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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2:25-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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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홍순택 목사 |
참고 : | 새길교회 2004.11.28 주일설교 |
오늘은 대림절, 또는 대강절 첫주입니다. 구원자를 기다리고 하나님나라를 기대하며 바라는 마음의 자세를 성찰해보는 때가 아닌가 합니다.
먼저 저와 제 가족의 이야기를 고백하겠습니다. 저는 지난 2003년 봄에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8월 제 아내가 첫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한달 두달이 지나면서 저희 부부는 꿈을 쌓아 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만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이 아이는 이랬으면 좋겠다, 이렇게 키우고 싶다, 이것을 가르치고 싶다, 이렇게 해 주고 싶다 등등.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 저희 부부는 여러 기대의 목록들을 늘려가고 있었습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그 수많은 기대의 목록들은 태어날 아이가 정신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지극히 일반적-흔히들 정상이라고 말하는-일 것은 물론 오히려 평균 이상의,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뛰어난 아이이어야 한다는 저희 맘대로의 전제를 깔고 있는 그런 기대와 바램들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저희 부부의 기대와 바램을 넘어뜨리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임신 5개월째에 접어들던 2004년, 올해군요, 1월 24일. 정기검진을 갔을 때였습니다. 10년만의 한파가 찾아왔다고 전국이 난리를 치던 그 토요일. 저희가 다니던 병원도 수도가 터져 물바다를 이루었고 의사와 간호사들은 물을 빼내고 진료기기들을 바로잡느라 어수선했습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지만 여전히 어수선한 가운데 진료가 시작되었습니다.
다른 날보다 유달리 진지하게, 그리고 길게 초음파 화면을 들여다보던 의사 선생님이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문제가 있는 것 같아 보이니 큰 병원에 가보라고 진단서를 써주었습니다.
그날로부터 저희는 근심과 걱정, 그리고 희망이 뒤범벅된 길고도 긴 석달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기형아에 정통한 의사 선생님이 있다는 모 대학병원으로 결국 옮기게 되었고, 임산부들이 할 수 있는 검사는 거의 다 하게 되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저희에게 일반적인 태아들하고는 분명히 다르긴 한데 현재 검사 결과들로는 뭐라고 단정지어 말할 수 없으니 희망을 갖고 기다리자고 했습니다. 부모의 심정이라는 게 그런 걸까요. 신중하자는 뜻으로 한 의사선생님 말씀이 저희에게는 마치 아이에게 중대한 문제가 있다는 확정적인 말로 비쳐졌습니다. 그렇게 아이의 얼굴을 직접 대하게 되기 전까지, 아이의 모습을 초음파라는 불완전한 거울을 통해 희미하게 볼 수밖에 없었던 그 3개월 동안은 저희에게 매우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내는 과도한 양수과다 증세로 두 차례나 입원하여 팔뚝만한 주사기를 꽂고 양수를 뽑아내야만 했습니다. 다른 임산부들보다 훨씬 무거운 몸으로 아내는 참 많이 힘들어 했습니다. 그러나 몸의 힘든 것보다 저희를, 저보다도 아내를 힘들게 했던 것은 태중의 아이에 대한 걱정이었습니다. 게다가 아이가 엄마 배 속에서 한달 정도는 빨리 자라 예정일보다 보름이나 일찍 수술로 세상을 보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고맙게도 태어난지 이제 7개월이 된 그 아이는 지금까지는 건강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예정된 출산일이 다가올수록 저희들은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기다리는 이 아이를 건강하게 만나게 해 주시면 더 좋겠습니다. 건강하게 만나게 해 주신다면 이 땅의 약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아이로 자라도록 돕겠습니다. 그러나 ‘약한 모습’을 가진 아이로 만나게 하신다면, 그래도 감사할 수 있는 저희가 되게 해 주십시오. 그 또한 받아들이고 그 아이를 하나님께서 주신 이웃으로 섬기겠습니다. 또한 어떤 경우이든지 약한 사람들이 좀 더 배려받으며 살 수 있는 이 땅이 되도록 저희 부부가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하겠습니다.”
1월 24일부터 4월 30일까지의 3개월 남짓한 시간. 지금 돌이켜보니 마치 3년이 지나버린 것 같습니다. 그 시간은 저희를 넘어지게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넘어짐의 시간을 통해, 저희 부부는 아이에 대해 늘려가던 저희의 기대와 바램의 목록들을 많이 버리게 되었습니다. 다른 기대들을 포기하며 그저 건강하게, 조금은 덜 힘들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신체적-정신적 조건을 갖고 태어나게 되기만을 바라게 되었습니다. 정말이지 그 당시에는 다른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저 건강하게 태어나주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희 부부가 갖고 있던 기대와 바램으로 아이를 바라보기 보다는 조금은 더 아이 그 자체만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를 아무런 조건 없이, 한 인간으로 존중하는 법을 조금은 일찍 배우게 되었다고 할까요. 이런 점에서 그 아이는 넘어져있던 저희 부부를 일어나도록 해 주었습니다. 사람을, 아무리 내 자식이라고 할지라도, 대할 때에 나의 기대와 바램에 맞추어 상대방을 바라보는 저희들의 모습을 넘어뜨리고 조금은 더 순수하게 상대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일으켜 세워준 것입니다.
그 아이는 저희 부부를 이렇게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서게도 하도록 해주었습니다.
평범한 저희 아이의 이야기를 예수님의 이야기와 연결시키는 해석이 얼토당토 않은 것이겠습니다만 이제 성서의 이야기로 눈을 돌려보려 합니다.
성경은 시므온이 유대의 법도에 따라 정결례를 받으러 성전에 찾아온 어린 예수를 품에 안고 축복한 후에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 가운데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서게도 하려고 세우심을 받았으며, 비방받는 표징이 되게 하려고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 그리고 칼이 당신의 마음을 찌를 것입니다. - 그리하여 많은 사람의 마음 속 생각들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눅 2:34~35)
시므온의 이같은 예언이 역사적인 사실인지의 여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라는 한 사람이 시므온의 말처럼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서게도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라는 한 사람을 통해 온전히 드러나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성서의 여러 구절들은 예수가 건강하고 총명하며 사랑받을만한 아이로 자라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랬던 예수가 어느날 갑자기 부모를 떠나 집을 나가 광야에서 생활합니다. 고향인 갈릴리로 돌아와서는 집에 들어오지도 않고 사람들을 불러 모아 이곳저곳 다니며 예언자처럼 떠들고 다닙니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그런 일이 결코 바라던 일이 아니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리아와 요셉도 부모이게에 그저 아들 예수가 아무런 탈 없이 큰 무리없이 무난하게 잘 살아주기를 바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자식이 걱정되어 찾아간 어머니 마리아에게 예수는 “누가 내 부모고 형제냐”라는 기가 막힌 말을 합니다. 그러더니 결국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당시 권력층인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 그리고 제사장들과 사사건건 충돌하다가 결국 반역죄라는 믿을 수 없는 죄목으로 로마군대에 의해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어버리고 맙니다. 보통의 부모들이 갖는 기대와 바램을 이렇게도 처참히 무너뜨리는 자식이 있을런지요. 예수는 부모인 마리아와 요셉의 가슴을 시므온의 예언처럼 칼로 찌르고 맙니다. 넘어지게, 그것도 크게 넘어지게 합니다.
그 뿐입니까. 예수는 공생애를 시작한 후 많은 사람들에 의해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아로 여겨지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를 메시아로 여기던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메시아라고 여기던 바로 그 예수에 의해 넘어지고 맙니다. 한 사람이 예수에게 로마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을 들이댈 때, 예수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속 시원한 대답을 해주기를 원했던 사람들은 예수의 애매한 대답에 넘어지고 맙니다. 간음 중이던 여인을 현장에서 잡아와 예수에게 데려왔을 때, 예수가 조상들이 전해 준 모세의 율법을 엄정히 지켜주는 수호자가 되어주기를 기대하던 사람들은 “죄 없는 자가 먼저 치라.”는 율법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예수의 말에 넘어지고 맙니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하나님의 단순한 명령쯤은 지켜주리라 기대했던 예수가 불경하게도 제자들과 이삭을 훑어먹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리사이들도 넘어집니다.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예수가 적어도 부활이 없다는 자신들의 진리에 동조해주기를 바랬던 사두가이들도 부활을 말하는 예수의 말에 넘어졌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들은 예수가 메시아라는 기대를 버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를 가까이서 따르던 제자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께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에 자신들을 예수가 앉을 왕좌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혀달라고 합니다. 예수가 자신들의 공로를 인정해 줄 것이라 기대했던 형제는 낮은 자가 높이 된다는, 너희들은 결코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는 예수의 기대 밖의 대답에 넘어집니다. 천하의 베드로도 변화산에서 이곳에 머물자고 하다가 혼나고, 예수께서 십자가 지는 것을 극구 반대하다가 사단이라는 지독한 비판을 듣고 넘어집니다.
그리고 유대의 정치적 혁명과 해방을 꿈꾸던 가리옷 유다 같은 이들은 예수에게 실망하고 넘어져 그를 팔아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은 자신의 가슴을 칼로 찌르고 맙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저의 경우를 포함하여, 성서의 인물들이 예수로 인해 넘어지는 데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다 자기들의 기대와 바램에 따라 예수를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자신들의 기대와 바램을 이루어주는 구원자가 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가 자신들이 원하는 모습대로 이루어지기를, 자신들이 원하는 사람들로만 구성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철저한 준수를 원하던 사람들은 간음한 여인이나 안식일에 이삭을 훑어먹은 사람은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했었을 것입니다. 열심당원들은 로마라는 악의 세력을 철저히 물리친 이후에 오는 것이 하나님나라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피의 희생도 불가피하다고, 악의 세력에 속한 사람들을 죽이는 것도 필요하다고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이런 기대와 바램들을 모두 넘어지게 한 것은 아닐런지요. 예수께서 보여주신 것은 인간의 기대와 바램으로 이루어지는, 남을 희생시키며 이루어지는, 자신의 생각에 들어맞는 사람들만이 모여 이루어지는 하나님나라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철저히 실패하는 듯 보이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보여준 하나님나라는 바로 자신을 죽음에까지 내어주며 자신을 포기하는 사랑을 통해서 확장되어지는 나라였던 것은 아닐까요. 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은 예수로 인해 넘어졌다가도 다시 예수로 인해 일어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십자가가 처절한 실패가 아니라 부활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그렇게 깨닫고서 또한 예수께서 그러셨듯이 사랑의 힘이 이끄는 희생과 죽음으로 두려움을 이겨내고 이끌려 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나와 철저히 다른 사람까지도 품을 수 있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벽을 넘을 수 있는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이렇게 예수를 통해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난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님나라가 넓혀져 온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다시 제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과정을 통해 저는 제 아이에게 저의 욕심과 기대를 투영하기보다는 아이의 존재 자체를 존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악하고 또 약한 인간이기에, 앞으로 저희 아이가 자라는 동안 저는 또 욕심을 부리게 될 것입니다. 아이의 소질과 적성과 무관하게 제 기대와 바램을 아이의 미래에 반영하려고 아이를 닦달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또 넘어지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신 소중한 인간, 고귀한 생명을 내 자식이라며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식에게 뿐이겠습니까. 제가 앞으로 인생을 살아나가면서 만나는 사람들을, 또 세상을 제가 원하는 방식대로만 재단하며 받아들이고 제 마음대로 어떻게 해 볼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나라는 이런 것이라고, 예수의 가르침은 이런 것이라고 독선적으로 떠드는 실수를 범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넘어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철저히 넘어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지만 가리옷 유다처럼 넘어지는 것에 그치지 말고 베드로가 그랬듯이, 또 성서에는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수많은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이 그랬듯이 저도 다시 일어서게 되길 원합니다.
순간 순간 끊임없이 저를 돌아보며 성찰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저를 넘어뜨리며 하나님께서 저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저의 기대와 바램, 욕심과 편견으로 이웃을, 하나님나라를 제멋대로 재단하는 못된 습성을 끊임없이 반성적으로 성찰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렇게 제 악함과 약함을 하나님께서 도우시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먼저 저와 제 가족의 이야기를 고백하겠습니다. 저는 지난 2003년 봄에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8월 제 아내가 첫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한달 두달이 지나면서 저희 부부는 꿈을 쌓아 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만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이 아이는 이랬으면 좋겠다, 이렇게 키우고 싶다, 이것을 가르치고 싶다, 이렇게 해 주고 싶다 등등.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 저희 부부는 여러 기대의 목록들을 늘려가고 있었습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그 수많은 기대의 목록들은 태어날 아이가 정신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지극히 일반적-흔히들 정상이라고 말하는-일 것은 물론 오히려 평균 이상의,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뛰어난 아이이어야 한다는 저희 맘대로의 전제를 깔고 있는 그런 기대와 바램들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저희 부부의 기대와 바램을 넘어뜨리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임신 5개월째에 접어들던 2004년, 올해군요, 1월 24일. 정기검진을 갔을 때였습니다. 10년만의 한파가 찾아왔다고 전국이 난리를 치던 그 토요일. 저희가 다니던 병원도 수도가 터져 물바다를 이루었고 의사와 간호사들은 물을 빼내고 진료기기들을 바로잡느라 어수선했습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지만 여전히 어수선한 가운데 진료가 시작되었습니다.
다른 날보다 유달리 진지하게, 그리고 길게 초음파 화면을 들여다보던 의사 선생님이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문제가 있는 것 같아 보이니 큰 병원에 가보라고 진단서를 써주었습니다.
그날로부터 저희는 근심과 걱정, 그리고 희망이 뒤범벅된 길고도 긴 석달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기형아에 정통한 의사 선생님이 있다는 모 대학병원으로 결국 옮기게 되었고, 임산부들이 할 수 있는 검사는 거의 다 하게 되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저희에게 일반적인 태아들하고는 분명히 다르긴 한데 현재 검사 결과들로는 뭐라고 단정지어 말할 수 없으니 희망을 갖고 기다리자고 했습니다. 부모의 심정이라는 게 그런 걸까요. 신중하자는 뜻으로 한 의사선생님 말씀이 저희에게는 마치 아이에게 중대한 문제가 있다는 확정적인 말로 비쳐졌습니다. 그렇게 아이의 얼굴을 직접 대하게 되기 전까지, 아이의 모습을 초음파라는 불완전한 거울을 통해 희미하게 볼 수밖에 없었던 그 3개월 동안은 저희에게 매우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내는 과도한 양수과다 증세로 두 차례나 입원하여 팔뚝만한 주사기를 꽂고 양수를 뽑아내야만 했습니다. 다른 임산부들보다 훨씬 무거운 몸으로 아내는 참 많이 힘들어 했습니다. 그러나 몸의 힘든 것보다 저희를, 저보다도 아내를 힘들게 했던 것은 태중의 아이에 대한 걱정이었습니다. 게다가 아이가 엄마 배 속에서 한달 정도는 빨리 자라 예정일보다 보름이나 일찍 수술로 세상을 보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고맙게도 태어난지 이제 7개월이 된 그 아이는 지금까지는 건강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예정된 출산일이 다가올수록 저희들은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기다리는 이 아이를 건강하게 만나게 해 주시면 더 좋겠습니다. 건강하게 만나게 해 주신다면 이 땅의 약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아이로 자라도록 돕겠습니다. 그러나 ‘약한 모습’을 가진 아이로 만나게 하신다면, 그래도 감사할 수 있는 저희가 되게 해 주십시오. 그 또한 받아들이고 그 아이를 하나님께서 주신 이웃으로 섬기겠습니다. 또한 어떤 경우이든지 약한 사람들이 좀 더 배려받으며 살 수 있는 이 땅이 되도록 저희 부부가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하겠습니다.”
1월 24일부터 4월 30일까지의 3개월 남짓한 시간. 지금 돌이켜보니 마치 3년이 지나버린 것 같습니다. 그 시간은 저희를 넘어지게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넘어짐의 시간을 통해, 저희 부부는 아이에 대해 늘려가던 저희의 기대와 바램의 목록들을 많이 버리게 되었습니다. 다른 기대들을 포기하며 그저 건강하게, 조금은 덜 힘들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신체적-정신적 조건을 갖고 태어나게 되기만을 바라게 되었습니다. 정말이지 그 당시에는 다른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저 건강하게 태어나주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희 부부가 갖고 있던 기대와 바램으로 아이를 바라보기 보다는 조금은 더 아이 그 자체만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를 아무런 조건 없이, 한 인간으로 존중하는 법을 조금은 일찍 배우게 되었다고 할까요. 이런 점에서 그 아이는 넘어져있던 저희 부부를 일어나도록 해 주었습니다. 사람을, 아무리 내 자식이라고 할지라도, 대할 때에 나의 기대와 바램에 맞추어 상대방을 바라보는 저희들의 모습을 넘어뜨리고 조금은 더 순수하게 상대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일으켜 세워준 것입니다.
그 아이는 저희 부부를 이렇게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서게도 하도록 해주었습니다.
평범한 저희 아이의 이야기를 예수님의 이야기와 연결시키는 해석이 얼토당토 않은 것이겠습니다만 이제 성서의 이야기로 눈을 돌려보려 합니다.
성경은 시므온이 유대의 법도에 따라 정결례를 받으러 성전에 찾아온 어린 예수를 품에 안고 축복한 후에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 가운데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서게도 하려고 세우심을 받았으며, 비방받는 표징이 되게 하려고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 그리고 칼이 당신의 마음을 찌를 것입니다. - 그리하여 많은 사람의 마음 속 생각들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눅 2:34~35)
시므온의 이같은 예언이 역사적인 사실인지의 여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라는 한 사람이 시므온의 말처럼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서게도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라는 한 사람을 통해 온전히 드러나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성서의 여러 구절들은 예수가 건강하고 총명하며 사랑받을만한 아이로 자라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랬던 예수가 어느날 갑자기 부모를 떠나 집을 나가 광야에서 생활합니다. 고향인 갈릴리로 돌아와서는 집에 들어오지도 않고 사람들을 불러 모아 이곳저곳 다니며 예언자처럼 떠들고 다닙니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그런 일이 결코 바라던 일이 아니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리아와 요셉도 부모이게에 그저 아들 예수가 아무런 탈 없이 큰 무리없이 무난하게 잘 살아주기를 바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자식이 걱정되어 찾아간 어머니 마리아에게 예수는 “누가 내 부모고 형제냐”라는 기가 막힌 말을 합니다. 그러더니 결국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당시 권력층인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 그리고 제사장들과 사사건건 충돌하다가 결국 반역죄라는 믿을 수 없는 죄목으로 로마군대에 의해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어버리고 맙니다. 보통의 부모들이 갖는 기대와 바램을 이렇게도 처참히 무너뜨리는 자식이 있을런지요. 예수는 부모인 마리아와 요셉의 가슴을 시므온의 예언처럼 칼로 찌르고 맙니다. 넘어지게, 그것도 크게 넘어지게 합니다.
그 뿐입니까. 예수는 공생애를 시작한 후 많은 사람들에 의해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아로 여겨지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를 메시아로 여기던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메시아라고 여기던 바로 그 예수에 의해 넘어지고 맙니다. 한 사람이 예수에게 로마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을 들이댈 때, 예수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속 시원한 대답을 해주기를 원했던 사람들은 예수의 애매한 대답에 넘어지고 맙니다. 간음 중이던 여인을 현장에서 잡아와 예수에게 데려왔을 때, 예수가 조상들이 전해 준 모세의 율법을 엄정히 지켜주는 수호자가 되어주기를 기대하던 사람들은 “죄 없는 자가 먼저 치라.”는 율법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예수의 말에 넘어지고 맙니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하나님의 단순한 명령쯤은 지켜주리라 기대했던 예수가 불경하게도 제자들과 이삭을 훑어먹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리사이들도 넘어집니다.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예수가 적어도 부활이 없다는 자신들의 진리에 동조해주기를 바랬던 사두가이들도 부활을 말하는 예수의 말에 넘어졌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들은 예수가 메시아라는 기대를 버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를 가까이서 따르던 제자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께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에 자신들을 예수가 앉을 왕좌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혀달라고 합니다. 예수가 자신들의 공로를 인정해 줄 것이라 기대했던 형제는 낮은 자가 높이 된다는, 너희들은 결코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는 예수의 기대 밖의 대답에 넘어집니다. 천하의 베드로도 변화산에서 이곳에 머물자고 하다가 혼나고, 예수께서 십자가 지는 것을 극구 반대하다가 사단이라는 지독한 비판을 듣고 넘어집니다.
그리고 유대의 정치적 혁명과 해방을 꿈꾸던 가리옷 유다 같은 이들은 예수에게 실망하고 넘어져 그를 팔아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은 자신의 가슴을 칼로 찌르고 맙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저의 경우를 포함하여, 성서의 인물들이 예수로 인해 넘어지는 데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다 자기들의 기대와 바램에 따라 예수를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자신들의 기대와 바램을 이루어주는 구원자가 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가 자신들이 원하는 모습대로 이루어지기를, 자신들이 원하는 사람들로만 구성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철저한 준수를 원하던 사람들은 간음한 여인이나 안식일에 이삭을 훑어먹은 사람은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했었을 것입니다. 열심당원들은 로마라는 악의 세력을 철저히 물리친 이후에 오는 것이 하나님나라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피의 희생도 불가피하다고, 악의 세력에 속한 사람들을 죽이는 것도 필요하다고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이런 기대와 바램들을 모두 넘어지게 한 것은 아닐런지요. 예수께서 보여주신 것은 인간의 기대와 바램으로 이루어지는, 남을 희생시키며 이루어지는, 자신의 생각에 들어맞는 사람들만이 모여 이루어지는 하나님나라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철저히 실패하는 듯 보이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보여준 하나님나라는 바로 자신을 죽음에까지 내어주며 자신을 포기하는 사랑을 통해서 확장되어지는 나라였던 것은 아닐까요. 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은 예수로 인해 넘어졌다가도 다시 예수로 인해 일어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십자가가 처절한 실패가 아니라 부활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그렇게 깨닫고서 또한 예수께서 그러셨듯이 사랑의 힘이 이끄는 희생과 죽음으로 두려움을 이겨내고 이끌려 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나와 철저히 다른 사람까지도 품을 수 있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벽을 넘을 수 있는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이렇게 예수를 통해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난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님나라가 넓혀져 온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다시 제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과정을 통해 저는 제 아이에게 저의 욕심과 기대를 투영하기보다는 아이의 존재 자체를 존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악하고 또 약한 인간이기에, 앞으로 저희 아이가 자라는 동안 저는 또 욕심을 부리게 될 것입니다. 아이의 소질과 적성과 무관하게 제 기대와 바램을 아이의 미래에 반영하려고 아이를 닦달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또 넘어지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신 소중한 인간, 고귀한 생명을 내 자식이라며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식에게 뿐이겠습니까. 제가 앞으로 인생을 살아나가면서 만나는 사람들을, 또 세상을 제가 원하는 방식대로만 재단하며 받아들이고 제 마음대로 어떻게 해 볼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나라는 이런 것이라고, 예수의 가르침은 이런 것이라고 독선적으로 떠드는 실수를 범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넘어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철저히 넘어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지만 가리옷 유다처럼 넘어지는 것에 그치지 말고 베드로가 그랬듯이, 또 성서에는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수많은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이 그랬듯이 저도 다시 일어서게 되길 원합니다.
순간 순간 끊임없이 저를 돌아보며 성찰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저를 넘어뜨리며 하나님께서 저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저의 기대와 바램, 욕심과 편견으로 이웃을, 하나님나라를 제멋대로 재단하는 못된 습성을 끊임없이 반성적으로 성찰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렇게 제 악함과 약함을 하나님께서 도우시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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