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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를/무엇을 기다리는가?

이사야 강남순............... 조회 수 2470 추천 수 0 2008.08.10 00:5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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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사11:1-11 
설교자 : 강남순 목사 
참고 : 새길교회 2004.12. 5 주일설교 
까뮤의 작품『시지프스의 신화』는 “진정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자살이다”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자발적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인 자살이야말로 진정한 철학적 문제라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이 삶에 대한 의미물음이야말로 진정으로 우리가 씨름해야 하는 주제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더 이상 살아갈 의미가 없다고 느낄 때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습니다. 인간과 동물은 여러 가지 점에서 유사성을 지니고 있지만, 유독 인간만이 삶의 의미물음을 물으면서 자기 스스로의 삶을 포기하기도 하는 존재라는 점이 인간을 여타의 동물과 구분하게도 합니다. 더 이상 이 삶의 의미를 줄 어떤 것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느낄 때, 인간은 자신의 목숨을 끊습니다. 다른 여러분들은 무엇을 기다리고 계십니까.

사실상 “인간은 왜 사는가?”라는 물음에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절대적인 보편적 답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어디에서 또는 누구에게서 찾아야 할 지가 객관적인 자료로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에 던져진 우리의 삶이란 그 누구도 객관화하여 그 목적이나 의미성을 나열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전혀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류의 역사에서 무수한 사람들은 이 대답되어질 수 없는 물음을 끊임없이 물어왔습니다. 세련된 분석과 언어를 통하여서든지 또는 투박하고 정리되지 않은 언어를 통해서든지 간에 사람들은 자신이 왜 이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묻게 되며, 자신의 삶의 자리에 따라서 이 삶의 여정을 유의미한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다양한 시도들을 합니다. 그래서 ‘살아감’이란 어찌보면 ‘기다림’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강림절의 아침에 ‘기다림’에 대하여 여러분과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제가 “기다림”을 생각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작품이 있다면, 그것은〈고도우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dot)입니다. 아일랜드출신의 작가 사뮤엘 베케트의 노벨상 수상 작품인,〈고도우를 기다리며〉는 “아무 것도 된 일이라곤 없어(nothing to be done)"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등장인물도 다섯 명밖에 안 되고 두 막으로 구성된 너무나 단조로운 듯한 이 희곡이 많은 사람들에게 이 삶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묻게 합니다.

디디(Didi)라고 불리우는 블라디미르(Vladimir)와 고고(Gogo)라고 불리는 에스트라곤(Estragon)은 어느 시골길에 서 있는 나무 밑에서 ‘고도우(Godot)'를 기다립니다. 이 희곡의 표면적 구성을 보면 1막과 2막이 거의 유사하며 지극히 단조롭습니다. 디디와 고고가 단둘이 나와 이야기를 나누면, 뒤 이어 포조와 럭키가 등장하여 이들과 이야기를 하고 사라집니다. 그리고 나서 하루가 끝나갈 무렵이면 남자 아이가 등장하여 오늘은 고도우가 오지 못하지만 내일은 올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떠납니다. 그 뒤 다시 홀로 남아 고도우를 기다리는 디디와 고고... 그들이 언제부터 고도우를 기다렸는지, 언제까지 기다릴 것인지, 오지도 않는 고도우를 기다리느라고 멀리 떠나지 못하고 왜 끊임없이 다시 그 자리로 되돌아오는지, 또는 도대체 고도우가 누구인지를 그들은 알지 못하며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는 고도우를 기다리지만 정작 그 중요한 메시지가 무엇인가는 전혀 알지 못한 채, ‘끝없는 기다림’ 그 자체가 그들의 삶이 되어버립니다. 표면적인 단순성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들이 나누는 대화는 사실상 우울하고 복잡한 삶의 이야기들이며, 그들은 그 무거운 이야기들을 가벼운 코미
였습니다.

제가 흥미롭게 읽은 부분 중의 하나는 에스트라곤보다는 좀 더 철학적인 듯 해 보이는 블라디미르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상에 있었던 두 도둑에 대한 이야기를 가지고 분석하는 것입니다. 그는 인간에게서 구원의 확률은 얼마만큼 될까를 성서에 대한 ‘객관적’ 분석을 가지고 유추해 봅니다. 예수의 십자가상에서의 사건을 모두 목격했을 네 복음서의 기자들 중 두 사람만 이 두 명의 도둑 이야기를 기록하였다는 점, 그 중의 한 복음서는 두 도둑이 모두 예수를 모욕함으로서 저주를 받았음을 예시하고 있고, 다른 복음서 하나만이 한 명의 도둑은 저주를 그리고 다른 한 명은 구원을 받았다고 함으로서(누가복음만이 두 도둑 중 한 명이 예수와 함께 낙원에 갈 것임을 기록하고 있음), 거룩한 책인 성서조차도 인간의 구원이 사실상 우연한 기회에 근거한 것임을 암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인간들이란 “참으로 지독하게 무식한 원숭이들(bloody ignorant apes)"이라고 에스트라곤은 한탄합니다. 결국 블라디미르의 산술방식을 가지고 유추해 보자면 인간이 구원받을 확률은 25%인 셈입니다. 파스칼의 말대로 신을 믿는 것은 손해 볼 일이 없는 일인가.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마지막에 안전한 편에 선 것이 되고, 설사 신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아무도 상관하지 않을 테니 결국 신을 믿는 것은 확률상 손해 볼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이렇듯 인간의 삶이란 우연한 기회들과 임의성에 뿌리내리고 있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1막에서는 장님이 아니었는데, 2막에서는 장님이 되어 나오는 포조에게 블라디미르가 언제부터 맹인이 되었느냐고 묻자 포조는 “나에게 묻지마. 맹인에게는 시간개념이 없단 말이야”라고 말합니다. 고도우의 메신저인 소년도 그가 이전에 이곳에 왔었는가 아닌가라는 기억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해서 우리가 매일 매일 그토록 집착하고 매어 달리고 있는 시간이란 사실상 아무런 의미를 주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이 희곡에 나오는 모든 이들에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시간개념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므로 결국 ‘시간’이란 무의미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 무의미성의 시간위에서 펼쳐지는 인간의 삶이란 당연히 무의미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작픔은 왜 그들은 고도우를 기다리는 것이며, 도대체 고도우는 누구/무엇이란 말인가. 이 끝없는 공허한 기다림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다른 선택이 있는가라는 물음을 묻게 합니다. 2막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곤은 이 공허한 기다림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 죽음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자살을 시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둘은 사실상 단호한 용기가 없어서 죽음을 선택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기다림은 다시 끝도 없이 계속됩니다.〈고도우를 기다리며〉가 주는 것은 답이 아니라 끊임없는 물음들입니다. 방랑자같은 두 사람이 정체불명의 고도우를 기다리는 끝없는 기다림의 공백을 메꾸기 위하여 나누는 무수한 이야기들은, 삶의 의미물음이라는 힘겨운 과제와의 대면을 애써 회피하려고 하는 우리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비극적인 코메디같은〈고도우를 기다리며〉는 우리의 일상적 세계를 돌연히 넘어서서 우리의 살아있음의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 물음들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이러한 물음들과 대면하는 것은 얼마나 참으로 커다란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우리의 반복적 삶의 의미에 대하여 문득 돌아보게 하는 물음들, 우리가 삶의 지고의 목적으로 설정했던 것들로부터 단호히 자신을 분리시켜서 그것에 대하여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는 물음들―바로 그러한 물음들을〈고도우를 기다리며〉는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강림절이란 사실상 이러한 근원적인 물음들과 진지하고 치열하게 대면함으로서, 우리는 이 삶에 무엇을 그리고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가에 찾아내는 여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떠한 사람들이 신실한 종교인이며 또는 인간인가에 대하여 저는 ‘끊임없이 진지한 물음 묻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들’이라고 제 나름대로 기준을 설정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경험이나 삶의 의미성에 대한 경험은 정형화된 정답을 통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물음묻기를 통해서 비로소 그 문이 열리기 시작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간에―종교의 이름을 빌리든, 그 어떤 사상이나 이론의 힘을 빌려서든― 삶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들에 ‘정답’을 가지고 있다고 호언하는 이들에 대하여 저는 전혀 신뢰를 갖지 못합니다. 그런데 신학자인 저를 아주 암담하게 느끼게 하는 것 중의 하나는 종교들이 무수한 물음표들을 제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획일적인 정답을 교리화하여서 앵무새같이 암기하게 만들고, 물음 묻는 이들을 ‘신앙 없는 이들’, 그래서 ‘구원받지 못할 이들’로 정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물음 묻기를 통해서만이 종교가 지녀온 인간의 삶의 의미성에 대한 성찰과 통찰이 비로소 살아있는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며, 그 물음묻기의 여정에서 어쩌면 우리는 불필요한 집착들로부터 벗어나서 보다 진정한 의미의 세계에 자신을 기투할 수 있는 삶에의 열정을 지니게 될 지 모릅니다.

〈고도우를 기다리며〉에서 고도우가 도대체 무엇을 상징하는지 저자도 또한 이 희곡의 등장인물들도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고도우가 신이거나 또는 희망일 것이라고 짐작해 볼 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고도우의 출현이 이 무의미성의 삶을 유의미적인 것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에 두 주인공은 매어 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외부로부터 오는 어떤 것에 의하여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이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곤을 그 공허한 기다림속에 붙잡아 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도우는 한 번도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오늘은 오지 않지만 내일은 올 것이다’라는 공허한 메시지만이 반복되어 전달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우리의 삶의 유의미성의 표지, 즉 희망과 구원의 표지를 우리자신 외부에서 객관적으로 그리고 수동적으로 찾고자 하는 시도들 자체에 물음표를 던져야 하지 않을까요. 희망이나 구원이라는 것은 사실상 나 자신 밖의 어떤 것이 나에게 그저 던져주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말입니다.

이 반복적이고 구차스러운 듯한 인간의 무의미성의 삶을 유의미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진정한 희망과 구원의 빛은 어디에서 오는가를 탐색하기 위해, 우리는 이제 나무 밑에서 하염없이 고도우를 기다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도우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차린 후 그 끝없이 공허한 기다림의 자리를 떠나고자 마음먹고 ‘이제 이 자리를 떠나가자(Let's go)'라고 서로 말하면서도 결국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소심하고 비겁한 듯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곤의 모습에서 저는 저의 모습,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 모두는 조금씩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곤을 닮은 이들인 것입니다. 무의미를 온몸으로 느끼면서도, 그것을 벗어나서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자신을 기투하고자 하는 용기와 열정을 상실한 채, 그저 맹목적으로 습관과도 같이 이 일상적 삶을 이어갑니다.

우리의 삶을 유의미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어떤 종교적 교리나 굳어진 예식도 아니고, 그 종교가 던져주는 삶의 희망과 구원에 대한 정형화된 정답은 더더군다나 아닙니다. ‘우리는 왜 사는가’라는 그 깊은 물음에 대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라고 단답형 식으로 조성된 객관적 도식에 의하여, 이 삶이 지니고 있는 무수한 어두움의 심연들, 부조리의 그늘들, 절망스러운 공허함들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의 비유대로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서 그 밭을 사는 것―이것이 구원의 표상인 하늘나라의 의미라면, 분명히 우리 삶의 희망과 구원의 의미는 ‘고도우의 출현’ 에 의하여 우리 자신 밖에서 그저 수동적으로 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온 존재를 바칠 수 있는 의미를 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과도 같은 그 어떤 것을 ‘스스로’ 찾아내어 그것에 자신의 삶을 기꺼이 던지는 것이 아닐까요. 이 부조리의 삶, 유한성의 삶, 무의미성의 삶을 넘어서서 자신 속에 살아있음의 불길을 끊임없이 활활 타오르게 하는 그 어떤 것을 진정으로 갈망하고 찾고자 하는 그 치열함 속에서 비로소 우리는 고도우를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저는 조금은 압니다. 이 일상성의 삶이라는 것이 한 인간이 지니고 있는 구원과 희망에의 절절한 갈망을 얼마나 빈번히 초라하고 구차하게 만드는 가를. 그래서 나무 밑에서 끝도 없이 고도우를 기다리는 그 공허한 기다림 속에 안주하는 것이 차라리 편한 삶일 수 있다는 생각하게 만드는지를. 그리고 처절한 고독함과 씨름해야 하고 자신의 삶에의 책임성을 엄격하게 요청하는 ‘자유’를 부여받느니, 차라리 물음표를 제거한 종교가 주는 ‘정답‘속에서 그저 타율적이고 수동적으로 고도우를 기다리는 편이 훨씬 낫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지를...

그러나 나무 밑에 하염없이 앉아 있는 우리에게 이 삶의 무의미성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줄 고도우는 영원히 오지 않습니다. 삶의 무의미성과 유의미성의 경계에서 우리가 어느 쪽으로 발을 디딜 것인가의 문제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 스스로가 치열하게 씨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여정에서 끊임없이 던져지는 물음표를 귀하게 여기는 종교, 근원적인 물음들과 대면하게 하는 용기를 주고 그 물음에의 답을 찾기 위한 각자의 고독한 여정에 함께 동반하는 교회―이러한 종교와 교회만이 박제화 되지 않고 그 생명력을 끊임없이 지니게 될 것입니다. 나무 밑에 앉아서 맹목적인 기다림 속에 잠겨있는 우리에게 고도우는 그저 불현 듯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나무 밑을 단호히 떠나서는 길목에서 어쩌면 우리는 고도우와 조우하게 될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교회력은 추수감사절이 끝나면 강림절이 시작됩니다.
강림절은 기다림의 절기입니다. 그런데 상업주의와 맞물린 기독교 문화 속에서 이 4주 동안의 ‘기다림’의 절기가 생략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추수감사절이 끝나자마자 백화점들은 크리스마스를 가져옵니다. 곳곳에 크리스마스 캐롤들과 장식품들을 진열함으로서 사람들에게 크리스마스를 빨리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저는 늘 듭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저는 외국에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모임이 열리는 호텔의 로비나 식당에 가니 계속 크리스마스 캐롤을 틀고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캐롤을 계속 들으면서, 저는 이 ‘강림절’이 생략된 크리스마스에 대하여 염려가 되었습니다. 사실상 크리스마스라는 하루는 강림절이라는 4주 동안의 긴 기다림 이후에 오는 것으로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저는 “진정으로 진정한 철학적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자살이다”라고 한 까뮤의 말을 “진정으로 진지한 신앙적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는 무엇을 또는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가라는 것이다”라는 말로 바꾸고 싶습니다. 사실상 우리는 12월만이 아니라, 신앙의 여정이란 끊임없이 자신만의 강림절을 지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들은 성급히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강림의 절기가 생략된 크리스마스는 사실상 오지도 않은 고도우를 온 것처럼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진지하게 강림절을 보낸 사람들이야 말로 비로소 예수의 오심인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자신 속에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강림절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새로운 지평이란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지평입니다. 혼돈과 어두움 속에서 진정으로 희망을 보기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당신이 바로 우리가 기다리던 바로 그 분입니까?”라고 묻는 그 물음과 진지하게 씨름하면서, 이 삶의 희망을 만나기 위한 여정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강림절은 칠흙같은 어두움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볼 수 있게 하는 절기입니다. 이 삶의 어두움 속에서도 치유와 평화와 희망의 근거들을 찾아낼 수 있는 절기입니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은총과도 같이 주어지는 것임을 다시 깨닫게 하는 절기입니다. 강림절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꿈을 키우고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강림절의 말씀인 이사야 11장에서 그리고 있는 그 새로운 세계는 ‘이리와 어린아이가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는’ 진정한 평화의 세계이며, 가난한 사람들을 공의로 재판하고, 억눌린 사람들이 바르게 되는 진정한 정의의 세계, 그래서 모든 종류의 차별과 억압과 소외가 극복되는 정의, 사랑, 평화, 평등의 세계입니다. 예수의 오심은 바로 이러한 세계의 도래를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림절이 단 한번의 절기가 되어서도 안 되며, 예수의 오심은 일회적 사건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예수는 강림절을 지나서 끊임없이 오십니다.
우리의 절망과 고통의 자리에, 우리의 깨어진 삶 속에 예수의 오심은 새로운 치유와 희망으로 오십니다. 여러분들은 이 강림절에 무엇을 또는 누구를 기다리고 계십니까?  왜 우리는 이 강림절에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는 것입니까? 자신의 삶을 유의미한 것으로 만들고, 새로운 세계의 비젼을 이루기 위한 결단과 헌신이 부재한 막연한 기다림 속에서는 고도우는, 진정한 크리스마스는 영원히 오지 않습니다. “이제는 가자”라는 단호한 결단과 헌신에 의해서만 우리는 이 삶의 무의미성 너머에 있는 새로운 세계에 한 걸음 발을 내딛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모든 분들 한분 한분께 이 강림절이 특별한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절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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