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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눅17: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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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2003.6.21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죄악의 유혹이 없을
수 없지만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하다. 이 보잘 것 없
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그 목에 연자맷
돌을 달고 바다에 던져져 죽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 조심하여
라. 네 형제가 잘못을 저지르거든 꾸짓고 뉘우치거든 용서해 주어라.
그가 너에게 하루 일곱 번이나 잘못을 저지른다 해도 그 때마다 너에
게 와서 잘못했다고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눅 17:1-4)
용서 만능?
마태복음에 따르면 남을 죄짓게 하는 것보다는 연자맷돌을 목에 달
고 바다에 던져져 죽는 편이 낫다는 앞의 두 구절(마 18:6,7)과 형제의
잘못을 용서해주라는 뒷 부분의 두 구절(마 18:21,22)이 서로 분리된 채
진술되고 있는 반면에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에서는 같은 맥락의 말
씀으로 진술되어 있습니다. 어느 쪽의 주장이 본래의 모습에 가까운지
우리가 정확하게 짚어내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그런 약간씩의 차이는 우
리가 이 말씀을 이해하는 데 별로 결정적인 문제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누가의 편집의도에 따라서 이 두 말씀을 하나로 연결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하루에 일곱 번이나 실수를 한 사람을 용서해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
은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이웃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
지에 대한 아주 엄격한 명령입니다. 마태복음에 진술되어 있는 다음과
같은 병행구는 이 사실을 훨씬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
께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
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누가복음에는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명령이 예수님의 말
씀이지만 마태복음에서는 베드로의 질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마 평소
에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에서 이런 대화가 충분히 오갔을 것입니다. 초
기 기독교 공동체가 이 대화를 기억하면서 약간씩 다른 형태로 전승시켜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일곱 번, 또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는
숫자는 그렇게 중요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닙니다. 용서의 당위에 대한 강
조일 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단 오늘 이 말씀을 문자적인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기독교인은 이
세상의 악을 지나치게 추상적으로 이해한다는 비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
다. 하루에 일곱 번씩이나 용서하라는 말씀이 아무리 높은 가치가 있다
고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살아간다면 이 세상의 악은 자신을 돌아봄으로
써 새로워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 용서하는 선을 이용할 뿐이라고 말
입니다. 이런 비판은 일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잘못
에 대한 징벌 없이 용서의 원리로 운용된다면 대개의 사람들은 훨씬 더
죄에 기울어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군사정권 때 고문을 일삼던 사람들을
그저 용서해준다고 해서 변화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은 훨씬 악
한 세력에 휩싸이게 됩니다. 사료용 원료를 식용으로 판다든지, 거짓 증
언으로 어떤 사람의 삶을 파괴하는 행위들, 돈을 위해서 유부녀를 약탈
하는 행위를 용서하기만 한다면 이 세상은 참으로 큰 혼란에 빠져들 것
입니다.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 사건에서도 하나님은 이미 아담과 이브를
무조건 용서해 준 게 아니라 일정한 책임을 물었다는 것을 보면 용서해
주는 게 능사는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
은 분명히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주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앞서 말한 대로 현실인식이 철저하지
못하거나 유약한 감정에 빠진 발언인가요?
죄의 유혹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뉘우치는 형제를 용서하라는 이 말씀은 한 인
간이 죄의 유혹 앞에서 얼마나 취약한지에 대한 현실적인 판단에 근거하
고 있습니다. "죄악의 유혹이 없을 수 없다"는(1절) 예수님이 말씀이 바
로 그것입니다. 죄의 유혹은 바로 인간 삶의 현실입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그런 유혹에서 벗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 수행을 통해서 정
신적으로 높은 단계에 올라선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유혹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니코스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이라는 소설
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앞에 둔 순간에 무슨 유혹을 받았을
까에 대한 소설가적 상상력으로 쓴 작품입니다. 그에 의하면 예수님은
여자와 결혼해서 아들 딸 낳고 평범하게, 그러나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유혹을 마지막 순간에 받았다고 합니다. 그만큼 인간이 본능적 충동 내
지 유혹에 취약하다는 의미이겠지요. 어떤 사람에게 죄의 충동이 전혀
없다면 그는 실제적인 인간은 아닐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에크하르트에
의하면 죄의 충동이 있지만 그것을 억제하고 자아가 흔들리지 않는 사람
이 그런 충동 자체가 없는 사람보다 낫다고 합니다. 죄의 충동이 죄가 아
니라 죄에 동의하는 것이 죄라는 뜻입니다. "최수의 유혹"에서도 예수님
은 십자가에서 결국 도망가지 않는다는 결말이 납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파렴치한 사건들을 볼 때마다 우리는 도대
체 저런 인간들은 무엇 하러 태어났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아
주 작은 실수로부터 시작해서 정말 악질적인 행위들도 적지 않습니다.
사람을 속이고 신체적 폭력을 행사하고 심지어는 살인행위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런 악한 행위에는 민족과 세계평화를 명분으로 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자기의 사적인 욕망을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팔레
스틴에서 벌어지고 있는 테러와 반테러의 악순환은 한 두 마디로 판단하
기 힘든 문제이니까 접어두기로 하고, 아주 사적인 욕망으로 일으키는
반사회적 범죄 행위에 한정해보도록 합시다. 누가 보더라도 악랄한 행위
는 많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악질적인 행위를 벌이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런 유혹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요즘 벌어지는 성범죄가 그
렇고, 심지어는 살인 범죄도 역시 그들에게만이 아니라 우리 인간 모두
에게 일어나는 심리적 작용입니다. 예수님은 친구에게 "이 놈, 저 놈" 욕
하는 행위 자체가 이미 살인과 진배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누구
와 경쟁을 벌여야 한다고 할 때 그가 없어졌으면 하고 바랍니다. 이런 심
리가 어떤 사람에게는 폭력과 살인까지 도달하게 되고, 자제력과 이성적
판단력이 있는 어떤 사람에게는 잠시의 유혹으로 끝나버립니다. 이렇듯
죄악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 상황이 바로 인간의 실존입니다.
우리 행위의 한계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의 행위가 다른 사람을 죄짓게 하는지 그렇
지 않은지를 잘 모른다는 사실이 훨씬 불안한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 보
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그 목에 연
자맷돌을 달고 바다에 던져져 죽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는 예수님
의 말씀에서 우리의 행위가 얼마나 불확실한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보
잘 것 없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 그들로 하여금 삶의 의미를
상실하게 하는 것이 그렇게 엄청난 잘못이라고 한다면 어느 누구도 여기
서 벗어날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무한히 너그러우면서도 동
시에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기 때문에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전체적인
맥락을 충분히 살펴야 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우리 행위가 갖는 근본
적인 한계를 지적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한계는 두 가지 각도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는 우리가 선
한 생각으로 시작한 일도 어느 틈에 나쁜 의도가 숨어들게 된다는 것입
니다. 적절한 예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키다리 아저씨"라는 동화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기억은 아주 희미한데, 여자 주인공이 키다리 아저씨
에게 쓴 편지인 것 같습니다. 그 아이가 고아원에 있을 때 그 지역의 의
원들이 간혹 방문하곤 했습니다. 그 의원들은 고아원에 방문해서 돈이나
물품으로 도와주고, 어린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 주인공 아이는 그게 아주 싫었다고 합니다. 마음은 없으면서 의원으
로서의 생색을 내기 위한 행동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어린아이가 일찌감
치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렇게 어린아이의 마
음에 상처를 내는 것도 씻지 못한 죄입니다. 우리가 종종 그렇게 하듯이
말입니다. 또 다른 하나의 문제는 우리의 인식능력이 어떤 사태의 이면
을 모두 담아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노무현 대통령이 어려운 상황
에서 국정을 이끌어가느라고 고생이 많습니다. 그의 판단은 양극단의 반
응이 따릅니다. 네이스를 수용하면 전교조 선생님들이 상처를 받습니다.
대북 송금 특검을 받아들이고 조사 기간을 연장하면 그것을 반대하는 사
람들의 마음이 상처를 받습니다. 그것을 거부하면 다른 쪽의 사람들이
상처를 받습니다. 시시비비가 비교적 뚜렷한 사안만이 아니라 긍정적인
일들도 경우에 따라서 어떤 사람들에게 나쁘게 작용합니다. 예컨대 A라
는 교회에 뛰어난 목사가 부임했다고 합시다. 그가 온 후로 그 지역의 기
독교인들이 대부분 A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교회가
부흥되지 않는다고 교회 구성원들 사이에 갈등이 있던 B교회는 이런 와
중에 결국 담임 목사를 내보내게 되었습니다. 한 교회의 부흥이 다른 교
회를 분열시키고 만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거의 이런 이중적 현상으로
작동됩니다. 우리 집 딸이 일류 대학에 들어가면 대신에 들어가지 못하
는 학생이 나오게 마련이고, 우리나라의 자동차와 티브이가 전세계를 휩
쓸게 되면 다른 나라는 그만큼 손해를 보게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행위를 재단할 수 있는 엄격한 잣대가 없기 때
문에 그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으로, 물에 술탄 듯, 술에 물탄듯 살아
가도 된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왜 기독교의 윤리적 근거가 없겠습니
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 따라서 이 땅 위에 정의롭고 평화로운
다스림이 실현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만 합니다.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가르치듯이 기독교인들의 행위는 참된 신
앙의 인식론적 바탕이 됩니다. 다만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구를, 무엇을
비판하는 바탕에는 선악이원론적인 기준이 놓이지 말아야하며, 또한 배
타적인 분노와 미움이 놓이지 말아야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말하자
면 하루에 일곱 번씩이라도 용서할 수 있는 관용이 있을 때만 적극적이
고 긍정적인 비판과 책임 추궁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죄는 자기 파괴의 길
여기서 우리는 좀더 직접적으로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하루에 일곱 번씩 용서할 수 있을까?" 생각하기에 따라서 이 대답은 달
라질 것입니다. 성서 해석상 이 말씀은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가, 아닌가
의 차원이 아니라 그런 태도에 대한 강조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
니다. 그러나 저는 약간 다른 시각에서 이 말씀이 현실성이 있다고 생각
합니다. 즉 죄는 그것에 의해서 손해를 보는 사람보다도 그것을 행함으
로써 이익을 보는 사람에게 훨씬 파괴적으로 작용한다고 말입니다. 본문
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
구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그 목에 연자맷돌을 달고 바다에 던져
져 죽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2절). 참으로 신기합니다. 악을 행하
면 그것을 당하는 사람보다도 행한 사람이 훨씬 심각하게 허물어집니다.
물론 겉으로만 보면 한 대 때린 사람이, 그리고 남에게 사기 친 사람이
이득을 보는 것 같지만 그 내면적 실상을 들여다보면 행한 사람이 오히
려 망가집니다. 이게 곧 하나님이 심판하는 방식이 아닐까요? 로마서(?)
에서도 심판을 하나님께 맡겨두라고 했습니다. 도둑질하는 사람은 늘 마
음이 불안하게 되고, 거짓말만 하는 사람은 늘 남을 의심하게 되고, 폭력
으로 재물을 얻는 사람들은 더욱 폭력적인 인간이 되고 맙니다.
이런 점에서 악을 행하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남에게 해꼬
지를 입히는 것 같지만 결국은 자기를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만약에 우
리가 이 사실을 명백하게 인식할 수만 있다면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용
서할 마음이 들지 않을까요? 불쌍한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렇습니다. 용서는 이렇게 상대방을 불쌍하게 여기는 데서만
가능합니다. 악을 행함으로써 이미 심판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용서받아야 할 자의 태도
우리가 형제의 허물을 가리우고 그의 뉘우침을 받아들이면서 용서한
다는 사실에는 위에서 말한 인간의 한계만이 아니라 더 근원적인 이유가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그렇습니다. 용서하는 사람만이 용서받을 자격이 있습
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
입니다.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에게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이
러한 최소한의 준비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런 용서의 복음을 늘 듣고 있는 교회 공동체 안에 오히려
용서하는 마음이 없다는, 아주 기이한 현상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
다. 저의 짧은 경험입니다만 세상 사람들은 자주 싸우고 감정을 상하지
만 그만큼 쉽게 화해하고 용서합니다. 자신들에게 흠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몰라도 남의 잘못을 크게 문제삼지 않습니다. 그런 말이 있습
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는 한번 사이가 벌어지면 오래 가지만 세상
사람들 사이의 충돌은 막걸리 한잔으로 금방 풀어집니다. 술이 큰 역할
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거칠게 살지만 쉽게 용서하며, 반면에 우리
종교인들은 세련되게 사는 것 같지만 서로 용서하지 못합니다. 이게 참
으로 아이러니입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 의, 자기 정당성이 너무 강하
기 때문입니다. 이미 쌓아놓은 종교적 업적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기 때
문에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고, 따라서 형제의 잘못도 용서하지
않습니다.
용서와 화해의 공동체를 향하여
오늘 말씀의 결론은 조금 더 원대한 미래 공동체를 향한 것에서 찾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가 이루어지는 사회는 단
지 개인적인 원한이나 파렴치범에 대한 문제에 한정되는 게 아니라 훨씬
포괄적이고 심층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삶의 경쟁력이 없는 사람들
을 향한 용서와 화해에까지 확대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젊었을 때
공부하지 않고 게으르게 산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뉘우치면 이 사
회가 용서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도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이 제공되어야 합니다. 똑똑하고 잘난 사람만 큰
소리치고 사는 게 아니라 그렇지 못한 사람도 똑같이 살아갈 수 있는 사
회 말입니다. 예컨대 대학교를 나온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 일류대
학교를 나온 사람이나 지방의 수준이 낮은 학교를 나온 사람이나 크게
구별되지 않는 사회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정
반대입니다. 우리 사회는 인색한 공동체입니다. 능력만큼 대우받는 사회
가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건강한 것은 아닙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막혀 있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 게을렀던 사
람이 뉘우칠 때 받아들여지는 미래의 사회를 위해서 교회는 오늘 예언자
적 소리를 내야합니다. 기도할 때마다 우리의 자식들이 이 세상에서 머
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말게 해달라는 생각에 머물러 있는 한 우리는 남
을 용서하기 힘들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살아가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똑똑한 사람이 많아지는 것보다는 경쟁력이 없는 사람들
이 용서받는 공동체를 지향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용서의 능력이야말로
우리 기독교인들이 살아가야 할 삶의 태도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희망이
기도 합니다. <2003. 6월22일>
수 없지만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하다. 이 보잘 것 없
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그 목에 연자맷
돌을 달고 바다에 던져져 죽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 조심하여
라. 네 형제가 잘못을 저지르거든 꾸짓고 뉘우치거든 용서해 주어라.
그가 너에게 하루 일곱 번이나 잘못을 저지른다 해도 그 때마다 너에
게 와서 잘못했다고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눅 17:1-4)
용서 만능?
마태복음에 따르면 남을 죄짓게 하는 것보다는 연자맷돌을 목에 달
고 바다에 던져져 죽는 편이 낫다는 앞의 두 구절(마 18:6,7)과 형제의
잘못을 용서해주라는 뒷 부분의 두 구절(마 18:21,22)이 서로 분리된 채
진술되고 있는 반면에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에서는 같은 맥락의 말
씀으로 진술되어 있습니다. 어느 쪽의 주장이 본래의 모습에 가까운지
우리가 정확하게 짚어내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그런 약간씩의 차이는 우
리가 이 말씀을 이해하는 데 별로 결정적인 문제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누가의 편집의도에 따라서 이 두 말씀을 하나로 연결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하루에 일곱 번이나 실수를 한 사람을 용서해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
은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이웃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
지에 대한 아주 엄격한 명령입니다. 마태복음에 진술되어 있는 다음과
같은 병행구는 이 사실을 훨씬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
께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
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누가복음에는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명령이 예수님의 말
씀이지만 마태복음에서는 베드로의 질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마 평소
에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에서 이런 대화가 충분히 오갔을 것입니다. 초
기 기독교 공동체가 이 대화를 기억하면서 약간씩 다른 형태로 전승시켜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일곱 번, 또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는
숫자는 그렇게 중요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닙니다. 용서의 당위에 대한 강
조일 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단 오늘 이 말씀을 문자적인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기독교인은 이
세상의 악을 지나치게 추상적으로 이해한다는 비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
다. 하루에 일곱 번씩이나 용서하라는 말씀이 아무리 높은 가치가 있다
고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살아간다면 이 세상의 악은 자신을 돌아봄으로
써 새로워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 용서하는 선을 이용할 뿐이라고 말
입니다. 이런 비판은 일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잘못
에 대한 징벌 없이 용서의 원리로 운용된다면 대개의 사람들은 훨씬 더
죄에 기울어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군사정권 때 고문을 일삼던 사람들을
그저 용서해준다고 해서 변화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은 훨씬 악
한 세력에 휩싸이게 됩니다. 사료용 원료를 식용으로 판다든지, 거짓 증
언으로 어떤 사람의 삶을 파괴하는 행위들, 돈을 위해서 유부녀를 약탈
하는 행위를 용서하기만 한다면 이 세상은 참으로 큰 혼란에 빠져들 것
입니다.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 사건에서도 하나님은 이미 아담과 이브를
무조건 용서해 준 게 아니라 일정한 책임을 물었다는 것을 보면 용서해
주는 게 능사는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
은 분명히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주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앞서 말한 대로 현실인식이 철저하지
못하거나 유약한 감정에 빠진 발언인가요?
죄의 유혹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뉘우치는 형제를 용서하라는 이 말씀은 한 인
간이 죄의 유혹 앞에서 얼마나 취약한지에 대한 현실적인 판단에 근거하
고 있습니다. "죄악의 유혹이 없을 수 없다"는(1절) 예수님이 말씀이 바
로 그것입니다. 죄의 유혹은 바로 인간 삶의 현실입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그런 유혹에서 벗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 수행을 통해서 정
신적으로 높은 단계에 올라선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유혹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니코스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이라는 소설
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앞에 둔 순간에 무슨 유혹을 받았을
까에 대한 소설가적 상상력으로 쓴 작품입니다. 그에 의하면 예수님은
여자와 결혼해서 아들 딸 낳고 평범하게, 그러나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유혹을 마지막 순간에 받았다고 합니다. 그만큼 인간이 본능적 충동 내
지 유혹에 취약하다는 의미이겠지요. 어떤 사람에게 죄의 충동이 전혀
없다면 그는 실제적인 인간은 아닐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에크하르트에
의하면 죄의 충동이 있지만 그것을 억제하고 자아가 흔들리지 않는 사람
이 그런 충동 자체가 없는 사람보다 낫다고 합니다. 죄의 충동이 죄가 아
니라 죄에 동의하는 것이 죄라는 뜻입니다. "최수의 유혹"에서도 예수님
은 십자가에서 결국 도망가지 않는다는 결말이 납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파렴치한 사건들을 볼 때마다 우리는 도대
체 저런 인간들은 무엇 하러 태어났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아
주 작은 실수로부터 시작해서 정말 악질적인 행위들도 적지 않습니다.
사람을 속이고 신체적 폭력을 행사하고 심지어는 살인행위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런 악한 행위에는 민족과 세계평화를 명분으로 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자기의 사적인 욕망을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팔레
스틴에서 벌어지고 있는 테러와 반테러의 악순환은 한 두 마디로 판단하
기 힘든 문제이니까 접어두기로 하고, 아주 사적인 욕망으로 일으키는
반사회적 범죄 행위에 한정해보도록 합시다. 누가 보더라도 악랄한 행위
는 많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악질적인 행위를 벌이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런 유혹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요즘 벌어지는 성범죄가 그
렇고, 심지어는 살인 범죄도 역시 그들에게만이 아니라 우리 인간 모두
에게 일어나는 심리적 작용입니다. 예수님은 친구에게 "이 놈, 저 놈" 욕
하는 행위 자체가 이미 살인과 진배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누구
와 경쟁을 벌여야 한다고 할 때 그가 없어졌으면 하고 바랍니다. 이런 심
리가 어떤 사람에게는 폭력과 살인까지 도달하게 되고, 자제력과 이성적
판단력이 있는 어떤 사람에게는 잠시의 유혹으로 끝나버립니다. 이렇듯
죄악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 상황이 바로 인간의 실존입니다.
우리 행위의 한계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의 행위가 다른 사람을 죄짓게 하는지 그렇
지 않은지를 잘 모른다는 사실이 훨씬 불안한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 보
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그 목에 연
자맷돌을 달고 바다에 던져져 죽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는 예수님
의 말씀에서 우리의 행위가 얼마나 불확실한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보
잘 것 없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 그들로 하여금 삶의 의미를
상실하게 하는 것이 그렇게 엄청난 잘못이라고 한다면 어느 누구도 여기
서 벗어날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무한히 너그러우면서도 동
시에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기 때문에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전체적인
맥락을 충분히 살펴야 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우리 행위가 갖는 근본
적인 한계를 지적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한계는 두 가지 각도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는 우리가 선
한 생각으로 시작한 일도 어느 틈에 나쁜 의도가 숨어들게 된다는 것입
니다. 적절한 예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키다리 아저씨"라는 동화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기억은 아주 희미한데, 여자 주인공이 키다리 아저씨
에게 쓴 편지인 것 같습니다. 그 아이가 고아원에 있을 때 그 지역의 의
원들이 간혹 방문하곤 했습니다. 그 의원들은 고아원에 방문해서 돈이나
물품으로 도와주고, 어린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 주인공 아이는 그게 아주 싫었다고 합니다. 마음은 없으면서 의원으
로서의 생색을 내기 위한 행동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어린아이가 일찌감
치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렇게 어린아이의 마
음에 상처를 내는 것도 씻지 못한 죄입니다. 우리가 종종 그렇게 하듯이
말입니다. 또 다른 하나의 문제는 우리의 인식능력이 어떤 사태의 이면
을 모두 담아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노무현 대통령이 어려운 상황
에서 국정을 이끌어가느라고 고생이 많습니다. 그의 판단은 양극단의 반
응이 따릅니다. 네이스를 수용하면 전교조 선생님들이 상처를 받습니다.
대북 송금 특검을 받아들이고 조사 기간을 연장하면 그것을 반대하는 사
람들의 마음이 상처를 받습니다. 그것을 거부하면 다른 쪽의 사람들이
상처를 받습니다. 시시비비가 비교적 뚜렷한 사안만이 아니라 긍정적인
일들도 경우에 따라서 어떤 사람들에게 나쁘게 작용합니다. 예컨대 A라
는 교회에 뛰어난 목사가 부임했다고 합시다. 그가 온 후로 그 지역의 기
독교인들이 대부분 A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교회가
부흥되지 않는다고 교회 구성원들 사이에 갈등이 있던 B교회는 이런 와
중에 결국 담임 목사를 내보내게 되었습니다. 한 교회의 부흥이 다른 교
회를 분열시키고 만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거의 이런 이중적 현상으로
작동됩니다. 우리 집 딸이 일류 대학에 들어가면 대신에 들어가지 못하
는 학생이 나오게 마련이고, 우리나라의 자동차와 티브이가 전세계를 휩
쓸게 되면 다른 나라는 그만큼 손해를 보게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행위를 재단할 수 있는 엄격한 잣대가 없기 때
문에 그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으로, 물에 술탄 듯, 술에 물탄듯 살아
가도 된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왜 기독교의 윤리적 근거가 없겠습니
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 따라서 이 땅 위에 정의롭고 평화로운
다스림이 실현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만 합니다.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가르치듯이 기독교인들의 행위는 참된 신
앙의 인식론적 바탕이 됩니다. 다만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구를, 무엇을
비판하는 바탕에는 선악이원론적인 기준이 놓이지 말아야하며, 또한 배
타적인 분노와 미움이 놓이지 말아야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말하자
면 하루에 일곱 번씩이라도 용서할 수 있는 관용이 있을 때만 적극적이
고 긍정적인 비판과 책임 추궁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죄는 자기 파괴의 길
여기서 우리는 좀더 직접적으로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하루에 일곱 번씩 용서할 수 있을까?" 생각하기에 따라서 이 대답은 달
라질 것입니다. 성서 해석상 이 말씀은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가, 아닌가
의 차원이 아니라 그런 태도에 대한 강조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
니다. 그러나 저는 약간 다른 시각에서 이 말씀이 현실성이 있다고 생각
합니다. 즉 죄는 그것에 의해서 손해를 보는 사람보다도 그것을 행함으
로써 이익을 보는 사람에게 훨씬 파괴적으로 작용한다고 말입니다. 본문
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
구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그 목에 연자맷돌을 달고 바다에 던져
져 죽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2절). 참으로 신기합니다. 악을 행하
면 그것을 당하는 사람보다도 행한 사람이 훨씬 심각하게 허물어집니다.
물론 겉으로만 보면 한 대 때린 사람이, 그리고 남에게 사기 친 사람이
이득을 보는 것 같지만 그 내면적 실상을 들여다보면 행한 사람이 오히
려 망가집니다. 이게 곧 하나님이 심판하는 방식이 아닐까요? 로마서(?)
에서도 심판을 하나님께 맡겨두라고 했습니다. 도둑질하는 사람은 늘 마
음이 불안하게 되고, 거짓말만 하는 사람은 늘 남을 의심하게 되고, 폭력
으로 재물을 얻는 사람들은 더욱 폭력적인 인간이 되고 맙니다.
이런 점에서 악을 행하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남에게 해꼬
지를 입히는 것 같지만 결국은 자기를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만약에 우
리가 이 사실을 명백하게 인식할 수만 있다면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용
서할 마음이 들지 않을까요? 불쌍한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렇습니다. 용서는 이렇게 상대방을 불쌍하게 여기는 데서만
가능합니다. 악을 행함으로써 이미 심판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용서받아야 할 자의 태도
우리가 형제의 허물을 가리우고 그의 뉘우침을 받아들이면서 용서한
다는 사실에는 위에서 말한 인간의 한계만이 아니라 더 근원적인 이유가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그렇습니다. 용서하는 사람만이 용서받을 자격이 있습
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
입니다.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에게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이
러한 최소한의 준비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런 용서의 복음을 늘 듣고 있는 교회 공동체 안에 오히려
용서하는 마음이 없다는, 아주 기이한 현상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
다. 저의 짧은 경험입니다만 세상 사람들은 자주 싸우고 감정을 상하지
만 그만큼 쉽게 화해하고 용서합니다. 자신들에게 흠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몰라도 남의 잘못을 크게 문제삼지 않습니다. 그런 말이 있습
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는 한번 사이가 벌어지면 오래 가지만 세상
사람들 사이의 충돌은 막걸리 한잔으로 금방 풀어집니다. 술이 큰 역할
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거칠게 살지만 쉽게 용서하며, 반면에 우리
종교인들은 세련되게 사는 것 같지만 서로 용서하지 못합니다. 이게 참
으로 아이러니입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 의, 자기 정당성이 너무 강하
기 때문입니다. 이미 쌓아놓은 종교적 업적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기 때
문에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고, 따라서 형제의 잘못도 용서하지
않습니다.
용서와 화해의 공동체를 향하여
오늘 말씀의 결론은 조금 더 원대한 미래 공동체를 향한 것에서 찾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가 이루어지는 사회는 단
지 개인적인 원한이나 파렴치범에 대한 문제에 한정되는 게 아니라 훨씬
포괄적이고 심층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삶의 경쟁력이 없는 사람들
을 향한 용서와 화해에까지 확대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젊었을 때
공부하지 않고 게으르게 산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뉘우치면 이 사
회가 용서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도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이 제공되어야 합니다. 똑똑하고 잘난 사람만 큰
소리치고 사는 게 아니라 그렇지 못한 사람도 똑같이 살아갈 수 있는 사
회 말입니다. 예컨대 대학교를 나온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 일류대
학교를 나온 사람이나 지방의 수준이 낮은 학교를 나온 사람이나 크게
구별되지 않는 사회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정
반대입니다. 우리 사회는 인색한 공동체입니다. 능력만큼 대우받는 사회
가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건강한 것은 아닙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막혀 있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 게을렀던 사
람이 뉘우칠 때 받아들여지는 미래의 사회를 위해서 교회는 오늘 예언자
적 소리를 내야합니다. 기도할 때마다 우리의 자식들이 이 세상에서 머
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말게 해달라는 생각에 머물러 있는 한 우리는 남
을 용서하기 힘들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살아가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똑똑한 사람이 많아지는 것보다는 경쟁력이 없는 사람들
이 용서받는 공동체를 지향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용서의 능력이야말로
우리 기독교인들이 살아가야 할 삶의 태도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희망이
기도 합니다. <2003. 6월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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