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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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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롬8:31-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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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2002년 10월 27일 주일설교(여의도순복음교회) |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 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참 참 좋으신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극히 예외적인 사건을 제외하고 우리 모두는 우리 부모님을 확실히 신뢰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부모님이 우리에 대한 사랑을 믿으며 어떠한 경우에도 부모님은 우리들에게 좋게 해주시려고 애쓰시는 좋으신 부모님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1958년 제가 처음 대조 마을에서 교회를 개척했을 때는 삶의 환경이 극히 열악했습니다. 헐벗음과 굶주림 위에 내일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심신이 대단히 고달팠습니다.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이 대단히 미천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꾸짖으시고 심판하시는 두려우신 하나님이란 생각이 마음에 가득했기 때문에 삶에 활기가 없고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서서히 저의 가슴속에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 참으로 좋게 해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더구나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이 말씀이 마음속에 굉장히 부딪혀 왔습니다. 요한삼서 1장 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와같은 말씀이 저의 맘속에 힘있게 부딪혀 왔을 때 저의 가슴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가 형성되었습니다. 그것은 "아! 하나님은 참말로 좋으신 하나님이시구나"하는 이 사실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확실히 깨닫고 믿게 되자 마음속에 기쁨과 확신과 담력과 소망이 넘쳐 났습니다.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어떠한 환경에서도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믿음이 만사를 긍정적으로 보게 되고 극복할 수 있는 힘을 허락하여 주었습니다.
첫째로, 왜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신 것입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영원히 대신 갚아 주시고 영원한 의로움을 주신 하나님이란 것을 생각할 때 좋으신 하나님이 아니시고는 이렇게 해주실 리가 만무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죄란 불법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벌을 받아야 됩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을 어긴 죄인은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고 살아날 도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값이 사망이니까 죽는 길 이외에는 죄를 청산할 길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이후로는 지옥의 형벌만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 18장 4절에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 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고 말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5절에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리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죄를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시고 장사지내심을 받으므로 청산해 주셨으니 그 은혜가 백골난망이 아닙니까? 내 대신 죽어 주셨다는 것을 생각할 때 여러분 가슴이 저미도록 감사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 나를 대신해서 죽어 주시겠습니까? 그것도 금새의 죽음뿐 아니라 영원한 죽음을 주님이 대신해 주신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9절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려고 하지 않고 우리를 살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살리려고 하기 때문에 독생자를 보내서 우리 대신 죽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동으로 말미암지 않고 어떤 공로를 세움으로 말미암지 않고 우리 고행을 통해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용서를 받고 구원을 얻고 의롭다 함을 얻는 이 모든 일이 오직 믿음으로만 되는 것입니다. 남녀노유, 빈부귀천 할 것 없이 교육을 받은 사람이나 교육이 없는 사람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동양인이나 서양인 할 것 없이 조건은 단지 하나밖에 없습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로 9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여러분 마틴루터는 청년때 친구와 함께 여행을 갔습니다. 그는 변호사, 법률학자가 되기 위해서 법률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소나기가 오고 천둥번개가 치더니만 벼락이 때려서 앞서가던 친구가 즉사해 버렸습니다. 그럴 때 마틴루터는 그 자리에 꿇어 엎드려서 "오 하나님! 만일 저를 살려 주시면 저는 저의 평생을 바쳐서 사제가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종이 되겠습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난 다음에 그는 살아나고 그 이후에 자기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신학을 공부하고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속에 끝없는 죄책감으로 번뇌를 했습니다. 아무리 고행을 해도 마음속에 있는 죄책감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종교적인 의식을 행해도 죄인이란 인식에서 해방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성경을 읽다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고행으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구원을 얻는다는 이 진리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때 교황 레오 10세가 베드로성당 증축자금을 위해 산사람과 죽은 사람에게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그 면죄부를 돈주고 사면은 그 만큼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죽은자도 면죄부만 사면 연옥에서 천당으로 올라온다고 그런 너무나 터무니없는 논리를 전개하고 면죄를 팔았습니다. 그는 거기에 대해서 의문하여 1517년 95개 조항을 발표하고 종교개혁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오직 믿음. 오직 하나님의 은총.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이 신앙생활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신약을 독일어로 번역해서 종교개혁을 한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깨달은 것은 오직 믿음으로 의로움과 영광을 얻고 천국 백성이 되고 영원천국의 소망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만일 우리보고 대가를 지불해서 용서를 받고 의로움을 얻고 천국을 값 주고 사라면 천국에 갈사람이 과연 몇사람이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구원의 문은 믿음을 통해서 활짝 열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습니다. 수고하고 고생하고 고행한 대가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몸을 찢고 피를 흘려서 천국길을 환하게 열어놓고 오직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값없이 구원을 거져 주시는 하나님이 좋은 하나님이 아니시고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아니했더라면 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려 몸을 찢고 피흘리게 했습니까? 어떠한 의심을 사탄이 갖다 준다하더라도 우리는 십자가만 바라보면 우리 마음이 모든 의심에서 눈녹듯이 녹아지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왜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은 그 분이 모든 능력과 권세를 가짐에도 불구하고 그를 포기하고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나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대신 갚아 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모든 의심은 사라지고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확정되어 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인 것을 우리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마귀를 멸하여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마귀는 언제나 우리 곁에 와서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며 참소하고 우리에게 어둠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아담의 원죄와 우리들의 자범죄로 인하여 마귀에게 팔려 종이 되어 하나님과 멀어지고 온갖 육신의 정욕의 포로가 되어 세상에서 고난 당하며 우리 조상들이 살아왔고 우리도 그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16절에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보혈로 원죄를 청산해 버리시고 여러분이 스스로 지은 자범죄를 다 갚아 버리셔서 마귀의 쇠사슬을 끊어 버리고 마귀의 정부와 군대를 무장해제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마귀는 더 이상 우리를 종으로 잡을수 있는 조건이 없습니다. 원죄와 자범죄 때문에 그 죄악의 쇠사슬로 우리를 묶었는데 그 죄가 예수님의 보혈로 청산되어 버리고 다 용서되어 버렸으니 죄악의 쇠사슬이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묶을수 있는 쇠사슬이 없어지고 말은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십자가에서 마귀의 불법을 책망하시고 그의 정사와 권세를 다 빼앗아 버렸습니다. 골로새서 2장 13절로 15절에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 즉 율법을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승리를 만끽할 수 있게 주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본문에 있는 말씀데로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이러한 처지에 있는데 어디 감히 마귀가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킬 수 있으며 우리를 또 참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는 마귀를 이기고 내어 쫓을 수 있는 권세를 주님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 17절로 19절에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귀는 여러분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능력보다 더 위대한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부모님은 연로하시면 몸이 약해서 능력은 우리보다 없습니다. 힘은 우리보다 없지만은 권세는 우리보다 계시므로 부모님이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옵니다. 힘이 없어서 우리가 부모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님은 부모로써의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통령께서 아무리 육신이 연약해도 힘이 강한 모든 사람들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은 그에게 권세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나는 미약하고, 허약하고, 보잘것없다고 생각하지만 여러분은 마귀에 대해서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 보혈의 능력과 말씀으로 무장해서 마귀가 한길로 오면 일곱길로 내어 쫓을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힘을 가지고 협박을 해도 여러분은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동물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가 있지 않습니까? 어린 아이가 코끼리를 타고서 코끼리를 이리가라 저리가라 이끄는 것 보았지요? 힘으로 말하면 어린 아이보다 엄청나게 큰 힘을 코끼리가 가지고 있으면 어린 아이는 짐승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힘은 권세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이름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그 말씀 안에서 마귀를 내어쫓을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권세자인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동안에서 우리는 종살이하고 마귀가 우리에게 주인 노릇해서 우리를 짓밟고 우리를 고통 주었는데 이제는 우리를 짓밟고 고통을 주는 옛 우리의 주인인 그 마귀를 우리는 쫓아내고 그를 멸할 수 있는 권세를 갖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하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런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겠습니까?
우리 하나님께서는 또한 율법과 의식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여러분 인간이 살아 있을 동안에는 하나님과 인간관계의 법이 있고 인간과 인간관계의 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이 법의 거미줄 속에 얽혀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모든 법을 다 지키고 정의롭게 될 힘은 없습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법을 어기고 살기 때문에 법을 어기면 죄를 짖지 않아요. 이 율법을 어기고 죄를 짓고 살수 있나요?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행위로 말하면 하나님과 인간관계의 법도 늘 어기고 인간과 인간관계의 법을 늘 어기고 있으니 늘 불법의 생활을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므로 율법을 그 몸으로 완성하시고 철폐하시고 말은 것입니다. 우리를 얽어매는 율법을 주님은 철폐해 버렸습니다. 십자가에서 그 율법을 다 완성하시고 주님께서 율법의 효력을 정지시켜 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에게 새로운 법을 주셨는데 무슨 법이냐, 믿음의 법과 성령의 법으로 살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을 믿음으로 용서와 의로움을 얻고 성령을 주셔서 성령이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의지해서 성령의 은혜로 우리는 살수 있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절로 2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받고 성령으로 새롭게 변화 받아야 천국가게 만들어 주셨으니 이 어찌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 아니신 것입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이 모든 일들을 생각할 때 하나님은 너무나 좋으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예수 그리스도를 못박아서 우리에게 값없이 구원을 주시고 마귀에게 해방시켜 주시고 율법을 폐하여 주시고 용서와 의를 주시고 성령을 주신 우리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인 것입니다. 너무나 좋은 하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좋게 해주신 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마음에 담대하게 되고 용기가 생기고 긍정적으로 인생을 바라보게 되고 희망차게 되고 내일에 대한 꿈을 가슴에 품고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 하나님께서는 환난과 고통 중에서도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좋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들은 환난과 고통중에도 하나님은 과연 좋은 하나님이실까?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환난과 고통은 우리의 잘못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마귀의 공격으로도 다가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혹은 국제적인 국가적인 재난으로 다가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환난과 고통을 우리가 변화시킬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환난과 고통을 당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도움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환난과 고통중에도 모두다 나를 버리고 떠나도 주님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좋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비록 내가 잘못했고 못된 짓을 해서 환난과 고통에 빠졌으므로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다고 할지라도 내가 회개하고 주님께 나오면 그 환난과 고통의 골짜기 속에 주님은 찾아 와서 함께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환난당할 때 친구가 참된 친구인데 주님은 시편 23편 4절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누가 같이가요? 부모, 형제, 처자라도 같이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곳에 나와 같이 계셔 주시고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안위해 주시니 주님은 참 좋으신 하나님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1절로 15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해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여러분과 나는 예수님이 기르는 양입니다. 예수님이 "나는 삯군이 아니야 돈 받고 와서 일시로 돌봐주는 사람이 아니야. 나는 너의 주인이요, 너를 기르는 책임자이므로 나는 너희를 위해서 내 목숨을 버린다." 여러분 이러므로 고난 당할때에 친구가 참된 친구인데 극한 고난에도 주님은 목숨을 버리더라도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고 떠나지 않고 함께 계시니 이 얼마나 좋은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고난과 고통을 주님께서 영광의 기회로 삼아 주시니 또한 감사하지요. 우리가 고난과 고통 당하는 것이 무익하고 손해가 나는 줄 생각하는데 실상은 고난과 고통의 터널을 통할 때 주님은 그를 통하여 우리 옛사람을 다 벗어버리고 새사람이 되게 하고 영광의 옷을 입게 하는 기회로 삼아 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로 17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고통은 그와 함께 영광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고통의 캄캄한 터널을 통과할때 우리 추하고 더러운 옛사람은 벗어 버리고 그 터널을 나올때는 지극히 크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서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없이 영광도 없습니다. 고통없이 축복도 없습니다. 이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가 고난당할 때 같이 하여서 고난이 오히려 영광으로 변화되게 만들어 주시니 얼마나 좋은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고난 당할 때 좌절과 절망하지 말 것은 내가 참으면 이 고난의 옷을 벗어 버리고 내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영광의 사람으로 변화된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용기와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91편 15절에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하여 저 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고 한 것입니다. 환난은 곧 영화(고난=영광)인 것입니다. 환난이 지나가면 영화가 다가온다. 그러므로 고난은 그와 동등 그 이상의 축복을 항상 동반한다는 것을 생각하고 고통 당하여 눈물 흘릴 때 고통과 동등 혹은 그 이상의 영화가 종국적으로 주님 안에서 다가온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고난은 영광과 축복을 향한 터널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고난의 터널을 지나기도 전에 좌절하고 절망해 버리는데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환난과 고통중에 은혜를 실감할 수 있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고난당할 때 절실하게 주님이 살아 계신 것을 체험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7절로 10절에 바울선생이 말씀하기를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 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 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내가 스스로 강할때는 나를 의지하기 때문에 주님의 능력이 나와 같이 할 수 없지만 내가 약하게 되면 주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정에도 보면 건강하고 씩씩하고 잘난 자식은 부모를 의지하지 않지만 병신자식은 끝까지 아버지, 어머니 부여잡고서 눈물로 매달립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연히 온힘을 다해서 약하고 병든 자식을 위해서 전심전력 기울여 도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도 약한 자를 붙들어 주시고 능력을 주시기 때문에 내가 약할 때 주님을 의지해서 강하게 되는 체험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종국적으로 우리는 고난을 당하고 원수에게 공격당할 때 그것이 잔에 넘치는 기회로 주님께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시편 23편 5절에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오히려 고난 당한 것이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주님의 축복을 실감하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관악대교구 문권숙 권사님은 전도하다가 당한 사고를 고침받고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신림동을 밭으로 삼고 19년 동안 전도하러 다녔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 한국 전국에 복음을 증거하기로 작정하고 선교회를 만들어서 작년 4월 외딴섬에 있는 교회를 위해 봉사팀들과 전도를 마치고 돌아오는 배를 타려다가 그만 바위에 미끄러져서 넘어지면서 머리를 바위에 콰~악하고 부딪혔습니다. 굉장히 큰 부상이었습니다. 순간 온몸이 마비가 되고 머리가 깨어지는 듯이 아팠습니다. 목포에서 제일 큰 병원으로 옮겨 X-ray를 촬영한 결과 머리를 부딪히면 목뼈중 4번과 6번이 튕겨져 나와 신경을 누르므로 전신마비가 올 것이라 했습니다. 이 영어로는 'Paraplegia'라고 해서 목만 살아있고 온 전신이 다 마비되는 이러한 병입니다. 의학적으로는 고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빨리 서울 큰 병원으로 들것에 들려 옮겨오면서 그는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주님 사업을 하다가 왔는데 왜 주님이 나를 지켜 주지 아니하시고 바위에 미끄러져 넘어지고 전신마비가 되게 했는가!" 원망스러운 마음이 생기고 두 번째는 "내가 주님 사업하다가 이렇게 했으니 주님께서 날 버리지 않고 꼭 고쳐 주실 것이다." 한편으로는 원망했지만 다른면으로는 주를 향한 긍정적인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살려 주십시오. 주님만 바라보고 살겠습니다."하고 서울까지 오는데 너무 아파서 정신이 몽롱해졌습니다. 온 팔다리가 마비가 되고 저렸습니다. 서울의 유명한 병원마다 찾아 다녀도 결과는 동일했습니다. 아무 치료 방법이 없다는 절망적인 의사의 말을 듣고 결국에는 전신마비 환자로써 여생을 보내겠다는 진단만 받은 것입니다. 치료 방법이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는 아에 응급실에서 퇴원하여 집으로 와서 이제 하나님만 유일한 치료와 희망이라고 믿고 벽에 머리를 대고 "저의 교만과 잘못을 용서해 주세요." 간절히 통회, 자복하고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하면 할수록 마음속에 치료해 준다는 확신이 생겨났습니다. 그 확신을 가지고 눈물을 흘리며 주님께 애쓰고 힘써서 기도를 했는데 좋으신 하나님 반드시 치료해 주시옵소서하고 3시간쯤 기도하는데 갑자기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자 머리가 상쾌해 지고 말은 것입니다. 그렇게 아프고 고통스럽던 머리가 시원해지고 말은 것입니다. 그 뒤에 조금씩 두통이 있어도 "예수 이름으로 물러가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입었다. 저가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고 가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변치 않는다. 나는 말씀에 서고 너희 거짓된 증상을 믿지 않는다." 그는 투쟁을 했습니다. 그러자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얼마있지 아니하여 그는 치료가 온몸에 오는 것을 느끼고 3개월 만에 이 척추도 다 고침받고 온몸이 깨끗이 나아 버리고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그는 고난당한 것이 더 유익이라 고난 당하기 전에는 막연한 하나님을 믿었지만 고난 당하고 난 다음에는 살아 계셔서 지금도 기도를 응답하시고 우리와 함께 계셔서 고난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고 믿음이 옛날보다 훨씬 강해졌다고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고난 당할 때 우리가 기도하므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게 해주시기 때문에 좋으신 하나님 이신 것입니다.
셋째로, 그러면 우리가 좋으신 하나님을 모시고 어떻게 살아가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항상 소망을 버려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소망을 버리면 하나님께서 쓸 수가 없습니다. 왜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절망하고 있는 사람하고는 같이 있을수가 없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망을 가져야 되지요. 모든 것이 다 끝날에는 좋게 될것이니 우리가 소망을 가져야 하나님이 역사를 베풀수가 있는 것입니다. 광야를 통과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항상 절망적이었습니다. 열번이나 하나님을 시험하고 불순종하고 원망하다가 결국에는 멸망당하고 말은 것입니다. 절망하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절망에 부딪혀 죽게 만들고 마는 것입니다.
다윗왕은 많은 죄를 짓고 잘못된 일을 한 사람입니다만 하나님이 다윗을 보고 내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라고 말씀한 것은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는 소망차고 긍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정 13장 22절에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다윗이 하나님에게 합당한 사람이 된 것은 항상 하나님을 소망하고 찬양하며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 앞에 소망을 두고 그는 늘 꿈을 가지고 믿고 감사를 드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주님이 다윗과 같이한 것입니다.
여러분 좋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환경을 극복하는 길을 하늘을 쳐다보고 기도하는 길밖에는 다른길이 없습니다. 우리 예수믿는 사람은 기도할수 있기 때문에 절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물로 심판할 때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했습니다. 3층으로 방주를 만들고 난 다음 방주의 천장 꼭대기에서 45.6cm 창문을 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옆으로는 창문이 없어요. 40일 동안 물이 창열하여 넘쳐 날 때 노아는 물 한방울도 못보았습니다. 왜, 꼭대기에서 45.6cm인 거기에 창문이 있었기 때문에 창문을 열면 하늘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홍수가 창열할 동안에도 노아는 홍수를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하늘만 쳐다보게 한 것입니다. 홍수와 같은 고난 당할 때 우리가 환경을 바라보면 두려워 하고 놀라고 낙심하게 되지만은 하늘만 쳐다보면 낙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서 33장 2절로 3절에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우리는 절망이라 생각하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주님이 가지고 계시므로 우리는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시험당할쯤에 또한 피할길을 내서 너희로 능히 감당케 하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주님을 좋은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좋을때는 물론 감사히 예물을 드리고 감사해야 됩니다. 시편 50편 23절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일이 안되고 역경을 당할때에도 눈물을 흘리며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감사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좋을 때보다 역경을 당할 때 하나님의 도움이 더 절실한 것입니다. 역경을 당할 때 하나님은 나를 버렸다.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냐. 하나님은 사랑하지 아니한다. 하나님은 너무나 야박하다. 그렇게 하면은 도움을 베풀 하나님을 쫓아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곳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찬양중에 거하는 하나님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감사와 찬양은 역경중에 더욱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임하셔서 역경에서 우리를 건져내어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라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시리라 함이라 말했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요셉은 그 억센 시련과 환난을 당했지만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탄식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50장 20절에 요셉이 형들에게 말하기를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나를 헤하려고 해도 하나님 그것을 오히려 선으로 바꾸어 주셨다. 우리 환경에 마귀가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해도 하나님은 종국적으로 그것을 선으로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우리는 믿고 감사하고 찬양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를 좋은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은 언제나 마음이 낙관적이고 긍정적이고 성도들과 늘 힘을 주고 받으며 마음에 낙관적이고 긍정적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언제나 소망을 가지고 바라보고 긍정적으로 바라봐야죠.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절망하면 안돼요. 여러분 우리는 환경에 지배를 많이 받기 때문에 우리 주위에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성도들과 늘 모여야 되는 것입니다. 늘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사람하고 만나면 파괴되고 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과 모이느냐가 굉장히 중요하지요. 우리가 정기적인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들을때 우리 마음속에 낙관적이고 긍정적이 됩니다. 히브리서 10장 23절로 25절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않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서로 자꾸 모여서 말씀을 공부하고 읽고, 기도하며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믿음을 북돋워 줘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공부와 기도회는 얼마나 필요한지 몰라요. 성경 요한복음 15장 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하셨으니 성경공부를 해야 주의 말씀이 내 속에 들어오지 않아요?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면서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 깨달아 지면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나님의 응답해 주겠다고 한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생애 속에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찾아온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좋은 하나님인 것입니다. 마귀는 나쁜 마귀입니다. 나쁜 마귀는 좋은 것을 해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십니다. 좋은 하나님이 나쁜 것을 줄수가 없습니다. 좋은 부모가 자기가 희생할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줍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자식이 떡을 달라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하면 뱀을 줄자가 있는가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 줄줄 알거든 하물며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지 않겠느냐고 말씀한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1절로 39절의 말씀을 여러분 다시한번 깊이 음미해 보십시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 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몸을 찢고 피를 흘리기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는데 이 사랑의 전능하신 밧줄을 끊을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안에 여러분은 24시간, 1년 365일 동안 사랑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알고 사랑을 받아들이고 사랑을 만끽하고 사랑에 감격해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여!
전능하신 우리 아버지의 너무나 크고 영광스러운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왜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박았겠습니까? 예수께서 십자가에 몸찢고 피흘려 우리를 위해서 대속 재물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확정된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여,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사람은 말로 다할수 없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마귀가 의심을 가져다 주어도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쳐다볼 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란 것을 의심할 도리가 없습니다. 십자가에 예수님은 모든 의심과 모든 마귀의 잘못된 미혹을 산산히 깨뜨리고 맙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사랑의 도치하고 사랑을 만끽하고 사랑으로 감동되어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희망적이며, 낙관적인 인생을 살아가게 도와주옵시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파하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참 참 좋으신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극히 예외적인 사건을 제외하고 우리 모두는 우리 부모님을 확실히 신뢰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부모님이 우리에 대한 사랑을 믿으며 어떠한 경우에도 부모님은 우리들에게 좋게 해주시려고 애쓰시는 좋으신 부모님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1958년 제가 처음 대조 마을에서 교회를 개척했을 때는 삶의 환경이 극히 열악했습니다. 헐벗음과 굶주림 위에 내일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심신이 대단히 고달팠습니다.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이 대단히 미천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꾸짖으시고 심판하시는 두려우신 하나님이란 생각이 마음에 가득했기 때문에 삶에 활기가 없고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서서히 저의 가슴속에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 참으로 좋게 해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더구나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이 말씀이 마음속에 굉장히 부딪혀 왔습니다. 요한삼서 1장 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와같은 말씀이 저의 맘속에 힘있게 부딪혀 왔을 때 저의 가슴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가 형성되었습니다. 그것은 "아! 하나님은 참말로 좋으신 하나님이시구나"하는 이 사실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확실히 깨닫고 믿게 되자 마음속에 기쁨과 확신과 담력과 소망이 넘쳐 났습니다.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어떠한 환경에서도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믿음이 만사를 긍정적으로 보게 되고 극복할 수 있는 힘을 허락하여 주었습니다.
첫째로, 왜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신 것입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영원히 대신 갚아 주시고 영원한 의로움을 주신 하나님이란 것을 생각할 때 좋으신 하나님이 아니시고는 이렇게 해주실 리가 만무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죄란 불법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벌을 받아야 됩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을 어긴 죄인은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고 살아날 도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값이 사망이니까 죽는 길 이외에는 죄를 청산할 길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이후로는 지옥의 형벌만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 18장 4절에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 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고 말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5절에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리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죄를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시고 장사지내심을 받으므로 청산해 주셨으니 그 은혜가 백골난망이 아닙니까? 내 대신 죽어 주셨다는 것을 생각할 때 여러분 가슴이 저미도록 감사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 나를 대신해서 죽어 주시겠습니까? 그것도 금새의 죽음뿐 아니라 영원한 죽음을 주님이 대신해 주신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9절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려고 하지 않고 우리를 살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살리려고 하기 때문에 독생자를 보내서 우리 대신 죽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동으로 말미암지 않고 어떤 공로를 세움으로 말미암지 않고 우리 고행을 통해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용서를 받고 구원을 얻고 의롭다 함을 얻는 이 모든 일이 오직 믿음으로만 되는 것입니다. 남녀노유, 빈부귀천 할 것 없이 교육을 받은 사람이나 교육이 없는 사람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동양인이나 서양인 할 것 없이 조건은 단지 하나밖에 없습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로 9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여러분 마틴루터는 청년때 친구와 함께 여행을 갔습니다. 그는 변호사, 법률학자가 되기 위해서 법률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소나기가 오고 천둥번개가 치더니만 벼락이 때려서 앞서가던 친구가 즉사해 버렸습니다. 그럴 때 마틴루터는 그 자리에 꿇어 엎드려서 "오 하나님! 만일 저를 살려 주시면 저는 저의 평생을 바쳐서 사제가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종이 되겠습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난 다음에 그는 살아나고 그 이후에 자기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신학을 공부하고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속에 끝없는 죄책감으로 번뇌를 했습니다. 아무리 고행을 해도 마음속에 있는 죄책감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종교적인 의식을 행해도 죄인이란 인식에서 해방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성경을 읽다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고행으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구원을 얻는다는 이 진리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때 교황 레오 10세가 베드로성당 증축자금을 위해 산사람과 죽은 사람에게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그 면죄부를 돈주고 사면은 그 만큼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죽은자도 면죄부만 사면 연옥에서 천당으로 올라온다고 그런 너무나 터무니없는 논리를 전개하고 면죄를 팔았습니다. 그는 거기에 대해서 의문하여 1517년 95개 조항을 발표하고 종교개혁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오직 믿음. 오직 하나님의 은총.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이 신앙생활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신약을 독일어로 번역해서 종교개혁을 한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깨달은 것은 오직 믿음으로 의로움과 영광을 얻고 천국 백성이 되고 영원천국의 소망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만일 우리보고 대가를 지불해서 용서를 받고 의로움을 얻고 천국을 값 주고 사라면 천국에 갈사람이 과연 몇사람이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구원의 문은 믿음을 통해서 활짝 열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습니다. 수고하고 고생하고 고행한 대가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몸을 찢고 피를 흘려서 천국길을 환하게 열어놓고 오직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값없이 구원을 거져 주시는 하나님이 좋은 하나님이 아니시고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아니했더라면 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려 몸을 찢고 피흘리게 했습니까? 어떠한 의심을 사탄이 갖다 준다하더라도 우리는 십자가만 바라보면 우리 마음이 모든 의심에서 눈녹듯이 녹아지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왜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은 그 분이 모든 능력과 권세를 가짐에도 불구하고 그를 포기하고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나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대신 갚아 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모든 의심은 사라지고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확정되어 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인 것을 우리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마귀를 멸하여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마귀는 언제나 우리 곁에 와서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며 참소하고 우리에게 어둠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아담의 원죄와 우리들의 자범죄로 인하여 마귀에게 팔려 종이 되어 하나님과 멀어지고 온갖 육신의 정욕의 포로가 되어 세상에서 고난 당하며 우리 조상들이 살아왔고 우리도 그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16절에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보혈로 원죄를 청산해 버리시고 여러분이 스스로 지은 자범죄를 다 갚아 버리셔서 마귀의 쇠사슬을 끊어 버리고 마귀의 정부와 군대를 무장해제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마귀는 더 이상 우리를 종으로 잡을수 있는 조건이 없습니다. 원죄와 자범죄 때문에 그 죄악의 쇠사슬로 우리를 묶었는데 그 죄가 예수님의 보혈로 청산되어 버리고 다 용서되어 버렸으니 죄악의 쇠사슬이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묶을수 있는 쇠사슬이 없어지고 말은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십자가에서 마귀의 불법을 책망하시고 그의 정사와 권세를 다 빼앗아 버렸습니다. 골로새서 2장 13절로 15절에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 즉 율법을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승리를 만끽할 수 있게 주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본문에 있는 말씀데로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이러한 처지에 있는데 어디 감히 마귀가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킬 수 있으며 우리를 또 참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는 마귀를 이기고 내어 쫓을 수 있는 권세를 주님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 17절로 19절에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귀는 여러분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능력보다 더 위대한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부모님은 연로하시면 몸이 약해서 능력은 우리보다 없습니다. 힘은 우리보다 없지만은 권세는 우리보다 계시므로 부모님이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옵니다. 힘이 없어서 우리가 부모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님은 부모로써의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통령께서 아무리 육신이 연약해도 힘이 강한 모든 사람들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은 그에게 권세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나는 미약하고, 허약하고, 보잘것없다고 생각하지만 여러분은 마귀에 대해서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 보혈의 능력과 말씀으로 무장해서 마귀가 한길로 오면 일곱길로 내어 쫓을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힘을 가지고 협박을 해도 여러분은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동물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가 있지 않습니까? 어린 아이가 코끼리를 타고서 코끼리를 이리가라 저리가라 이끄는 것 보았지요? 힘으로 말하면 어린 아이보다 엄청나게 큰 힘을 코끼리가 가지고 있으면 어린 아이는 짐승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힘은 권세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이름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그 말씀 안에서 마귀를 내어쫓을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권세자인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동안에서 우리는 종살이하고 마귀가 우리에게 주인 노릇해서 우리를 짓밟고 우리를 고통 주었는데 이제는 우리를 짓밟고 고통을 주는 옛 우리의 주인인 그 마귀를 우리는 쫓아내고 그를 멸할 수 있는 권세를 갖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하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런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겠습니까?
우리 하나님께서는 또한 율법과 의식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여러분 인간이 살아 있을 동안에는 하나님과 인간관계의 법이 있고 인간과 인간관계의 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이 법의 거미줄 속에 얽혀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모든 법을 다 지키고 정의롭게 될 힘은 없습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법을 어기고 살기 때문에 법을 어기면 죄를 짖지 않아요. 이 율법을 어기고 죄를 짓고 살수 있나요?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행위로 말하면 하나님과 인간관계의 법도 늘 어기고 인간과 인간관계의 법을 늘 어기고 있으니 늘 불법의 생활을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므로 율법을 그 몸으로 완성하시고 철폐하시고 말은 것입니다. 우리를 얽어매는 율법을 주님은 철폐해 버렸습니다. 십자가에서 그 율법을 다 완성하시고 주님께서 율법의 효력을 정지시켜 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에게 새로운 법을 주셨는데 무슨 법이냐, 믿음의 법과 성령의 법으로 살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을 믿음으로 용서와 의로움을 얻고 성령을 주셔서 성령이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의지해서 성령의 은혜로 우리는 살수 있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절로 2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받고 성령으로 새롭게 변화 받아야 천국가게 만들어 주셨으니 이 어찌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 아니신 것입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이 모든 일들을 생각할 때 하나님은 너무나 좋으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예수 그리스도를 못박아서 우리에게 값없이 구원을 주시고 마귀에게 해방시켜 주시고 율법을 폐하여 주시고 용서와 의를 주시고 성령을 주신 우리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인 것입니다. 너무나 좋은 하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좋게 해주신 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마음에 담대하게 되고 용기가 생기고 긍정적으로 인생을 바라보게 되고 희망차게 되고 내일에 대한 꿈을 가슴에 품고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 하나님께서는 환난과 고통 중에서도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좋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들은 환난과 고통중에도 하나님은 과연 좋은 하나님이실까?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환난과 고통은 우리의 잘못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마귀의 공격으로도 다가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혹은 국제적인 국가적인 재난으로 다가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환난과 고통을 우리가 변화시킬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환난과 고통을 당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도움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환난과 고통중에도 모두다 나를 버리고 떠나도 주님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좋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비록 내가 잘못했고 못된 짓을 해서 환난과 고통에 빠졌으므로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다고 할지라도 내가 회개하고 주님께 나오면 그 환난과 고통의 골짜기 속에 주님은 찾아 와서 함께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환난당할 때 친구가 참된 친구인데 주님은 시편 23편 4절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누가 같이가요? 부모, 형제, 처자라도 같이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곳에 나와 같이 계셔 주시고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안위해 주시니 주님은 참 좋으신 하나님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1절로 15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해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여러분과 나는 예수님이 기르는 양입니다. 예수님이 "나는 삯군이 아니야 돈 받고 와서 일시로 돌봐주는 사람이 아니야. 나는 너의 주인이요, 너를 기르는 책임자이므로 나는 너희를 위해서 내 목숨을 버린다." 여러분 이러므로 고난 당할때에 친구가 참된 친구인데 극한 고난에도 주님은 목숨을 버리더라도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고 떠나지 않고 함께 계시니 이 얼마나 좋은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고난과 고통을 주님께서 영광의 기회로 삼아 주시니 또한 감사하지요. 우리가 고난과 고통 당하는 것이 무익하고 손해가 나는 줄 생각하는데 실상은 고난과 고통의 터널을 통할 때 주님은 그를 통하여 우리 옛사람을 다 벗어버리고 새사람이 되게 하고 영광의 옷을 입게 하는 기회로 삼아 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로 17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고통은 그와 함께 영광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고통의 캄캄한 터널을 통과할때 우리 추하고 더러운 옛사람은 벗어 버리고 그 터널을 나올때는 지극히 크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서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없이 영광도 없습니다. 고통없이 축복도 없습니다. 이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가 고난당할 때 같이 하여서 고난이 오히려 영광으로 변화되게 만들어 주시니 얼마나 좋은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고난 당할 때 좌절과 절망하지 말 것은 내가 참으면 이 고난의 옷을 벗어 버리고 내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영광의 사람으로 변화된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용기와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91편 15절에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하여 저 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고 한 것입니다. 환난은 곧 영화(고난=영광)인 것입니다. 환난이 지나가면 영화가 다가온다. 그러므로 고난은 그와 동등 그 이상의 축복을 항상 동반한다는 것을 생각하고 고통 당하여 눈물 흘릴 때 고통과 동등 혹은 그 이상의 영화가 종국적으로 주님 안에서 다가온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고난은 영광과 축복을 향한 터널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고난의 터널을 지나기도 전에 좌절하고 절망해 버리는데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환난과 고통중에 은혜를 실감할 수 있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고난당할 때 절실하게 주님이 살아 계신 것을 체험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7절로 10절에 바울선생이 말씀하기를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 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 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내가 스스로 강할때는 나를 의지하기 때문에 주님의 능력이 나와 같이 할 수 없지만 내가 약하게 되면 주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정에도 보면 건강하고 씩씩하고 잘난 자식은 부모를 의지하지 않지만 병신자식은 끝까지 아버지, 어머니 부여잡고서 눈물로 매달립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연히 온힘을 다해서 약하고 병든 자식을 위해서 전심전력 기울여 도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도 약한 자를 붙들어 주시고 능력을 주시기 때문에 내가 약할 때 주님을 의지해서 강하게 되는 체험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종국적으로 우리는 고난을 당하고 원수에게 공격당할 때 그것이 잔에 넘치는 기회로 주님께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시편 23편 5절에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오히려 고난 당한 것이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주님의 축복을 실감하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관악대교구 문권숙 권사님은 전도하다가 당한 사고를 고침받고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신림동을 밭으로 삼고 19년 동안 전도하러 다녔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 한국 전국에 복음을 증거하기로 작정하고 선교회를 만들어서 작년 4월 외딴섬에 있는 교회를 위해 봉사팀들과 전도를 마치고 돌아오는 배를 타려다가 그만 바위에 미끄러져서 넘어지면서 머리를 바위에 콰~악하고 부딪혔습니다. 굉장히 큰 부상이었습니다. 순간 온몸이 마비가 되고 머리가 깨어지는 듯이 아팠습니다. 목포에서 제일 큰 병원으로 옮겨 X-ray를 촬영한 결과 머리를 부딪히면 목뼈중 4번과 6번이 튕겨져 나와 신경을 누르므로 전신마비가 올 것이라 했습니다. 이 영어로는 'Paraplegia'라고 해서 목만 살아있고 온 전신이 다 마비되는 이러한 병입니다. 의학적으로는 고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빨리 서울 큰 병원으로 들것에 들려 옮겨오면서 그는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주님 사업을 하다가 왔는데 왜 주님이 나를 지켜 주지 아니하시고 바위에 미끄러져 넘어지고 전신마비가 되게 했는가!" 원망스러운 마음이 생기고 두 번째는 "내가 주님 사업하다가 이렇게 했으니 주님께서 날 버리지 않고 꼭 고쳐 주실 것이다." 한편으로는 원망했지만 다른면으로는 주를 향한 긍정적인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살려 주십시오. 주님만 바라보고 살겠습니다."하고 서울까지 오는데 너무 아파서 정신이 몽롱해졌습니다. 온 팔다리가 마비가 되고 저렸습니다. 서울의 유명한 병원마다 찾아 다녀도 결과는 동일했습니다. 아무 치료 방법이 없다는 절망적인 의사의 말을 듣고 결국에는 전신마비 환자로써 여생을 보내겠다는 진단만 받은 것입니다. 치료 방법이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는 아에 응급실에서 퇴원하여 집으로 와서 이제 하나님만 유일한 치료와 희망이라고 믿고 벽에 머리를 대고 "저의 교만과 잘못을 용서해 주세요." 간절히 통회, 자복하고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하면 할수록 마음속에 치료해 준다는 확신이 생겨났습니다. 그 확신을 가지고 눈물을 흘리며 주님께 애쓰고 힘써서 기도를 했는데 좋으신 하나님 반드시 치료해 주시옵소서하고 3시간쯤 기도하는데 갑자기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자 머리가 상쾌해 지고 말은 것입니다. 그렇게 아프고 고통스럽던 머리가 시원해지고 말은 것입니다. 그 뒤에 조금씩 두통이 있어도 "예수 이름으로 물러가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입었다. 저가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고 가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변치 않는다. 나는 말씀에 서고 너희 거짓된 증상을 믿지 않는다." 그는 투쟁을 했습니다. 그러자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얼마있지 아니하여 그는 치료가 온몸에 오는 것을 느끼고 3개월 만에 이 척추도 다 고침받고 온몸이 깨끗이 나아 버리고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그는 고난당한 것이 더 유익이라 고난 당하기 전에는 막연한 하나님을 믿었지만 고난 당하고 난 다음에는 살아 계셔서 지금도 기도를 응답하시고 우리와 함께 계셔서 고난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고 믿음이 옛날보다 훨씬 강해졌다고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고난 당할 때 우리가 기도하므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게 해주시기 때문에 좋으신 하나님 이신 것입니다.
셋째로, 그러면 우리가 좋으신 하나님을 모시고 어떻게 살아가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항상 소망을 버려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소망을 버리면 하나님께서 쓸 수가 없습니다. 왜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절망하고 있는 사람하고는 같이 있을수가 없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망을 가져야 되지요. 모든 것이 다 끝날에는 좋게 될것이니 우리가 소망을 가져야 하나님이 역사를 베풀수가 있는 것입니다. 광야를 통과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항상 절망적이었습니다. 열번이나 하나님을 시험하고 불순종하고 원망하다가 결국에는 멸망당하고 말은 것입니다. 절망하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절망에 부딪혀 죽게 만들고 마는 것입니다.
다윗왕은 많은 죄를 짓고 잘못된 일을 한 사람입니다만 하나님이 다윗을 보고 내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라고 말씀한 것은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는 소망차고 긍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정 13장 22절에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다윗이 하나님에게 합당한 사람이 된 것은 항상 하나님을 소망하고 찬양하며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 앞에 소망을 두고 그는 늘 꿈을 가지고 믿고 감사를 드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주님이 다윗과 같이한 것입니다.
여러분 좋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환경을 극복하는 길을 하늘을 쳐다보고 기도하는 길밖에는 다른길이 없습니다. 우리 예수믿는 사람은 기도할수 있기 때문에 절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물로 심판할 때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했습니다. 3층으로 방주를 만들고 난 다음 방주의 천장 꼭대기에서 45.6cm 창문을 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옆으로는 창문이 없어요. 40일 동안 물이 창열하여 넘쳐 날 때 노아는 물 한방울도 못보았습니다. 왜, 꼭대기에서 45.6cm인 거기에 창문이 있었기 때문에 창문을 열면 하늘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홍수가 창열할 동안에도 노아는 홍수를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하늘만 쳐다보게 한 것입니다. 홍수와 같은 고난 당할 때 우리가 환경을 바라보면 두려워 하고 놀라고 낙심하게 되지만은 하늘만 쳐다보면 낙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서 33장 2절로 3절에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우리는 절망이라 생각하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주님이 가지고 계시므로 우리는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시험당할쯤에 또한 피할길을 내서 너희로 능히 감당케 하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주님을 좋은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좋을때는 물론 감사히 예물을 드리고 감사해야 됩니다. 시편 50편 23절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일이 안되고 역경을 당할때에도 눈물을 흘리며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감사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좋을 때보다 역경을 당할 때 하나님의 도움이 더 절실한 것입니다. 역경을 당할 때 하나님은 나를 버렸다.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냐. 하나님은 사랑하지 아니한다. 하나님은 너무나 야박하다. 그렇게 하면은 도움을 베풀 하나님을 쫓아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곳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찬양중에 거하는 하나님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감사와 찬양은 역경중에 더욱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임하셔서 역경에서 우리를 건져내어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라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시리라 함이라 말했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요셉은 그 억센 시련과 환난을 당했지만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탄식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50장 20절에 요셉이 형들에게 말하기를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나를 헤하려고 해도 하나님 그것을 오히려 선으로 바꾸어 주셨다. 우리 환경에 마귀가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해도 하나님은 종국적으로 그것을 선으로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우리는 믿고 감사하고 찬양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를 좋은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은 언제나 마음이 낙관적이고 긍정적이고 성도들과 늘 힘을 주고 받으며 마음에 낙관적이고 긍정적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언제나 소망을 가지고 바라보고 긍정적으로 바라봐야죠.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절망하면 안돼요. 여러분 우리는 환경에 지배를 많이 받기 때문에 우리 주위에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성도들과 늘 모여야 되는 것입니다. 늘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사람하고 만나면 파괴되고 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과 모이느냐가 굉장히 중요하지요. 우리가 정기적인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들을때 우리 마음속에 낙관적이고 긍정적이 됩니다. 히브리서 10장 23절로 25절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않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서로 자꾸 모여서 말씀을 공부하고 읽고, 기도하며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믿음을 북돋워 줘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공부와 기도회는 얼마나 필요한지 몰라요. 성경 요한복음 15장 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하셨으니 성경공부를 해야 주의 말씀이 내 속에 들어오지 않아요?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면서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 깨달아 지면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나님의 응답해 주겠다고 한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생애 속에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찾아온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좋은 하나님인 것입니다. 마귀는 나쁜 마귀입니다. 나쁜 마귀는 좋은 것을 해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십니다. 좋은 하나님이 나쁜 것을 줄수가 없습니다. 좋은 부모가 자기가 희생할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줍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자식이 떡을 달라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하면 뱀을 줄자가 있는가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 줄줄 알거든 하물며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지 않겠느냐고 말씀한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1절로 39절의 말씀을 여러분 다시한번 깊이 음미해 보십시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 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몸을 찢고 피를 흘리기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는데 이 사랑의 전능하신 밧줄을 끊을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안에 여러분은 24시간, 1년 365일 동안 사랑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알고 사랑을 받아들이고 사랑을 만끽하고 사랑에 감격해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여!
전능하신 우리 아버지의 너무나 크고 영광스러운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왜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박았겠습니까? 예수께서 십자가에 몸찢고 피흘려 우리를 위해서 대속 재물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확정된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여,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사람은 말로 다할수 없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마귀가 의심을 가져다 주어도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쳐다볼 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란 것을 의심할 도리가 없습니다. 십자가에 예수님은 모든 의심과 모든 마귀의 잘못된 미혹을 산산히 깨뜨리고 맙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사랑의 도치하고 사랑을 만끽하고 사랑으로 감동되어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희망적이며, 낙관적인 인생을 살아가게 도와주옵시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파하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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