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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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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완상 형제 |
참고 : | 새길교회 2002.12.8 주일설교 |
요한복음서 1:1-3, 로마서 1:1-4
크리스마스의 주인은 바로 예수입니다. 그런데 주인 없는 크리스마스 잔치를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치러왔습니다. 빈 껍데기가 되어버린 성탄절인 줄도 모르고 한낱 한 겨울의 계절 잔치로 우리는 성탄절을 보냈습니다. 기독교 신자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오래 전부터 예수는 크리스마스 계절에 추방되었습니다. 자본주의 시장이 확장될수록 예수는 자신의 생일잔치에서 손님으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 잔치의 주인 자리에는 언제부터인가 싼타클로스가 예수 대신 앉아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싼타를 예수님보다 더 기다리고 더 사랑합니다. 그만큼 싼타 할아버지의 선물을 제조하는 업자들만 신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케롤 속에서 흥행되는 상업주의의 열기는 세계화 흐름 속에서 더욱 뜨거워지는 듯 합니다. 케롤의 달콤한 노랫소리는 크리스마스 세일을 부추기는 소비욕구를 자극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세일의 물결에 밀려 예수는 이미 저 멀리 떠내려가 버린 듯 합니다. 소비 예찬이 아기 예수 예찬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제 크리스마스는 예수를 주인의 자리에서 쫓아내고 그 자리에 자본주의의 이윤을 모시고 있는 듯 합니다.
제가 안타까워하는 것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보다 근원적으로 생각해보면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의 부활에 감동했던 사람들이 기독교라는 종교를 창설한 뒤 그것을 제도화하여 굳게 지키려는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가운데 예수는 무거운 교리의 옷을 입게 되었습니다. 예수에게 제도화된 기독교가 입혀준 옷은 유신론(theism)에 근거한 무거운 교리의 옷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신 자유·진리의 주체인 예수에게 자유를 구속하는 온갖 유신론적 도그마의 옷을 입혀 온 셈이지요. 결국 오늘 크리스천들이 보고, 생각하고, 믿는 예수는 박제화된 형상으로서의 예수에 불과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특별히 그의 탄생을 축하하는 계절이 찾아올 때마다 저는 예수의 참 모습이 그리워지고 그 모습을 직접 체험하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끼곤 합니다. 예수 부재(不在)의 한 본보기를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 따르미들이 예배 때마다 뜻없이 사도신경을 외우면서 그 분의 부재를 아예 모르거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 쉽지요. 이 전통적 신앙고백에서 역사적 예수의 모습, 갈릴리의 예수의 그 감동적인 행적은 아예 증발되고 없습니다.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자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여기에 예수의 삶은 고스란히 빠져 있습니다. 처녀 몸에서 나신 후 바로 고난 받으시고 죽으시는 예수 모습만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 실종이 가장 오랫동안 세계 기독교신자들이 고백하는 신앙교리의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었으니, 성탄절에 자본주의 시장에 의해 추방된 예수를 안타까워한다는 것이 우스꽝스럽기도 합니다. 이 신앙고백은 예수를 더 높이기 위해 그의 탄생을 유신론적 입장에서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여 예수를 탄생시켰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동정녀 탄생을 부각시킨 것입니다.
하기야 역사적 인물을 사후에 평가함에 있어 신화적 요소를 과장하기 쉽습니다. 저는 어느 공식적인 행사 자리에서 몸둘 바를 모를 정도로 당황한 적이 있습니다. 이미 명사가 된 제 후배가 공식석상에서 저를 소개하면서 너무 과장했기 때문입니다. 중학교 시절 단편소설을 썼고 고등학교 때는 중후한 논문을 써서 학교와 학생들로부터 칭찬을 받은 천재인 것처럼 소개했습니다. 아마도 그 후배는 저를 좋아했기에 저의 일부 장점만을 기억하고 그것을 지나치게 과장시켰던 것이겠죠. 그런데 저는 부끄러웠습니다. 요즘 TV의 안방극장에서 인기를 모으고 있는《野人時代》의 주인공 金斗漢 씨의 모습도 과장되고 있는 듯 합니다. 그가 살아있어 이 드라마를 본다면 그도 얼마간 부끄러워 할 것 같습니다. 하기야 이것은 오늘의 정치인들이 지난날 주먹패들의 수준에도 이르지 못한 안타까운 현실 때문에 생긴 신드롬 같기도 합니다만.
그렇다면, 예수께서 돌아가신 뒤 그를 따르고 흠모했던 사람들이 기록한 문서들도 예수의 삶에 대해 과장하지 않았을까요? 이른바 정경의 예수(canonical Jesus) 곧 신약성서에 나타난 예수에 관한 기록들이 과연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그대로 복사하다시피 한 객관적 사실의 기록일까요? 특히 예수의 탄생에 관련된 성서의 기록이 그러한 것일까요?
최근 저는 흥미롭고 유익한 책을 읽었습니다. 유명한 미국인 작가로, 평화주의자인 Norman Mailer의 책 The Gospel according to the Son이었습니다. 이 책을 조성기 작가가 『예수의 일기』라는 책명으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이 책 첫 장에서 예수는 친히 이렇게 고백하는 것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 날 나는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나사렛으로부터 왔다.『마가복음』에서는 말하기를, 내가 물에 잠길 때 하늘이 열리고 권세 있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고 하였다. '너는 사랑하는 나의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다...' 이상과 같은『마가복음』의 기록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과장된 부분이 제법 있다고 할 수 있다. 마태와 누가, 요한도 내 입에서 나오지 않은 말들을 내가 한 것처럼 기록해 놓기도 하고, 내가 분노로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을 적에도 나를 온화한 인물로 묘사하곤 하였다. 하긴 그들의 글이 내가 죽은 지 오랜 후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늙은 사람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놓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늙어도 아주 늙은 사람들 말이다. 그런 이야기들은 뿌리에서 떨어져 나와 바람에 이리 저리 날아다니는 덤불 같은 자료들을 근거로 하기 쉽다. 그래서 내가 직접 나의 생애에 대해 말하기로 하였다..."
물론 이것은 작가 Mailer가 예수와 역지사지(易地思之)하면서 작가적 상상력으로 예수의 삶과 죽음을 재구성한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면 이제 예수의 삶에 대한 성서의 증언, 특히 그의 신성(神性)을 부각시킨 성서의 기록이 어떤 성격을 지니는 것인지 잠시 살펴보기로 합시다. 무엇보다 분명히 해야 할 점은 그것이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역사기록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즉 그 기록이 예수께서 활동하셨던 그 때 바로바로 일기처럼 그의 주변 인물들이 기록해 놓은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복음서이든 바울의 서신이든 그것은 예수의 부활사건을 실존적으로 체험했던 예수 따르미들의 신앙고백적 증언이었습니다. 예수의 비참한 처형에 놀랐던 제자들, 너무나 실망했던 예수 따르미들이 예수 부활 체험을 통해 새로운 존재로 일어서게 되면서, 그 부활 체험의 관점에서 예수의 삶과 고난과 죽음을 재구성한 것이 바로 성서기록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객관적 사실"을 신앙의 관점으로 해석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활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했던 제자들, 예수 따르미들이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역사적 예수를 새롭게 조명한 것입니다.
"아하 그랬구나 그래서 그런 말씀하셨구나..."
"아하 그래서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수에 대해 이렇게 오래 전에 예언하셨구나..."
라고 무릎을 치면서 예수에 대해 기록한 것이 신약성서의 증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기록자들의 해석이 당시 유대교의 신학적 틀과 그 화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연히 구약에 깊이 녹아있는 유대교적 신관(神觀) 곧 전통적 유대교 신자들이 확고하게 믿었던〈하나님 다움〉의 영향에서 벗어나긴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로 예수를 묘사하려 했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당시 유대교의 신관은 어떤 특징을 갖고 있었을까요?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 신의 외재성(外在性)입니다. 신은 저 밖의 높은 곳에 계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이것은 당시의 3층적 우주관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제일 높은 층에 계시고, 인간은 그 다음 층에 살며, 지옥은 지하층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여하튼 하나님은 항상 높은 저 밖에 거하시지요.
둘째, 신의 초자연적 개입성(介入性)입니다. 저 높은 곳에서 인간의 시간과 공간으로 침입해옵니다. 상황과 시간으로 들어오실 때 신은 어김없이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개입하시지요. 여기에서 온갖 기적들이 생기게 됩니다. 신구약에 기적 설화가 많은 것도 이러한 신의 성격 때문이지요.
셋째, 신의 배타성입니다. 전지전능하신 신은 인간에게 배타적 경배를 요구하십니다. 유대교의 신에게만 100% 충성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신은 질투하시고 징벌하시지요. 불순종을 관용하지 않는 신입니다.
넷째, 동물의 번제를 즐기는 신입니다. 불순종한 인간은 동물을 죽여 희생 제물로 제단에 태워서 그 불순종의 죄를 용서 받아야합니다. 그러니 동물의 타는 냄새를 즐기시는 카니발의 신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특징을 지닌 절대자 神의 아들로 예수를 신격화(神格化)시키려했던 흔적이 여기저기서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그런데 흥미롭게 의미 있는 것은 예수의 삶, 특히 그의 탄생에 대한 신격화는 성서 기록의 시기가 늦어지면서 더 강하게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예수 나심에 대한 기록이 신의 초자연적 개입 곧 기적의 사건으로 부각되는데, 기록이 늦게 나온 것일수록 더욱 그러하다는 점입니다. 후일 기독교가 확고한 제도종교로 자리잡게 되면서 교리가 굳건하게 정착되면, 예수의 탄생 설화는 움직일 수 없는, 결코 수정되거나 변경될 수 없는 철칙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는 교리의 철창에 갇히게되고 말지요. 이제 이 문제를 잠시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성서기록이 오래된 것으로 추정될수록 예수에 대한 서술 특히 그의 탄생에 관련된 묘사는 덜 신화적입니다. 즉 나중에 나온 것일수록 역사적 예수의 모습은 희미해지고 신격화된 예수의 모습은 뚜렷해집니다. 그렇다면, 신약문서 중 가장 오래된 순서에 따라 예수에 대한 기록이 어떠한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제일 먼저 기록된 것은 사도 바울의 서신입니다. 이것은 주후 50∼64년 경에 쓰여진 것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의 제자들 보다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의 기초를 닦는데 더 큰 공헌을 했습니다. 4복음서의 그 어느 것보다 바울의 서신이 일찍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바울은 예수의 탄생에 대해 별로 언급한 것이 없습니다. 그는 역사적 예수에 대해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의 주된 관심은 오로지 부활한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는 부활의 그리스도를 알고, 그 부활의 능력을 실존적으로 체험하면서 언제 어디서나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 탄생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기한이 찼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은 보내셔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갈라디아서 4:4)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그 아들은 인간으로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나셨고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사심으로 그 권능에 의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확인되셨습니다."(로마서 1 : 3 - 4)
이 두 증언 어디에도 예수의 신성이 탄생과는 연관되어 있지 않습니다. 처녀 탄생에 대해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바울의 관심은 오로지 그의 부활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그의 부활에 있지 신비한 탄생에 있는 것이 아님을 바울은 뚜렷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초기 성서 기록에 속하는 바울 서신에는 기적적 예수 탄생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바울서신 다음으로 오래된 문서는 Q자료입니다. 이것은 주로 예수님의 어록 모음이라 하겠습니다. 이것은 1세기 중엽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Q자료를 상당히 활용했습니다. 이 자료에도 외재신이 기적으로 개입하여 예수를 탄생시켰다는 언급은 없습니다. 외재신의 개입으로 이뤄진 성육신에 대한 해석도 없습니다.
이 자료보다 조금 후에 나온 마가복음은 주후 65∼75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 시기는 예루살렘이 비참하게 함락되는 처절한 전쟁 시기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신이 거주하는 지성소가 있는 예루살렘 성전이 이방군대(로마군)에 의해 허무하게 무너지는 아픔을 경험했기에 그런지, 마가복음에는 묵시·종말론적 해석이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예수의 神性, 곧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인시켜 주는 구절은 예수가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을 때 나타납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늘에서 권위 있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하나님이 직접 예수를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확인시켜 주십니다(1:11). 그러나 여기서도 예수 탄생에 대한 언급은 아예 없습니다. 그러니 처녀 탄생을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요. 마가복음은 오히려 예수 모친 마리아가 예수를 미친 사람으로 오해하고 있는 인물로 부각시킵니다. 이것은 후일의 흠결없는 처녀 성모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지 않습니까.
마가복음보다 10년 이상 더 늦게 기록된 마태복음에 이르러, 비로소 예수 탄생은 신의 기적적 개입사건으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1세기 80년대 초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마태복음은 빛나는 새벽 별의 인도로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 탄생을 축하하러 오는 장면을 동화처럼 아름답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에 앞서 신은 마리아의 약혼자 요셉의 꿈에 나타나 약혼녀 마리아가 기적적으로 임신할 것임을 예고합니다. 꿈에 신의 계시를 받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요.
그런데 마태복음보다 조금 더 후(88-95년)에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누가복음에서는 신의 천사가 마리아에게 직접 찾아와 예수의 임신을 알려줍니다. 이것은 꿈을 통해 알리는 것보다 더 대담한 신개입(神介入)으로 볼 수 있습니다. 더 드라마틱한 기적의 묘사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늦게 기록된 문서일수록 예수 탄생의 신화적 요소는 더 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잠시 예수의 탄생과 세례요한의 탄생을 비교해 보면 흥미롭습니다. 예수의 위대함이 드러나기 때문이지요. 세례요한은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가 그러했듯이, 도무지 임신할 수 없는 늙은 여인의 몸에서 태어납니다. 사무엘의 모친 한나가 사무엘을 낳은 것이 기적이었듯이, 요한의 모친인 늙은 엘리사벳이 요한을 잉태한 것은 신의 개입으로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사무엘과 같은 위대한 예언자임이 확인되는 셈이지요. 그런데 예수는 요한보다 더 위대합니다. 예수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독생자)이십니다. 그러니 예수의 탄생은 마땅히 더 기적적인 사건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 드라마틱한 신개입으로 이뤄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늙은 여성의 임신 보다 더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되는 쳐녀의 임신을 통해 예수는 태어나야 하지요. 흠결없는 완벽한 처녀의 몸에서 태어난 아이야말로 신의 능력으로 태어난 존재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4복음서 중 가장 늦게 나온 요한복음은 주후 95∼100년에 쓰여졌습니다. 여기에서는 정말 특이합니다. 예수의 신성(神性)은 탄생에서 비롯되지 않습니다. 예수 탄생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신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던 바로 그 원시점에서부터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존재하신 분으로 숭상되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말씀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1:1∼2)
예수님은 처녀 탄생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신격화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으로 더 높임을 받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그를 통하여 생겨났으며, 그를 통하지 않고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1:3) 여기서 우리는 예수가 창조주로 격상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성육신(incarnation)의 교리와 삼위일체 교리의 단초가 또한 다져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결국 신약성서 문서 중 늦게 나온 것일수록 예수의 신성은 더욱 강조되고 있습니다.〈저 밖의 높은 곳으로부터 저 낮은 곳에로 초자연적 방식으로 개입하는 神의 아들〉로 예수가 더 뚜렷하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특히 그의 탄생 사건에 대한 해석에서 그러합니다. 이것이 후일 확고부동한 기독교 신조와 교리로 뿌리내리게 되면서, 이 교리와 신조에서 벗어난 예수의 생동하는 모습은 제도 기독교 틀 속에서는 사라지게 됩니다. 그 후 역사적 예수에 대한 진솔하고 정직하고 용기 있는 탐구가 생길 때까지 장구한 기간 동안 예수 없는 기독교 안에서 예수 없는 크리스마스 축제가 펼쳐져 온 셈이지요.〈예수 없는 기독교〉안에서〈예수 있는 성탄절〉을 맞이하고 싶었던 예수 탐구자들은 때로 고통스러운 종교 교리 재판의 희생자가 되었던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탄절에 과연 유대교 유신론의 옷을 입지 않고 계신 예수를 우리의 삶 한 가운데서 만날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 신조, 특히 근본주의 교리의 옷을 입지 않고 계신 예수를 뜨겁게 만날 수 있겠습니까?
먼저 앙드레 지드(Andr Gide)의 신앙적 고백에 주목합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도움을 주시기 위해 하루 24시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라고 프랑스의 작가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 속 깊숙이 이미 와 계십니다. 우리의 생명 한가운데서 살아 움직이고 계십니다. 당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해 주시기 위해 매 순간 일하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 존재의 근거가 되시어 가치 있는 존재로 우리가 살 수 있게 하기 위해 애쓰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간절히 소망하고 간구하면 그것이 이뤄질 수 있도륵 우리를 향해 귀를 기울이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 할 뿐입니다. 그러기에 그것을 깨닫게 하는 대화, 곧 하나님과의 대화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불교 신도들은 그것을 명상 또는 수행이라 하겠지요. 마음다함의 수행 말입니다. 우리 예수따르미들은 그것을 하나님과의 속사귐, 곧 깊은 내적 대화라고 하지요. 특히 성탄절이 가까이 올수록 깊은 내면의 대화는 은혜롭게 진행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 케롤로 방해받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요란한 싼타 할아버지의 선심으로도 방해받아서도 안됩니다. 우리 삶 속에서〈영적 골방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 영적 공간에 조용히 이미 와 계신 내재신(內在神)과 은혜로운 속사귐의 기회를 가져보십시오. 참 크리스마스의 멋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미 오래 전에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그에겐 율법을 관철하려는 외재신(外在神)은 의미가 없었습니다. 부활의 그리스도를 알고, 그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는 일만이 그에겐 가장 소중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존재 자체도 율법의 준수를 통해서가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의 은혜로 이뤄지고 있음을 고백했습니다. "내가 나 됨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내 존재의 근거가 바로 이 사랑의 은혜지요. 그는 처녀 탄생이나 동방박사의 얘기를 굳이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비록 그가 그러한 얘기를 들어서 알았다 하더라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체험 할 수 있다는 사실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도 부활의 예수 체험이 처녀탄생 설화나 기독교 교리 보다 훨씬 더 소중합니다. 이렇게 보면, 성육신의 교리도 외재신의 초자연적 개입으로 보기 보다는 내재신의 체험으로 이해하는 것이 오히려 힘이 될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의 임재를 구체적으로 증언하는 일이 바로 성육신을 실천하는 예수 따르미의 삶이기 때문이지요.
이번 크리스마스 때 우리는 스스로를 비우시어 십자가에 달린 종의 모습으로 오시는 예수를 만나야 할 것입니다. 자기비움은 교리나 관념의 문제가 아니라 살아있는 同苦의 체험입니다. 동고해야만 비로소 동락(同樂)이 따라 옵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 아기 예수를 만나려면, 우리는 이웃과 同苦하는 체험을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은 동고임을 새삼 체험으로 깨닫는 크리스마스가 되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그토록 흠모하는 평화실천자 틱낫한 스님은 사랑은 고통에서 피어나는 꽃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는 고통이 전혀 없는 곳에 가서 살 마음이 없습니다. 그런 곳에 살면 사랑을 경험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2002년 크리스마스 때 남의 아픔을 함께 아파함으로써 예수님을 모시는 기쁨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이웃과의 同苦가 주님과의 同樂으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예수 있는 성탄절을 이웃과 함께 뜻깊게 체험하고 즐기시기 바랍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 있는 성탄절을 우리의 역사현실에서 절박하게 만나시려면, 인간과 민족을 부당하게 분열시켜 고통을 안겨준 온갖 차별의 장벽을 허물어뜨리시는 예수를 새롭게 맞아들여야 합니다. 민족분단의 벽, 계급의 벽, 지역차별의 벽, 이념간의 벽, 남녀간의 차별 벽을 과감하게 허무시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에 사랑과 평화의 연대를 만들어 가시는 메시아 예수를 우리는 뜨겁게 만나야 합니다. 그분이야말로 부당한 교리와 신조의 옷을 훌렁 벗어버리신 우리의 주님이시며, 우리로 하여금 온갖 차별의 죄악으로부터 새 사람으로 일으켜 세워주시는 우리의 메시아이십니다. 아직도 분단의 질고 속에서 지역과 이념으로 찢겨지고, 계급간의 갈등이 쉼 없이 분출하고 있는 2002년 12월에 예수 따르미들은 바로 아름답게 하나되게 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그분의 뜻이 이 동토의 땅에 이뤄지게 해야 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크리스마스의 주인은 바로 예수입니다. 그런데 주인 없는 크리스마스 잔치를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치러왔습니다. 빈 껍데기가 되어버린 성탄절인 줄도 모르고 한낱 한 겨울의 계절 잔치로 우리는 성탄절을 보냈습니다. 기독교 신자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오래 전부터 예수는 크리스마스 계절에 추방되었습니다. 자본주의 시장이 확장될수록 예수는 자신의 생일잔치에서 손님으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 잔치의 주인 자리에는 언제부터인가 싼타클로스가 예수 대신 앉아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싼타를 예수님보다 더 기다리고 더 사랑합니다. 그만큼 싼타 할아버지의 선물을 제조하는 업자들만 신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케롤 속에서 흥행되는 상업주의의 열기는 세계화 흐름 속에서 더욱 뜨거워지는 듯 합니다. 케롤의 달콤한 노랫소리는 크리스마스 세일을 부추기는 소비욕구를 자극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세일의 물결에 밀려 예수는 이미 저 멀리 떠내려가 버린 듯 합니다. 소비 예찬이 아기 예수 예찬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제 크리스마스는 예수를 주인의 자리에서 쫓아내고 그 자리에 자본주의의 이윤을 모시고 있는 듯 합니다.
제가 안타까워하는 것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보다 근원적으로 생각해보면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의 부활에 감동했던 사람들이 기독교라는 종교를 창설한 뒤 그것을 제도화하여 굳게 지키려는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가운데 예수는 무거운 교리의 옷을 입게 되었습니다. 예수에게 제도화된 기독교가 입혀준 옷은 유신론(theism)에 근거한 무거운 교리의 옷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신 자유·진리의 주체인 예수에게 자유를 구속하는 온갖 유신론적 도그마의 옷을 입혀 온 셈이지요. 결국 오늘 크리스천들이 보고, 생각하고, 믿는 예수는 박제화된 형상으로서의 예수에 불과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특별히 그의 탄생을 축하하는 계절이 찾아올 때마다 저는 예수의 참 모습이 그리워지고 그 모습을 직접 체험하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끼곤 합니다. 예수 부재(不在)의 한 본보기를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 따르미들이 예배 때마다 뜻없이 사도신경을 외우면서 그 분의 부재를 아예 모르거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 쉽지요. 이 전통적 신앙고백에서 역사적 예수의 모습, 갈릴리의 예수의 그 감동적인 행적은 아예 증발되고 없습니다.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자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여기에 예수의 삶은 고스란히 빠져 있습니다. 처녀 몸에서 나신 후 바로 고난 받으시고 죽으시는 예수 모습만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 실종이 가장 오랫동안 세계 기독교신자들이 고백하는 신앙교리의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었으니, 성탄절에 자본주의 시장에 의해 추방된 예수를 안타까워한다는 것이 우스꽝스럽기도 합니다. 이 신앙고백은 예수를 더 높이기 위해 그의 탄생을 유신론적 입장에서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여 예수를 탄생시켰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동정녀 탄생을 부각시킨 것입니다.
하기야 역사적 인물을 사후에 평가함에 있어 신화적 요소를 과장하기 쉽습니다. 저는 어느 공식적인 행사 자리에서 몸둘 바를 모를 정도로 당황한 적이 있습니다. 이미 명사가 된 제 후배가 공식석상에서 저를 소개하면서 너무 과장했기 때문입니다. 중학교 시절 단편소설을 썼고 고등학교 때는 중후한 논문을 써서 학교와 학생들로부터 칭찬을 받은 천재인 것처럼 소개했습니다. 아마도 그 후배는 저를 좋아했기에 저의 일부 장점만을 기억하고 그것을 지나치게 과장시켰던 것이겠죠. 그런데 저는 부끄러웠습니다. 요즘 TV의 안방극장에서 인기를 모으고 있는《野人時代》의 주인공 金斗漢 씨의 모습도 과장되고 있는 듯 합니다. 그가 살아있어 이 드라마를 본다면 그도 얼마간 부끄러워 할 것 같습니다. 하기야 이것은 오늘의 정치인들이 지난날 주먹패들의 수준에도 이르지 못한 안타까운 현실 때문에 생긴 신드롬 같기도 합니다만.
그렇다면, 예수께서 돌아가신 뒤 그를 따르고 흠모했던 사람들이 기록한 문서들도 예수의 삶에 대해 과장하지 않았을까요? 이른바 정경의 예수(canonical Jesus) 곧 신약성서에 나타난 예수에 관한 기록들이 과연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그대로 복사하다시피 한 객관적 사실의 기록일까요? 특히 예수의 탄생에 관련된 성서의 기록이 그러한 것일까요?
최근 저는 흥미롭고 유익한 책을 읽었습니다. 유명한 미국인 작가로, 평화주의자인 Norman Mailer의 책 The Gospel according to the Son이었습니다. 이 책을 조성기 작가가 『예수의 일기』라는 책명으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이 책 첫 장에서 예수는 친히 이렇게 고백하는 것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 날 나는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나사렛으로부터 왔다.『마가복음』에서는 말하기를, 내가 물에 잠길 때 하늘이 열리고 권세 있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고 하였다. '너는 사랑하는 나의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다...' 이상과 같은『마가복음』의 기록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과장된 부분이 제법 있다고 할 수 있다. 마태와 누가, 요한도 내 입에서 나오지 않은 말들을 내가 한 것처럼 기록해 놓기도 하고, 내가 분노로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을 적에도 나를 온화한 인물로 묘사하곤 하였다. 하긴 그들의 글이 내가 죽은 지 오랜 후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늙은 사람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놓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늙어도 아주 늙은 사람들 말이다. 그런 이야기들은 뿌리에서 떨어져 나와 바람에 이리 저리 날아다니는 덤불 같은 자료들을 근거로 하기 쉽다. 그래서 내가 직접 나의 생애에 대해 말하기로 하였다..."
물론 이것은 작가 Mailer가 예수와 역지사지(易地思之)하면서 작가적 상상력으로 예수의 삶과 죽음을 재구성한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면 이제 예수의 삶에 대한 성서의 증언, 특히 그의 신성(神性)을 부각시킨 성서의 기록이 어떤 성격을 지니는 것인지 잠시 살펴보기로 합시다. 무엇보다 분명히 해야 할 점은 그것이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역사기록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즉 그 기록이 예수께서 활동하셨던 그 때 바로바로 일기처럼 그의 주변 인물들이 기록해 놓은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복음서이든 바울의 서신이든 그것은 예수의 부활사건을 실존적으로 체험했던 예수 따르미들의 신앙고백적 증언이었습니다. 예수의 비참한 처형에 놀랐던 제자들, 너무나 실망했던 예수 따르미들이 예수 부활 체험을 통해 새로운 존재로 일어서게 되면서, 그 부활 체험의 관점에서 예수의 삶과 고난과 죽음을 재구성한 것이 바로 성서기록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객관적 사실"을 신앙의 관점으로 해석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활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했던 제자들, 예수 따르미들이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역사적 예수를 새롭게 조명한 것입니다.
"아하 그랬구나 그래서 그런 말씀하셨구나..."
"아하 그래서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수에 대해 이렇게 오래 전에 예언하셨구나..."
라고 무릎을 치면서 예수에 대해 기록한 것이 신약성서의 증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기록자들의 해석이 당시 유대교의 신학적 틀과 그 화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연히 구약에 깊이 녹아있는 유대교적 신관(神觀) 곧 전통적 유대교 신자들이 확고하게 믿었던〈하나님 다움〉의 영향에서 벗어나긴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로 예수를 묘사하려 했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당시 유대교의 신관은 어떤 특징을 갖고 있었을까요?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 신의 외재성(外在性)입니다. 신은 저 밖의 높은 곳에 계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이것은 당시의 3층적 우주관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제일 높은 층에 계시고, 인간은 그 다음 층에 살며, 지옥은 지하층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여하튼 하나님은 항상 높은 저 밖에 거하시지요.
둘째, 신의 초자연적 개입성(介入性)입니다. 저 높은 곳에서 인간의 시간과 공간으로 침입해옵니다. 상황과 시간으로 들어오실 때 신은 어김없이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개입하시지요. 여기에서 온갖 기적들이 생기게 됩니다. 신구약에 기적 설화가 많은 것도 이러한 신의 성격 때문이지요.
셋째, 신의 배타성입니다. 전지전능하신 신은 인간에게 배타적 경배를 요구하십니다. 유대교의 신에게만 100% 충성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신은 질투하시고 징벌하시지요. 불순종을 관용하지 않는 신입니다.
넷째, 동물의 번제를 즐기는 신입니다. 불순종한 인간은 동물을 죽여 희생 제물로 제단에 태워서 그 불순종의 죄를 용서 받아야합니다. 그러니 동물의 타는 냄새를 즐기시는 카니발의 신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특징을 지닌 절대자 神의 아들로 예수를 신격화(神格化)시키려했던 흔적이 여기저기서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그런데 흥미롭게 의미 있는 것은 예수의 삶, 특히 그의 탄생에 대한 신격화는 성서 기록의 시기가 늦어지면서 더 강하게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예수 나심에 대한 기록이 신의 초자연적 개입 곧 기적의 사건으로 부각되는데, 기록이 늦게 나온 것일수록 더욱 그러하다는 점입니다. 후일 기독교가 확고한 제도종교로 자리잡게 되면서 교리가 굳건하게 정착되면, 예수의 탄생 설화는 움직일 수 없는, 결코 수정되거나 변경될 수 없는 철칙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는 교리의 철창에 갇히게되고 말지요. 이제 이 문제를 잠시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성서기록이 오래된 것으로 추정될수록 예수에 대한 서술 특히 그의 탄생에 관련된 묘사는 덜 신화적입니다. 즉 나중에 나온 것일수록 역사적 예수의 모습은 희미해지고 신격화된 예수의 모습은 뚜렷해집니다. 그렇다면, 신약문서 중 가장 오래된 순서에 따라 예수에 대한 기록이 어떠한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제일 먼저 기록된 것은 사도 바울의 서신입니다. 이것은 주후 50∼64년 경에 쓰여진 것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의 제자들 보다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의 기초를 닦는데 더 큰 공헌을 했습니다. 4복음서의 그 어느 것보다 바울의 서신이 일찍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바울은 예수의 탄생에 대해 별로 언급한 것이 없습니다. 그는 역사적 예수에 대해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의 주된 관심은 오로지 부활한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는 부활의 그리스도를 알고, 그 부활의 능력을 실존적으로 체험하면서 언제 어디서나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 탄생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기한이 찼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은 보내셔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갈라디아서 4:4)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그 아들은 인간으로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나셨고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사심으로 그 권능에 의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확인되셨습니다."(로마서 1 : 3 - 4)
이 두 증언 어디에도 예수의 신성이 탄생과는 연관되어 있지 않습니다. 처녀 탄생에 대해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바울의 관심은 오로지 그의 부활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그의 부활에 있지 신비한 탄생에 있는 것이 아님을 바울은 뚜렷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초기 성서 기록에 속하는 바울 서신에는 기적적 예수 탄생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바울서신 다음으로 오래된 문서는 Q자료입니다. 이것은 주로 예수님의 어록 모음이라 하겠습니다. 이것은 1세기 중엽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Q자료를 상당히 활용했습니다. 이 자료에도 외재신이 기적으로 개입하여 예수를 탄생시켰다는 언급은 없습니다. 외재신의 개입으로 이뤄진 성육신에 대한 해석도 없습니다.
이 자료보다 조금 후에 나온 마가복음은 주후 65∼75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 시기는 예루살렘이 비참하게 함락되는 처절한 전쟁 시기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신이 거주하는 지성소가 있는 예루살렘 성전이 이방군대(로마군)에 의해 허무하게 무너지는 아픔을 경험했기에 그런지, 마가복음에는 묵시·종말론적 해석이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예수의 神性, 곧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인시켜 주는 구절은 예수가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을 때 나타납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늘에서 권위 있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하나님이 직접 예수를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확인시켜 주십니다(1:11). 그러나 여기서도 예수 탄생에 대한 언급은 아예 없습니다. 그러니 처녀 탄생을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요. 마가복음은 오히려 예수 모친 마리아가 예수를 미친 사람으로 오해하고 있는 인물로 부각시킵니다. 이것은 후일의 흠결없는 처녀 성모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지 않습니까.
마가복음보다 10년 이상 더 늦게 기록된 마태복음에 이르러, 비로소 예수 탄생은 신의 기적적 개입사건으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1세기 80년대 초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마태복음은 빛나는 새벽 별의 인도로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 탄생을 축하하러 오는 장면을 동화처럼 아름답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에 앞서 신은 마리아의 약혼자 요셉의 꿈에 나타나 약혼녀 마리아가 기적적으로 임신할 것임을 예고합니다. 꿈에 신의 계시를 받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요.
그런데 마태복음보다 조금 더 후(88-95년)에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누가복음에서는 신의 천사가 마리아에게 직접 찾아와 예수의 임신을 알려줍니다. 이것은 꿈을 통해 알리는 것보다 더 대담한 신개입(神介入)으로 볼 수 있습니다. 더 드라마틱한 기적의 묘사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늦게 기록된 문서일수록 예수 탄생의 신화적 요소는 더 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잠시 예수의 탄생과 세례요한의 탄생을 비교해 보면 흥미롭습니다. 예수의 위대함이 드러나기 때문이지요. 세례요한은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가 그러했듯이, 도무지 임신할 수 없는 늙은 여인의 몸에서 태어납니다. 사무엘의 모친 한나가 사무엘을 낳은 것이 기적이었듯이, 요한의 모친인 늙은 엘리사벳이 요한을 잉태한 것은 신의 개입으로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사무엘과 같은 위대한 예언자임이 확인되는 셈이지요. 그런데 예수는 요한보다 더 위대합니다. 예수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독생자)이십니다. 그러니 예수의 탄생은 마땅히 더 기적적인 사건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 드라마틱한 신개입으로 이뤄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늙은 여성의 임신 보다 더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되는 쳐녀의 임신을 통해 예수는 태어나야 하지요. 흠결없는 완벽한 처녀의 몸에서 태어난 아이야말로 신의 능력으로 태어난 존재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4복음서 중 가장 늦게 나온 요한복음은 주후 95∼100년에 쓰여졌습니다. 여기에서는 정말 특이합니다. 예수의 신성(神性)은 탄생에서 비롯되지 않습니다. 예수 탄생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신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던 바로 그 원시점에서부터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존재하신 분으로 숭상되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말씀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1:1∼2)
예수님은 처녀 탄생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신격화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으로 더 높임을 받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그를 통하여 생겨났으며, 그를 통하지 않고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1:3) 여기서 우리는 예수가 창조주로 격상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성육신(incarnation)의 교리와 삼위일체 교리의 단초가 또한 다져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결국 신약성서 문서 중 늦게 나온 것일수록 예수의 신성은 더욱 강조되고 있습니다.〈저 밖의 높은 곳으로부터 저 낮은 곳에로 초자연적 방식으로 개입하는 神의 아들〉로 예수가 더 뚜렷하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특히 그의 탄생 사건에 대한 해석에서 그러합니다. 이것이 후일 확고부동한 기독교 신조와 교리로 뿌리내리게 되면서, 이 교리와 신조에서 벗어난 예수의 생동하는 모습은 제도 기독교 틀 속에서는 사라지게 됩니다. 그 후 역사적 예수에 대한 진솔하고 정직하고 용기 있는 탐구가 생길 때까지 장구한 기간 동안 예수 없는 기독교 안에서 예수 없는 크리스마스 축제가 펼쳐져 온 셈이지요.〈예수 없는 기독교〉안에서〈예수 있는 성탄절〉을 맞이하고 싶었던 예수 탐구자들은 때로 고통스러운 종교 교리 재판의 희생자가 되었던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탄절에 과연 유대교 유신론의 옷을 입지 않고 계신 예수를 우리의 삶 한 가운데서 만날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 신조, 특히 근본주의 교리의 옷을 입지 않고 계신 예수를 뜨겁게 만날 수 있겠습니까?
먼저 앙드레 지드(Andr Gide)의 신앙적 고백에 주목합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도움을 주시기 위해 하루 24시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라고 프랑스의 작가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 속 깊숙이 이미 와 계십니다. 우리의 생명 한가운데서 살아 움직이고 계십니다. 당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해 주시기 위해 매 순간 일하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 존재의 근거가 되시어 가치 있는 존재로 우리가 살 수 있게 하기 위해 애쓰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간절히 소망하고 간구하면 그것이 이뤄질 수 있도륵 우리를 향해 귀를 기울이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 할 뿐입니다. 그러기에 그것을 깨닫게 하는 대화, 곧 하나님과의 대화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불교 신도들은 그것을 명상 또는 수행이라 하겠지요. 마음다함의 수행 말입니다. 우리 예수따르미들은 그것을 하나님과의 속사귐, 곧 깊은 내적 대화라고 하지요. 특히 성탄절이 가까이 올수록 깊은 내면의 대화는 은혜롭게 진행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 케롤로 방해받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요란한 싼타 할아버지의 선심으로도 방해받아서도 안됩니다. 우리 삶 속에서〈영적 골방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 영적 공간에 조용히 이미 와 계신 내재신(內在神)과 은혜로운 속사귐의 기회를 가져보십시오. 참 크리스마스의 멋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미 오래 전에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그에겐 율법을 관철하려는 외재신(外在神)은 의미가 없었습니다. 부활의 그리스도를 알고, 그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는 일만이 그에겐 가장 소중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존재 자체도 율법의 준수를 통해서가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의 은혜로 이뤄지고 있음을 고백했습니다. "내가 나 됨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내 존재의 근거가 바로 이 사랑의 은혜지요. 그는 처녀 탄생이나 동방박사의 얘기를 굳이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비록 그가 그러한 얘기를 들어서 알았다 하더라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체험 할 수 있다는 사실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도 부활의 예수 체험이 처녀탄생 설화나 기독교 교리 보다 훨씬 더 소중합니다. 이렇게 보면, 성육신의 교리도 외재신의 초자연적 개입으로 보기 보다는 내재신의 체험으로 이해하는 것이 오히려 힘이 될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의 임재를 구체적으로 증언하는 일이 바로 성육신을 실천하는 예수 따르미의 삶이기 때문이지요.
이번 크리스마스 때 우리는 스스로를 비우시어 십자가에 달린 종의 모습으로 오시는 예수를 만나야 할 것입니다. 자기비움은 교리나 관념의 문제가 아니라 살아있는 同苦의 체험입니다. 동고해야만 비로소 동락(同樂)이 따라 옵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 아기 예수를 만나려면, 우리는 이웃과 同苦하는 체험을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은 동고임을 새삼 체험으로 깨닫는 크리스마스가 되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그토록 흠모하는 평화실천자 틱낫한 스님은 사랑은 고통에서 피어나는 꽃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는 고통이 전혀 없는 곳에 가서 살 마음이 없습니다. 그런 곳에 살면 사랑을 경험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2002년 크리스마스 때 남의 아픔을 함께 아파함으로써 예수님을 모시는 기쁨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이웃과의 同苦가 주님과의 同樂으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예수 있는 성탄절을 이웃과 함께 뜻깊게 체험하고 즐기시기 바랍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 있는 성탄절을 우리의 역사현실에서 절박하게 만나시려면, 인간과 민족을 부당하게 분열시켜 고통을 안겨준 온갖 차별의 장벽을 허물어뜨리시는 예수를 새롭게 맞아들여야 합니다. 민족분단의 벽, 계급의 벽, 지역차별의 벽, 이념간의 벽, 남녀간의 차별 벽을 과감하게 허무시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에 사랑과 평화의 연대를 만들어 가시는 메시아 예수를 우리는 뜨겁게 만나야 합니다. 그분이야말로 부당한 교리와 신조의 옷을 훌렁 벗어버리신 우리의 주님이시며, 우리로 하여금 온갖 차별의 죄악으로부터 새 사람으로 일으켜 세워주시는 우리의 메시아이십니다. 아직도 분단의 질고 속에서 지역과 이념으로 찢겨지고, 계급간의 갈등이 쉼 없이 분출하고 있는 2002년 12월에 예수 따르미들은 바로 아름답게 하나되게 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그분의 뜻이 이 동토의 땅에 이뤄지게 해야 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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