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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에서 세상을 넘어

마가복음 정경일............... 조회 수 1896 추천 수 0 2008.08.18 20:17:53
.........
성경본문 : 막6:46 
설교자 : 정경일 형제 
참고 : 새길교회 2005. 1.23 주일설교 
그들과 헤어지신 뒤에,
예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올라가셨다. - 마가복음서 6:46

1. “저 친구, 스님 맞아?”
격동의 1980년대를 보낸 후, 기대했던 사회변화의 좌절과 개인적 삶의 혼란으로 인해 지쳐있던 저는 친구들과 남도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모처럼 번잡한 도시를 떠나는 경험은 즐겁고 신선했습니다. 여행 중 하루는 지리산 남쪽 기슭의 쌍계사를 찾았는데, 고즈넉한 산사의 풍경이 한없이 평온했습니다. 우리가 절 한 구석에 앉아 “참선이나 하며 살면 좋겠다”고 잡담하고 있을 때, 젊은 스님 한 분이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있던 공중전화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습니다. 일부러 들으려 했던 건 아닌데, 주위가 워낙 조용하다보니 그의 통화 내용을 자연스럽게 듣게 되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엄마? 나야. … 응, 잘 지내. 여기 좋아. 모두 잘 대해주고. … 그럼. 밥도 맛있고 좋아. … 네. 잘 지내요. 다시 전화할께.” 통화를 마친 그는 한 번 머쓱하게 우리를 돌아보더니 총총걸음으로 그의 수행처로 돌아갔습니다. 잠시 후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습니다. “저 친구, 스님 맞아?” 출가 수행자라면 세상과 인연을 끊어야 한다고 믿던 우리에게 그는 수행이 한참 부족한 새내기 스님으로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그날의 경험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겉보기에 종교적인 삶이 사실은 가장 세속적일 수 있고, 반대로 세속적으로 보이는 삶이 실은 가장 종교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였습니다. 그리고 물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세속적 인연을 끊어야만 하는 것일까? 깨달음의 장소는 세상 바깥에 있는 것일까? 세상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2. 세상 밖으로
물론 구도자들이 세상을 떠나 사막이나 산 속으로 들어가는 데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세상이 그들의 관심을 분산시키기 때문이고, 또한 삶의 의미와 존재의 신비를 깨닫기 위한 집중적 수행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인도인들의 전통적 삶의 방식처럼 인생에서 한번 쯤 세상을 떠나 일정기간 수행해 보는 것은 오히려 바람직한 일로 보입니다. 하지만 세상을 떠난다는 것이 단지 물리적 공간의 이동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공간적 이동만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면 떠났던 모든 이들이 깨달음을 얻어야 했겠지요. 세상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세속적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어떤 수행자가 평생을 사막에서 홀로 산다 해도, 그 마음이 여전히 소유와 명예, 권력을 다투는 데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그는 결코 세상을 떠난 게 아닙니다. 외적으로 경건한 삶에 몰두하는 이들에게서 세속적 욕망의 거친 결을 발견하는 것도 이 때문이지요. 무소유와 자비, 평정심의 실천을 서원한 스님들이 대형 사찰의 주지 자리나 종단 요직을 확보하기 위해 문중을 동원한 유혈 폭력사태를 초래하는 것이나, 스스로 성별(聖別)된 존재라고 믿는 목사들이 갈등과 증오의 악순환을 부추기는 것도, 겉으로는 세속의 질서를 벗어났다고 하지만 그 마음이 여전히 세상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죄지을 조건인 관계의 기회가 줄어들면 세속적 욕망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또한 그런 욕망들은 쉽게 드러나기 마련이어서 어떻게든 방지하거나 극복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세속적 욕망이 종교적 외양을 띠고 나타날 때는 걷잡을 수 없는 불길처럼 모든 걸 태워버릴 수도 있습니다. 움베르토 에코는『장미의 이름』에서 종교적 진리에 대한 열정이 가장 잔인한 세속적 욕망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수도원의 장서각 책임자인 수도사 호르헤가 탐구심 강한 수사들을 살해했던 것은, 복음서에서 예수는 한 번도 웃지 않았다는 엄숙주의에 대한 맹신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덧없는 이름’일뿐인 그 앙상한 진리 때문에 살인의 중죄까지 저질렀던 것이죠. 그래서 연쇄살인을 조사하던 윌리엄 수사는 장서각이 불타는 것을 보며 조수 아드소에게 말합니다.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를 조심하라.” 세상과 담쌓고 지낸다고 해서 세상을 떠날 수 있는 게 아님을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수행자들을 넘어뜨리는 또 다른 욕망은 수행으로 얻은 깨달음이나 종교적 체험의 상태를 모든 것의 완성으로 착각하는 조급함과 자만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오면서 제가 오랫동안 가져왔던 의문은 구원이 어떤 한 순간의 체험으로 완성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등학생 때 저는 친구들을 따라 어느 큰 교회에서 이틀 동안 하는 부흥회에 갔습니다. 첫날 부흥회를 이끌던 목사님은 분위기가 적당히 뜨거워지자, “지금 구원 받을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그 좋다는 걸 주신다기에 저와 친구들은 서둘러 앞으로 나갔지요. 목사님은 제 머리를 배구공 쥐듯 꽉 움켜쥐고 잠깐 큰 소리로 기도하시더니, “이제 구원받았으니 자리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어? 이게 구원인가?’ 하는 싱거운 느낌이 들었지만, 시키는 대로 자리로 돌아와 감사의 기도를 드렸지요. 다음날 예배가 끝날 즈음, 그 목사님은 또 다시 “구원 받을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일어나 또 나가려고 하자 옆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있던 친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며 말했습니다. “야, 너 뭐해? 어제 구원 받았잖아?” 그래도 저는 앞으로 나가 한 번 더 구원을 받았는데, 역시 뭔가 미진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그날 밤 친구들과 자장면을 함께 먹는데, 이미 구원받은 친구들이 저를 무척 안쓰럽게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했던 이유는, 단 한번의 종교적 체험으로 모든 것이 완성된다는 것이 인간 삶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무리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제 자신의 삶을 돌아볼 때 더 분명했습니다. 인간은 체험 이후에도 악을 저지르고 이기적 욕망에 사로잡히기 마련이니까요. 그러니까 특별한 종교적 경험은 자신과 세상에 대해 새롭게 눈뜨고 삶을 개선하는 출발점인 것이지 그 자체로 완성이라고 볼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불교의 조주 선사가 깨달음을 얻은 후 30년을 더 수행했을 때 비로소 깨달음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한 것이나, 예수께서 광야에서 모든 유혹을 극복하셨을 때가 아니라 골고다 언덕에 이르러서야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요?

이렇듯 깨달음, 욕망으로부터의 자유가 그 자체로 구원의 완성이 아니라 이후 전개될 삶에서 입증해야 할 하나의 출발점 내지 전환점이라고 한다면, 구원의 장소는 고립된 수행처가 아니라 관계적 삶이 이루어지는 세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은 종교적 스승들이 세상으로 돌아왔던 것이겠지요. 그런데 이 깨달음의 상태를 벗어나 세상 속으로 돌아오는 것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수행자들이 깨달음의 순간에 체험했을 신비는 어떤 극도의 해방감을 포함했을 테니, 당연히 그 상태에 한없이 머물고 싶은 욕망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붓다도 깨달음을 얻은 후, 세상 사람들은 그의 깨달음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테니 바로 열반에 들라는 마라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물론 그분은 땅을 흔들어 마라를 내치고 사르나트로 걸어가 법을 전했지요. 예수께서도 광야에서 모든 욕망을 극복하셨을 때 천사들이 시중드는 절대평정의 상태에 머물고 싶으셨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 상태에 머물지 않고 체제의 희생자들이 삶을 견디고 있는 갈릴리로 돌아오셨습니다. 당신이 돌아가야 할 세상이 야수처럼 덤벼들며 십자가의 죽음으로까지 몰아갈 것을 예감하면서도.

3. 세상 속에서 세상을 넘어
세속적 욕망을 끊고 세상으로 돌아온 예수의 삶은 한 구도자가 세상 속에서 어떻게 세상을 넘어서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우선 갈릴리로 돌아오신 예수의 삶은 당시 통념에서 볼 때 그리 거룩하지도 종교적이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의 적대자들이 그를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요, 죄인과 세리들의 친구”(마태복음서 11:19)라고 비난할 정도였지요. 이 본문의 우리말 번역은 그래도 부드러운 편인데, ‘포도주를 마시는 자’는 ‘술꾼’으로 번역하는 게 더 정확합니다. 물론 비난자들의 과장된 표현이므로 예수께서 그 정도였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그 비난은 예수의 실제 삶을 어느 정도 반영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즉 예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금욕주의나, 바리새파나 사두개파의 외적 경건과 달리 자유로운 삶을 사셨다는 것이지요.

예수의 공동체도 우리가 흔히 상상하듯 외적으로 경건한 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밀 이삭을 훑어 먹기도 하고, 어쩌다 동조자의 집에 머물게 되면 한바탕 잔치를 벌이며 술과 음식을 즐겼습니다. 게다가 부정한 죄인들과도 허물없이 어울렸지요. 그러니 당시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통념에서도 상당히 파격적 집단이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런 파격을 이끄셨던 것은 종교적 제도와 율법이 비인간적 족쇄가 되어 있는 현실을 용납하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아빠’ 하나님과 하나 됨을 체험한 예수께는 인간과 인간을 갈라놓는 제도와 율법이야말로 가장 세속적인 질서였던 것이지요.

더 나아가 예수께서는 예배와 안식일의 외적 준수마저 흔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분은 제사를 드리기 전에 누군가 자신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는 것이 생각나면, 제사를 그만 두고 먼저 화해부터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 5:23-24). 이를 그만큼 예배는 거룩하게 드려야 하는 거라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지만, 예수의 삶에 비추어볼 때 세상에서 화해를 이루는 것이 예배의 외적 준수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외적 경건을 거침없이 비판한 예언자 전통과도 일치합니다.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못한다면 구별된 시간과 공간에서의 예배는 무의미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께서는 안식일의 율법적 준수보다 사랑의 실천을 중시하셨습니다. 물론 그분도 안식일에는 성전이나 회당에 머물며 편안히 쉬고 싶으셨겠지요. 하지만 안식의 날에도 계속되는 인간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으셨기에 율법을 깨뜨리면서까지 병을 고치셨습니다. 그 사랑이 예수님의 예배였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예수따르미들이 드리는 예배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해 줍니다. 언젠가 미군 범죄를 규탄하는 집회에 갔다가 집행위원장으로 바쁘게 일하고 있던 공동체의 한 형제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그분은 “주일에 집회가 많아 교회에 못 가 미안”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분이 자기의 예배 처소에서 진실한 예배를 드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정치적 행동이든, 문화적 나눔이든, 혹은 자원봉사이든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라면 그것이 곧 예수께서 가르치신 예배일 테니까요.

이처럼 예수께서는 외적 경건과 율법을 거부하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별다른 수행 없이 자유분방하게 사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 속에서 내적 경건을 지키기 위해 광야에서보다 더 철저히 수행하셨습니다. 그분의 가장 중요한 수행은 홀로 하나님을 만나는 고독의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복음서를 읽을 때마다 예수의 3년에는 다른 종교적 성인들의 30년에 해당하는 시간의 밀도가 있음을 느낍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 동안 늘 바쁘게 지내셨고, 심지어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그분 사랑의 분량을 바닥까지 퍼내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쓰러지지 않으셨던 이유는 무한한 사랑의 원천이신 ‘아빠’ 하나님과 소통하는 기도와 고독의 시간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고독의 의미는 격동하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욱 소중합니다. 나날이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개인의 삶도 중심을 잃고 휘청댈 때가 많고,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삶을 사는 이들도 쉽게 지치거나 절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시민운동의 영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도, 개인의 내적 평화 없이는 세상의 평화를 이룰 수 없다는 인식 때문일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 했던 브라질의 돔 헬더 까마라 주교도, 자기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암살이나 폭력의 위협이 아니라 자기 마음 안에 평화를 이루는 것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니 세상 속에서 세상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홀로 하나님을 고요히 만나며 삶과 뜻을 가지런히 하는 고독의 시간이 더욱 필요한 것이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고독에는 일반적인 고독 이상의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유난히 분주했던 어느 날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이날 찾아온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 일행은 밥 먹을 겨를도 없었다고 기록합니다. 심한 피로를 느끼신 예수는 외딴 곳에 가서 쉬자며 일행과 함께 배를 타고 떠나셨지요. 그런데 예수 일행을 본 사람들이 미리 배가 도착할 곳에 가서 기다립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절박한 기대를 저버리실 수 없어 그곳에서 다시 가르침을 전하셨습니다. 그러다 날이 저물었고, 그 외딴 곳에서는 식사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때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 사건이 해가 저물고 나서 있었다니까, 이날의 일정은 밤늦은 때에 끝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 늦은 시간에 기도하러 산에 들어가십니다(막 6:46). 종일 일하느라 몹시 고단하셨을 텐데, 그 밤늦은 시간에 홀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산에 가신 것이지요.

이 이야기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예수께서 기도하신 시간이 낮이 아니라 한밤중이라는 사실입니다. 복음서의 다른 기록들도 예수께서 낮 시간이 아닌 한 밤중이나 아주 이른 새벽에 외딴 곳에서 홀로 기도하셨음을 한결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까마라 주교의 경건생활에서 그 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늘 새벽 두세 시에 깨어나 기도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때가 조용한 시간이기 때문이 아니라 공동체를 돌볼 일이 상대적으로 없는 시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도 낮 시간은 사람들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를 살아야 하는 공동체의 시간이었습니다. 종교적, 사회적 구원을 갈망하며 찾아온 사람들을 가르치고, 위로하고, 사랑하느라 바쁘셨던 예수께는, 당시의 위선적 종교 엘리트들처럼 낮에 사람 많은 데서 큰 소리로 길게 기도하실 틈이 없으셨던 것이지요. 당시 사람들이 예수의 경건생활을 몰랐던 것도,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의 수행을 드물게 기록하고 있는 것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들어 있던 시간에 홀로 기도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그 늦은 밤, 그 이른 새벽에도 공동체의 일이 있었다면 예수께서는 기꺼이 고독을 포기하셨을 겁니다. 그분이 추구하신 고독의 목적은 홀로 성스럽게 머무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공동체적 관계 속에 세상을 개선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지요. 토마스 머튼이 고독은 모든 사람이 나와 무관한 존재가 아님을 깨닫는 과정이기에, 수행자는 결코 “자기를 위한 암자를 지어서는 안 된다”고 했던 뜻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자기를 비우고 초월과 만나는 수행의 장소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자리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물론 일정 기간 모든 관계를 끊고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도 큰 결단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세상 속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 위선적 경건 대신 내적 경건과 사랑을 실천하는 것, 그리고 공동체를 살기 위해 고독해지는 것이 구원을 완성하는 길임을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4. 수행자들의 공동체
그때 함께 쌍계사를 찾았던 친구가 오랜만에 전화를 했습니다. 수행하며 살겠다는 제 말에, 그는 “너무 거룩해지는 거 아냐?” 라며 걱정스럽게 물었습니다. 저는 염려 말라고 대답했습니다. 우선은 여전히 한심하고 유치한 제 인격 때문에 쉽게 거룩해질 것 같지 않아서이고, 다행히 수행자로 살게 되더라도 세상 속에서 세상을 넘어서는 참된 경건을 따르게 될 거라고 예감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새길의 정신을 요약하는 ‘예수따르미’라는 표현에는 세상을 수행과 구원의 장소로 재발견한 삶의 체험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껏 제가 새길에 설레는 연애감정을 느껴온 것도, 주일 하루의 구별된 교회생활의 경험보다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애쓰는 자매, 형제들의 삶을 지켜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형도 시인의 아름다운 시구처럼,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긋는 삶의 모습 때문이었지요. 새길이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키게 된다면, 탄탄한 교회조직과 제도 때문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세상을 넘는 예수따르미들의 삶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새길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예수따르미들이 만나 새 힘을 얻는, 여행 중의 오아시스 같은 공동체입니다. 오아시스에 머물면 편하기야 하겠지만 결코 사막을 건널 수 없겠지요. 세상 속에서 세상을 넘는 도반으로 계속 만날 수 있기를 바라고 또한 다짐해봅니다.

하나님,  
우리가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시고,
세상 속에서 세상을 넘어서게 해 주십시오.
언제나 우리 삶 중심으로 돌아오고 계신
그리스도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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