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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갈등, 나의 갈등

로마서 조용기 목사............... 조회 수 1811 추천 수 0 2008.10.22 20: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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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롬7:24-8:2 
설교자 : 조용기 목사 
참고 : 2003년 7월 20일 주일2부설교(여의도순복음교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의 갈등, 나의 갈등」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우리의 삶은 모순과 갈등의 연속이며 매일매일 모순과 갈등속에 괴로워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 체험은 평범한 성도의 생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탁월한 바울 사도조차 그 생활중에 느끼고 괴로워 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리오.” 의롭게 살려고 하는데 죄가 있고, 거룩하게 살려고 하는데 세속의 유혹이 있고, 건강하게 살려고 하는데 병들고, 잘 살고자 하는데 가난과 실패가 있고, 사랑하며 살고자 하는데 미움이 있고, 천국 갈려고 하는데 지옥이 입을 벌리고 있습니다. 이 모든 갈등속에 우리는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누가 이 고통에서 건져 주실수 있습니까? 오직 모순과 갈등은 용서와 화해와 사랑과 감사만이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심판과 용서의 갈등
첫째로, 율법의 심판과 자비의 용서는 하나님의 갈등이요, 우리의 갈등인 것입니다. 여러분 율법의 실천은 심판입니다. 죄를 지은 영혼은 죽으리라. 율법은 죄지은 사람에게 심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비의 실천은 용서입니다. 자비는 죄를 지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사 용서해 주는 것이 자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한번은 성전에서 말씀을 증거하고 있는데 이른 아침에 수많은 사람이 웅성 거리고 모였는데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이 길을 비키자 많은 젊은이들이 한 여인을 끌고 예수님 앞에 와서 내동댕이 쳤습니다. 머리는 산발이 되고 눈은 충혈이 되고 옷은 흐트러지고 신발은 벗었습니다. 그 청년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말했습니다.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 잡혔으니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여자는 돌로써 쳐죽이라고 했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에 예수님서는 아무말도 안하시고 엎드려서 손으로 글을 적었습니다. 무얼 적었다고 말씀은 안하지만 주님이 분명히 십계명을 적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 다음 계속해서 선생은 어떻게 하겠느냐고 하기에 예수님이 일어나서 나이 많이 먹은 사람부터 젊은이까지 쫘~악 살펴 보시고 난 다음에 “너희들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그런다음 엎드려서 주님이 손가락으로 또 기록하는데 손가락을 따라가 보니 그들의 죄가 백일천하에 드러났습니다. 모든 사람의 위선과 감추인 죄가 예수님의 손가락끝에 다 드러나니까 큰자로부터 적은 자까지 손에 손에 쥐고 있던 돌맹이와 몽둥이를 다 버려놓고 슬며시 빠져 도망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한참만에 예수님이 고개를 들어보니 그곳에 있는 돌맹이, 지팡이만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고 아무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여자보고 말했습니다. “여자여 고개를 들라! 너를 정죄하는 자가 있느냐?” 여자가 공포에 떨면서 좌우로 살펴보니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기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여기에서 예수님은 율법의 심판과 자비의 용서를 기묘하게 조화시켰습니다. 율법도 주님이 이루시고 자비도 주님이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용서의 모순과 갈등을 해결하신 분이 예수님인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의 속죄제와 속건제는 바로 이런 것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모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심판을 받아야 됩니다. 그런데 심판을 받으면 다 죽을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할까요? 그러므로 심판도 받고 하나님이 용서도 주기 위해서는 짐승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속죄제물은 죄지은때 하나님께 나와서 죄지은 사람이 거기에 안수하고 그 보는 앞에서 그 짐승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니까. 그 짐승이 죽임을 당하고 그 비명을 부르짖고 버둥대며 죽는 것을 눈앞에 보고 그곳에서 죄는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 된다는 것을 느낄수 있습니다. 그 흘린피가 또 용서와 자비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범죄한 죄를 사함받기 위해서는 속죄제의 대가로 희생제물을 반드시 드려야 됐습니다. 죽음이 있고 난 다음에 용서가 있었습니다. 속건제물은 하나님의 성물이나 이웃의 권리나 재산침해때 범과를 사함받기 위해서 제사와 아울러 손해배상을 더해서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의 법이 있으면 법도 만족하고 자비를 통한 용서도 만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물이 드려지고 재물이 죽어야 됩니다. 피흘림이 없은즉 죄사함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 우리의 삶에 있어서 율법의 심판과 하나님의 자비의 용서 이 모순되고 갈등된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예수님의 십자가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긍휼히 조화되는 곳. 법을 세우자하니 자비가 울고, 자비를 세우자니 법이 웁니다. 이 모순과 갈등을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으로 해결했습니다. 법을 세우지 않으면 다 심판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자비가 없어집니다. 자비를 세우자니 법을 지킬수가 없습니다. 법이 웁니다. 이 갈등이 얼마나 심합니까? 법도 세워야 되고 자비의 긍휼도 베풀어야 되고 이 상극되고 모순된 갈등을 조화시킬수 있는 길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하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심판하면 살아 남을 사람이 한사람도 없어요. 그러므로 심판받을 우리들을 대신해서 주님이 심판을 받아 몸찢고 피흘려 처참하게 고난 당하여 죽고 그 죽으심을 통한 보혈을 통하여 용서와 자비를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율법과 계명을 범한 우리를 대신하여 심판받으시고 그 보혈로 자비와 용서를 들이시니 은혜가 없이는 우리가 결코 살아 남을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은혜는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기에서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갈등을 해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의로운 하나님이기 때문에 죄를 지은 우리에게 심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시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자비와 용서도 베풀어야 됩니다. 이 갈등을 보십시오.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합니까?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님을 사람으로 보내셔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무지무지한 심판을 받게 하시고 그 죽으심을 통하여 흘린피로 또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와 자비를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속의 율법의 심판에 대한 고민과 용서와 자비를 구하는 소원의 모순과 갈등을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다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옛날 어떤 나라에 한 공의로운 임금이 있었습니다. 이 임금은 법에 따라 아주 공정하게 심판했기 때문에 온 국민들이 두려워하고 존경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연로한 어머니가 계셨는데 그는 어머니를 끔찍이 사랑하는 효자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임금님의 어머니가 큰 죄를 범한 것입니다. 임금님은 큰 고민에 빠졌습니다. 재판날이 다가올수록 백성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임금이 죄지은 어머니에 대해서 어떻게 판결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백성들은 둘로 나뉘었습니다. 한패는 임금이 법대로 어머니를 심판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정의로운 임금이라고 해서 자기 어머니를 예외 시키지는 아니할 것이다.” 또 한패는 “효자인 임금님이 사랑하는 어머니를 절대로 심판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드디어 재판날이 왔습니다. 임금님은 높은 보좌에 앉고 죄수인 어머니는 결박을 당한채 끌려와 무릎을 꿇었습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며 재판과정을 지켜 보았습니다. 드디어 임금의 입에서 단호한 판결이 내렸습니다. “저 죄인에게 굵은 몽둥이로 곤장 40대를 때려라.” 한쪽에서는 “와~”하는 함성이 들렸습니다. “역시 우리 임금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비난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무리 공의롭다고 해도 자기 어머니를 곤장으로 치라고 할수 있느냐? 저 노인을 곤장 40대 때리면 죽지 않느냐?” 판결을 집행하기 전에 건장한 청년 둘이 몽둥이를 하나씩 들고 섰습니다. 그들이 어머니를 치려는 순간 임금이 외쳤습니다. “잠깐만 기다려라” 그는 그의 왕관과 왕복을 벗어 놓더니만 계단을 내려와서 어머니 등뒤에 감싸 안았습니다. 그리고 “처라. 40대를 처라” 어머니를 치자니까 임금님이 어머니 대신 40대를 얻어 맞아 온 몸이 상처 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매는 어머니를 때렸으나 어머니를 감싸고 있는 아들 임금이 얻어 맞고 공의도 세우고 자비도 이룬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죄인인 우리를 심판하실 수밖에 없지만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므로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우리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심판받는 우리를 끌어 안고 십자가에 올라가서 못박힌 것은 예수님이 못박히고 품에 안긴 우리는 공자로 의도 이루고 용서도 받게 된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과 용서의 모순을 십자가 상에서 해결하시고 하나님의 정의와 긍휼의 조화를 기막히게 이룬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는 어떤 종교도 철학도 도덕도 수양도 공의를 세우고 용서를 세울수 있는 역사를 베풀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만이 하나님이 공의도 세우고 그리고 용서와 사랑도 세울수 있기 때문에 천하만국에 어떤 종교가 있어도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구원의 길은 없는 것입니다.


2. 반역과 화해의 갈등
둘째로, 괘씸죄와 화해의 모순과 갈등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돌아섰으니 하나님이 괘씸하지 않습니까? 너무나 하나님이 사랑하고 잘해주고 돌보아 주셨는데 하나님을 배반한 인생들. 아담, 하와만 그런 것 아닙니다. 여러분과 나도 하나님을 얼마나 수없이 배반하기 때문에 꽤씸하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고 싶지 않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하나님은 화해하기를 원하십니다. 갈등입니다. 괘씸죄와 화해의 모순과 갈등속에 있습니다. 용서와 화해는 달라요. 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느 외아들이 있었는데 가정에 아들과 아버지가 심히 다투었습니다. 아버지가 “이놈아! 아버지 말을 안들으려거든 집에서 나가라!” 아들이 서슴치 않고 나가지요. 보따리를 싸서 나가 버렸습니다. 아버지가 나가라고 해도 속으로는 나가지 말라는 것과 한가지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나가라고 한다고 아들이 보따리 싸고 나가니 그 아버지의 상처가 말로 다할수 없습니다. 또 어머니의 상처도 말로 다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가 밤낮 울며 그 남편에게 사정을 해서 아들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용서해서 집에 돌아와서 아들은 2층에 있고 부모는 아래층에 있는데 그러나 아버지와 화해는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옛날에는 밥상에 아들과 같이 다정하게 이야기 하면서 밥을 먹었는데 밥상에 아들을 청하지 않습니다. 그 어머니가 “여보, 아들 불러서 밥상에 같이 진지 잡수시지요.”“안먹어. 용서해서 집에는 돌아왔지만 나는 그놈하고 대화는 하고 싶지 않다.”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용서는 했는데도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교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가 밤낮으로 또 눈물을 흘리고 남편에게 간구해서 어느 하루 아들이 손을 잡고 내려와서 밥상에서 같이 밥을 먹는 화해가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에도 화목제물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용서는 받았으나 올바른 삶을 못살므로 괘씸하게 여기십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주일날 교회에서 예배 안드리고 산으로 들로 놀러가면 하나님이 “괘씸한 놈!”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십일조 도둑질해서 포켓에 다 집어 넣는 “괘씸한 놈!” 괘씸죄를 지으면 하나님과의 교통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괘씸한 놈이지만은 그러나 하나님은 화목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 갈등속에 있습니다.
구약에도 화목제물이라고 있습니다. 괘씸한 죄를 지으면 벌을 받아야 됩니다. 벌을 받고 난 다음에야 화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도 하나님을 불순종해서 괴심죄를 지은 사람은 화목제물을 가져와야 됩니다. 화목제물을 드려서 그 짐승이 죽고 피를 흘려서 죄를 받고 그리고 난 다음 흘린 피로써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죄로 단절된 하나님과 관계회복을 위한 자원제사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여러분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제물이 되었었습니다. 우리는 이 화목제물이 매일매일 필요합니다. 매일매일 괘씸죄 짓고 있어요. 여러분 매일매일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하나님이 “이 괘씸한 놈, 네가 그럴수 있느냐?” 이런 하나님의 꾸중을 들을 수밖에 없을때가 많습니다. 그러한데 우리가 어떻게 늘 하나님께 교통이 되고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겠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여러분 고린도후서 5장 18절로 21절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과 화목하라. 화목이 값없이 화목이 되는줄 알아요? 괘씸한 일 해놓고 난 다음 그냥 화목합시다. 안됩니다.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됩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죄가를 지불해야 돼요. 공짜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몸찢고 피흘려 우리에게 화목제물이 되셔서 하나님이 괘씸죄가 거기에 다 심판을 내리시고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의 피로써 화목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어떠한 잘못을 저질러도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 보혈을 믿고 나가면 하나님과 화목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5절에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하고 화목한다는 것은 얼마나 좋지요? 하나님이 두려우나 또한 가까이 가고 싶은 우리의 심정이 있잖아요. 우리는 하나님에게 괘씸죄를 짓고 하나님께 나가는 것이 두렵잖아요. 그러나 역시 우리 중심은 하나님과 화목하고 싶지 않아요? 그럴때 그것을 이루시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에베소서 2장 16절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요한1서 2장 2절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한1서 4장 10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항상 화목을 해야 돼요. 괘씸한 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갚아서 벌을 받았습니다. 그 보혈을 통해 이젠 하나님과 늘 화목해야 돼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화목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전에 한 은혜로운 간증을 들은적이 있는데요. 어떤 부형님이 사업차 뉴욕에 갔다가 그곳에서 자기집 고등학교 2학년 아들이 상급생에게 얻어 맞아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급히 귀국을 서둘렀습니다. 그는 비행기 안에서 복수심이 이글이글 타서 이를 갈았습니다. “내가 가면 가만 둘까보냐? 사랑하는 내 아들을 상급생이 학교에서 때려서 죽이다니 내가 이놈에게 기어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리라.” 마음에 분노가 이글이글 타올랐습니다. 그리고 학교 교장으로부터 시작해서 학교 당국자를 가만히 안두고 모조리 고발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듭난 크리스챤이었습니다. 그가 비행기 안에서 탄식하며 기도하는데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모습이 자꾸 떠오르면서 “네 죄로 말미암아 내가 대신 십자가에 몸찢고 피흘려 죽지 않았느냐? 그리고 내가 용서했지. 내가 십자가 안 짊어졌으면 너는 하나님 앞에 심판받아 죽어야 마땅하다. 내가 너 대신 십자가 짊어지고 죽어서 그 보혈로 너를 용서했으니 너도 이번에 십자가를 짊어져라. 너가 죽음의 고통을 당하고 용서를 베풀어 주라.” 이런 주님의 음성이 자꾸 마음에 들려 옵니다. 이 부형님은 “예수님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내 아들의 원수를 용서하려고 해도 내가 안됩니다. 어떻게 할수 있습니까?”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원수를 갚겠다는 복수심이 끌어 올랐습니다. 이렇게 비행기 안에서 15시간 동안 마음속에 수없이 원수를 죽었다가 살렸다가 죽였다가 살렸다가 그는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가 공항에 도착했을때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리라는 결심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고 작정했습니다. 이분이 집에 도착해보니 학교 관계자들이 얼굴을 들지 못하고 쩔쩔매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이미 자기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리라고 굳게 결심한 그는 부드러운 말로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내 아들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나도 처음엔 복수를 다짐했지만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 마음을 강권해서 내가 용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이분은 검사에게 아들을 죽인 피의자를 관대하게 처분해 달라는 탄원서를 보냈습니다. 또 그리고 그는 3천여만원을 들여 아들의 학교에 장학금으로 기탁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번제물이 되었다는 깨달음이 그 부형님으로 하여금 미움과 사랑의 갈등을 해결하게 된 것입니다. 이 부형님이 그 아들을 죽인 원수에 대한 어마어마한 미움과 그리고 또한 용서하고 사랑해야 된다는 의무감과 그 갈등을 어떻게 해결합니까?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끌어 안음으로 해결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속에 원수에 대한 심판도 있고 원수에 대한 용서도 있어서 조화가 이루어지고 갈등이 해결될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십자가 이외에는 괘씸죄와 화해를 가져올수가 없습니다.

3. 미움과 사랑의 갈등
셋째로, 미움과 사랑의 갈등과 모순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반역한 인간을 미워하시나 또한 사랑하십니다. 이런 갈등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을 반역한 인생들을 하나님은 미워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사랑하십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의 갈등, 얼마나 심합니까? 우리도 하나님께 범죄하고 하나님을 두려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또한 사랑하고 싶습니다. 갈등입니다. 미워하나 사랑해야 하는 모순과 갈등은 심합니다. 여러분 르윈스키와 염문을 일으킨 클린턴과 힐러리의 자서전 읽어 보셨습니까? 전세계 이목을 집중시킨 힐러리 여사의 자서전 ‘살아있는 역사’에서 그는 그 자서전을 적어서 미국에 일주만에 60만부의 베스트셀러로 팔려 나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스캔들때 “클린턴을 용서할 수 있느냐? 왜 이혼하지 않느냐?” 질문에 대해 그 당시에는 입을 딱 다물고 있었으나 그 자서전에는 솔직하게 고백했습니다. 법정에 나가기전에 클린턴이 아침에 와서 방안에서 싱글거리면서 “내가 르윈스키와 불미한 관계가 있었다.”고 힐러리에게 고백할 때 힐러리는 그 자리에서 클린턴 대통령의 모가지를 비틀어 버리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분노가 차올라서 “이자식 모가지를 비틀어 버리겠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 남편이고 내 딸의 아버지고 대통령이고 사랑해야만 된다.” 그녀는 그 갈등에서 죽음과 같은 고통을 겪었다고 했던 것입니다. 목을 틀어 버리고 싶은 그 마음에서 또한 사랑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그 무시무시한 갈등. 이 갈등을 어떻게 해결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기 전에는 그 갈등의 문제가 해결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에 번제가 바로 그것인 것입니다. 매일같이 구약에는 번제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 번제는 미움과 사랑의 갈등을 해결하는 제사인 것입니다. 매일같이 사람들이 미운 행동을 하니까 하나님이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해야 돼요. 미움은 심판해야 되고 사랑은 베풀어야 되니까 번제의 제물을 드려서 온전히 각을 뜨고 불로 태워서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므로 하나님의 미움이 그곳에서 다 소진되고 번제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베풀어지는 제물이 바로 번제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사랑받는 하나님의 친구라 했지만 아주 고약하고 미운 행동을 했습니다. 85세 되었을때 하나님이 분명히 그를 하늘에 별들을 헤아리라 하고 네 자손이 하늘의 별같이 많으리라고 약속을 해주었는데 집에 돌아와서 아내 사라가 “여보 나는 나이 늙어 자식을 못 낳으니까 내 여종 하갈에게 들어가서 자식을 얻으시오.” 그러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면 단오하게 “무슨소리! 하나님이 약속을 했는데 당신 나이 75세요 내 나이 85세라도 하나님을 믿고 기다려야지 무슨 그런 소리를 하나?” 그랬더라면 사라가 “와~ 우리 남편 넘버 원이다. 과연 우리 남편이다.” 그렇게 했을 것 아닙니까? 여자는 젊으나 늙으나 질투심은 다같이 있는 것입니다. 할수없이 아들을 못낳으니까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해서 남편에게 한번 마음을 떠보았는데 “내가 아들을 못낳으니까 당신 내 여종 하갈에게 들어가서 아들을 낳으시오.” 아브라함이 그 말을 넙죽 받아서 “그래? 그럼 그렇게 하지.” 그때 이 사라의 마음에 얼마나 실망을 하겠습니까? 하나님도 괘씸하게 여겼습니다. “내가 약속을 주었는데 약속을 믿어야지. 그래 사라가 꼬인다고 해서 그 권고를 받아 들일수가 있느냐?” 언제고 하나님이 미워한 그 행동을 갚아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100세가 되어 아들 이삭을 낳아서 이삭이 19내지 20살이 되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게 아버지에게 귀엽게 놀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사랑하는 외아들 독자를 모리아산에 데려가서 번제로 드려라.”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심판인 것입니다. 번제는 제사장이 드리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직접 각을 떠야 합니다. 자기 손으로 죽여서 각을 떠서 태워야 됩니다. 아브라함은 알았습니다. “올 것 왔구나. 내가 하나님께 미운 행동 했으니 반드시 이 미운 행동을 용서받기 위해서는 번제를 드려야 한다.” 그것도 짐승이 아닌 친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고 했으니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그러나 두말하지 않고 아들을 데리고 사흘길을 걸어가서 모리아산에 올라가서 재단을 쌓고 아들을 묶고 발로 머리를 밟고 경동맥을 칼로써 자르려고 했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천사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내 독자 이삭에게 손대지 말라. 네가 이렇게 순종하므로 비로소 내가 너가 나를 완전히 사랑한줄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보니까 거기에 염소 한 마리가 칡넝쿨에 걸려 있는지라 그를 잡아다가 대신 번제를 드린 것입니다.
여러분 미운행동을 대가를 지불해야 됩니다. 대가없이 하나님께서 무조건 용서하시는 법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의 잘못 행위에 대해서는 대가를 지불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불 못하니까 구약시대에는 번제를 드렸고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번제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향하여 분노하시나 사랑하시는 모순과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번제물이 되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미움을 다 소진시켜 버리고 그를 통하여 미움은 사라지고 사랑을 베풀어주는 조화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 이외에는 우리는 절대로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값싼 은혜란 없습니다. 대가를 주님이 대신 지불해 주었기 때문에 공짜이지 값싼 은혜는 없습니다. 비싼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 우리를 대신해서 번제가 되어서 우리의 미운 행동을 다 매맞아 고통 당하므로 죽음으로 청산하시고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미운삶을 청산하고 순종과 사랑의 삶을 얻은 우리들은 정말 하나님께 감사해야 돼요. 미국의 문필가 마크 투웨이는 말하기를 “용서는 자기를 짓밟는 발꿈치를 향수로 발라주는 풀꽃의 향기와 같다.” 이렇게 용서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용서는 가장 고귀한 신앙인격을 가지고 있어야만 충심으로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해 줄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용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것입니다.
어느 젊은 부부가 귀여운 첫딸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았는데 갑자기 그 아이가 죽고 말았습니다. 어린 아이를 땅에 묻고 돌아온 부부는 슬픔에 벗어나지 못하고 자주 다투다가 미워하게 되고 네 탓이다 내 탓이다 그러다가 이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부부는 서로 헤어졌지만 귀여웠던 어린 딸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짙어져서 가끔 묘지를 찾아가곤 했습니다. 어느날 부인은 부인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각각 눈물에 젖은 모습으로 그 사랑하는 딸의 무덤에 꽃을 가지고 찾았는데 부인이 무덤 가까이 갔을때 멀리 한 남자의 뒷모습을 보니 바로 전 남편이었습니다. 돌아 갈까 하다가 기왕에 왔으므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한참 딸의 무덤에서 울고 꽃을 무덤에 얹어놓고 집에 가려고 돌아서 보니 얼마 떨어진 곳에 이전의 아내가 서있었습니다. 그때 남자가 다가가서 “내가 그저 잘못했어요. 성질이 못되어서 당신 마음을 상하게 했어요.” 그 여자도 “아닙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남편이 “나를 용서해 주오.” 아내도 “여보. 당신이 나를 용서해 주오.” 딸의 그 무덤에서 남편은 아내를 용서하고 아내는 남편을 용서하고 용서의 터전에서 다시 사랑으로 재결합해서 그들은 부등켜 앉고 울며 말하기를 “우리는 이렇게 살지 말고 다시 사랑으로 화목하여 귀여운 아이도 낳고 행복하게 살자”고 약속하고 결합하여 그 전보다 더 밝은 생활을 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용서없는 사랑은 있을수가 없습니다. 그 용서는 값없이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대가를 지불해야 돼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용서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4. 고난과 감사의 갈등
넷째로, 고난과 괴로움을 주시면서 감사하라는 모순과 갈등이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합니다. 병들고 고통당하고 괴로움이 다가오면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라. 이런 갈등이 어디 있습니까? 원망과 불평과 탄식이 나와야 될것인데 그것도 하지 말고 감사하라고 하니까 우리가 굉장히 갈등을 느낍니다. 내 생애속에 이런 고난과 괴로움이 있는데 왜 나에게 감사하라고 합니까? 요셉을 보십시오. 형들에게 팔려서 종살이 10년에 또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 3년을 하는데 이러한 고통속에서도 하나님이 감사하라. 그런 갈등을 어떻게 해소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러나 성경에는 로마서 8장 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구약에 있는 감사 제물이 있습니다. 감사제. 하나님 앞에서 감사할 수 없는 여러 가지 고통과 괴로움이 있을 때에도 감사의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오셔서 놀라운 기적을 베풀어 줄 것을 기대하는 제사인 것입니다.
시편 107편 21절로 22절에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찌로다 감사제를 드리며 노래하여 그 행사를 선포할찌로다"했으며
시편 50편 14절로 15절에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감사는 감사할 수 없을 때 감사하라 하니까 굉장한 마음에 갈등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이 감사 제삽니다. 희생의 제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온전한 감사 제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감사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감사할 수 있도록 해주는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여러분 생활에 고통과 원망이 있을때 감사할 수 있나요?
그러나 예레미야 29장 11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고 했었으며
로마서 5장 3절로 4절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날 위하여 고난 당하신 십자가 예수님을 바라볼때 눈물을 흘리며 나를 이처럼 사랑해 주시니 주님께서 끝까지 버리지 않고 돌보아 주실 것을 믿고 감사를 드릴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고난도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주시는 것을 믿게 하고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고난에 있으면서 감사 기도를 드릴수가 없습니다. 신앙이 매우 돈독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 청년은 길을 가다가 인도로 뛰어 들은 자동차에 치여 병원으로 실려 갔습니다. 몇차례 수술 끝에 다리를 절단하게 되자 그는 깊은 절망에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청년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에 목사님과 성도들이 병문안을 다녀 갔습니다. 그들은 청년을 위로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 주었습니다. 그 말씀은 로마서 8장 28절 말씀이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청년은 그 말씀을 들을때 마음에 반발심이 생겼습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내 다리는 걷고 뛸수 있는 성한 다리였는데 그러나 지금은 다리가 잘려서 불구자가 되었는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웃기는 소리 하네. 자기들은 다리가 성하니까 저런 말하지. 다리가 잘려져 병신되면 그런말 하겠는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왜 나를 이렇게 박대하실까?” 그는 굉장한 갈등을 느꼈습니다. 원망과 불평을 해야 되겠는데 자꾸 목사님은 와서 감사하라 하니까 그 마음에 갈등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고 “주님! 주님이 십자가에서 날 위하여 몸찢고 피흘려 죽으셨으므로 주님이 나를 지극히 사랑한 줄 압니다. 내 다리가 잘려진 것도 주님의 사랑 가운데 한가지 계획이 있는 것을 알고 나는 모르지만 감사하겠습니다.” 그래서 그 청년은 신앙심이 좋은 사람이므로 기도하고 고난에 대한 원망과 반발심을 누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 고난 당하신 십자가 예수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음으로 아멘하며 억지로 감사를 드렸습니다. 청년은 얼마후 수술 경과가 좋아 퇴원을 하게 되었지만 고무다리를 달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지 않고 열심히 신앙생활 하다가 결국 신학을 공부하며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선교사로 자원하여 아프리카의 한 식인종 마을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가 나타나자 식인종들이 좋은 먹이가 왔다고 “오늘은 흰고기 먹어 보겠다. 지금까지는 까만 고기만 먹었는데 이제는 흰고기 먹겠다.” 달라들어 가지고 잡았습니다. 잡아가지고서 축제를 열고 그를 요리해 먹으려고 할때 그가 다리를 고무 다리를 탁 떼가지고서 탁 던졌습니다. 식인종들이 보니까 다리를 떼면 피가 나와야 되겠는데 피가 한방울도 안나오거든. “야이~ 희안한 백인이다. 사람이 아닌가 보다. 다리를 떼었는데도 피가 안나온다.” 그리고 이 청년은 “내 다리를 한번 먹어 보시고 맛이 있거든 나를 잡아 먹으시오.” 그래서 달라 들어서 그 고무 다리를 씹어 보니까 질기고 맛도 없거든. 그래서 그들이 모여서 “아~ 이것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구나. 우리 동네에 신이 찾아 왔다. 다리를 잘라 내어도 피 한방울도 안나오고 그 다리는 사람의 다리가 아니라 먹어도 아주 맛도 없고 질기다. 이분에게 우리가 잘못했다가는 큰일나겠다.” 모조리다 엎드려서 잘못했다고 무릎을 꿇매 이분이 그들을 선도하고 전도해서 모두다 예수를 믿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다시는 사람 잡아먹지 않는 사람들로 만들어 주고 말은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 그는 자기의 숙소에 들어와서 무릎을 꿇어 감사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자동차 사고를 내 다리를 잃은 것을 너무나 너무나 감사합니다. 내가 자동차 사고로 다리를 잃어 버리지 않았지만 오늘 백인축제에 고기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리를 잃어 버렸기 때문에 나도 살고 저 수많은 식인종들을 다 회개시키고 예수 믿고 구원받게 했으니 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는 모든 일이 합동하여 선을 이룬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현실만 보지 먼 장래는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계획할 때 먼 장래를 보고 계획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게 손해되나 장차 이익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게 괴로우나 장차 즐거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한없는 고통과 괴로움이 있었으나 그 고통과 괴로움 저 건너편에 수많은 인류를 구원하고 그리스도가 마귀를 이기고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보좌 우편에 앉을 것을 바라보고 즐거워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십자가는 이러한 갈등을 해소할 수 있습니다.

<결론>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갈등과 모순은 용서와 화해와 사랑과 감사를 통하여 해결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속죄제물, 속건제물, 화목제물, 번제물, 감사제물이 되셔서 갈등과 모순에 꽉 들어찬 우리의 삶을 치료하시고 제기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외는 우리의 매일매일 다가오는 열풍같은 마음에 갈등을 이길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갈등, 우리의 갈등을 십자가에서 너무나 아름답고 조화롭게 주님께서는 해결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도 이루시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도 이루셔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가슴 활짝펴고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서서 매일같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수가 있습니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며 버림을 받아야 마땅하고 허물많은 우리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려고 하는 그 갈등속에 우리는 소멸되고 말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이 모든 갈등을 모두 해소하고 승리를 갖다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그리스도 예수 십자가 이외에는 우리에게 도무지 구원이 있을수가 없습니다.
어떠한 종교도 어떠한 수양과 도덕도 노력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질풍같은 이 갈등을 누가 해결할 수 있습니까?
선과 악의 갈등이며 소망과 절망의 갈등이며 의와 죄의 갈등이며 더러움과 거룩함의 갈등이며
성공과 실패의 갈등이며 이런 갈등의 광풍이 우리의 가슴속에 휘몰아쳐오고 우리 가정과 생활에 휘몰아쳐 오는데 이 갈등을 하나님 앞에서 해결해 주는 이가 예수님이 아니십니까?
우리의 잘못을 대신 받아 심판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의로움을 나타내고 또 그를 통하여 용서해 주시므로 우리는 용서도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갈등이 해소되고 구원을 받게 됨을 감사합니다.
아버지 우리는 평생을 예수님을 의지하고 평생을 예수님을 자랑으로 삼고
평생을 예수님만 모시고 살게 하여 주시옵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갈등은 다 조화되고
해결되고 오직 하나님의 의와 사랑으로 충만한 은혜를 받아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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