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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되신 하나님

요한복음 길희성............... 조회 수 2763 추천 수 0 2008.08.10 00: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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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1:1-18 
설교자 : 길희성 형제 
참고 : 새길교회 2002.12.15 주일설교 
지금 한국 개신교에 가장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아 사는 예수 따름의 삶입니다. 있으나마나한 존재로 전락해 가는 한국 개신교의 맹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노력을 수반하지 않는 값싼 은총, 행위를 수반하지 않는 공허한 믿음을 버리고 예수 따름의 어려운 길, 좁은 길로 들어가는 실천적 신앙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스도만 있고 예수는 없는 공허하고 추상적인 기독교를 버리고 역사적 예수, 인간 예수의 삶을 구체적으로 본받는 기독교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오늘 한국 기독교계에는 이러한 작은 예수 따르기 운동, 예수 공동체 운동들이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어 우리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 새길 교회도 미약하고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그런 대열에 동참하고자 하는 신앙 공동체입니다. 적어도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 따르기는 현대 기독교가 나아 가야할 올바른 방향임에 틀림없습니다. 기독교는 이제 값싼 은총을 남발하는 종교에서 예수 따름의 실천과 수행의 종교로 변모해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이 예수 따르기의 구호가 또 하나의 빈 구호가 되지 않으려면 깊은 신앙과 탄탄한 신학적 뒷받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 따름이란 말은 우리와 같은 보통사람들에게는 거창한 구호처럼 들리고 교만하게도 들립니다. 우리 주제에 무슨 예수를 따른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아주 부담스럽게 느껴집니다. 부담스럽다 못해 스트레스까지 줄 수 있습니다. 사실, 지난 한 해, 아니 바로 지난 한 주간의 나의 삶을 되돌아 볼 때, 나와 예수와의 거리는 한없이 크게만 느껴집니다. 이런 경험이 되풀이 되다보면 죄의식만 쌓여 가고, 예수 따름이라는 것이 하나의 빈 구호가 되고 허위의식만 조장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예수를 따를 수 있다는 말이며 무엇이 예수를 따르는 삶인가, 다시 한 번 묻게 됩니다. 저는 성탄일이 다가오는 이 시점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기독교의 성육신 사상의 의미를 음미해 보면서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크리스마스 하면 흔히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저 높은 하늘로부터 낮고 천한 우리를 구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날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은 신적 존재이기에 우리와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존재로 여깁니다. 예수님은 물론 신적 존재입니다.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는 구세주가 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신성, 적어도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아주 특별한 관계를 인정하지 않으면, 예수는 우리에게 하나의 훌륭한 교사나 사상가 혹은 도덕적 모범은 될 수 있어도, 종교적으로, 신앙적으로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를 영원하신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중보자, 우리 신앙의 대상은 못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떠나서 우리는 그의 인격의 힘과 비밀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토록 훌륭하고 기막힌 존재이면 존재일수록 우리는 어떻게 그가 우리와는 다른 그런 뛰어난 존재가 될 수 있었는지를 묻고 설명해야 합니다. 결국 우리는 그의 신성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고 그와 하나님과의 각별한 관계를 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가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그가 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면,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특수한 밀접한 관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라는 존재의 특수성도 이해 못하고, 우리의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예수도 설명이 안 되고, 온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그의 보편성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가 그토록 가깝게 모셨던 아빠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해해야 하며,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고자 하면 우리는 곧 예수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 원리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고 그와 하나님과의 각별하고도 특별한 관계를 강조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 앞에서 형편없는 존재가 되고 우리와 예수와의 간격은 더 커진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의 특별한 위치는 설명이 되지만, 우리와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우리는 도저히 그를 따라갈 길이 없어 보입니다. 그는 숭배의 대상은 될지언정 모방이나 추종의 대상은 못 됩니다. 그는 그야말로 지상에 걸어다니셨던 하나님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칫하면 그가 지상에서 행하신 모든 일도 우리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고 실감이 나지 않는 신화적 사건, 문자 그대로 신의 이야기 정도가 되기 쉽습니다. 예수님이 땅 위에 걸어다니시던 하나님이었다면, 그에게는 십자가의 고통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고, 부활하실 것도 미리 아셨을 것이니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됩니다. 본래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인데 십자가의 고통이나 부활의 영광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전부 쇼가 아니냐 하는 의문마저 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옛 교부들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균형 있게 파악하고자 했으며 그를 참 하나님, 참 인간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오늘 읽은 요한복음 1장의 말씀은 바로 이러한 전통적인 교부들이 신봉했던 기독론의 초석이 된 구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크리스마스의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사건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을 함께 지니신 존재로 파악된 것입니다. 그 후로 이 사상은 모든 교부들과 신학자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오늘날까지 기독교 신앙의 초석으로 남아 있습니다.

교리라는 것은 사변을 좋아하는 어느 한가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절실한 문제 의식에서 나온 소산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나름대로 다 이유가 있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결코 교리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절대화하고 경직되게 해석하는 교조주의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믿는 신앙을 교리를 믿는 행위로 대체해 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를 예수이게끔 한 것은 무엇인가, 그의 인격의 힘과 비밀이 무엇이냐를 물으면서 예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강하게 이해한 것이 오늘 봉독한 요한복음의 성육신(incarnation) 사상입니다. 예수는 한 마디로 말해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과 생명 그 자체로서 하나님과 존재론적으로 동일하다는 주장입니다. 그는 본래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인간으로 하강, 현현, 육화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존재는 이해가 안 되고 그가 하신 모든 일도 설명하기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예수는 우리 인간을 찾아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사람이 되신 하나님 자신이었다는 것이 요한의 결론입니다.

하지만 이 성육신 사상은 잘못하면 예수와 우리 인간들 사이의 거리를 건널 수 없이 넓고 깊게 만드는 쪽으로 오해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성육신 사건을 그야말로 우리들과는 무관하게 오직 예수라는 예외적 존재에게만 일어난 기적적 사건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와 우리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질적 차이가 있고, 기독교는 성육신인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 시작된 종교이기에 다른 어느 종교와도 비교할 수 없는 우월한 종교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역설적이게도, 하나님과 인간의 장벽을 허물고 인간과 인간의 장벽을 허물기 위해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성육신 사건이 오히려 하나님과 인간의 거리를 무한히 확대하고 인간과 인간의 거리를 확장하는 차별의 논리, 배타의 논리로 작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육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아닙니다.

성육신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내재성을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초월성만을 강조하여 하나님과 세계는 완전히 별개의 존재로 잘 못 보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도 무한한 거리가 있는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 사상이 아닙니다.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이 자신을 세계 속으로 세속화함으로써 세계를 거룩하게 성화한 사건이며, 하나님이 사람이 되심으로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도록 사람의 지위를 격상시킨 사건입니다. 그것은 神人合一, 동양적으로 말하면 天人合一의 사건입니다.

유대교나 이슬람은 그리스도교와 마찬가지로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종교이지만, 하나님의 내재성을 말해주는 성육신 사상이 없습니다. 이 두 종교가 기독교에 대하여 가장 심각하게 비판하는 사상이 바로 성육신 사상입니다. 왜냐하면 성육신 사상은 예수를 신격화시켜 하나님과 동격에 놓아 유일신 신앙을 배반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육신 진리의 일면만 보는 것입니다. 성육신은 예수님의 신성을 말하면서 동시에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인간성을 말해주는 심오한 진리입니다. 유대교와 이슬람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심으로 인해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신비한 진리를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부정하여 세계의 일부가 되고 인간과 완전히 하나가 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부합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고통 속에 돌아가신다는 생각은 엄두도 못 냅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러나 절대적 존재인 하나님이 자기를 부정하고 상대화시킴으로써 절대와 상대, 하나님과 세계, 거룩한 것과 속된 것,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의 장벽이 무너지고 하나가 되는 성육신의 심오한 진리를 믿습니다. 기독교는 이 점에서 하나님의 초월성을 주로 강조하는 유대교나 이슬람보다는 오히려 天人合一을 말하고 부처와 중생이 하나임을 말하는 동양종교에 더 가깝습니다.

사실, 성육신은 창조의 개념과 근본적으로 하나이며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창조론을 너무나 일방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초월성만을 강조하는 쪽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것은 이 세계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에 귀한 존재이며 피조물과 창조주 하나님은 부모자식처럼 유사하고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중세 신학의 초석인 유비론은 바로 이에 근거한 이론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만물들 사이에는 차이 못지 않게 유사성이 있으며, 존재론적 단절보다는 연속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만물을 초월하지만 동시에 만물에 내재하며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생명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의 말씀대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사 17: 28).

더욱이 하나님은 자기 형상으로 지은 인간과는 떨래야 뗄 수 없는 아주 특별한 관계를 지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다는 개념 안에는 이미 하나님과 인간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神人合一의 성육신 개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육신은 세계를 품고 세계와 하나가 되신 하나님, 인간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스스로 인간이 됨으로써 인간과 하나가 되시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엄청난 사건이요 심오한 진리입니다. 실로 성육신 개념은 기독교 신관의 초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나 분명하게 보여주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저 멀리 하늘 위에 군림하는 존재, 세상의 고통을 먼발치서 팔짱 끼고 구경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기 자식과도 같은 세상 만물들을 품으시며 자기 자신의 형상을 지닌 우리 인간을 사랑하셔서 스스로 사람이 되어 우리가 사는 이 물질 세계, 자연 세계에 참여하시고 우리와 함께 이 세상의 고난을 겪으시고 우리보다 더 무거운 역사의 질곡을 짊어지신 것입니다. 이보다 더 강한 세계 긍정, 인간 긍정의 사상이 있습니까? 옛날에 임금님이 한 번 다녀가신 곳은 아무리 초라한 마을이라도 큰 영광을 입고 길이 기억됩니다. 아니 오늘날도 대통령이 한 번 방문만 해 줘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방문한 이 세계는 그대로 성화된 아름다운 세계이며, 더군다나 사람이 되셨다니 인간은 얼마나 신성한 존재입니까?

성육신 사건은 무엇보다도 우리와 같아지신 하나님, 우리의 눈높이가 되신 사랑의 하나님을 보여주는 결정적 계시의 사건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같아져야 가능합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낮은 지위의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려면, 그와 동등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월한 자로서 자비와 동정은 베풀 수 있어도 낮은 데 있는 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참된 사랑은 보여줄 수 없습니다. 같아지려면 낮아져야 하고 찾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같이 살아야 하는 법입니다. 같아지지 않는 사랑, 동거하면서 동고동락하지 않는 사랑은 관념적인 사랑이 되기 쉽고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고 요한은 말하고 있습니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성육신의 진리를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옛날 자기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는 한 왕이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어느 날 아내가 한 눈을 잃게 되었습니다. 몹시 슬퍼하는 아내에게 왕은 왜 그렇게 슬퍼 하냐고 묻자, 아내는 말하기를, 내가 이렇게 슬퍼하는 것은 한 눈을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로 인해 당신이 나를 예전처럼 사랑하지 않을까 그것이 더 걱정되어 슬퍼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왕은 어느 날 자기의 한 쪽 눈을 뽑고서 아내를 찾아와 위로하기를, "자 이제 나도 외눈으로 당신과 같이 되었소.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이렇게 나도 외눈이 된 것이요."라고 하면서 위로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 때문에 자기를 부정하고 낮아져 사람과 하나가 되신 하나님의 마음과 행위를 말해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이렇게 한 쪽 눈을 뽑아버리고 우리와 같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동거하면서 동고동락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그것도 아주 밑바닥 인생들과 동고동락하신 분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얼마나 고귀한 존재이기에,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기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사람이 되셨단 말입니까? 기독교의 이 사상은 생각할수록 엄청난 진리를 품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신 하나님의 참 모습이고 본성이며, 이를 두고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증언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크리스마스를 기뻐하는 참된 이유입니다.

최근 저는 워싱톤 흑인 빈민가, 매일 같이 마약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는 우범지대에서 목숨을 내걸고 흑인 노숙자들에게 사랑을 나누는 〈평화나눔공동체〉를 운영하고 있는 한 한국 목사님의 이야기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백악관 뒷골목의 성자들』이라는 책인데, 저자 최상진 목사의 수기입니다. 흑인 우범지대에서 그 어떤 미국인도 하기 어려운 일을 한국인 목사가 하려니 그가 겪은 시련과 좌절, 회의와 절망은 말 안 해도 가히 짐작이 갑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진한 은총의 체험과 깨달음을 최 목사는 감동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극과 극을 달리는 선과 악의 전쟁터와 같은 이 빈민가에서 저들을 도울 나의 힘의 한계를 느낄 때면 그만 포기하고싶은 생각에 휩싸이기도 한다. 어느 때는 하루에도 수 없이 이런 생각에 빠져든다. 나는 왜 남들이 꺼려하는 이런 현장에 서 있는가? 남들이 관심을 갖지도 않는 이 사역이 꼭 필요한 것인가? 반문을 하며 좌절에 빠지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이들을 친구 삼아 한 평생을 보내고 계실 예수님을 생각해 본다.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며 친히 가난한 자들의 친구가 되신 예수님, 자신 스스로 노숙자가 되어 빈자들과 공동체를 이루시는 예수님. 예수님에게도 얼마나 많은 고민과 고통이 있으실까? 그런 예수님을 나마저 외면하고 떠난다면 누가 이런 사역을 통해 예수님의 동역자가 되어 줄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 가장 불쌍한 분은 오직 예수님이라는 생각을 나 스스로 해석해 보며 위로를 얻고 하루하루를 참고 견디어 본다. 언젠가 너무 지쳐 참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어 할 때 한 노숙자 형제가 찾아와 위로를 주어 힘을 얻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영적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에 있는 노숙자 형제가 오히려 내 손을 잡고는 다음과 같은 위로를 주었다.
"목사님, 나는 기도를 잘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지쳐 있는 목사님에게 주기도문을 읽어드리고 싶습니다."
"형제님, 감사합니다. 형제님의 손을 내 머리에 올려놓으세요. 나는 형제님의 입술을 통해 예수님으로부터 안수 기도를 받고 싶습니다."
"저는 가진 것 한 푼 없는 거지입니다. 그리고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가 목사님에게 안수 기도를 할 수 있습니까?"
"형제님, 가장 높으신 예수님은 가장 낮아져 친히 노숙자가 되셨습니다. 그것도 죄인인 우리를 섬기시기 위해서요. 노숙자이신 형제님은 예수님의 진정한 친구이십니다. 형제님을 통해 노숙자이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꼭 간직하고 싶습니다."
태어나 처음으로 받아보는 노숙자의 기도를 통해 나는 점점 더 예수님의 삶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흔하게 들려지던 주기도문은 그날 나의 영혼을 완전히 소생시키는 기적을 가져다 주었다. 낮은 자들을 들어 높이시는 주님의 은혜를 다시 한 번 체험하며 지금도 지칠 줄 모르고 사역 현장을 달리고 있다. 그분의 이름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위로를 얻을 수 있으며 자유함을 누릴 수 있다. 그리고 우리 같은 죄인까지 구원받을 수 있다. 오직 그분의 이름만으로.

기독교가 아직도 이런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한, 생명력 있는 종교요 인류 구원의 종교라는 것을 실감하게 해 줍니다. 최 목사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진리를 문자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시무시한 우범지대에서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는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신적 존재들이며, 하나님이 사랑하는 존귀한 존재임을 몸으로 증언하며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봉사, 선교 활동을 하지만, 아마도 가장 미흡한 것은 바로 이러한 동고동락의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낮아지지 못하고, 찾아가지 못하고, 함께 동거하면서 고락을 나누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에 가장 근접하는 것은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의료봉사 활동일 것이며, 우리 형제 가운데 몇 분은 남몰래 이런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실천공동체들이 곳곳에 있어서 엄동설한의 추위를 녹이면서 우리에게 희망의 등불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새길 이야기』에 정기적으로 실리는 공동체 순례를 보면 잘 알 것입니다.

이렇게 설교를 하고 있는 저 자신이 이러한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부끄러운 일이며, 설교하기를 주저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나는 목사는 아니지만, 목사님들은 혀만 천당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저도 혀만 가면 그나마 다행이겠습니다. 아마도 다일공동체의 최일도 목사 같은 사람은 빼고 하는 말이겠지요. 언젠가 김수환 추기경도 고위 성직자들과 테레사 수녀의 삶을 비교해 보면 누가 예수를 닮은 삶인지 확연히 드러난다고 대담 중에 고백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성육신 사건을 오직 예수 한 분에게만 일어난 특별하고도 예외적인 사건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성육신 사건은 예수라는 한 개인에게 일어난 사건이자 동시에 모든 인류, 온 인간성을 하나님께서 품으시고 긍정하시는 보편적 의미를 지닌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실 때 취하신 인간성은 예수 개인의 인간성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보편적 인간성 그 자체라는 것이 교부시대부터 칼 바르트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학자들의 공통된 증언이며, 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기독교 인간선언이며 기독교 휴머니즘의 초석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아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모든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진리, 다시 말해 神人合一이 이루어졌다는 진리를 말합니다. 예수에게서 실현된 신인합일은 그에게만 일어난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사건이며 우리 모두의 진리입니다.

요한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를 영접하고 그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그리고 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육으로부터 탄생하거나 인간의 의지에 의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탄생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성육신 사건은 우리 모두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 점을 간과하고 오직 예수만 하나님 아들이라고 우러러보고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크리스마스의 사건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딸로 탄생하는 우리들 자신의 사건이고 그래야만 합니다. 내 영혼 안에 하나님의 말씀, 온 우주의 창조적 생명인 로고스가 탄생하여 우리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도록 하기 위해 2000년 전 그리스도의 탄생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실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 중에서도 인간은 특히 우주 만물의 정기를 받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귀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본래부터 하나님을 닮은 신성한 존재입니다. 신성을 지닌 하나님의 아들딸들입니다. 동학 사상으로 말하자면, 人乃天, 곧 사람이 하늘이라는 것이 본래 기독교의 인간관이고 신관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이미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으며, 인간은 이미 하나님과 하나된 神人合一의 존재이며 하나님의 육화입니다. 예수는 바로 이러한 엄청나고도 심오한 진리, 인간의 신성을 깊이 자각하시고 실현하신 진정한 인간이고 위대한 휴머니스트입니다. 그는 이 진리를 선언하고 실천하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존재 안에서 완벽하게 구현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사람의 아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상인 우리들은 모두 세계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얼굴이며,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살아야 할 귀한 존재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신성과 인간성을 동시에 갖춘 신인합일적 존재들입니다. 이것이 타락 이전의 아담의 본래 모습이고 아름다운 모습이며 우리들 자신의 본래 모습입니다. 예수는 이러한 우리들의 본래 모습을 구현하신 분으로서, 그리스도는 이미 완성된 인간이고 우리 모두는 되어가야 할 도상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 진리를 증언하시기 위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위대하고 고귀한 존재인가를 보여 주기 위해 하나님은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것을 깨달아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물론 현실적으로는 이러한 고귀한 신적 인간성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삽니다. 인간 노릇을 제대로 못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래성과 현실성 사이에 괴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유교, 불교와 마찬가지로, 기독교도 이 본래성과 현실성 사이의 괴리를 수행과 수도로 극복해야 합니다. 공짜 은총만 강조하는 공허한 메시지를 전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 따름의 길에 나서야 합니다.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는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자신의 본래적 인간성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취한 인간성과 조금도 다름없다는 것을 깊이 자각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비천하고 비참한 존재로 비하하거나 벌레만도 못한 죄인으로 자학하는 것은 결코 신앙도 아니고 하나님의 뜻도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감과 자긍심을 바탕으로 해서 참인간 예수의 모습을 우리 삶에서 구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낮은 데로 임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아빠로 모시고 그의 뜻을 순종하며 인간을 사랑한 참다운 사람의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철저히 자신을 비우고 낮추시는 사람의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신 분이지만, 사람의 아들 예수는 참다운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그는 사람을 사랑하사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모습,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을 향해 자기를 비운 사람의 모습을 완벽하게 구현한 분입니다. 참 하나님, 참 사람으로서, 문자 그대로 완벽한 신인합일이 실현된 존재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과 인간을 사랑한 참 사람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는 우리도 자신을 비우는 수도 생활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은폐되거나 왜곡되어 있는 참다운 신성과 인간성이 드러나기 위해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광야에서 금식하고 기도하는 고행의 길, 수도자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본 받아 부단히 자기 성찰과 수행을 함으로써 자신의 참다운 본성인 신성과 인간성을 실현하는 일입니다. 기독교는 이제 과감히 수행의 종교로 변모해야 합니다.

수행이라 하면 우리는 옛날 수도사들, 그리고 가톨릭이나 동방교회의 수사나 수녀들만 하는 것으로 알지만 그래서는 안 됩니다. 개신교는 본래 수도사의 삶을 세상을 등지지 말고 바로 세상 속에서 해야 된다는 정신으로 출발한 운동입니다. 초기에는 이러한 정신이 살아 있었으나, 그 후 개신교는 결국 모든 사람들을 세속에 빠지도록 만드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는데 공헌했습니다. 그래서 목사, 장로, 평신도 할 것 없이 모두 시궁창에 빠지는 종교가 된 것입니다. 모두를 한 통속으로 만들어버린 개신교는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성과 속을 분리하는 엄격한 이원론도 문제이지만, 모두를 시궁창 속에 빠뜨린 개신교도 문제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종교개혁가들이 추구했던 제 3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세상 안에서 수도자들처럼 사는 개신교적 수도운동이 필요합니다.

재가와 출가의 구별이 워낙 뚜렷한 불교에서도 재가불교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재가자들이 출가 승려들의 타락상을 고발하고 막는 일에 주력했지만, 이제는 어떻게 하면 재가이면서도 출가적 생활을 할 수 있는지 제 3의 길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이제 현대 문명은 수도자, 성직자, 평신도, 재가출가 할 것 없이 모두에게 새로운 금욕주의, 새로운 수도 정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욕망과 욕심을 줄이고 단순한 삶을 사는 금욕주의, 물질을 소중하게 여기며 최소한의 물질만 사용하고 그마저 없는 사람들과 나누는 검약한 삶만이 가난으로 비인간화 된 사람들을 살리고 우리의 탐욕과 낭비로 신음하는 하나님의 자식인 이 지구를 살리는 실천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광야에서 금식하고 기도하는 수행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들의 광야는 어디며 오늘 우리들의 금식기도는 어떠해야 합니까? 새로운 금욕주의가 우리들의 광야이며 우리들의 금식기도입니다. 꼭 필요한 만큼만 사용하는 검약하는 삶이 현대인의 일상적 금식기도이어야 하고, 매일 마음을 비우는 연습이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찾아야 할 광야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비울 때 하나님의 영이 우리 마음에 들어와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생깁니다. 마음을 비우는 것만큼 하나님의 영이 우리 마음을 채웁니다. 우리 마음 안에 세상의 정욕과 욕심으로 가득 차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영이 들어오겠습니까? 여기서도 역시 우리는 은총 타령만 해서는 안 되고, 우리들 자신의 진지한 노력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요한은 오늘의 말씀에서 "누구든 그를 받아들였고 그의 이름을 믿은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능을 그는 주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피로나 육의 의지로부터 혹은 인간의 의지로부터 태어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3절). 이러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으로 잉태되신 예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조금도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를 받아들이고 그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결코 관념적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받아들이는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신 분임을 믿으며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가장 선명하고 확실하게 드러내 주신 분임을 믿을 뿐만 아니라, 자기를 비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신 그의 삶과 모습을 닮기 위해 예수 따름의 삶에 동참하는 실천적 행위까지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이런 믿음과 실천수행의 길만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사회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집니다. 주여 주여, 예수의 이름만 불러대는 공허한 믿음, 실천수행 없이 값싼 은총의 공수표를 남발하는 기독교는 이제 변해야 합니다. 맹목적인 예수 숭배의 종교에서 예수 따름의 종교로 변화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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