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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롬6: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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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권진관 형제 |
참고 : | 새길교회 2007.9.2주일설교 |
대리냐 대표냐: 속죄론에 대하여
저는 이번 방학 동안에 캘리포니아 버클리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버클리의 대학 주변에는 교회가 모퉁이마다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에 골목마다 교회가 있는데 이 버클리라고 하는 도시에는 교회가 많이 있습니다. 대학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서는데 그 곁에 교회가 있습니다. 어떤 코너에는 다양한 교단의 교회들이 여러 개가 모여 있습니다. 대학이라고 하는 중요한 곳에 교회가 있고, 그 교회들이 대체로 잘되고 있다는 것을 보면서 저는 한 가지 중요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미국에서는 교회가 학교를 떠받치고 있고, 또 학교는 나라를 떠받치고 있으며, 이것으로 교회가 바로 설 때 나라도 바로 선다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미국에는 아직도 교회가 살아 있습니다. 미국의 강대함 뒤에는 건강한 교회와 건강한 교육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개신교회는 어떠합니까? 한국의 기독교가 한국사회와 나라를 잘 떠 받쳐주고 있는지 아니면 환란과 불신을 가져다주는 존재가 아닌지요?
로마서 5장 마지막 부분에 보면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비하는 바울의 말씀이 나옵니다.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이 유죄판결의 심판을 받게 되었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총으로 많은 사람들이 무죄판결을 받았습니다. 여기에서 모든 사람, 많은 사람의 사이에 대비가 있습니다. 로마서 5:18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죄를 지어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은 것과는 달리 한 사람이 올바른 행위로 모든 사람이 무죄판결을 받고 길이 살게 되었습니다.” 유죄판결을 받은 것은 현재완료형입니다. 모든 사람이 판결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길이 살게 된 것은 그렇게 되도록 문이 열린 것이므로 일부에게는 현재완료형이 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가능성으로만 남는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모두와 일부의 차이입니다. 즉 아담의 죄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지만 예수의 구원은 일부에게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선교란 것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선교를 추동하고 있는 신학적인 교리는 속죄론입니다. 속죄론이 우리나라 개신교회의 가장 중요한 교리가 되었는데, 그리스도의 구원의 피의 속죄의 능력을 알리기 위해서 그 위험한 곳까지 마다하지 않고 분당샘물교회의 23명이 아프가니스탄으로 갔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봉사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전도하러 갔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가 앞다투어 위험 지역으로 순진한 교인들을 단기 선교로 보내는 것은 이를 통하여 교인들의 영적인 긴장고조, 신앙훈련,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무언가 하고 있다.” 하는 자기 정당화를 이루어내면서 이를 통하여 교회의 양적 성장을 기하고자 하는 데에 있다고 보여 집니다. 보수교단의 집합체인 한기총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단기 선교사들을 보내겠다고 공언하면서 앞으로는 인질 사태 등 위기 상황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자체에서 해결할 것이며 정부는 관여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입장을 공식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입장에는 오직 예수만이 구원자라고 하는 십자군적인 자세가 보여집니다. 예수는 승리자이고, 그의 승리에 의해서 다른 종교들, 특히 이슬람 종교는 아무 구원의 능력이 없게 되었기 때문에 기독교로 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 속에는 다른 종교나 다른 영성들이 가지고 있는 구원의 능력, 계시 능력을 무시하는 제국주의적인 발상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현실을 모르는 단순하고 무지한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공격적 선교”라고 하는 군대식 발상의 선교 정책 뒤에는 그리스도는 승리자(Christus Victor)라고 하는 속죄론이 숨어 있습니다. “공격”이라는 말 자체가 매우 위협적이고 군사적인 발상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십자군을 연상하게 합니다. 십자가는 수난을 가리키지만, 십자군은 공격적이고 정복과 승리를 추구합니다. 십자가의 겸손과 수난의 의미는 간 데 없고, 십자군의 정복주의만이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대형교회들은 얼마나 교만한지 모릅니다. 오직 자신만이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고 또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대체로 교만한 사람들은 현실을 자기중심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유아독전적인 현실관은 현실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하는 만용의 자세를 갖게 합니다. 이들의 이러한 교만과 만용이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미 승리하신 승리자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서 나오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수난 당하신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승리자 정복자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매우 낙관적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모든 것을 승리하셨고 다 이루어놓았기 때문에 우리도 함께 구원받았고, 승리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부흥회나 집회들을 가보면 승리의 확신에 찬 노래들을 힘차게 부르는 것을 쉽게 봅니다. 이러한 교만한 마음가짐이 이번 아프간 인질 사태를 불러일으켰던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제가 유학시절 다니던 미국의 어떤 한인 교회에서 성 금요일 저녁 예배를 드렸는데, 그날 담임 목사님이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주신 기쁜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성 금요일을 Good Friday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여기에서 Good이 기쁨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날 저는 깊은 신학적인 혼란에 빠졌습니다. 어떻게 예수가 악한 세력에 의해 억울하게 고통당하시고 돌아가신 날이 기쁜 날일 수 있겠는가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담임 목사님의 신앙은 대속의 속죄론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예수는 죽으셔야 했고, 죽기를 잘 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얼마 전 피가 철철 흐르는 라는 영화가 있었지만, 이 영화도 이러한 희생의 속죄론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영화는 승리자 그리스도라기보다는 희생자 그리스도의 속죄론에 대한 것인데, 이러한 속죄론도 우리나라 개신교회에 깊이 뿌리박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개신교회에서는 이 “희생된 그리스도”와 “승리자 그리스도”가 하나로 합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해 희생 당한 그리스도는 곧 세상을 이긴 승리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양자는 모두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양자는 모두 우리를 대신하여 혹은 대리하여 희생 당하셨고 승리하셨다고 하는 ‘대리’라는 것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대리운전이란 말이 있습니다마는 여기에서 대리는 내가 운전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내 대신 운전하여서 차를 고스란히 집 앞 주차장에 평소처럼 세워 놓아주는 것을 말합니다. 이 주차장에 잘 모셔다 놓고는 이 대리운전자는 홀연히 어둠속으로 사라집니다. 그 다음날 출근하려고 나가 보면 차가 그 자리에 잘 모셔져 있는 걸 보고, 우리는 안도의 숨을 쉽니다. “햐, 이렇게 편안할 수가!” 이렇게 대리운전을 받으면 우리는 그 다음날 편안하게 직장까지 자기 차를 몰고 갈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나는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이 모든 것을 대신해 주는 것이 대리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리해서 모든 죄악을 뒤집어썼고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징벌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냥 편안하게 구원을 받게 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예수가 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할 일이 없습니다. 예수가 우리를 대신하여 대리의 희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노래하는 찬송가는 많이 있습니다. 찬송가 182~202장까지 모두 속죄의 피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193장에 보면,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 그대는 씻기어 있는가?” 194장에는,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려 주 예수 십자가 지셨으니 기쁘게 부르세 할렐루야 나 구원 얻었네.” 여기에서 십자가를 지는 것과 기쁨이 연결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참혹한 고난과 우리의 그에 대한 참여가 기쁨이라고 하는 전연 다른 감정으로 변하고 있는 현실을 보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느낌의 역전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재를 뒤집어쓰고 눈물 흘리며 회개하고 반성해야 할 선교기구들이 오히려 자신들은 더 공격적인 선교를 하겠다고 호언장담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뭔가 아래 위와 앞뒤가 뒤바뀌고 전도되고 있다는 허탈한 감정을 느끼는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한국 개신교의 이러한 호언장담과 교만함 뒤에는 현실에 대한 나이브한 승리주의적이며 낙관적인 생각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러한 승리주의적이며 낙관적인 천진난만한 현실이해는 결국 개신교회의 특징 중 하나가 되고 말았는데, 이것도 깊이 따지고 보면 왜곡된 속죄론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분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가 힘센 장수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부대의 군인들입니다. 십자가 군병들입니다. 찬송가 389장에 “믿는 사람들은 군병같으니 앞에 가신 주를 따라 갑시다. 우리 대장 예수 기를 가지고 접전하는 곳에 가신 것 보라.” 2절에, “원수 마귀 모두 쫓겨 가기는 예수 이름 듣고 겁이 남이라. 우리 찬송 듣고 지옥 떨리니 형제들아 찬송 찬송합시다.” 이런 찬송가들은 예수가 우리를 대신하여 승리하였으므로 우리는 장수 예수 뒤를 따라가기만 하면 승리하게 되어있다고 하는 현실 낙관적 나이브한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대신이라는 차원에서는 나는 없는 존재가 됨을 말합니다. 나는 무력한 존재, 아무 일을 할 수 없는 갓난애와 같은 존재가 됩니다. 이렇게 누가 대신하는 구원, 즉 타율적인 구원을 상징하는 두 가지의 예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쥐의 방식입니다. 쥐는 위험에 닥치면 어미쥐가 새끼쥐를 물고 안전한 곳으로 피신합니다. 새끼 쥐는 이 구원의 사건에 아무 일을 못합니다. 완전히 어미가 모든 일을 “대신”해서 감당합니다. 그런데 원숭이는 위험에 닥치게 되면 새끼는 어미의 품을 두 팔로 힘껏 감고 안깁니다. 그러면 어미는 새끼를 안전한 곳으로 운반해 줍니다. 이 원숭이의 경우 어미가 구원을 이루기는 하지만 새끼도 이 구원에 어느 정도 참여합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구원의 행위는 어미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경우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대신”하는 구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른 예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누가 나를 대신하여 입학시험을 쳐 주었고 내가 그 덕으로 대학에 입학하였다고 한다면 나는 입학시험을 치는 과정에 아무런 공헌을 하지 않고 시험 장소에도 가지 않았지만 합격의 영예를 거머쥐게 됩니다.
예수가 대신 승리해주었고, 대신 고통당해 주었다는 전통적인 속죄론은 기독교 신학에서 근거가 매우 약하다는 것이 비판되어 왔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대신의 속죄론은 오늘날 많은 문제점들을 일으켰습니다. 그리하여 대신의 속죄론에 대항하여 “대표”의 속죄론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나를 대신하여 부정입학시험을 쳐 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표하여 시험을 쳐서 합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에 뒤를 이어서 그 입학시험을 치르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한 것을 우리는 뒤따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합격하셨으므로 우리도 합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합격을 하려면 그리스도가 한 것을 충실하게 따라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한 일들을 충실하게 따를 때 우리는 합격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잠자지 않고 시간을 아껴가며 공부한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할 때 우리도 합격하는 것이지 우리는 빈둥빈둥 거리고 놀면서 합격을 바란다면 그것은 도둑 심보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무임승차입니다. 바울을 오늘의 말씀에서 이것을 비판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하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에는 죽은 사람인데, 어떻게 죄 가운데서 그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은혜를 더하는 일은 내가 아주 공부 못하고 빈둥빈둥거리고 있는데 그럼에도 가장 높은 커트라인의 대학 학과에 들어가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아주 열심히 하고 있는데 대신 시험쳐 주어서 합격증을 받는 형편이라면 그리 고마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결국 대신의 속죄론은 우리를 무기력하게 하고, 우리를 빈둥거리게 하고, 아무런 공헌 없이 좋은 것만을 취하려는 무임승차하려는 심보를 갖게 합니다. 그리고 현실을 너무 쉽게 판단합니다. 아프가니스탄에 가면 아프가니스탄이 나에게로 넘어올 것이라고 하는 허황된 승리주의에 사로잡혀 있게 됩니다. 고난 없이 좋은 열매를 따서 먹으려고 한 심보입니다. 이것은 고난과 노력 없이 무임승차로 지혜의 열매를 따먹으려고 했던 아담의 잘못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지혜는 다릅니다. 처세술적인 세상적인 지혜가 아닙니다. 그것은 고난과 함께 얻은 값진 지혜입니다.
“대표”의 속죄론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일에 충실하게 참여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오늘의 로마서의 바울의 말씀처럼 우리는 예수의 고난에 연합하였고 그리하여 그의 부활에 참여하게 되고 새로운 생명 가운데 살아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오늘 제가 그전부터 좋아하여왔던 찬송가 하나를 소개하고 마치겠습니다. 그것은 오늘 저의 말씀을 마친 후 함께 부를 찬송입니다.
십자가 그늘 밑에 나 쉬기 원하네. 저 햇빛 심히 쬐이고 또 짐이 무거워
이 광야같은 세상에 늘 방황할 때에 주 십자가의 그늘에 내 쉴 곳 찾았네.
내 눈을 밝히 떠서 저 십자가 볼 때 나 위해 고생 당하신 주 예수 보인다
그 형상 볼 때 내 맘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리네.
십자가 그늘에서 나 길이 살겠네. 나 사모하는 광채는 주 얼굴뿐이라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나 관계 없도다 내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뿐이라.
― 찬송가 471장
이 곡은 세상 속에서 심한 고난 속에서 살고 있는 어떤 민중, 어떤 욥과 같은 인물을 생각하게 합니다. 제가 힘든 상황에 처해 있을 때에 부르게 되는 찬송가입니다. 우리의 삶이 예수의 경우와 같이 그것이 의를 위한 것이든 선을 위한 것이든 많은 수고와 노력 속에서 고난의 경지에 닿아 있을 때 우리는 예수도 그러한 고난을 당하셨음을 상기하고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대신”의 무임승차는 없고 오직 따름만 있습니다. 그 따름 속에서 예수와 연합하며, 예수와 함께 걷는 영광에 이르는 것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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