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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6: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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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상태 형제 |
참고 : | 새길교회 2005. 9. 4 주일설교 |
5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아라.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자기네 상을 이미 다 받았다.
6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숨어서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리하면 숨어서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7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아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만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아라.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신다.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해서’ 가르쳐주신 말씀이 성경에 더러 나옵니다. “믿음으로 기도하라” 라든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라든지, 이런 ‘기도에 관한 말씀’을 우리가 성경에서 적지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기도하라”고 ‘기도의 내용’을 가르쳐 주신 말씀은 주기도문 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주기도문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가장 중요하고 모범적인, 기도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기도를 드릴 때,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가장 진지하게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가장 성의없이 하는 기도가 주기도입니다.
심지어 어떤 순서가 끝난다는 표시로 사용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배의 끝부분에, 혹은 운동회나 친목회, 야유회를 끝낼 때, 별 생각없이 “주기도문으로 마치겠습니다” 라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교회도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칩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그 귀하고 중요한 기도를 정성껏 드리고 예배를 마치자”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그 의미를 충분히 따르고 있는지 한번쯤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이 중요한 주기도를, 왜 우리가 많은 경우에, 그렇게 성의없이 드리게 되었을까요? 그 원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 한번, 차분하게 그 원인을 찾아봅시다.
문제는, 우리가 너무 잘 안다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외웠습니다.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많이 사용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타성에 젖은 겁니다.
처음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처음에는 감격에 겨워 정성껏 기도했는데, 우리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기도이므로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기도했는데, 계속 그렇게 하다 보니까 너무나 익숙해 졌고, 줄줄 외울 정도가 되었고, 그러다 보니 결국은 타성에 젖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가슴에 담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머리에서 곧바로 입으로, “외워 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담기지 않은 기도, 그것을 기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주기도문 외우겠습니다” 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 외우는 것과 기도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가 오늘 본문(마 6장) 5-8절 말씀에 나옵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의 내용과 의미를 바로 이해하려면, 이 본문 말씀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5절 말씀을 보면, 회당(교회)과 큰 거리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너희는 그러지 말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왜냐 하면, 그 기도의 목적이 자기 자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렇게 기도에 힘쓰는 경건한 사람이요….” 라는 걸 과시하기 위해서 하는 기도는 위선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창한 기도보다, 진솔한 기도를 좋아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예도 들어주셨습니다.
한 바리새인이 성전에서 큰 소리로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저 세리와도 다릅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을 하고, 십일조도 꼬박 꼬박 냅니다. 저에게 이렇게 할 수 있는 믿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말을 듣고, 세리가 가슴을 치며 기도합니다. “주여!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주님께서 이 두 사람의 예를 드시면서, 바리새인보다 세리가 더 의롭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주님께서 오늘 본문 6절에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숨어서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이것저것 의식하지 말고 하나님과 조용히 독대하여라.” 그런 말씀인데요. 여기서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을 “숨어서 계시는” 분이라고 표현하신 부분입니다.
이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마치 숨어서 우리를 감시하시는 하나님, 파파라치처럼 무언가 잘못이 드러나기를 기다리고, 그 순간을 포착해서 야단칠 근거를 찾는 듯한 하나님으로 곡해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의미는, 물질세계의 눈으로는 파악될 수 없는 하나님, 영의 눈, 맑은 마음의 눈이 없이는 느낄 수 없고 만날 수 없는 하나님을 뜻하는 것일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숨어 계시는 분이라면), 우리도 눈에 보이는 사물로부터 숨을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단 둘이 은밀하게 만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중요한 건 ‘만남’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고 나서야 대화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만남이 없는 대화는 대화가 아니라 그냥 독백일 것입니다.
대단히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저는 요즘에 우리 기독교인들이 드리는 기도의 대부분은 기도가 아니라 독백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상과의 진지한 만남이 없이 혼자 계속 말하는 것은 대화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숨어서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데이트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의 데이트죠.
연인과 데이트할 때, 필요한게 많습니다. 얼마간의 돈도 필요하고, 시간도 필요합니다. 적절한 장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필수 사항이 아니라 선택사항일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를 향한 마음일 것입니다.
7절에, 주님께서 계속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아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만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이 말씀도 언뜻 들으면, 예수님께서 이방인 전체에 대해 어떤 편견을 가진 것처럼 느낄 수 있겠습니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따뜻하게 대해 주시고 그가 가진 문제를 근원적으로 풀어주신 예수님답지가 않습니다.
또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때로는 이방인이 유대인보다 더 경건하고, 더 따뜻하고 인간적일 수도 있다는 점을 말씀하신 주님과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당시 세계에 널리 퍼져있는 주술적인 성격의 기도를 염두에 두신 것입니다.
주술이 무엇입니까? 주술이란, 어떤 힘있는 신적 존재를 달래고 그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서, 혹은 그의 진노를 잠재우기 위해서, 신적 언어를 반복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술의 목적은 신적 존재를 설득하는데 있습니다. 사실 우리 한국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그렇게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자기가 바라는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서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하나님, 이 기도를 꼭 들어주세요. 들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빌고 또 빌어서 기어코 하나님을 설득시키려고 합니다.
그런 것이 기도의 목적이라면 끊임없이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그건 기도라기보다는 주술에 가깝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말하는 것은 독백하는 것이지 대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대화입니다. 그 대화를 위해서 주님께서 대화의 중요한 내용, 그 골자를 간추려서 알려주셨는데 그게 바로 주기도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께서 ‘기도의 자세나 우선순위’에 대해서 강조하신 말씀은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렇게 기도하라”고 기도의 내용 자체를,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것은 이 주기도문 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주기도를 드릴 때, 어느 기도보다도 진지하게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주신, 가장 모범적인 기도니까요.
주님은 우리들에게 기도 잘 하라고, 바로 하라고, 직접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동시에, 기도할 때 우리가 조심해야 할 점을 두 가지로 간추려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당부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기도를 가장 성의없게 드린다면,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마음아파 하실까요?
그러므로 앞으로는 주기도를 드릴 때, 외워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깊은 정성을 담아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다 외우고 있지만, 주기도를 할 때마다 다시금 그 의미를 하나하나 새기며, 마음에 담아, 정성껏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주기도문을 너무 빨리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의미를 차분히 마음에 담아가면서 했으면 좋겠는데, 너무 속도가 빨라서 마음에 담기가 어렵습니다. 조금은 천천히, 내용을 음미하면서 기도하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주기도문은 그 구조에 있어서도 신구약의 중심사상을 포괄하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주기도문과 십계명은 같은 구조로 되어 있고, 십계명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4계명까지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계명이고, 5-10계명은 사람끼리의 관계에 대한 계명입니다.
주기도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앞부분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위한 기도이고, 뒷부분은 우리들이 현실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인간관계에 대한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한 기도인데, 이 십계명과 주기도문의 사상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경천애인’입니다.
경천애인, 즉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없이 살라는 것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중심사상입니다. 주기도문의 이런 구조 자체가 우리에게 깊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은,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주신 유일한 기도문이라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그 내용의 깊이 때문에도 그냥 의미없이 외워버려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어느 기도보다도 마음 깊이 정성을 담아 드려야할 기도가 바로 주기도입니다.
오늘은 주기도문의 배경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주기도문 서론인 셈입니다. 다음에 언젠가 주기도문 자체의 내용에 대한 말씀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6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숨어서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리하면 숨어서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7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아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만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아라.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신다.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해서’ 가르쳐주신 말씀이 성경에 더러 나옵니다. “믿음으로 기도하라” 라든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라든지, 이런 ‘기도에 관한 말씀’을 우리가 성경에서 적지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기도하라”고 ‘기도의 내용’을 가르쳐 주신 말씀은 주기도문 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주기도문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가장 중요하고 모범적인, 기도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기도를 드릴 때,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가장 진지하게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가장 성의없이 하는 기도가 주기도입니다.
심지어 어떤 순서가 끝난다는 표시로 사용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배의 끝부분에, 혹은 운동회나 친목회, 야유회를 끝낼 때, 별 생각없이 “주기도문으로 마치겠습니다” 라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교회도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칩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그 귀하고 중요한 기도를 정성껏 드리고 예배를 마치자”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그 의미를 충분히 따르고 있는지 한번쯤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이 중요한 주기도를, 왜 우리가 많은 경우에, 그렇게 성의없이 드리게 되었을까요? 그 원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 한번, 차분하게 그 원인을 찾아봅시다.
문제는, 우리가 너무 잘 안다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외웠습니다.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많이 사용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타성에 젖은 겁니다.
처음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처음에는 감격에 겨워 정성껏 기도했는데, 우리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기도이므로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기도했는데, 계속 그렇게 하다 보니까 너무나 익숙해 졌고, 줄줄 외울 정도가 되었고, 그러다 보니 결국은 타성에 젖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가슴에 담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머리에서 곧바로 입으로, “외워 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담기지 않은 기도, 그것을 기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주기도문 외우겠습니다” 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 외우는 것과 기도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가 오늘 본문(마 6장) 5-8절 말씀에 나옵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의 내용과 의미를 바로 이해하려면, 이 본문 말씀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5절 말씀을 보면, 회당(교회)과 큰 거리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너희는 그러지 말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왜냐 하면, 그 기도의 목적이 자기 자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렇게 기도에 힘쓰는 경건한 사람이요….” 라는 걸 과시하기 위해서 하는 기도는 위선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창한 기도보다, 진솔한 기도를 좋아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예도 들어주셨습니다.
한 바리새인이 성전에서 큰 소리로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저 세리와도 다릅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을 하고, 십일조도 꼬박 꼬박 냅니다. 저에게 이렇게 할 수 있는 믿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말을 듣고, 세리가 가슴을 치며 기도합니다. “주여!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주님께서 이 두 사람의 예를 드시면서, 바리새인보다 세리가 더 의롭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주님께서 오늘 본문 6절에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숨어서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이것저것 의식하지 말고 하나님과 조용히 독대하여라.” 그런 말씀인데요. 여기서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을 “숨어서 계시는” 분이라고 표현하신 부분입니다.
이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마치 숨어서 우리를 감시하시는 하나님, 파파라치처럼 무언가 잘못이 드러나기를 기다리고, 그 순간을 포착해서 야단칠 근거를 찾는 듯한 하나님으로 곡해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의미는, 물질세계의 눈으로는 파악될 수 없는 하나님, 영의 눈, 맑은 마음의 눈이 없이는 느낄 수 없고 만날 수 없는 하나님을 뜻하는 것일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숨어 계시는 분이라면), 우리도 눈에 보이는 사물로부터 숨을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단 둘이 은밀하게 만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중요한 건 ‘만남’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고 나서야 대화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만남이 없는 대화는 대화가 아니라 그냥 독백일 것입니다.
대단히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저는 요즘에 우리 기독교인들이 드리는 기도의 대부분은 기도가 아니라 독백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상과의 진지한 만남이 없이 혼자 계속 말하는 것은 대화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숨어서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데이트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의 데이트죠.
연인과 데이트할 때, 필요한게 많습니다. 얼마간의 돈도 필요하고, 시간도 필요합니다. 적절한 장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필수 사항이 아니라 선택사항일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를 향한 마음일 것입니다.
7절에, 주님께서 계속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아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만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이 말씀도 언뜻 들으면, 예수님께서 이방인 전체에 대해 어떤 편견을 가진 것처럼 느낄 수 있겠습니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따뜻하게 대해 주시고 그가 가진 문제를 근원적으로 풀어주신 예수님답지가 않습니다.
또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때로는 이방인이 유대인보다 더 경건하고, 더 따뜻하고 인간적일 수도 있다는 점을 말씀하신 주님과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당시 세계에 널리 퍼져있는 주술적인 성격의 기도를 염두에 두신 것입니다.
주술이 무엇입니까? 주술이란, 어떤 힘있는 신적 존재를 달래고 그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서, 혹은 그의 진노를 잠재우기 위해서, 신적 언어를 반복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술의 목적은 신적 존재를 설득하는데 있습니다. 사실 우리 한국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그렇게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자기가 바라는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서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하나님, 이 기도를 꼭 들어주세요. 들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빌고 또 빌어서 기어코 하나님을 설득시키려고 합니다.
그런 것이 기도의 목적이라면 끊임없이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그건 기도라기보다는 주술에 가깝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말하는 것은 독백하는 것이지 대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대화입니다. 그 대화를 위해서 주님께서 대화의 중요한 내용, 그 골자를 간추려서 알려주셨는데 그게 바로 주기도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께서 ‘기도의 자세나 우선순위’에 대해서 강조하신 말씀은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렇게 기도하라”고 기도의 내용 자체를,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것은 이 주기도문 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주기도를 드릴 때, 어느 기도보다도 진지하게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주신, 가장 모범적인 기도니까요.
주님은 우리들에게 기도 잘 하라고, 바로 하라고, 직접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동시에, 기도할 때 우리가 조심해야 할 점을 두 가지로 간추려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당부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기도를 가장 성의없게 드린다면,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마음아파 하실까요?
그러므로 앞으로는 주기도를 드릴 때, 외워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깊은 정성을 담아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다 외우고 있지만, 주기도를 할 때마다 다시금 그 의미를 하나하나 새기며, 마음에 담아, 정성껏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주기도문을 너무 빨리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의미를 차분히 마음에 담아가면서 했으면 좋겠는데, 너무 속도가 빨라서 마음에 담기가 어렵습니다. 조금은 천천히, 내용을 음미하면서 기도하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주기도문은 그 구조에 있어서도 신구약의 중심사상을 포괄하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주기도문과 십계명은 같은 구조로 되어 있고, 십계명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4계명까지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계명이고, 5-10계명은 사람끼리의 관계에 대한 계명입니다.
주기도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앞부분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위한 기도이고, 뒷부분은 우리들이 현실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인간관계에 대한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한 기도인데, 이 십계명과 주기도문의 사상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경천애인’입니다.
경천애인, 즉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없이 살라는 것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중심사상입니다. 주기도문의 이런 구조 자체가 우리에게 깊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은,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주신 유일한 기도문이라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그 내용의 깊이 때문에도 그냥 의미없이 외워버려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어느 기도보다도 마음 깊이 정성을 담아 드려야할 기도가 바로 주기도입니다.
오늘은 주기도문의 배경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주기도문 서론인 셈입니다. 다음에 언젠가 주기도문 자체의 내용에 대한 말씀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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