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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요

마가복음 백소영............... 조회 수 2527 추천 수 0 2008.08.25 14:50:07
.........
성경본문 : 막4:24-25 
설교자 : 백소영 교수 
참고 : 새길교회 2005. 6. 5 주일설교/ 이화여자대학교 강사 
샬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문안합니다. 여러분들께는 많이 낯선 얼굴일터라 제 소개를 잠깐 해야 할 듯 싶습니다. 한 열흘 전 쯤인가, 홍순택 간사님께서 전화를 하셨어요. 주보를 만드는데, 다음 주 설교자 소개를 뭐라 써야 하는지 묻는 전화였습니다. 제 마음에서 불쑥 생각난 대답은 “‘편의상 집사’요.”였지만 사정을 모르는 홍 간사님이 난처해 하실까봐 ‘글쎄요.’하고 얼버무려 버렸습니다. 지금 제가 다니고 있는 교회에서는 제 타이틀이 ‘편의상 집사’입니다.

   10년을 객지생활 하다가 작년 이맘때 즈음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살게 된 동네에서 제일 가까운 감리교회를 나갔습니다. 친정 아버지께서 감리교회 목회자로 계시다 은퇴하셨고, 저 역시 미국 감리교회에서 목사안수 과정을 밟기도 한지라 자연스레 그냥 동네 감리교회를 갔습니다. 새신자 심방을 오신 목사님과 심방전도사님께서 집요하게 직분을 물으시더군요. 개인적인 집안 사정이지만 아이 문제로 저는 목사 안수 과정을 도중에 그만 두었습니다. 그러니 뭐라고 소개를 할지... 그냥 ‘성도’라고 했더니 완전 초짜 신도인줄 알고 그 다음주부터 ‘새신자 성서교육’ ‘기독교의 기본교리’ ‘그리스도인의 생활’... 뭐 이런 프로그램에다가 저를 강제로 등록시켜 놓으셨더군요. 그리고 속장님, 여신도회 회장님이 주중에도 끊임없이 연락, 방문하여 신앙입문에 관한 말씀들을 하시는 거예요. 지금은 많이 좋아졌습니다만 제 아이가 유난히 사회적응에 고생을 하는 바람에 주일에 목회활동이 불가능해서 하던 안수과정도 그만둔 마당이었는데, 교회에서 강권하는 새신자 프로그램을 다 참석하려면 주일 5시가 되어도 못 끝낼 지경이었습니다. 환경이 급격히 바뀐 상황에서 아이는 도통 떨어지질 않았고... 그래서 난처해진 저는 어느 날인가 목사님께 이실직고를 했습니다. “사실은요. 제가 모태신앙이고, 아버님도 감리교 목사님이고, 저는 신학공부를 했고, 지금 신학박사이고, 미국 감리교에서 안수과정을 하다가 현재까지는 certified candidate인 상태입니다.” ‘그러니 이런 기초반에서는 빼 주세요.’하는 것이 제 부탁이었지요. 제 말을 듣고 목사님께서는 고민스런 표정을 지으시더니 한참 만에 그러시더군요. “그럼, ‘편의상 집사’로 합시다.” 처음엔 그게 무슨 소린가 했습니다. 친절하게 덧붙여 설명하시는데, “이 교회에서 내 지도 하에 목회활동을 할 것이 아니라면 괜히 목회자 타이틀로 불리면 피차에 곤란하지 않겠느냐. 그냥 ‘편의상 집사’라고 하자. 그러면 그 귀찮은 프로그램들 안 해도 되고...” . . . 그래서 지금 저는 ‘편의상 집사’입니다.

이 시원찮은 타이틀을 가진 제게 새길 교회에서 설교부탁을 해 주셨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인 것 같습니다. 제가 학위논문으로 쓰고 2003년 9월부터 2004년 7월까지 <기독교 사상>에 연재했던 무교회에 대한 글 때문이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교회주의’ ‘교회지상주의’에 꼭꼭 갖힌 교파교회, 물질문명과 손잡고 걸어가는 물량주의적 대형교회, 산 신앙은 없고 온통 직분과 직제와 예전의식과 교리들만 지키고 있는 껍데기뿐인 교회, 하나님의 말씀은 오간데 없고 주일 하루 종일 온통 사람소리만 들리는 인간중심적인 교회, 이런... 생명 없는 곳에서 나와서 산 신앙 가지고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해라’하시는 명령에 충실히 순종하며 살았던 무교회에 대한 글이었기 때문에, 한국교회의 ‘새길’을 찾는 새길 공동체에게 매력적이었겠구나. 그리 생각했습니다. <기독교사상>에 연재되었던 11편의 글들을 모아서 이번 5월에 단행본이 나왔는데, 길희성 선생님께 추천사를 부탁드렸더랬습니다. 제일 열심히, 또 제일 진지하게 읽고 반응해 주신 분이라서요. 평소에 안면이 있던 분도 아니고, 어찌 그리 열심히 읽어주셨나 생각했었는데... 추천사를 받아 읽어보니 이유를 알겠더라구요. 한 구절만 인용하겠습니다.

  “나는 기독교사상의 구독자이나 애독자는 못 된다. 달마다 도착하는 잡지를 때로는 한편의 글도 읽지 못하고 팽개쳐두는 경우도 많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단지 무교회에 관한 글이었기에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의 글을 읽게 되었다.”
그러니... ‘나이 40 이전에는 선생인체 하지 말라’는 말도 배운바 있고, 더구나 성스러운 말씀을 선포하는 강대상에 이렇게 덥썩 올라와버린 제가, 감히 새길 교회 여러분께 들려드릴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면 그건 단 하나 무교회다. 그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해서 무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소개해드리려 무례하게 이 자리에 섰습니다.

본론:
    오늘 설교제목을 보시고 의아해하셨을 분들도 계실 줄 압니다.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요.” 언뜻 듣기에 무슨 독점자본주의의 논리 같은 제목입니다. 빌딩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 목 좋은 곳에 땅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 자본이 많아 여기저기 전망 좋은 기업에 주식 투자를 많이 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더 받을 것이요... 하는 말인가? 싶어 당황하셨다면 안심하셔도 됩니다. 이게 제 말이 아니라 예수님 말씀이거든요. 언제 예수님께서 독점자본가 같은 말씀 하신 적 있나요?

   그렇다고 요즘 유행하는 ‘물질적 축복론’도 아닙니다. 예수 믿고 복 받아서 부자된 사람들, 그렇게 계속해서 교회에 헌금도 많이 하고 목회자를 하나님 보듯 헌신적으로 섬기면 더 많은 물질적 축복, 건강의 축복, 자녀들 척척 좋은 대학 붙고 남편들 척척 승진하고... 그런 복을 받을 거다. 하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요.” 이건 마가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말씀입니다. 성서학자들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다 구체적인 신앙공동체의 특수한 정황을 반영하면서, 예수의 말씀과 생애를, 자신들만의 편집의도를 가지고 서술했다고 말합니다. 똑 같은 예수님의 말씀도 어디에 위치하냐, 어떤 식으로 편집되었느냐에 따라 읽는 신자에게 다가오는 느낌이 달라집니다. 저는 성서신학자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성격상 주석을 보고 “그랬다더라”를 전하는 것은 참 불편해합니다. 해서 지금 제가 제 나름대로 기도하고 묵상한 결과로 어줍잖게 하고 있는 이 성서해석이 전문가들의 눈에 어찌 보일지 걱정스럽기는 합니다.

   함석헌 선생님이 ‘하는 생각’하고 ‘나는 생각’을 분리해서 정의하신 적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이성을 가지고 현실의 문제, 성서의 가르침 둘 다 잡고서 열심히, 진지하게, 사력을 다해 ‘하는 생각’-이거 인간의 생각인데-, 이 ‘하는 생각’을 자꾸 하다보면 어느 순간 ‘나는 생각’ 즉 하나님께서 내 마음 가운데 주시는 생각이 난다 합니다. 그 ‘나는 생각’을 받으려면 자꾸 생각을 ‘해야 한다’고 하셨지요. 전 이 말이 참 와 닿았었어요. 그래서 성경묵상에 많이 활용하고 있습니다. ‘하는 생각’ 많이 하면서 기도하면 언젠가 ‘나는 생각’ 주신다는 이 말에 용기를 얻어 제가 해본 생각을 여러분과 나누어 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질하여 주는 만큼 너희에게 되질하여 주실 것이요. 덤으로 더 주실 것이다.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요.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이 말씀이 마가복음 전체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은 이러하다.”하는 선포적 첫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예수, 우리가 3년 동안 따라다녔고, 십자가와 부활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던 그리스도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곧 세례요한의 이야기가 나오고, 그에게 세례 받는 예수의 이야기, 광야의 시험 이후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파하시는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선포와 함께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십니다.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고, 병자들을 고치시는 이야기들이 연이어 등장합니다. 예수의 병 고치는 능력은 삽시간에 소문을 타고 이웃 마을들로 전해지고, 많은 무리들이 병 고침을 받으려고 예수가 거처하는 시몬 베드로의 집으로 몰려옵니다. 마가복음은 기록하기를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는 새벽 미명에 아직 날도 채 밝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십니다. 병 고침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예수를 기다린다는 제자들의 보고에 그는 ‘내가 전도하러 왔다.’고 하십니다. 전도. 도를 전하러 오셨다는데 그 도는 무얼까. 그 뒤에 이어지는 보고들도 이웃마을에서, 혹은 회당에서 만나는 병자들을 고치시는 이적행위들이 몇 사례 더 등장합니다. 이적행위를 하나님 나라 선포의 하나의 상징으로 보는 해석들이 많이 있는데, 오늘의 중점은 거기에 있지 않으므로 그 다음 장면으로 가 봅니다.

   열 두 제자를 다 세우시고 이제 본격적으로 가르침을 시작하시는 예수께서는 4장부터 일련의 비유들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십니다. 유명한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나오고 ‘등경 위의 불빛’ 이야기가 나오고, ‘자라나는 씨의 비유’ ‘겨자씨 비유’가 연이어, 4장에 등장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중 ‘등경 위의 불빛 비유’에 바로 이어서 나오는 구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등불을 가져다가 말 아래에나, 침상 아래에 두겠느냐? 등경 위에다가 두지 않겠느냐? 숨겨 둔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 둔 것은 나타나기 마련이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이렇게 말씀하신 뒤에 연이어 나오는 구절이 오늘 본문입니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질하여 주는 만큼 너희에게 되질하여 주실 것이요. 덤으로 더 주실 것이다.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요.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언뜻 들으면 저희가 쌀 퍼 담을 때 쓰는 되질용 그릇 같은 것으로 내 것을 많이 퍼주면 하나님께서 더 많이 주실거다. 이런 이야기처럼 들리는데... 그렇게 이해하고 나면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요.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이 부분의 해석이 난감합니다. 궁금해져서 헬라어 원어 성경도 읽어보고 영어번역본의 여러 버전들도 들추어 보고 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New Revised Standard Version이 제일 원문에 가깝게 직역되어 있다고 합니다.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And he said to them, "Pay attention to what you hear; the measure you give will be the measure you get, and still more will be given you.  For to those who have, more will be given; and from those who have nothing, even what they have will be taken away.

‘너희는 새겨들어라.’
Pay attention to what you hear.
예수께서는 계속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듣는 것에 주의를 집중하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들과 따르는 무리들, 그리고 지금 이 마가복음을 읽고 있는 독자들은 그럼, 지금까지 무엇을 듣고 있었는가?

   4장 전체 구조에서 생각해 보기로 합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 제자들에게 이를 해석하신 내용의 핵심은 이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내용이 너희들에게 들려질텐데... 길 가, 돌밭, 가시밭, 옥토... 토양에 따라, 즉 듣는 이의 자세에 따라 그 결실이 달라질 것이라는 비유였습니다. 이어지는 비유에서, 감추어지지 않은 채 이제 등경 위에 올라가 세상에 드러나게 된 불빛은 바로 예수에 의해 선포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이 생명의 말씀은, 이제 드러내졌다는 선포입니다. 그 선포에 바로 뒤이어 오늘의 본문이 나오는 겁니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질하여 주는 만큼 너희에게 되질하여 주실 것이요. 덤으로 더 주실 것이다.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요.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자 이제 너희 귀에 들려지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주의하여 귀를 기울여라. 너희가 진지하게 귀 기울이고 곱씹고 생각에 생각을 또 해보고 그 메시지로 씨름을 해보고... 그거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더 받을거다. ‘아하!’의 체험, 하나님 나라의 비밀, 이제 드러나는 그 나라의 모습과 질서를 더 많이 알게 될 거다. 그 노력을 보고 하나님께서 너희들이 하는 만큼으로 되질하여 주시되 덤으로 더 주실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고 나면 뒤의 구절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요.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기게 될 것이라’는 쉽게 받아들여집니다. ‘가지지 못한 사람’, 마치 길 가에 뿌려진 씨 마냥,  모두에게 동등한 기회로 공공의 장소에서 예수의 입을 통해 이렇게 뿌려지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 그 씨를 마음에 심어놓지 않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씨마저도 빼앗기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사탄이 와서 그 뿌려진 말씀을 곧바로 빼앗아 간다는 말씀이 4장 16절에 나와 있습니다. 미처 우리 마음 밭에 뿌리 내려 싹 틔우고 자랄 새도 없이 하나님 나라, 그 비밀의 씨를 빼앗기게 될 거라는 말씀입니다.

   연이어 나오는 ‘자라는 하나님 나라’의 비유도 연결이 쉽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마치 사람이 씨를 뿌리는 거와 같다. 뿌려 놓은 씨앗이 점차로 자라는 거다. 추수 때가 될 때까지 땅이 스스로 열매 맺는 거다. 처음에 싹트고 자라서 이삭이 될 때까지 자라는 거다.’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는데, 사람의 마음을 땅, 밭으로 보면 금새 이해가 됩니다.

   곧이어 ‘겨자씨 비유’가 나옵니다. 마치 땅에 심기워진 작은 겨자씨 같은 메시지이지만 그게 우리가 생각함의 되질을 계속 하는 동안 싹이 트고 자라서 나중에는 모든 풀보다 더 크고 가지를 내어 공중의 새들에게 큰 그늘을 제공하는 유익한 나무가 된다는 겁니다.

얼마나 공감이 되는 해석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저로서는 ‘나는 생각’의 경험을 하게 된 내용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계속 자란다는 것. 우주적인 차원에서만 계속 자라는 것이 아니고, 나. 믿고 생각하는 나의 마음 밭 안에서도 하나님 나라가 자꾸 자라는 것이라는 것. 씨가 일단 뿌려지고 나면, 그거 자라게 하는 것은 나의 좋은 땅됨. 옥토됨이라는 것. 옥토됨이라는 것은 많이 되질하는 것. 받은 말씀을 많이, 진지하게, 끊임없이 되새기고 곱씹는 것이라는 것. 이 말씀의 묵상 끝에 제가 깨닫게 된 것이 있다면 이런 것이었습니다.

무교회가 저에게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바로 여기 있었습니다. 무교회는 한 마디로 말하자면 완성된 형태의 하나님 나라, 그거 받기까지 ‘지금’ ‘여기’에서 되질하기를 그치지 말자. 영원히 되질하자. 하는 정신입니다. 무교회라고 했더니 어떤 분은 무교, 샤먼 집단의 일종이냐고 묻는 분들도 계십니다. 여기서 ‘무’는 없을 무(無)자입니다. ‘교회 없이’ 신앙 한다는 말입니다. 무교회는 신앙의 제도화를 가장 꺼리는데, 제도화가 되고 나면 산 신앙이, 그 생명력이 죽게 된다고 믿어서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영원히 저항하는 정신’ ‘제도화되는 것, 교리화되는 것을 영원히 거부하는 정신’이라고 부릅니다. 요즈음 무교회 내에도 껍질로 굳어버린 분들이 많아서 마음 아프지만, 적어도 무교회 정신이랄까, 무교회 원칙이랄까 하는 것은 “끊임없는 저항의 정신”이고 “내 영이 자라고 시대가 자라고 삶의 자리가 변화함에 따라 끊임없이 거듭나는 새 말씀을 받아 말하는 정신”입니다.

   사실 무교회는 일본에서 시작했습니다. 우치무라 간조가 처음 자신의 신앙모임을 ‘무교회’ mukyokai라고 불렀거든요. 서양식으로 제도화된 교파 기독교는 싫다 해서 일본식으로 한다고 ‘두 개의 J' 즉 Jesus and Japan을 가지고 씨름하다 만든 신앙공동체였습니다. 사무라이의 정신과 기독교 정신을 변증법적으로 통합해서 만들었다는데, 이런 시도를 가능케 한 것이 바로 무교회 정신입니다. 유한한 인간에게 절대, 보편이란 없다. 그건 하나님께 속한 용어다. 유한한 인간에게는 언제나 구체적으로 주어진 시간과 공간이 있는 것이니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해도, 그게 독특하고 구체적인 시대와 공간이 주는 과제들 속에서 끊임없이 재고되어야 한다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일본에 온 기독교는 ‘일본적’이어야한다는 겁니다.

   그 정신에서 영감을 얻어 그럼 기독교가 한국적이려면 어떤 모습, 어떤 내용이어야 하나? 그거 고민하면서 시작한 것이 한국의 무교회입니다. 절대로 ‘일본 무교회의 한국 지점’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김교신, 함석헌, 송두용, 정상훈, 유석동, 양인성 이 여섯 분이, 망국의 설움과 뜨거운 신앙심으로 ‘한국적인 순수 신앙 공동체’를 꿈꾸며 출발했던 무교회는 그랬습니다. 우리의 실존적 제한됨을 긍정하고 그 제한된 장에서 끙끙 고민하며 받는 하나님 나라를 시도해 본 겁니다. 식민치하라는 망국의 현실, 그러나 파고 들어가보면 버리기 아까운 귀한 정신문화적 유산들을 많이 물려받은 한국의 종교문화적 전통. 여기에 초월신앙과 역사의식의 긴밀한 결합으로 역사 안에서 용감한 저항의 소리를 내게 하는 예언자적인 정신의 기독교 신앙. 이러한 한국인됨, 그리스도인 됨이라는 두 현실을 꼭 부여잡고서 우리식으로 신앙의 되질, 생각의 되질을 해보자. 한 것이 한국의 무교회입니다. 그래서 공동의 신앙고백으로 내는 월간지 이름도 <성서조선>이라고 했습니다. 성서와 조선을 양 손에 꼭 쥐고 생각의 되질을 하는 공동체다 해서...

   그래서 ‘한국식’으로 한다고 서당에서처럼 모여서 ‘공자왈 맹자왈’ 하듯이 성서연구를 진지하게 하게 되었습니다. 헬라어, 히브리어까지 배워서 열심히 성서를 읽습니다. 처음부터 스스로 생각하는 평신도들의 모임이어놔서 번갈아 인도하며 성서묵상을 나누고 이를 모아 월간지 형식으로 내고 합니다. 사실 제도화를 부정하는 것이 무교회이지만, 제도라는 게, 종교사회학적으로 정의하자면 ‘한 특정한 집단이 함께 살기 위하여 개발한 원형적인 생활방식’이거든요. 이리 본다면 서당식도 일종의 제도는 제도입니다. 다만 서양식 제도 부정하고 한국적 정서에 익숙한 제도를 택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바르다고 봅니다. 어느 개인도 무교회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모임을 열고 생각의 되질을 계속 할 수 있지만, 죽거나 병들거나 해서 더 이상 지속할 수 없게 되면 그 모임도 닫고 내던 잡지도 깨끗하게 접습니다. 인간은 ‘무자격의 존재’ 그러니 아무리 신앙공동체라도 인간이 만든 공동체는 언제나 유한하고 부족한 공동체라는 인식 하에, 완전한 것은 마지막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뿐이다. 그러나 그 나라 받을 때까지 우리 실존 안에서 최선을 다해 되질 해보자. 그리고 나만의 되질은 내 선에서 끝내자. 나의 되질을 우상화하지 말자. 뭐가 우상화냐. 내 이름, 내 신앙고백, 그거 절대화, 교리화해서 후대에 물리고 그 잣대로 신앙생활 하라고 강요하는 것, 그게 우상화입니다. 그래서 무교회에는 직분도 없고 대물림도 없는 게 원칙입니다. 인간들의 모임인 지라 원칙은 이러해도 요즈음 교회에 부끄러울 정도로 자기모순적 행동을 하는 무교회 모임들도 있습니다만, 아직도 무교회 정신을 소유한 분들은 그들을 향해 ‘너희는 무교회라 스스로 이름하지만 무교회 아니다. 무교회는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사는 것이다.’ 하며 비판합니다. 어쨌든 원칙상 무교회는 평등한 관계의 평신도들이 제도적 제약, 교리적 제약, 직분의 위계적 관계 등과 같은 형식적 제약으로부터 자유하여 만나서,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이성으로 진지하게 성서연구하고 시대를 읽고, 기도하는 가운데 받는 말씀으로 하루하루를, 매일을 예배하는 자세로 살아가자는 모임입니다. 삶 가운데 드려지는 예배로서의 ‘이제, 여기 살이’ ‘하루살이’를 하루하루 성실히 하는 동안 하나님의 뜻대로 역사의 방향을 돌리는 데 작은 힘이니마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 그렇게 믿으면서요.

이 공동체를 소개하고 이를 한국교회 개혁을 위한 거울로 제시해 본 것이 제 책이었습니다. 생각의 되질이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길 없는 주류 한국교회. 성령의 감동인지 신들린 자기도취인지 모를 감정적 경험만을 부추키는 성령형 교회, 하나님이 아버지라더니 이제는 담임목사님이 아버지가 되어 유교적 효를 신앙심과 동일시 시켜버린 한국교회, 이제는 사회에서도 찾아볼 길 없는 전제적 군주제를 시행하느라 아들, 사위 다 동원하여 목사직까지 세습하려는 한국교회, 프로그램은 많아서 수요일, 금요일 날마다 교인들을 바쁘게 모아대기만 했지 바른 신앙심 가지고 밖으로 나가서 제대로 살기는 실천하지 않는 ‘노아의 방주형’ 한국교회, 자본주의 물질, 소비, 향락 문명이 극에 달한 한국사회에서 예언자적 비판의 소리는커녕 오히려 사회보다 더 물질적이고 소비적이고 향락적이어서 신년예배도 일류 호텔에서 모이고 임원회 하러 골프장 가고 하는 한국교회. 이런 한국교회를 향해서, ‘밖으로 불려져 나온 평신도들의 공동체’인 무교회적 외침들을 거울삼아 한국교회가 자기반성을 해 보자고 제안했었습니다.

시대와 성서라는 두 재료를 들고서 자기의 실존적 상황에서 스스로 하는 생각의 되질. 그거 할 수 있는 평신도를 길러내는 한국교회가 되자. 이게 제 책의 요점이었는데, 보통 이런 내용의 글들이 나오면 새길 교회 교인들처럼 이미 생각할 줄 아는 분들만 읽으세요. 그래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한 주류 한국교회 평신도들, 그리고 그들이 생각할 줄 알게 되면 큰일 난다. 가진 기득권이 위태하다 여기는 주류 한국교회 목회자분들. 이런 분들이 좀 읽어주십사 싶어 책 제목을 부드럽게 해 보았어요. <우리의 사랑이 의롭기 위하여...> 언뜻 들으면 무슨 수필 제목 같은 제목이지만,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전해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메시지가 이 사회에서 의로운 실천으로 구체화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생각의 되질을 계속하자고 계속 초청중입니다.

저도, 여러분들도, 그리고 한국교회의 목회자, 평신도 모두가 스스로 하는 생각의 되질을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진지하게, 계속, 많이 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받고 또 받고 더 받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받기 위한 생각의 되질... 충성은 열매 중 하나입니다.

결론
제가 ‘편의상 집사’라 축복권은 없지만, 그래도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과 한 자매된 자로서 애정을 가지고 여러분을 축복하고 싶습니다. 충성된 생각의 되질을 계속하시는 가운데... 한국 신앙공동체의 ‘새 길’을 찾으시고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더 많이 받으시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우리를 낳으시고 이 땅에서 우리의 생명이 아름답고 의미있게 자라도록 북돋아주시는 하나님, 저희에게 지혜와 용기를 주셔서 하나님 나라의 그 놀라운 비밀을 더 깊이 깨닫게 하시고, 저희들의 깨달은 바를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내게 하소서. 우리에게 그 본을 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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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0 마태복음 이렇게 기도하라 마6:5-6  류상태 형제  2008-08-25 1889
1339 전도서 코헬렛의 회고 전1:1-11  김기동 자매  2008-08-25 2077
1338 누가복음 예수 따르미 정체성 눅14:26-27  조혜자 자매  2008-08-25 1874
1337 창세기 이리 가까이 오십시오 창45:1-5  홍순택 형제  2008-08-25 1644
1336 마가복음 사람을 위하여 막2:23-28  류상태 형제  2008-08-25 1692
1335 마태복음 다 내게로 오너라 마11:28-30  오강남 교수  2008-08-25 1992
1334 히브리서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히12:1-3  이정숙 교수  2008-08-25 2783
1333 히브리서 믿음의 실상 히11:1~2, 17~19  노희정 형제  2008-08-25 2532
» 마가복음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요 막4:24-25  백소영 교수  2008-08-25 2527
1331 에스겔 화해의 도 겔37:15-23  홍근수 형제  2008-08-25 1752
1330 누가복음 영생과 선한 사마리아인의 집중(력) 눅10:25-37  이은선 교수  2008-08-25 4014
1329 룻기 두 과부 이야기 룻1:15-17  김기동 자매  2008-08-25 3046
1328 누가복음 시중드는 이로 오신 예수 눅22:4-27  홍주민 목사  2008-08-25 1876
1327 요한일서 사랑과 노동 요일4:7-8  배현주 교수  2008-08-25 2109
1326 호세아 도마의 질문 호6:1~3  왕대일 목사  2008-08-25 2597
1325 아모스 신앙생활의 기초와 기본 암3:1-13  박봉수 목사  2008-08-25 3646
1324 골로새서 속지 말라 골2:6-8  강종수 목사  2008-08-24 2755
1323 아가 떠남에서 돌아오라 아5:2-6:13  박봉웅 목사  2008-08-22 2231
1322 아가 솔로몬의 연의 행렬 아3:6-5:1  박봉웅 목사.  2008-08-22 2018
1321 아가 주님의 방문 모습 아2:8-3:5  박봉웅 목사  2008-08-22 1682
1320 아가 내마음에 사랑하는 자 아1:1-2:7  박봉웅 목사  2008-08-22 2551
1319 시편 가난하고 상한마음 시109:22  김남준 목사  2008-08-22 2166
1318 요한계시 연단과 믿음 계3:18  김남준 목사  2008-08-22 2579
1317 고린도후 연단과 의뢰 고후1:8~9  김남준 목사  2008-08-22 1757
1316 빌립보서 연단과 충성 빌2:22  김남준 목사  2008-08-22 2340
1315 잠언 온전한 삶과 연단된 마음 잠17:3  김남준 목사  2008-08-22 2452
1314 시편 온전해진 자의 섬김을 받으심 시101:6  김남준 목사  2008-08-22 2032
1313 시편 하나님을 섬기는 예절 시1:1-6  조용기 목사  2008-08-19 1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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