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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4:26-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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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혜자 자매 |
참고 : | 새길교회 2005. 8.21 주일설교 |
1. 관계적 자아 정체성
수련회에 가서 우리는 서로의 다른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얌전한 것만 같던 자매님의 끼를 보고 놀라고,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형제님들과도 몸을 부대끼면서 가까워질 수 있었습니다. 공부를 잘 하시는 형제님이 제기는 형편없이 찬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안에서 형제 자매라는 것을 확인하는 자리였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별로 생각하지 않으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러나 잠시 생각해보면,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아”라는 노래가사처럼, 우리에게는 다양한 모습들이 존재하고, 또한 다양한 범주의 정체성들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다양한 모습이나 범주들을 인식하지 않고 있지만, 상황이나 관계에 따라 그에 맞추어 행동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평소에는 여자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지만, 많은 남자들 속에 혼자 여자일 때,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자녀의 학부모로 선생님을 찾아갔을 때에는 어머니임을 인식하고, 남편 친구들을 만났을 때에는 누구누구의 아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학생들을 가르칠 때에는 선생이라는 정체성을 가져야만 하고, 그에 맞는 옷차림과 말투를 사용합니다. 친구를 만났을 때에는 자유로운 나의 개성이 십분 발휘됩니다. 이렇게 우리의 다양한 모습과 특성들은 한꺼번에 모두 나타날 수는 없고, 관계와 상황에 맞게 발현되어야 합니다.
사회는 관계와 상황에 맞는 정체성을 요구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기를 요구합니다. 자녀의 학부모로 학교에 찾아가서, 어머니처럼 행동하지 않고 선생님처럼 군다면 자녀의 담임선생님의 기분을 상하게 하겠지요. 병원에서 의사선생님들이 제일 싫어하는 환자는 환자처럼 행동하지 않고, 자기가 의사나 된 듯이 자기 병을 다 설명하는 환자일 겁니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는 승객으로서의 행동이 요구됩니다. 그래서 지하철에서 “예수를 믿으라”고 큰 소리로 설교하는 사람은 승객들 모두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관계적이고 상황 의존적인 우리의 모습들은 이 복잡한 세상에서 적응하고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다양한 상황들, 관계들 중에서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으며 자아의 중심에 놓는 범주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개인의 행동이나 인생의 의미는 달라집니다.
저는 중년의 여성들을 만나 자기가 누구인지를 물을 기회를 가졌었습니다. 그때 한 여성은 “저는 누구누구의 엄마이구요, 우리 아이는 지금 군대에 가 있구요, 언제 제대를 할 것이구요…” 등, 자기 이야기보다는 자기 아이 이야기를 주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 여성에게는 어머니라는 범주가 매우 중요한 것이지요. 그녀는 아마도 아들이 휴가를 나온다면 다른 모든 중요한 일들을 포기하고 아들을 보살필 것입니다. 또 어떤 여성은 자기 남편이 어느 학교 출신이라는 것을 계속 강조하였습니다. 이 여성은 누구누구의 아내라는 범주를 자아의 핵심에 놓고 있는 것이겠지요. 다른 여성은 자기 어머니는 자기가 어릴 때 사랑해주지 않았다고 하소연 하면서, 아직도 어머니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가하면 한 여성은 자기는 사람들이 자기를 누구의 어머니, 아내로 보는 것이 싫다고 하면서, 자기는 독립적으로 자기를 꾸려가기 위해 공부하고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2. 예수 따르미의 정체성
그렇다면 새길교회를 다니고 있는 우리는 자신과 교회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습니까? 바깥에서 우리 새길교회를 말할 때, 3무 교회라고들 합니다. 교회 건물이 없고, 교단에 속하지 않고, 목사님이 안 계신 교회라고 말입니다. 물론 이런 사실들이 새길을 부분적으로 말해 주지만, 이것이 새길의 정체성의 중심은 아닙니다. 우리들은 초기에는 수련회를 갈 때마다 교회 정체성 문제를 토론하곤 했고, 이 문제는 아무리 토론을 해도 끝나지 않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는 “예수 따르미”라는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따르미라는 정체성이 새 길을 다니고 있는 우리 자신에게는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가요?
예수 따르미라는 정체성을 구성하고, 예수를 따르겠다고 나선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따르라고 이야기하십니까? 복음서의 여러군데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중 오늘의 본문 누가복음 14장 26~27절에서는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사람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이웃 사랑을 강조하시면서 가장 가까운 부모와 형제에 대해 왜 이러신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입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우리들이 살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관계들을 단절하라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우리는 겁도 없이 예수 따르미가 된다고 한 건 아닌가요?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는 자기중심적인 사고로는 이룩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시고자 하신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 12:29~34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사랑이 제 일 계명이고 이웃 사랑은 두 번째 계명이며, 이를 이해하는 사람에게 하나님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고 하십니다. 즉 자기 사랑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때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자기 사랑은 아주 자동적입니다. 누가 명령하지 않아도 인간은 자기를 사랑합니다. 사람들에게 ‘사랑’, ‘천사’, ‘천당’, ‘기쁨’, ‘웃음’과 같은 긍정적인 단어들과 ‘미움’, ‘악마’, ‘지옥’, ‘암’, ‘슬픔’과 같은 부정적인 단어들을 주고 이런 단어들을 ‘자기’와 연결시키는지 ‘타인’과 연결시키는지를 실험했을 때, 사람들은 거의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으로 자기에게는 좋은 단어들을 연결시키고 타인에게는 나쁜 단어들을 연결시켰습니다. 이런 실험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인간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며 배타적인 것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족은 바로 확장된 나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는 나의 자아정체성을 형성하는데 기본이 되고 중심이 되는 관계입니다. 내가 어디에서 나왔는지도 모르면서 나의 정체성을 형성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자기를 해외에 입양시킨 부모를 찾기 위해 한국을 찾아오는 입양아들을 봐 왔습니다. 그들은 자기를 낳아준 부모를 모르고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기 어려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부모가 자기를 사랑하지만 입양시켜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믿고,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합니다.
부모님처럼 우리를 사랑하고 경쟁 없이 진정으로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또 있을까요? 그래서 부모님의 기대는 나의 목표를 더 공고히 하는 자극제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모와의 관계에만 묶여있을 때, 마마걸, 마마보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부모님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또 때로는 부모님의 한을 풀어드리기 위해 이웃을 돌아볼 여력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자식은 어떻습니까? 내가 힘이 없어도, 든든하고 자랑스러운 자식이 있으면 자신감이 생깁니다.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는 것보다 자식에 대한 소망을 접기가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꿈은 접었지만, 자식에 대한 소망 하나로 열심히 일합니다. 자식이 속을 썩여도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것들을 포용하고, 미래를 담보로 오늘의 어려움을 참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아름다운 사랑이 왜 문제가 됩니까? 그것은 이 사랑이 배타적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자녀가 우리의 소망을 이루어주기 위해서는 남보다 앞서야 하고, 그렇지 못하다면 적어도 낙오자가 되지는 않도록 도와주는 것이 부모가 해야 할 도리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내 자녀만 사랑하게 될 때 물불을 안 가리게 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무엇이 죄인지 무엇이 옳은 일인지 분별하는 분별력은 약화되고, 죄에 대한 감각은 무디어 지는 것 같습니다.
내 아내나 남편, 그리고 형제나 자매 역시 내가 집착하게 되는 관계들입니다. 관계는 집단 에너지(synergy)를 만들어냅니다. 내가 세상적인 욕망들을 포기하고 싶어도, 나의 부모 때문에, 또는 나의 형제 때문에, 아니면 내 자식들을 잘 교육하고 싶어서,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규정할 때에 가족과 연결시키는 것이겠지요.
예수님께서는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 기도할 때 무엇을 기도합니까?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그것들을 나에게, 내 가족에게 달라는 기도가 가장 우선하지는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아마도 우리의 정체성의 중심에 나와 가족이 놓여있기 때문에 우리의 주의의 폭은 좁아져,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지 못하고 더 넓은 이웃들이 보이지 않음을 경고하신 것 같습니다. 가족관계에서 요구되는 역할들은 세상적인 눈으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렇게 하지 못할 때 문제가 되지만, 그 역할에만 매몰될 때, 죄에 대한 감각은 무뎌지고 고통당하는 이웃들에게 주의를 돌릴 수 없다는 것을 환기시키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가족에 대한 사랑이 배타적이기 때문에 경고한 것이지, 이웃은 사랑하고 자신과 가족은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도 육신의 어머니를 염려하여, 사도 요한에게 “네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시며, 어머니를 부탁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가족개념을 확장시키시고자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2장 46~50절에서는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와 말을 하겠다고 바깥에 서 있는데, 예수께서는 누가 나의 어머니이며, 누가 나의 형제들이냐? 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면서 “보아라 나의 어머니와 나의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내 자아의 중심되는 정체성을 예수 따르미에 두고, 내가 사랑하는 자식들, 남편, 아내, 부모님을 더 큰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바로 자기 십자가가 되는 것이겠지요.
3. 상황적 예수 따르미
그렇다면 21세기를 살고 있는 평신도인 우리들이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복잡하고 다면화된 오늘의 세계는 우리에게 사회적 카멜레온이 될 것을 요구하고, 우리는 상황에 맞추어 변신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다양한 역할들을 수행하면서도 “예수 따르미”의 정체성을 중심에 놓는 것, 즉 예수 따르미를 접두어로 놓고 행동하는 것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예수 따르미 교사, 예수 따르미 어머니, 예수 따르미 의사, 예수 따르미 친구 같이 말입니다.
저는 가까운 후배가 자기 아들의 선생님을 찾아가기보다는 도서 상품권을 잔뜩 사서 자기 아들 반의 어려운 학생들에게 나눠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려운 학생들이 그것으로 참고서도 사고 필요하면 돈처럼 사용할 수 있을거라고 하면서요. 예수 따르미 어머니는 바로 이런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주의의 초점을 자기 아들에게만 두지 않고, 다른 아이들에게도 돌리면서, 그들의 어머니도 되어 주는 것이지요.
며칠 전 지하철에서의 일입니다. 다리가 절단된 장애우가 올라와 편지를 돌렸습니다. 모두 무관심한 표정이었는데, 한 승객이 돈을 천 원 꺼내며, 옆 사람에게 “나도 저렇게 된 사람을 아는데 정말 어려운 삶을 살아요”라고 말하자 주변의 사람들이 거의 모두 천 원짜리를 꺼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승객의 작은 말은 지하철에서 “예수 믿으시오”라고 큰 소리로 외치는 것보다 더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기적도 상황에 맞추어 인간을 먼저 배려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적합한 상황도 아닌 곳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거나, 물고기와 떡을 떼어도 계속 나오는 것을 보여주셨다면 그것은 묘기나 마술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주가 떨어진 잔치집의 상황에서는 포도주를 만들어 주시고, 배고픈 군중들의 형편을 고려해 줌으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죽음을 함께 슬퍼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시다가 살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다양한 상황에서 상황이 맡기는 역할에 수동적으로 끌려 다니는 존재가 아니라, “예수 따르미” 정체성을 우선에 두고 상황에 맞추어 가는 지혜롭고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이웃도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분명히 후배 아들의 친구와 지하철의 장애우는 기적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 율법주의자를 싫어하셨는데, 율법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들이 꽉 막혀, 상황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새길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예수 따르미의 삶을 집단적으로 체험하는 실험의 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안에서 형제 자매된 하나님의 가족을 중시하셨는데, ‘자기’를 중심에 두고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주장하기 보다는, 주의의 초점을 다른 사람들에게 두고 서로 배려하는 훈련을 하는 곳, 그런 곳이 새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비록 그렇게 하지 못하지만, 이 공동체의 형제자매들의 삶을 보면서 예수 따르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웁니다. 그래서 새길 공동체를 떠날 수 없고, 새길의 형제 자매들이 혈육보다도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이겠지요.
평신도 교회의 강력한 힘은 말이나 이론을 통해서 뿐 아니라, 우리 각자의 예수 따르미로서의 삶을 통해, 서로에게 하나님 나라의 상황을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수련회에 가서 우리는 서로의 다른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얌전한 것만 같던 자매님의 끼를 보고 놀라고,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형제님들과도 몸을 부대끼면서 가까워질 수 있었습니다. 공부를 잘 하시는 형제님이 제기는 형편없이 찬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안에서 형제 자매라는 것을 확인하는 자리였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별로 생각하지 않으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러나 잠시 생각해보면,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아”라는 노래가사처럼, 우리에게는 다양한 모습들이 존재하고, 또한 다양한 범주의 정체성들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다양한 모습이나 범주들을 인식하지 않고 있지만, 상황이나 관계에 따라 그에 맞추어 행동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평소에는 여자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지만, 많은 남자들 속에 혼자 여자일 때,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자녀의 학부모로 선생님을 찾아갔을 때에는 어머니임을 인식하고, 남편 친구들을 만났을 때에는 누구누구의 아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학생들을 가르칠 때에는 선생이라는 정체성을 가져야만 하고, 그에 맞는 옷차림과 말투를 사용합니다. 친구를 만났을 때에는 자유로운 나의 개성이 십분 발휘됩니다. 이렇게 우리의 다양한 모습과 특성들은 한꺼번에 모두 나타날 수는 없고, 관계와 상황에 맞게 발현되어야 합니다.
사회는 관계와 상황에 맞는 정체성을 요구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기를 요구합니다. 자녀의 학부모로 학교에 찾아가서, 어머니처럼 행동하지 않고 선생님처럼 군다면 자녀의 담임선생님의 기분을 상하게 하겠지요. 병원에서 의사선생님들이 제일 싫어하는 환자는 환자처럼 행동하지 않고, 자기가 의사나 된 듯이 자기 병을 다 설명하는 환자일 겁니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는 승객으로서의 행동이 요구됩니다. 그래서 지하철에서 “예수를 믿으라”고 큰 소리로 설교하는 사람은 승객들 모두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관계적이고 상황 의존적인 우리의 모습들은 이 복잡한 세상에서 적응하고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다양한 상황들, 관계들 중에서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으며 자아의 중심에 놓는 범주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개인의 행동이나 인생의 의미는 달라집니다.
저는 중년의 여성들을 만나 자기가 누구인지를 물을 기회를 가졌었습니다. 그때 한 여성은 “저는 누구누구의 엄마이구요, 우리 아이는 지금 군대에 가 있구요, 언제 제대를 할 것이구요…” 등, 자기 이야기보다는 자기 아이 이야기를 주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 여성에게는 어머니라는 범주가 매우 중요한 것이지요. 그녀는 아마도 아들이 휴가를 나온다면 다른 모든 중요한 일들을 포기하고 아들을 보살필 것입니다. 또 어떤 여성은 자기 남편이 어느 학교 출신이라는 것을 계속 강조하였습니다. 이 여성은 누구누구의 아내라는 범주를 자아의 핵심에 놓고 있는 것이겠지요. 다른 여성은 자기 어머니는 자기가 어릴 때 사랑해주지 않았다고 하소연 하면서, 아직도 어머니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가하면 한 여성은 자기는 사람들이 자기를 누구의 어머니, 아내로 보는 것이 싫다고 하면서, 자기는 독립적으로 자기를 꾸려가기 위해 공부하고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2. 예수 따르미의 정체성
그렇다면 새길교회를 다니고 있는 우리는 자신과 교회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습니까? 바깥에서 우리 새길교회를 말할 때, 3무 교회라고들 합니다. 교회 건물이 없고, 교단에 속하지 않고, 목사님이 안 계신 교회라고 말입니다. 물론 이런 사실들이 새길을 부분적으로 말해 주지만, 이것이 새길의 정체성의 중심은 아닙니다. 우리들은 초기에는 수련회를 갈 때마다 교회 정체성 문제를 토론하곤 했고, 이 문제는 아무리 토론을 해도 끝나지 않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는 “예수 따르미”라는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따르미라는 정체성이 새 길을 다니고 있는 우리 자신에게는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가요?
예수 따르미라는 정체성을 구성하고, 예수를 따르겠다고 나선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따르라고 이야기하십니까? 복음서의 여러군데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중 오늘의 본문 누가복음 14장 26~27절에서는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사람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이웃 사랑을 강조하시면서 가장 가까운 부모와 형제에 대해 왜 이러신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입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우리들이 살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관계들을 단절하라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우리는 겁도 없이 예수 따르미가 된다고 한 건 아닌가요?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는 자기중심적인 사고로는 이룩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시고자 하신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 12:29~34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사랑이 제 일 계명이고 이웃 사랑은 두 번째 계명이며, 이를 이해하는 사람에게 하나님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고 하십니다. 즉 자기 사랑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때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자기 사랑은 아주 자동적입니다. 누가 명령하지 않아도 인간은 자기를 사랑합니다. 사람들에게 ‘사랑’, ‘천사’, ‘천당’, ‘기쁨’, ‘웃음’과 같은 긍정적인 단어들과 ‘미움’, ‘악마’, ‘지옥’, ‘암’, ‘슬픔’과 같은 부정적인 단어들을 주고 이런 단어들을 ‘자기’와 연결시키는지 ‘타인’과 연결시키는지를 실험했을 때, 사람들은 거의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으로 자기에게는 좋은 단어들을 연결시키고 타인에게는 나쁜 단어들을 연결시켰습니다. 이런 실험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인간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며 배타적인 것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족은 바로 확장된 나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는 나의 자아정체성을 형성하는데 기본이 되고 중심이 되는 관계입니다. 내가 어디에서 나왔는지도 모르면서 나의 정체성을 형성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자기를 해외에 입양시킨 부모를 찾기 위해 한국을 찾아오는 입양아들을 봐 왔습니다. 그들은 자기를 낳아준 부모를 모르고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기 어려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부모가 자기를 사랑하지만 입양시켜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믿고,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합니다.
부모님처럼 우리를 사랑하고 경쟁 없이 진정으로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또 있을까요? 그래서 부모님의 기대는 나의 목표를 더 공고히 하는 자극제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모와의 관계에만 묶여있을 때, 마마걸, 마마보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부모님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또 때로는 부모님의 한을 풀어드리기 위해 이웃을 돌아볼 여력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자식은 어떻습니까? 내가 힘이 없어도, 든든하고 자랑스러운 자식이 있으면 자신감이 생깁니다.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는 것보다 자식에 대한 소망을 접기가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꿈은 접었지만, 자식에 대한 소망 하나로 열심히 일합니다. 자식이 속을 썩여도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것들을 포용하고, 미래를 담보로 오늘의 어려움을 참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아름다운 사랑이 왜 문제가 됩니까? 그것은 이 사랑이 배타적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자녀가 우리의 소망을 이루어주기 위해서는 남보다 앞서야 하고, 그렇지 못하다면 적어도 낙오자가 되지는 않도록 도와주는 것이 부모가 해야 할 도리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내 자녀만 사랑하게 될 때 물불을 안 가리게 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무엇이 죄인지 무엇이 옳은 일인지 분별하는 분별력은 약화되고, 죄에 대한 감각은 무디어 지는 것 같습니다.
내 아내나 남편, 그리고 형제나 자매 역시 내가 집착하게 되는 관계들입니다. 관계는 집단 에너지(synergy)를 만들어냅니다. 내가 세상적인 욕망들을 포기하고 싶어도, 나의 부모 때문에, 또는 나의 형제 때문에, 아니면 내 자식들을 잘 교육하고 싶어서,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규정할 때에 가족과 연결시키는 것이겠지요.
예수님께서는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 기도할 때 무엇을 기도합니까?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그것들을 나에게, 내 가족에게 달라는 기도가 가장 우선하지는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아마도 우리의 정체성의 중심에 나와 가족이 놓여있기 때문에 우리의 주의의 폭은 좁아져,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지 못하고 더 넓은 이웃들이 보이지 않음을 경고하신 것 같습니다. 가족관계에서 요구되는 역할들은 세상적인 눈으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렇게 하지 못할 때 문제가 되지만, 그 역할에만 매몰될 때, 죄에 대한 감각은 무뎌지고 고통당하는 이웃들에게 주의를 돌릴 수 없다는 것을 환기시키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가족에 대한 사랑이 배타적이기 때문에 경고한 것이지, 이웃은 사랑하고 자신과 가족은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도 육신의 어머니를 염려하여, 사도 요한에게 “네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시며, 어머니를 부탁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가족개념을 확장시키시고자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2장 46~50절에서는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와 말을 하겠다고 바깥에 서 있는데, 예수께서는 누가 나의 어머니이며, 누가 나의 형제들이냐? 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면서 “보아라 나의 어머니와 나의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내 자아의 중심되는 정체성을 예수 따르미에 두고, 내가 사랑하는 자식들, 남편, 아내, 부모님을 더 큰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바로 자기 십자가가 되는 것이겠지요.
3. 상황적 예수 따르미
그렇다면 21세기를 살고 있는 평신도인 우리들이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복잡하고 다면화된 오늘의 세계는 우리에게 사회적 카멜레온이 될 것을 요구하고, 우리는 상황에 맞추어 변신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다양한 역할들을 수행하면서도 “예수 따르미”의 정체성을 중심에 놓는 것, 즉 예수 따르미를 접두어로 놓고 행동하는 것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예수 따르미 교사, 예수 따르미 어머니, 예수 따르미 의사, 예수 따르미 친구 같이 말입니다.
저는 가까운 후배가 자기 아들의 선생님을 찾아가기보다는 도서 상품권을 잔뜩 사서 자기 아들 반의 어려운 학생들에게 나눠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려운 학생들이 그것으로 참고서도 사고 필요하면 돈처럼 사용할 수 있을거라고 하면서요. 예수 따르미 어머니는 바로 이런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주의의 초점을 자기 아들에게만 두지 않고, 다른 아이들에게도 돌리면서, 그들의 어머니도 되어 주는 것이지요.
며칠 전 지하철에서의 일입니다. 다리가 절단된 장애우가 올라와 편지를 돌렸습니다. 모두 무관심한 표정이었는데, 한 승객이 돈을 천 원 꺼내며, 옆 사람에게 “나도 저렇게 된 사람을 아는데 정말 어려운 삶을 살아요”라고 말하자 주변의 사람들이 거의 모두 천 원짜리를 꺼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승객의 작은 말은 지하철에서 “예수 믿으시오”라고 큰 소리로 외치는 것보다 더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기적도 상황에 맞추어 인간을 먼저 배려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적합한 상황도 아닌 곳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거나, 물고기와 떡을 떼어도 계속 나오는 것을 보여주셨다면 그것은 묘기나 마술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주가 떨어진 잔치집의 상황에서는 포도주를 만들어 주시고, 배고픈 군중들의 형편을 고려해 줌으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죽음을 함께 슬퍼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시다가 살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다양한 상황에서 상황이 맡기는 역할에 수동적으로 끌려 다니는 존재가 아니라, “예수 따르미” 정체성을 우선에 두고 상황에 맞추어 가는 지혜롭고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이웃도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분명히 후배 아들의 친구와 지하철의 장애우는 기적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 율법주의자를 싫어하셨는데, 율법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들이 꽉 막혀, 상황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새길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예수 따르미의 삶을 집단적으로 체험하는 실험의 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안에서 형제 자매된 하나님의 가족을 중시하셨는데, ‘자기’를 중심에 두고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주장하기 보다는, 주의의 초점을 다른 사람들에게 두고 서로 배려하는 훈련을 하는 곳, 그런 곳이 새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비록 그렇게 하지 못하지만, 이 공동체의 형제자매들의 삶을 보면서 예수 따르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웁니다. 그래서 새길 공동체를 떠날 수 없고, 새길의 형제 자매들이 혈육보다도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이겠지요.
평신도 교회의 강력한 힘은 말이나 이론을 통해서 뿐 아니라, 우리 각자의 예수 따르미로서의 삶을 통해, 서로에게 하나님 나라의 상황을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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