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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45: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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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홍순택 형제 |
참고 : | 새길교회 2005. 8.14 주일설교 |
내일은 광복절입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35년 식민지배를 벗어난 날입니다. 광복의 기쁨, 해방의 기쁨을 마음껏 누려도 좋겠습니다만,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광복의 기쁨은 곧 이어진 외세의 개입과 내분, 그리고 분단으로 인해 빛을 잃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분단은 지속되고 있고 그 아픔으로 인해 광복절은 빛을 잃고 있습니다. 광복절에 해방의 기쁨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분단 현실과 통일에 대한 열망을 되새기는 우리의 현실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번 광복절에도 어김없이 8.15경축행사를 둘러싸고 남과 북이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으며 남쪽에서도 소위 보수와 진보 간의 갈등이 이곳저곳에서 터져나오고 있습니다. 어디 남북과 보수-진보 사이의 갈등뿐이겠습니까. 이 땅에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부터 시작하여 국가 대 국가의 차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갈등과 오해가 쌓여있고 서로에 대한 반목과 불신이 가득 차 있습니다.
복합적인 갈등 상황에 놓여 있는 우리에게 통일에 앞서 화해가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제가 남과 북이 하나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은 아닙니다. 가까운 미래이건 먼 장래이건 하나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남과 북이 하나가 되기를, 그뿐 아니라 남쪽 내의 다양한 사람들도 다양성을 인정하며 하나가 되는 그 날을 희망합니다. 더 나아가 전세계의 모든 사람들과 국가들이 형제애로 하나되는 그 날을 소망합니다. 그러나 서로 많이 달라져 버렸고 서로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진정한 하나됨을 당장에 이루기는 어려울 것이라 생각됩니다. 또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서로에 대한 이해와 화해 없는 하나됨은 누군가의 압도적인 힘-그것이 군사력이든 경제력이든-의 윽박지름에 의한 인위적인 하나됨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서로간의 절묘한 이해타산에 의한 잔머리 굴리기에 불과할 타산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도 아니라면 서로를 적당히 무시하고 간섭하지 않으면서 여전히 자신의 뜻대로만 살아나가겠다는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 겉보기로는 하나됨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울타리 안에 있으나 서로 딴 생각을 하며 상대에게 눈길 한 번 제대로 주지 않은 채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서로 부딪히지도 않으려 합니다. 적당히 예의를 차리며 충돌은 피합니다. 하지만 이런 예의바른 몰이해, 세련된 무관심은 배타성의 또다른 표현에 불과한 것은 아닐런지요. 하나됨으로 나아가는 첫 발걸음은 다름 아닌 서로에 대한 진실한 이해가 밑밭침된 화해를 이루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러기에 하나됨은 진정 어려운 일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저희 아버지는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전쟁이 날 때에도 그 곳에 살고 계셨고 1.4 후퇴 때 남쪽으로 피난 나오셨습니다. 피난 나올 때에 10살이셨던 아버지는 전쟁 전과 전쟁 중에 형님들 중 2분과 백부님 한 분께서 북쪽 군인들과 동조자들에 의해 죽임당한 것을 생생히 기억하고 계십니다. 피난 중에 옆에 떨어진 포탄이며 아버지 등에 지고 나오던 이불에 무수히 꽂힌 북쪽 군인들의 총알들을, 그리고 그들에게 붙잡혀 피난 나간다는 명목으로 죽기 일보 직전까지 몰렸었던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렇다고 저희 아버지는 성조기를 들고 시청 앞 기도회에 나가실 정도의 분은 아니십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때때로 미군들도 참 못된 일을 많이 했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저는 물론 아버지와 정치적인 면에서, 남북 문제에 대해서 적지 않이 다른 이해를 갖고 있습니다. 때로는 부자간의 대화에서 의견 충돌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충돌이 부자 간에 등을 돌리는 사태로까지 번지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것은 투쟁에 철저하지 못한 저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아버지와 제가 서로 의견은 다르지만 분명한 것은 서로를 신뢰하고 있다는 것이고 서로를 이해하고 있기에 그 신뢰가 지켜지고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버지의 정치적인 신념, 종교적인 신념이 저와 많은 부분에서 같지 않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인생역정을 알기에, 아버지의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신념이 터무니없는 아집이라거나 맹목적인 교조주의라고 생각하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인생에서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의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인 신념을 아버지께 강요하지 않으려 노력해 왔습니다. 아버지가 틀렸다고 대놓고 말하지도 못해 왔습니다. 그저 저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에서 그칩니다. 그마저도 아버지의 입장을 생각하며 제 의견을 누그러뜨려 말씀드립니다. 물론 아버지도 저에게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아버지와 같은 역사를 격은 세대의 생각을 우리 젊은 세대도 똑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다. 이런 서로에 대한 믿음은 부모와 자식 사이의 끈끈한 무언가가 모든 것을 초월하는 강한 유대감을 만들어주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와 저는 깊은 신뢰를 가진, 인격적 교류를 가져온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돌이켜보면서 막연하나마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에 이런 저런 갈등이 많이 드러나고 있는 데, 그런 갈등들을 풀어나가는 중요한 단계가 서로의 삶의 여정에 대한 세밀한 나눔과 이해가 아닐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그리고 또한 인격적인 교류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렇게 속칭 ‘정’이 들고나면 논쟁할 때는 논쟁하더라도 같이 살 때는 서로 정겹게 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 생각과 경험이 모자란 저로서는 정치나 종교적 신념이 이 세상 진리와 현상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드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같은 역사적 사실을 경험하고서도 서로 다르게 역사적 진실을 이야기하는 인간의 한계를 어렴풋이나마 느끼고 있기에 그렇게 자신 없어하며 확신을 갖고 말하지 못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저희 아버지와 저는 서로 참아내며 각자의 경험과 신념을 나눔으로써 조금은 더 서로를 이해해가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오늘 읽은 성서본문은 형들의 시기와 질투로 인해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갔으나 결국은 이집트의 총리대신이 되어버린 요셉과, 바로 그 요셉을 팔아버린 형들이 다시 맞대면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성서의 증언에 따르면 요셉은 형들의 과거의 행동을 용서합니다. 아니 용서하다 못해 자신을 팔아버린 형들의 망나니 짓이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집트로 미리 보내어 가족의 앞날을 대비하기 위한 놀라운 계획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저는 성서에 증언된 요셉의 언행들을 통해 오늘 우리 시대에 필요한 화해의 자세를 숙고해 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첫째로, 요셉은 피해자였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형들, 가해자들이 잘못했다고 뉘우치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은 상황인데도 이미 다 용서하고 화해를 요청합니다. 나아가 요셉을 팔아버린 일을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동생 하나는 죽었다고 말을 돌려버리는 형들을 용서합니다. 피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의 사죄와 반성을 요구하지도 않고서 용서해버립니다. “이리 가까이 오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계속 말합니다. “내가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버린 그 아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이같은 납득되지 않는 부조리한 용서의 상황은 예수의 죽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한다는, 가해자로부터 사죄와 반성의 의사를 확인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먼저 용서를 선언한다는 부조리한 상황은 사람들에게 기이함을 느끼게 합니다. 이런 기이함은 종교적 체험을 일으켜 또 다른 피해자들도 가해자들을 용서하게 하는 연쇄반응을 일으킵니다. 예수의 부조리한 죽음과 용서를 기억하는 초대교회 교인들 역시 반성할 줄 모르는 가해자들을 용서하며 죽어갔습니다. 나아가 이같은 기이한 상황을 경험하는 가해자들 중 어떤이들은 회심하게 됩니다. 이렇게 피해자가 먼저 용서한다는 기이한 일을 통해 가해자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세상의 변혁이 일어납니다.
둘째로, 요셉은 먼저 손을 내밀 줄 알았습니다. 맺힌 한이 우주의 크기처럼 클지라도 먼저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요셉은 이집트의 총리대신이었기에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무장해제 된 상태로 쌀을 사고자 찾아온 형들을 한 칼에 모두 베어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 수십년을 꼬이도록 만든 형들을 자신이 당한 것 이상으로 괴롭히며 철저하게 후회하도록 만들며 서서히 죽여갈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형들을 죽이지는 않더라도 당당하게 사죄와 반성을 요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리 가까이 오십시오.” 이집트의 총리와 쌀을 구걸하다시피 찾아온 가나안의 일개 부족원이라는 신분과 경제상의 먼 거리를 뛰어넘는 말이었습니다. 수십년 동안 쌓여온 한과 아픈 기억의 망망한 바다를 순식간에 한 방울도 남김없이 증발시켜버리는 뜨거운 화해의 요청이었습니다. 당연히 사죄받아야 할 위치에 서 있는 요셉이, 예전에는 피해자였으나 이제는 가해자가 될 수도 있는, 복수할 수 있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서 있는 요셉이 그런 것 다 버리고 내뱉은 말이었습니다. 가해자의 사죄와 반성을 요구하지도 기다리지도 않고 먼저 손을 내밉니다. “이리 가까이 오십시오.”
셋째로, 요셉의 화해하는 자세는 바로 신앙의 힘에 기초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능력만으로가 아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했던 것이라 생각됩니다. 요셉은 수십년 동안 이집트에서 별의 별 고생을 다하면서도 증오만을 키워나가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요셉도 때때로 증오에 몸부림쳤을지도 모릅니다. 성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인간으로서 어찌 그런 순간이 한 번도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결국, 결국에 요셉은 자신의 마음과 육체에 깊이 뿌리박힌 증오를 뿌리뽑는 데 성공한 것 같습니다. 이 어려운 일을 요셉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신앙 때문이 아니었나,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이리 가까이 오십시오”라고, 증오가 아닌 화해의 손을 내밉니다. 이집트의 총리가 다름아닌 자신들이 죽어버리라고 노예로 팔아버렸던 요셉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형들은 아마도 경악했을 것입니다. 아! 이제 다 죽게 생겼구나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요셉은 자신이 내민 화해와 용서의 말을 납득하지 못하고 두려움에 당황해하는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형님들이 나를 이곳에 팔아 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그 뒤의 8절에서 요셉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나를 이곳에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악한 본성을 거슬러 성화되어가는 과정의 한 예를 요셉이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요셉 식의, 또는 톨스토이 식의 화해의 자세는 무모한 짓일지도 모릅니다. 반성의 기미도 없는 뻔뻔한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개인의 차원에서라면 혹 모를까 국가와 같은 집단의 차원에서 요셉식으로 화해를 실천한다면.... 아마도 어리석은 운영이라고 질타를 받을 것이 뻔합니다. 윤리학자 라인홀트 니버의 지적대로 집단의 차원에서 추구해야 할 최상의 가치는 정의일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 저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적어도 집단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서 개인의 차원에서도 용서와 화해, 서로에 대한 이해를 게을리 하지는 말아야 할텐데... 나와 얼굴을 맞대는 사람들과만이라도 진정한 이해와 화해를 위해 애쓴다면 이 세상에 그만큼 신뢰와 화해의 영역이 넓어질텐데... 증오를 없애는 것이 어려운 일일지라도 하나님의 도움심을 빌어 조금씩 성화(聖化)되어 갈 수 있어야 할텐데...
그러면서도 가슴 한 편에 질문이 남습니다. 그런데... 나는 진짜 먼저 용서할 수 있을까? 상대방의 반성과 사과를 기다리지도, 바라지도 않고 먼저 용서와 화해를 요청하며 “이리 가까이 오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또 내가 가해자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을 텐 데, 가해자가 되었을 때 솔직하게 먼저 반성하고 사과할 수 있을까? 이런 것 저런 것 다 귀찮으니 적당히 피해가며 적당히 관심 끊으며 살지는 않게 될까? 걱정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남북 간의 이해와 신뢰회복, 그리고 화해를 위해 /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부딪히는 사람들과 서로를 나누고 이해하며 정을 쌓아갈 수 있도록 / 그리고 가해자-피해자가 되었을 때 가리지 않고 먼저 반성하고 화해를 요청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도우시기를...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이번 광복절에도 어김없이 8.15경축행사를 둘러싸고 남과 북이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으며 남쪽에서도 소위 보수와 진보 간의 갈등이 이곳저곳에서 터져나오고 있습니다. 어디 남북과 보수-진보 사이의 갈등뿐이겠습니까. 이 땅에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부터 시작하여 국가 대 국가의 차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갈등과 오해가 쌓여있고 서로에 대한 반목과 불신이 가득 차 있습니다.
복합적인 갈등 상황에 놓여 있는 우리에게 통일에 앞서 화해가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제가 남과 북이 하나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은 아닙니다. 가까운 미래이건 먼 장래이건 하나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남과 북이 하나가 되기를, 그뿐 아니라 남쪽 내의 다양한 사람들도 다양성을 인정하며 하나가 되는 그 날을 희망합니다. 더 나아가 전세계의 모든 사람들과 국가들이 형제애로 하나되는 그 날을 소망합니다. 그러나 서로 많이 달라져 버렸고 서로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진정한 하나됨을 당장에 이루기는 어려울 것이라 생각됩니다. 또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서로에 대한 이해와 화해 없는 하나됨은 누군가의 압도적인 힘-그것이 군사력이든 경제력이든-의 윽박지름에 의한 인위적인 하나됨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서로간의 절묘한 이해타산에 의한 잔머리 굴리기에 불과할 타산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도 아니라면 서로를 적당히 무시하고 간섭하지 않으면서 여전히 자신의 뜻대로만 살아나가겠다는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 겉보기로는 하나됨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울타리 안에 있으나 서로 딴 생각을 하며 상대에게 눈길 한 번 제대로 주지 않은 채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서로 부딪히지도 않으려 합니다. 적당히 예의를 차리며 충돌은 피합니다. 하지만 이런 예의바른 몰이해, 세련된 무관심은 배타성의 또다른 표현에 불과한 것은 아닐런지요. 하나됨으로 나아가는 첫 발걸음은 다름 아닌 서로에 대한 진실한 이해가 밑밭침된 화해를 이루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러기에 하나됨은 진정 어려운 일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저희 아버지는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전쟁이 날 때에도 그 곳에 살고 계셨고 1.4 후퇴 때 남쪽으로 피난 나오셨습니다. 피난 나올 때에 10살이셨던 아버지는 전쟁 전과 전쟁 중에 형님들 중 2분과 백부님 한 분께서 북쪽 군인들과 동조자들에 의해 죽임당한 것을 생생히 기억하고 계십니다. 피난 중에 옆에 떨어진 포탄이며 아버지 등에 지고 나오던 이불에 무수히 꽂힌 북쪽 군인들의 총알들을, 그리고 그들에게 붙잡혀 피난 나간다는 명목으로 죽기 일보 직전까지 몰렸었던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렇다고 저희 아버지는 성조기를 들고 시청 앞 기도회에 나가실 정도의 분은 아니십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때때로 미군들도 참 못된 일을 많이 했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저는 물론 아버지와 정치적인 면에서, 남북 문제에 대해서 적지 않이 다른 이해를 갖고 있습니다. 때로는 부자간의 대화에서 의견 충돌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충돌이 부자 간에 등을 돌리는 사태로까지 번지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것은 투쟁에 철저하지 못한 저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아버지와 제가 서로 의견은 다르지만 분명한 것은 서로를 신뢰하고 있다는 것이고 서로를 이해하고 있기에 그 신뢰가 지켜지고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버지의 정치적인 신념, 종교적인 신념이 저와 많은 부분에서 같지 않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인생역정을 알기에, 아버지의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신념이 터무니없는 아집이라거나 맹목적인 교조주의라고 생각하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인생에서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의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인 신념을 아버지께 강요하지 않으려 노력해 왔습니다. 아버지가 틀렸다고 대놓고 말하지도 못해 왔습니다. 그저 저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에서 그칩니다. 그마저도 아버지의 입장을 생각하며 제 의견을 누그러뜨려 말씀드립니다. 물론 아버지도 저에게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아버지와 같은 역사를 격은 세대의 생각을 우리 젊은 세대도 똑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다. 이런 서로에 대한 믿음은 부모와 자식 사이의 끈끈한 무언가가 모든 것을 초월하는 강한 유대감을 만들어주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와 저는 깊은 신뢰를 가진, 인격적 교류를 가져온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돌이켜보면서 막연하나마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에 이런 저런 갈등이 많이 드러나고 있는 데, 그런 갈등들을 풀어나가는 중요한 단계가 서로의 삶의 여정에 대한 세밀한 나눔과 이해가 아닐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그리고 또한 인격적인 교류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렇게 속칭 ‘정’이 들고나면 논쟁할 때는 논쟁하더라도 같이 살 때는 서로 정겹게 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 생각과 경험이 모자란 저로서는 정치나 종교적 신념이 이 세상 진리와 현상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드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같은 역사적 사실을 경험하고서도 서로 다르게 역사적 진실을 이야기하는 인간의 한계를 어렴풋이나마 느끼고 있기에 그렇게 자신 없어하며 확신을 갖고 말하지 못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저희 아버지와 저는 서로 참아내며 각자의 경험과 신념을 나눔으로써 조금은 더 서로를 이해해가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오늘 읽은 성서본문은 형들의 시기와 질투로 인해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갔으나 결국은 이집트의 총리대신이 되어버린 요셉과, 바로 그 요셉을 팔아버린 형들이 다시 맞대면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성서의 증언에 따르면 요셉은 형들의 과거의 행동을 용서합니다. 아니 용서하다 못해 자신을 팔아버린 형들의 망나니 짓이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집트로 미리 보내어 가족의 앞날을 대비하기 위한 놀라운 계획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저는 성서에 증언된 요셉의 언행들을 통해 오늘 우리 시대에 필요한 화해의 자세를 숙고해 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첫째로, 요셉은 피해자였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형들, 가해자들이 잘못했다고 뉘우치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은 상황인데도 이미 다 용서하고 화해를 요청합니다. 나아가 요셉을 팔아버린 일을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동생 하나는 죽었다고 말을 돌려버리는 형들을 용서합니다. 피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의 사죄와 반성을 요구하지도 않고서 용서해버립니다. “이리 가까이 오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계속 말합니다. “내가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버린 그 아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이같은 납득되지 않는 부조리한 용서의 상황은 예수의 죽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한다는, 가해자로부터 사죄와 반성의 의사를 확인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먼저 용서를 선언한다는 부조리한 상황은 사람들에게 기이함을 느끼게 합니다. 이런 기이함은 종교적 체험을 일으켜 또 다른 피해자들도 가해자들을 용서하게 하는 연쇄반응을 일으킵니다. 예수의 부조리한 죽음과 용서를 기억하는 초대교회 교인들 역시 반성할 줄 모르는 가해자들을 용서하며 죽어갔습니다. 나아가 이같은 기이한 상황을 경험하는 가해자들 중 어떤이들은 회심하게 됩니다. 이렇게 피해자가 먼저 용서한다는 기이한 일을 통해 가해자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세상의 변혁이 일어납니다.
둘째로, 요셉은 먼저 손을 내밀 줄 알았습니다. 맺힌 한이 우주의 크기처럼 클지라도 먼저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요셉은 이집트의 총리대신이었기에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무장해제 된 상태로 쌀을 사고자 찾아온 형들을 한 칼에 모두 베어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 수십년을 꼬이도록 만든 형들을 자신이 당한 것 이상으로 괴롭히며 철저하게 후회하도록 만들며 서서히 죽여갈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형들을 죽이지는 않더라도 당당하게 사죄와 반성을 요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리 가까이 오십시오.” 이집트의 총리와 쌀을 구걸하다시피 찾아온 가나안의 일개 부족원이라는 신분과 경제상의 먼 거리를 뛰어넘는 말이었습니다. 수십년 동안 쌓여온 한과 아픈 기억의 망망한 바다를 순식간에 한 방울도 남김없이 증발시켜버리는 뜨거운 화해의 요청이었습니다. 당연히 사죄받아야 할 위치에 서 있는 요셉이, 예전에는 피해자였으나 이제는 가해자가 될 수도 있는, 복수할 수 있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서 있는 요셉이 그런 것 다 버리고 내뱉은 말이었습니다. 가해자의 사죄와 반성을 요구하지도 기다리지도 않고 먼저 손을 내밉니다. “이리 가까이 오십시오.”
셋째로, 요셉의 화해하는 자세는 바로 신앙의 힘에 기초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능력만으로가 아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했던 것이라 생각됩니다. 요셉은 수십년 동안 이집트에서 별의 별 고생을 다하면서도 증오만을 키워나가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요셉도 때때로 증오에 몸부림쳤을지도 모릅니다. 성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인간으로서 어찌 그런 순간이 한 번도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결국, 결국에 요셉은 자신의 마음과 육체에 깊이 뿌리박힌 증오를 뿌리뽑는 데 성공한 것 같습니다. 이 어려운 일을 요셉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신앙 때문이 아니었나,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이리 가까이 오십시오”라고, 증오가 아닌 화해의 손을 내밉니다. 이집트의 총리가 다름아닌 자신들이 죽어버리라고 노예로 팔아버렸던 요셉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형들은 아마도 경악했을 것입니다. 아! 이제 다 죽게 생겼구나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요셉은 자신이 내민 화해와 용서의 말을 납득하지 못하고 두려움에 당황해하는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형님들이 나를 이곳에 팔아 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그 뒤의 8절에서 요셉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나를 이곳에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악한 본성을 거슬러 성화되어가는 과정의 한 예를 요셉이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요셉 식의, 또는 톨스토이 식의 화해의 자세는 무모한 짓일지도 모릅니다. 반성의 기미도 없는 뻔뻔한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개인의 차원에서라면 혹 모를까 국가와 같은 집단의 차원에서 요셉식으로 화해를 실천한다면.... 아마도 어리석은 운영이라고 질타를 받을 것이 뻔합니다. 윤리학자 라인홀트 니버의 지적대로 집단의 차원에서 추구해야 할 최상의 가치는 정의일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 저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적어도 집단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서 개인의 차원에서도 용서와 화해, 서로에 대한 이해를 게을리 하지는 말아야 할텐데... 나와 얼굴을 맞대는 사람들과만이라도 진정한 이해와 화해를 위해 애쓴다면 이 세상에 그만큼 신뢰와 화해의 영역이 넓어질텐데... 증오를 없애는 것이 어려운 일일지라도 하나님의 도움심을 빌어 조금씩 성화(聖化)되어 갈 수 있어야 할텐데...
그러면서도 가슴 한 편에 질문이 남습니다. 그런데... 나는 진짜 먼저 용서할 수 있을까? 상대방의 반성과 사과를 기다리지도, 바라지도 않고 먼저 용서와 화해를 요청하며 “이리 가까이 오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또 내가 가해자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을 텐 데, 가해자가 되었을 때 솔직하게 먼저 반성하고 사과할 수 있을까? 이런 것 저런 것 다 귀찮으니 적당히 피해가며 적당히 관심 끊으며 살지는 않게 될까? 걱정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남북 간의 이해와 신뢰회복, 그리고 화해를 위해 /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부딪히는 사람들과 서로를 나누고 이해하며 정을 쌓아갈 수 있도록 / 그리고 가해자-피해자가 되었을 때 가리지 않고 먼저 반성하고 화해를 요청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도우시기를...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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