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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일2:1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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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길희성 형제 |
참고 : | 새길교회 2002.10.20 주일설교 |
"가을을 탄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가을을 타십니까? 낙엽이 거리에 나뒹굴기 시작하며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기 시작하는 계절에 가을을 아니 탈 정도로 감각이 무딘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가을을 타는 것은 비단 10대 문학소녀들만이 아니라 인간이면 누구나 느끼는 가을의 우수이며 외로움일 것입니다.
가을은 두 가지 상반된 얼굴로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가을은 여름철의 땀과 노력이 결실을 맺는 수확의 계절로서, 우리에게 풍성한 축복의 얼굴로 찾아오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추위를 재촉하는 가을비와 스산한 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이 속절없는 인생 무상을 알리면서 쓸쓸한 얼굴로 찾아옵니다. 늦가을이 될수록 수확의 보람에서 오는 기쁨보다는 모든 생명은 끝날 때가 있고 인생도 떠날 때가 있다는 애상이 더 강해집니다.
가을을 탄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외로움을 탄다는 말일 것입니다. 주위에 처자식이 있고 친구들이 있는데 새삼스럽게 무슨 외로움이냐고 코웃음치는 사람도 있겠고, 먹고살기도 바쁜데 무슨 얼어죽을 감상주의냐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래도 까닭 없이 찾아드는 허전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고 잡다한 세상사들이 몸 속 깊이 스며드는 고독감을 완전히 묻어버리지는 못합니다. 아무리 바쁘게 살아도 인간은 결국 홀로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숨기지는 못합니다. 인간은 자기 의식을 가진 존재로서, 인간 본연의 실존적 외로움은 결코 사회적 관계 속에 완전히 묻혀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집단의식과 공동체성이 강한 원시 부족사회나 전통사회에서는 현대 개인주의 사회와는 달리 개인의 외로움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과연 그랬을까요? 믿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적어도 자의식을 가진 존재인 한 어쩔 수 없이 개체이며 외로운 존재들입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며, 나의 아픔과 슬픔을 남이 대신해 주지 못하고, 나의 죽음은 더더욱 남이 대신하지 못합니다. 원시인들도 죽음의 순간만은 쓸쓸하게 맞았을 것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인간은 날 때부터 아무개의 아들·딸이며 어느 지역 출신이라는 사회적 관계 속에 던져지고 그 속에서 살아가지만, 인간의 위대성은 인간이 결코 사회적 관계로 완전히 해소되거나 환원될 수 없는 존재라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의 생명이 온 천하보다도 더 귀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결코 생물학적 의미로서의 생명을 두고 하신 말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생명이기 때문에 온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일 것입니다. 생명 그 자체로 말하면, 어디 인간의 생명만 소중합니까? 미물에 이르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고 보존하려는 본능은 모든 생명의 공통된 현상이고 모든 생명이 다 소중합니다. 하지만 유독 인간만은 의식과 인격을 가진 주제적 존재이며 초월적 존재로서, 인간은 결코 사회적 관계로 완전히 환원되거나 세계의 일부분으로 자리 매김 될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물체들처럼 즉자적으로만 존재하는 존재가 아니며 대상화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최근 사상계를 풍미하고 있는 온갖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은 인간의 주체성을 부정하는 것이 유행처럼 되어 있지만, 근대적 주체의 오만함을 비판하는 것은 좋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하는 반 휴머니즘적 사상이 되어서도 곤란합니다.
외로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인간만의 고유한 특권인지도 모릅니다. 동물들이 고독을 느끼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고독은 필경 자의식을 가진 개체적 존재인 인간만의 현상일 것입니다. 인간은 결코 사회적 관계로만 규정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며 사회적 역할에 갇힐 수 있는 존재도 아닙니다. 우리는 아버지 어머니이기 이전에 한 인간입니다. 엄마는 당연히 집에서 일만 하는 줄 알았던 아이들이 돌연 '엄마도 사람이야'라는 인간 선언을 듣는 순간 무척 놀라는 경우도 있지요. 우리는 사장이나 회사원, 의사나 교수이기 이전에 한 인간입니다. 모두 어쩔 수 없이 사회에서 부과된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긴 하지만, 그 역할이 곧 나 자신은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선입견을 가지고 한 사람을 그의 직업이나 역할에 따라 판단하며 규정하려 합니다. 그러다가 그에게 전혀 예기치 못했던 면이 있는 것을 보고는 저 사람에게도 저런 면이 있었구나 심히 놀라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점잔은 줄만 알았던 사람에게서 엉뚱한 '끼'가 발견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직업에 종사하고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종종 '이것이 나는 아닌데', '내가 이 짓 하려고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닐텐데'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배운 게 이 짓이니 어쩌겠나' 하면서 체념을 하고 하던 일을 계속합니다.
사회적 자아가 나의 존재는 아닙니다. 사회적 자아는 'persona', 즉 우리가 인생이라는 연극에서 쓰고 있는 탈 아니면 옷과 같은 것입니다. 마치 연극에서 하고 싶지 않은 역할을 맡아야 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기 싫은 직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설령 운이 좋아 정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직업으로 가진 자라 해도, 결코 그 한 가지 역할로 그가 완전히 규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가 쓰고 있는 가면을 벗어버리고 싶은 충동, 자기가 입고 있는 옷을 훨훨 벗어버리고 벌거벗은 인간으로 살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임제 선사는 그런 벌거벗은 사람을 無位眞人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모두 때로는 가수가 되고 싶은 때도 있고 화가가 되고 싶기도 하며 시인이 되고 싶은 마음도 품고 삽니다. 그런가 하면 때로는 모든 것을 훌훌 떨쳐버리고 출가 수행자가 되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합니다. 아니, 그렇지는 못해도 모든 일을 접어두고 진정한 나를 찾아 잠시 여행이라도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존재들입니다.
가을은 바로 이러한 보이지 않는 자아, 초월적 자아가 우리 안에서 꿈틀거리는 계절입니다. 사회적 자아의 탈을 벗어 던지고 마음껏 외로움에 탐닉하고자 어디론가 홀로 떠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기 어려운 계절인 것입니다. "가을에는 홀로 있게 하소서...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라는 김현승 시인의 시가 절로 생각나는 계절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탈을 벗어 던지고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대면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오래 쓰고 있던 탈을 벗어버리면 아무것도 안 남고 허무에 빠져버린 것 같은 두려움이 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곧 자기의 사회적 자아를 도피처로 삼고 자기가 이루어 놓은 사회적 성취로 자신을 위로하고 안심시키고자 합니다. 하지만 초월적 자아의 충동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때로는 그 충동이 너무 강해서 사람을 반사회적으로 만들기도 하고, 그 유혹이 너무 강해서 사람을 무책임한 존재로 만들기도 합니다. 하던 일을 갑자기 때려치우기도 하고 멀쩡한 직장을 떠나기도 하며, 심지어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아예 사라져 버리기도 합니다. 갑자기 증발해 버리는 것이지요.
이러한 초월적 자아의 충동은 물론 프로이트적인 무의식 세계의 충동과는 다릅니다. 사회의 규범과 이성의 제약에 의해 억압당한 무의식의 충동도 반사회적 경향을 띠고 때로는 파괴적으로 나타나지만, 인간에게는 이런 무의식의 충동과는 다른 또 하나의 무의식적 충동이 있습니다. 이른바 종교적 본능 혹은 형이상학적 충동입니다. 인간에게는 초월적 자아의 형이상학적 갈망이 있어서, 보이는 세계의 그 어느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초월적 실재를 찾아 끊임없이 방황합니다. 마치 고향을 동경하듯 인간의 영혼은 자신의 존재의 뿌리, 생명의 근원을 찾고자 합니다. 참 자아, 초월적 자아의 자유를 실현해 보려는 근본적인 욕구이며, 종교적 동물로서의 인간이 지닌 영적 욕구입니다.
인간의 초월적 자아는 자기에게 주어진 사회적 역할에 만족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보이는 세계 자체에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나려 합니다. 세상의 모든 유한한 것들, 덧없는 것들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기를 규정하려는 일체의 것들을 속박으로 여기고 끊임없이 거부하면서 자유롭고자 합니다, 초월적 자아는 나를 나의 육체와 동일시하지도 않고 내가 가진 소유와 동일시하기를 거부합니다. 오늘날의 소비사회에서 우리는 자신을 소비자로, 그리고 자기가 소유하는 물건이나 재산과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풍조가 강합니다. 우리 사회에 강하게 일고 있는 외제 명품 열기는 바로 이러한 껍데기 자아를 충족시킴으로써 자신의 참 자아와의 대면을 회피하려는 전략으로 보입니다. 어느 자동차 광고에 "You are what you drive" (당신이 모는 차가 당신 자신입니다)라고 씌어 있습니다. 내가 모는 자동차가 나이고, 내가 소유하고 있는 몇 평 짜리 아파트가 나이고, 나의 직업과 직장이 나라고 우리는 거듭거듭 다짐해 보지만, 우리 안에 있는 참 자아는 이 모든 주장에 승복하지 않고 끊임없이 'No'라고 항의합니다.
자신의 사회적 얼굴에 만족하지 못하고 사회적 관계 속에 해체되기를 거부하며, 자신의 소유로 사물화 되기를 거부하는 이 초월적 자아가 찾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일 뿐입니다. 자기가 자기가 되고자 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같은 자명한 진리를 모르고 자아에 여러 가지 못을 입히고 탈을 씌우려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우리는 이 자아에게 다른 것을 사랑하라고, 다른 것을 욕구 하라고 강요합니다. 당연히 거부하고 뿌리치려 할 것입니다. 질식할 것 같아 못 견디고 탈출하려 합니다. 떠나고자 합니다. 벗어버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영혼의 진정한 행복이고 만족입니다. 영혼은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없습니다. 영혼은 결코 세상의 사물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은 사물들을 즐기기는 하되 사랑하도록 된 존재는 아닙니다. 영혼은 본래부터 세상을 사랑하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세상을 사랑하는 순간 우리는 세상에 묶이고 종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영혼에게는 세상이 무거운 짐이 되고 하는 일이 모두 수고가 됩니다.
영혼이 진정으로 사랑해야 할 대상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며, 곧 자신의 생명의 근원이며 존재의 근거인 하느님 자신입니다. 영혼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이미 자기 안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영혼이 모든 것을 훌훌 털어 버리고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은 하나님, 곧 자기 존재의 뿌리를 만나기 위함입니다. 영혼의 여행의 종착지는 결국 자기 자신의 뿌리인 하나님입니다. 영혼이 이 가을에 시리도록 외로움을 타는 이유는 자기 자신, 곧 하나님과 함께 있고 싶어서 입니다. 영혼이 그 어떤 사물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그 누구를 전적으로 사랑할 수 없는 것은 영혼이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공간이 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외의 다른 어떤 것으로도 결코 채워질 수 없는 빈 공간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공간은 하나님만이 거할 우리 안의 성전입니다. 하나님이 차지해야 할 이 빈 공간을 우리는 견딜 수 없어 세상의 부질없는 것들로 채우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 1서의 말씀은 이 진리를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며, 세상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라질 것들에 대한 욕망과 영원한 하나님 사랑과는 양립할 수 없다는 단순한 메시지입니다.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는 대상과 하나가 되게 합니다. 한 통속이 되게 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우리는 세상과 짝이 되고 하나가 되며 나의 영혼은 세상에 속하게 됩니다. 성 어거스틴에 의하면, 사랑이란 좋은 것, 즉 선을 좋아하고 추구하는 행위인데, 좋은 것에는 우선순위와 질서가 있으며 따라서 사랑에도 질서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죄악이란 바로 이 올바른 사랑의 질서를 어기는 것으로서, 인간을 불행에 빠트린다는 것입니다.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보다 피조물을 더 사랑하고, 피조물 가운데서도 사람보다 사물들을 더 사랑하는 사랑의 착종이 일어나면서 가치관이 뒤바뀌고 인간의 불행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자기보다 더 훌륭한 것, 더 고귀한 것을 사랑하게 되어 있는데, 우리의 영혼이 자기 자신보다도 훨씬 못한 세상의 사물들을 사랑하면, 그것은 잘못된 사랑입니다. 그것은 오래 가지 못하고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영혼은 만족을 얻지 못하고 끊임없이 다른 대상을 찾아 방황하게 됩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 살도록 창조하셨음으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쉴 때까지는 안식을 모릅니다"라는 어거스틴의 고백은 자기 자신의 오랜 영혼의 편력에서 얻은 귀중한 통찰을 담고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영혼은 그 본질, 그 원형인 하나님 자신을 그리워하고 찾고 만나야 비로소 행복한 것입니다. 영혼이 사랑해야 할 대상은 적어도 같은 인격적 존재인 인간 아니면 하느님이지, 그 이하의 세상의 것들은 아닙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필요로 하고 누릴 수는 있어도 결코 '사랑'의 대상으로 삼지는 말라는 것이 오늘 요한의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은 세상이냐 하나님이냐 사랑의 대상을 선택하라는 강한 이원론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왜곡되기 쉬운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경고의 말씀이지 기독교의 가르침의 전부도 아니고 최고의 경지도 아닙니다. 성서 전체의 메시지는 결코 세상이냐 하나님이냐를 이원적 선택의 문제로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어떻게 세상과 하나님이 적대관계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누차 '보시기에 좋았다, 심히 좋았다'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미워하고 도피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문제는 우리가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거나 더 사랑하지 않고 세상을 더 사랑한다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따라서 하나님 사랑과 피조물 사랑을 구별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목적 그 자체로서의 사랑이고 유한한 피조물들에 대한 사랑은 사용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사랑이라고 구별을 했습니다. 기복신앙이란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질서를 뒤집어서 목적적 사랑인 하나님 사랑을 오히려 수단적 사랑인 피조물에 대한 사랑의 수단으로 역이용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 사랑은 우리가 잠시도 멈출 수 없는 사랑,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지향해야 할 사랑임에 반하여, 세상 사물들의 사랑은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이루어지는 일시적 사랑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물들과 관계를 맺을 때마다 항시 하나님의 사랑을 위한 공간과 여유를 우리 영혼 안에 남겨두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사랑이 하나님 사랑을 질식시키는 순간, 우리의 영혼도 질식해서 세상의 사랑은 불행으로 변해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면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과 더불어 세상을 제대로 사랑하고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무한한 하나님 사랑의 빛 아래서 우리는 유한한 것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지 않고 세상을 먼저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도 잃고 세상도 잃게되지만,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도 얻고 하나님 안에서 세상도 얻는 것이 사랑의 질서입니다.
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세상이 더 아름다워 보입니다. 무한의 빛을 받아 유한한 것들은 더 아름답게 빛나고, 유한 한 사물들 하나 하나가 무한한 것을 드러내는 빛을 발합니다. 청명한 가을 햇살에 반사되는 단풍이 더 아름답게 홍조를 띠듯이, 영원의 빛 아래서 덧없는 시간적인 것들이 더 없이 아름답게 영롱한 자태를 드러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세상을 보아야 하고 세상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것이 올바른 성서적 영성이며 현대적 영성입니다. 중세적 영성이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수도원의 영성이었다면, 오늘의 영성은 세상 한 복판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영성이어야 하며, 하나님 안에서 사물들을 대하고 세상사 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영성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세상에 안주하지 않고 방황 끝에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만나고 자기 존재의 뿌리인 생명의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와 일들은 더 깊은 차원에서 더 활기차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단지 가면을 쓰고 하는 연극이 아니라 진정한 나, 본질적 나의 뿌리로부터 흘러나오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가능하려면, 오늘의 말씀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일단 세상을 부정하고 떠날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 걸림돌이 된 사람들에게는 먼저 세상을 떠나는 세계 부정적 영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 안에서 다시 세상을 보아야 세상이 제대로 보이고 세상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으며 세상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요한이 우리에게 말해 주는 사랑의 질서입니다.
깊어 가는 가을에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통해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아니, 우리의 영혼 자체가 우리에게 조용히 말하고 있습니다. 너는 결코 사회적 자아가 아니며 세상 속에 묻힐 존재도 아니라고 말입니다. 네가 입고 있는 맞는 옷 안 맞는 옷을 모두 벗어버리고 벌거벗은 너의 영혼을 만나보라고 말입니다. 네가 쓴 가면을 모두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를 엄습하는 가을날의 고독은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수줍은 미소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말하기를, "종교는 한 개인이 자신의 고독을 대하는 일이며, 고독을 모르는 사람은 결코 종교적이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올 가을은 우리 모두가 자신의 영혼과 깊은 대화를 나누며 하나님을 만나는 영적 축복의 계절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가을은 두 가지 상반된 얼굴로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가을은 여름철의 땀과 노력이 결실을 맺는 수확의 계절로서, 우리에게 풍성한 축복의 얼굴로 찾아오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추위를 재촉하는 가을비와 스산한 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이 속절없는 인생 무상을 알리면서 쓸쓸한 얼굴로 찾아옵니다. 늦가을이 될수록 수확의 보람에서 오는 기쁨보다는 모든 생명은 끝날 때가 있고 인생도 떠날 때가 있다는 애상이 더 강해집니다.
가을을 탄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외로움을 탄다는 말일 것입니다. 주위에 처자식이 있고 친구들이 있는데 새삼스럽게 무슨 외로움이냐고 코웃음치는 사람도 있겠고, 먹고살기도 바쁜데 무슨 얼어죽을 감상주의냐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래도 까닭 없이 찾아드는 허전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고 잡다한 세상사들이 몸 속 깊이 스며드는 고독감을 완전히 묻어버리지는 못합니다. 아무리 바쁘게 살아도 인간은 결국 홀로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숨기지는 못합니다. 인간은 자기 의식을 가진 존재로서, 인간 본연의 실존적 외로움은 결코 사회적 관계 속에 완전히 묻혀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집단의식과 공동체성이 강한 원시 부족사회나 전통사회에서는 현대 개인주의 사회와는 달리 개인의 외로움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과연 그랬을까요? 믿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적어도 자의식을 가진 존재인 한 어쩔 수 없이 개체이며 외로운 존재들입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며, 나의 아픔과 슬픔을 남이 대신해 주지 못하고, 나의 죽음은 더더욱 남이 대신하지 못합니다. 원시인들도 죽음의 순간만은 쓸쓸하게 맞았을 것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인간은 날 때부터 아무개의 아들·딸이며 어느 지역 출신이라는 사회적 관계 속에 던져지고 그 속에서 살아가지만, 인간의 위대성은 인간이 결코 사회적 관계로 완전히 해소되거나 환원될 수 없는 존재라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의 생명이 온 천하보다도 더 귀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결코 생물학적 의미로서의 생명을 두고 하신 말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생명이기 때문에 온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일 것입니다. 생명 그 자체로 말하면, 어디 인간의 생명만 소중합니까? 미물에 이르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고 보존하려는 본능은 모든 생명의 공통된 현상이고 모든 생명이 다 소중합니다. 하지만 유독 인간만은 의식과 인격을 가진 주제적 존재이며 초월적 존재로서, 인간은 결코 사회적 관계로 완전히 환원되거나 세계의 일부분으로 자리 매김 될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물체들처럼 즉자적으로만 존재하는 존재가 아니며 대상화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최근 사상계를 풍미하고 있는 온갖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은 인간의 주체성을 부정하는 것이 유행처럼 되어 있지만, 근대적 주체의 오만함을 비판하는 것은 좋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하는 반 휴머니즘적 사상이 되어서도 곤란합니다.
외로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인간만의 고유한 특권인지도 모릅니다. 동물들이 고독을 느끼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고독은 필경 자의식을 가진 개체적 존재인 인간만의 현상일 것입니다. 인간은 결코 사회적 관계로만 규정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며 사회적 역할에 갇힐 수 있는 존재도 아닙니다. 우리는 아버지 어머니이기 이전에 한 인간입니다. 엄마는 당연히 집에서 일만 하는 줄 알았던 아이들이 돌연 '엄마도 사람이야'라는 인간 선언을 듣는 순간 무척 놀라는 경우도 있지요. 우리는 사장이나 회사원, 의사나 교수이기 이전에 한 인간입니다. 모두 어쩔 수 없이 사회에서 부과된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긴 하지만, 그 역할이 곧 나 자신은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선입견을 가지고 한 사람을 그의 직업이나 역할에 따라 판단하며 규정하려 합니다. 그러다가 그에게 전혀 예기치 못했던 면이 있는 것을 보고는 저 사람에게도 저런 면이 있었구나 심히 놀라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점잔은 줄만 알았던 사람에게서 엉뚱한 '끼'가 발견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직업에 종사하고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종종 '이것이 나는 아닌데', '내가 이 짓 하려고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닐텐데'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배운 게 이 짓이니 어쩌겠나' 하면서 체념을 하고 하던 일을 계속합니다.
사회적 자아가 나의 존재는 아닙니다. 사회적 자아는 'persona', 즉 우리가 인생이라는 연극에서 쓰고 있는 탈 아니면 옷과 같은 것입니다. 마치 연극에서 하고 싶지 않은 역할을 맡아야 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기 싫은 직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설령 운이 좋아 정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직업으로 가진 자라 해도, 결코 그 한 가지 역할로 그가 완전히 규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가 쓰고 있는 가면을 벗어버리고 싶은 충동, 자기가 입고 있는 옷을 훨훨 벗어버리고 벌거벗은 인간으로 살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임제 선사는 그런 벌거벗은 사람을 無位眞人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모두 때로는 가수가 되고 싶은 때도 있고 화가가 되고 싶기도 하며 시인이 되고 싶은 마음도 품고 삽니다. 그런가 하면 때로는 모든 것을 훌훌 떨쳐버리고 출가 수행자가 되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합니다. 아니, 그렇지는 못해도 모든 일을 접어두고 진정한 나를 찾아 잠시 여행이라도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존재들입니다.
가을은 바로 이러한 보이지 않는 자아, 초월적 자아가 우리 안에서 꿈틀거리는 계절입니다. 사회적 자아의 탈을 벗어 던지고 마음껏 외로움에 탐닉하고자 어디론가 홀로 떠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기 어려운 계절인 것입니다. "가을에는 홀로 있게 하소서...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라는 김현승 시인의 시가 절로 생각나는 계절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탈을 벗어 던지고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대면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오래 쓰고 있던 탈을 벗어버리면 아무것도 안 남고 허무에 빠져버린 것 같은 두려움이 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곧 자기의 사회적 자아를 도피처로 삼고 자기가 이루어 놓은 사회적 성취로 자신을 위로하고 안심시키고자 합니다. 하지만 초월적 자아의 충동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때로는 그 충동이 너무 강해서 사람을 반사회적으로 만들기도 하고, 그 유혹이 너무 강해서 사람을 무책임한 존재로 만들기도 합니다. 하던 일을 갑자기 때려치우기도 하고 멀쩡한 직장을 떠나기도 하며, 심지어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아예 사라져 버리기도 합니다. 갑자기 증발해 버리는 것이지요.
이러한 초월적 자아의 충동은 물론 프로이트적인 무의식 세계의 충동과는 다릅니다. 사회의 규범과 이성의 제약에 의해 억압당한 무의식의 충동도 반사회적 경향을 띠고 때로는 파괴적으로 나타나지만, 인간에게는 이런 무의식의 충동과는 다른 또 하나의 무의식적 충동이 있습니다. 이른바 종교적 본능 혹은 형이상학적 충동입니다. 인간에게는 초월적 자아의 형이상학적 갈망이 있어서, 보이는 세계의 그 어느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초월적 실재를 찾아 끊임없이 방황합니다. 마치 고향을 동경하듯 인간의 영혼은 자신의 존재의 뿌리, 생명의 근원을 찾고자 합니다. 참 자아, 초월적 자아의 자유를 실현해 보려는 근본적인 욕구이며, 종교적 동물로서의 인간이 지닌 영적 욕구입니다.
인간의 초월적 자아는 자기에게 주어진 사회적 역할에 만족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보이는 세계 자체에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나려 합니다. 세상의 모든 유한한 것들, 덧없는 것들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기를 규정하려는 일체의 것들을 속박으로 여기고 끊임없이 거부하면서 자유롭고자 합니다, 초월적 자아는 나를 나의 육체와 동일시하지도 않고 내가 가진 소유와 동일시하기를 거부합니다. 오늘날의 소비사회에서 우리는 자신을 소비자로, 그리고 자기가 소유하는 물건이나 재산과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풍조가 강합니다. 우리 사회에 강하게 일고 있는 외제 명품 열기는 바로 이러한 껍데기 자아를 충족시킴으로써 자신의 참 자아와의 대면을 회피하려는 전략으로 보입니다. 어느 자동차 광고에 "You are what you drive" (당신이 모는 차가 당신 자신입니다)라고 씌어 있습니다. 내가 모는 자동차가 나이고, 내가 소유하고 있는 몇 평 짜리 아파트가 나이고, 나의 직업과 직장이 나라고 우리는 거듭거듭 다짐해 보지만, 우리 안에 있는 참 자아는 이 모든 주장에 승복하지 않고 끊임없이 'No'라고 항의합니다.
자신의 사회적 얼굴에 만족하지 못하고 사회적 관계 속에 해체되기를 거부하며, 자신의 소유로 사물화 되기를 거부하는 이 초월적 자아가 찾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일 뿐입니다. 자기가 자기가 되고자 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같은 자명한 진리를 모르고 자아에 여러 가지 못을 입히고 탈을 씌우려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우리는 이 자아에게 다른 것을 사랑하라고, 다른 것을 욕구 하라고 강요합니다. 당연히 거부하고 뿌리치려 할 것입니다. 질식할 것 같아 못 견디고 탈출하려 합니다. 떠나고자 합니다. 벗어버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영혼의 진정한 행복이고 만족입니다. 영혼은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없습니다. 영혼은 결코 세상의 사물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은 사물들을 즐기기는 하되 사랑하도록 된 존재는 아닙니다. 영혼은 본래부터 세상을 사랑하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세상을 사랑하는 순간 우리는 세상에 묶이고 종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영혼에게는 세상이 무거운 짐이 되고 하는 일이 모두 수고가 됩니다.
영혼이 진정으로 사랑해야 할 대상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며, 곧 자신의 생명의 근원이며 존재의 근거인 하느님 자신입니다. 영혼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이미 자기 안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영혼이 모든 것을 훌훌 털어 버리고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은 하나님, 곧 자기 존재의 뿌리를 만나기 위함입니다. 영혼의 여행의 종착지는 결국 자기 자신의 뿌리인 하나님입니다. 영혼이 이 가을에 시리도록 외로움을 타는 이유는 자기 자신, 곧 하나님과 함께 있고 싶어서 입니다. 영혼이 그 어떤 사물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그 누구를 전적으로 사랑할 수 없는 것은 영혼이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공간이 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외의 다른 어떤 것으로도 결코 채워질 수 없는 빈 공간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공간은 하나님만이 거할 우리 안의 성전입니다. 하나님이 차지해야 할 이 빈 공간을 우리는 견딜 수 없어 세상의 부질없는 것들로 채우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 1서의 말씀은 이 진리를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며, 세상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라질 것들에 대한 욕망과 영원한 하나님 사랑과는 양립할 수 없다는 단순한 메시지입니다.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는 대상과 하나가 되게 합니다. 한 통속이 되게 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우리는 세상과 짝이 되고 하나가 되며 나의 영혼은 세상에 속하게 됩니다. 성 어거스틴에 의하면, 사랑이란 좋은 것, 즉 선을 좋아하고 추구하는 행위인데, 좋은 것에는 우선순위와 질서가 있으며 따라서 사랑에도 질서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죄악이란 바로 이 올바른 사랑의 질서를 어기는 것으로서, 인간을 불행에 빠트린다는 것입니다.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보다 피조물을 더 사랑하고, 피조물 가운데서도 사람보다 사물들을 더 사랑하는 사랑의 착종이 일어나면서 가치관이 뒤바뀌고 인간의 불행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자기보다 더 훌륭한 것, 더 고귀한 것을 사랑하게 되어 있는데, 우리의 영혼이 자기 자신보다도 훨씬 못한 세상의 사물들을 사랑하면, 그것은 잘못된 사랑입니다. 그것은 오래 가지 못하고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영혼은 만족을 얻지 못하고 끊임없이 다른 대상을 찾아 방황하게 됩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 살도록 창조하셨음으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쉴 때까지는 안식을 모릅니다"라는 어거스틴의 고백은 자기 자신의 오랜 영혼의 편력에서 얻은 귀중한 통찰을 담고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영혼은 그 본질, 그 원형인 하나님 자신을 그리워하고 찾고 만나야 비로소 행복한 것입니다. 영혼이 사랑해야 할 대상은 적어도 같은 인격적 존재인 인간 아니면 하느님이지, 그 이하의 세상의 것들은 아닙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필요로 하고 누릴 수는 있어도 결코 '사랑'의 대상으로 삼지는 말라는 것이 오늘 요한의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은 세상이냐 하나님이냐 사랑의 대상을 선택하라는 강한 이원론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왜곡되기 쉬운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경고의 말씀이지 기독교의 가르침의 전부도 아니고 최고의 경지도 아닙니다. 성서 전체의 메시지는 결코 세상이냐 하나님이냐를 이원적 선택의 문제로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어떻게 세상과 하나님이 적대관계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누차 '보시기에 좋았다, 심히 좋았다'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미워하고 도피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문제는 우리가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거나 더 사랑하지 않고 세상을 더 사랑한다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따라서 하나님 사랑과 피조물 사랑을 구별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목적 그 자체로서의 사랑이고 유한한 피조물들에 대한 사랑은 사용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사랑이라고 구별을 했습니다. 기복신앙이란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질서를 뒤집어서 목적적 사랑인 하나님 사랑을 오히려 수단적 사랑인 피조물에 대한 사랑의 수단으로 역이용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 사랑은 우리가 잠시도 멈출 수 없는 사랑,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지향해야 할 사랑임에 반하여, 세상 사물들의 사랑은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이루어지는 일시적 사랑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물들과 관계를 맺을 때마다 항시 하나님의 사랑을 위한 공간과 여유를 우리 영혼 안에 남겨두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사랑이 하나님 사랑을 질식시키는 순간, 우리의 영혼도 질식해서 세상의 사랑은 불행으로 변해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면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과 더불어 세상을 제대로 사랑하고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무한한 하나님 사랑의 빛 아래서 우리는 유한한 것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지 않고 세상을 먼저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도 잃고 세상도 잃게되지만,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도 얻고 하나님 안에서 세상도 얻는 것이 사랑의 질서입니다.
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세상이 더 아름다워 보입니다. 무한의 빛을 받아 유한한 것들은 더 아름답게 빛나고, 유한 한 사물들 하나 하나가 무한한 것을 드러내는 빛을 발합니다. 청명한 가을 햇살에 반사되는 단풍이 더 아름답게 홍조를 띠듯이, 영원의 빛 아래서 덧없는 시간적인 것들이 더 없이 아름답게 영롱한 자태를 드러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세상을 보아야 하고 세상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것이 올바른 성서적 영성이며 현대적 영성입니다. 중세적 영성이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수도원의 영성이었다면, 오늘의 영성은 세상 한 복판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영성이어야 하며, 하나님 안에서 사물들을 대하고 세상사 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영성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세상에 안주하지 않고 방황 끝에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만나고 자기 존재의 뿌리인 생명의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와 일들은 더 깊은 차원에서 더 활기차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단지 가면을 쓰고 하는 연극이 아니라 진정한 나, 본질적 나의 뿌리로부터 흘러나오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가능하려면, 오늘의 말씀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일단 세상을 부정하고 떠날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 걸림돌이 된 사람들에게는 먼저 세상을 떠나는 세계 부정적 영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 안에서 다시 세상을 보아야 세상이 제대로 보이고 세상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으며 세상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요한이 우리에게 말해 주는 사랑의 질서입니다.
깊어 가는 가을에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통해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아니, 우리의 영혼 자체가 우리에게 조용히 말하고 있습니다. 너는 결코 사회적 자아가 아니며 세상 속에 묻힐 존재도 아니라고 말입니다. 네가 입고 있는 맞는 옷 안 맞는 옷을 모두 벗어버리고 벌거벗은 너의 영혼을 만나보라고 말입니다. 네가 쓴 가면을 모두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를 엄습하는 가을날의 고독은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수줍은 미소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말하기를, "종교는 한 개인이 자신의 고독을 대하는 일이며, 고독을 모르는 사람은 결코 종교적이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올 가을은 우리 모두가 자신의 영혼과 깊은 대화를 나누며 하나님을 만나는 영적 축복의 계절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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