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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하나님

누가복음 한완상............... 조회 수 2146 추천 수 0 2008.08.10 00:0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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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5:11-24 
설교자 : 한완상 형제 
참고 : 새길교회2002.10.13 주일설교 
가장 인간적인 것이 가장 하나님답다는 진리를 우리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잘 믿는 분일수록 그러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다워야 하기에 절대로 인간적일 수 없다는 믿음 때문이겠지요. 하나님은 절대권력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무서운 분으로 믿기 때문이지요. 절대로 엄격하고, 전적으로 일방적인 권위를 행사하시는 지엄한 분으로 믿는 것이지요. 당신이 만든 율법과 원칙을 철저히 지키도록 명령하시며 그에게만 절대 충성을 바치도록 요구하시는 절대자로 믿기 때문이지요. 질투하며, 분노하며, 심판하며, 죄인(일탈자)을 지옥에 떨어뜨리기를 즐겨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경배하도록 우리들은 그 동안 훈련받아 왔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은 하나님답게 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다움은 인간다움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인간적'이라고 할 때, 그것은 연약하지만 정(情)이 넘치는 행위와 분위기를 뜻합니다. 양보할 줄도 알고, 남의 딱한 사정도 배려할 줄 아는 따뜻한 마음과 삶을 인간적인 것으로 이해합니다. 사람다움은 그 속에 情을 가득 담고 있습니다. 情은 남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면서 푸른 희망을 함께 나누는 일이지요. 情은 마음(心)에 푸른 청(靑)을 합친 것입니다. 곧 정은 마음(心) 으로 푸르름(靑)을 나누는 일입니다. 영어의 humane과 compassion과 비슷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인간다움은 결코 하나님다움과 거리가 먼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를 통해 우리는 예수의 하나님이 얼마나 인간적인 분인지를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이 점을 보다 뚜렷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본문의 상황을 잠시 살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예수님은 멋진 분이었습니다.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였고 따랐습니다. 그를 따랐던 사람들은 대체로 밑바닥 인생들이었습니다. 차별 받았던 사람들, 죄인으로 낙인 찍혀 제대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사람들, 변두리에서 서러움을 감수해야 했던 사람들, 당시 '어둠의 자식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자유와 진리의 문을 활짝 열어주신 분이 바로 예수였습니다. 그들에게 인간 존엄의 느낌을 맘껏 느끼고 누리도록 잔치를 베풀어주신 분이 예수였습니다. 버림받았던 자들을 주인으로 대접해 주었던 분이 바로 예수였습니다. 계급의 장벽을 허물고 그들을 밥상공동체의 주체로 세워주신 분도 예수였습니다. 그의 열린 선교는 그러기에 그를 인기 있는 카리스마로 부상시켰습니다.

바로 이 멋진 카리스마의 사나이를 곱지 않은 눈으로 쳐다보며, 그의 인기를 시기하고, 그의 열림과 자유로움의 선교를 불온시했던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파격적인 메시지와 행위에 대해 한편으로는 주눅이 들면서도, 다른 한편 끊임없이 그의 도전적 선교행위를 모함해 보려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그들의 비난과 비아냥, 그들의 질시와 경멸의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은 비유의 말씀으로 깨우쳐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 나라의 주인은 누구며, 주인 됨의 기쁨은 어떤 것인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기뻐하는 하나님, 잃어버린 돈을 찾았을 때의 그 기쁨, 잃어버린 자식이 되돌아 왔을 때의 그 기쁨을 여러 비유를 통해 말씀 하셨습니다.

탕자의 비유도 바로 이러한 예수의 비난자들을 향해 던져진 메시지입니다. 바리새인들의 하나님과 예수의 하나님이 어떻게 다른지를 뚜렷하게 부각시켜주는 메시지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가 오늘 기독교 현실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심각하게 성찰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특히 우리 한국교회와 우리 새길 공동체에게 던져주는 오늘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찾아봐야 할 것입니다. 특히 기독교 위기 상황에서 이 비유가 더욱 절절하다면 왜 그러한지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주 무서운 경고를 듣게 됩니다. 오늘 기독교가 변화하지 않으면 사멸될 것이라는 경고 말입니다. 이것은 전 세계적으로 오늘의 기독교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음을 뜻합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오시어, 오늘의 교회들의 행태를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오늘의 왕국처럼 거대해진 기독교는 허물어져야 할 예루살렘 성전 같구나!"
"나는 예수 그리스도이지 예수교 신자가 아니며 그리스도교 신자도 아니다"

이 같은 꾸중을 들어 마땅한 것이 우리 기독교의 현실임을 우리는 自省해야 합니다. 이같은 현실은 우리의 하나님다움에 대한 잘못된 확신 곧 잘못된 우리의 神觀때문이기도 합니다. 人間事와 歷史를 사사롭게 요리하는 변덕스럽고 무서운 질투의 神, 外在神(external god)을 확신하는 우리의 전통적 신앙은 인간의 자유를 제약하며 인간을 객체화시키는 억압적인 심판의 神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神觀과 그것에 기초한 신앙과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않고서는 오늘의 기독교 위기를 극복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잔혹한 불의가 기승을 부려도 침묵하고 있는 외재신인데도, 이런 '유배지 상황'에서도 그 신에 대한 미신적 신앙은 여전합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실존과 공동체 안에서)조용히 그러나 힘있게 살아 움직이고 게시는 인간적이고 인격적인 존재이십니다. 바로 이러한 內在神을 뜨겁게 체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 분은 우리 존재의 근원이시요, 우리 생명의 근본이시지만, 결코 추상적인 범주나 형이상학적인 개념으로 남아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 분을 존재의 근원으로 표현할 수는 있으나, 그 표현이 그 분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따뜻한 모습, 살아있는 실체를 다 담아내지 못하기에 안타깝습니다.

인간 실존의 상황은 추상적 개념으로 담아 낼 수 없는 생동하는 실체입니다.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자유에 대한 갈망과 좌절, 탐욕과 유혹의 교차와 시련, 시련과 후회의 만남, 이 모든 실존의 경험은 구체적인 사회제도와 일상적인 삶의 틀 속에서 매 순간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존재의 근거와 같은 추상적 개념으로 하나님을 체험하기는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의 실존상황 안에서 의미 있게 나의 하나님 또는 우리의 하나님으로 체험할 수 있어야 하는데, 전통적 유일신의 개념으로나 존재의 근본이라는 표현으로는 인간적으로 우리에게 따뜻하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느낄 수 없다는 것, 이것이 문제라 하겠습니다. 특히 자유의 오용으로 시련을 겪으며 몸부림치는 실존들에게 가까이 찾아오시어 상처받은 죄인을 존엄한 주인으로 따뜻하게 맞아 주시는 하나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그 하나님을 우리는 갈망하고 있습니다.

이제 탕자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적절한 메시지에 주목해 봅시다. 도대체 이 비유는 어떠한 하나님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는지에 새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의 하나님이 과연 바리새인들의 하나님과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도 우리는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의 하나님은 둘째 아들에게 재산소유권의 자유와 그 처분의 자유를 허락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를 존중해 주신다는 진리에 새삼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지요. 사랑은 사람을 매어두지 않습니다. 사랑은 남의 자유를 제약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스스로 남에게 종이 되어 남을 주인으로 모시는 힘입니다. 그러기에 사랑하는 존재들은 서로에게 종이 됨으로써 마침내 서로를 주인으로 모시게 됩니다. 그러기에 사랑과 자유는 역설처럼 들리지만, 그 역설이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실진데,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자유를 주심으로써 당신의 자유는 스스로 제한하십니다. 자기 자유의 자발적 제한은 아픔을 동반하는 사랑의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자유가 잘못된 선택으로 이어질 때, 자유를 주신 분에게나, 자유를 행사하는 당사자에게 커다란 시련과 아픔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랑의 하나님은 자유를 주심으로써 자유로워진 존재가 혹시나 잘못된 선택을 하게되지 않을까 항상 노심초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실존적 아픔입니다. 사랑이시기에 하나님께서 치루시게 되는 당신의 아픔이라 하겠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전지전능한 힘을 스스로 제약하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또한 하나님의 자기비움(kenosis)이기도 합니다.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스스로 상처받게 되는 하나님이시지요. 그러기에 참 사랑은 남을 위해 자유를 제한 할 수 있는 힘, 곧 자기 비움의 힘이라 하겠습니다. 이 자기비움은 하나님의 본질이요, 이것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답게 됩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으로 자유를 얻게 된 인간이 그 자유의 오용으로 자기 자신과 하나님께 아픔을 주게 될 때 하나님은 그 실수한 인간 곧 죄인에게 어떻게 하나님답게 대응하시는지를 감동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너무나 뚜렷하게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탕자의 아버지의 모습은 마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사마리아인의 일거수 일투족이 자세히 묘사되었듯이, 상세히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 묘사에서 예수님의 하나님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이 뚜렷하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그 면면을 잠시 살펴보기로 합시다.

첫째, 노심초사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작은 아들에게 재산의 분깃을 나눠준 뒤 아버지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작은 아들은 그 재산을 가지고 유혹이 넘치는 도시로 떠났기 때문입니다. 예수 당시 도시화가 급진전되면서 농촌은 피폐되었지만, 도시는 번창하는 가운데 쾌락과 소비의 중심지로 변모하고 있었습니다. 작은아들이 탕자가 되기에 알맞는 조건이 이미 무르익고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자유가 타락의 자유로 전락되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아버지의 염려는 현실적이었습니다. 아버지의 근심은 자식을 미국 유학 보낸 뒤 새벽 제단을 쌓으며 아들의 안녕을 위해 절절하게 기도했던 저의 부모님 심정보다 더 절박했을 것입니다. 저에겐 유학이 한갖 고생의 길이었지만, 둘째 아들에게는 도시 생활이 유혹과 타락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그에게 자유를 주시면서 그 자유의 남용으로 인한 유혹의 시련 때문에 노심초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확인하게 됩니다. 노심초사하시는 하나님과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한번 비교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하나님과 바리새인의 하나님이 이렇게 다르다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둘째로, 간절히 기다리는 하나님의 모습을 확인합니다. "아직도 먼 거리에 있는데 그를 보았다"(20절)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도시로 떠난 뒤 늘 도시로 향한 길을 쳐다보며 그 아들의 귀환을 기다렸습니다. 끈질기게 기다렸습니다. 이 기다림 때문에 아버지는 먼 거리에 있는데도 그의 아들을 대번에 알아보았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먼저 사랑의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도 오래오래 끈질기게 기다리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하기야 사랑 없이는 기다릴 수 없지요. 사랑은 오래 기다리게 하는 힘입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북한에 두고 온 아내를 반세기 이상 기다렸습니다.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을 쳐다보면서도 "지금 그 사람은 저 달을 쳐다보고 있겠지..." 라고 속삭이면서 아내와의 재회를 기다렸습니다. 결국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나 그의 아내사랑은 지극했기에 죽을 때까지 기다렸던 것입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고학하는 학생에게는 졸업을 기다리는 부모님이 계시기에, 아니 부모님의 사랑이 있기에 그는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공부에 매진하게 되지요. 교도소에서 출감하는 사람에게 기다려 주는 이가 없다면, 그는 참으로 고독한 인간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기다림은 사랑입니다. 기다리는 힘은 사랑의 힘입니다. 忍은 그러기에 仁이 됩니다. 사도바울도 사랑은 오래 참는 힘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예수의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기다리는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그 까닭으로 갈보리는 기다림의 언덕이요, 십자가는 기다림의 절정입니다.

이렇게 끈질기게 기다리는 힘은 눈을 밝게 해 줍니다. 망원경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대번에 귀환하는 아들을 알아볼 만큼 아버지의 눈은 밝아졌습니다. 기다림이 사랑에서 온 것이라면, 투시력은 기다림에서 온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자유로 인해 시련을 겪으면서 새로운 길로 들어서려는 사람들을 제대로 알아보려면,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의 귀환을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기다림이 있는 곳에 영적 투시력은 더욱 밝아지는 법이지요.

셋째로, 귀환하는 초라한 자식의 모습을 보며 그와 함께 아파하면서 달려가는 하나님의 모습에 주목해야 합니다. 아버지는 먼 거리에서 자식의 모습을 보자 가만히 앉아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체면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당시에도 가부장적 전통이 강했을 터인데 말입니다. 아버지에게는 양반의 체면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여기 아버지의 모습은 버선발로 아들에게 뛰어가는 엄마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가장 엄마 같은 아빠의 모습입니다. 바로 이런 하나님이 예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엄마다움을 다시 한번 여기서 우리는 느끼게 됩니다. 유교의 전통에 확고하게 서 있는 아버지는 이런 경우 절대로 달려가지 않습니다. 中庸之道를 익힌 양반 아버지는 喜怒哀樂之未發을 굳게 믿고 반드시 실천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희로애락의 감정을 절대로 겉으로 나타내서는 안되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의 하나님은 결코 유교의 권위주의적 君子가 아니십니다. 오히려 바리새인의 하나님은 엄한 유교적 가부장에 가까울 수 있겠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하나님, 예수의 하나님은 '표현하는 하나님'이십니다.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뻐하시는 하나님, 그러기에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하나님이십니다.

틱낫한 스님은 십자가에 달려 고통 당하시는 예수 모습을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 고통스러운 모습은 기쁨과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한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는 가부좌를 틀고 명상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싶어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반드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회개하여 귀환하는 자식 모습을 멀리서 보자마자 버선발로 뛰어 가시는 하나님은 오히려 십자가 위의 괴로운 예수 모습에서 더 절박하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지요. 예수의 하나님은 인간사, 인간 실존 상황을 초월한 명상하는 道人으로만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버선발로 체면불구하고 달려가는 엄마 같은 하나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요, 우리 공동체의 하나님이시라는 이 진실이 너무나 벅찬 감동을 주지 않습니까!

넷째로, 목을 껴안고 입 맞추시는 하나님은 죄인으로 귀환하는 아들을 심문하거나 정죄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좋은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워주고 좋은 신을 신겨 주십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회개하는 죄인을 의인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뜻합니다. 새 옷, 새 반지, 새 신은 주인을 높이 받든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주인으로 높이 대접하기 위해 살찐 송아지를 잡아 큰 잔치를 베푸는 것이지요. 이 잔치는 환락의 연회가 아니라 주인의 재관식이라 해야 하겠습니다. 아들의 복권을 담보하는 환희의 잔치라 하겠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아버지가 탕자를 결코 심문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로부터 사랑의 선물로 얻은 자유를 무책임하게 낭비하여 타락의 삶에 빠졌던 탕자는 마땅히 야단 맞아야 할 존재인데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그를 다그치거나 나무라거나 심판하지 않았습니다. 자유를 줄 때보다 더 뜨거운 사랑으로 죄인을 받아들이고 그를 주인으로 높이 올려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은 인간적인 하나님이라고만 표현하기에는 무엇인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인간적이면서 동시에 인격적으로 고매하신 하나님, 인간적이기에 너무나 따뜻하신 하나님이시오, 동시에 인격적이기에 높은 도덕적 감동을 주는 고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교회는 인간적이고 인격적인 잔치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혹시나, 교회가 심문하는 곳이라면, 그곳에는 결코 예수님의 하나님은 계시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는 사랑으로 서로 자유케 하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끈질기게 기다리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자유의 오용으로 시련에 빠져 회개하고 귀환하는 죄인을 멀리서부터 알아보는 영적 투시력을 지닌 분들의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버선발로 달려가는 엄마 같은 공동체입니다.

결코 체면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함께 아파함에 조금도 인색하지 않는 표현공동체입니다. 교회는 함께 기뻐하면서 죄인을 주인으로 모시는 잔치공동체입니다. 이러한 교회가 아닐진대, 단연코 진정한 기독교 공동체라고 할 수 없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하나님이야말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러하기에 그 분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항상 감사하면서 고백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
성령의 힘을 얻어 스스로에게 묻게 하소서.
우리 공동체가 과연 남의 자유를 존중해 주기에
나의 자유를 스스로 비우는 비움의 공동체인지 묻게 하소서.

노심초사하시는 주님!
우리 공동체가 자유의 남용으로 시련에 빠져 몸부림치다가
스스로 뉘우치는 사람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공동체인지 스스로 묻게 하소서.

달려가시는 주님!
귀환하는 자매 형제를 먼 거리에서 대번에 알아보는 영적 투시력을
과연 우리 공동체가 갖고 있는지,
보자마자 버선발로 바로 달려가는
어머니의 사랑을 정말 지니고 있는지 스스로 묻게 하소서.

함께 아파하고 기뻐하시는 주님!
우리 공동체가 죄인을 주인으로 모시는 잔치를 베풀어
그의 아픔을 함께 나누므로 그 아픔을 없애고,
그의 기쁨을 함께 나누어 그 기쁨을 확장시키는
잔치 공동체인지 스스로 묻게 하소서.

사랑의 주님!
죄인이 주인이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며
변두리가 중심부가 되는
놀라운 변화를 뜨겁게 체험하는 당신의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사랑이시기에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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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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