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롬4:16-25 |
---|---|
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2002년 12월 22일 주일2부설교(여의도순복음교회) |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 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 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저에게 의로 여기셨 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 신 이를 믿는 자니 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아브라함의 신앙』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버드대학이나 프린스턴대학 출신이 아닙니다. 더구나 동경대학이나 서울대학교 출신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그가 명문대가의 집 자손도 아니었습니다. 미안하게도 그 아버지 데라는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만들어 파는 상인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평범한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목동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IQ가 높은 천재는 더욱 아니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만큼 인류문명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이는 없습니다. 그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문명의 조상이며 현대 서구 문명의 기원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그처럼 사랑하시고 복을 주셨는지 그 이유를 찾아보는 것은 의미깊은 일입니다.
성경에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떠한 믿음을 가졌을까요?
1.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은 아브라함
첫째로, 이 성경에는 아브라함은 죽은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4장 17절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고 말했습니다. 이와같은 하나님을 아브라함은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은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은자를 살린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이나 상상의 한계를 완전히 뛰어 넘는 것입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죽은자를 다시 살려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복제인간은 지금 만들어서 그 어린아이가 태어난다고 하고 있지만은 그러나 죽은자를 살렸다는 그런 이야기는 없습니다. 이런 일은 창조주 이외에는 하실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흙으로 인간을 빚으사 생기를 불어넣어 생명이 되게 하실 뿐 아니라 또다시 죽은자도 살리시는 것입니다. 지구상 약 120만종의 동물과 약 50만종의 식물을 주님께서 돌보시고 그들에게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생명은 하나님만이 역사하실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성경을 보면 엘리야 의 하나님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의 죽음을 다시 살려 놓으셨습니다. 열왕기상 17장 17절로 24절에 보면 엘리야에게 마지막 떡 한조각을 만들어 공개한 과부의 아들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엘리야가 그 아들을 품에 안고 그 다락에 올라가서 침상에 누이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그 아이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려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야훼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 났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혼이 떠나게 하는이도 하나님이시고 혼이 돌아오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사람은 혼이 떠나면 살았으나 죽은것입니다. 몸은 사람의 형체지만은 혼이 떠나면 생기가 없기 때문에 죽은 존재인 것입니다. 거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떠난 혼을 다시 불러오는 것은 어떠한 사람의 기술로도 안되고 현대의학으로도 안됩니다. 하나님만이 혼을 다시 돌아오게 하여 살게할수 있는 것입니다.
엘리사의 하나님도 보면 수넴 여인의 아들의 죽음과 그를 다시 살리는 역사를 베풀은 것입니다. 열왕기하 4장 17절로 37절에 보면
엘리사에게 종종 음식을 대접하고 남편과 함께 엘리사 일행이 쉴방을 예비한 그의 부인이 바로 이 수넴 여인이었는데 그 남편은 늙었고 그 부인은 자녀가 없었습니다만 엘리사가 그들의 정성을 고맙게 여겨서 축복한즉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추수할 때 아버지와 함께 밖에서 있다가 머리가 아프다고 해서 집으로 돌려 보냈는데 어머니 무릎에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수넴 여인이 엘리사를 집으로 청해 왔습니다. 엘리사가 자기의 침상에 어린아이를 뉘어 놓고 그 위에 올라가 엎드려 엘리사의 얼굴과 손을 아이의 얼굴과 손에 대니 몸이 조금씩 따뜻해 졌습니다. 엘리사가 두 번째 대었을 때 아이가 재채기하고 눈을 뜨며 살아났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물론 죽은자를 살리셨습니다. 회당장의 딸이 죽었을 때 주님이 가서 달리다굼 딸아 일어나라 하니 살아서 일어난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죽어서 관에 들어가서 상여에 얹혀서 장지로 가던 도중에 예수님을 만나게 된것입니다. 죽음의 행열이 지나가는 곳에 예수님의 행렬이 오다가 만났습니다. 여러분 놀라운 일 아닙니까? 여기에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죽어서 관속에 들어가서 상여에 매여서 장지로 가고 있었습니다. 죽음의 행렬입니다.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행렬이 오셔서 만나자 죽음의 행렬은 생명의 기쁨으로 넘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관뚜껑을 열게 하시고 죽은자를 보고 청년아 일어나라 하니 청년이 일어나 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오늘도 인생의 죽음의 행렬이 예수 그리스도의 행렬을 만나면 살아나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더구나 여러분 잘알다시피 나사로는 죽어서 무덤에 들어간지 나흘이 되었습니다. 썩은 냄새가 났습니다. 오장육부가 부패했습니다. 사람으로써는 도저히 살아날 수 있다고 상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나서 살리라고 해도 마르다와 마리아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니 그가 온몸에 수의를 둥둥 동여맨체 살아서 걸어 나왔습니다. 도저히 우리로써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일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창조주 하나님 즉, 기적의 하나님을 믿었다 그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합리적인 일, 이성적인 일은 할 수도 있고 믿을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일은 못합니다. 하나님만 하시죠.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을 알고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 즉, 죽은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7절로 19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이처럼 아브라함은 죽은자를 살리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자기의 외아들을 재물로 드리라고 할 때도 두려워 하지 않고 재물로 드릴려고 작정한 것은 하나님은 죽은자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져야 돼요.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지면 아브라함처럼 복을 받는다고 했는데 우리들도 죽은자를 살리시는 기적의 하나님을 믿어야 할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안에 사는 유한한 존재이므로 항상 과거, 현재, 미래 이렇게 나누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지 않습니까? 우리는 현재에 살고 있지만은 순식간에 현재는 과거로 지나가고 언제나 마음은 미래에 두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항상 하나님 앞에는 지금이십니다. 그러므로 과거도 하나님은 지금으로 볼 수 있고 지금은 지금이고 영원한 미래도 하나님에게는 지금입니다. 하나님은 영원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영원이란 무한한 과거와 무한한 미래가 창조적으로 결합된 것이 영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항상 현재만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고 한 말씀도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과거의 예수님, 미래의 예수님이 아닙니다. 언제나 현재에 살아계신 예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좋습니까? 히브리서 1장 10절로 11절에 또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 지리니"라고 했습니다. 영원히 하나님께서...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는 우리들이 성경읽으면서 아 과거에 예수님은 이랬었다. 미래의 예수님은 이랬었다. 인간은 언제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분리해서 생각하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언제나 영존하시고 항상 동일하신 것입니다. 언제나 현재에 계신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래적 사건을 현재에 받아 들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 인간에게는 마음속에 꿈을 꾸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우리는 과거로 돌아 갈 수도 없고 미래로 뛰어 나가서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장차 될 일을 우리가 받아 들일 수 있는 것은 마음속에 꿈을 통해서 받아 들일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받아들이는 것은 꿈 혹은 비전을 통하는 길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아브라함에게 미래적 사건을 현재적으로 받아들이도록 바라봄의 법칙을 사용하게 했습니다. 창세기 13장 14절에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하나님께서 언덕위에 아브라함을 올라오게 하시고 너희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네 눈에 보이는 그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하리라. 아브라함 눈에 보이는 그 땅은 아직까지도 아브라함을 한 평도 소유로 삼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하나님은 바라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평생에는 그 땅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만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그 땅을 차지했습니다. 오늘날 이스라엘이 그 땅을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5장 5절로 6절에 보면은 아브라함이 아직 아들이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하늘을 쳐다보고 뭇별을 헤아리게 하시고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했습니다. 장차 하늘에 별같이 많은 자손들을 하나님은 지금 별을 바라보시고 네 자손이 지금 이처럼 많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사실을 어떻게 용납합니까? 우리는 바라봄의 법칙을 통해서 꿈으로 마음속에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바라보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적 사건을 현재에 우리가 받아 들여야 하나님과 함께 역사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미래적 사건을 현재에 있는 것처럼 말씀하기 때문에 우리도 현재 있는것처럼 받아 들이기 위해서는 바라봄의 법칙을 통해서 꿈으로 마음속에 소유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우리도 같이 믿으려면 죽은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그 역사를 우리도 받아 들여야만 되는 것입니다. 기적을 믿어야 돼요. 현재 마음의 캠퍼스에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받아 들여서 바라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2.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은 아브라함
둘째로,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4장 18절에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란다 그것은 무슨 말이냐 인간적으로는 끝장났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지경에 처했다. 바랄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절대긍정적이고 희망적이었다는 것입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란다는 것은 절대절망을 절대희망으로 절대절망을 절대긍정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는 절대로 좋으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눈에는 아무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고 절망이라도 하나님은 절대 좋은 하나님이시므로 내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종국적으로는 좋게 만들어 준다는 희망을 마음속에 가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고 시작과 끝이 되시므로 하나님이 결국 운명과 역사를 다스리시고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종국적으로 우리에게 좋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박국 2장 20절에 보면은 여러분 하박국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절망적인 상황을 하나님께로부터 묵시받고 난 다음에도 그는 하박국 3장 16절로 19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고 말했었습니다. 여러분 이 하박국의 노래처럼 우리가 소망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소망을 가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는 것은 즉,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바랄길이 없습니다. 인간의 능력이 한계점에 처하면 끝장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하박국의 노래처럼 무화과나무가 무성치도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도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도 없고 밭에 식물도 없고 우리에 양도 없고 외양간에 소도 없는 절망입니다. 그러나 나는 야웨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한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눈에 아무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고 내 앞길 칠흙같이 어두워도 나는 소망을 가질 수가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절대긍정적이고 희망적인 그러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희망을 가슴에 품고 살아야 됩니다. 인간적인 생각에는 절망이라도 하나님 안에서는 언제나 희망을 가질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9절에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도저히 상상을 초월하게 예비해 놓았다 그말씀인 것입니다. 눈으로는 안보이고 귀에는 들어보지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지도 못할 그러한 것을 하나님은 예비를 해 놓았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가질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우리가 알지 못하고 앞날에 대해 캄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큰 비밀을 예비하고 있습니다. 깜짝 놀랄 비밀을 예비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절망이라도 하나님은 절망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바랄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이 계시므로 우리는 계속 마음에 바램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절대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감각에 의존해서 살지 않았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것이 믿음인데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부름심을 받아 장래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때 갈바를 모르고 나갔던 것입니다. 어디로 가야될지 모르지만은 하나님이 가라고 하니까 믿음으로 출발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7절에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재물로 바치라고 할 때도 바쳤습니다. 바쳐서 재물을 만들어도 하나님은 잿더미 위에서 그 아들 이삭을 다시 부활시킬 줄을 믿은 것입니다. 믿음은 엄청난 힘입니다. 믿음은 도저히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어서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26절에도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했는데 우리가 믿음으로써 우리의 삶에 실천해야 되는 것입니다. 항상 말씀을 바라보고 말씀을 듣고 말씀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말했습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는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처럼 소망을 품에 품고 살뿐아니라 믿음을 품에 품고 믿음으로 실천하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저 입술로만 믿습니다하는게 아니라 실제로 행함으로서 그는 살았던 것입니다.
3. 영적 전쟁에서 계속 이긴 아브라함
셋째로, 아브라함은 영적 전쟁에서 계속 승리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는것과 믿음과의 전쟁을 아브라함은 끊임없이 했습니다. 로마서 4장 19절에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아는것하고 믿음입니다. 자기가 아는 것으로는 자기 나이 백세나 되어 몸이 죽은 것 같아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번연히 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지식으로 볼 때는 절대로 어린아이를 낳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린아이를 낳을 것을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 전쟁입니다. 아는것과 믿음과의 전쟁입니다. 사람들은 ‘아 내가 아니까 안된다’ 믿음을 포기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무리 자기가 현실이 불가능하다고 알고 있었어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었습니다. 지식과 믿음의 전쟁에서 이겨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성적인 지식과 감각과 믿음의 전쟁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끊임없이 경험하는 바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에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마가복음 11장 22절로 24절에도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지식과 믿음의 전쟁을 끊임없이 계속합니다. 우리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아 이건 희망이다. 아 이건 절망이다. 성경은 할 수 있다 해보라고 말하면 내가 지식을 따를 것이냐 믿음을 따를 것이냐 그 영적인 전쟁을 치뤄야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영적전쟁에서 지식과 감각과 이성을 따르지 아니하고 믿음편을 들어서 믿음에 우뚝 섰던 것입니다.
중동성전 정현희 성도의 간증을 들어보면 바로 이 지식과 믿음의 전쟁을 치뤄서 이긴 사건이 있습니다.
성도님과 남편은 믿음이 미지근했는데 문제는 둘째 아이를 갖기 원했으나 여러번 유산이 되어 병원에서는 이유를 찾을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8월에 몸에 이상이 있어 병원에 갔더니 임신이라고 하며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는데 며칠뒤에 계속해서 하혈이 있었습니다. 7주일 뒤 병원에 가니 의사는 배속의 아이에게서 박동이 사라졌다 하면서 아이가 죽은이상 빨리 수술을 해서 어린아이를 적출해 내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 날은 준비가 없어서 남편에게 연락하니까 일단 집으로 돌아오라고 해서 수술일을 3일뒤로 잡고 집에 돌아 왔습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지식과 감각을 초월해서 믿음으로 어린아이가 살아날 것을 믿고서 남편하고 결사적으로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병원에서 어린아이가 죽었으니 빨리 수술해서 죽은 태아를 끄집어 내야 된다고 하는데 그 현실적인 지식을 초월해서 하나님은 죽은자를 살리기 때문에 우리 믿음으로 결투하자. 그래서 남편과 결사적으로 기도하고 또 셀원들 부탁해서 함께 기도를 했습니다. 수술 하루전날 성도님 집에 셀식구들이 모여서 간절히 기도드리고 합심으로 부르짖은 후에 수술하는날 이제 병원에 가서 수술받기 위해서 의사가 초음파 검진을 해보았는데 뱃속에 애를 살펴보니까 애가 살아 났어요. 아이의 심장도 박동소리가 힘차게 들리고 의사도 성도님도 입을 딱벌리고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3일 뒤 주일설교후에 제가 아픈데 손을 얹고 기도하라고 하시자 둘이서 배에 손을 대고 아멘 아멘하면 눈물로 기도했는데 어린아이의 유산으로 고통받고 있는 자매님이 오늘 완전히 고침을 받고 건강한 아이를 출산할 것이라고 예언을 해주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시작해서 몸은 건강하고 어린아이는 뱃속에서 잘 자라고 있어요.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만일 믿음이 없었더라면 수술을 해버릴 것을 그런데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부부간에 결사적으로 지식과 감각을 초월해서 믿음으로 부르짖었기 때문에 그 어린아이가 적출되지 않고 생명을 얻게 되고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될 것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와같이 여러분 지식과 믿음의 투쟁에서 믿음 편을 택하고 믿음에 굳세게 섰던 것입니다.
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신실함 즉, 약속에 대한 의심과 믿음의 전쟁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것 과연 이루어 주실까? 하나님은 안이루어주시겠지. 그런 의심이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4장 20절에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 을 돌리며"라고 했는데 기도의 응답이 늦어지고 역풍이 불어올 때 느끼는 번뇌가 과연 하나님께서 살아계실까? 과연 나의 기도를 들어주실까 하는 마음의 문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도 그런 마음의 번뇌를 많이 가졌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어린아이를 주신다고 했는데 과연 주실까? 그래서 한때 시험에 들어서 하갈을 취해서 이스마엘을 낳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그가 잘못한 것을 알고 회개하고 끝까지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믿었습니다. 약속하시고 미쁘시는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 하나님의 인생이 아니신지라 식언치 아니하시고 인자가 아니신지라 거짓이 없으시로다 어찌 그 말씀을 이루지 아니하시며 그 하신 말씀을 성취하지 아니하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의지했었습니다. 말씀에 의지해서 하나님 거짓이 없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그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의심과 믿음의 전쟁이었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이런 일을 하실 수 있을까? 아브라함은 노년에 자식을 기적적으로 주실 수 있는가에 대한 의심 때문에 하나님을 도우기 위하여 여종 하갈을 취해 아들을 낳기도 했지만은 그는 99세 전능한 하나님이 무엇을 못하겠는가! 내가 1백살이 되고 아내의 나이가 90세가 되어도 인간으로 상상할 수 없는 기적을 행할지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시기 때문에 할 수 있다. 하나님이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 이 투쟁에서 그는 이겼던 것입니다.
로마서 4장 21절에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11절로 12절에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 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능력에 대한 의심을 이길수 가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믿음의 전쟁을 불가불 치뤄야만 한것입니다. 그는 믿음이냐, 감각이냐, 하나님은 거짓말 하나님이냐, 참말 하나님이냐 거기에 대한 마음의 투쟁과 하나님이 과연 할수 있냐 없느냐 거기에 대한 마음의 투쟁에서 그는 언제나 믿음의 편을 택했습니다. 눈에는 아무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소리 안들리고 잡히는 것 없어도 내가 볼때는 인간적으로 안되어도 하나님이 믿음을 택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도응답을 늦게 해주시고 너무 오래 기다리기 때문에 과연 살아계신가? 과연 응답하실까? 그런 하나님의 성실하심에 대한 의심이 생겨날때라도 의심과 싸워서 하나님은 절대로 거짓이 없으시고 성실하시다는 편에 서서 믿었습니다.
그 다음 하나님은 능력이 없어, 이런일은 못해, 안해. 그러한 비난에 대해 끝까지 하나님은 할수 있다. 그 믿음으로 굳세게 서서 또한 믿음으로 이긴 것입니다. 성경에는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자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9절에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해와 그 믿음의 태도와 영적 전쟁을 거울삼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갖도록 우린 노력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의 믿음바 하나님은 죽은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지면 비록 시련과 고난은 많을지라도 종국적으로 하나님은 믿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놀라운 기적의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아브라함은 우리와 성장이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 되었사옵니다.
우리 아버지여 우리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 아브라함처럼 복을 받는 자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브라함은 죽은자를 살리심이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었사옵니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을 수 없는 중에 믿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끝까지 의심하지 않고 영적 전쟁에서
믿음의 편을 택해서 단호하게 이성보다 더 믿음을, 지식보다 더 믿음을,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보다는 믿음을, 하나님의 능력을 못믿는 의심보다 더 믿음을 택하여서
하나님과 동행한 것을 우리가 깨닫게 하옵시고 우리도 그와같은 본을 따라가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 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 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저에게 의로 여기셨 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 신 이를 믿는 자니 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아브라함의 신앙』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버드대학이나 프린스턴대학 출신이 아닙니다. 더구나 동경대학이나 서울대학교 출신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그가 명문대가의 집 자손도 아니었습니다. 미안하게도 그 아버지 데라는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만들어 파는 상인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평범한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목동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IQ가 높은 천재는 더욱 아니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만큼 인류문명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이는 없습니다. 그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문명의 조상이며 현대 서구 문명의 기원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그처럼 사랑하시고 복을 주셨는지 그 이유를 찾아보는 것은 의미깊은 일입니다.
성경에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떠한 믿음을 가졌을까요?
1.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은 아브라함
첫째로, 이 성경에는 아브라함은 죽은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4장 17절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고 말했습니다. 이와같은 하나님을 아브라함은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은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은자를 살린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이나 상상의 한계를 완전히 뛰어 넘는 것입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죽은자를 다시 살려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복제인간은 지금 만들어서 그 어린아이가 태어난다고 하고 있지만은 그러나 죽은자를 살렸다는 그런 이야기는 없습니다. 이런 일은 창조주 이외에는 하실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흙으로 인간을 빚으사 생기를 불어넣어 생명이 되게 하실 뿐 아니라 또다시 죽은자도 살리시는 것입니다. 지구상 약 120만종의 동물과 약 50만종의 식물을 주님께서 돌보시고 그들에게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생명은 하나님만이 역사하실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성경을 보면 엘리야 의 하나님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의 죽음을 다시 살려 놓으셨습니다. 열왕기상 17장 17절로 24절에 보면 엘리야에게 마지막 떡 한조각을 만들어 공개한 과부의 아들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엘리야가 그 아들을 품에 안고 그 다락에 올라가서 침상에 누이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그 아이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려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야훼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 났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혼이 떠나게 하는이도 하나님이시고 혼이 돌아오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사람은 혼이 떠나면 살았으나 죽은것입니다. 몸은 사람의 형체지만은 혼이 떠나면 생기가 없기 때문에 죽은 존재인 것입니다. 거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떠난 혼을 다시 불러오는 것은 어떠한 사람의 기술로도 안되고 현대의학으로도 안됩니다. 하나님만이 혼을 다시 돌아오게 하여 살게할수 있는 것입니다.
엘리사의 하나님도 보면 수넴 여인의 아들의 죽음과 그를 다시 살리는 역사를 베풀은 것입니다. 열왕기하 4장 17절로 37절에 보면
엘리사에게 종종 음식을 대접하고 남편과 함께 엘리사 일행이 쉴방을 예비한 그의 부인이 바로 이 수넴 여인이었는데 그 남편은 늙었고 그 부인은 자녀가 없었습니다만 엘리사가 그들의 정성을 고맙게 여겨서 축복한즉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추수할 때 아버지와 함께 밖에서 있다가 머리가 아프다고 해서 집으로 돌려 보냈는데 어머니 무릎에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수넴 여인이 엘리사를 집으로 청해 왔습니다. 엘리사가 자기의 침상에 어린아이를 뉘어 놓고 그 위에 올라가 엎드려 엘리사의 얼굴과 손을 아이의 얼굴과 손에 대니 몸이 조금씩 따뜻해 졌습니다. 엘리사가 두 번째 대었을 때 아이가 재채기하고 눈을 뜨며 살아났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물론 죽은자를 살리셨습니다. 회당장의 딸이 죽었을 때 주님이 가서 달리다굼 딸아 일어나라 하니 살아서 일어난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죽어서 관에 들어가서 상여에 얹혀서 장지로 가던 도중에 예수님을 만나게 된것입니다. 죽음의 행열이 지나가는 곳에 예수님의 행렬이 오다가 만났습니다. 여러분 놀라운 일 아닙니까? 여기에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죽어서 관속에 들어가서 상여에 매여서 장지로 가고 있었습니다. 죽음의 행렬입니다.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행렬이 오셔서 만나자 죽음의 행렬은 생명의 기쁨으로 넘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관뚜껑을 열게 하시고 죽은자를 보고 청년아 일어나라 하니 청년이 일어나 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오늘도 인생의 죽음의 행렬이 예수 그리스도의 행렬을 만나면 살아나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더구나 여러분 잘알다시피 나사로는 죽어서 무덤에 들어간지 나흘이 되었습니다. 썩은 냄새가 났습니다. 오장육부가 부패했습니다. 사람으로써는 도저히 살아날 수 있다고 상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나서 살리라고 해도 마르다와 마리아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니 그가 온몸에 수의를 둥둥 동여맨체 살아서 걸어 나왔습니다. 도저히 우리로써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일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창조주 하나님 즉, 기적의 하나님을 믿었다 그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합리적인 일, 이성적인 일은 할 수도 있고 믿을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일은 못합니다. 하나님만 하시죠.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을 알고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 즉, 죽은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7절로 19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이처럼 아브라함은 죽은자를 살리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자기의 외아들을 재물로 드리라고 할 때도 두려워 하지 않고 재물로 드릴려고 작정한 것은 하나님은 죽은자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져야 돼요.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지면 아브라함처럼 복을 받는다고 했는데 우리들도 죽은자를 살리시는 기적의 하나님을 믿어야 할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안에 사는 유한한 존재이므로 항상 과거, 현재, 미래 이렇게 나누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지 않습니까? 우리는 현재에 살고 있지만은 순식간에 현재는 과거로 지나가고 언제나 마음은 미래에 두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항상 하나님 앞에는 지금이십니다. 그러므로 과거도 하나님은 지금으로 볼 수 있고 지금은 지금이고 영원한 미래도 하나님에게는 지금입니다. 하나님은 영원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영원이란 무한한 과거와 무한한 미래가 창조적으로 결합된 것이 영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항상 현재만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고 한 말씀도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과거의 예수님, 미래의 예수님이 아닙니다. 언제나 현재에 살아계신 예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좋습니까? 히브리서 1장 10절로 11절에 또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 지리니"라고 했습니다. 영원히 하나님께서...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는 우리들이 성경읽으면서 아 과거에 예수님은 이랬었다. 미래의 예수님은 이랬었다. 인간은 언제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분리해서 생각하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언제나 영존하시고 항상 동일하신 것입니다. 언제나 현재에 계신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래적 사건을 현재에 받아 들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 인간에게는 마음속에 꿈을 꾸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우리는 과거로 돌아 갈 수도 없고 미래로 뛰어 나가서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장차 될 일을 우리가 받아 들일 수 있는 것은 마음속에 꿈을 통해서 받아 들일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받아들이는 것은 꿈 혹은 비전을 통하는 길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아브라함에게 미래적 사건을 현재적으로 받아들이도록 바라봄의 법칙을 사용하게 했습니다. 창세기 13장 14절에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하나님께서 언덕위에 아브라함을 올라오게 하시고 너희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네 눈에 보이는 그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하리라. 아브라함 눈에 보이는 그 땅은 아직까지도 아브라함을 한 평도 소유로 삼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하나님은 바라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평생에는 그 땅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만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그 땅을 차지했습니다. 오늘날 이스라엘이 그 땅을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5장 5절로 6절에 보면은 아브라함이 아직 아들이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하늘을 쳐다보고 뭇별을 헤아리게 하시고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했습니다. 장차 하늘에 별같이 많은 자손들을 하나님은 지금 별을 바라보시고 네 자손이 지금 이처럼 많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사실을 어떻게 용납합니까? 우리는 바라봄의 법칙을 통해서 꿈으로 마음속에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바라보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적 사건을 현재에 우리가 받아 들여야 하나님과 함께 역사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미래적 사건을 현재에 있는 것처럼 말씀하기 때문에 우리도 현재 있는것처럼 받아 들이기 위해서는 바라봄의 법칙을 통해서 꿈으로 마음속에 소유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우리도 같이 믿으려면 죽은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그 역사를 우리도 받아 들여야만 되는 것입니다. 기적을 믿어야 돼요. 현재 마음의 캠퍼스에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받아 들여서 바라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2.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은 아브라함
둘째로,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4장 18절에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란다 그것은 무슨 말이냐 인간적으로는 끝장났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지경에 처했다. 바랄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절대긍정적이고 희망적이었다는 것입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란다는 것은 절대절망을 절대희망으로 절대절망을 절대긍정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는 절대로 좋으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눈에는 아무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고 절망이라도 하나님은 절대 좋은 하나님이시므로 내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종국적으로는 좋게 만들어 준다는 희망을 마음속에 가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고 시작과 끝이 되시므로 하나님이 결국 운명과 역사를 다스리시고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종국적으로 우리에게 좋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박국 2장 20절에 보면은 여러분 하박국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절망적인 상황을 하나님께로부터 묵시받고 난 다음에도 그는 하박국 3장 16절로 19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고 말했었습니다. 여러분 이 하박국의 노래처럼 우리가 소망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소망을 가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는 것은 즉,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바랄길이 없습니다. 인간의 능력이 한계점에 처하면 끝장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하박국의 노래처럼 무화과나무가 무성치도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도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도 없고 밭에 식물도 없고 우리에 양도 없고 외양간에 소도 없는 절망입니다. 그러나 나는 야웨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한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눈에 아무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고 내 앞길 칠흙같이 어두워도 나는 소망을 가질 수가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절대긍정적이고 희망적인 그러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희망을 가슴에 품고 살아야 됩니다. 인간적인 생각에는 절망이라도 하나님 안에서는 언제나 희망을 가질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9절에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도저히 상상을 초월하게 예비해 놓았다 그말씀인 것입니다. 눈으로는 안보이고 귀에는 들어보지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지도 못할 그러한 것을 하나님은 예비를 해 놓았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가질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우리가 알지 못하고 앞날에 대해 캄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큰 비밀을 예비하고 있습니다. 깜짝 놀랄 비밀을 예비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절망이라도 하나님은 절망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바랄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이 계시므로 우리는 계속 마음에 바램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절대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감각에 의존해서 살지 않았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것이 믿음인데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부름심을 받아 장래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때 갈바를 모르고 나갔던 것입니다. 어디로 가야될지 모르지만은 하나님이 가라고 하니까 믿음으로 출발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7절에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재물로 바치라고 할 때도 바쳤습니다. 바쳐서 재물을 만들어도 하나님은 잿더미 위에서 그 아들 이삭을 다시 부활시킬 줄을 믿은 것입니다. 믿음은 엄청난 힘입니다. 믿음은 도저히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어서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26절에도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했는데 우리가 믿음으로써 우리의 삶에 실천해야 되는 것입니다. 항상 말씀을 바라보고 말씀을 듣고 말씀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말했습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는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처럼 소망을 품에 품고 살뿐아니라 믿음을 품에 품고 믿음으로 실천하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저 입술로만 믿습니다하는게 아니라 실제로 행함으로서 그는 살았던 것입니다.
3. 영적 전쟁에서 계속 이긴 아브라함
셋째로, 아브라함은 영적 전쟁에서 계속 승리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는것과 믿음과의 전쟁을 아브라함은 끊임없이 했습니다. 로마서 4장 19절에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아는것하고 믿음입니다. 자기가 아는 것으로는 자기 나이 백세나 되어 몸이 죽은 것 같아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번연히 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지식으로 볼 때는 절대로 어린아이를 낳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린아이를 낳을 것을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 전쟁입니다. 아는것과 믿음과의 전쟁입니다. 사람들은 ‘아 내가 아니까 안된다’ 믿음을 포기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무리 자기가 현실이 불가능하다고 알고 있었어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었습니다. 지식과 믿음의 전쟁에서 이겨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성적인 지식과 감각과 믿음의 전쟁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끊임없이 경험하는 바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에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마가복음 11장 22절로 24절에도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지식과 믿음의 전쟁을 끊임없이 계속합니다. 우리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아 이건 희망이다. 아 이건 절망이다. 성경은 할 수 있다 해보라고 말하면 내가 지식을 따를 것이냐 믿음을 따를 것이냐 그 영적인 전쟁을 치뤄야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영적전쟁에서 지식과 감각과 이성을 따르지 아니하고 믿음편을 들어서 믿음에 우뚝 섰던 것입니다.
중동성전 정현희 성도의 간증을 들어보면 바로 이 지식과 믿음의 전쟁을 치뤄서 이긴 사건이 있습니다.
성도님과 남편은 믿음이 미지근했는데 문제는 둘째 아이를 갖기 원했으나 여러번 유산이 되어 병원에서는 이유를 찾을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8월에 몸에 이상이 있어 병원에 갔더니 임신이라고 하며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는데 며칠뒤에 계속해서 하혈이 있었습니다. 7주일 뒤 병원에 가니 의사는 배속의 아이에게서 박동이 사라졌다 하면서 아이가 죽은이상 빨리 수술을 해서 어린아이를 적출해 내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 날은 준비가 없어서 남편에게 연락하니까 일단 집으로 돌아오라고 해서 수술일을 3일뒤로 잡고 집에 돌아 왔습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지식과 감각을 초월해서 믿음으로 어린아이가 살아날 것을 믿고서 남편하고 결사적으로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병원에서 어린아이가 죽었으니 빨리 수술해서 죽은 태아를 끄집어 내야 된다고 하는데 그 현실적인 지식을 초월해서 하나님은 죽은자를 살리기 때문에 우리 믿음으로 결투하자. 그래서 남편과 결사적으로 기도하고 또 셀원들 부탁해서 함께 기도를 했습니다. 수술 하루전날 성도님 집에 셀식구들이 모여서 간절히 기도드리고 합심으로 부르짖은 후에 수술하는날 이제 병원에 가서 수술받기 위해서 의사가 초음파 검진을 해보았는데 뱃속에 애를 살펴보니까 애가 살아 났어요. 아이의 심장도 박동소리가 힘차게 들리고 의사도 성도님도 입을 딱벌리고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3일 뒤 주일설교후에 제가 아픈데 손을 얹고 기도하라고 하시자 둘이서 배에 손을 대고 아멘 아멘하면 눈물로 기도했는데 어린아이의 유산으로 고통받고 있는 자매님이 오늘 완전히 고침을 받고 건강한 아이를 출산할 것이라고 예언을 해주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시작해서 몸은 건강하고 어린아이는 뱃속에서 잘 자라고 있어요.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만일 믿음이 없었더라면 수술을 해버릴 것을 그런데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부부간에 결사적으로 지식과 감각을 초월해서 믿음으로 부르짖었기 때문에 그 어린아이가 적출되지 않고 생명을 얻게 되고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될 것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와같이 여러분 지식과 믿음의 투쟁에서 믿음 편을 택하고 믿음에 굳세게 섰던 것입니다.
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신실함 즉, 약속에 대한 의심과 믿음의 전쟁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것 과연 이루어 주실까? 하나님은 안이루어주시겠지. 그런 의심이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4장 20절에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 을 돌리며"라고 했는데 기도의 응답이 늦어지고 역풍이 불어올 때 느끼는 번뇌가 과연 하나님께서 살아계실까? 과연 나의 기도를 들어주실까 하는 마음의 문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도 그런 마음의 번뇌를 많이 가졌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어린아이를 주신다고 했는데 과연 주실까? 그래서 한때 시험에 들어서 하갈을 취해서 이스마엘을 낳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그가 잘못한 것을 알고 회개하고 끝까지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믿었습니다. 약속하시고 미쁘시는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 하나님의 인생이 아니신지라 식언치 아니하시고 인자가 아니신지라 거짓이 없으시로다 어찌 그 말씀을 이루지 아니하시며 그 하신 말씀을 성취하지 아니하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의지했었습니다. 말씀에 의지해서 하나님 거짓이 없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그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의심과 믿음의 전쟁이었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이런 일을 하실 수 있을까? 아브라함은 노년에 자식을 기적적으로 주실 수 있는가에 대한 의심 때문에 하나님을 도우기 위하여 여종 하갈을 취해 아들을 낳기도 했지만은 그는 99세 전능한 하나님이 무엇을 못하겠는가! 내가 1백살이 되고 아내의 나이가 90세가 되어도 인간으로 상상할 수 없는 기적을 행할지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시기 때문에 할 수 있다. 하나님이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 이 투쟁에서 그는 이겼던 것입니다.
로마서 4장 21절에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11절로 12절에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 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능력에 대한 의심을 이길수 가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믿음의 전쟁을 불가불 치뤄야만 한것입니다. 그는 믿음이냐, 감각이냐, 하나님은 거짓말 하나님이냐, 참말 하나님이냐 거기에 대한 마음의 투쟁과 하나님이 과연 할수 있냐 없느냐 거기에 대한 마음의 투쟁에서 그는 언제나 믿음의 편을 택했습니다. 눈에는 아무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소리 안들리고 잡히는 것 없어도 내가 볼때는 인간적으로 안되어도 하나님이 믿음을 택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도응답을 늦게 해주시고 너무 오래 기다리기 때문에 과연 살아계신가? 과연 응답하실까? 그런 하나님의 성실하심에 대한 의심이 생겨날때라도 의심과 싸워서 하나님은 절대로 거짓이 없으시고 성실하시다는 편에 서서 믿었습니다.
그 다음 하나님은 능력이 없어, 이런일은 못해, 안해. 그러한 비난에 대해 끝까지 하나님은 할수 있다. 그 믿음으로 굳세게 서서 또한 믿음으로 이긴 것입니다. 성경에는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자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9절에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해와 그 믿음의 태도와 영적 전쟁을 거울삼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갖도록 우린 노력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의 믿음바 하나님은 죽은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지면 비록 시련과 고난은 많을지라도 종국적으로 하나님은 믿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놀라운 기적의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아브라함은 우리와 성장이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 되었사옵니다.
우리 아버지여 우리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 아브라함처럼 복을 받는 자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브라함은 죽은자를 살리심이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었사옵니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을 수 없는 중에 믿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끝까지 의심하지 않고 영적 전쟁에서
믿음의 편을 택해서 단호하게 이성보다 더 믿음을, 지식보다 더 믿음을,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보다는 믿음을, 하나님의 능력을 못믿는 의심보다 더 믿음을 택하여서
하나님과 동행한 것을 우리가 깨닫게 하옵시고 우리도 그와같은 본을 따라가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