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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과 귀걸이

창세기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112 추천 수 0 2008.08.25 15: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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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35:1-8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2004.7.20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야곱은 아브라함, 이삭, 요셉과 더불어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씨족장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들에 얽힌 서사가 창세기 12장부터 50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을 읽어보신 분들은 이미 느꼈겠지만 성서기자는 이스라엘의 씨족장들을 단순히 신앙적으로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철저하게 리얼리즘에 입각해서 보도되고 해석된 이스라엘 씨족장들의 이야기는 현대의 소설보다 훨씬 우리의 실제적인 삶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 우리에게 훨씬 친근하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런 이야기를 단순히 소설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이런 위대한 인간들의 삶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그 삶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그 내용이 아무리 드라마틱하더라도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의 삶에서 활동하는 하나님을 포착해내는 작업이 중요합니다. 오늘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러고 있지 말고 베델에 올라 가 거기에 자리를 잡아라. 네가 형 에사오를 피해 갈 때 너에게 나타났던 이 하느님에게 제단을 바쳐라."(1절).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세겜인데, 여기를 떠나서 베델로 가라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께 제단을 바치라고 구체적으로 명령하십니다. 오랜 전, 그러니까 대략 30여 년쯤 전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살기 등등한 형을 피해 유랑생활을 시작하면서 제일 처음 야영하다가 하나님의 환상을 본 곳이 바로 베델입니다. 나이가 어렸을 뿐만 아니라 늘 어머니의 치마폭에 싸여 있던 야곱이 혼자 광야를 여행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그의 가련한 처지를 단적으로 말해줍니다. 그 두려움을 무엇을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역설적이지만 베델은 두려움의 장소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체험했다는 점에서 위로의 곳이기도 합니다. 두려움과 위로가 교차되던 그곳으로 다시 가라는 명령은 현재 야곱이 처한 상황이 그 때와 비슷하다는 뜻입니다.

돌발사태 발생

또 다시 짐을 꾸리지 않을 수 없게 된 자초지종이 창세기 34장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젊은 시절 내도록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고
향에 돌아와 그런 대로 안정되게 살았는데, 너무나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인해서 야곱은 다시 위기에 처했습니다. 야곱의 딸인 디나가 그 마을에 나갔다가 그 마을의 유지인 하몰의 아들 세겜에게 성폭력을 당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그런 일이 생기면 그 두 사람을 결혼시키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래서 하몰은 아들 세겜의 행동에 대해서 용서를 구하고 그 당시의 관행처럼 디나를 며느리로 맞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디나의 오빠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비겁한 수단을 통해서 하물과 세겜은 물론 그 마을의 모든 남자들을 죽였습니다. 야곱은 아들들이 이렇게 행동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30년 전에는 자기가 아버지와 형을 속인 탓에 살던 곳을 떠나야 했는데, 이제는 아들들의 난폭한 행동 때문에 다시 살던 곳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들들을 책망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때문에 나는 이 지방에 사는 가나안 사람과 브리즈인들에게 상종할 수 없는 추한 인간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수가 얼마 되지 않는데 그들이 합세하여 나를 치면 나와 내 가족은 몰살당할 수밖에 없다."(30절).
사람이 살다보면 예상하지 못한 일을 만나게도 됩니다. 때에 따라서는 자기의 잘못으로 인한 일도 있지만 또 다른 경우에는 자기와는 전혀 상관없이 이런 저런 일을 당하게 됩니다. 자기 아들들이 자기에게 사전에 허락도 받지 않고 일을 이렇게 크게 벌일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던 야곱에게 결국 삶의 근거를 모두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이 닥친 것처럼 우리에게도 역시 그렇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나쁜 일은 모조리 피하고 좋은 일만 일어나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 두 발을 딛고 사는 사람 중에서 무조건 좋은 일들만 일어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리 주변 환경이 좋고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인간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처지와 상황에서라도 하나님의 손길을 감지하고 인식해내는 일입니다. 어쩌면 가장 열악한 상황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손길을 더욱 절실하고 확실하게 체험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야곱처럼 말입니다.
이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은 야곱에게 더 이상 이곳에 머뭇거리지 말고 베델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야곱은 30년 전의 경험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있었을 것입니다. 정신적으로도 그렇고 실제적으로도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져 있다가 삶의 희망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 그 베델은 야곱에게 구원의 땅이었습니다. 삼십 년 전처럼 절대절명의 순간인 지금, 베델을 기억하는 야곱에게 다시 희망이 솟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기 식구와 하인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에게 있는 남의 나라 신들을 내버려라. 깨끗이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어라. 이제 우리는 여기를 떠나 베델로 올라간다. 거기에서 나는 내가 어려움을 당할 때 나의 호소를 들어주시고 내가 가는 곳 어디에서나 보살펴 주신 하느님께 제단을 쌓아 바치고자 한다."(2,3절).

의지할 대상

사람이 위기에 처했을 때 참되게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이 없는 사람은 끝없이 나락에 떨어져버리고 말지만 그것이 있는 사람은 어느 정도의 고통이 있긴 하겠지만 그래도 그 위기를 극복해냅니다. 요즘 자살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고 합니다. 며칠 전에는 어린 자식 세 명과 함께 아파트에서 투신 자살한 어머니도 있었습니다. 살 길이 막막하다는 그 위기가 자신만이 아니라 자식들의 목숨까지 빼앗았습니다. 그 여자보다 더 큰 어려움을 당한 사람이 어디 없겠습니까만은 이 여자는 의지할만한 대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런 극한의 행동을 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사람들이 자기가 의지할 대상을 돈이나 권력이나 사람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여전히 문제를 안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대상은 여전히 이 세상의 사물에 불과한데도 그것에만 매달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확대하고 강화시킴으로써 위기를 예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큰 착각입니다. 그런 대상은 그것 자체가 또 하나의 위기를 만들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제한적입니다. 예컨대 오늘 본문에 나오듯이 야곱의 열 한 명의 아들은 야곱에게 자랑거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아들들로 인해서 다시 큰 위기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인간사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위기 때 의지할 대상은 전혀 다른 차원에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성서는 그 대상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가르칩니다.
오늘 야곱도 그 사실을 인식하고 "내가 어려움을 당할 때 나의 호소를 들어주시고 내가 가는 곳 어디에서나 보살펴 주신 하나님"이라고 증
언합니다. 이제 그가 할 일은 베델로 가서 제단을 쌓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제단을 쌓아 하나님께 바치는 이 일의 준비는 우선 남의 나라 신들을 내버리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우상

베델로 가서 제단을 쌓아 바칠 준비를 하는 이들 야곱 가족들은 자기들에게 있는 남의 나라 신들과 귀에 걸고 있던 귀걸이를 모두 야곱에게 내어놓았습니다. 그러자 야곱은 그것들을 느티나무 밑에 묻어버렸습니다(4절). 여기서 남의 나라 신들은 가나안 토착민들이 섬기던 우상들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곧 흙이나 철, 또는 금이나 은으로 만든 여러 조각품으로 되어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섬기는 신을 형상화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런 조각품들을 만듭니다. 그것을 집안에 두거나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어떤 위로를 얻으려고 합니다. 지금도 어떤 집에는 무당이나 점쟁이가 그린 부적이 붙여져 있습니다. 가톨릭 신자들도 대개는 성모 마리아 상을 안방이나 거실에 모셔놓고 그 앞에서 기도합니다. 아마 그 마리아 상이 자기 집안을 지켜줄 것으로 여길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어디까지가 우상이고 어디까지가 종교적 상징인지 규정하는 게 쉽지는 않습니다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남의 나라 신"은 분명히 종교적인 의미를 가진 조각품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야곱의 집안 식구들이 이런 남의 나라 신들을 왜 소지하고 있었을까요? 이는 흡사 신자들 집에 부적을 붙여 놓는 것과 비슷합니다. 야곱 시대는 아직 유대교가 자리를 잡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야곱의 할아버지인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는 했지만 야곱 시대까지도 어떤 구체적인 종교 형식도 없었습니다. 물론 율법도 없었고 제사장도 없었고 예배 형식도 없었습니다. 단지 자기들의 삶에 직접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말씀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곱 가족들은 가나안 여러 부족들과 어울려 살면서 그들의 종교의식을 자주 접하게 됨으로써 그런 종교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아내 두 명에다가 첩이 두 명이었으며, 그 밑으로 아들을 열 한 명이나 둘 정도로 대가족을 이루었습니다. 목축업에 성공한 사람답게 그 밑에서 일하는 하인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야곱은 그 부근에서 상당히 이름을 날리던 호족 행세를 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여러 부족들과 관계를 맺으며 그들의 우상을 지니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신앙에서 처음부터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신앙이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씨족장들은 늘 주변의 가나안 원주민들에게 종교적인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나그네처럼 가나안에 들어온 이들은 원래부터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고, 그들이 살아가는 풍습을 따라야만 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의도적이었든지, 비의도적이었든지 우상을 섬기는 일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이들만이 아니라 율법와 제사장과 성전을 비롯해서 고대의 가장 짜임새 있고 고차원적인 종교 체계를 갖춘 다음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전히 가나안 사람들의 종교에 관심을 많이 기울였습니다. 이런 상황은 그들의 생각이 불순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은 본래 가시적이고 실증적인 대상을 추구하는 반면에 하나님은 은폐의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이 긴장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지금도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적으로 좀더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모색하고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런 점에서 신자 개인들도 자기의 신앙이 불순한 것들로 인해서 훼손되어 가는지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만약 그런 성찰 없이 되는대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결국 "다른 나라의 신"을 숨겨둘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수행하듯이 하나님에게 영적인 귀를 열어놓으면 무엇이 다른 나라 신인지 구별할 수 있게 됩니다. 이는 흡사 음악가나 화가나 시인들이 각자 소리와 형체와 언어에 집중해야만 그런 영감이 녹슬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귀걸이

그런데 4절 말씀에 따르면 그 식구들이 "신들과 귀걸이"를 모두 내어놓았다고 합니다. 신을 새긴 조각품을 땅에 묻었다는 말은 이해가 가지만 거기에 왜 귀걸이가 포함되는 걸까요? 귀걸이 자체가 우상은 아니었을 텐데 우상 조각품과 함께 이 귀걸이까지 땅에 묻고 하나님에게 제단을 쌓아 바치러 갔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구약성서의 신앙과 근동의 종교 사이에 가장 결정적인 차이가 무엇인지 해명해야만 합니다.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어떤 형태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하나님에 대한 이름도 없습니다. 호렙산에서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라는 모세의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름을 알려주는 대신에 "나는 앞으로 될 바로 그 자이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근거이기 때문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어떤 형상으로 규정하거나 이름을 통해서 규정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어떤 역사적 행위나 말씀으로 자기를 나타내실 뿐이지 구체적인 형태로는 나타내지 않습니다. 반면에 근동의 종교들은 자기들의 신을 주로 "황소상"으로 형상화했습니다. 풍요의 신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빚어놓은 황소상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마시며 풍요와 출산에 대해서 감사하고, 마음껏 즐겼을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아주 매력적으로 보였기 때문에 종종 우상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근동의 이런 이방 종교는 신의 형상을 가능한대로 구체적으로, 확실한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종교의식도 역시 매우 자극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요염하게 차려입은 젊은 여성들의 춤, 때로는 자기 몸에 칼을 대어 피를 뿌리는 자학적 행위가 일종의 퍼포먼스처럼 연출되었습니다. 이 양측의 특징을 수사적으로 표현하자면, 구약성서는 들음(聽)의 종교이지만 근동의 종교는 봄(視)의 종교라 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신앙은 하나님만을 의식하는 것인데 반해서 근동의 신앙은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 데 중심이 있었습니다. 이렇듯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에 무게를 둔 근동의 종교로 인해서 그들의 실제적인 삶도 역시 보이는 것에 중점을 두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멋지게 보이기 위해서 여러 모양의 액세서리를 걸쳤습니다. 귀걸이, 팔지, 심지어는 코걸이까지 등장합니다.
귀걸이와 목거리 등을 걸치게 되면 물론 다른 사람들의 눈에 잘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 장식품은 대개 아름답기 때문에 그것을 걸친 사람마저 어느 정도는 아름답게 보이게 합니다. 이런 감각적 작용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거의 똑같이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저의 눈에는 그런 장식품 때문에 그 주인이 아름답다고 느낀 적은 별로 없습니다만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런 건지 아니면 모두가 그런 착각에 빠져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지 세계 모든 민족들이 그런 장식품을 통해서 자기를 나타내 보려고 했다는 점에서 그 행위 자체를 나무랄 건 없습니다. 야곱의 식구들이 귀걸이를 했다는 사실도 역시 그것 자체로는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문제의 핵심은 그런 장식품에 마음을 빼앗기면 살아간다 것이 아닐까요? 야곱이 이제 하나님께 제단을 쌓아 바쳐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즉시 남의 나라 신과 귀걸이를 모두 땅에 묻어버렸다는 사실은 이 두 가지 사물이 자기들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주범이라고 생각한 게 아닐까요? 위에서 설명했듯이 근동의 이방 종교가 갖는 특징과 귀걸이를 통해서 자기를 돋보이게 하려는 인간의 심성은 서로 통하는 법입니다. 하나님에게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근원이 바로 우상과 귀걸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도 귀걸이로 대표되는 장식품에 너무 마음을 많이 빼앗긴 시대를 살아갑니다. 여자대학교 앞에 가면 책방은 별로 없고 모두 옷, 구두, 엑세서리, 먹거리를 파는 가게만 있다고 합니다. 그냥 있어도 모두 아름다운 나이의 여대생들이 눈수술, 코수술, 지장흡입술을 받고 있습니다. 젊은이들만이 아니라 우리 기성세대도 역시 남을 의식해서 크고 좋은 것만을 찾으며 살아갑니다. 유치원 아이들에게 외국인 영어 강사를 붙여서라도 영어를 가르치려고 합니다. 우리의 사는 모습은 거의 이렇게 남을 의식해서 자기를 장식하는 데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이런 방식으로는 우리에게 결코 평화와 기쁨이 자리잡지 못합니다. 늘 서로를 의식하고 경계하고 경쟁하면서 긴장할 뿐입니다.
야곱은 자기 식구들의 우상만이 아니라 귀걸이까지 몽땅 땅에 묻어버린 후에 길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에게 제단을 쌓아 바치기 위한 길을 떠났습니다(5절). 이들은 이제 우상에 대한 미련과 남에게 보이기 노력을 일체 포기하고 전혀 다른 삶으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성서가 우리에게 말하려는 바는 이런 방식이 아니면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대충 이방사람들과 비슷한 가치관으로 살면서 그저 교회만 다니는 방식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일체 땅에 묻고 다른 세계를 향해서 길을 떠나는 결단만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인이 되면 모든 세속의 삶을 접어두고 순수하게 종교적인 테두리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말씀은 결코 아닙니다. 비록 우리 살아가는 자리가 세속이지만 전혀 다른 삶의 내용을, 그 영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남보다 잘나고 남보다 예쁘고, 남보다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에 마음을 두는 게 아니라 제단을 쌓아 하나님께 바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진리에 마음을 둔다는 뜻이겠지요.

신비한 두려움

오늘 성서는 야곱 가족이 베델을 향해서 길을 떠나는 그 순간에 주변의 도시에 신비한 두려움이 휘어잡았다고 증언합니다. 야곱 일당이 행한 일을 생각한다면 당장에 몰려가서 박살을 내야만 했는데 그들이 살고 있는 도시에 신비한 두려움이 감돌아 감이 나설 수 없었습니다. 이게 무슨 현상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우상과 귀걸이를 땅에 묻고 길을 떠나는 야곱 식구들의 신앙이 기특해서 하나님이 특별히 이렇게 보호해 주실 수도 있었겠지요. 또는 이곳에서 쌓아놓은 상당한 기반을 미련 없이 포기하고 떠나는, 더구나 신과 귀걸이 같은 장신구를 땅에 묻어버리고 분연히 길을 떠나는 야곱의 비장한 행동을 보고 그들이 아예 근접할 마음을 먹지 못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쨌든지 전혀 다른 삶의 세계를 향해서 버릴 것을 버리고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는 거칠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아예 인간끼리의 경쟁을 포기한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내가 누구보다 잘 나가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땅에 묻어버린 사람을 건드릴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 9-15절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이 이 야곱에게 다른 방식으로 축복해주십니다. 즉 이 세상의 일은 결국 하나님이 주도하신다는 선언입니다. 따라서 우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어디에 삶의 무게를 두고 살아야 하는지 대답이 주어졌습니다. 귀걸이인가, 하나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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