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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43-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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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민웅 목사 |
참고 : | 성공회대 신학과 겸임교수 /새길교회 2005. 4.17 주일설교 |
온통 봄의 기색이 완연합니다. 꽃구경들이 한참이지요. 그동안 잠자고 있던 꽃나무가, 누군가의 비밀스러운 신호에 따라 모두 일제히 깨어 일어선 느낌조차 듭니다. 그러면서, 저 스스로 알아서 어김없이 물러나는 시간과, 때를 놓치지 않고 찾아오는 계절 앞에서 우린, 그동안 채 눈여겨보지 못했던 것들의 진상을 목격하게 됩니다. 아무도 모르게 속에서 치솟아 오르고 있던 생명의 진면목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어라, 이게 언제 이렇게들 피어났나 하고 놀라게들 되지만 사실 그것은 “난데없는 출현”이 아닙니다. 얼핏 고개를 드니 갑자기 보게 되는 진풍경이 아닌 것입니다. 이미 있었으나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것뿐이요, 벌써부터 기척을 내고 있었으나 우리가 듣지 못했을 뿐입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개 사람들은 제 눈에 안 보이면 없다하고, 제 귀에 들리지 않으면 있지 않다고 고집합니다. 본래 하늘이 내려 주신 자신의 감각이 온갖 욕심과 무지와 어리석음으로 해서 어느새 퇴화되어 있는 것은 좀체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자기가 본 것만이 다 입니다. 자기가 들은 것만이 모두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게다가 망각이 몸에 밴 습관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봄이 오기 전에 엄연히 겨울이 있었다는 사실은 아득히 먼 곳에 있는 타향의 낯선 지명처럼 생각됩니다. 겨울이 없다면 봄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우린, 지금 눈앞에 보이는 봄의 찬란함에 압도되어 지난 해 겨울은 이 봄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처럼 여기기 십상입니다.
봄은 겨울을 뚫고 오는 것이 아니라, 겨울이 잉태하는 시간입니다. 봄의 뿌리는 겨울의 흙 속에서 진액을 빨아올리는 힘을 더욱 강하게 길러냅니다. 겨울은 그 냉기로 생명을 얼어붙게 하는 계절만이 아닙니다. 겨울은 침묵하는 듯하나 사실은 새로운 목소리로 말할 발언의 내공을 쌓아가는 시간입니다. 만물이 숨죽이고 잠든 것 같지만, 새롭게 움트기 위한 용기가 쌓이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비밀을 꿰뚫어 보는 이는 얼어있는 땅 속의 소리를 듣는 힘과, 산맥을 타고 흐르는 시내물의 조심스러운 움직임을 알아보는 기쁨을 배우게 됩니다. 실로, 덮여 있다고 묻혀버린 것이 아니며, 실낱같다고 소멸해버리고 만 것이 아닙니다. 눈에 뜨이지 않게 미미하다고 없는 것이 아니며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미완성으로 남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작 봄이 오면 그제야 모두가 사태의 진상을 알아보게 되지만, 생명의 숨결에 예민한 사람은 빙판이었던 강물이 따스한 봄볕으로 풀리기 전에도 그의 영혼이 진작부터 봄이 됩니다. 아직도 찬 바람이 멈추지 않고 들판이 푸른빛을 띠기도 전에, 그의 몸에서는 싱그러운 풀냄새가 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런 이는 때로 세월이 힘겹다고 쉽게 주저앉지 않습니다. 그 고된 고비를 통해서야 비로소 이루어져가고 있는 생명의 새로운 성취에 눈과 귀가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신앙이란, 다름 아닌 바로 이를 깨달아 아는 감사와 통하며 그로써 얻게 되는 <하늘의 힘>을 이 세상과 나누는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신 당시,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던 이스라엘의 정신세계에 휘몰아치게 충격을 주고 있었던 것은 세례요한의 회개운동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을 보면서 사람들은 이제 가장 확실하고도 “최종적인 대안”이 마련되었다고들 믿었습니다. 그것이 이제 지금껏 찾던 답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의외의 인물, 나사렛 예수로 인해 세례요한 운동의 진로에 혼선을 겪는 듯한 상황이 생겨나게 됩니다. 요한을 따르던 제자들 가운데 일부가 그에게로 가서 그의 제자가 되는 사건이 발생했던 것입니다. 자칫 요한과 예수의 추종자들 간에 심각한 주도권 쟁탈과 충돌이 발생할 수 있는 소지가 있는 사태였습니다.
하지만 요한 공동체의 지도자 세례요한이 이 미묘한 현실을 명확하게 수습합니다. 그는 “자신의 회개운동이 다가 아니다”라고 일깨웁니다. 최고의 수준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면, 그에 미치지 못한 것은 눈에 차지 않게 마련입니다. (어제 고암 이응노 화백의 서예전을 보고는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 글씨 안에 담긴 영혼의 위대함에 서예의 최고봉이 어떤 것인지 절감했습니다. 그리고 나니까 높고 낮음의 기준이 새롭게 달라지게 되더군요.)
또한, 세례요한은 회개운동에 따라 마음을 비우는 이유는 새롭게 채워야 할 바가 있기 때문임을 일깨웁니다. 그 채울 바를 이룰 존재가 나타났으니, 운동의 새로운 단계가 열렸다는 것을 요한은 사람들이 알아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비우기만 하면 무엇 합니까? 일곱 귀신이 다시 돌아와 자리를 잡으면 이전보다 못하게 된다는 것, 인생에서나 역사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운동 이후에 이루어져야 할 바에 대해 분명하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한 출발은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빌립도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예수의 제자가 되는 인물입니다. 그는 자신의 친우 나다나엘에게 자기들이 오랫동안 고대해왔던 분을 만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빌립으로서는 이 어려운 시대에 자신들이 그렇게 애타게 찾던, <진정한 최종적 대안의 등장>에 대한 감격적인 증언이었습니다. 답이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은, 빌립이 열심히 열정을 가지고 한 이 이야기 끝에 한 말을 듣자 퉁명스럽게 반응합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대목 때문이었습니다. “그 분은 나사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입니다.” 이 말에 나다나엘은 대뜸,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습니다. 빌립이 사람 잘못 봤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출신지 나사렛이라는 곳이 얼마나 후진 곳인데 그것도 모르냐 하는 식입니다.
나다나엘은 이렇게 예수를 직접 만나보지도 않고, 그가 어디 출신인가라는 정보 하나만을 가지고 자기 판단이 확실하다고 단정합니다. 다 좋다 해도 그것 하나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식과는 참 다른 시각과 판단의 과정입니다. 다 문제가 있다 해도 그것 하나만으로 살 길이 열린다는 믿음과는 전혀 다르지요. 아무튼, 자기가 알고 있는 것 이상의 절대적 근거는 없다는 이야기인데, 이런 것이 다 다름 아닌, 자기가 자기한테 속는 줄 모르는 무지의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이 자신에게 오는 모습을 멀리서 보시더니 “보아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요,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라고 극찬을 하셨습니다. 한쪽은 보기도 전에 멸시하고 다른 한쪽은 만나서 이야기도 나누기 전에 그를 단번에 알아봅니다. 상대에 대한 정보의 유무가 아니라 그 영혼에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꿰뚫어보는 힘이 인간이해의 핵심인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 말씀에 나다나엘은 놀라, “아니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랬더니 예수께서는,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란 이스라엘의 꿈과 생명을 상징합니다. 나다나엘이 빌립의 말에 이끌려 예수가 계신 곳에 오기 전 무화과나무 아래 실제로 서 있었던 것을 예수께서 내다 보셨다는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보다 속 깊은 뜻은, 그가 늘 상 이스라엘 민족의 힘겨운 운명에 대하여 고뇌하면서 미래의 번성을 위해 기도하는 자였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그를 가리켜,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 즉 하나님의 뜻에 온 영혼을 기울여 사는 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자신의 영혼 깊은 곳에 있는 열망과 기원을 알아보시는 예수에게 감동합니다. 그가 언제나 자신의 조국과 민족이 잘 되어가기를 바라는 깊은 소망에 사로잡혀 살고 있는 것을 이 세상에 단 한번도 만나보거나 이야기를 나누어 본 바 없는 예수께서 통찰하신 것에 놀라워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묘한 것은, 나다나엘이 어떻게든 지금의 현실을 이기고 새로운 미래가 오기를 바라는 자이지만, 사실 알고 보면 그는 비관적 숙명론자라는 점입니다. 그의 마음은 어디까지나 무화과나무에 있었지만, 그의 정작의 삶은 현실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무화과의 꿈을 꾸는 자이면서도 그 꿈이 그를 이끌지 못하고, 현실에 보다 크게 좌우되고 있다는 모순입니다.
이만하면 희망이 있겠다고 여기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현실이 가지고 있는 조건에 대한 이해이지 현실을 돌파하는 신앙의 위력에 대한 고백과는 상관이 없는 발언에 지나지 않습니다.
거기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나? 하고 경멸한 나사렛은 나다나엘에게 그가 늘 고뇌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비극적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를 타파하고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그가 꾸어야 할 꿈이건만, 그 꿈은 언제나 현실의 사정에 휘둘리고 있을 뿐입니다. 세상이 달라져야 한다는 소망은 가지고 있으나, 현실을 보면 그 소망은 언제나 부서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의 이상이나 믿음이 현실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의 현실이 그 이상을 하나씩 포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해서 그는 비록 소망을 품고 있긴 했으나 현실에 눈을 돌리는 순간 그 꿈이 좌절당하는 것에 그 마음이 무너지고 있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다나엘이 빌립에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는가?”라고 했을 때 그것은 나사렛은 무화과열매를 결코 맺지 못한다는 패배주의의 고백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도 때로 이 나다나엘을 닮아 있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믿음으로 무언가 용기를 얻으면 마치 무엇이라도 이겨낼 듯 하다가도 막상 나사렛의 현실과 직면하면, 이내 풀이 꺾이는 것입니다. 패배주의가 더 깊게 우리의 영혼을 지배하고 있는 셈입니다. 현실의 조건이 도와주지 않는다고 여기면 거기에서 선한 것은 나올 수 없다는 마음에 사로잡힙니다. 자신의 신앙은 무화과나무 아래 있다고 하면서, 현실과 마주하면 결론은 대체로 그래 과연 되겠어? 하고 후퇴해버리고 맙니다. 말은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믿는다고 하면서, 진짜로 믿는 것은 현실의 조건입니다. 그래서 현실에서 문제에 부딪히면 평소에 자신에게 다짐해온 굳건한 믿음보다는, 잔머리 굴리기에 더 바빠집니다. 그렇게 굴려봐야 아차 하는 순간에 자충수를 놓으면,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 뿐입니다. 이걸 몰라 우린 제 꾀에 제가 넘어가는 줄 모르는 것입니다.
돌이켜 기억해봅시다. 야곱의 아들 요셉은 이국땅에서 우여곡절의 험난한 고비를 넘게 됩니다. 그는 억울하게 파렴치범으로 몰려 옥에 갇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현실에 자신의 존재가 굴복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자신의 존재가 상황에 압도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로 상황을 압도하는 힘을 보였습니다. 아무리 험난한 지경에 처해 있다 해도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어둡고 막막한 현실 앞에 서 있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자신의 미래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하나님이 주신 은총과 지혜, 그리고 의지와 능력을 하나도 낭비하지 않고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내는 것에 쏟아 부었습니다. “그래봐야 감옥인데” 하며 냉소하지 않았습니다. 그 안에서의 새로운 현실은 그에게 새로운 미래로 통하는 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종국적으로 그를 새로운 존재로 만들어가는 은총의 과정이기도 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날로 새로워지면, 그 새로움이 현실을 압도해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가 지금 보고 듣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완성되어가는 새로운 미래에 대한 확신이 그를 요셉이 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존재 자체가 중요합니다. 그가 언제 어디에 있는가는 어디까지나 부차적입니다. 그의 존재가 그의 때와 그의 자리를 만들어 갑니다. 때와 자리가 그의 존재를 최종적으로 결정하지 않습니다. 존재가 하나님의 마음과 영으로 채워질 때, 그가 있는 때와, 그가 있는 곳이 곧 하나님의 은총이 실현되는 때와 자리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하여 그 어디에서나 그가 바로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답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이 세상에 대한 답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선물의 핵심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보면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봐야 할지, 결론이 나오는 그런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 순간, 지위를 넘어서는 자리에 우리가 있게 됩니다. 학식과 권세를 초월하는 힘을 가진 지점에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별의 차이와 연령의 고하가 문제가 되지 않는 그런, 세상에 대한 진정한 답이요 미처 가보지 않았으나 확실한 길이 그로써 보이는 것입니다.
실로 나다나엘은 나사렛의 고되고 지친 현실만을 보았지, 그 안에서 움터 나오고 있는 무화과나무의 싹을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눈에 안보이면 없는 것이며, 자기 귀에 들리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여 하나님 나라를 향해 열리지 못한 영혼의 눈에는, 개탄스러운 현실은 보일지 모르나 그 현실을 정작 돌파해나갈 힘의 근본에 대해서는 진실로 눈뜨지 못합니다. 겨울을 통과하면서 나무는 더욱 강해지고 그 안에 봄에 이루어질 새로운 생명의 기력을 준비하는 시절을 지내는 것임을 안다면, 우린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다고 그런 것은 없는 것이라고 우기지 않게 될 것입니다.
패배인 줄 알았는데 승리이며, 죽음인 줄 알았는데 생명이자 잠시인줄 알았으나 영원인 길이 있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해서 예수께서는 그에게, 이제 더 큰 일을 보게 된다면서 하늘이 열려 천사들이 하늘과 땅을 오가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의 현실은 인간의 고뇌와 번민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열려 그로부터 쏟아져 내려오는 생명의 기력으로 푸는 것임을 깨우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딛고 서 있는 땅의 이름이 나사렛이건 그 어디이건, 그는 참으로 날로 위력 있는 존재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오게 하려면 나무 아래 서 있는 것만으로 족하지 아니하며, 나무 위에서 열리는 하늘의 기운을 흠뻑 받아 사는 감격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결국 그러다보면, 우리 자신이 어느 덧 이 세상을 위해 열매가 풍성한 무화과나무 그 자체가 되어가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뿌리가 뻗은 땅이 풍요해질 것이며, 그 나무 아래 모여드는 이들이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무화과나무 아래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열리는 것을 바라보며 그 기운을 받아 땅에 단단히 뿌리박고 숨쉬며 사는 무화과나무 그 자체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봄볕 따뜻한 양지에 나무 등걸에 기대어 서서 나무의 진동을 느껴보는 것입니다. 그건 평소에 체험하려 하지 않았던 시도일 수 있습니다. 하늘과 만나는 길을 그 마음에 내는 일입니다. 그러다가 어느새 자신과 나무가 하나가 되어가는 기분에 취해보는 것입니다.
하늘의 기운을 받아 사는 나무가 숨을 쉬면, 주변이 맑아집니다. 나무의 숨결은 어느새 세상의 호흡이 됩니다. 나무가 있는 곳은 사막이 되지 아니합니다. 나무는 자신을 온갖 생명체의 집으로 내어주기도 합니다. 그 그늘은 사람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열기를 식히는 쉼터가 됩니다. 그 가지는 다람쥐의 통로가 되고, 먼 길을 떠나온 철새들의 안락한 휴양처가 되곤 합니다.
나무는 산(山)의 다채로운 표정이며 도시의 문명수준입니다. 절망으로 고개가 밑으로만, 밑으로만 떨구어 질 때 문득 그 등걸에 기대어 하늘을 보게 하는 푯대입니다. 우리의 인생사와 세상은 그렇게 해서 산림(山林)이 무성한, 놀랍기 그지없는 풍경으로 하루하루 변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숨을 쉬면 세상이 청정해질 것이며, 우리가 나이 들어 늙어도 세상은 기대어 쉴 곳이 있어 희망을 잃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바로 이 땅에 하나님이 심어놓으신 나무입니다. 땅에 뿌리박고 하늘을 향해 영혼이 열려 있으며 두 팔을 벌려 이 세상을 사랑으로 감싸 안는 그런 나무 말입니다. 그 나무는 우람한 크기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언뜻 초라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뭐 그리 대단한 열매가 나오겠는가 하고 쉽게 대합니다. 하지만, 그 나무가 결국 이 세상을 푸르고 아름답게 만들어 갑니다. 그 나무의 생명력은 결코 시들지 아니하며 또한 제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나무의 진액을 받아 마시고, 이 나무의 진동에 그 영혼과 몸이 떨리는 이는 그 나무를 닮아갈 것이며, 그 자신이 어느새 그리스도의 숲에 속한 자가 될 것입니다.
때로 어둡고 힘겨운 시간을 통과할 때에, 우리의 머리 위로 하늘이 열리고 그로 말미암아 생명의 기력이 우리의 비워진 마음을 가득 채우는 그런 축복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들리지 않았던 것이 들리는, 그래서 마침내 온전해지는 길로 가는 그런 기쁨, 우리 모두의 것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어라, 이게 언제 이렇게들 피어났나 하고 놀라게들 되지만 사실 그것은 “난데없는 출현”이 아닙니다. 얼핏 고개를 드니 갑자기 보게 되는 진풍경이 아닌 것입니다. 이미 있었으나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것뿐이요, 벌써부터 기척을 내고 있었으나 우리가 듣지 못했을 뿐입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개 사람들은 제 눈에 안 보이면 없다하고, 제 귀에 들리지 않으면 있지 않다고 고집합니다. 본래 하늘이 내려 주신 자신의 감각이 온갖 욕심과 무지와 어리석음으로 해서 어느새 퇴화되어 있는 것은 좀체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자기가 본 것만이 다 입니다. 자기가 들은 것만이 모두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게다가 망각이 몸에 밴 습관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봄이 오기 전에 엄연히 겨울이 있었다는 사실은 아득히 먼 곳에 있는 타향의 낯선 지명처럼 생각됩니다. 겨울이 없다면 봄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우린, 지금 눈앞에 보이는 봄의 찬란함에 압도되어 지난 해 겨울은 이 봄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처럼 여기기 십상입니다.
봄은 겨울을 뚫고 오는 것이 아니라, 겨울이 잉태하는 시간입니다. 봄의 뿌리는 겨울의 흙 속에서 진액을 빨아올리는 힘을 더욱 강하게 길러냅니다. 겨울은 그 냉기로 생명을 얼어붙게 하는 계절만이 아닙니다. 겨울은 침묵하는 듯하나 사실은 새로운 목소리로 말할 발언의 내공을 쌓아가는 시간입니다. 만물이 숨죽이고 잠든 것 같지만, 새롭게 움트기 위한 용기가 쌓이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비밀을 꿰뚫어 보는 이는 얼어있는 땅 속의 소리를 듣는 힘과, 산맥을 타고 흐르는 시내물의 조심스러운 움직임을 알아보는 기쁨을 배우게 됩니다. 실로, 덮여 있다고 묻혀버린 것이 아니며, 실낱같다고 소멸해버리고 만 것이 아닙니다. 눈에 뜨이지 않게 미미하다고 없는 것이 아니며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미완성으로 남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작 봄이 오면 그제야 모두가 사태의 진상을 알아보게 되지만, 생명의 숨결에 예민한 사람은 빙판이었던 강물이 따스한 봄볕으로 풀리기 전에도 그의 영혼이 진작부터 봄이 됩니다. 아직도 찬 바람이 멈추지 않고 들판이 푸른빛을 띠기도 전에, 그의 몸에서는 싱그러운 풀냄새가 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런 이는 때로 세월이 힘겹다고 쉽게 주저앉지 않습니다. 그 고된 고비를 통해서야 비로소 이루어져가고 있는 생명의 새로운 성취에 눈과 귀가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신앙이란, 다름 아닌 바로 이를 깨달아 아는 감사와 통하며 그로써 얻게 되는 <하늘의 힘>을 이 세상과 나누는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신 당시,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던 이스라엘의 정신세계에 휘몰아치게 충격을 주고 있었던 것은 세례요한의 회개운동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을 보면서 사람들은 이제 가장 확실하고도 “최종적인 대안”이 마련되었다고들 믿었습니다. 그것이 이제 지금껏 찾던 답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의외의 인물, 나사렛 예수로 인해 세례요한 운동의 진로에 혼선을 겪는 듯한 상황이 생겨나게 됩니다. 요한을 따르던 제자들 가운데 일부가 그에게로 가서 그의 제자가 되는 사건이 발생했던 것입니다. 자칫 요한과 예수의 추종자들 간에 심각한 주도권 쟁탈과 충돌이 발생할 수 있는 소지가 있는 사태였습니다.
하지만 요한 공동체의 지도자 세례요한이 이 미묘한 현실을 명확하게 수습합니다. 그는 “자신의 회개운동이 다가 아니다”라고 일깨웁니다. 최고의 수준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면, 그에 미치지 못한 것은 눈에 차지 않게 마련입니다. (어제 고암 이응노 화백의 서예전을 보고는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 글씨 안에 담긴 영혼의 위대함에 서예의 최고봉이 어떤 것인지 절감했습니다. 그리고 나니까 높고 낮음의 기준이 새롭게 달라지게 되더군요.)
또한, 세례요한은 회개운동에 따라 마음을 비우는 이유는 새롭게 채워야 할 바가 있기 때문임을 일깨웁니다. 그 채울 바를 이룰 존재가 나타났으니, 운동의 새로운 단계가 열렸다는 것을 요한은 사람들이 알아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비우기만 하면 무엇 합니까? 일곱 귀신이 다시 돌아와 자리를 잡으면 이전보다 못하게 된다는 것, 인생에서나 역사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운동 이후에 이루어져야 할 바에 대해 분명하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한 출발은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빌립도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예수의 제자가 되는 인물입니다. 그는 자신의 친우 나다나엘에게 자기들이 오랫동안 고대해왔던 분을 만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빌립으로서는 이 어려운 시대에 자신들이 그렇게 애타게 찾던, <진정한 최종적 대안의 등장>에 대한 감격적인 증언이었습니다. 답이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은, 빌립이 열심히 열정을 가지고 한 이 이야기 끝에 한 말을 듣자 퉁명스럽게 반응합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대목 때문이었습니다. “그 분은 나사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입니다.” 이 말에 나다나엘은 대뜸,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습니다. 빌립이 사람 잘못 봤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출신지 나사렛이라는 곳이 얼마나 후진 곳인데 그것도 모르냐 하는 식입니다.
나다나엘은 이렇게 예수를 직접 만나보지도 않고, 그가 어디 출신인가라는 정보 하나만을 가지고 자기 판단이 확실하다고 단정합니다. 다 좋다 해도 그것 하나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식과는 참 다른 시각과 판단의 과정입니다. 다 문제가 있다 해도 그것 하나만으로 살 길이 열린다는 믿음과는 전혀 다르지요. 아무튼, 자기가 알고 있는 것 이상의 절대적 근거는 없다는 이야기인데, 이런 것이 다 다름 아닌, 자기가 자기한테 속는 줄 모르는 무지의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이 자신에게 오는 모습을 멀리서 보시더니 “보아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요,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라고 극찬을 하셨습니다. 한쪽은 보기도 전에 멸시하고 다른 한쪽은 만나서 이야기도 나누기 전에 그를 단번에 알아봅니다. 상대에 대한 정보의 유무가 아니라 그 영혼에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꿰뚫어보는 힘이 인간이해의 핵심인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 말씀에 나다나엘은 놀라, “아니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랬더니 예수께서는,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란 이스라엘의 꿈과 생명을 상징합니다. 나다나엘이 빌립의 말에 이끌려 예수가 계신 곳에 오기 전 무화과나무 아래 실제로 서 있었던 것을 예수께서 내다 보셨다는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보다 속 깊은 뜻은, 그가 늘 상 이스라엘 민족의 힘겨운 운명에 대하여 고뇌하면서 미래의 번성을 위해 기도하는 자였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그를 가리켜,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 즉 하나님의 뜻에 온 영혼을 기울여 사는 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자신의 영혼 깊은 곳에 있는 열망과 기원을 알아보시는 예수에게 감동합니다. 그가 언제나 자신의 조국과 민족이 잘 되어가기를 바라는 깊은 소망에 사로잡혀 살고 있는 것을 이 세상에 단 한번도 만나보거나 이야기를 나누어 본 바 없는 예수께서 통찰하신 것에 놀라워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묘한 것은, 나다나엘이 어떻게든 지금의 현실을 이기고 새로운 미래가 오기를 바라는 자이지만, 사실 알고 보면 그는 비관적 숙명론자라는 점입니다. 그의 마음은 어디까지나 무화과나무에 있었지만, 그의 정작의 삶은 현실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무화과의 꿈을 꾸는 자이면서도 그 꿈이 그를 이끌지 못하고, 현실에 보다 크게 좌우되고 있다는 모순입니다.
이만하면 희망이 있겠다고 여기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현실이 가지고 있는 조건에 대한 이해이지 현실을 돌파하는 신앙의 위력에 대한 고백과는 상관이 없는 발언에 지나지 않습니다.
거기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나? 하고 경멸한 나사렛은 나다나엘에게 그가 늘 고뇌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비극적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를 타파하고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그가 꾸어야 할 꿈이건만, 그 꿈은 언제나 현실의 사정에 휘둘리고 있을 뿐입니다. 세상이 달라져야 한다는 소망은 가지고 있으나, 현실을 보면 그 소망은 언제나 부서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의 이상이나 믿음이 현실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의 현실이 그 이상을 하나씩 포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해서 그는 비록 소망을 품고 있긴 했으나 현실에 눈을 돌리는 순간 그 꿈이 좌절당하는 것에 그 마음이 무너지고 있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다나엘이 빌립에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는가?”라고 했을 때 그것은 나사렛은 무화과열매를 결코 맺지 못한다는 패배주의의 고백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도 때로 이 나다나엘을 닮아 있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믿음으로 무언가 용기를 얻으면 마치 무엇이라도 이겨낼 듯 하다가도 막상 나사렛의 현실과 직면하면, 이내 풀이 꺾이는 것입니다. 패배주의가 더 깊게 우리의 영혼을 지배하고 있는 셈입니다. 현실의 조건이 도와주지 않는다고 여기면 거기에서 선한 것은 나올 수 없다는 마음에 사로잡힙니다. 자신의 신앙은 무화과나무 아래 있다고 하면서, 현실과 마주하면 결론은 대체로 그래 과연 되겠어? 하고 후퇴해버리고 맙니다. 말은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믿는다고 하면서, 진짜로 믿는 것은 현실의 조건입니다. 그래서 현실에서 문제에 부딪히면 평소에 자신에게 다짐해온 굳건한 믿음보다는, 잔머리 굴리기에 더 바빠집니다. 그렇게 굴려봐야 아차 하는 순간에 자충수를 놓으면,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 뿐입니다. 이걸 몰라 우린 제 꾀에 제가 넘어가는 줄 모르는 것입니다.
돌이켜 기억해봅시다. 야곱의 아들 요셉은 이국땅에서 우여곡절의 험난한 고비를 넘게 됩니다. 그는 억울하게 파렴치범으로 몰려 옥에 갇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현실에 자신의 존재가 굴복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자신의 존재가 상황에 압도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로 상황을 압도하는 힘을 보였습니다. 아무리 험난한 지경에 처해 있다 해도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어둡고 막막한 현실 앞에 서 있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자신의 미래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하나님이 주신 은총과 지혜, 그리고 의지와 능력을 하나도 낭비하지 않고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내는 것에 쏟아 부었습니다. “그래봐야 감옥인데” 하며 냉소하지 않았습니다. 그 안에서의 새로운 현실은 그에게 새로운 미래로 통하는 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종국적으로 그를 새로운 존재로 만들어가는 은총의 과정이기도 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날로 새로워지면, 그 새로움이 현실을 압도해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가 지금 보고 듣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완성되어가는 새로운 미래에 대한 확신이 그를 요셉이 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존재 자체가 중요합니다. 그가 언제 어디에 있는가는 어디까지나 부차적입니다. 그의 존재가 그의 때와 그의 자리를 만들어 갑니다. 때와 자리가 그의 존재를 최종적으로 결정하지 않습니다. 존재가 하나님의 마음과 영으로 채워질 때, 그가 있는 때와, 그가 있는 곳이 곧 하나님의 은총이 실현되는 때와 자리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하여 그 어디에서나 그가 바로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답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이 세상에 대한 답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선물의 핵심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보면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봐야 할지, 결론이 나오는 그런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 순간, 지위를 넘어서는 자리에 우리가 있게 됩니다. 학식과 권세를 초월하는 힘을 가진 지점에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별의 차이와 연령의 고하가 문제가 되지 않는 그런, 세상에 대한 진정한 답이요 미처 가보지 않았으나 확실한 길이 그로써 보이는 것입니다.
실로 나다나엘은 나사렛의 고되고 지친 현실만을 보았지, 그 안에서 움터 나오고 있는 무화과나무의 싹을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눈에 안보이면 없는 것이며, 자기 귀에 들리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여 하나님 나라를 향해 열리지 못한 영혼의 눈에는, 개탄스러운 현실은 보일지 모르나 그 현실을 정작 돌파해나갈 힘의 근본에 대해서는 진실로 눈뜨지 못합니다. 겨울을 통과하면서 나무는 더욱 강해지고 그 안에 봄에 이루어질 새로운 생명의 기력을 준비하는 시절을 지내는 것임을 안다면, 우린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다고 그런 것은 없는 것이라고 우기지 않게 될 것입니다.
패배인 줄 알았는데 승리이며, 죽음인 줄 알았는데 생명이자 잠시인줄 알았으나 영원인 길이 있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해서 예수께서는 그에게, 이제 더 큰 일을 보게 된다면서 하늘이 열려 천사들이 하늘과 땅을 오가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의 현실은 인간의 고뇌와 번민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열려 그로부터 쏟아져 내려오는 생명의 기력으로 푸는 것임을 깨우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딛고 서 있는 땅의 이름이 나사렛이건 그 어디이건, 그는 참으로 날로 위력 있는 존재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오게 하려면 나무 아래 서 있는 것만으로 족하지 아니하며, 나무 위에서 열리는 하늘의 기운을 흠뻑 받아 사는 감격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결국 그러다보면, 우리 자신이 어느 덧 이 세상을 위해 열매가 풍성한 무화과나무 그 자체가 되어가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뿌리가 뻗은 땅이 풍요해질 것이며, 그 나무 아래 모여드는 이들이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무화과나무 아래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열리는 것을 바라보며 그 기운을 받아 땅에 단단히 뿌리박고 숨쉬며 사는 무화과나무 그 자체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봄볕 따뜻한 양지에 나무 등걸에 기대어 서서 나무의 진동을 느껴보는 것입니다. 그건 평소에 체험하려 하지 않았던 시도일 수 있습니다. 하늘과 만나는 길을 그 마음에 내는 일입니다. 그러다가 어느새 자신과 나무가 하나가 되어가는 기분에 취해보는 것입니다.
하늘의 기운을 받아 사는 나무가 숨을 쉬면, 주변이 맑아집니다. 나무의 숨결은 어느새 세상의 호흡이 됩니다. 나무가 있는 곳은 사막이 되지 아니합니다. 나무는 자신을 온갖 생명체의 집으로 내어주기도 합니다. 그 그늘은 사람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열기를 식히는 쉼터가 됩니다. 그 가지는 다람쥐의 통로가 되고, 먼 길을 떠나온 철새들의 안락한 휴양처가 되곤 합니다.
나무는 산(山)의 다채로운 표정이며 도시의 문명수준입니다. 절망으로 고개가 밑으로만, 밑으로만 떨구어 질 때 문득 그 등걸에 기대어 하늘을 보게 하는 푯대입니다. 우리의 인생사와 세상은 그렇게 해서 산림(山林)이 무성한, 놀랍기 그지없는 풍경으로 하루하루 변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숨을 쉬면 세상이 청정해질 것이며, 우리가 나이 들어 늙어도 세상은 기대어 쉴 곳이 있어 희망을 잃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바로 이 땅에 하나님이 심어놓으신 나무입니다. 땅에 뿌리박고 하늘을 향해 영혼이 열려 있으며 두 팔을 벌려 이 세상을 사랑으로 감싸 안는 그런 나무 말입니다. 그 나무는 우람한 크기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언뜻 초라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뭐 그리 대단한 열매가 나오겠는가 하고 쉽게 대합니다. 하지만, 그 나무가 결국 이 세상을 푸르고 아름답게 만들어 갑니다. 그 나무의 생명력은 결코 시들지 아니하며 또한 제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나무의 진액을 받아 마시고, 이 나무의 진동에 그 영혼과 몸이 떨리는 이는 그 나무를 닮아갈 것이며, 그 자신이 어느새 그리스도의 숲에 속한 자가 될 것입니다.
때로 어둡고 힘겨운 시간을 통과할 때에, 우리의 머리 위로 하늘이 열리고 그로 말미암아 생명의 기력이 우리의 비워진 마음을 가득 채우는 그런 축복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들리지 않았던 것이 들리는, 그래서 마침내 온전해지는 길로 가는 그런 기쁨, 우리 모두의 것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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