에 휘말려 이데올로기를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시하며, 형제와 동족을 원수와 적으로 삼아 미워하고 보복하려고 했던 우리의 죄를 고백하며,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와 똑같이 사랑하며 용납한 하나님의 자녀임을 올바로 인식해야 한다. 우리와 교리나 신조가 다르다 하더라도 그들을 '원수'로 삼지 말고 도리어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에게 유익이 되는 일을 해야 한다. 그리하여 한 핏줄 한 형제자매인 동족에 대해 미움과 보복을 부추기는 모든 거짓된 교설과 이데올로기를 깨뜨리며 정의를 수립함으로써 그리스도가 원하는 참된 화해와 평화의 역사를 이루어야 한다. 분단된 이 민족이 또다시 미움과 갈등과 보복심에 휩싸여 제 2의 '한국전쟁'을 일으키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 민족 전체가 강대국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시급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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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를 읽으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놀랄 수밖에 없는 구절을 보게 된다. 그것은 바로 로마서 9장 2-3절의 말씀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게는 내 동족을 위한 큰 슬픔이 있고, 내 마음에는 끊임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나는 육신으로 내 동족 내 겨레를 위하는 일이면, 내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본래 열심있는 유대교인 중의 유대교인이었던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그가 핍박하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사건을 통해서, 이제는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이 되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이제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그 자신이 이전에 내세우며 자랑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까지 진술한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던 바울은 동족인 유대인들에 의해 매를 맞고 돌로 쳐 죽임을 당할 뻔도 하면서 말할 수 없는 핍박과 박해를 당했다. 그런데 지금 로마서에서 바울은 동족인 유대민족을 위하는 일이라면, 그 자신이 그토록 모든 것을 바쳐서 찾았던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저주를 받을지라도 달게 받겠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라 살려고 애쓰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분단된 우리 민족과 동족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바울은 자신을 핍박하던 유대 동족을 위해서라면 그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찾았던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도 좋다고 말하고 있는데, 우리는 도리어 그리스도의 이름과 교리와 법을 내세우며 내 동족 내 형제자매를 비판한고 비난하며 저주해 온 것은 아닌가? 사실 우리는 세계사의 역사를 통해 예수를 믿는다고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신봉하는 교리와 교설을 내세우며, 타종교인이나 이데올로기를 빌미로 무고한 많은 사람을 살해해 온 역사를 알고 있다. 십자군 전쟁의 역사와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미국의 부시가 자기들의 잣대로 '악의 축' 국가들을 규정하면서 그들에 대한 보복과 전쟁의 위협을 가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모든 행위는 바울의 복음에 비추어보면 결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참된 태도가 아니다. 아니, 그들은 결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오늘 우리는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이 사실을 분명히 하면서, 분단된 우리 민족의 현실에서 지금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올바로 규명해 보아야만 할 것이다.
2. 그리스도인이란?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들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구원 소식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다함을 받은 자들인, 그리스도인들이란 도대체 어떠한 존재인가? 하는 점이다. 실로 오늘날 종교간의 갈등이나 이데올로기 논쟁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사람들 중의 하나가 소위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로마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하나님의 의'(롬 1-3장)라는 주제를 통해서 상세히 밝히고 있다.
바울은 본래 이름은 사울인데, 그는 유대교의 열심 있는 율법학자였으며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사람이다. 그러나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후, 당시 유대교가 말하고 있던 구원교리와는 전혀 다른 그리스도교의 구원 소식을 전파한다. 당시 유대교에서는 인간이 의로운 율법적 행위를 통하여 먼 미래의 종말에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고 생명과 구원을 얻는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바울은 종말에 구원을 주는 '의'는 인간의 율법적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먼 미래가 아닌 지금 얻게되었다(롬 1-8장)고 선포한다.
바울은 이 사실을 증언하기 위하여 우선 로마서 1:18-32절에서 당시 이방인들이 자연을 통해서 모든 만물을 창조한 하나님을 깨달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리지 않을 뿐 아니라 온갖 불의와 악행을 저지름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었다는 점을 말한다. 그리고 2:1-3:8절에서는 이방인들이 저지르는 그런 죄를 자신은 전혀 저지르지 않았다고 자처하면서 자신의 의를 자랑하던 유대인들의 죄를 폭로한다. 유대인들은 다른 사람을 심판해서는 안 된다는 하나님의 법도를 알면서 다른 사람을 심판한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은 율법을 자랑하면서 겉모양으로만 지키고 사실은 하나님의 법도를 전혀 지키지 않는 사람이다.
그 때문에 바울은 로마서 3:9-20절에서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다 같이 죄 아래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결론적으로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롬 3:20)하고 말한다. 그런 후에 바울은 '율법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나타난 하나님의 의'(롬 3:21)에 관해서 설명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인 '복음'을 통해서 나타났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불의한 인간과 화목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 스스로 자신의 아들인 예수를 화목제물과 대속 제물로 내어줌으로써 인간에게 '의'를 선포해 주었으며, 그것이 바로 '인간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다.
바울은 인간의 의로운 행위 없이, 아니 그가 불의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아 심판을 피하고 생명과 의를 얻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당시 유대교에서 사용되던 제사 용법인 화목제물과 대속제물의 화법을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증언했지만, 사실상 이것은 바울 이전 초대교회의 가르침이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화목제물과 대속제물의 개념을 '하나님의 의'의 소식과 관련시키면서 그 사건을 독자적으로 새롭게 해석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그것은 바로 율법의 행위 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롬 3:24) 모든 불의한 사람을 조건없이 받아들이고 용서하며 자신의 자녀로 삼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과 은혜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로마서 4:4-5절에서 단적으로 말해준다. "일을 하는 사람은 그가 받는 품삯을 은혜로 받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당연한 보수로 행각합니다. 그러나 경건하지 못한 사람을 의롭게 하여 주시는 분을 믿는 사람은, 비록 아무 공로가 없어도, 그 믿음이 의로움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이 진술에 따르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불의한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믿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인간이 아무리 불의할지라도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내어주는 그러한 큰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공로 없이, 조건 없이 거저 은혜로 용서하고 사랑하며 받아들임으로써 의롭다고 여겨주시고 생명과 구원을 주셨음을 믿는 것이다(롬 5-8장).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의 특징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바울이 로마서 3장 27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자랑하지 않는' 존재자이다. 그는 오히려 하느님에 대하여 빚진 자로서, 자신의 몸 전체를 다른 사람의 종으로 바치며 사는 사람이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산 자로서, 이제부터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살지 않고 오직 자신을 죽음과 심판에서 구원하여 생명과 의를 선사해 준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위해 사는 자가 된다(롬 5-6장). 그는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면서, 자신을 다른 사람을 섬기는 종으로 선포한다(고후 4:5). 그는 자기의 유익이 아니라 이웃의 유익을 구하며, 원수까지 사랑하는 삶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이 모든 행위는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이나, 자신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의 의로운 행위없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의와 생명을 얻은 '빚진 자'로서의 행위일 뿐이다.
3. 그런데 "남의 종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바울이 로마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율법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 소식인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했는데, 그 목적은 당시 로마교회 안에서 일어났던 커다란 갈등과 분쟁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로마교회 안에는 이방인으로서 예수를 믿은 사람들과 유대인에서 개종하여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대계 그리스도인은 음식을 먹을 때에 채소만 먹고, 또 어떤 날을 더 존중히 여기면서 아직 율법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이방인계 그리스도인의 경우는 모든 것을 먹고, 모든 날이 다 같다고 생각하면서 자신들이야말로 '믿음이 강한 자들'(롬 14:1-6, 15:1)이라고 자처했다. 그리고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을 '믿음이 약한 자들'이라고 멸시하며 비판했다.
바울은 이러한 상황에서 그리스도를 통한 차별 없는 하나님의 의의 사건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 후에, 믿음이 강하다고 자처하며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은 믿음이 약한 이를 받아들이고, 그의 생각을 시비거리로 삼지 마십시오...하나님께서 그를 받아들이셨습니다. 우리가 누구이기에 남의 종을 비판합니까? 그가 서 있든지 넘어지든지, 그것은 그 주인이 상환할 일입니다. 주께서 그를 서 있게 할 수 있으시니, 그는 서 있게 될 것입니다"(롬 14:1-4). 바울은 또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는 형제나 자매를 비판합니까?...이제부터는 서로 남을 판단하지 마십시다. 형제자매 앞에 장애물이나 걸림돌을 놓지 않겠다고 결심하십시오...여러분 각자가 음식 문제로 형제자매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 그것은 이미 사랑을 따라 살지 않는 것입니다. 음식문제로 그 사람을 망하게 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좋다고 여기는 일이 도리어 비방거리가 되지 않게 하십시오"(롬 14"10-15:16).
여기에서 바울은 율법과 교리와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멸시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그리스도은 그들이 멸시하는 그 사람을 위해서도 죽으셨다고 말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차별하는 모든 종교적 교리나 이데올로기를 철폐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사실상 모든 차별과 갈등과 이데올로기와 종교적 교리의 벽을 허물어 버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자녀인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만물을 받아들이고 용서하며 사랑한 사건이다. 그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이, 모두 하나이다"(갈 3:28) 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로마교회 뿐 아니라 오늘의 현실에서도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오히려 타 종교인들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자신과 다른 견해나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 가혹할 정도로 비판하며 원수로 삼아 살해하면서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라고 자처하는 경우가 많다. 바울의 구원 소식은 분명히 타종교의 구원 교리와 다르다. 그러나 바울이 전한 구원 소식은 타종교인이나 이데올로기가 다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들도 모두 차별없이, 자기 아들을 내어주는 그 큰 사랑과 자비로 거저 용서하며 사랑하며 구원했다고 말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차별하는 종교적 교리와 이데올로기를 깨뜨리며 모든 사람을 포용하고 있다.
타종교인들, 이데올로기나 사상이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이 우리와 똑같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이것은 예수의 산상설교에서도 잘 드러난다. 하나님은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구별하지 않고 그들 모두에게 해를 떠오르게 하며 비를 내려주는 자비한 분이다(마 5:45).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를 판단하는' 그리스도인이야말로 다시 한번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자신들이 언제부터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그것은 자신들의 공로와 의로운 행위 때문이었는가?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에 심판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었고, 또 지금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그것으로 범죄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만들고 있는 불의한 자들이 아닌가? 그리스도는 의인이 아니라 모든 불의한 사람들에게 의와 생명을 주려고 죽으셨다. 그리고 자기의 종을 일으켜 세우고자 하면, 그는 서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남의 하인을 판단하고 있는 너희는 누구인가?"(롬 14:4).
4. "보복하지 말고 구하는 것을 주라"
바울은 이러한 관점에서 로마교회 안에서 믿음이 강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소위 그들이 볼 때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돌보아 주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해서는 안 되며, 자기가 아니라 자기 이웃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면서 이웃에게 유익을 주고 덕을 세우라고 권면한다. 바울은 '믿음이 강한 자'로 자처하는 이들에게 자기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일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비방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하게 말한다(롬 14:16).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비방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서로 평화를 도모하는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자(롬 14:17-19)고 말한다.
바울은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랑의 행위나 윤리적 계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받은 하나님의 자비함에 근거하여 그들도 자신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할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권면한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행동이야말로 그들이 드려야할 합당한 예배라고 말한다(롬 12:1). 바울은 로마서 12장-15장에서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그들도 하나님의 산 제물로 행해야 할 일들을 말해준다. 선을 행하면서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기를 먼저하며, 쓸 것을 공급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힘 쓸 뿐 아니라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라"(롬 12:17-18)고 권면한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핵심도 자기를 박해하는 사람들과 원수를 용서하며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는 산상설교를 통해서 보복에 대한 금지와 원수에 대한 사랑을 말한다. 그런데 보복의 금지와 원수 사랑의 이 요구는 흔히 오해해왔듯이 예수의 제자나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일종의 윤리적 도덕 계명도, 또 이 세상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유토피아적인 이상도 아니다. 보복의 금지와 원수 사랑의 요구는 주후 70년 유대전쟁 말기에 갈릴리의 독립 운동가들을 폭도와 살인자로 매도하면서 그들에 대한 미움과 보복을 부추기고 있던 예루살렘의 율법학자들을 향하고 있다. 유대전쟁이 일어나던 주후 67-70년 당시 유대민족은 실질적으로는 이미 북쪽 갈릴리 지방과 남쪽 예루살렘 지역으로 나뉘어진 채 서로 반목하고 있었다. 지배자인 로마 뿐 아니라 동족인 예루살렘 사람들로부터도 멸시와 착취를 당해오던 갈릴리 사람들은 주후 67년 유대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그런데 70년 전쟁 말기에 갈릴리의 열심당원들은 자신을 적국 로마에 폭도와 살인자로 밀고하여 살해하는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을 민족 반역자로 간주하여 단도로 살해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루살렘의 율법학자들은 본래는 극심한 보복을 금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탈리온의 법을 갈릴리 사람들에 대한 보복법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예수는 "악한 것으로 대응하지 말고,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라"고 말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보복하지 않는 것 뿐 아니라 "속옷을 가지려고 하면 겉옷까지 내어주고, 달라고 하면 주고, 꾸려고 하면 물리치지 말라"(마 5: 39-42)고 말한다. 말하자면 여기에서 예수는 가난과 굶주림 때문에 생존을 위한 투쟁과 민족 독립전쟁을 일으켰던 갈릴리의 동족을 폭도와 살인자로 매도하며 그들에 대한 보복심을 불러일으키던 예루살렘의 율법학자들을 향하여 보복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먼저 가난하고 굶주린 갈릴리의 형제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5.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용납하라!
마태복음 5장 43-48절을 보면 당시 예루살렘의 율법학자들은 구약성서에도 없는 계명을 만들어서 "네 이웃은 사랑하고, 네 원수는 미워하라"고 가르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예수는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 하여라"(마 5:443-44)하고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가 드려야 할 올바른 기도에 관해 듣게 된다. 예수는 자비와 정의를 행하지 않고 입술로만 주님을 부르짖는 유대인들의 위선적인 기도와, 내일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위하여 중언부언하는 이방인들의 기도를 모두 비판한다(마 6:5-34). 참된 기도란 '나의 이름, 나의 나라,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당신의 이름, 당신의 나라, 당신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 위하여 간구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원수를 사랑하며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함으로써 참된 평화와 사랑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다. 그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주셨듯이 우리도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기를 위해 간구해야 한다(마 6:14-15). 그래야만 미움과 보복의 악순환을 끊고 참된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8장 23-35절의 비유에 의하면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해 주지 않고 미워하며 보복하는 사람은, 마치 일만 달란트라는 큰 빚을 진 사람이 자비로운 주인에 의해 거저 탕감을 받은 후에 일백 데나리온이라는 아주 적은 돈을 빚진 사람을 만나 용서하지 않고 멱살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호통 치는 사람과 같다. 예수는 만일 하나님으로부터 큰 빚을 거저 탕감 받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결코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마 18:35)이라고 말한다. 예수가 선포한 원수 사랑의 요구는 바울의 경우 로마교회 안에서 교리 문제로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용서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요구되었다. 바울은 자신들을 '믿음이 강한 자'라고 자처하며 '믿음이 약한 자'를 비난하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용서를 받은 사람들답게 교리와 신념이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그의 생각을 시비거리로 삼지 말라'(롬 14:1)고 말한다. 또한 그들을 판단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그들 앞에 장애물이나 걸림돌을 놓지 않겠다고 결심하고(롬 14:13-14), 더 나아가서 자기 자신이 아니라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돌보아 주면서, 유익을 주고 덕을 세우라"(롬 15:1-2)고 촉구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믿음이 강한 사람들'이 비판하고 있는 그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죽으셨고, 그들을 조건 없이 이미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로마서 1장 8절에 의하면 로마교회 교인들은 이미 복음을 들었고, 그들의 믿음이 좋다고 알려진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복음의 참 뜻을 알지 못하고 교리 문제로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면서, 자기와 이념과 교리가 다른 이들을 전혀 용납하지 않고 있었다. 오늘날도 소위 '믿음이 좋다'는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교리와 이데올로기 문제로 타종교인이나 다른 사람을 비판하며 그들에 대한 저주와 보복과 살인을 정당화시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모든 사람을 거저 값없이 사랑하고,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준 그리스도를 믿는 행위가 아니다. 예수의 선포에 비추어보면 만일 우리가 종교적 교리와 이데올로기 문제로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용납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우리를 결코 용납하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미 사랑하고 용납한 그 사람을 조건 없이 받아들이고, 그들이 구하는 것을 주며 박해할지라도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올바로 나타내 보여주는 참된 승리의 길이다.
6. '자랑함이 없이' 맺어야 할 '열매'
그런데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복음의 기쁜 소식을 들은 그리스도인이 궁극적으로 맺어야 할 '열매'는 무엇일까? 바울은 로마교회 교인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정도였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복음을 받은 자들로서 맺어야할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바울은 그 자신이 로마에 가려고 한 이유에 대해서 몇 가지를 언급하면서, 그가 다른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거둔 것 같은 '열매'를 로마교회 안에서도 거두려고 했기 때문(롬 1:13)이라고 밝힌다. 바울이 말한 '열매'는 어떤 것일까? 사람들은 그것을 흔히 '전도'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로마서 15장 28절에 의하면 바울이 말하려는 '열매'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제금을 보내는 일로 제시된다. 그러나 구제금을 보내는 일로 제시되는 그 '열매'는 결코 하나의 자선 행위나 단순한 '나눔'의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도리어 그리스도인이 '빚진 것'을 되갚는 행위로서의 '열매'이다.
바울은 로마서 15장 22절 이하에서 자신이 여러해 전부터 로마교회를 방문하려고 했으나, 지금은 성도들을 돕는 일로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말한다. 그는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에게 보낼 구제금을 기쁜 마음으로 내었다고 말하며, 이방인들은 사실상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빚을 진 사람들'로서 그들에게 봉사할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서 신령한 복을 나누어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사람들이 헌금한 '열매'를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전해준 후에 로마교회에 가서 그들의 후원을 얻어서 다시 스페인으로 가려고 한다고 말한다.
성서적 관점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선행이나 사랑의 행위는 결코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이나, 칭송받을 만한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아무런 자랑도 할 수 없는 '빚진 자'로서의 행위일 뿐이다. 성서의 증언에 의하면 본래 땅과 땅의 소산물은 모두 하나님에게 속한 것으로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선물로 맡겨 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노예로 신음할 때, 큰 사랑과 자비로 자유와 해방을 주신 분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땅과 소산물이 많아질수록 하나님 대신 물질을 섬기며 신발 한 켤레 값으로 가난한 동족을 노예로 삼고 얹혀사는 이방 식객을 멸시하고 착취했다. 뿐만 아니라 남과 북이 분단된 채 부자와 권력자들은 강대국의 무력을 의존하여 동족을 착취하고 죽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언자들은 하나님이 요구하는 '희년법'을 선포하면서,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난 50년째에는 모든 것을 원 상태로 되돌려 주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그들에게 빚진 자들을 모두 탕감해 주고, 노예를 해방시켜주며, 땅을 쉬게 하라고 명한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은 사실상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희년법'이 요구하고 있는 것은 흔히 말하는 '나눔'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착취한 그 모든 것을 '되돌려 줌'이다. 삭개오처럼 '누구에게 강탈한 것을 네 배로 갚는'(눅 19:8)행위이며, 불의한 재판관에 의해 빼앗겼던 과부에게 그 권리를 되찾아 주는(눅 18:5-7)행위이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는 당시 유대인들이 위선적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들으려고 행하던 '자선'과 '기도', '금식' 행위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한 행위는 하나님의 칭송 대신, 도리어 그것에 상응하는 보응을 받을 뿐이다. 예수는 "너희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마 23장)하고 말한다. 예수가 볼 때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선행과 사랑의 행위는 모두, 밭에 나가서 일을 하고 돌아온 후에도 앞치마를 두르고 주인의 식사를 준비하면서도 아무런 공로도 내 세울 줄 모르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 하고 자신을 '쓸모없는 종'(눅 17:7-10)으로 말하는 자와 같아야 한다. 그리고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 그러한 일은 모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용서와 사랑을 받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빚진 자'로서의 행위일 뿐이다.
바울의 경우도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모든 사랑의 행위는 '빚진 자'로서 해야 할 일일 뿐 결코 자기의 의를 자랑하려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바울이 보는 바, 가장 큰 죄는 '하느님의 은례'로 살고있다는 사실을 거부하며 자기의 의로운 행위를 통해 살려고 하면서,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3장 21-26절에서 모든 불의한 사람을 차별 없이 의롭다고 여겨준 '하나님의 의'에 관한 소식을 전한 후에, 3장 27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면 사람이 자랑할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어떠한 법으로 의롭게 됩니까? 행위의 법으로 됩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4장 7절에서 자기를 자랑하고 있던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한다. "누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별다르게 보아 줍니까? 여러분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모두가 받은 것인데, 왜 받지 않은 것처럼 자랑합니까".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 12절에서 자신들이 받은 '영'은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어떤 신비적인 힘으로 말하지 않고,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이 자기의 공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임을 깨달아 아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사도행전 4장 32-35절에 의하면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은 남녀 신도들은 모두 '자기 소유를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 때문에 초대교회에서는 구약시대에는 완전히 이루어질 수 없었던 희년의 역사, 곧 자신의 땅과 집을 다 팔아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는 은혜의 역사가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빚진 자'로서, 기쁜 마음으로 필요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것을 되돌려주는 평화의 희년의 역사를 세워야만 한다.
7. "먼저 가서 화해하라"
구약성서 래위기에 의하면 땅과 소유를 되돌려주고, 노예를 풀어주며 빚을 탕감해주라는 희년법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축복과 저주를 주는 기준으로 제시되었다. 레위기 26장에서 하나님은 그가 제시한 희년법을 지키면 땅의 소출과 많은 열매와 곡식을 주고 평화를 주겠지만, 만일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들이 원수의 칼에 맞아 쓰러지고 곡식과 열매도 맺지 못하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준 땅도 이방 적국에 의해 모두 빼앗기게 될 것이라고 선언한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가난한 동족을 노예로 삼고 억압하며 착취하는 불의한 사람들로부터 그 자신의 소유인 땅과 소산과 모든 것을 도로 찾고, 다시 그들을 이방 적국의 노예가 되게 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상 이스라엘은 한번도 희년법을 올바로 지킨 적이 없었다. 예레미아서에 의하면 시드기야 왕 때 예루살렘이 바빌로니아 군대에 의해 공격을 받고 라기스와 아세가 성 만 남게 되었을 때 히브리 노예를 풀어준 적이 있었지만, 곧 마음이 바뀌어 다시 남녀 종들을 잡아다가 종으로 부렸다(렘 34: 8-11). 결국 하나님이 요구한 희년법을 지키지 않고 정의와 평화를 수립하지 못했던 이스라엘 민족은 남과 북이 모두 이방의 강대국에 의해 멸망하고 노예가 되고 말았다.
신약성서에서 누가복음 기자는 처음부터 나사렛 예수를 구약에서 예언되었던 종말적 평화와 희년의 성취자로 증언한다. 예수는 종말은 구원 은사인 '주의 영'을 받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며, 포로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눈먼 사람들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려고" (눅 4:18-19) 이 땅에 왔다. 그런데 '주의 은혜의 해'는 착취와 억압을 당하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은혜'와 '축복'의 해가 되지만, 불의를 저지르고 있던 부자와 권력자들에게는 '심판'과 '화'를 입는 시간이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자신을 통해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새 역사에 의해서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어버리고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비천한 사람들을 높이며 주린 사람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는"(눅 1:51-53)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고 찬양한다. 예수도 이제부터는 "지금 굶주리는 사람은 배부르게 되고, 지금 슬피 우는 사람은 웃게 될 것이며, 지금 배부른 사람은 굶주리며, 지금 웃는 사람을 슬퍼하며 울게 될 것" (눅 6:20-21)이라고 선포한다.
신약성서에서 예수가 말하는 '평화'는 결코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내면적인 평화나, 영지주의에서처럼 금식이나 금욕 등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초 신비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예수가 말하는 평화는 구약성서의 '샬롬'과 같이 이 사회 속에서 너와 나의 관계를 통해 정의를 수립함으로써 이루어지는 평화이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을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불의와 싸워 이기는 평화이다(요 14:27, 15:18-27, 16:33). 예수는 세상이 말하는 것과 같은 '거짓 평화'가 아니라, 모든 억압받는 사람들을 풀어주는 '참 평화'를 이루기 위해 불의한 권력자와 부자들에게 회개할 것과 참된 화해를 이룰 것을 촉구한다. 예수가 말하는 '회개'는 단순한 후회나 뉘우침이 아니다. 그것은 '회개'를 뜻하는 희랍어 '메타노이아'가 말해주는 것처럼, 전적으로 그 방향을 달리 하여 살아가는 것, 말하자면 불의를 버리고 정의를 수립하며 사는 삶을 뜻한다. 그리고 참된 '화해'란 약자를 멸시하고 착취한 불의한 강자들이 먼저, 그가 착취한 모든 것을 한 푼도 남김없이 되돌려주는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마 5:21-26).
참된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일, 이 일은 제단에 제물을 바치는 일이나 예배를 드리는 일보다 우선하여, 지금 시급히 해야만 하는 일이다(마 5:24).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억울함을 당한 약자들이 하늘을 우러러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할 것이고, 우는 자들의 기도를 들어주는 하나님은 저들의 호소를 결코 외면하지 않고 들으시며 불의한 자들을 속히 심판할 것이다(마 5:26, 18:10, 눅7-8). 그리하여 땅과 부를 자랑하던 자들은 그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고, 불의한 권력자와 종교가들로 말미암아 민족 전체가 이방 적국의 노예가 되며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성전과 성도 모두 무너지고 말 것이다(마 24:1-2, 눅 21:5-6).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값없이 용서받은 자로서 우리와 이데올로기가 다르고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 우리가 원수와 적으로 삼았던 사람들도 용납하고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독점하고 착취했던 것을 내어놓고, 서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은 나눔으로써 참된 평화와 화해를 이루어야 한다. 강대국의 이데올로기 논쟁에 휘말려 이데올로기를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시하며, 형제와 동족을 원수와 적으로 삼아 미워하고 보복하려고 했던 우리의 죄를 고백하며,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와 똑같이 사랑하며 용납한 하나님의 자녀임을 올바로 인식해야 한다. 우리와 교리나 신조가 다르다 하더라도 그들을 '원수'로 삼지 말고 도리어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에게 유익이 되는 일을 해야 한다. 그리하여 한 핏줄 한 형제자매인 동족에 대해 미움과 보복을 부추기는 모든 거짓된 교설과 이데올로기를 깨뜨리며 정의를 수립함으로써 그리스도가 원하는 참된 화해와 평화의 역사를 이루어야 한다. 분단된 이 민족이 또다시 미움과 갈등과 보복심에 휩싸여 제 2의 '한국전쟁'을 일으키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 민족 전체가 강대국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시급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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