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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145: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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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유경재 목사 |
참고 : | 새길교회2005. 9.25 주일설교 |
유경재 목사(안동교회)
우리가 풍성한 가을에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것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풍성한 추수 때문이기도 하지만, 미국에 건너온 청교도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땅에 살게 되었음을 감사하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따라서 추수감사는 풍성한 추수를 빌미로 하였지만 실상은 신앙의 자유를 감사하는 마음이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초막절이 추수감사절의 기원이라고 본다면 이 역시 추수의 계절에 풍성한 곡식을 거두면서 하느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렸지만, 그보다는 출애굽하여 광야생활ㅁ을 기념하는데 더 큰 뜻을 두었습니다. 즉 하느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가 초막절을 지키는 중요 목적이었습니다. 이런 뜻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풍성한 추수를 하는 이 좋은 계절에 하느님의 종합적인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기 위하여 이 절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추수감사주일을 지키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면서 하느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첫째는 이 땅의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일용할 양식을 주심을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일용할 양식이란 반드시 먹는 것만이 아니라 이 땅의 삶을 이루는데 필요한 모든 의식주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이 땅의 삶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은총을 허락하심에 대해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상 이것이 감사의 본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생각하는 감사의 단계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하나 더 높은 감사의 단계가 있습니다.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는 단계입니다. 나만의 구원을 감사하는 단계에서 만물이 함께 구원함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함께 나누게 된 것을 감사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온전한 감사가 될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삶
첫째로, 우리는 금년 일년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풍성한 은혜를 입어 오늘까지 이른 것에 대해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풍성한 추수와 건강과 가정의 평안을 주심에 대하여 감사를 드려야 마땅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루 하루를 산다는 것이 늘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느닷없이 닥쳐오는 질병과 사고, 예측할 수 없는 삶의 변동 때문에 그야말로 하루를 무사히 보내고 잠자리에 들 수 있다는 것은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회적 경제적 변동이 극심한 사회 속에 잠자리가 있고 일용할 양식이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라 감사한 일일 수밖에 없도록 바뀌었습니다. 오염된 공기와 물을 마시면서도 큰 병 걸리지 않고 일년을 산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복잡한 도시 속에 살기에 사고의 위험을 안고 살 수밖에 없는 가운데서도 가족들이 별 사고 없이 지내온 것을 감사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감사한 일을 꼽다 보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여러 가지 어려움과 슬픔을 당한 가정들이 있습니다. 원치 않는 질병으로 치료를 받는다든지, 뜻하지 않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든지, 자녀들의 진로와 문제로 고심한다든지, 직장이 없어 취직을 못해 애태운다든지 기타 여러 가지 원치 않는 일들로 인하여 남들이 감사하다고 말할 때 입 다물고 침울해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더구나 미국의 카트리나 허리케인으로 재난을 당한 뉴올리언스의 시민들에게는 감사보다는 원망이 앞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차적인 감사는 모두가 함께 드릴 수 있는 것이 되지를 못합니다.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앙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질병이나 고난도 감사의 조건이 될 수 있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함께 하시며, 역경을 통해서 더욱 하느님께로 이끄시는 그 손길을 느낀다면 감사하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고통을 인내하면서 믿음으로 잘 통과한다면 보다 더 큰 믿음으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드려야 할 감사의 조건은 일용할 양식이라는 일차적인 삶의 조건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만이 아니라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풍성한 추수가 있을 때만이 아니라, 흉년이 들어 거둘 것이 없을 때에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건강할 때만이 아니라 병들었을 때 감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신앙인의 진정한 감사가 될 것입니다.
영적 차원의 감사
그래서 우리는 이런 일차적인 감사의 차원에서 한 단계 올라서서 우리의 삶의 외적인 조건 때문에 감사하기보다는 영적 차원에서 감사를 발견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어떤 조건 속에 있든 언제나 버리지 아니하시고 구원하시며 지키시며 돌보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 속에서 우러나는 감사야말로 진정한 감사의 예물이 될 것입니다.
“우리 주께서 나에게 은혜를 넘치게 부어 주셔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믿음과 사랑을 누리게 하셨습니다.”〈디모데전서 1:14〉
“나는 죄인의 괴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먼저 나에게 끝없이 참아 주심을 보이셔서 앞으로 예수를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본보기로 삼으려 하신 것입니다.”〈디모데전서 1:15b-16〉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죽음과 죄의 굴레를 벗기시고 우리를 자유케 하신 하느님의 사랑, 제한적인 이 땅의 삶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도록 그 장벽을 허물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우리를 이끌어 영원한 영적 세계의 비밀을 알게 하시고 그곳으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열게 하시는 성령의 교통하심이야말로 우리가 감사할 조건들입니다. 바울은 이를 넘치는 은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빈부귀천이나 남녀노소의 차이가 없이 누구나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감사의 자리입니다. 물론 여기에도 믿음이 없음으로 참여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에게도 이 구원의 길은 언제나 열려 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이 구원의 은혜야말로 진정으로 우리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는 중요한 요인입니다.
우리가 추수감사절에 추수한 곡식들을 단 앞에 쌓아 놓고 하느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립니다만, 실상은 눈에 보이는 추수보다도 눈에 보이지 않는 구원의 추수가 진정으로 우리가 감사를 드리는 이유가 됩니다. 가을의 풍성한 열매와 곡식은 하늘부터 우리에게 넘치게 부어지는 구원의 은혜를 연상케 합니다. 눈으로는 쌓아놓은 곡식을 보지만, 실제로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구원의 추수를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추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값진 하늘의 기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1장에서 기도한 것처럼 우리의 마음의 눈이 밝아져 우리에게 약속된 하늘의 풍성함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셔서 여러분에게 주신 그 소망이 무엇인지, 하느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하느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그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에베소서 1:18-19〉
우리의 마음눈이 밝아져 이런 것들을 볼 수 있다면 우리가 현재 어떤 조건 속에 있어도 언제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 주님께 드리는 감사
그러나 우리의 감사가 여기에 머문다면 온전한 감사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내가 구원받고 내가 하늘의 기업을 이어 받는 것에 만족하고 감사한다면, 아직은 이기적인 생각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없습니다. 나만이 아닌 하느님의 지으신 모든 피조물이 다함께 구원함을 받아서 하나의 생명공동체를 이루게 되었음을 생각하고 이런 큰 구원을 이루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감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인 시편 145편 9절에 보면 “주님은 모든 만물을 은혜로 맞아 주시며, 지으신 모든 피조물에게 긍휼을 베푸신다”고 하였고, 14절에서는 “주님은 넘어지는 피조물을 모두 붙들어 주시며, 짓눌린 모든 사람을 모두 일으켜 세우신다”고 하였습니다. 이 시편은 이스라엘만이 선민으로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편협한 생각에서 벗어나 하느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물에게 긍휼을 베푸신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시인은 바로 이런 하느님의 크신 긍휼을 그의 위대하심이라 보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하자. 그 위대하심은 측량할 길이 없다.” 〈시편 145편 3절〉
측량할 길이 없는 하느님의 그 위대하심은 바로 모든 피조물을 긍휼이 여기셔서 저들을 구원하신다는 사실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7절에서도 “사람들은 한량없는 주의 은혜를 기념하면서, 주의 의를 노래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은혜는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시고도 남는 한량없는 은혜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여기에 미칠 때 우리도 이 시편의 신앙인처럼 크게 찬양하며, 크게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종교 다원주의를 이야기하면서 흔히 사용하는 비유로 산을 오르는 길은 여럿이지만 결국은 모두 정상에서 만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보다는 여러 골짜기에서 물이 흘러내리지만 그것은 결국은 한 바다로 다 모이게 된다는 비유가 더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흘러온 골짜기는 다르지만 결국은 한 바다로 모인 물 여기에 놀라운 하느님의 구원의 비밀이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각기 다른 종교,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어서 제 나름대로 진리의 길을 찾아가지만, 결국은 모든 세계가 하느님께로 흘러들게 될 것입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불교가 아무리 우리와 전혀 다른 형태의 신앙을 가졌다 할지라도, 이슬람이 기독교와 적대적인 것처럼 보여도, 힌두교가 전혀 전능하신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아도, 결국은 이들이 모두 하느님께로 돌아오게 되어있다는 것이 성경의 분명한 확신입니다. 이런 믿음이 바로 기독교로 하여금 다른 종교보다 뛰어나게 하는 것이며, 그 폭이 넓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요인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께로부터 나왔고, 그로 말미암아 존재하기 때문에 결국은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자명한 원리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지 못한다고 아니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전능하심과 그의 위대하심이 이를 이루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 하느님의 그 위대하심을 감사하며 찬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물이 깨끗한 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온갖 더러운 물이 이 골짜기 저 골짜기에서 쏟아져 흘러들지만 그것들이 하느님의 품에 이르면 모두가 정화되어 깨끗한 물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위대하신 능력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라는 큰 정화조를 통과하고 나면 모든 피조물은 다 깨끗하게 되어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감사의 찬송을 드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비록 지금 여러분의 처지가 이 땅의 삶을 만족하게 이룰만한 것이 못되어도, 아니 오히려 고난에 처하여 있다 할지라도 절망하거나 낙심하거나 슬퍼하지 맙시다. 결국 그것은 지극히 짧은 순간에 불과하고 지나고 보면, 참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영원한 생명의 세계가 펼쳐지면서 거기에 슬퍼하던 자들, 병들어 고생하던 자들, 가난하여 울던 자들, 억눌려 신음하던 자들, 빼앗겨 울분해 하던 사람들, 의를 위하여 핍박받던 자들, 평화를 위해 일하던 사람들이 모두 모여 하느님의 보좌 앞에 면류관을 드리며 아름다운 노래로 그의 긍휼하심과 놀라운 구원의 능력을 찬양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마음 눈을 활짝 열어 모든 피조물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분명하게 보면서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주님께 돌려드려야 하겠습니다. 이 감사의 마음으로 오늘의 역경을 헤치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어 나가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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