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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의 등대

로마서 조용기 목사............... 조회 수 1969 추천 수 0 2008.10.22 20: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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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롬5:1-5 
설교자 : 조용기 목사 
참고 : 2003년 6월 29일 주일2부설교(여의도순복음교회) 
『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소망의 등대」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뉴잉글랜드 동부연안의 한 작은 어촌이 있었는데 그 동네 남자들이 고기 잡이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오후에 큰 폭풍우가 다가와서 천지가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벼락이 치고 소나기가 쏟아지고 거센 바람이 불었습니다. 저녁때 돌아와야 될 어부들이 한사람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온 어촌의 아낙네들이 모래사장에 모여서 통곡을 하며 울며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우리 남정네들이 돌아오게 해 주시옵소서.” 그런데 한 밤중이 되어도 소식은 없고 폭풍우는 점점 거셌는데 설상가상으로 동리에 불이 났습니다. 남자들이 없는 동리에 불이 나니까 이집에서 저집으로 화염이 충천하여 온 천지가 불기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있는 아낙네들은 땅을 치고 울며 “하나님 우리를 이렇게 버리십니까? 폭풍우를 통해서 남자들은 다 바다에서 죽고 우리가 살고있는 삶의 터전인 집들은 다 불타 버렸으니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밤새도록 통곡을 하고 울며 아침을 맞으니 어느새 폭풍은 가라 앉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고기 잡으러 나갔던 그 남정네들이 배를 타고 항구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항구에서 내려서 기다리는 부인들을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고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었다.”고 고함을 쳤습니다. 폭풍우를 만나고 천지는 어두워져서 갈길 잃어 버리고 망망대해에 표류할 때 그들은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어디로 갈지 알수가 없습니다. 날은 어둡고 방향은 잃었으니 이제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갈길을 보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부르짖는데 마침 해안에서 불기둥 같은 화염충천한 광채가 나타난 것입니다. 바로 동리에 불이난 것입니다. 그 불길을 바라보고 방향을 잡고 결사적으로 항해를 계속해서 그들은 무사히 항구에 도착하게 된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이 붙어 동리가 다 불탄 것이 엄청난 손실인줄 알고 절망하고 좌절했지만 하나님은 동리에 불을 나게 하셔서 그 불기둥을 통해서 소망의 등대를 삼아 난파당한 어선들이 돌아올 수 있게 비춰준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우리는 항상 우리의 마음속에 소망의 등대를 바라보고 살아야 하겠는데 소망의 등대를 가리는 비바람, 안개구름이 언제나 우리의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1. 소망을 가리는 비바람과 안개구름
첫째로, 소망을 가리는 비바람과 안개구름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아 보아야 되겠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늘 일어나는 크고 작은 미움이 우리의 소망을 가리는 안개구름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미움이 들어오면 격랑이 일어나고 이성을 잃어 버리고 절망의 물보라가 마음을 때립니다.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갈곳을 알지 못하나니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함이라”고 요한일서 2장 11절에 말을 하고 있습니다. 미워하면 마음에 어두움이 들어오고 눈이 멀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방울뱀은 코너에 몰려서 그 마음속에 미움이 꽉들어 차면 자기 몸을 물어 뜯습니다. 미워하면 상대방에게 고통을 가하기 전에 자기의 마음을 물어 뜯게 되고 자기의 삶을 물어 뜯게 되는 것입니다. 미워하는 것은 상대보다도 자기에게 큰 손해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얼마전 신문에 보니까 5월 26일 새벽에 남편이 가정을 돌보지 않는다고 부인이 집에 불을 질러서 14살난 딸을 불에 타 숨지게 했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결국 미움이 살인을 한 것입니다. 미움이란 것은 소망을 가리는 비바람과 안개구름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마음속에는 분노의 바람이 소망을 없애 버립니다. 여러분 분노는 파괴적이고 종말적인 감정입니다. 잠언서 15장 18절에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킨다고 말했고 분노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분을 내면 파괴적이고, 종말적인 감정이 일어나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히틀러가 전쟁에 망한 근본 이유는 그의 분노 때문이었습니다. 독일의 히틀러는 머리가 명석하고 관찰력이 깊고 예리한 판단력과 비상한 통치력을 갖고 있었지만 어찌나 화를 잘내는지 자기의 비위를 조금만 거슬려도 미움과 분노가 충천하므로 그의 부하들은 사실을 제대로 보고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영국과 프랑스등 자유진영과 힘겨운 전쟁을 하면서도 일시적인 분노로 말미암아 주력부대를 빼돌려 소련을 침공하였는데 바로 그것이 그의 일생일대의 돌이킬수 없는 실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부관은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을 감행하였을 때 소련쪽으로 향하던 기갑사단만 그쪽으로 돌린다며 상륙을 저지할 수 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낮잠이 든 히틀러를 겁이 나서 깨우지를 못했습니다. 깨웠다가는 벼락이 떨어질테니까. 항상 히틀러는 사소한 일에도 분노를 폭발시켰습니다. 히틀러가 한참 잠을자고 일어 났을때 이미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완전히 상륙하여 진지를 구축한 뒤였고 이로 인해 독일은 패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히틀러의 분노가 결국 독일제국을 패망에 이르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불안과 공포는 소망을 빼앗아 갑니다. 불안과 공포가 일어나면 삶의 활력을 빼앗고 암담하게 됩니다. 마음이 불안하고 공포에 눌리는데 무슨 활력이 생깁니까? 그저 암담한 따름인 것입니다.
성경 요한일서 4장 18절에는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두려움에는 형벌이 따른다고 말했습니다. 암을 두려워 하면 암이 형벌로 오고, 가난을 두려워 하면 가난이 형벌로 오고, 전쟁을 두려워 하면 전쟁이 형벌로 다가온 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슬픔. 이것도 소망을 빼앗아 갑니다. 슬픔은 여름 장마비처럼 가슴을 적시며 흘러 내리는 것입니다. 슬픔이 마음에 가득하면 삶을 부정적으로 만들고 희망을 빼앗아 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전도서 2장 23절에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 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슬픔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겉으로 웃으면서도 가슴속에는 슬픔이 그 가슴속에 빗물처럼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슬픔이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 소망을 빼앗아 갑니다. 또한 우리가 어떤일을 당하고 마음에 꺽이고 좌절하지 않습니까? 이 좌절은 삶을 포기하게 만듭니다. 억센 인생의 고난을 당했어도 좌절하지 않고 극복하고 일어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가지는 길밖에 다른길은 없습니다. 누가 좌절에서 일으켜 줄수가 있습니까?
독실한 루터교 신자로서 세계 역사상 교회 음악 작곡가들 가운데 가장 뛰어 났다고 할 수 있는 요한 세바스찬 바하의 생애는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이요, 좌절의 연속이었습니다. 바하는 10살도 되기전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는 결혼한지 13년째 되던해에 죽었고 다시 재혼했습니다. 자녀 한명은 정신박약자였습니다. 그는 노년에 앞을 보지 못해 눈이 어두워졌고 또 뇌출혈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속에서도 그는 계속해서 작곡을 했습니다. 수많은 그의 작품은 영혼을 완전히 사로잡을 만큼 웅장하고 장엄한 찬양과 경배와 감사의 노래들로서 불후의 명작들이 되었습니다. 그가 작곡한 칸타타나 오라토리오의 마지막 부분에는 항상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라는 글자를 적어 넣었습니다. 무시무시한 고통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삶의 희망과 놀라운 영감으로 불후의 명작을 남기게 된것입니다. 좌절은 위 희망을 꺽어 버릴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좌절속에 하나님을 바라고 희망의 불길을 태우면 그 좌절이 오히려 위대하고 상상할 수 없는 깊이 있는 인생을 살수 있도록 만들어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죄악의 파도가 처오고 세속의 홍수가 넘쳐오고 질병과 생활고가 다가오면 소망은 어두워지고 마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15절로 17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 소망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죄악과 세속의 홍수와 질병과 생활고속에 발버둥치고 그곳에 무엇을 얻었다 하나 모두다 물거품에 불과한 것입니다. 안개 구름같이 지나가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 우리는 소망을 이룰수가 있습니다.
또한 불안한 정치, 국제 정세, 사회적인 갈등등이 삶의 소망을 어둡게 합니다. 전쟁이 일어나고, 테러가 일어나고, 종교적인 갈등이 있고, 장기적인 경기침체와 환경의 파괴 등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소망을 잃어 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주한 외국인의 63.3%가 한국 정부는 부패했다고 최근에 응답을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문을 펼쳐보면 늘 매일같이 유괴, 납치, 살인, 폭행, 사회 전반이 불안심리가 꽉들어차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소망을 어둡게 만듭니다. 우리의 마음을 절망의 안개구름으로 덮어 놓습니다. 소망이 깨어짐은 삶을 포기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유명한 소설가였던 미국의 소설가 헤밍웨이는 20세기 대표적인 작가중의 하나로 경건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의사로써 평생동안 선교의 꿈을 버리지 않았던 분이고 어머니는 신앙심이 깊어 그를 믿음으로 키우려고 애를 썼습니다만 그러나 헤밍웨이는 성장하여 신앙에서 벗어 났으며 급기야 하나님없이 마음대로 살다가 자살로 끝났습니다. 그는 ‘무기야 잘있거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등 불후의 명작을 썼으며 ‘노인과 바다’라는 작품으로 1954년도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명예와 인기도 있었으나 삶은 결코 평탄치 않아 세 번이나 결혼에 실패하고 네 번째 결혼을 했으며 아프리카 여행중 두 번이나 비행기 추락사고로 부상해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는 재치있고 쾌활한 반면 성미가 급하고 호탕하고 이기적이고 개방적이고 쾌락적이며 술을 많이 마시고 복잡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성공에도 불구하고 항상 불안과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정신병원에서 전기쇼크치료까지 두 번 받았으나 1961년 옆총으로 머리를 쏘아 자살을 했습니다. 생의 마지막 무렵에 남긴 글에 보면 ‘나는 전지약이 다 떨어지고 코드를 꽂으려 해도 꽂을 전원이 없어서 불이 들어오지 않는 라디오의 진공관처럼 외로움의 공허함속에 살고 있다. 나는 필라멘트가 끊어진 텅빈 전구처럼 공허하다.’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 부귀와 영화와 공명과 쾌락을 다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마음은 공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세상에 부귀, 영화, 공명, 쾌락은 바닷물과 같습니다. 목이 마른 사람이 출렁이는 바닷물이 많아서 마시면 시원할 것 같으나 바닷물을 마시면 마실수록 소금기가 목에 붙어 더 목이 타서 나중에는 바닷물을 마셔서 배가 터져 죽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결코 우리의 갈증을 채워 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소망을 채워주지 못해요.
세상을 추구한 모든 사람들의 종국은 좌절과 절망과 자살인 것입니다. 마음에 허무와 무의미를 채울수가 없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과연 내게 관심이 있으신가?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절망속에 부르짖는 외침은 ‘하나님 과연 나에게 관심이 계신가요? 나는 이렇게 삶이 절망적인데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은 어디 계시옵나이까? 내게 관심이 있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외칩니다.
고린도후서 1장 8절로 9절에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바울이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은 형언할 수가 없었습니다. 에베소에서 그는 잡혀서 원형 운동장에서 수많은 사람 보는 가운데서 생사를 걸고 짐승과 격투를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또 에베소에서 은장색 데미트리오가 일어나서 폭동을 일으켜서 바울을 처치하려고 해서 그 고난중에 겨우 목숨을 건졌습니다. 여러번 파선을 경험하고 중병이 걸리고 또 육체의 가시등이 있어서 극도로 절망한 상태에서 하루하루를 그는 하나님께 의지하고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 같았으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승리를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경건하고 신령한 생활을 한다고 해서 고난이 안다가 오는 것은 아닙니다. 경건하고 신령한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도 고난이 다가오지만은 고난중에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므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고난을 밥으로 삼고 극복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고난에 짓밟혀서 파멸하고 말지만은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은 고난을 이길수 있는 힘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크게 복받은 사람이나 그의 인생노정을 보면은 평탄한 노정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음과 함께 항상 고난은 그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75세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고향 산천을 떠나 아내와 롯을 데리고 가나안을 향해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순종하고 고향을 떠나 가나안에 왔으나 가나안에 오니까 처참한 기근입니다. 마실물이 없습니다. 산천초목이 다 불탑니다. 살아갈수가 없습니다. 같이 따라온 종들과 친척들은 다 뿔뿔이 헤어져서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할수없이 그 아내와 조카 롯을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애굽 바로에게 그 아름다운 아내를 빼앗긴 수치와 모욕을 당했습니다. 얼마나 중첩된 고난입니까? 기근에다가 또한 애굽에 내려가서 자기 아내조차 빼앗겼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조상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복주고 복주며 번창케 하고 번창케 함이라고 약속을 받은 사람이 이러한 험한 가시밭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바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과 금을 많이 주었으며 많은 짐승과 노비를 받아서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터전을 잡고서 살기 시작했는데 얼마있지 아니하여 골육상쟁이 났습니다. 조카와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의 짐승떼가 많아지고 조카의 짐승떼가 많아지니까 그 땅에 목초지가 많지 않고 우물이 많지 아니하므로 물을 가지고 아브라함의 목동과 조카 롯의 목동이 싸우고 그리고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싸우게 되었습니다. 골육상쟁입니다. 말할수 없는 고통입니다. 안믿는 주위의 수많은 사람 앞에서 아브라함의 가족들이 싸운다운 소문이 팽배하게 났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조카를 불렀습니다. “조카야! 우리는 골육인데 서로 이렇게 싸워서는 안되고 이방인들에게 얼마나 나쁜 인상을 주느냐? 그러므로 우리 헤어지자. 네가 동으로 하면 내가 서로 하고 네가 저 앞으로 나가면 내가 뒤로 나갈 테니까 그렇게 하자.” 아브라함은 아마 기대했을 것입니다. ‘내가 그래도 삼촌이고 그는 조카인데 “아이고 삼촌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삼촌이 먼저 택하십시오. 그러면 내가 택하지요.”’ 그게 인생의 도리 아닙니까? 그런데 조카는 고개 딱들고서 “예~ 내가 먼저 택하지요.” 저 요단뜰에 물이 흐르고 목초지가 좋은데 나 저리 가겠습니다.“ 아마 삼촌 아브라함이 ”이 고약하고 괴씸한 놈. 그래 아제비(?)가 먼저 택해야지 지가 먼저 택하냐?“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조카는 무례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조카가 먼저 택하고 아브라함은 풀도 많지 않고 물도 없는 그러한 황막한 사막과 같은 곳에 남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복이 있으므로 그 가운데서도 번창하고 잘 되었습니다만 나중에 조카 롯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일시적으로는 번창하고 부자가 되어 잘 따랐으나 외국의 침략을 받아서 재산 다 뺏앗기고 포로로 잡혀 갔다가 아브라함에 의해서 겨우 구출되고 그 다음에는 소돔과 고모라에 하나님의 심판할 때 사위들 다 죽고 아내는 소금기둥이 되고 딸과 함께 도망을 쳐서 집도 없는 산에 토굴을 파고 들어 앉아 살 수밖에 없게 된것입니다.
인생에 무례하게 행하는 사람은 끝이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손해를 보더라도 공의롭게 사는 사람은 끝이 좋습니다. 조카 롯은 토굴로 들어갔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복을 받아 승승장구하고 창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85세 그는 아들이 없어서 그 아내 사라의 권고를 통해서 여종 하갈을 첩으로 받아 들여서 이스마엘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결과로 가정에 큰 풍파가 일어났습니다. 사라하고 이스마엘을 낳은 하갈하고의 싸움속에 아브라함은 그 사이에 끼어서 아예 정신을 차릴수 없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결국에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어 쫓는 비극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결단코 그는 개인 생활에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100살이 되어서 사라를 통하여 아들 이삭을 낳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이삭을 모리아산에 재물로 바치라고 그랬습니다. 자기의 100살에 낳은 아들을 각을 떠서 장작불로 태워서 재물로 드리라고 하니 여러분 그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갈갈이 찢어지는 마음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그 아들을 데리고 사흘길을 가서 모리아 산에 올라가서 장작불을 피워 놓고 아들을 잡으려고 목을 밣고 칼을 들었을 때 하늘에서 천사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아들 이삭에게 칼대지 말아라. 네가 이렇게 내게 순종하였으므로 나를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너에게 복주고 복주며 번창케하고 번창케 하리라”고 했는데 종국적으로 보십시오. 오늘날 이스라엘이 바로 그 촌부 아브라함의 씨에서 나온 한 민족이 된것입니다.
반드시 여러분 우리가 믿고 하나님을 따라 가므로 모든 일이 평탄하고 복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이라는 것은 춘하추동과 같고 변화무쌍한 기상과 같습니다. 봄이 왔는가 하면 봄을 잡아 놓을수 없어. 여름이 되고. 여름을 붙잡아 놓고자 해도 언간 가을이 오고 가을에 매달리고 있어도 언간 또 겨울이 오고 눈이 내립니다. 어떻게 똑같은 것을 사람이 취할수 있습니까? 하루에도 기상이 변합니다. 아침에 날이 맑더니 낮에는 구름이 끼고 오후에는 소낙비가 쏟아지고 우울합니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기상을 어떻게 합니까? 우리 인생은 살아갈 동안에 내 운명을 내가 좌우할 수가 없습니다. 내게 다가오는 희노애락과 시련과 고통과 괴로움과 즐거움을 내가 어떻게 좌우할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다가오는 운명은 마치 춘하추동과 같고 기상의 변화 같아 우리의 힘으로 변화시킬수가 없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14절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잠언서 27장 1절에는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24절로 25절에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인생 매사는 인간의 힘으로 할수 없기 때문에 인간이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을 기대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에는 우리가 의지할 수 없습니다. 변화무쌍한 환경을 바라고 웃고, 울고, 발버둥을 치면 나중에 파탄에 이르고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운명과 환경은 내가 변화시킬수 없지만은 그 가운데 내 마음의 자세와 태도는 내가 붙잡을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을 어떻게 붙잡을까요? 내 마음 나도 못붙잡습니다. 내 마음을 붙잡을 자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께 의지하는 길밖에는 소망의 처소가 아무데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옛날 중국 북방 국경 근처에 한 노인이 살았습니다. 하루는 노인이 기르는 말이 오랑캐 땅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와서 위로하고 동정하자 노인은 “이것이 또 무슨 복이 될른지 누가 아오?” 그렇게 말했습니다. 몇 달후에 뜻밖에도 도망간 암말이 오랑캐족의 좋은 숫말 한필을 데리고 돌아오자 사람들이 와서 축하를 했습니다. 노인은 그 축하를 듣고 “그것이 또 무슨 화가 될는지 누가 아오?” 그런데 그집 아들이 좋은 말이 생기자 타고 달리다가 그만 말에서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져서 장애자가 되고 말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와서 위로하자 노인은 태연한 표정으로 또 대답했습니다. “그것이 혹시 복이 될지 누가 아오?” 그런지 1년후 오랑캐들이 쳐들어와 이 마을 장정들이 모두 전쟁터에 나가서 전쟁에 이겼지만 거의 전사했는데 노인 아들만 다리를 다쳐서 전쟁에 나가지 못했기 때문에 무사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당신 아들이 장애가 되었으니 얼마나 고맙고 전쟁 안나가서 살았으니 얼마나 좋소이까?” 그러니까 “또 장차 어떻게 될지 누가 아오?” 그 이야기는 새옹지마라고 합니다. 여러분 전도서 7장 14절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형통한 날도 다가오고 곤고한 날도 다가온다. 항상 형통하지 않고 항상 곤고하지 않고 날이 맑았는가 하면 먹장 구름이 끼고 비 오는날이요, 캄캄한 밤인가 하면 아침도 다가오고, 험한 길인가 하면 평탄한 길도 다가오고 인생이란 형통과 곤고가 서로 섞여서 다가오니 우리가 그것을 감당할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 가운데서 환경을 따라 울고 웃다가는 좌절과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도서 3장 1절로 8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 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이렇게 인생이 긍정과 부정, 축복과 고난, 슬픔과 기쁨이 뒤범벅이 되어서 다가옵니다. 여러분 가정에 부부싸움이 나서 온 가정이 날라갈 것 같은때 어떻게 합니까? 싸움할때가 있으면 또 사랑할때도 다가 오느니라. 가정에 염려 근심이 생겨서 이젠 파멸 되었다고 생각할 때 폭풍우가 불어 오지만 또 잠잠한 날도 오느니라. 부부간에 죽기 아니면 살기로 미워해서 이제는 헤어지자고 하는 캄캄한 밤이 다가올때는 기다리면 또 아침도 오느니라. 인생이란 여러분 우리가 삶의 한가운데서 마음에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끝까지 꿈과 소망을 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그 길 밖에는 살아갈 길이 없습니다. 환경에 따라서 울고 웃으면 끝이 없는 소용돌이 속에 우리는 빠져들고 마는 것입니다.

3. 소망을 등대를 늘 바라보라
그럼 셋째로,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소망의 등대를 바라보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환경과 운명의 변화를 따라 울고 웃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파멸되고 마는 것입니다. 소망의 등대를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탄 호화로운 요트가 바다를 항해하고 그래서 영국의 해안을 향해서 캄캄한 밤에 돌아 오는데 저 앞에 환한 불빛이 비취거든. 그래서 여왕이 탄 요트이기 때문에 그 권위가 대단하지 않습니까? 선장이 말했습니다. “그 앞에 누구냐? 불을 켜고 오는 배는 항로를 비켜라.” 그러니까 그 등대에서 대답이 왔습니다. “우리는 항로를 비킬수 없으니 너희가 비켜라.” 그다음 여왕을 태운 요트의 선장이 말했습니다. “이놈아! 무슨 말을 하는거냐? 우리배는 영국 여왕이 탄 요트다. 대형제국의 여왕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항로를 비켜라” 그런데 그 불빛에서 방송이 왔습니다. “우리는 수백년 전부터 이 자리에 서있는 영국의 해안등대다. 여왕이 탄 요트라도 우리를 향해서 들어와서 부딪히면 산산 조각이 난다.” 그러자 선장은 불이나케 요트를 돌려서 항로를 바꿨습니다. 등대를 잃어 버리면 어떤 배도 침몰합니다. 등대를 빛을 보고 나가야지 등대를 비키라고 하면 안됩니다.
빅토 프랭크 박사는 그가 쓴 ‘의미를 찾는 인간의 탐색’이라는 책에 나치하에 6백만 유대인이 포로 수용소에서 죽어갈 때 독일의 죄악상과 유대인 생존자를 연구한 결론에 ‘마음에 희망을 포기한 사람은 심신이 최악이다. 끝까지 소망을 잃지 않는 사람은 살아 남았다. 나아가 절망하는 동료들에게 소망을 갖도록 격려하던 사람은 모진 고문에도 몸과 마음이 건강하여 생존해 나왔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소망을 잃으면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아도 그 마음은 죽어가는 것입니다. 소망이 있으면 아무리 환경이 고통스럽고 괴롭고 슬퍼도 살아 남습니다. 이겨 나갈수가 있어요.
디모데전서 1장 1절은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등대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등대는 십자가의 등대, 십자가 위에 우리 위해서 몸찢고 피흘리고 달리신 예수 만이 우리의 소망이 되시는 것입니다. 나와 같은 인간이 되어 오셔서 나와 같은 인생, 고난, 역정을 다 겪었습니다. 배고프기도 하고, 춥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집없이 떠돌아 다니기도 하고, 풍찬노숙을 하고, 칭찬도 받았는가 하면 욕도 얻어 먹고, 사랑도 받았냐면 미움도 받고... 그런 모든 인생고를 다 겪고 나중에는 처참하게 발가벗고 십자가에 못박혀 몸을 찢고 피를 흘리고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원한 소망의 등대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쳐다 봅니다. 우리가 찢기고 좌절되고 피곤하고 절망에 처하고 누더기 같은 인생이 되어도 우리 소망의 등대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될 때 예수님 안에서 용서와 의와 영광의 빛이 비춰 옵니다. 예수님께로부터 거룩함과 성령충만의 놀라운 은총의 등대불이 비춰 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치료와 건강의 등대불이 비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형통과 축복의 등대불이 비춰 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활과 영생과 천국의 소망의 등불이 비춰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처다 봄으로 말미암아 캄캄한 어두운 세상에서 우리는 찬란한 소망의 등불을 얻을수가 있습니다. 삶에 방향을 잡을수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버림을 당한다 해도 환경에 배반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동남풍이 불고 서북풍이 분다 할지라도 소망의 등대를 우리가 힘차게 바라볼 때 그곳에 힘없이 매달려 찢어져 죽으신 그 예수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그 예수님이 우리에게 소망의 빛을 비춰 주는 것입니다. 용서받고 의로움을 얻으라. 거룩함 받고 성령을 받으라. 치료받고 건강을 얻으라. 축복을 받고 형통을 받으라. 부활을 얻고 영생천국에 들어오너라. 내가 너를 바로 구출하는 소망의 손길이요 등불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얻어진 새로운 신분을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함 받은 사람이다. 수많은 사람중에 하나님이 좋아 하셔서 나를 택해 주셨다. 내가 자격도 없는데 나같은 비참한 인생을 왜 택했는지 모르겠다. 하나님께서 원하셔서 그 주권으로서 나를 택하여 주신다는 택하신 족속이요. 주님이 나를 왕이요, 제사장으로 삼아 주셨고,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거하시면서 나를 다스려 주시고 나를 그 소유된 백성으로 삼아 주신다. 온 세상 사람 가운데 나를 소유된 백성을 삼아 주신다. 그 가운데 우리는 울면서라도 소망에 영광이 가슴을 울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린도후서 4장 7절로 9절에 말씀대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왜냐하면 소망의 등대를 가슴에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외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삶에 회의를 느끼고 버림받은 심정, 고독감, 좌절감, 절망을 느낄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나만 그렇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너도 그렇고 저도 그렇습니다. 겉으로는 울고 있지만 속으로는 다 눈물이 그 가슴을 적시고 있습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아담이 오늘까지 인생을 살아온 모든 사람들은 이같은 삶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예외 없습니다. 이 세상에 부귀, 영화, 공명이 크면 클수록 마음에 갈증은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한무제가 배를 양자강에 띄우고 밤새도록 노래를 듣고 무희들의 춤을 보고 술을 마시고 난 다음 아침에 안개가 뿌옇할 때 나룻터에 배를 대면서 그가 한말이 있습니다. ‘희락극해요 애정다로다’ 너무나 기쁨을 극하게 느끼고 난 다음에 다가오는 슬픔은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부귀, 영화, 공명은 일시적인 아편과 같아서 환상 가운데 기쁜 것 같지만 기쁨이 있은 그 다음에는 그보다 더 깊은 나락의 슬픔이 가슴속에 파헤쳐 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은 헛되고 헛되며 또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는 솔로몬의 탄식과 같이 세상은 소망 없습니다. 그러나 이럴때마다 우리가 항상 바라보아야 될 것은 우리의 소망의 등대인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환난중에도 즐거워 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줄 앎이라. 소망이 부끄럽지 아니하면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인바 됨이니라. 십자가를 바라보고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를 소망의 등불로 받아 들이면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우리 마음속에 부으셔서 우리에게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 위로를 주심으로 말미암아 울면서 웃을수 있고 넘어지면서 일어날 수 있고 상처 입으면서 치료 받을수 있고 패배하면서 극복하여 천당길을 향해 걸어갈 수가 있습니다.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
이 세상엔 소망이 없습니다. 소망이 있는줄 알고 붙잡아 보면 물거품입니다.
얻었다고 하면 꿈에서 깬것같이 사라집니다.
이 세상 소망은 구름같고 부귀와 영화도 한 꿈에 불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상처를 입고 장마비 창문에 흘러 내리듯
가슴에 슬픔의 눈물이 흘러 내리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의 소망은 우리처럼 와서 고통당하고, 탄식하고,
외로움도 당하고, 배반도 당하고, 십자가에 몸찢고 피흘려 죽으신 예수님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 이외 우리를 끝까지 붙잡아 주시고, 이해하고, 동정하고,
사랑하고 함께 삶을 나눌자가 우주에 어디 있겠습니까?
이 예수님의 소망의 등대를 바라보고
그 불빛을 마음에 받아서 우리는 어두운 가운데서
빛을 찾아 나가는 인생들이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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