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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5:21-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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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현숙 총재 |
참고 : | 대한 적십자사 부총재 / 새길교회 2005. 2.13 주일설교 |
우리 예수쟁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인물은 말할 것도 없이 예수입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에 관한 이야기가 늘 우리의 관심사가 됩니다. 그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를 모방하고자 하는 열정을 가진 이들이 예수쟁이들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예수쟁이들은 그의 이야기를 읽고 또 읽고 듣고 또 듣곤 합니다. 잘 아시는 대로 예수에 관한 이야기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들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를 증언하는 이 네 사람은 때로 겹치긴 해도 각기 예수의 다른 풍모를 전해 주고 있어 예수에 관한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를 위대한 교사로 그리고 있습니다. 마가는 예수를 행동하는 사람이자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아들로, 누가는 예수를 이스라엘의 구세주이자 인류의 구세주로, 요한은 인류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각기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예수를 교사로 그리고 있는 마태의 이야기를 다시 펼쳐보고자 합니다. 마태는 특히 예수를 두 가지 문제에 있어서 권위를 가진 교사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율법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는 데 있어서 권위를 가졌던 교사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미 아시는 대로 오늘 읽은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율법을 해석하는 예수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여섯 가지 잇슈를 문제 삼고 있습니다. 살인, 간음, 이혼, 맹세, 복수, 적에 관한 문제를 차례로 다룹니다. 이들 문제를 예수께서 다시 거론한 것을 보면 오늘 우리가 문제삼고 있는 국가보안법 등 개혁입법 잇슈들 만큼이나 당시 사회를 괴롭히는 예민한 잇슈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따지고 보면 예수당시의 이 문제들은 지금도 여전히 모든 사회의 문제가 되고 있는 잇슈들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예수는 10계명 중 제6계명과 제7계명을 해석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살인하지 말라. 살인하는 자는 누구든지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옛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예수는 살인의 원인이 성내고 형제를 무시하고 경멸하는데 있는 것 아니냐며 원한을 품게 한 형제가 있거든 가서 먼저 화해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간음죄나, 맹세문제에 대해서도 당시로는 매우 급진적인 해석을 내어 놓습니다. 보복의 문제와 원수의 문제로 가면 예수는 기존의 법, 또는 가르침을 폐기하는 과격한 말씀을 던집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앙갚음 하지 말아라.’ 예수는 <앙갚음하라>를 <앙갚음 하지 말라>로 바꾸어 놓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적, enemy)를 미워하여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적을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여기서 잠시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원수를 미워하란 말씀은 어느 율법에도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 율법교사들의 필요에 따른 가르침이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판관기 19장(1~30)에 나오는 레위인의 첩에 관한 설화를 보면 당시 민족간 복수전이 얼마나 잔인하고 광범하게 벌어졌으며 원수 또는 적을 미워하라는 율법교사의 가르침이 자연스러운 것이었을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쨋거나 예수는 <원수를 미워하라>는 당시의 가르침을 대담하게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법으로 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늘나라의 법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의 급진성은 극치를 이룹니다. 오늘까지도 이법들은 불가능의 윤리로 보이는 것들이고 우리에게 여전히 부담스런 가르침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런 식의 예수님의 가르침들은 7장까지 계속됩니다.
어느날 갈릴리 호숫가 낮은 언덕 위에서 행했던 예수님의 이 유명한 강론 중에서 특별히 오늘 주목해 보려는 것은 살인이나 간음. 이혼, 맹세, 보복, 원수라는 법율적 잇슈에 대한 놀라운 해석 방식이나 그 내용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되새기고자 하는 것은 이 대목에서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너희는 그렇게 들었느냐?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는 어법입니다. 언뜻 별 의미없어 보이는 듯한 이 구절이 실로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라는 어법 속에서 우리는 세상을 거스르는 예수의 위험한 도전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 속에서 우리는 생명을 억압하는 기존 질서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 테제로서의 그의 존재 의미를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낡은 법에 얽어 메인 삶을 근원적으로 흔들어 깨우는 그의 어법에서 예수의 구원능력을 보기 때문입니다. 젊디 젊은 나이에 직면한 예수님의 엄청난 수난 또한 바로 여기에 잉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사회가 지금 경험하듯이 기존의 법이나 관습, 가르침을 문제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국가보안법이나 호주제법을 둘러싼 논쟁은 지난 한해 우리사회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 듯 했습니다. 호주제법은 바로 얼마 전 법원의 위헌판결로 비교적 간단히 폐기가 결정되겠지만 이것 때문에 이 순간에도 전국에 계신 많은 할아버지들이 가슴앓이를 하시며 반전의 계기를 꿈꾸고 계십니다. 국보법을 비롯한 쟁점법안들은 새해에도 여전히 뜨거운 감자로 남아 있습니다. 예수시대는 2000년 전 식민지 상황인데다가 당시 권력자들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가르침에 딴지를 거는 일이어서 오늘 우리의 상황보다 얼마나 더 위험스러웠을지는 상상이 가능합니다. 예수는 옛 가르침을 재해석하는 데 매우 조심성 있고 지혜롭게 접근합니다. 자신이 하는 일은 율법을 폐하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시키려는 것이라고 전제하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심지어는 천지가 없어지는 한이 있어도 율법은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매우 간단명료하면서도 단호하게 하늘나라의 법으로 율법을 재해석하고 재구성하기 시작합니다.
대단한 도전입니다. 기존의 율법과 가르침을 생명처럼 모셔온 율법학자들이나 추종자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모욕이자 도전입니다. 작년 국가보안법 논쟁이 불러 일으킨 우리 사회의 대응을 돌아보면 당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을가를 충분히 그려 볼 수 있습니다.
예수쟁이들은 예수가 구원자라면 그들도 다른 이들에게 구원자가 되어야 하는 운명을 선택한 이들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라는 예수의 행위에서 저는, 역사발전이란 예수를 모방한 수많은 구원자들의 외침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란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1970년대 80년대 한국의 교회와 노동계, 청년, 지식인들은 기존 권력과 질서에 대해 끊임없이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를 외치고 실천해왔고 그로 인해 촉발된 험란한 역사를 지나 오늘 우리는 일정부분 자유라는 과실을 향유하게 되었습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한국여성들 또한 예수를 모방하기 시작했습니다. ‘너희 가부장들은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는 세상을 흔들어 놓기 시작했습니다. 여성들은 우리 문화의 주요 전제와 가치를 재점토하여 생명을 억압하는 개념적 모형은 폐기하고 인류 문화사의 어떤 시기에 버렸던 여성적 가치, 예수가 강조했던 약자들의 가치들을 새롭게 불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여성들은 정말이지 예수처럼 기존의 율법들을 재해석하고 재개념화하고 재정의하고 필요하면 폐기하면서 여성들과 약자들에게 생명(살아갈 힘)을 불어넣는 새로운 개념과 정의를 재구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사회의 윤리적 토대는 타인을 보살피는 능력과 배려, 유연성, 부드러움, 청취성, 협동적 의식에 두어야 함을 드러냈고 이에 힘입어 새 시대는 이러한 가치의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는 집단적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습니다(정대현 형제).’ CEO들과 학자들은 다투어 여성의 감성적 리더쉽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대현 교수는 최근 ‘나를 이루는 것이 만물을 이루는 것과 맞물려 있다’는 성기성물적 리더쉽 개념을 모성적 양식에서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여성들은 무시되었던 가사노동의 개념을 발굴해내어 노동의 개념을 완성해가고 있으며 기존의 권력개념에 대해서도 새롭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권력은 타자에 대한 가부장의 지배나 통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힘을 고양시키는 것이어야 하며 공유하고 나누는 그 무엇이어야 한다고 재정의 합니다. 권력은 꼴지에게 두발로 설 수 있는 힘을 불어 넣어 주는 것이며 <기죽이는 문화>를 <기살리는 문화>로 바꾸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이김현숙의 표현). 신학에서도 여성들의 도전은 새로운 물결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서구신학에서 하나님의 권능은 강제력, 강제적 전능으로 사유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성들에게 하나님의 전능하심(권력)은 다른 의미로 해석됩니다. 하나님의 참된 힘(권력)은 설득력이며 납득시키고 권유하는 비폭력적 힘이며 감화력으로 여성들은 느끼고 재정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류의 관계도 예속적 관계가 아니라 결속의 관계로 발견합니다. 국방영역에도 여성들은 과감하게 도전합니다. 국가를 방위하기 위해 존재하는 군대가 주둔 지역 주민과 여성의 안전(안보)을 해치는 모순된 현실에 주목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군사안보의 개념을 인간안보개념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도전합니다. 매향리 주민들과 여성들의 피폐한 삶과, 인간이기 위한 몸부림에서 여성들은 인간안보의 개념을 구성해 냈습니다.
성공이라는 율법에 도전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현대인은 성공이라는 율법에 얽매어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공하기 위해 목숨 걸고 뛰며 불행해 하고 있습니다. 엘리트들일수록 성공을 향한 질주와 그로 인한 불행은 더 큽니다. 저는 최근 우리 주변에서 성공을 행해 가던 우수한 젊은 이들이 스스로 생명을 끊는 불행한 일을 보아 왔습니다. 개인화와 세계화, 정보화가 진행될수록 성공이라는 율법은 우리 젊은이들을 더 괴롭힐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이 지향하는 그 성공이란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런 성공 개념에 대해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엇이 성공인가
랄프 왈도 에머슨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현명한 이에게 존경을 받고
아이들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
정직한 비평가의 찬사를 듣고
친구의 배반을 참아내는 것
아름다움을 식별할 줄 알며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의 것을 발견하는 것
건강한 아이를 낳든
한 뙈기의 정원을 가꾸든
사회환경을 개선하든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한 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역사의 새 길은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고 외치는, 그리스도를 닮은 시대의 구원자들이 만들어 왔습니다. 설날 연휴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북한의 핵보유 발표를 들어야 했습니다. 또다시 한반도와 동북아 상황이 벼랑끝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핵의 소용돌이가 일고 또다시 전쟁의 기운이 감돌고 있는 한반도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에 대해, 그리고 어떻게,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를 외쳐야 하겠습니까? 분단 60년을 맞은 이때 아니 분단 60년을 지나 분단 70년, 80년, 100년을 맞을지도 모르는 이 우울한 상황에서, 우리 예수 따르미(한완상 형제의 표현)들은 무엇에 대해 그리고 어떻게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를 외쳐야 하겠습니까?
잠시 침묵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저는 오늘 예수를 교사로 그리고 있는 마태의 이야기를 다시 펼쳐보고자 합니다. 마태는 특히 예수를 두 가지 문제에 있어서 권위를 가진 교사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율법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는 데 있어서 권위를 가졌던 교사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미 아시는 대로 오늘 읽은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율법을 해석하는 예수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여섯 가지 잇슈를 문제 삼고 있습니다. 살인, 간음, 이혼, 맹세, 복수, 적에 관한 문제를 차례로 다룹니다. 이들 문제를 예수께서 다시 거론한 것을 보면 오늘 우리가 문제삼고 있는 국가보안법 등 개혁입법 잇슈들 만큼이나 당시 사회를 괴롭히는 예민한 잇슈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따지고 보면 예수당시의 이 문제들은 지금도 여전히 모든 사회의 문제가 되고 있는 잇슈들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예수는 10계명 중 제6계명과 제7계명을 해석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살인하지 말라. 살인하는 자는 누구든지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옛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예수는 살인의 원인이 성내고 형제를 무시하고 경멸하는데 있는 것 아니냐며 원한을 품게 한 형제가 있거든 가서 먼저 화해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간음죄나, 맹세문제에 대해서도 당시로는 매우 급진적인 해석을 내어 놓습니다. 보복의 문제와 원수의 문제로 가면 예수는 기존의 법, 또는 가르침을 폐기하는 과격한 말씀을 던집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앙갚음 하지 말아라.’ 예수는 <앙갚음하라>를 <앙갚음 하지 말라>로 바꾸어 놓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적, enemy)를 미워하여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적을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여기서 잠시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원수를 미워하란 말씀은 어느 율법에도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 율법교사들의 필요에 따른 가르침이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판관기 19장(1~30)에 나오는 레위인의 첩에 관한 설화를 보면 당시 민족간 복수전이 얼마나 잔인하고 광범하게 벌어졌으며 원수 또는 적을 미워하라는 율법교사의 가르침이 자연스러운 것이었을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쨋거나 예수는 <원수를 미워하라>는 당시의 가르침을 대담하게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법으로 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늘나라의 법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의 급진성은 극치를 이룹니다. 오늘까지도 이법들은 불가능의 윤리로 보이는 것들이고 우리에게 여전히 부담스런 가르침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런 식의 예수님의 가르침들은 7장까지 계속됩니다.
어느날 갈릴리 호숫가 낮은 언덕 위에서 행했던 예수님의 이 유명한 강론 중에서 특별히 오늘 주목해 보려는 것은 살인이나 간음. 이혼, 맹세, 보복, 원수라는 법율적 잇슈에 대한 놀라운 해석 방식이나 그 내용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되새기고자 하는 것은 이 대목에서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너희는 그렇게 들었느냐?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는 어법입니다. 언뜻 별 의미없어 보이는 듯한 이 구절이 실로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라는 어법 속에서 우리는 세상을 거스르는 예수의 위험한 도전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 속에서 우리는 생명을 억압하는 기존 질서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 테제로서의 그의 존재 의미를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낡은 법에 얽어 메인 삶을 근원적으로 흔들어 깨우는 그의 어법에서 예수의 구원능력을 보기 때문입니다. 젊디 젊은 나이에 직면한 예수님의 엄청난 수난 또한 바로 여기에 잉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사회가 지금 경험하듯이 기존의 법이나 관습, 가르침을 문제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국가보안법이나 호주제법을 둘러싼 논쟁은 지난 한해 우리사회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 듯 했습니다. 호주제법은 바로 얼마 전 법원의 위헌판결로 비교적 간단히 폐기가 결정되겠지만 이것 때문에 이 순간에도 전국에 계신 많은 할아버지들이 가슴앓이를 하시며 반전의 계기를 꿈꾸고 계십니다. 국보법을 비롯한 쟁점법안들은 새해에도 여전히 뜨거운 감자로 남아 있습니다. 예수시대는 2000년 전 식민지 상황인데다가 당시 권력자들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가르침에 딴지를 거는 일이어서 오늘 우리의 상황보다 얼마나 더 위험스러웠을지는 상상이 가능합니다. 예수는 옛 가르침을 재해석하는 데 매우 조심성 있고 지혜롭게 접근합니다. 자신이 하는 일은 율법을 폐하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시키려는 것이라고 전제하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심지어는 천지가 없어지는 한이 있어도 율법은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매우 간단명료하면서도 단호하게 하늘나라의 법으로 율법을 재해석하고 재구성하기 시작합니다.
대단한 도전입니다. 기존의 율법과 가르침을 생명처럼 모셔온 율법학자들이나 추종자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모욕이자 도전입니다. 작년 국가보안법 논쟁이 불러 일으킨 우리 사회의 대응을 돌아보면 당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을가를 충분히 그려 볼 수 있습니다.
예수쟁이들은 예수가 구원자라면 그들도 다른 이들에게 구원자가 되어야 하는 운명을 선택한 이들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라는 예수의 행위에서 저는, 역사발전이란 예수를 모방한 수많은 구원자들의 외침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란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1970년대 80년대 한국의 교회와 노동계, 청년, 지식인들은 기존 권력과 질서에 대해 끊임없이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를 외치고 실천해왔고 그로 인해 촉발된 험란한 역사를 지나 오늘 우리는 일정부분 자유라는 과실을 향유하게 되었습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한국여성들 또한 예수를 모방하기 시작했습니다. ‘너희 가부장들은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는 세상을 흔들어 놓기 시작했습니다. 여성들은 우리 문화의 주요 전제와 가치를 재점토하여 생명을 억압하는 개념적 모형은 폐기하고 인류 문화사의 어떤 시기에 버렸던 여성적 가치, 예수가 강조했던 약자들의 가치들을 새롭게 불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여성들은 정말이지 예수처럼 기존의 율법들을 재해석하고 재개념화하고 재정의하고 필요하면 폐기하면서 여성들과 약자들에게 생명(살아갈 힘)을 불어넣는 새로운 개념과 정의를 재구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사회의 윤리적 토대는 타인을 보살피는 능력과 배려, 유연성, 부드러움, 청취성, 협동적 의식에 두어야 함을 드러냈고 이에 힘입어 새 시대는 이러한 가치의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는 집단적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습니다(정대현 형제).’ CEO들과 학자들은 다투어 여성의 감성적 리더쉽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대현 교수는 최근 ‘나를 이루는 것이 만물을 이루는 것과 맞물려 있다’는 성기성물적 리더쉽 개념을 모성적 양식에서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여성들은 무시되었던 가사노동의 개념을 발굴해내어 노동의 개념을 완성해가고 있으며 기존의 권력개념에 대해서도 새롭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권력은 타자에 대한 가부장의 지배나 통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힘을 고양시키는 것이어야 하며 공유하고 나누는 그 무엇이어야 한다고 재정의 합니다. 권력은 꼴지에게 두발로 설 수 있는 힘을 불어 넣어 주는 것이며 <기죽이는 문화>를 <기살리는 문화>로 바꾸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이김현숙의 표현). 신학에서도 여성들의 도전은 새로운 물결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서구신학에서 하나님의 권능은 강제력, 강제적 전능으로 사유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성들에게 하나님의 전능하심(권력)은 다른 의미로 해석됩니다. 하나님의 참된 힘(권력)은 설득력이며 납득시키고 권유하는 비폭력적 힘이며 감화력으로 여성들은 느끼고 재정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류의 관계도 예속적 관계가 아니라 결속의 관계로 발견합니다. 국방영역에도 여성들은 과감하게 도전합니다. 국가를 방위하기 위해 존재하는 군대가 주둔 지역 주민과 여성의 안전(안보)을 해치는 모순된 현실에 주목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군사안보의 개념을 인간안보개념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도전합니다. 매향리 주민들과 여성들의 피폐한 삶과, 인간이기 위한 몸부림에서 여성들은 인간안보의 개념을 구성해 냈습니다.
성공이라는 율법에 도전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현대인은 성공이라는 율법에 얽매어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공하기 위해 목숨 걸고 뛰며 불행해 하고 있습니다. 엘리트들일수록 성공을 향한 질주와 그로 인한 불행은 더 큽니다. 저는 최근 우리 주변에서 성공을 행해 가던 우수한 젊은 이들이 스스로 생명을 끊는 불행한 일을 보아 왔습니다. 개인화와 세계화, 정보화가 진행될수록 성공이라는 율법은 우리 젊은이들을 더 괴롭힐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이 지향하는 그 성공이란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런 성공 개념에 대해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엇이 성공인가
랄프 왈도 에머슨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현명한 이에게 존경을 받고
아이들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
정직한 비평가의 찬사를 듣고
친구의 배반을 참아내는 것
아름다움을 식별할 줄 알며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의 것을 발견하는 것
건강한 아이를 낳든
한 뙈기의 정원을 가꾸든
사회환경을 개선하든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한 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역사의 새 길은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고 외치는, 그리스도를 닮은 시대의 구원자들이 만들어 왔습니다. 설날 연휴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북한의 핵보유 발표를 들어야 했습니다. 또다시 한반도와 동북아 상황이 벼랑끝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핵의 소용돌이가 일고 또다시 전쟁의 기운이 감돌고 있는 한반도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에 대해, 그리고 어떻게,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를 외쳐야 하겠습니까? 분단 60년을 맞은 이때 아니 분단 60년을 지나 분단 70년, 80년, 100년을 맞을지도 모르는 이 우울한 상황에서, 우리 예수 따르미(한완상 형제의 표현)들은 무엇에 대해 그리고 어떻게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를 외쳐야 하겠습니까?
잠시 침묵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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