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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와 두려움

요한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911 추천 수 0 2008.08.25 15:2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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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14:27-31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2004.7.27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
하지 말라. 내가 떠나갔다가 너희에게로 다시 오겠다는 말을 너희가 듣지 않았느냐? 아버지께서는 나보다 훌륭하신 분이니 만일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기뻐했을 것이다. 내가 지금 이 일을 미리 알려 주는 것은 그 일이 얼어날 때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와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세상의 권력자가 가까이 오고 있다. 그가 나를 어떻게 할 수는
없지만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께서 분부하신 대로 실천한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야 하겠다. 자, 일어나 가자. <요 14:27-31>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이 현재 처해진 상황은 평화와는 참으로 거리가 멉니다. 14장에서 17장에 이르는 긴 연설과 기도가 끝난 직후에 예수님은 유대교의 고위 성직자들에 의해서 체포당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야간 심문이 진행되고 다음 날 일찍 빌라도에 의해서 십자가형의 선고가 내려진 후 결국 죽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가장 폭력적인 권력에 의해서 죽게 되는 바로 그 순간에 선포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평화를 주고 간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 게 아닐까요? 만약 그가 참된 평화를 줄만한 능력이 있는 분이라면 왜 그렇게 평화와 반대되는 사태에 빠져들었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가 일단 순수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평화는 이 세상에서는 별로 쓸모가 없고 피안의 세계에서나 통용되는 것에 불과한 게 아닐까요? 즉 평화 운운하는 이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지만 세상의 악한 힘에 의해서 결국 모든 걸 빼앗긴 예언자의 자기 합리화나 하소연은 아닐까요? 과연 예수님이 주신다는 평화는 무엇이며, 그것은 이 세상에서 현실성이 있는 것일까요? 더 나아가서 이 세상에도 수많은 평화 단체들이 평화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마당에 굳이 교회가 또 다른 평화를 주장할 필요가 있을까요?

샬롬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는 말씀을 우선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이미 그 당시에도 평화는 모든 정치 사회
적 차원에서 중심 이념이었습니다. 오죽 했으면 얼굴을 비비며 나누는 유대인들의 인사가 "샬롬"이었겠습니까? 아마 유대인들은 역사를 통해서 전쟁이 지긋지긋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했을 것이며, 그래서 이웃을 만날 때마다 평화를 구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 당시에 유대는 로마의 피식민지였습니다. 형식적으로만 왕도 있고 종교도 있는 하나의 나라였지 실제로는 로마의 완전한 통치를 받았습니다. 그런 식민지 상황도 길게 가지 못하고 기원 후 70년에는 로마 군대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초토화되고, 결국 나라 자체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로마는 유대지역만이 아니라 그들이 통치하는 모든 피식민지에 막강한 로마군을 주둔시켰습니다. 유대의 경우에는 지중해 해변 가까운 가이사랴에 총독부가 있었고 예루살렘에는 치안을 맡은 일정한 군인들이 배치되었습니다. 유대민족은 워낙 다른 나라에 배타적인 기질이 강했기 때문에 다른 피식민지 국가보다 훨씬 자주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로마 정부에서는 이 유대인들을 늘 골치거리로 생각하고 이를 통제하기 위해서 가장 유능한 총독을 임명했습니다. 그런데 로마에서 이런 식민지에 자기 군대를 주둔시키면서 내세운 가장 큰 명분이 바로 "평화"였습니다. 사회치안을 어지럽히는 악을 제압하고 사회의 안정과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 자기들이 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의 주장에도 어느 정도의 타당성이 없진 않았습니다. 강력한 로마군이 주둔하게 되면 아마 좀도둑이 사라지겠지요. 로마에 대항하는 이들과 친로마인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회 불안도, 또는 그런 상황이 악화되어 발생하는 내전도 어느 정도 제압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로마군이 있어야 평화가 유지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였을 때도 적지 않은 한국 사람들이 일본순사들과 헌병 때문에 서울의 질서가 유지된다고 생각했던 것과 비슷합니다. 이 나라를 대표하는 지식인들과 문인들과 예술가들이 앞다투어 친일, 부일행각을 벌인 것은 나름대로 그런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팍스 로마나

그런데 로마가 겉으로는 유대지역의 평화를 지키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자기들의 평화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목표로 하는 평화는 소위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였습니다. 로마는 유대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로마의 평화를 위해서 유대사회를 군사력으로 지켜주기도 하고 위협하기도 한 것이지 유대의 평화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로마의 평화는 로마의 기득권을 유지시키는 것만을 목표로 합니다. 부분적으로는 관용을 베풀기도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결국 로마의 체제가 보장되는 한도 안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로마에 사는 귀족들의 사치스런 생활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모든 식민지 사람들은 일정한 세금을 바쳐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로마는 자기들의 군사력으로 식민지를 지켜준다고 생색을 냈습니다. 우리는 이런 평화를 진정한 평화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미 충분할 정도로 힘을 비축한 사람들의 그 힘만을 보장하는 평화는 다른 한편으로 아직 힘이 없는 사람들의 희생을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상이 주는 평화는 곧 이런 것이었습니다.
로마의 평화만이 강요된 시대는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그런 종류의 강압된 평화는 지금도 역시 계속되고 있습니다. 요즘 막강한 군사력으로 세계를 주름잡고 있는 미국을 이 자리에서 거론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너무나 노골적으로 "팍스 아메리카나"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말할 필요까지도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50년 이상이나 이 한반도 땅에 미군이 점령군처럼 주둔하도록 내버려둔 우리의 태도가 부끄럽기 때문에 말하기가 싫습니다.
물론 미군의 힘으로 남북한의 군사적 긴장이 더 악화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합니다만 우리의 남북분단 상황이 아무리 그렇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극복해보려는 노력을 별로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변명의 여지는 없습니다. 미군 문제는 일단 접어 놓고 대신 우리 사회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이런 왜곡된 평화의 그림자는 명확히 집어야합니다. 그래야만 예수님이 주신 평화가 왜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른지 알 수 있기도 하며, 이 문제가 바로 우리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상유지

벌써 오랜 전부터 지속된 현상이기도 하지만 IMF 이후에 더 극단적으로 나타난 현상이 하나 있는데, 고시열풍입니다. 대학생들만이 아니라 거의 마흔 살이 다 된 사람들까지 행정고시, 외무고시, 사법고시에 목을 매고 있는 실정입니다. 특히 사법고시가 그렇게 극성인 이유는 단 한번의 합격으로 신분이 급상승한다는 매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판사, 검사, 변호사도 하나의 직업에 불과한데도 불구하고 이 나라에서 이렇게 인기를 끄는 이유는 돈과 명예를 한몫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욕구야 인간에게 있는 자연스러운 것이니까 거기에 매달리는 개인들을 크게 탓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거의 사회문제가 되다시피 한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수요가 많으면 공급을 늘려야 해결되는 것처럼 변호사를 많이 배출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인데도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공급을 늘리지 않습니다. 변호사협회는 갑작스럽게 변호사 숫자가 많아지면 사회혼란이 야기된다는 이유를 들어 변호사 숫자를 늘리는 걸 반대합니
다. 사회혼란이 무엇인지 나는 잘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이미 변호사 일을 하던 사람들의 수입이 갑자기 줄어들거나, 아니면 너무 쉽게 변호사 자격증을 주면 변호사들의 질이 떨어진다는 이야기 같은데, 그것이 사회를 혼란시킬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의사들도 똑같은 논리를 폅니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의과대학에 가서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 일을 한다는 것은 정말 바람직합니다만 그 일이 돈과 너무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이 사회를 평화공동체로 만드는 일에 방해가 됩니다. 의사협회에서도 의사 숫자를 너무 많이 늘리지 말아야 한다고 압력을 가합니다. 의사의 질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사실 거의 모든 재판문제나 질병문제는 그렇게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기 보다는 거의 상식적인 지식만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전문적이 지식이 없는 변호사가 일반소송건을 맡는다거나 의사가 환자의 1차 진료를 맡는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변호사나 의사의 숫자를 가급적 늘리지 말아야 한다는 그들의 생각은 다른 데 있습니다. 자신들의 특권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 사람들은 이 세상이 그저 이렇게 현상유지(스타투스 크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평화로운 세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모순된, 한쪽으로 치우친 힘을 균형 있게 하려는 노력을 사회불안으로 매도합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바로 이런 평화입니다. 로마의 큰 이익을 위해서 작은 분쟁을 억압함으로써 외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돌아가는 세상의 평화 말입니다.

걱정과 두려움

그런데 이런 평화는 걱정과 두려움이라는 속성을 갖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고 말씀하시면서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걱정하거나 두려워 말라."(27절). 걱정하거나 두려워 말라는 이 말씀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실 것에 대한 제자들의 두려움을 단순히 위로하기 위한 말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바로 앞서 예수님 당신의 평화와 세상의 평화를 구별해서 말씀하신 걸 감안한다면 이 걱정과 두려움이 바로 참된 평화와 위선적 평화를 구별해낼 수 있는 기준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세상의 평화는 걱정과 두려움을 생산해낸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 안에는 많은 힘들이 서로 충돌하고 타협합니다. 그 힘들 사이에 균형이 맞추어진 상태를 사람들은 평화라고 생각합니다. 한쪽이 워낙 강해서 상대방이 도전할 의사를 갖지 못하든지, 아니면 양측의 힘이 거의 똑같아서 서로간에 조심을 하든지 나름대로의 균형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사회라는 점에서나, 인간의 자기 중심적 속성이라는 점에서나 이런 정도의 균형을 맞추어 내는 것도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정치인들의 정치활동도 역시 이런 힘의 균형이라는 메커니즘 안에서 돌아갑니다. 어쨌든지 그런 정도라도 애를 쓰면 살아간다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힘의 균형을 통한 평화가 얼마나 위선적인가를 명확하게 뚫어보아야 합니다. 이런 종류의 평화는 인간을 걱정거리에 싸이게 하고 두려워하게 만듭니다. 그게 이상합니다. 평화를 일군다고 하면서도 평화와 반대되는 걱정과 두려움이 휩싸여 있습니다.
이런 사회적인 차원이 아니라 우리 개인의 삶에도 역시 이런 불상사가 개입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경제활동이나 가정생활, 또는 직장이나 대인관계에 이르는 모든 일상적인 삶이 결국은 평화를 얻으려는 것입니다. 돈을 벌어야 가난으로 인한 불화를 깨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삶의 평화를 위한 모든 노력들이 결국은 평화와 반대되는 걱정과 두려움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합니까? 어느 정도 사회신분이 상승된 사람들도 평화로운 삶보다는 두려운 삶을 살아갑니다. 평화로운 삶을 위한 모든 일들이 결국은 두려운 삶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우리의 현실 삶에서 일어나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

오늘 성서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은 걱정과 두려움이 없는 평화를 우리에게 준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의 평화가 모든 평화의 근원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에 이어서 "내가 떠나갔다가 너희에게로 다시 오겠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에게 걱정과 두려움이 없는 평화는 하나님과의 평화에서만 주어집니다. 참된 평화는 인간이 자동차를 만들 듯이 생산해내는 게 아니라 하나님 나라 자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론 우리는 UN을 조직해서 지구 전체의 평화를 어느 정도 진작시킬 수는 있습니다만, 요즘 미국의 행동에서 보듯이 막강한 힘을 가진 나라가 다르게 마음을 먹으면 그런 평화 기구와 약속은 단숨에 깨지고 맙니다. 노사관계도 그렇고 가족관계도 역시 그렇습니다. 인간이 만든 평화 구조는 약간 그럴듯하게 보일 뿐이지 근본적으로 평화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이 세상에서 평화 공동체를 위해 투쟁할 필요가 없다는 뜻을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화는 물론이고, 자연과의 평화를 위해서도 실질적인 노력을 기울여나가야 합니다. 특히 우리처럼 남북분단체제에서는 이 평화운동이 절실하게 요구됩니다. 다만 이런 평화운동이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지적되었듯이 세상이 주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로서 승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과 우리편의 이익을 위해서 교묘하게 기술적으로 힘의 균형을 맞추어나가는 정도의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차원에서 요구되는 평화를 지향해야 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미국이 늘 세계 평화의 사도연 하는 것처럼 자기 구미에 맞는 것만을 선택하면서 그것이 흡사 평화의 본질이며 성취인 것처럼 호도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주는 평화의 한계
입니다.   (7월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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