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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0:25-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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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은선 교수 |
참고 : | 새길교회 2005. 5.22 주일설교/ 이은선(세종대 교육학과 교수) |
1.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관한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삶은 항상 중심과 주변부, 정통과 이단, 주인과 이방인 등 이분법적으로 나뉘어져 평가되는데, 사마리아인이란 우리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들었듯이 예수님 당시 남쪽의 유다에 비해서 주변부이고, 이방인이었으며, 정통적인 하나님 신앙을 갖지 못한 사람들로 여겨져 왔습니다.
이러한 멸시받는 이방인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예수님 이야기는 그러나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때의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그랬고, 오늘의 우리에게도 삶의 궁극적인 관심이 되는 ‘영생’에 관한 질문과 관련하여서 사마리아인이 등장하는데, 오늘 우리가 읽은 ‘선한 사마리아인’과 더불어 요한복음 4장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수가라 우물가에서의 여인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2. 한 율법학자가 예수에게 묻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 반문하시기를,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느냐?” 대답하기를 “네 마음(heart)과 목숨(soul)과 힘(strength)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재차의 질문에 바로 이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3. 이러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해봅니다. 당시 이 질문을 했던 율법학자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보면, 그는 그래도 오늘의 우리와는 다르게 끊임없이 ‘영생’에 관한 질문을 묻고 있었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오늘의 우리가 지금 당장의 먹고 사는 일과 ‘利’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것 때문에 옆의 사람들과 싸우느라고 깨어있는 시간의 거의 전부를 보내고 있는 것과는 달리 그는 그래도 일상의 대화에서 ‘영생’에 관한 언급과 질문을 할 정도로 궁극적인 것에 대한 관심을 지녔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이 알기에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할 줄도 모르고, 자신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해주는 성결법도 잘 지키지 못하며, 온갖 이방적인 것과 섞으면서 잡종처럼 살아가는 ‘사마리아인’을 들어서 바로 그 영생에 이르신 길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여행길에 강도 만나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의 스러지는 숨소리를 듣고서, 그를 우선 자기가 가진 것으로 치료해주고, 그가 온전해질 때까지 보살펴줄 것을 이웃에게 다시 부탁하고, 비용에 대한 배려도 섬세하게 조정하여서 끝까지 책임지는 배려와 仁의 마음을 그 카드로 밝히신 것입니다.
4. 이렇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해서 20세기 프랑스의 여성철학자로서 知와 行의 관계에 대해서 어느 누구보다도 래디칼한 물음을 물었던 시몬느 베이유(Simone Weil, 1909~1943)는 아주 인상 깊은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70년대 한국에서도『시몬느 베이유, 불꽃의 여자』라는 제목의 전기가 출판되어서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그녀는 20세기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깊이 목도하고서 노동운동에 깊이 관여했던 철저한 도덕적 의지의 철학자였습니다. 신념과 생활태도 사이의 간극을 메우려고 죽기까지 노력한 그녀는 “신은 올바른 행동에 의해서만 생각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존재의 핵심을 ‘관계’(relation)로 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모든 기도와 학문과 공부란 바로 이 존재들의 관계를 찾아내고 포착할 수 있는 ‘집중’(attention, attentiveness)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스스로가 철학교수의 직을 포기하고 노동운동에 투신하여 세상의 ‘중력’과 ‘필연성의 법칙’을 몸으로 경험하면 할수록 그녀는 또 다른 존재의 법칙인 ‘은총의 법칙’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있어서 세계는 모두 신의 현현의 장소입니다. 우주와 세계의 질서, 세상의 아름다움이란 이 세상 필연성 법칙의 실제에도 불구하고 하찮은 풀 한 포기의 존재에서도 우리에게 다가오기를 원하는 신의 현재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우리가 신앙의 한 표현으로 행하는 기도와 세계의 대상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 행하는 공부를 하나로 봅니다. 공부와 학문이란 이 신의 모습과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인데, 그것은 ‘집중’을 통해서 존재들의 ‘관계’를 찾아내는 일로 본 것입니다. 그녀에 의하면 공부는 ‘기도’와 같고, 모든 학문적인 탐구는 “일종의 종교적 명상”입니다. 오늘 학교공부는 일종의 “성례전”과 같고, 그래서 “교육의 본질이란-어린아이를 키우는 것이건, 어른을 위한 것이건, 또는 자기교육이라 하더라도- 바로 이러한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움으로 인해서 행위에로의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기도와 명상의 질은 ‘집중’에 달려 있습니다. 그녀에 따르면 집중이란 우리의 사고를 일단 정지시키고 우리 정신에 대상이 침투할 수 있도록 어떠한 편견도 없이 자신을 비워두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온전히 비우는 것을 통해서 대상과 하나됨을 이루는 집중은, 그녀에 따르면, 궁극적으로는 우주와 하나님을 대상으로 삼고, 그래서 이 우주의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학문인 것입니다. 이 우주의 아름다움은 관계가 만들어갑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사고란 바로 우리 주변과 우리 안의 모든 것이 관계인 그 관계들의 파악과 다름없습니다. 이 관계를 파악하는 집중의 최고 상태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만납니다.
5. 집중의 가장 순수한 형태는 자기 자신을 온전히 비우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도와 욕심, 선입견, 편견, 염려와 걱정을 온전히 비우고 대상에 마음을 쏟는 것입니다. 베이유에 따르면 인간의 가장 고귀한 작업인 참된 창조는 몰아의 경지를 의미하며, 창조적인 집중이란 우리의 집중을 지금 여기서는 잘 보이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것, 스러져가서 하찮게 보이는 것에 귀 기울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바로 우리가 오늘 읽은 누가복음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이러한 맥락에서 풀고 있습니다; 여기서 길가에 무력하게 누워서 죽어가는 무명의 육체 속에는 인간성(생명의 소리)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당시 신앙생활을 누구보다도 열심히 하고 교육을 많이 받았다고 여겨지던 제사장도, 레위인도 그 꺼져가서 거의 희미해져가는 인간성의 외침을 듣지 못했고,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걸음을 멈추고 이 사라져가는 인간성에 시종일관되게 주의를 기울여서 거기서 다시 그 인간성을 감지해낸 사람은 바로 당시의 이방인인 사마리아인이었고, 이러한 사마리아인의 행동이야말로 바로 창조적인 집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집중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통해서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내는 창조의 일을 행할 수 있었습니다. 베이유는 ‘신앙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증거니라’ 라는 바울의 말도 바로 이러한 창조적인 집중력으로 풀고 있고, 신앙을 사랑과 마찬가지로 집중하는 순간에 나타나는 그런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6. 불행한 사람은 집중하지 못합니다. 우리 자신이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인가 아니면 불행한 사람인가를 구별할 수 있는 시금석은 우리가 얼마나 집중하는 능력으로 주변의 고뇌하는 소리들을 들을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불행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빠져있거나 실망하여서 관계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베이유는 그래서 노동자들이 불행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단지 빵만이 아니라 詩이고, 집중하는 훈련이며, 이들의 육체적 노동이 우주와 연결되어 있고 세상의 아름다움과 접촉되어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불행한 사람은 자기 자신 속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자신과 다른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차이를 참을 수 없어합니다. 자신이 세워놓은 가치관과 신앙, 자신이 속해 있는 그룹 이외의 다른 대상에 대해 매우 배타적이거나 무관심합니다. 여기에 반해서 이 세상의 존재하는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고백하는 시몬느 베이유는 다름에 대하여 매우 예민합니다. 그녀의 마음은 존재의 전 영역을 포괄하는 사랑으로 가득 차서 이 모든 영역을 포괄하지 못하는 역사적 사실로서의 교회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catholic’ 교회가 본래의 이름대로 ‘보편적’이 되지 못하는 현실을 알고서, 그녀는 세 번의 신비한 하나님 체험을 하지만 교회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이 모든 영역을 모두 통합해서 본래적인 보편성을 지닌 종교를 추구하게 되었고, 보편성 그것 자체로서의 종교, 신과 기독교를 표현하기 위해 ‘하나님’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대신 “이 세상이 아닌 현실”과 같은 말로 하나님을 언급하기 원합니다. 그녀는 하나님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 이유로 “기독교를 모르는 사람들도 모두 모이기 위해서는 새로운 용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소망으로 기독교 이외의 모든 인간적인 전통, 거기에는 중국의 예술과 종교전통도 포함되었고, 그리스인들의 사유체제도 포함되며, 수학과 과학의 영역도 포함되는데, 이러한 인간적인 종교적인 전통에 나타난 것에 대한 사랑 때문에 교화 밖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하나님이 이 물질적인 시대 속에서 “진실을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바치면서도 교회 밖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있기를 바라시는지”를 진지하게 물으면서, 우리 시대에 새롭게 요구되는 “새로운 성스러움”(une saintete nouvelle)에 대해서 말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자신은 유태인으로서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왔지만 다시 조국 프랑스의 고통에 동참하고자 영국을 거쳐 프랑스로 돌아가기를 고대하며 금욕하다가 요절한 베이유의 삶은 이러한 “새로운 성스러움”의 실현이었고, “이 세계의 바깥에 놓여 있는 현실”의 구체화였습니다. 그녀의 삶과 사고는 가장 초월적이면서 동시에 구체적이었고, 지성과 윤리, 종교와 학문, 영성과 이성, 배움과 실천의 하나됨을 추구한 지극한 예라고 하겠습니다. 그녀에게 공부란 ‘기도’와 같은 것이며, 그 기도란 다르게 표현하면 ‘집중’인 것입니다.
7. 서구의 한 한국학자는 우리나라 퇴계의『聖學十圖』를 영역하면서 퇴계의 ‘敬’을 우리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집중’(attentiveness)과 유사한 ‘mindfulness’로 번역하였습니다. ‘mindful’, 온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집중하는 것, 이것이 퇴계의 敬과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퇴계 임종 시의 일화, 자신이 싸놓은 설사 때문에 그가 사랑하던 방안의 매화가 견디기 힘들 것이니 그 매화를 치워주라고 했다던 이야기는 敬의 사람 퇴계가 자신이 죽을 것 같은 고통의 상황에서도 옆의 매화의 괴로움까지 감지하고 알아차릴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늘날『길 위의 집』의 여성작가 이혜경은 몇 년 전 자신의 배고팠던 사정을 감지해 낸 시장터의 한 떡장수 아주머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습니다; 가난하고 배고팠던 시절 밥으로 먹을 떡을 사려고 돈을 내미는 그녀에게 그 돈의 두 배 분량의 떡을 주면서 “아가씨가 무척 허기진 모양이구려. 내 손이 이렇게 커지는 것을 보면.”이라고 응수했다던 그 아주머니의 배려하는 직관력과 집중력, 자신도 바로 그런 마음의 소유자가 되고 싶은 소망으로 그 책을 썼다고 후기를 적고 있습니다.
이렇게 전통적으로 한국 사람들과 특히 한국 여성들의 배려하는 집중력은 뛰어난 것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오늘날 우리 교회 안의 모습, 우리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어떤가 생각해보아야겠습니다. 지난주에 한국여성신학회는 2005년이 일제 식민지 통치로부터 해방된 지 60주년을 맞이한 것을 기념하여 ‘광복 60주년과 여성신학’이라는 제목의 심포지엄을 열었습니다. 여기서 여성 성서학자 최영실은 오늘날 우리의 상황을, 해방 60년이 된 것이 아니라 분단 60년의 상황으로 보고, 남과 북이 나뉘어져서 서로가 강대국을 끌어들여서 싸우고 있는 상황을 과거 이사야 시절의 이스라엘 상황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 때 예언자 이사야가 예루살렘이 강대국에게 멸망당할 위기에서도 물질과 부를 추구하며 위기에 대한 어떠한 감각과 관심도 없이 안일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질책하며, 그 종교지도자들을 사치와 안일에 빠져있는 '여인들'로 비유하며 다음과 같이 외친 것을 상기시켰습니다;
“안일하게 사는 여인들아, 일어나서 나의 목소리를 들어라. 걱정거리 없이 사는 딸들아,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라. 걱정거리가 없이 사는 딸들아, 일 년이 채 되지 못하여 몸서리 칠 일이 생길 것이다. 포도농사가 망하여 거둘 것이 없을 것이다. 안일하게 사는 여인들아, 몸부림쳐라. 걱정거리가 없이 사는 여인들아, 몸서리쳐라. 맨몸이 되도록 옷을 다 벗어버리고 베로 허리를 둘러라.”
주후 70년 또 한 차례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강대국 로마에 의해 짓밟힘으로써 유대가 완전히 망하게 되는 일을 겪습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이 일을 앞에 두고 앞으로 되어질 일에 깊이 비통해 하며 눈물로써 탄식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그러나 지금 너는 그 길을 보지 못하는구나. 그 날들이 너에게 닥칠 것이니, 너의 원수들이 흙 언덕을 쌓고, 너를 에워싸고, 사면으로부터 너를 공격하여서, 너와 네 안에 있는 네 자녀들을 짓밟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얹혀 있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너를 구원하러 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누 19:42-44)
8. 어떻게 하다가 우리가 이와 유사한 끔찍한 비극이 닥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도 감수성과 집중력을 잃어버리고 안일하게, 사치와 부만을 추구하며, 걱정거리 없이 살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집중력을 다시 회복하고, 그래서 다시 우리 주변과, 우리 사회와 국가의, 자연의 고뇌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가 읽었던 성서본의 맨 앞의 ‘영생’에 관한 질문과 관심을 다시 상기해봅니다. 오늘 우리는 물질과 부와 사치를 추구하며 영생에 관한 관심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아니 십자가의 보혈과 부활을 되내이며 이미 다음 생까지도 보장받았다고 외치면서, 걱정 없이, 물질과 강대국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며, 귀를 막고 보지 않으며, 마음을 닫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영생’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삶’과 관련하여 또 다시 등장하는 사마리아 수가라 여인의 이야기, 그녀는 자신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 예수에게 순순히 물을 주는 대신, “당신은 유대사람인데, 왜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요 4:9)라고 도전하면서 당시 ‘구원은 유대로부터 온다’는 유대인들의 차별의식에 이의를 제기하고, “이 산 위에서도 아니고, 예루살렘에서도 아닌 데서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가 올 것이다”라는 예수의 대답을 받아냈습니다. 앞의 최영실 교수는 당시 이방인으로, 더러운 자들로 취급받던 이 사마리아 여인의 도전을 그녀의 민족의식으로 해석해주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그녀의 항의를 그녀의 집중력, 평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 ‘영생’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던 그녀의 집중력의 표현으로 보고 싶습니다.
오늘 한국 사회가 그렇게 관심하고 각 개인과 가정과 사회가 모든 것을 쏟아 넣는 교육만 보더라도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그러한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집중력을 키우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베이유는 말합니다; “우리들을 신에게 가까이 다가가게 하지 못하는 학문은 아무 가치가 없다.”, “진리는 진리로써 추구되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써 추구된다.”고 했습니다. 선에 관한 관심을 가르치지 않는 곳에서는 진리에 대한 관심도 지속될 수 없다고 본 그녀는, 그래서 종교교육이 실천상의 많은 오류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에게 선에 대한 추구를 가르쳐주기 때문에 학교에서 통합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들의 의식 속에 항상 ‘영생’에 대한 물음을 생생히 유지하는 것,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모든 눈에 보이는 것의 뿌리가 되고 방향성이 되는 것에 대한 관심을 놓치지 않는 것,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가르쳐주신 예수의 삶이 바로 그랬고, 우리도 그 모습을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이러한 멸시받는 이방인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예수님 이야기는 그러나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때의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그랬고, 오늘의 우리에게도 삶의 궁극적인 관심이 되는 ‘영생’에 관한 질문과 관련하여서 사마리아인이 등장하는데, 오늘 우리가 읽은 ‘선한 사마리아인’과 더불어 요한복음 4장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수가라 우물가에서의 여인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2. 한 율법학자가 예수에게 묻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 반문하시기를,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느냐?” 대답하기를 “네 마음(heart)과 목숨(soul)과 힘(strength)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재차의 질문에 바로 이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3. 이러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해봅니다. 당시 이 질문을 했던 율법학자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보면, 그는 그래도 오늘의 우리와는 다르게 끊임없이 ‘영생’에 관한 질문을 묻고 있었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오늘의 우리가 지금 당장의 먹고 사는 일과 ‘利’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것 때문에 옆의 사람들과 싸우느라고 깨어있는 시간의 거의 전부를 보내고 있는 것과는 달리 그는 그래도 일상의 대화에서 ‘영생’에 관한 언급과 질문을 할 정도로 궁극적인 것에 대한 관심을 지녔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이 알기에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할 줄도 모르고, 자신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해주는 성결법도 잘 지키지 못하며, 온갖 이방적인 것과 섞으면서 잡종처럼 살아가는 ‘사마리아인’을 들어서 바로 그 영생에 이르신 길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여행길에 강도 만나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의 스러지는 숨소리를 듣고서, 그를 우선 자기가 가진 것으로 치료해주고, 그가 온전해질 때까지 보살펴줄 것을 이웃에게 다시 부탁하고, 비용에 대한 배려도 섬세하게 조정하여서 끝까지 책임지는 배려와 仁의 마음을 그 카드로 밝히신 것입니다.
4. 이렇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해서 20세기 프랑스의 여성철학자로서 知와 行의 관계에 대해서 어느 누구보다도 래디칼한 물음을 물었던 시몬느 베이유(Simone Weil, 1909~1943)는 아주 인상 깊은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70년대 한국에서도『시몬느 베이유, 불꽃의 여자』라는 제목의 전기가 출판되어서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그녀는 20세기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깊이 목도하고서 노동운동에 깊이 관여했던 철저한 도덕적 의지의 철학자였습니다. 신념과 생활태도 사이의 간극을 메우려고 죽기까지 노력한 그녀는 “신은 올바른 행동에 의해서만 생각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존재의 핵심을 ‘관계’(relation)로 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모든 기도와 학문과 공부란 바로 이 존재들의 관계를 찾아내고 포착할 수 있는 ‘집중’(attention, attentiveness)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스스로가 철학교수의 직을 포기하고 노동운동에 투신하여 세상의 ‘중력’과 ‘필연성의 법칙’을 몸으로 경험하면 할수록 그녀는 또 다른 존재의 법칙인 ‘은총의 법칙’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있어서 세계는 모두 신의 현현의 장소입니다. 우주와 세계의 질서, 세상의 아름다움이란 이 세상 필연성 법칙의 실제에도 불구하고 하찮은 풀 한 포기의 존재에서도 우리에게 다가오기를 원하는 신의 현재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우리가 신앙의 한 표현으로 행하는 기도와 세계의 대상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 행하는 공부를 하나로 봅니다. 공부와 학문이란 이 신의 모습과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인데, 그것은 ‘집중’을 통해서 존재들의 ‘관계’를 찾아내는 일로 본 것입니다. 그녀에 의하면 공부는 ‘기도’와 같고, 모든 학문적인 탐구는 “일종의 종교적 명상”입니다. 오늘 학교공부는 일종의 “성례전”과 같고, 그래서 “교육의 본질이란-어린아이를 키우는 것이건, 어른을 위한 것이건, 또는 자기교육이라 하더라도- 바로 이러한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움으로 인해서 행위에로의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기도와 명상의 질은 ‘집중’에 달려 있습니다. 그녀에 따르면 집중이란 우리의 사고를 일단 정지시키고 우리 정신에 대상이 침투할 수 있도록 어떠한 편견도 없이 자신을 비워두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온전히 비우는 것을 통해서 대상과 하나됨을 이루는 집중은, 그녀에 따르면, 궁극적으로는 우주와 하나님을 대상으로 삼고, 그래서 이 우주의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학문인 것입니다. 이 우주의 아름다움은 관계가 만들어갑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사고란 바로 우리 주변과 우리 안의 모든 것이 관계인 그 관계들의 파악과 다름없습니다. 이 관계를 파악하는 집중의 최고 상태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만납니다.
5. 집중의 가장 순수한 형태는 자기 자신을 온전히 비우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도와 욕심, 선입견, 편견, 염려와 걱정을 온전히 비우고 대상에 마음을 쏟는 것입니다. 베이유에 따르면 인간의 가장 고귀한 작업인 참된 창조는 몰아의 경지를 의미하며, 창조적인 집중이란 우리의 집중을 지금 여기서는 잘 보이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것, 스러져가서 하찮게 보이는 것에 귀 기울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바로 우리가 오늘 읽은 누가복음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이러한 맥락에서 풀고 있습니다; 여기서 길가에 무력하게 누워서 죽어가는 무명의 육체 속에는 인간성(생명의 소리)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당시 신앙생활을 누구보다도 열심히 하고 교육을 많이 받았다고 여겨지던 제사장도, 레위인도 그 꺼져가서 거의 희미해져가는 인간성의 외침을 듣지 못했고,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걸음을 멈추고 이 사라져가는 인간성에 시종일관되게 주의를 기울여서 거기서 다시 그 인간성을 감지해낸 사람은 바로 당시의 이방인인 사마리아인이었고, 이러한 사마리아인의 행동이야말로 바로 창조적인 집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집중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통해서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내는 창조의 일을 행할 수 있었습니다. 베이유는 ‘신앙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증거니라’ 라는 바울의 말도 바로 이러한 창조적인 집중력으로 풀고 있고, 신앙을 사랑과 마찬가지로 집중하는 순간에 나타나는 그런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6. 불행한 사람은 집중하지 못합니다. 우리 자신이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인가 아니면 불행한 사람인가를 구별할 수 있는 시금석은 우리가 얼마나 집중하는 능력으로 주변의 고뇌하는 소리들을 들을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불행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빠져있거나 실망하여서 관계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베이유는 그래서 노동자들이 불행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단지 빵만이 아니라 詩이고, 집중하는 훈련이며, 이들의 육체적 노동이 우주와 연결되어 있고 세상의 아름다움과 접촉되어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불행한 사람은 자기 자신 속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자신과 다른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차이를 참을 수 없어합니다. 자신이 세워놓은 가치관과 신앙, 자신이 속해 있는 그룹 이외의 다른 대상에 대해 매우 배타적이거나 무관심합니다. 여기에 반해서 이 세상의 존재하는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고백하는 시몬느 베이유는 다름에 대하여 매우 예민합니다. 그녀의 마음은 존재의 전 영역을 포괄하는 사랑으로 가득 차서 이 모든 영역을 포괄하지 못하는 역사적 사실로서의 교회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catholic’ 교회가 본래의 이름대로 ‘보편적’이 되지 못하는 현실을 알고서, 그녀는 세 번의 신비한 하나님 체험을 하지만 교회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이 모든 영역을 모두 통합해서 본래적인 보편성을 지닌 종교를 추구하게 되었고, 보편성 그것 자체로서의 종교, 신과 기독교를 표현하기 위해 ‘하나님’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대신 “이 세상이 아닌 현실”과 같은 말로 하나님을 언급하기 원합니다. 그녀는 하나님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 이유로 “기독교를 모르는 사람들도 모두 모이기 위해서는 새로운 용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소망으로 기독교 이외의 모든 인간적인 전통, 거기에는 중국의 예술과 종교전통도 포함되었고, 그리스인들의 사유체제도 포함되며, 수학과 과학의 영역도 포함되는데, 이러한 인간적인 종교적인 전통에 나타난 것에 대한 사랑 때문에 교화 밖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하나님이 이 물질적인 시대 속에서 “진실을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바치면서도 교회 밖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있기를 바라시는지”를 진지하게 물으면서, 우리 시대에 새롭게 요구되는 “새로운 성스러움”(une saintete nouvelle)에 대해서 말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자신은 유태인으로서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왔지만 다시 조국 프랑스의 고통에 동참하고자 영국을 거쳐 프랑스로 돌아가기를 고대하며 금욕하다가 요절한 베이유의 삶은 이러한 “새로운 성스러움”의 실현이었고, “이 세계의 바깥에 놓여 있는 현실”의 구체화였습니다. 그녀의 삶과 사고는 가장 초월적이면서 동시에 구체적이었고, 지성과 윤리, 종교와 학문, 영성과 이성, 배움과 실천의 하나됨을 추구한 지극한 예라고 하겠습니다. 그녀에게 공부란 ‘기도’와 같은 것이며, 그 기도란 다르게 표현하면 ‘집중’인 것입니다.
7. 서구의 한 한국학자는 우리나라 퇴계의『聖學十圖』를 영역하면서 퇴계의 ‘敬’을 우리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집중’(attentiveness)과 유사한 ‘mindfulness’로 번역하였습니다. ‘mindful’, 온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집중하는 것, 이것이 퇴계의 敬과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퇴계 임종 시의 일화, 자신이 싸놓은 설사 때문에 그가 사랑하던 방안의 매화가 견디기 힘들 것이니 그 매화를 치워주라고 했다던 이야기는 敬의 사람 퇴계가 자신이 죽을 것 같은 고통의 상황에서도 옆의 매화의 괴로움까지 감지하고 알아차릴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늘날『길 위의 집』의 여성작가 이혜경은 몇 년 전 자신의 배고팠던 사정을 감지해 낸 시장터의 한 떡장수 아주머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습니다; 가난하고 배고팠던 시절 밥으로 먹을 떡을 사려고 돈을 내미는 그녀에게 그 돈의 두 배 분량의 떡을 주면서 “아가씨가 무척 허기진 모양이구려. 내 손이 이렇게 커지는 것을 보면.”이라고 응수했다던 그 아주머니의 배려하는 직관력과 집중력, 자신도 바로 그런 마음의 소유자가 되고 싶은 소망으로 그 책을 썼다고 후기를 적고 있습니다.
이렇게 전통적으로 한국 사람들과 특히 한국 여성들의 배려하는 집중력은 뛰어난 것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오늘날 우리 교회 안의 모습, 우리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어떤가 생각해보아야겠습니다. 지난주에 한국여성신학회는 2005년이 일제 식민지 통치로부터 해방된 지 60주년을 맞이한 것을 기념하여 ‘광복 60주년과 여성신학’이라는 제목의 심포지엄을 열었습니다. 여기서 여성 성서학자 최영실은 오늘날 우리의 상황을, 해방 60년이 된 것이 아니라 분단 60년의 상황으로 보고, 남과 북이 나뉘어져서 서로가 강대국을 끌어들여서 싸우고 있는 상황을 과거 이사야 시절의 이스라엘 상황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 때 예언자 이사야가 예루살렘이 강대국에게 멸망당할 위기에서도 물질과 부를 추구하며 위기에 대한 어떠한 감각과 관심도 없이 안일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질책하며, 그 종교지도자들을 사치와 안일에 빠져있는 '여인들'로 비유하며 다음과 같이 외친 것을 상기시켰습니다;
“안일하게 사는 여인들아, 일어나서 나의 목소리를 들어라. 걱정거리 없이 사는 딸들아,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라. 걱정거리가 없이 사는 딸들아, 일 년이 채 되지 못하여 몸서리 칠 일이 생길 것이다. 포도농사가 망하여 거둘 것이 없을 것이다. 안일하게 사는 여인들아, 몸부림쳐라. 걱정거리가 없이 사는 여인들아, 몸서리쳐라. 맨몸이 되도록 옷을 다 벗어버리고 베로 허리를 둘러라.”
주후 70년 또 한 차례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강대국 로마에 의해 짓밟힘으로써 유대가 완전히 망하게 되는 일을 겪습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이 일을 앞에 두고 앞으로 되어질 일에 깊이 비통해 하며 눈물로써 탄식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그러나 지금 너는 그 길을 보지 못하는구나. 그 날들이 너에게 닥칠 것이니, 너의 원수들이 흙 언덕을 쌓고, 너를 에워싸고, 사면으로부터 너를 공격하여서, 너와 네 안에 있는 네 자녀들을 짓밟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얹혀 있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너를 구원하러 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누 19:42-44)
8. 어떻게 하다가 우리가 이와 유사한 끔찍한 비극이 닥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도 감수성과 집중력을 잃어버리고 안일하게, 사치와 부만을 추구하며, 걱정거리 없이 살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집중력을 다시 회복하고, 그래서 다시 우리 주변과, 우리 사회와 국가의, 자연의 고뇌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가 읽었던 성서본의 맨 앞의 ‘영생’에 관한 질문과 관심을 다시 상기해봅니다. 오늘 우리는 물질과 부와 사치를 추구하며 영생에 관한 관심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아니 십자가의 보혈과 부활을 되내이며 이미 다음 생까지도 보장받았다고 외치면서, 걱정 없이, 물질과 강대국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며, 귀를 막고 보지 않으며, 마음을 닫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영생’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삶’과 관련하여 또 다시 등장하는 사마리아 수가라 여인의 이야기, 그녀는 자신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 예수에게 순순히 물을 주는 대신, “당신은 유대사람인데, 왜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요 4:9)라고 도전하면서 당시 ‘구원은 유대로부터 온다’는 유대인들의 차별의식에 이의를 제기하고, “이 산 위에서도 아니고, 예루살렘에서도 아닌 데서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가 올 것이다”라는 예수의 대답을 받아냈습니다. 앞의 최영실 교수는 당시 이방인으로, 더러운 자들로 취급받던 이 사마리아 여인의 도전을 그녀의 민족의식으로 해석해주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그녀의 항의를 그녀의 집중력, 평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 ‘영생’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던 그녀의 집중력의 표현으로 보고 싶습니다.
오늘 한국 사회가 그렇게 관심하고 각 개인과 가정과 사회가 모든 것을 쏟아 넣는 교육만 보더라도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그러한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집중력을 키우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베이유는 말합니다; “우리들을 신에게 가까이 다가가게 하지 못하는 학문은 아무 가치가 없다.”, “진리는 진리로써 추구되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써 추구된다.”고 했습니다. 선에 관한 관심을 가르치지 않는 곳에서는 진리에 대한 관심도 지속될 수 없다고 본 그녀는, 그래서 종교교육이 실천상의 많은 오류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에게 선에 대한 추구를 가르쳐주기 때문에 학교에서 통합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들의 의식 속에 항상 ‘영생’에 대한 물음을 생생히 유지하는 것,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모든 눈에 보이는 것의 뿌리가 되고 방향성이 되는 것에 대한 관심을 놓치지 않는 것,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가르쳐주신 예수의 삶이 바로 그랬고, 우리도 그 모습을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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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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