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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중심

열왕기하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150 추천 수 0 2008.08.25 15:14:29
.........
성경본문 : 왕하5:20-27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2003.6.15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의 시종 게하지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스승께서 이 시리아
사람 나아만이 바치는 것을 거절하시고 그냥 돌려보내시니 뒤쫓아가서 무엇이든 좀
받아 오고 말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게하지는 나아만을 쫓아갔다. 나아만은 게하지
가 뒤쫓아오는 것을 보고 마차에서 내려 그를 만나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게하
지가 말하였다. "별일 없습니다. 지금 막 에브라임 산악 지방에서 예언자 수련생 두
사람이 왔습니다. 그들에게 줄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보내 달라고 스승께서 저
를 보내셨습니다. " 나아만은 "드리다뿐이겠는가? 한 달란트를 더 드리겠다"하며 은
두 달란트를 억지로 두 자루에 넣고 옷 두 벌을 꺼내서 부하 두 사람들에게 들려 게
하지 앞에 세워 보냈다. 게하지가 집 있는 언덕에 돌아 와서 짐을 받아 집안에 넣고
그 사람들을 돌려보낸 후 들어가서 스승 앞에 서자, 엘리사가 물었다. "게하지야, 어
디를 갔다 왔느냐?" "소인은 아무 데도 갔다 오지 않았습니다."하고 그가 대답하였
다. 그러나 엘리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누군가가 마차에서 내려 너를 만나기 위하여
돌아설 때 내 마음이 거기에 가 있지 않은 줄 아느냐? 그래, 너는 돈을 받았다. 네가
그 돈으로 정원을 사서 올리브나무, 포도나무를 심고 양과 소를 사고 하인과 하녀를
거느릴 수야 있겠지만, 너와 네 자손을 나아만에게서 옮은 나병을 영원히 앓으리라."
게하지는 나병으로 피부가 눈처럼 하얗게 되어 엘리사를 떠났다.
                                                                               <왕하 5:20-27>

나병

아주 오래 전, 나병을 앓는 한하운(?) 시인의 시를 읽은 기억이 납니
다. 그 때 저는 천형이라는 자신의 병을 문학적으로 승화시킨 아름다운
시에 대한 감상만이 아니라 문둥병자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을 어느 정도 배웠든 것 같습니다. 영화 벤허에 주인공의 어머니와 누이
동생이 오랜 지하 감옥 생활에서 문둥병에 걸렸다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
건이 일어나는 그 순간에 그 병이 치료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신약성서
에도 심심치 않게 이 나병에 얽힌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나병에 얽힌 구약성서의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입니다. 뇌물
을 받은 게하지가 나병에 걸립니다. 그런데 이 나병은 바로 앞서 시리아
장군인 나아만이 앓던 바로 그 병이 옮은 것이라고 성서가 증언하고 있
습니다(27절).
5장 1절 이하에 나아만 장군의 나병이 치료되는 과정이 비교적 소상
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는 시리아와 이스라엘이 티걱태걱 자주
싸우던 시절이었습니다. 시리아의 위대한 장군인 나아만이 나병이 걸렸
습니다. 점점 증상이 깊어 가는 중에 이스라엘과의 전쟁시에 포로로 잡
아온 하녀의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하녀는 자랑스럽게 자기 나라에
있는 엘리사를 만나기만 하면 그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물에 빠
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심정이었는지 아니면 평소에 그 하녀
가 믿을만하다고 생각했는지 나아만은 그녀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습
니다. 나아만이 왕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이스라엘 왕에게 친서를 써
주면서 상당한 분량의 선물도 준비시켜 주었습니다. 은 십 달란트, 금 육
천 세겔, 옷 열 벌이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나아만은 엘리사의 집에 당
도했습니다. 그런데 마중 나오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엘리사는 사람을 보
내서 "요르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는 말만 전해왔습니다. 기분
이 상할 만 하지요. 이스라엘보다 훨씬 국력이 강한 나라의 참모총장을
이렇게 대접하는 일은 없습니다.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에는 요르단 강물
보다 더 좋은 아바나강과 발바르강이 있다고 큰소리치면서 돌아갈 마음
을 먹었습니다만 부하들의 만류로 결국 요르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었고, 몸이 어린 아이 몸처럼 깨끗해졌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선물을 주면 앞으로는 야훼만을 믿고 살아가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모시는 야훼께서 살아 계십니다. 결
코 이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 나아만이 몇 번이나 받아달라도 간청했지
만 엘리사는 번번이 물리쳤습니다.
나아만은 결국 병을 고쳐준 것에 대한 보답을 하지 못한 채 돌아갑니
다. 그런데 엘리사의 시종인 게하지는 엘리사와는 다른 생각이었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갖고 온 선물에 욕심이 난 탓인지 아니면 엘리사의 시종
으로서 집안살림을 꾸리는데 도움이 되겠다 싶었는지 나아만을 뒤따라
가서 은 두 달란트와 옷 두 벌을 받아냅니다. 스승이 자신을 보냈다고 거
짓말을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선물을 주고 싶어하던 차에 나아만으로
서는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습니까? 게하지가 말한 액수인 한 달란트가
아니라 두 달란트를 줍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스승 앞에 선 게하
지에게 엘리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군가가 마차에서 내려 너를 만나
기 위하여 돌아 설 때 내 마음이 거기에 가 있지 않은 줄 아느냐? 그래,
너는 돈을 받았다. 네가 그 돈으로 정원을 사서 올리브나무, 포도나무를
심고 양과 소를 사고 하인과 하녀를 거느릴 수야 있겠지만, 너와 네 자손
은 나아만에게서 옮은 나병을 영원히 앓으리라."(26,27절).
이방인이었던 나아만은 나병이 치료되었지만 유대인이면서 그 당시
이스라엘의 최고 예언자인 엘리야의 시종이었던 게하지는 나아만의 나
병을 옮아 앓게 되었다는 이 현실은 유대인들에게 별로 익숙한 일이 아
닙니다. 어쩌면 엘리사가 나아만 장군의 병을 치료해 준 것 자체가 유대
인들의 정서에는 맞지 않는 일입니다. 지옥의 불쏘시개감으로나 쓰일 이
방인을 구원시키는 일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더
구나 지금은 시리아와 이스라엘이 전쟁 중이기도 합니다. 요즘의 경우로
말해서 이스라엘 의사가 팔레스틴 과격 단체 우두머리의 난치병을 고쳐
주는 것과 비슷합니다. 또한 약간 거짓말을 해서 돈을 받았다는 이유로
같은 민족을 죽게 했다면 지금의 이스라엘 사람들도 결코 용납하지 않았
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서 본문은 분명히 그렇게 진술하고 있습니
다. 민족적 정체성보다는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윤리적 정당성이 훨씬 고
차원의 가치가 있다는 가르침일까요? 아니면 야훼 하나님이 민족의 차
이를 뛰어넘어 보편적으로 계시하신다는 가르침일까요?

엘리사

나병이 치료된 나아만이 선물을 주려고 하자 엘리사는 이렇게 대답
합니다. "내가 모시는 야훼께서 살아 계십니다. 결코 이것을 받을 수 없
습니다."(16절). 우리는 엘리사가 왜 나아만이 고마움의 표시로 가져온
돈과 옷을 거절했는지 그 깊은 속마음을 정확하게 헤아릴 길은 없습니
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친절을 베푼 이에게 물질을 통해서 보답하려는
것은, 또한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사람살이에서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성직자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일정
한 정도의 사례비를 받고 있습니다. 만약 엘리사의 이런 태도를 우리 모
두에게 문자적으로 적용시켜야 한다면 성직자들의 사례비는 잘못된 관
행일지 모릅니다. 2천7백년전 전 이스라엘에서 일어났던 이런 일들을 오
늘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시킬 수는 없지만 엘리야의 태도에서 우리는 어
떤 근본적인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제자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카리스마가 강한 예언자들이었습니다. 물론 엘리사보다는 엘리야
가 이스라엘 사람들의 전승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죽지 않고 불수
레를 타고 승천했다는 전설적 인물인 엘리야는 메시아가 오기 전에 다시
오게 될 인물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변화산에 올라
갔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서 초막 세 채를 짓자
고 제안할 정도였습니다. 그렇지만 엘리사는 엘리야 못지 않은 카리스마
를 갖고 있었습니다. 열왕기하 2장부터 엘리야의 뒤를 이어 엘리사의 활
동이 전개되고 있는데, 대부분 엘리야의 경우처럼 초자연적인 사건들이
벌어집니다. 아마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서 엘리야와 엘리사는 거의 동일
인물로 여겨질 만큼 강한 능력을 보였습니다. 오늘 나아만 장군의 나병
치료 이야기도 이런 일련의 상황 속에 있습니다.
성서를 읽는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들을 접할 때마다 그런 기적이 일
어났는가, 또는 그 사람이 참으로 대단하구나, 하는 식으로 접근하고 있
습니다. 일전에 큰 딸 지예가 성서에 나오는 기적이 사실이냐고 묻더군
요. 고등학교 시절의 아이들에게는 그런 이야기에 흥미가 많은 것 같습
니다. 귀신이 어떻고, 태몽이 어떻고, 저승사자가 어떻고, 하는 식입니
다. 그래서 성서의 이야기들도 그런 식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성서의 이야기를 매우 조심스럽게, 또한 아주 정밀하게 해석해야만 합니
다. 이 안에는 역사도 있고, 전설도 있고, 수필도 있고, 소설도 있습니다.
다양한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만 하나님의 구원과 계시사건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일치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와 그렇지 않은 부분들을
구분하면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 그의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집중
해야만 합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에서 엘리야가 나아만 장군의 나병을 진짜 고
쳤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역사적으로 검증될 사안이 아닙니다. 여기에
는 역사적인 부분도 있고, 그 역사가 전승과정을 통해서 전설의 형식을
갖춘 부분도 있습니다. 아마 나아만 장군이 엘리야를 찾아왔다는 사실은
역사적일 수 있겠지요. 그러나 고칠 수 없는 병을 요르단강에 들어가서
몸을 씻었기 때문에 고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은 별로 역사적 사실은 아
닙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몇 가지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나아만 장군의
병은 실제로는 나병이 아니라 악성 피부병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당시
는 병명을 정확하게 구분할 수 없던 시대였으니까요. 요르단 강물에는
피부병에 효과가 있는 성분이 들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요즘도 어떤 온
천물은 피부병이나 위장병을 고칩니다. 또는 어떤 영적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 앞에 서게 되면 심리적으로 어떤 작용을 일으켜서 몸의 상태가 좋
아질 수 있습니다. 물론 본문에서 나아만은 엘리사를 직접 만나지 않은
채 요르단 강물에 들어갔습니다만 이미 엘리사에게 왔다는 사실 자체가
그에게는 심리적 효과를 가져다 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여기서 말씀드
린 내용들은 그야말로 추정에 불과하지 어떤 명확한 사실은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실에 근거해서 나아만 장군의 몸이
정상으로 회복되었다는 사실만 알 수 있습니다.
엘리사는 "내가 모시는 야훼께서 살아 계십니다"는 말로 나아만의 진
심 어린 선물을 거절했습니다. 엘리사는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나아만의
치유는 자기가 아니라 야훼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의
능력이 나타났다는 것은 바로 그가 살아있다는 의미입니다. 엘리사 자기
가 한 일이 아닌데 값비싼 선물을 받는다는 것은 불의한 일입니다. 이게
바로 예언자들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자기의 삶
전체로 믿고 깨닫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삶을 가리켜 우리는
"영적"이라고 말합니다. 예언자들은 이렇게 영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돈과 옷을 받겠습니까?

게하지

엘리사의 시종인 게하지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는 자기 스승을 융
통성 하나 없는 원칙주의자라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자기 나라로 돌아
가는 나아만을 뒤쫓아가서 은 두 달란트와 옷 두 벌을 받아왔습니다. 나
아만이 처음에 가져온 선물에 비해서는 너무나 작은 것입니다. 아마 게
하지는 스승의 이름을 판 것말고는 나름대로 떳떳했을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이 그런 것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
하게 알 수는 없지만 우리의 일상적 삶의 기준에 따르면 그렇다는 것입
니다. 게하지의 입장을 두둔하는 뜻으로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
다. 엘리사를 가장 가까이 모시고 있는 시종으로서 집안을 꾸려 가는 데
재정적인 어려움이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엘리사는 그렇다 치고 시종으
로서 스승의 생활을 걱정해야 하고 다른 제자들의 생활도 걱정해야 합니
다. 이번 기회에 나아만에게서 약간의 도움만 받으면 수년 동안 아무런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위에서 언급한대로 게하지가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나아만에
게서 돈과 옷을 받았다고 한다면 엘리사는 그래도 게하지를 책망했을까
요? 오늘 우리는 거기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서가 그것을 말하
려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의 책망을 보면 게하지가 그런 순수
한 마음으로 행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사는 게하지
에게 "네가 그 돈으로 ... 하인과 하녀를 거느릴 수 있겠지만"이라고 나무
랍니다. 게하지는 불순한 동기로 딴 주머니를 찼겠지요. 엘리사는 평소
에 게하지가 이렇게 행동할 수 있다는 낌새를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
을 것입니다. 사람의 행동은 갑자기 바뀌는 게 아니라 그 의식에 잠재해
있는 것들이 시나브로 나타나기 때문에 웬만큼 직관력이 있기만 하면 그
런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게하지가 나아만 장군을 뒤쫓아갔을 때 엘
리사의 마음이 "거기에 가 있었다"는 말이 그것을 의미합니다.

소유지향적 삶

엘리야는 게하지에게 이렇게 책망했습니다. "네가 그 돈으로 정원을
사서 올리브나무, 포도나무를 심고 양과 소를 사고 하인과 하녀를 거느
릴 수야 있겠지만." 오랜 세월 엘리사 옆에서 듣고 배운 게하지가 결국
전원주택을 꾸리고 파출부를 두면서 화려하게 사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
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런 삶의 자세를 끌어안고 있는 한 게하지는 나
아만을 뒤쫓아가서 돈을 뜯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삶의 중심이 엘리
사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도덕한
행위는 결국 어떤 삶의 가치관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이
런 점에서 행위보다 존재가 상위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티브이나 라디오, 신문의 뉴스를 볼 때마다 우리 사회는 왜 이렇게
부정부패와 뇌물이 성행하는가 하는 분노와 슬픔이 함께 밀려옵니다. 군
사정권 때는 우리의 재벌의 총수들이 매년 수십 억원씩 대통령에게 바쳤
습니다. 지금 전두환 전대통령은 2천억 가까운 벌금을 내지 않고 있다고
하는군요. 지금도 약간씩 모양을 달라졌지만 이런 돈들이 정치, 경제, 교
육계에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대학교수가 되기 위해서 돈을 내야 한다는
웃지 못할 일들이 버젓이 일어나는 실정이기도 합니다. 일전에는 영관
급, 장성급 장교들이 뇌물을 받은 일이 발각되었습니다. 지금 북한 송금
에 대한 특검이 진행되고 있습니다만 이런 것도 역시 비합법적인 방법이
라고 하더라도 무언가를 만들어 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관행이 빚
은 비극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한 사회가 완벽하게 깨끗할 수만은 없지
만, 또한 빈틈이 없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만도 아니지만 우리 사회에
는 이런 일들이 너무나 많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독일의 티브이 뉴
스나 신문 뉴스에는 이런 일들이 별로 보도되지 않습니다. 작년인가, 재
작년에 장관인가 시장인가 하는 사람이 공무로 여행 다니면서 쌓이게 된
마일리지를 개인 용무로 사용한 일이 드러나게 되지 사임했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판공비를 거의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있는 마당에 마
일리지 때문에 사임한다는 것은 실감이 가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가 사회에 만연한 이런 부정부패, 청탁과 뇌물 자체가 핵심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정부에서 아무리 부정부패 척결위원회
를 만들어서 시민운동을 펼쳐보았자, 또는 기독교 윤리실천 운동본부 같
은 단체에서 아무리 건전한 시민사회를 만들어가자는 구호를 외쳐보았
자 근본 의식이 고쳐지지 않는 한 반짝 하다가 끝나버릴 뿐입니다. "그
돈으로 정원을 사서 올리브나무, 포도나무를 심고 양과 소를 사고 하인
과 하녀를 거느리고 살고 싶다"는 생각이 자기 삶의 중심에 버티고 있다
면 게하지처럼 나아만을 뒤쫓아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약간 거짓말을
하고, 누구나 그렇게 하는 거니까, 노후를 편안하게 지낼 수 있다면 이
길을 택할 것입니다.

야훼가 살아 계시다

그런데 전원주택에서 파출부를 두고 온갖 문화시설을 갖추고 살고
싶다는 인간의 마음은 이미 이런 산업사회 이후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도저히 떨칠 수 없는 욕망입니다. 아마 설교자인 나에게도 그런 욕망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하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그런 소유지향적
삶을 가장 바람직하고 그래서 반드시 성취해야만 할 목표로 확신하고 있
기 때문에, 남을 생각하고 부를 분배하고 정의롭게 살아야한다고 아무리
가르쳐도 알아듣기 힘들고, 알아들었다고 해도 그대로 실천하기 힘듭니
다. 이게 우리의 어쩔 수 없는 현실이며 한계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개인과 공동체가 정의롭고 평화로운 삶으로 가기 위
한 첩경은 어디에 있을까요? 소유지향적 삶보다 훨씬 근본적으로 행복
한 삶의 근거를 알아야만 합니다. 어린아이들은 밖에 나가 친구들과 노
는 것만을 즐겁게 생각하지만 철이 들면 공부도 하고 남을 위해서 봉사
를 하며 살아가는 것을 훨씬 즐겁게 생각하듯이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를
인식하는 길이 최선입니다. 예언자들은 바로 이런 사실을 명증하게 인식
하고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앞서 우리가 본문에서 읽었듯이 병을 낫게
해준 것에 대해 보답하겠다는 나아만의 제의를 받고 엘리사는 이렇게 대
답했습니다. "내가 모시는 야훼께서 살아 계십니다. 결코 이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16절). 야훼가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온전히 깨우친다면, 즉
삶의 중심이 야훼에게 놓여 있기만 하다면 우리는 더 이상 나아만을 뒤
쫓아 다니며 야비하게 공갈치고 거짓말하고, 교묘하게 뇌물 받고, 청탁
하는 식으로 우리의 삶을 소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2003년6월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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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왕기하 삶의 중심 왕하5:20-27  정용섭 목사  2008-08-25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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