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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전1: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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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기동 자매 |
참고 : | 새길교회2005. 8.28 주일설교 |
얼마 전 가족들과 〈웰컴 투 동막골〉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관객이 400만 명을 넘었다고 합니다. 조선일보 어느 칼럼에 보니까 이 영화는 반미영화라고 규정짓더군요. 저는 보면서 ‘반미’라는 것까지는 생각지 못하였고, 그저 사실은 왜곡된 채 죽음의 골짜기로 변할 수 있는 상황을 몸으로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하는 그 동막골의 주민들을 보면서 이미 전쟁의 포화 속에 갇혀버린 이라크 민중의 고통을 떠올렸습니다. 그런가 하면 작은 아이는 상징을 잘 이해하지 못해 죽은 사람들이 평온한 오수를 즐기는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저 사람들 천국 간 거야?”라고 묻기도 하였습니다. 또 한 지인은 이러저러한 느낌들을 들으면서 그냥 재미있는 영화 이야기로 즐기면 안되느냐고 하면서 이렇게 덧붙이더군요. “전공은 못 숨겨!”
‘전공’이라니요? 한 영화의 의미는 그 제작자와 감독이 무엇을 표현하고자 했는지 상관없이 관람자의 생각과 입장에 따라 조금씩, 혹은 아주 다르게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수용미학자 야우스는 의미는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수용자의 상황과 입장 안에서 비로소 생성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대상에 대해 그것을 수용하고 만나는 주체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무엇을 기대하는가에 따라 그 의미는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사실 이 말은 객관과 합리성 속에 포장되어 한 개체의 의미는 곧 하나라고, 그래서 그것을 찾아야만 유일한 진리에 이르는 거라고 말하는 근대적 사고의 종말을 단적으로 표현한 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성서를 보는 눈도 이러한 근대성의 아집을 벗어나는 시기를 맞고 있습니다. 지금의 현실은 오직 하나의 의미로만, 그 성서기자의 의도로만, 혹은 위대한 주석자의 이해로만 성서의 의미를 받아들이도록 강요될 때 그것은 또 하나의 폭력이라고까지 합니다.
저는 요즈음 전도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관심 혹은 선호 이상의 이유가 있기는 하지만, 나에게 다가오는 전도서의 의미를 때로는 음미하고, 때로는 고통 받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전도서가 저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전도서는 잠언, 욥기와 더불어 구약의 3대 지혜문학에 속합니다. 지혜문학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어떻게 하면 성공적 삶을 살 수 있는지 가르쳐 주는 교훈문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도 서점에 가면 성공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코드로 작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성공이라는 의미가 다양하긴 하지만 말입니다. 잠언이 야웨 하나님 안에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가르쳐주는 것이라면, 욥기와 전도서는 물음의 토대가 사뭇 다릅니다. 욥기가 성공적 삶과 야웨 신앙의 관계에 대해 부정적 물음을 던지고 그럼에도 결국 긍정적인 결론을 이끌어 낸 것과는 달리, 전도서는 처음부터 한마디 선언으로 삶에 대한 희망을 일순간에 와해시켜버리는 당혹감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전도서를 시작하고 끝을 맺는 이 말은 이미 초기 유대교에서부터 전도서의 경전성에 대한 논란의 단초가 되었습니다. 30번 이상 헛되다라고 반복하는 주인공 코헬렛의 탄식에서 묻어나는 이 회의주의적 색채는 전도서가 어떻게 경전에 들어올 수 있었는지에 대해 지금까지 명쾌하게 대답되지 못한 채 그 물음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영국의 한 구약학자가 전도서에 대해 연구한다고 하자 그의 신실하신 할머니가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요지는 간단했습니다. 왜 하필 전도서를 연구하려 하느냐, 성서의 나머지 65권의 책에 나오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의 말씀들을 제쳐두고 하필이면 불경건하게 헛되다고 되풀이하고 있는 그 책을 보려고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구약경전에 속해 있으면서도 야웨는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 책,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대하기는커녕 태어난 것을 저주하기까지 하는 절망의 태도, 먹고 마시고 눈에 보기에 좋은 것을 취하여 즐기라는 쾌락주의적 명령, 이러한 내용으로 가득 차서 도대체 무엇에 대해 ‘교훈’을 주겠다는 것인지, 뉴솜이라는 신학자는 전도서의 이러한 비신앙적 태도야말로 포스트모던 시대, 기독교가 타신앙에 대해 지녀야 하는 관용을 함의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전도서의 형식적 특징은 그 주인공인 코헬렛이 일인칭 시점으로 그 어떤 제3의 대상이 아닌 자신의 삶과 생각을 진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학비평에서 이러한 일인칭서술은 독자나 청중이 코헬렛의 말을 신뢰할 만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하나의 문학적 장치라고 합니다. 즉 주인공을 통해 자신이 경험한 것을 직접 말하게 함으로써 독자나 청중이 의심 없이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장치라는 것입니다. 직접 자신에 대해 말하는 코헬렛을 신뢰하는 자는 그의 말을 받아들일 것이고, 그럼에도 그를 신뢰할 수 없는 자는 결국 그의 말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신뢰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일인칭 서술의 형식과 비신앙적 회의주의적 내용이 도대체 어떻게 소위 교훈문학으로 분류되는 전도서에서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전도서는 강력한 설득의 코드로 신앙의 관용을 보여주는 극히 포스트모던적 책이다? 혹은 경전화 과정에서 잘못 이해되어 들어온 실수의 산물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성서의 한 독자로 저는 전도서를 대할 때마다 마치 자신의 삶을 직접 고백하는 그래서 관객들과 교감하고자 하는 모노드라마를 보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1:12에서 코헬렛은 자신은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되었다고 밝힌 후 12:7에서 자신의 말이 끝날 때까지 때론 격앙된 소리로, 때론 탄식의 소리로, 때론 기쁨에 찬 소리로 담담히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이야기해 나갑니다. 전도서가 사고의 일관성이 없다고 하면서 전도서는 그저 단편적 교훈들을 각각의 경험을 토대로 모아놓은 것이라고들 말하지만, 저는 오히려 코헬렛의 소리를 통해 논리적 일관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럼에도 나는 이렇게 살았다고 실에 구슬을 꿰듯이 살아온 삶의 단편을 엮어서 이야기해 나가는 어느 노인의 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인간이란 무엇이냐는 철학적 문제가 아니라, 나 코헬렛은 누구였는지, 어떤 이였는지, 삶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소리를 듣는 듯 합니다. 이러한 이해는 마치 연극직전, 그리고 직후 등장하는 나레이터인 양 이 이야기를 틀처럼 둘러싸고 있는 1:1절과 12:9절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먼저 나와 코헬렛은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의 왕이라고 밝혀줍니다. 그리고 ‘연극’이 끝난 후 그는 지금까지 말한 코헬렛은 지혜자라고 12:7절에서 다시 결론적으로 말해줍니다.
코헬렛은 왕으로서의 삶을 이야기하기 앞서 그가 벗어날 수 없는 무게로 느꼈던 삶의 문제가 무엇인지 시로 표현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이 시는 하나의 물음으로 시작합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는가?” 사람이라는 객관적 표현을 쓰지만 실상 이 물음은 코헬렛이 떠날 수 없었던 자신의 물음이었습니다. “도대체 내가 이렇게 애쓴다고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이러한 물음은 사실 이제 막 왕이 되어 벅찬 가슴으로 의기양양 무엇인가 이루어내려는 자의 소리가 아닙니다. 삶의 오랜 여정을 거친 후, 되돌아보는 가운데 아쉬움과 회환에 가득 찬 회고자의 소리, 그래서 결코 긍정적인 대답을 이끌어 내지 못할 비장한 톤을 지니고 있습니다. 소용없는 삶, 보람 없는 삶, 왜 코헬렛은 삶을 그렇게 비관적이고, 회의적으로 보았을까?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해, 바람, 강물 그것들은 변함없이 영원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자연의 대명사들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영원을 뽐내며 있는데, 인간은 오고, 가고, 그 모습 가운데 새로운 것은 없고, 그리고 결국은 가면 잊혀지고 마는 덧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이 바로 코헬렛이 보람없다고 말하는 그 이유였습니다. 코헬렛이 가장 고민하며 방황하였던 것은 기억될 수 없음의 당혹성이었습니다. 자신의 존재가 잊혀진다는 것, 그것은 죽음을 넘어서서 현재의 실존까지도 보람없다고, 의미없다고 치부해버릴 수 있는 위협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바로 왕 코헬렛의 자기 진술로 넘어갑니다. 왕으로서 코헬렛은 의욕에 넘쳐 세 가지 일을 기획합니다. 그는 세상의 이치를 알고자 했고, 지혜롭게 되어 어리석음을 피하려 했고, 또한 업적을 통한 성취의 기쁨을 누리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성공하지 못했고, 결국 헛되다고 탄식하고 맙니다. 화려한 궁정, 많은 처첩들, 거대한 부로 대변되는 그의 모든 성취물들은 소위 ‘왕’인 자에게 새로울 것도 대단할 것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비록 지혜를 얻기는 하였으나 죽으면 어리석은 자나 지혜로운 자나 모두 똑같아진다는 것에 분노합니다. 세상의 이치는 앎의 대상이 될 수 없음에 절망하면서 이 모든 수고가 헛되고 바람을 잡는 것과 같다고 탄식합니다. 세상의 주체가 되고자 했고, 세상에서 영원히 기억되기를 원했던 코헬렛의 ‘왕’으로서의 삶은 완전히 파산해 버렸습니다.
이제 코헬렛은 죽음으로 잊혀져 버리고 말, 아무 것도 알 수 없고, 이룰 수 없다는 절망 가운데 ‘왕’의 정체성을 버리고 세상을 방랑하며 경험합니다. 억압의 상황, 헛된 일, 비참한 일, 잘못되고 억울한 일, 불합리한 일 등을 목도하면서 코헬렛은 자신의 깨달음의 폭을 넓혀갑니다. 그것은 단순히 인식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젠 ‘왕’이 아닌 자신의 또 다른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코헬렛은 처음부터 놓치지 않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욕망과 열정 가운데 있을 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일상적 실존의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남들보다 우뚝 선 것을 이루고자 하는 성취욕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먹고 마시고, 작은 것에서 보람을 느끼고 그리고 사랑의 관계에서 기쁨을 누리는 것.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요, 몫이요, 은혜로서의 실존의 모습이었습니다. 코헬렛은 이렇게 ‘살아있음’을 느끼고 간직하고, 고백하면서 세상을 여행했고, 사실상 ‘세상의 중요한 이치’를 깨달아 갑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으로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해갑니다.
코헬렛은 결국 주체이자 목적으로서의 ‘왕’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전혀 다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젊은이들을 위한 가르침의 직접화법안에서 드러납니다. ‘젊은 때에 너는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12:1) ‘너의 창조주’ 는 코헬렛이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또한 누구라고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표현입니다. ‘피조물’은 창조주와의 관계 안에서만 의미를 갖습니다. 피조물은 결코 창조주 앞에서 자신의 업적과 앎을 뽐낼 수 없습니다. 생을 주신 창조주 앞에서 살아 있는 동안 피조물이 해야 할 것은 바로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 기억은 일상의 실존의 몫에서 기쁨을 누리며, 피조물됨을 이 세상 안에서 나누는 것입니다. 코헬렛은 바로 이야기 과정을 통해 이젠 더 이상 주체와 목적이 되고자 했던 왕이 아닌 창조주와 실존적 관계 속에서 피조물의 정체로 변화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코헬렛의 모습에 대해 나레이터는 그는 실로 지혜자였다라고 표현합니다.
전도서는 구약에서 정말 독특한 책입니다. 창조자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의 관계를 창세기, 욥기와는 달리 피조물 인간이 주인공 되어 서술합니다. 창조하신 세계의 놀라움, 웅장함, 신기함을 통한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는 시편과는 달리, 코헬렛은 피조물로서의 실존의 사소한 기쁨 가운데 창조주와의 관계를 깨달아 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혀 말씀하지도 않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 계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전혀 하나님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세상의 부조리, 냉소 그리고 회의주의의 난무 가운데 코헬렛은 놀랍게도 신앙의 작은 실마리를 찾아냅니다. 하나님이 주신 몫은 살아있음, 먹고 마시고 사랑 가운데 즐거워 할 수 있는 실존 그 것이었습니다.
사는 게 뭐지? 하나님이 도대체 있기나 한건가? 이러한 의문을 품은 자에게 코헬렛은 나도 그렇게 고민했었노라고 이야기해줍니다. 그리고 이렇게 속삭입니다. “먹고 마시며 살고 있잖아! 네가 사랑하고 너를 사랑하는 자가 있잖아! 그 속에서 하나님을 느껴보렴!”
기도
사랑의 하나님, 오늘 살아 쉼쉬며 사랑하는 자들과 함께 할 수 있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이것이 기쁨임을, 이것이 바로 우리가 찾아야 할 삶의 의미임을 코헬렛을 통해 다시 한번 느끼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전공’이라니요? 한 영화의 의미는 그 제작자와 감독이 무엇을 표현하고자 했는지 상관없이 관람자의 생각과 입장에 따라 조금씩, 혹은 아주 다르게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수용미학자 야우스는 의미는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수용자의 상황과 입장 안에서 비로소 생성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대상에 대해 그것을 수용하고 만나는 주체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무엇을 기대하는가에 따라 그 의미는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사실 이 말은 객관과 합리성 속에 포장되어 한 개체의 의미는 곧 하나라고, 그래서 그것을 찾아야만 유일한 진리에 이르는 거라고 말하는 근대적 사고의 종말을 단적으로 표현한 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성서를 보는 눈도 이러한 근대성의 아집을 벗어나는 시기를 맞고 있습니다. 지금의 현실은 오직 하나의 의미로만, 그 성서기자의 의도로만, 혹은 위대한 주석자의 이해로만 성서의 의미를 받아들이도록 강요될 때 그것은 또 하나의 폭력이라고까지 합니다.
저는 요즈음 전도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관심 혹은 선호 이상의 이유가 있기는 하지만, 나에게 다가오는 전도서의 의미를 때로는 음미하고, 때로는 고통 받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전도서가 저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전도서는 잠언, 욥기와 더불어 구약의 3대 지혜문학에 속합니다. 지혜문학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어떻게 하면 성공적 삶을 살 수 있는지 가르쳐 주는 교훈문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도 서점에 가면 성공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코드로 작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성공이라는 의미가 다양하긴 하지만 말입니다. 잠언이 야웨 하나님 안에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가르쳐주는 것이라면, 욥기와 전도서는 물음의 토대가 사뭇 다릅니다. 욥기가 성공적 삶과 야웨 신앙의 관계에 대해 부정적 물음을 던지고 그럼에도 결국 긍정적인 결론을 이끌어 낸 것과는 달리, 전도서는 처음부터 한마디 선언으로 삶에 대한 희망을 일순간에 와해시켜버리는 당혹감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전도서를 시작하고 끝을 맺는 이 말은 이미 초기 유대교에서부터 전도서의 경전성에 대한 논란의 단초가 되었습니다. 30번 이상 헛되다라고 반복하는 주인공 코헬렛의 탄식에서 묻어나는 이 회의주의적 색채는 전도서가 어떻게 경전에 들어올 수 있었는지에 대해 지금까지 명쾌하게 대답되지 못한 채 그 물음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영국의 한 구약학자가 전도서에 대해 연구한다고 하자 그의 신실하신 할머니가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요지는 간단했습니다. 왜 하필 전도서를 연구하려 하느냐, 성서의 나머지 65권의 책에 나오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의 말씀들을 제쳐두고 하필이면 불경건하게 헛되다고 되풀이하고 있는 그 책을 보려고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구약경전에 속해 있으면서도 야웨는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 책,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대하기는커녕 태어난 것을 저주하기까지 하는 절망의 태도, 먹고 마시고 눈에 보기에 좋은 것을 취하여 즐기라는 쾌락주의적 명령, 이러한 내용으로 가득 차서 도대체 무엇에 대해 ‘교훈’을 주겠다는 것인지, 뉴솜이라는 신학자는 전도서의 이러한 비신앙적 태도야말로 포스트모던 시대, 기독교가 타신앙에 대해 지녀야 하는 관용을 함의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전도서의 형식적 특징은 그 주인공인 코헬렛이 일인칭 시점으로 그 어떤 제3의 대상이 아닌 자신의 삶과 생각을 진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학비평에서 이러한 일인칭서술은 독자나 청중이 코헬렛의 말을 신뢰할 만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하나의 문학적 장치라고 합니다. 즉 주인공을 통해 자신이 경험한 것을 직접 말하게 함으로써 독자나 청중이 의심 없이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장치라는 것입니다. 직접 자신에 대해 말하는 코헬렛을 신뢰하는 자는 그의 말을 받아들일 것이고, 그럼에도 그를 신뢰할 수 없는 자는 결국 그의 말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신뢰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일인칭 서술의 형식과 비신앙적 회의주의적 내용이 도대체 어떻게 소위 교훈문학으로 분류되는 전도서에서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전도서는 강력한 설득의 코드로 신앙의 관용을 보여주는 극히 포스트모던적 책이다? 혹은 경전화 과정에서 잘못 이해되어 들어온 실수의 산물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성서의 한 독자로 저는 전도서를 대할 때마다 마치 자신의 삶을 직접 고백하는 그래서 관객들과 교감하고자 하는 모노드라마를 보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1:12에서 코헬렛은 자신은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되었다고 밝힌 후 12:7에서 자신의 말이 끝날 때까지 때론 격앙된 소리로, 때론 탄식의 소리로, 때론 기쁨에 찬 소리로 담담히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이야기해 나갑니다. 전도서가 사고의 일관성이 없다고 하면서 전도서는 그저 단편적 교훈들을 각각의 경험을 토대로 모아놓은 것이라고들 말하지만, 저는 오히려 코헬렛의 소리를 통해 논리적 일관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럼에도 나는 이렇게 살았다고 실에 구슬을 꿰듯이 살아온 삶의 단편을 엮어서 이야기해 나가는 어느 노인의 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인간이란 무엇이냐는 철학적 문제가 아니라, 나 코헬렛은 누구였는지, 어떤 이였는지, 삶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소리를 듣는 듯 합니다. 이러한 이해는 마치 연극직전, 그리고 직후 등장하는 나레이터인 양 이 이야기를 틀처럼 둘러싸고 있는 1:1절과 12:9절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먼저 나와 코헬렛은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의 왕이라고 밝혀줍니다. 그리고 ‘연극’이 끝난 후 그는 지금까지 말한 코헬렛은 지혜자라고 12:7절에서 다시 결론적으로 말해줍니다.
코헬렛은 왕으로서의 삶을 이야기하기 앞서 그가 벗어날 수 없는 무게로 느꼈던 삶의 문제가 무엇인지 시로 표현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이 시는 하나의 물음으로 시작합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는가?” 사람이라는 객관적 표현을 쓰지만 실상 이 물음은 코헬렛이 떠날 수 없었던 자신의 물음이었습니다. “도대체 내가 이렇게 애쓴다고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이러한 물음은 사실 이제 막 왕이 되어 벅찬 가슴으로 의기양양 무엇인가 이루어내려는 자의 소리가 아닙니다. 삶의 오랜 여정을 거친 후, 되돌아보는 가운데 아쉬움과 회환에 가득 찬 회고자의 소리, 그래서 결코 긍정적인 대답을 이끌어 내지 못할 비장한 톤을 지니고 있습니다. 소용없는 삶, 보람 없는 삶, 왜 코헬렛은 삶을 그렇게 비관적이고, 회의적으로 보았을까?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해, 바람, 강물 그것들은 변함없이 영원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자연의 대명사들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영원을 뽐내며 있는데, 인간은 오고, 가고, 그 모습 가운데 새로운 것은 없고, 그리고 결국은 가면 잊혀지고 마는 덧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이 바로 코헬렛이 보람없다고 말하는 그 이유였습니다. 코헬렛이 가장 고민하며 방황하였던 것은 기억될 수 없음의 당혹성이었습니다. 자신의 존재가 잊혀진다는 것, 그것은 죽음을 넘어서서 현재의 실존까지도 보람없다고, 의미없다고 치부해버릴 수 있는 위협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바로 왕 코헬렛의 자기 진술로 넘어갑니다. 왕으로서 코헬렛은 의욕에 넘쳐 세 가지 일을 기획합니다. 그는 세상의 이치를 알고자 했고, 지혜롭게 되어 어리석음을 피하려 했고, 또한 업적을 통한 성취의 기쁨을 누리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성공하지 못했고, 결국 헛되다고 탄식하고 맙니다. 화려한 궁정, 많은 처첩들, 거대한 부로 대변되는 그의 모든 성취물들은 소위 ‘왕’인 자에게 새로울 것도 대단할 것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비록 지혜를 얻기는 하였으나 죽으면 어리석은 자나 지혜로운 자나 모두 똑같아진다는 것에 분노합니다. 세상의 이치는 앎의 대상이 될 수 없음에 절망하면서 이 모든 수고가 헛되고 바람을 잡는 것과 같다고 탄식합니다. 세상의 주체가 되고자 했고, 세상에서 영원히 기억되기를 원했던 코헬렛의 ‘왕’으로서의 삶은 완전히 파산해 버렸습니다.
이제 코헬렛은 죽음으로 잊혀져 버리고 말, 아무 것도 알 수 없고, 이룰 수 없다는 절망 가운데 ‘왕’의 정체성을 버리고 세상을 방랑하며 경험합니다. 억압의 상황, 헛된 일, 비참한 일, 잘못되고 억울한 일, 불합리한 일 등을 목도하면서 코헬렛은 자신의 깨달음의 폭을 넓혀갑니다. 그것은 단순히 인식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젠 ‘왕’이 아닌 자신의 또 다른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코헬렛은 처음부터 놓치지 않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욕망과 열정 가운데 있을 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일상적 실존의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남들보다 우뚝 선 것을 이루고자 하는 성취욕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먹고 마시고, 작은 것에서 보람을 느끼고 그리고 사랑의 관계에서 기쁨을 누리는 것.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요, 몫이요, 은혜로서의 실존의 모습이었습니다. 코헬렛은 이렇게 ‘살아있음’을 느끼고 간직하고, 고백하면서 세상을 여행했고, 사실상 ‘세상의 중요한 이치’를 깨달아 갑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으로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해갑니다.
코헬렛은 결국 주체이자 목적으로서의 ‘왕’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전혀 다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젊은이들을 위한 가르침의 직접화법안에서 드러납니다. ‘젊은 때에 너는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12:1) ‘너의 창조주’ 는 코헬렛이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또한 누구라고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표현입니다. ‘피조물’은 창조주와의 관계 안에서만 의미를 갖습니다. 피조물은 결코 창조주 앞에서 자신의 업적과 앎을 뽐낼 수 없습니다. 생을 주신 창조주 앞에서 살아 있는 동안 피조물이 해야 할 것은 바로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 기억은 일상의 실존의 몫에서 기쁨을 누리며, 피조물됨을 이 세상 안에서 나누는 것입니다. 코헬렛은 바로 이야기 과정을 통해 이젠 더 이상 주체와 목적이 되고자 했던 왕이 아닌 창조주와 실존적 관계 속에서 피조물의 정체로 변화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코헬렛의 모습에 대해 나레이터는 그는 실로 지혜자였다라고 표현합니다.
전도서는 구약에서 정말 독특한 책입니다. 창조자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의 관계를 창세기, 욥기와는 달리 피조물 인간이 주인공 되어 서술합니다. 창조하신 세계의 놀라움, 웅장함, 신기함을 통한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는 시편과는 달리, 코헬렛은 피조물로서의 실존의 사소한 기쁨 가운데 창조주와의 관계를 깨달아 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혀 말씀하지도 않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 계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전혀 하나님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세상의 부조리, 냉소 그리고 회의주의의 난무 가운데 코헬렛은 놀랍게도 신앙의 작은 실마리를 찾아냅니다. 하나님이 주신 몫은 살아있음, 먹고 마시고 사랑 가운데 즐거워 할 수 있는 실존 그 것이었습니다.
사는 게 뭐지? 하나님이 도대체 있기나 한건가? 이러한 의문을 품은 자에게 코헬렛은 나도 그렇게 고민했었노라고 이야기해줍니다. 그리고 이렇게 속삭입니다. “먹고 마시며 살고 있잖아! 네가 사랑하고 너를 사랑하는 자가 있잖아! 그 속에서 하나님을 느껴보렴!”
기도
사랑의 하나님, 오늘 살아 쉼쉬며 사랑하는 자들과 함께 할 수 있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이것이 기쁨임을, 이것이 바로 우리가 찾아야 할 삶의 의미임을 코헬렛을 통해 다시 한번 느끼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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