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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3:14-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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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경미 자매 |
참고 : | 새길교회 2003. 4. 6 주일설교 |
요한복음서3,14∼16; 17,1~5
지구 저편에서 불어오는 전쟁과 죽음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생명을 생각합니다. 돌이켜보면 인류 역사 속에서 전쟁이 없었던 적이 얼마나 있었습니까? 지구는 늘 전쟁의 화약연기와 포탄소리, 죽어 가는 사람들의 비명소리로 얼룩졌습니다. 역사가들은 평화와 공존이 아니라 전쟁과 경쟁을 통해 인류의 문명이 발전했다고 합니다. 어느 시대에나 군인들이 점령지에 깃발을 꽂고 나면 제일 먼저 달려오는 것이 장사꾼들이었으니 이 말을 부정하기도 어렵습니다.
가까이는 반도체나 핸드폰, 컴퓨터 등이 군의 통신장비 발전과정에서 나온 부산물이고, 통조림이나 장기 식품 저장 기술도 군용 식량 저장 방법에 대한 연구과정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메소포타미아 문명 역시 전쟁과 함께 발전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인류 최초로 문자를 고안해내고, 교통 운송 수단을 발전시켰으며, 화폐 경제를 이루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사방으로 트인
지형적 특성 때문에 문명의 초기부터 민족의 이동과 접근이 용이했고, 이로 인해 일찍부터 전쟁이 끊이지 않았으며, 수많은 민족들이 부침을 거듭하며 이 지역의 패권을 다투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그 특성상 역동적이고 변화와 교류를 추구하며, 보편성을 띠게 되었습니다. 여러 민족이 부딪치고 갈등하는 과정에서 보편적인 규범의 필요성 때문에 일찍이 법을 발전시키게 되었고, 서로 다른 민족과 문화에서 유래한 다양한 물자를 교류하는 과정에서 화폐를 발전시켰으며, 전쟁시 물자와 무기 운송의 필요성 때문에 마차, 전차 등을 발전시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문명이라는 것이 그 끝을 알 수 없는 맹목적인 욕망과 맞닿아 있다면, 문명은 전쟁을 피할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한편으로는 인간 욕망의 허망함과 어리석음을 실감하게 되지만, 동시에 어째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타자를 희생시키면서 자기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지, 욕망의 본질은 무엇이며, 죄는 무엇인가 하는 근원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더욱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지구 저편의 전쟁장면을 보노라면, 최고의 과학적 두뇌와 정치 엘리트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어리석을 수 있는지, 고도의 집약된 자본과 기술, 고급두뇌들이 최고의 능력을 발휘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고작 인간을 대량학살 하는 일인지 인간성 자체에 대해 근원적인 회의가 듭니다. 한편으로 대량학살의 피로 유지되는 문명의 야만성에 절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득권을 추구하는 나의 삶의 방식이 결국은 이 전쟁의 공범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릅니다. 숱한 정치적 수사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이 사실은 석유확보와 21세기 미국의 새로운 세계 질서 재편을 위한 것이며, 미국 국민의 70% 이상이 전쟁을 지지한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결국은 끝없는 물질적 욕망과 지배욕이 이 가공할 전쟁과 폭력의 광기 근저에 깔려 있는 원흉이며, 이 점에서 우리 모두 이 대학살의 범죄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전쟁과 폭력, 경쟁을 통해 역사가 발전했다는 논리는 결국 욕망을 생의 추동력으로 삼는 인간 본성에 대한 통렬한 반증 외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생명의 본질이 다른 생명을 먹어 자기 생명을 유지하고 종국에는 자기 생명을 다른 생명의 밥으로 내어주는 데 있다고 할진대,
생명 자체가 죽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며, 나약한 개체 생명으로서는이 먹고 먹히는 사슬을 벗어날 도리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파괴하는 생명의 수레바퀴는 그 밑에 깔린 개체 생명들의 선악 관념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위대한 종교적 통찰은 이러한 고통과 시련을 부정하지 않으며, 싸구려 섭리로 미화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고통과 시련이 본질적으로 평화와 궁극적 생명에 이르는 길임을 깨닫게 하고, 운명과 마주하여 싸우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줍니다. 종교적 통찰의 신비는 먹고 먹히는 삶의 비극과 처참함을 생명에 대한 찬미와 감사로 바꿔놓는 데 있습니다.
적대적인 대립의 어느 한쪽에 서 있는 한 삶은 아(我)와 비아(非我), 적과 동지가 마지막 지쳐 쓰러질 때까지 싸울 수밖에 없는 투쟁과 상극의 아비규환이고, 그것은 무섭고 잔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대립 자체를 포기할 때 마음은 믿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으며, 마음의 중심이 이동하면 삶의 무섭고 잔인한 측면은 사라집니다. 그리고 고통도 극복됩니다. 이 때도 역시 우리가 숨쉬고 있는 동안에는 시간에 종속된 존재로서 선악을 판단하고, 어느 한편에 설 수밖에 없지만 이제는 더 이상 '옛 나'가 아니라 삶의 허무와 두려움을 극복한 '달라진 나'로서, 대립과 증오를 넘어선 '생(生)의 자비로운 투사'로서 싸울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잔인하고도 고통스러운 현실은 성서가 뿌리내린 삶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구약성서는 이집트의 압제 아래서 신음하던 노예들과 나라 없는 민족으로 떠돌던 유대인들의 힘겨운 삶을 근간으로 하고 있으며, 신약성서는 로마제국에 의해 정치범으로 처형당한 사람을 구원자로 믿었던 불온한 집단의 기록입니다. 성서는 '하느님 없음'의 현실 속에서 하느님을 붙들고 하느님과 함께 현실을 돌파해나가려고 했던 사람들의 삶의 고백입니다. 하느님 없는 세상 속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믿음의 역설이 성서의 증언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역사와 삶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늘 하느님의 정의가 문제됩니다.
포탄에 두 발목이 잘려나간 피투성이 어린 딸을 끌어안은 아버지의 가슴속에 하느님의 정의는 있습니까? 두 발 없이 가시밭 투성이 인생 길을 걸어가야 할 어린 딸의 미래에 하느님은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할 수 있습니까? 전통적으로 이러한 질문들에서 이원론적 신학이
생겨났습니다. 선신과 악신을 가정하는 이원론적 신학은 인간이 세상 안에서 경험하는 악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신정론(神正論)적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생겨났습니다. 악한 현상들을 초래하고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악의 근원으로서 신적 존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탄이니 악마니 하는 개념들은 이렇게 해서 생겨났습니다.
역사의 밑바닥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둘로 나뉘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에게 세상은 적과 동지로, 빛과 어둠으로, 진리와 거짓으로, 하느님과 악마로 나뉘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서에 보면, 특히 구약성서 시편이나 열왕기 등에 원수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시편은 삶의 어두운 골짜기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이 부르짖는 탄식과 하느님을 향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내용, 구원에의
갈망 같은 것이 절절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의 시들은 비슷한 경험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줍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시편에는 원수가 비참하게 죽기를 야훼 하느님의 이름으로 기원하고, 그의 후손들까지 처참하게 살육 당하기를 기원하는
내용들이 많이 나옵니다. 같은 시라도 궁정 현자들이 쓴 잠언이 점잖고 절제된 감성을 보여주는 반면, 시편의 시들은 거칠고 억압된 분노의 감정 같은 것들을 표출시킵니다. 아마도 이것은 시편이 불의한 압제자들 밑에서 고통받았던 이스라엘 민중들의 자리에서 쓰여진 시들이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예수도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인 사두개파와 바리새파 사람들을 향해 지독한 욕을 퍼부었습니다. 예수는 그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 독사의 자식들, 뱀들"이라는 비난을 서슴지 않았고, "눈먼 자들, 위선자들"이라고 하며 화가 있으라고 말씀했습니다.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땅에 죄 없이 흘린 모든 피가 그들에게 돌아가리라고 저주했습니다.(마태25:35)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서도 세상이 온통 둘로 나뉘어진
것처럼 말했습니다. 요한은 세계가 위와 아래, 영과 육, 진리와 거짓, 빛과 어둠으로 처음부터 나뉘어져 있었던 것처럼 말했고, 영원 전부터 하느님에게 속한 세계와 하느님에게 속하지 않은 세계가 나뉘어진 것처럼 말했습니다. 아마 요한복음서에서 이처럼 이분법적인 언어가 많이 사용된 것도 요한복음서를 탄생시킨 요한공동체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인해 유대교 당국으로부터 끔찍한 박해를 겪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구약성서의 시편에서부터 신약성서의 예수에 이르기까지 성서는 결코 삶의 현장으로부터 뒷짐 지고 물러나서 고통과 상처를 모르는 체하지 않습니다. 폭풍처럼 불어닥치는 재난과 갈등, 그 속에서 불길처럼 솟구쳐 올라오는 증오의 감정, 비탄, 외로움. 성서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보여줍니다.
박해받고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적과 동지로, 흑과 백으로 나누어서 보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분법적인 세계관이 삶과 인간에 대한 궁극적인 인식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이들의 결핍된 세계관이 그 삶의 자리에서 이해가 되고, 양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과거와 달리 사회 정치적으로 가진 자, 지배자의 위치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이런 이분법적이고 근본주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추악합니다. 그들은 아무리 복잡한 논리를 구사한다해도 사실은 달랑 손가락 세 개만 가지고 세상을 재단합니다. 그들이 보는 세상은 첫째, 저 인간은 내게 득이 되는가, 둘째 저 인간은 내게 해가 되는가, 셋째 저 인간은 내게 해도, 득도 안 되는가, 이 세 가지입니다.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은 여기서 끝납니다. 이것은 세상을 사는 아메바적인 태도이며, 노예의 생존본능일 따름입니다.
노예가 노예근성을 갖는 것은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해해줄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노예근성을 가지게 되면 그것은 만인에게 재앙입니다. 그래서 지금 전 인류가 재앙 속에 있습니다. 소설가 움베르토 에코는 과거 인류가 오랜 문화적, 역사적 삶을 통해 근친상간을 금기시하는 제2의 천성을 형성함으로써 생존할 수 있었듯이 이제는 전쟁을 무조건 금기시하는 제2의 천성을 형성해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만일 인류가 이러한 제2의 천성을 발전시키지 못한다면, 지구상의 사라진 종으로 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서의 세계는 서로 대립해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상대편을 저주하는 데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성서는 마치 세상에 아무런 갈등이나 대립, 모순이 없는 것처럼 초연하게 천상의 아름다움이나 내적 세계에 침잠해버리지도 않지만, 증오와 분노의 감정에 함몰되어버리지도 않습니다. 신약성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둘로 분열된 세계가 화해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합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평화이며, 양쪽으로 갈라진 세계를 하나로 만드셨다고 감동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셨다고 했습니다. 서로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느님과 화해시키려고 했다고 합니다.
요한복음서에서도 예수는 둘로 분열된 세계 사이를 왕래합니다. 요한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하느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서 위로부터 아래로, 하늘로부터 세상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위로, 하느님께로 다시 돌아갈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서에서 그리스도는 하느님으로부터, 위로부터 '보냄 받은 분'이라는 독특한 칭호를 얻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이원론적으로 나뉘어진 세계의 긍정적인 한 축에 속하는 분으로서 "위로부터" 아래로 왔고, 다시 위로 돌아가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바로 이 위와 아래를 연결하는 통로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처럼 적대적으로 대립하던 두 세계가 서로 상대방을 향해 겨누고 있던 칼날이 둘 사이를 왕래하는 그리스도로 인해 무뎌지고, 신학적으로는 요한의 이원론이 반대되는 양극적인 개념들의 한계를 넘어서게 된다는 점입니다.
요한복음 3,14-15에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과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인자가 들려야 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예수가 십자가에 올려지는 것을 나타냅니다. 광야에서 모세가 뱀을 지팡이 위에 올렸듯이 예수도 십자가 위에 올려져야 하며, 이것은 사람들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요한은 16절에서 하느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요한은 예수가 십자가에 올려진 사건을 하느님의 사랑의 행위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16은 우리가 어린 시절 주일학교 때부터 입버릇처럼 외워온 구절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통해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기 때문에 사실 우리는 그 말이 내포하고
있는 날카로움과 기괴함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참으로 창피하고 낭패스러운 사건입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이라고까지 생각했을 정도로 위대했던 한 남자, 자신과 타인 사이에 있는 경계를 완전히 해소시켜버린 사람, 완전한 사랑의 모범을 보여준 사람.
그런 예수가 벌거벗기고 피 흘린 채 나무에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런 실패와 수치의 십자가가 생명을 얻기 위한 길이고,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말했습니다. 희생자의 피흘린 모습을 가리키며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한 최초의 신학자일 것입니다. 최초의 이 인식은 참으로 위대한 것입니다. 여기서 요한은 십자가로 "올려지다" "들려지다"라는 의미로 υψουν 이라는 동사를 사용했는데 요한복음에서 이 동사는 십자가로 올려지는 것과 하늘로 올려지는 것 둘 다를 의미합니다. 본래 예수가 십자가에 올려지는 것과 부활 이후 공중으로 승천하는 것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사건이고, 가령 누가는 이 둘을 분명히 구분해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뇌리 속에는 예수가 공중으로 승천하는 누가복음의 극적인 장면이 뚜렷이 남아 있습니다. 누가는 십자가에 예수가 올려지는 것과 승천을 분명히 구분해서 두 개의 서로 다른 장면으로 묘사하고, "올려졌다"는 동사는 승천이라는 의미, 즉 하늘로 올려졌다는 의미로만 사용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하늘로 올리우는 승천과 십자가에 올려진다는 이중적인 의미로 υψουν 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요한의 독특한 신학적 인식이 드러납니다. 예수가 십자가 위로 올려지는 것은 그가 이전에 하느님과 함께 누렸던 영광에로
되돌아가는 것이며, 실은 하늘을 향한 움직임, 즉 승천이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십자가로 올려지는 것과 하늘로 올려지는 것의 시간적인 선후관계를 구별할 수는 있었지만, 신학적으로 이 둘이 뗄 수 없는 하나임을 알고 있었고, 이러한 인식을 "올려졌다", υψουν이라는 독특한 말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υψουν이라는 한 단어로 두 사건이 묘사됨으로써 시간적인 선후관계는 뒤로 밀려나는 대신 요한의 독창적인 신학적 인식이 전면에 부각되었습니다. 참혹한 십자가가 곧 영광에로 올려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이 독특하게 사용한 "영광받음"이라는 말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승천과 같은 일련의 사건들을 지칭할 때 "영광스럽게 하다", δοξαζειν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이 말은 하느님의 구원행위 전체를 가리키며,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아니라 부활과 승천까지도 포함합니다. 원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승천은 시차를 가지고 진행되는 서로 다른 사건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요한복음 17장 5절에서 마지막 죽음을 앞둔 예수는 하느님께 "아버지,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누리던 그 영광으로, 나를 아버지 앞에서 영광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여기서 영광 받게 해달라는 예수의 기도는 십자가에 올려지고 부활하고 승천하는 일련의 과정을 하느님께서 시작해달라는 기도일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요한이 부활과 승천뿐만이 아니라 십자가와 죽음까지도 하나로 통합해서 "영광받음"이라는 한 마디 말로 표현했다는 점입니다.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대조적이기까지 한 사건들을 요한은 본질적으로 하나로 파악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요한의 신학적 천재성 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요한은 십자가에 올려지는 것과 하늘 하느님에게로 올려지는 승천을 본질적으로 동일한 한 사건으로 이해했고,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과 부활 승천하는 것을 "영광받음"이라는 하나의 단일한 과정으로 이해했습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성공과 실패, 삶과 죽음을 하나로 받아들였고, 빛과 어둠처럼 극명하게 대조되어 보이는 두 가지를 신학적으로 통전된 하나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요한은 승천이나 영원한 생명 같은 빛나고 영광스러운 것들을 고통스러운 십자가와 연결시켰습니다. 그것들은 각기 구분은 되지만 뗄 수 없이 통합된 하나입니다. 십자가 없이 승천도 없고, 십자가 없이 영원한 생명도 없습니다. 이 점에서 십자가는 이미 그 안에 승천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종말론적 구원의 실현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한 신학의 틀을 받아들인다면, 삶과 고통에 대한 인간의 태도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요한은 고통 뒤에 축복된 미래가 있으리라는 허황된 약속을 하지 않습니다. 현재의 삶은 괴롭지만 죽고 난 다음에 천당에서 영원한 복을 누리리라는 뻔한 약속도 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고통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삶의 냉혹함으로부터 도피하거나 거짓된 미사여구로 삶을 미화하지 않으면서 심리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요한은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시간의 무상성 한가운데서 영원한 하느님의 생명을 발견하라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이 제시하는 삶의 방식은 영웅적입니다.
덧없는 생명들이 전쟁의 포화 속에서 듣는 것은 고통의 비명소리이며,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 깔린 개인에게 시간의 주인인 하느님은 무자비하고 냉혹하게 느껴집니다. 박해받으며 고통 당하는 사람들에게 보이는 세상은 둘로 분열된 세상입니다. 그들에게 세상은 적과 동지, 빛과 어둠, 진리와 거짓으로 분열되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보아야 그들이 겪는 갈등과 고통, 모순이 이해되고, 변혁에 대한 열망을 불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이러한 고뇌와 시련에 대한 깊은 감수성을 보여주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든 대립을 포기하라고
합니다. 선과 악, 차안과 피안, 남성과 여성, 나와 너의 온갖 대립을 포기하고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삶이 지니는 무섭고 잔인한 측면을 나타내며, 먹고 먹힘으로써 생명을 이어가는 삶의 현장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요한의 예수는 십자가를 통해 두려움을 극복하고, 광대하고 무자비한 우주의 비극을 자기 존재의 존엄성 속에서 해소시킵니다. 예수는 생존투쟁의 희생제물이었습니다.
그러나 희생양 예수에게서 먹고 먹히는 생존투쟁이 서로 살리는 공동체적 삶의 원리로 바뀌었습니다. 요한은 수치스럽고 처참한 십자가를 영광받음, 하느님께로 올리움이라고 해석했고, 더 나아가서 그것을 하느님의 사랑의 행위(3,16)로 이해했습니다. 이것은 분열된 세계의 갈등과 모순을 냉엄하게 보면서 동시에 그러한 대립의 근저에 깔려 있는 우주와 역사의 영원한 본질을 깨달은 자에게만 가능한 인식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역설과 아이러니를 내포합니다.
요한은 고난을 당하는 하느님,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친 하느님에 대해 말함으로써 생명의 역설적인 진리를 웅변적으로 설파했습니다. 하느님인 그리스도의 육체는 죽음의 형틀인 십자가에 못 박힙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는 다름 아닌 생명나무였습니다. 요한은 죽음의 형틀인
십자가에 이미 부활의 생명꽃이 핀 것을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식이 가능할 때 비로소 인간은 진정으로 생명, 즉 살라는 명령에 충실해질 수 있습니다. 이 살라는 명령 앞에서는 어떠한 개체의 불안도, 두려움도, 고통도 이차적입니다. 아마도 요한은 고통스러운 박해와 시련 가운데서 이러한 생명의 본질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시련 속에 있더라도 개체적인 나의 생명이 보다 큰 대자연과 우주, 하느님의 생명과 맞닿아 있음을 깨닫고, 우주와 대자연, 시간의 주인인 하느님의 지엄한 명령인 생명(生命), 즉 살라는 명령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끝없는 탐욕과 패권적 지배를 관철하기 위해서 약자들을 희생시키는 전쟁을 일부 기독교인들이 정당화하고 지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자신의 안전과 안락한 삶을 위해 타인을 고통과 죽음의 길로 몰아넣는 전쟁이 성서적으로 지지되고 정당화될 수 있습니까? 성서는 고통 당하는 희생자들의 삶 속에서 구원의 길이 열린다고 말합니다. 권력자들과 군인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은 예수의 길이 구원의 길이고 영광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에서 영광을 받는 길이 열리고 생명이 온전히 실현됩니다. 희생자 그리스도에게서 구원의 길이 열리고, 죽음의 형틀인 십자가가 사실은 생명나무였듯이 이 잔인한 시대에도 하느님은 벼랑끝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이라크 사람들, 잿더미 속에서 남은
살림붙이를 끌어 모으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여인들과 함께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갈 것이고, 새로운 야곱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지구 저편에서 불어오는 전쟁과 죽음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생명을 생각합니다. 돌이켜보면 인류 역사 속에서 전쟁이 없었던 적이 얼마나 있었습니까? 지구는 늘 전쟁의 화약연기와 포탄소리, 죽어 가는 사람들의 비명소리로 얼룩졌습니다. 역사가들은 평화와 공존이 아니라 전쟁과 경쟁을 통해 인류의 문명이 발전했다고 합니다. 어느 시대에나 군인들이 점령지에 깃발을 꽂고 나면 제일 먼저 달려오는 것이 장사꾼들이었으니 이 말을 부정하기도 어렵습니다.
가까이는 반도체나 핸드폰, 컴퓨터 등이 군의 통신장비 발전과정에서 나온 부산물이고, 통조림이나 장기 식품 저장 기술도 군용 식량 저장 방법에 대한 연구과정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메소포타미아 문명 역시 전쟁과 함께 발전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인류 최초로 문자를 고안해내고, 교통 운송 수단을 발전시켰으며, 화폐 경제를 이루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사방으로 트인
지형적 특성 때문에 문명의 초기부터 민족의 이동과 접근이 용이했고, 이로 인해 일찍부터 전쟁이 끊이지 않았으며, 수많은 민족들이 부침을 거듭하며 이 지역의 패권을 다투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그 특성상 역동적이고 변화와 교류를 추구하며, 보편성을 띠게 되었습니다. 여러 민족이 부딪치고 갈등하는 과정에서 보편적인 규범의 필요성 때문에 일찍이 법을 발전시키게 되었고, 서로 다른 민족과 문화에서 유래한 다양한 물자를 교류하는 과정에서 화폐를 발전시켰으며, 전쟁시 물자와 무기 운송의 필요성 때문에 마차, 전차 등을 발전시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문명이라는 것이 그 끝을 알 수 없는 맹목적인 욕망과 맞닿아 있다면, 문명은 전쟁을 피할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한편으로는 인간 욕망의 허망함과 어리석음을 실감하게 되지만, 동시에 어째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타자를 희생시키면서 자기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지, 욕망의 본질은 무엇이며, 죄는 무엇인가 하는 근원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더욱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지구 저편의 전쟁장면을 보노라면, 최고의 과학적 두뇌와 정치 엘리트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어리석을 수 있는지, 고도의 집약된 자본과 기술, 고급두뇌들이 최고의 능력을 발휘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고작 인간을 대량학살 하는 일인지 인간성 자체에 대해 근원적인 회의가 듭니다. 한편으로 대량학살의 피로 유지되는 문명의 야만성에 절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득권을 추구하는 나의 삶의 방식이 결국은 이 전쟁의 공범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릅니다. 숱한 정치적 수사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이 사실은 석유확보와 21세기 미국의 새로운 세계 질서 재편을 위한 것이며, 미국 국민의 70% 이상이 전쟁을 지지한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결국은 끝없는 물질적 욕망과 지배욕이 이 가공할 전쟁과 폭력의 광기 근저에 깔려 있는 원흉이며, 이 점에서 우리 모두 이 대학살의 범죄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전쟁과 폭력, 경쟁을 통해 역사가 발전했다는 논리는 결국 욕망을 생의 추동력으로 삼는 인간 본성에 대한 통렬한 반증 외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생명의 본질이 다른 생명을 먹어 자기 생명을 유지하고 종국에는 자기 생명을 다른 생명의 밥으로 내어주는 데 있다고 할진대,
생명 자체가 죽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며, 나약한 개체 생명으로서는이 먹고 먹히는 사슬을 벗어날 도리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파괴하는 생명의 수레바퀴는 그 밑에 깔린 개체 생명들의 선악 관념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위대한 종교적 통찰은 이러한 고통과 시련을 부정하지 않으며, 싸구려 섭리로 미화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고통과 시련이 본질적으로 평화와 궁극적 생명에 이르는 길임을 깨닫게 하고, 운명과 마주하여 싸우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줍니다. 종교적 통찰의 신비는 먹고 먹히는 삶의 비극과 처참함을 생명에 대한 찬미와 감사로 바꿔놓는 데 있습니다.
적대적인 대립의 어느 한쪽에 서 있는 한 삶은 아(我)와 비아(非我), 적과 동지가 마지막 지쳐 쓰러질 때까지 싸울 수밖에 없는 투쟁과 상극의 아비규환이고, 그것은 무섭고 잔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대립 자체를 포기할 때 마음은 믿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으며, 마음의 중심이 이동하면 삶의 무섭고 잔인한 측면은 사라집니다. 그리고 고통도 극복됩니다. 이 때도 역시 우리가 숨쉬고 있는 동안에는 시간에 종속된 존재로서 선악을 판단하고, 어느 한편에 설 수밖에 없지만 이제는 더 이상 '옛 나'가 아니라 삶의 허무와 두려움을 극복한 '달라진 나'로서, 대립과 증오를 넘어선 '생(生)의 자비로운 투사'로서 싸울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잔인하고도 고통스러운 현실은 성서가 뿌리내린 삶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구약성서는 이집트의 압제 아래서 신음하던 노예들과 나라 없는 민족으로 떠돌던 유대인들의 힘겨운 삶을 근간으로 하고 있으며, 신약성서는 로마제국에 의해 정치범으로 처형당한 사람을 구원자로 믿었던 불온한 집단의 기록입니다. 성서는 '하느님 없음'의 현실 속에서 하느님을 붙들고 하느님과 함께 현실을 돌파해나가려고 했던 사람들의 삶의 고백입니다. 하느님 없는 세상 속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믿음의 역설이 성서의 증언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역사와 삶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늘 하느님의 정의가 문제됩니다.
포탄에 두 발목이 잘려나간 피투성이 어린 딸을 끌어안은 아버지의 가슴속에 하느님의 정의는 있습니까? 두 발 없이 가시밭 투성이 인생 길을 걸어가야 할 어린 딸의 미래에 하느님은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할 수 있습니까? 전통적으로 이러한 질문들에서 이원론적 신학이
생겨났습니다. 선신과 악신을 가정하는 이원론적 신학은 인간이 세상 안에서 경험하는 악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신정론(神正論)적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생겨났습니다. 악한 현상들을 초래하고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악의 근원으로서 신적 존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탄이니 악마니 하는 개념들은 이렇게 해서 생겨났습니다.
역사의 밑바닥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둘로 나뉘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에게 세상은 적과 동지로, 빛과 어둠으로, 진리와 거짓으로, 하느님과 악마로 나뉘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서에 보면, 특히 구약성서 시편이나 열왕기 등에 원수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시편은 삶의 어두운 골짜기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이 부르짖는 탄식과 하느님을 향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내용, 구원에의
갈망 같은 것이 절절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의 시들은 비슷한 경험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줍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시편에는 원수가 비참하게 죽기를 야훼 하느님의 이름으로 기원하고, 그의 후손들까지 처참하게 살육 당하기를 기원하는
내용들이 많이 나옵니다. 같은 시라도 궁정 현자들이 쓴 잠언이 점잖고 절제된 감성을 보여주는 반면, 시편의 시들은 거칠고 억압된 분노의 감정 같은 것들을 표출시킵니다. 아마도 이것은 시편이 불의한 압제자들 밑에서 고통받았던 이스라엘 민중들의 자리에서 쓰여진 시들이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예수도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인 사두개파와 바리새파 사람들을 향해 지독한 욕을 퍼부었습니다. 예수는 그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 독사의 자식들, 뱀들"이라는 비난을 서슴지 않았고, "눈먼 자들, 위선자들"이라고 하며 화가 있으라고 말씀했습니다.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땅에 죄 없이 흘린 모든 피가 그들에게 돌아가리라고 저주했습니다.(마태25:35)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서도 세상이 온통 둘로 나뉘어진
것처럼 말했습니다. 요한은 세계가 위와 아래, 영과 육, 진리와 거짓, 빛과 어둠으로 처음부터 나뉘어져 있었던 것처럼 말했고, 영원 전부터 하느님에게 속한 세계와 하느님에게 속하지 않은 세계가 나뉘어진 것처럼 말했습니다. 아마 요한복음서에서 이처럼 이분법적인 언어가 많이 사용된 것도 요한복음서를 탄생시킨 요한공동체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인해 유대교 당국으로부터 끔찍한 박해를 겪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구약성서의 시편에서부터 신약성서의 예수에 이르기까지 성서는 결코 삶의 현장으로부터 뒷짐 지고 물러나서 고통과 상처를 모르는 체하지 않습니다. 폭풍처럼 불어닥치는 재난과 갈등, 그 속에서 불길처럼 솟구쳐 올라오는 증오의 감정, 비탄, 외로움. 성서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보여줍니다.
박해받고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적과 동지로, 흑과 백으로 나누어서 보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분법적인 세계관이 삶과 인간에 대한 궁극적인 인식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이들의 결핍된 세계관이 그 삶의 자리에서 이해가 되고, 양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과거와 달리 사회 정치적으로 가진 자, 지배자의 위치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이런 이분법적이고 근본주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추악합니다. 그들은 아무리 복잡한 논리를 구사한다해도 사실은 달랑 손가락 세 개만 가지고 세상을 재단합니다. 그들이 보는 세상은 첫째, 저 인간은 내게 득이 되는가, 둘째 저 인간은 내게 해가 되는가, 셋째 저 인간은 내게 해도, 득도 안 되는가, 이 세 가지입니다.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은 여기서 끝납니다. 이것은 세상을 사는 아메바적인 태도이며, 노예의 생존본능일 따름입니다.
노예가 노예근성을 갖는 것은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해해줄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노예근성을 가지게 되면 그것은 만인에게 재앙입니다. 그래서 지금 전 인류가 재앙 속에 있습니다. 소설가 움베르토 에코는 과거 인류가 오랜 문화적, 역사적 삶을 통해 근친상간을 금기시하는 제2의 천성을 형성함으로써 생존할 수 있었듯이 이제는 전쟁을 무조건 금기시하는 제2의 천성을 형성해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만일 인류가 이러한 제2의 천성을 발전시키지 못한다면, 지구상의 사라진 종으로 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서의 세계는 서로 대립해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상대편을 저주하는 데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성서는 마치 세상에 아무런 갈등이나 대립, 모순이 없는 것처럼 초연하게 천상의 아름다움이나 내적 세계에 침잠해버리지도 않지만, 증오와 분노의 감정에 함몰되어버리지도 않습니다. 신약성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둘로 분열된 세계가 화해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합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평화이며, 양쪽으로 갈라진 세계를 하나로 만드셨다고 감동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셨다고 했습니다. 서로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느님과 화해시키려고 했다고 합니다.
요한복음서에서도 예수는 둘로 분열된 세계 사이를 왕래합니다. 요한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하느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서 위로부터 아래로, 하늘로부터 세상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위로, 하느님께로 다시 돌아갈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서에서 그리스도는 하느님으로부터, 위로부터 '보냄 받은 분'이라는 독특한 칭호를 얻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이원론적으로 나뉘어진 세계의 긍정적인 한 축에 속하는 분으로서 "위로부터" 아래로 왔고, 다시 위로 돌아가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바로 이 위와 아래를 연결하는 통로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처럼 적대적으로 대립하던 두 세계가 서로 상대방을 향해 겨누고 있던 칼날이 둘 사이를 왕래하는 그리스도로 인해 무뎌지고, 신학적으로는 요한의 이원론이 반대되는 양극적인 개념들의 한계를 넘어서게 된다는 점입니다.
요한복음 3,14-15에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과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인자가 들려야 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예수가 십자가에 올려지는 것을 나타냅니다. 광야에서 모세가 뱀을 지팡이 위에 올렸듯이 예수도 십자가 위에 올려져야 하며, 이것은 사람들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요한은 16절에서 하느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요한은 예수가 십자가에 올려진 사건을 하느님의 사랑의 행위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16은 우리가 어린 시절 주일학교 때부터 입버릇처럼 외워온 구절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통해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기 때문에 사실 우리는 그 말이 내포하고
있는 날카로움과 기괴함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참으로 창피하고 낭패스러운 사건입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이라고까지 생각했을 정도로 위대했던 한 남자, 자신과 타인 사이에 있는 경계를 완전히 해소시켜버린 사람, 완전한 사랑의 모범을 보여준 사람.
그런 예수가 벌거벗기고 피 흘린 채 나무에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런 실패와 수치의 십자가가 생명을 얻기 위한 길이고,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말했습니다. 희생자의 피흘린 모습을 가리키며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한 최초의 신학자일 것입니다. 최초의 이 인식은 참으로 위대한 것입니다. 여기서 요한은 십자가로 "올려지다" "들려지다"라는 의미로 υψουν 이라는 동사를 사용했는데 요한복음에서 이 동사는 십자가로 올려지는 것과 하늘로 올려지는 것 둘 다를 의미합니다. 본래 예수가 십자가에 올려지는 것과 부활 이후 공중으로 승천하는 것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사건이고, 가령 누가는 이 둘을 분명히 구분해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뇌리 속에는 예수가 공중으로 승천하는 누가복음의 극적인 장면이 뚜렷이 남아 있습니다. 누가는 십자가에 예수가 올려지는 것과 승천을 분명히 구분해서 두 개의 서로 다른 장면으로 묘사하고, "올려졌다"는 동사는 승천이라는 의미, 즉 하늘로 올려졌다는 의미로만 사용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하늘로 올리우는 승천과 십자가에 올려진다는 이중적인 의미로 υψουν 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요한의 독특한 신학적 인식이 드러납니다. 예수가 십자가 위로 올려지는 것은 그가 이전에 하느님과 함께 누렸던 영광에로
되돌아가는 것이며, 실은 하늘을 향한 움직임, 즉 승천이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십자가로 올려지는 것과 하늘로 올려지는 것의 시간적인 선후관계를 구별할 수는 있었지만, 신학적으로 이 둘이 뗄 수 없는 하나임을 알고 있었고, 이러한 인식을 "올려졌다", υψουν이라는 독특한 말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υψουν이라는 한 단어로 두 사건이 묘사됨으로써 시간적인 선후관계는 뒤로 밀려나는 대신 요한의 독창적인 신학적 인식이 전면에 부각되었습니다. 참혹한 십자가가 곧 영광에로 올려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이 독특하게 사용한 "영광받음"이라는 말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승천과 같은 일련의 사건들을 지칭할 때 "영광스럽게 하다", δοξαζειν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이 말은 하느님의 구원행위 전체를 가리키며,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아니라 부활과 승천까지도 포함합니다. 원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승천은 시차를 가지고 진행되는 서로 다른 사건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요한복음 17장 5절에서 마지막 죽음을 앞둔 예수는 하느님께 "아버지,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누리던 그 영광으로, 나를 아버지 앞에서 영광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여기서 영광 받게 해달라는 예수의 기도는 십자가에 올려지고 부활하고 승천하는 일련의 과정을 하느님께서 시작해달라는 기도일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요한이 부활과 승천뿐만이 아니라 십자가와 죽음까지도 하나로 통합해서 "영광받음"이라는 한 마디 말로 표현했다는 점입니다.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대조적이기까지 한 사건들을 요한은 본질적으로 하나로 파악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요한의 신학적 천재성 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요한은 십자가에 올려지는 것과 하늘 하느님에게로 올려지는 승천을 본질적으로 동일한 한 사건으로 이해했고,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과 부활 승천하는 것을 "영광받음"이라는 하나의 단일한 과정으로 이해했습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성공과 실패, 삶과 죽음을 하나로 받아들였고, 빛과 어둠처럼 극명하게 대조되어 보이는 두 가지를 신학적으로 통전된 하나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요한은 승천이나 영원한 생명 같은 빛나고 영광스러운 것들을 고통스러운 십자가와 연결시켰습니다. 그것들은 각기 구분은 되지만 뗄 수 없이 통합된 하나입니다. 십자가 없이 승천도 없고, 십자가 없이 영원한 생명도 없습니다. 이 점에서 십자가는 이미 그 안에 승천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종말론적 구원의 실현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한 신학의 틀을 받아들인다면, 삶과 고통에 대한 인간의 태도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요한은 고통 뒤에 축복된 미래가 있으리라는 허황된 약속을 하지 않습니다. 현재의 삶은 괴롭지만 죽고 난 다음에 천당에서 영원한 복을 누리리라는 뻔한 약속도 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고통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삶의 냉혹함으로부터 도피하거나 거짓된 미사여구로 삶을 미화하지 않으면서 심리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요한은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시간의 무상성 한가운데서 영원한 하느님의 생명을 발견하라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이 제시하는 삶의 방식은 영웅적입니다.
덧없는 생명들이 전쟁의 포화 속에서 듣는 것은 고통의 비명소리이며,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 깔린 개인에게 시간의 주인인 하느님은 무자비하고 냉혹하게 느껴집니다. 박해받으며 고통 당하는 사람들에게 보이는 세상은 둘로 분열된 세상입니다. 그들에게 세상은 적과 동지, 빛과 어둠, 진리와 거짓으로 분열되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보아야 그들이 겪는 갈등과 고통, 모순이 이해되고, 변혁에 대한 열망을 불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이러한 고뇌와 시련에 대한 깊은 감수성을 보여주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든 대립을 포기하라고
합니다. 선과 악, 차안과 피안, 남성과 여성, 나와 너의 온갖 대립을 포기하고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삶이 지니는 무섭고 잔인한 측면을 나타내며, 먹고 먹힘으로써 생명을 이어가는 삶의 현장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요한의 예수는 십자가를 통해 두려움을 극복하고, 광대하고 무자비한 우주의 비극을 자기 존재의 존엄성 속에서 해소시킵니다. 예수는 생존투쟁의 희생제물이었습니다.
그러나 희생양 예수에게서 먹고 먹히는 생존투쟁이 서로 살리는 공동체적 삶의 원리로 바뀌었습니다. 요한은 수치스럽고 처참한 십자가를 영광받음, 하느님께로 올리움이라고 해석했고, 더 나아가서 그것을 하느님의 사랑의 행위(3,16)로 이해했습니다. 이것은 분열된 세계의 갈등과 모순을 냉엄하게 보면서 동시에 그러한 대립의 근저에 깔려 있는 우주와 역사의 영원한 본질을 깨달은 자에게만 가능한 인식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역설과 아이러니를 내포합니다.
요한은 고난을 당하는 하느님,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친 하느님에 대해 말함으로써 생명의 역설적인 진리를 웅변적으로 설파했습니다. 하느님인 그리스도의 육체는 죽음의 형틀인 십자가에 못 박힙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는 다름 아닌 생명나무였습니다. 요한은 죽음의 형틀인
십자가에 이미 부활의 생명꽃이 핀 것을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식이 가능할 때 비로소 인간은 진정으로 생명, 즉 살라는 명령에 충실해질 수 있습니다. 이 살라는 명령 앞에서는 어떠한 개체의 불안도, 두려움도, 고통도 이차적입니다. 아마도 요한은 고통스러운 박해와 시련 가운데서 이러한 생명의 본질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시련 속에 있더라도 개체적인 나의 생명이 보다 큰 대자연과 우주, 하느님의 생명과 맞닿아 있음을 깨닫고, 우주와 대자연, 시간의 주인인 하느님의 지엄한 명령인 생명(生命), 즉 살라는 명령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끝없는 탐욕과 패권적 지배를 관철하기 위해서 약자들을 희생시키는 전쟁을 일부 기독교인들이 정당화하고 지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자신의 안전과 안락한 삶을 위해 타인을 고통과 죽음의 길로 몰아넣는 전쟁이 성서적으로 지지되고 정당화될 수 있습니까? 성서는 고통 당하는 희생자들의 삶 속에서 구원의 길이 열린다고 말합니다. 권력자들과 군인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은 예수의 길이 구원의 길이고 영광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에서 영광을 받는 길이 열리고 생명이 온전히 실현됩니다. 희생자 그리스도에게서 구원의 길이 열리고, 죽음의 형틀인 십자가가 사실은 생명나무였듯이 이 잔인한 시대에도 하느님은 벼랑끝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이라크 사람들, 잿더미 속에서 남은
살림붙이를 끌어 모으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여인들과 함께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갈 것이고, 새로운 야곱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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