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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마10:24-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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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황금성 목사 |
참고 : | 멋진교회 http://www.mutjin.net/ |
스카이다이빙이란 항공스포츠가 있습니다. 먼저 비행기를 타고 3, 4천 미터 하늘에 올라갑니다. 거기서 낙하산을 메고 뛰어내린 뒤 45초에서 1 분 정도 자유낙하를 즐기는 경기입니다. 이때 떨어지는 속도는 200 Km가 넘는다고 합니다. 자세에 따라서 300 Km까지 속도가 붙습니다. 스카이다이버들은 만약을 위해서 예비 낙하산을 하나 더 멥니다. 주 낙하산이 펴지지 않으면 사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보호 장구들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대비를 해도 맨 몸을 허공에 던지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이런 일을 직업처럼 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공수부대 특전사들이나, 스카이다이빙 직업 교관들입니다. 이들은 점프를 밥 먹듯이 해냅니다. 천 번이 넘는 경력을 가진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들이 점프를 할 때 믿는 것은 오직 낙하산 뿐 입니다. 낙하산을 믿고 뛰어 내립니다. 이 낙하산에 대한 믿음은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해 줍니다.
두려움이란 앞으로 닥칠 해로운 일로 불안해진 마음입니다. 이 두려움은 인간이 죄를 지으면서 생겼습니다. 아담은 죄를 지은 후 하나님이 나타나시자 숨었습니다. 하나님을 피한 것은 아담의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유난히 두려움이란 단어가 많이 등장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단어가 세 번, 두려워하라는 말이 한 번 나옵니다.
26 절에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28 절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말라고 했습니다.
31 절에도 ‘두려워하지 말라’가 나옵니다.
그리고 28 절 마지막에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 즉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나옵니다.
이 두려워하지 말라는 교훈은 전도 현장에서 당할 고난에 대해서 제자들의 마음의 준비를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전도를 하다보면 두려워할 일들이 닥칩니다. 그래도 정신 바짝 차리고 겁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전도는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주님의 일 가운데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전도는 누구나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전도에서 빠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전도는 예수님이 가장 열정적으로 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제자를 뽑으신 이유도 바로 전도를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많은 병자를 불쌍히 여기셔서 고치셨습니다. 그것 역시 전도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병 낫기를 원한 사람들이 몰려 왔습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치시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들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전도를 쉽게 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전도하면서 어려움을 많이 겪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전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임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 가지 점에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러면 스카이다이버가 낙하산을 의지하면서 두려움을 극복했듯이 우리는 무엇을 믿고 이 전도의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첫 번째 두려움을 이겨야 할 대상은 전도하는 것을 훼방하고 흉보는 자들입니다. (소극적인 훼방자)
26 절을 보면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여기서 저희는 그 앞 25 절에서 나옵니다.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그러니까 두려움을 이길 저희들이란 바로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고 하는 자들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 능력을 행한다고 빈정댔습니다.
누가복음 11:14-15 “예수께서 한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벙어리가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기이히 여겼으나,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바알세불을 귀신의 왕 이름입니다. 예수님의 능력 행함이 워낙 큰 기적들이라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 그리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귀신이 도왔다면 귀신끼리 내분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고작 귀신의 힘이겠습니까?
이것은 예수님을 조롱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기를 얻고 큰 능력을 행하는 것을 보고 시기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전도하면서 어려움을 겪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신 것은 그 고난의 정점입니다. 집 주인도 이런 고난을 겪는데 그 집 사람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여기서 집 주인은 예수님을 말하고, 집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보다 더 심한 방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지난주일 본문이었던 16 절에서도 제자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이 감당할 전도가 만만하지 않음을 다시 강조하고 있습니다.
전도는 쉽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 만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도를 하다가 보면 많은 어려움에 부딪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어려움을 잘 이겨내야 합니다.
전도에서 제일 어려운 문제는 무엇일까요? 전도자의 두려운 마음입니다. 낯선 사람에게 다가가 말을 붙이려고 하면 가슴이 쿵쾅댑니다. 게다가 전도를 했다고 핍박을 받는다면 그 두려움은 훨씬 클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은 전도하기도 전에 지례 겁을 먹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전도에 앞서 먼저 극복할 일은 이 두려움을 걷어내는 것입니다. 담대한 마음으로 맞서야 합니다.
예수를 믿으라고 하면 빈정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눈에는 예수를 믿는 것이 미련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주일 쉬는 시간에 교회를 가는 것이 헛수고로 보입니다. 거기다 교회에 가서 연보를 내는 일을 아주 어리석게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자기를 희생시키는 봉사 정신을 깎아 내립니다. 자기들이 못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시기심이 일기 때문입니다.
이 빈정대는 자들은 적극적인 방해자들이 아닙니다. 그저 변두리에서 빈정댈 뿐입니다. 그저 전도를 훼방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세력도 없고 힘도 없습니다. 이들은 단지 못 먹는 감 찔러보는 정도의 놀부 심보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전도를 하는데 옆에서 빈정대는 자가 있습니까? 무시하십시오. 저들은 세력이 아닙니다. 저들은 우리보다 훨씬 연약한 자들입니다. 겁이 많은 개가 짖는다고 합니다. 저들은 겁을 먹고 있기 때문에 개처럼 짖는 것입니다.
전도의 훼방자가 나타나면 기도하십시오. 전도할 때는 기도하면서 해야 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전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새 훼방자는 물러나고 돕는 천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두 번째 두려움을 이겨낼 대상은 전도를 적극적으로 핍박하는 자들입니다.
28 절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붙잡아 죽이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그만한 정치적인 세력이 있습니다. 이렇게 전도하다가 붙잡혀 죽는 것을 순교라고 합니다. 기독교 전도의 역사는 이 순교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올 때도 수많은 전도자의 피 값을 치렀습니다. 1866 년부터 대원군의 박해로 6 년 동안 죽은 천주교인이 만 명을 넘습니다. 이들은 재판도 없이 대부분 즉결 참수형으로 죽었습니다. 개신교 순교는 토마스 선교사가 평양 대동강에서 목이 베이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기독교가 독립운동과 3·1 운동을 주도하면서 많은 순교자를 낳았습니다. 또 신사참배와 배교를 강요받았지만 신앙의 절개를 지켰던 믿음의 선조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6·25 전쟁을 치르면서 종교를 탄압한 공산주의에 맞서다 순교를 당한 분들이 많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이런 순교자들의 핏자국 아래서 다시 세워진 교회입니다.
기독교 초기에는 로마 정부의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핍박을 받았습니다.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한 죄로 붙잡혀 십자가형을 받으셨습니다. 그 다음 두 번째 순교자는 스데반 집사입니다. 그 다음은 제자 야고보입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가 모두 차례로 순교를 당하며 죽었습니다. 그러나 순교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죽음을 두려워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들이 죽음을 넘어서 용기 있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그것은 몸은 죽여도 영혼까지는 죽일 수 없는 저들의 힘의 한계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죽음이 곧 멸망이 아닙니다. 영혼이 죽는 것을 멸망이라고 합니다. 영혼이 지옥불에 떨어지는 것이 곧 두 번째 사망 영원한 멸망입니다.
이 심판을 주관하시는 이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전도자들은 핍박하는 전도의 적극적인 방해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순교는 주님을 위해 죽는 가장 영화로운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순교를 오히려 간절히 원했습니다.
기독교는 박해를 받으면서 번성했습니다.
로마 정부는 10 차례에 거쳐서 기독교를 탄압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더욱 퍼져나갔습니다. 결국 로마 정부는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였습니다. 교황의 권위를 국왕 위에 두었습니다. 기독교는 이렇게 박해를 통해 오히려 자라는 독특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탄압하면 할수록 복음 전파가 활발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본문 27 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예수님은 핍박을 받을수록 더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숨어서가 아니라 더욱 드러나게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귓속으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외치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죽음을 넘어서는 종교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죽는 것을 오히려 영광으로 압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 더 이상의 적은 없습니다.
우리는 전도한다고 잡아 가두고 죽이는 세상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마음껏 복음 전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위험이 사라졌음에도 전도하지 않는다면 주님의 책망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도 전도가 금지된 공산국가가 있습니다. 여전히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전도하가 발각되면 죽거나 추방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순교 지역에 선교를 지망하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저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선교를 후원해야 합니다. 아직도 전도의 불모지가 널려 있습니다. 아직 전도자로 할 일이 쌓여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지붕 위에서 복음을 외친 믿음의 선배들의 모습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그리고 전도를 두려워하면서 주저앉아 있는 내 모습을 비통하게 여겨야 합니다.
세 번째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대상은 전도자의 변심에 대한 공포입니다. 전도하다가 붙들리면 바로 죽이지 않습니다. 심문의 과정을 거칩니다. 여기에는 모진 고문이 뒤따릅니다. 핍박하는 자들의 목적은 기독교를 이 땅에서 없애는 것입니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전도자를 잡아다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자를 배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전하던 입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전도를 할 만큼 열정이 있던 자의 입에서 주님을 부인하게 만들면 그것은 최고의 전리품이 됩니다. 변절자를 내세워 선전하면 기독교는 힘을 잃게 될 것입니다.
본문을 읽어보면 예수님은 그런 변심에 대한 두려움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심을 알게 됩니다.
본문 29 절부터 보겠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당시에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시리온에 팔리고 있습니다. 한 앗시리온은 로마 동전의 단위입니다. 앗시리온보다 10 배가 되는 단위가 드라크마입니다. 이 드라크마보다 16 배는 로마 은전 한 데나리온입니다. 이 데나리온이 하루 장정 품값입니다. 그러니 한 앗시리온은 한 데나리온의 160 분지 1입니다. 하루 품값을 십만 원으로 볼 때 한 앗시리온은 62 원입니다. 그러면 참새 한 마리는 31 원입니다.
이런 값 싼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땅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하찮은 참새까지도 관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30 절에서 하나님은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다고 했습니다.
보통 머리털이 10 만개 쯤 된다고 합니다. 머리숱이 많은 사람은 셀 필요가 없습니다. 몇 가닥 안 남은 사람은 세겠지요. 그러나 대머리라 해도 머리카락을 아끼겠지만 그것을 세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세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것 까지도 세심하게 관리하고 계십니다.
31 절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전도하다 붙잡히면 목숨이 위험하겠지요. 그러나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에게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귀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전도자들을 쉽게 죽이도록 내놓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화급한 위기가 닥쳐도 담대하라는 것입니다. 두려워 떨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때 아주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어떤 위협 앞에서도 떨지 말고 대답을 똑바로 해야 합니다. 어떤 모진 고문에도 주님을 부인하면 안 됩니다.
32 절과 33 절을 읽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목에 칼을 들이대고 예수를 부인하면 살려 준다고 합시다. 그런 위협 앞에서도 비굴하게 살려고 주님을 부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6·25 때 실제로 그런 일들이 있었습니다. 북한군이 예수님의 초상화를 바닥에 깔고 밟고 지나가면 살려주고 못 지나기면 죽인다는 위협을 했습니다.
2004 년에 이라크에 선교를 하기 위해 들어간 한 젊은이의 죽음을 기억합니다. 이라크의 무장단체는 김선일씨를 붙잡아 협박을 했습니다. 그리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김선일 씨의 동영상을 찍어서 공개했습니다. 요구조건을 들어주지 않으면 참수하겠다는 것입니다. 며칠 후 김선일 씨는 잔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저는 김선일 씨의 몸부림과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소리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오늘 이 본문을 읽고 생각해 봅니다. 그가 좀 더 당당하게 맞서지 못했을까? 이왕 이렇게 된 것 무당단체들을 향해 복음을 외치지 그랬나? 그러나 입장을 바꿔서 만일 내가 그런 일을 당한다면 나는 떳떳하게 맞설 수 있었을까? 여기 있는 어느 누구도 장담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시인하면, 예수님도 하늘에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시인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마다 우리를 시인해 주고 계십니다. 만약 주님이 거기서 우리를 부인하시면 어떻게 됩니까?
마7:23 말씀입니다.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지막이 중요합니다. 비록 붙잡혀 죽음의 위협 앞에 있어도 끝까지 주님을 시인해야 합니다. 잘 하다가 마지막에 가서 주님을 부인하면 이제까지의 모든 수고가 허사입니다.
어떤 크리스천은 죽음의 협박이 아니어도 쉽게 시인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직장에서 당당하게 나는 크리스천이라고 밝히지 못합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같은 지붕에 사는 이웃 앞에서 나는 예수를 믿는다고 밝히지 못합니다. 왜 그렇게 쭈그러든 모습으로 교회를 다닐까요? 불법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다고 당당히 밝히면 오히려 대접을 받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고 복된 시대입니까? 어떤 자리에서도 어떤 사람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밝히며 삽시다. 나는 크리스천입니다. 나와 함께 예수 믿으며 사십시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내가 죽는 그 순간까지 어떤 경우에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도록 지켜달라고… 죽는 그 순간까지 담대하게 주님을 증거하며 살게 해달라고…
(황금성 목사)
이런 일을 직업처럼 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공수부대 특전사들이나, 스카이다이빙 직업 교관들입니다. 이들은 점프를 밥 먹듯이 해냅니다. 천 번이 넘는 경력을 가진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들이 점프를 할 때 믿는 것은 오직 낙하산 뿐 입니다. 낙하산을 믿고 뛰어 내립니다. 이 낙하산에 대한 믿음은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해 줍니다.
두려움이란 앞으로 닥칠 해로운 일로 불안해진 마음입니다. 이 두려움은 인간이 죄를 지으면서 생겼습니다. 아담은 죄를 지은 후 하나님이 나타나시자 숨었습니다. 하나님을 피한 것은 아담의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유난히 두려움이란 단어가 많이 등장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단어가 세 번, 두려워하라는 말이 한 번 나옵니다.
26 절에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28 절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말라고 했습니다.
31 절에도 ‘두려워하지 말라’가 나옵니다.
그리고 28 절 마지막에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 즉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나옵니다.
이 두려워하지 말라는 교훈은 전도 현장에서 당할 고난에 대해서 제자들의 마음의 준비를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전도를 하다보면 두려워할 일들이 닥칩니다. 그래도 정신 바짝 차리고 겁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전도는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주님의 일 가운데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전도는 누구나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전도에서 빠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전도는 예수님이 가장 열정적으로 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제자를 뽑으신 이유도 바로 전도를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많은 병자를 불쌍히 여기셔서 고치셨습니다. 그것 역시 전도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병 낫기를 원한 사람들이 몰려 왔습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치시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들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전도를 쉽게 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전도하면서 어려움을 많이 겪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전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임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 가지 점에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러면 스카이다이버가 낙하산을 의지하면서 두려움을 극복했듯이 우리는 무엇을 믿고 이 전도의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첫 번째 두려움을 이겨야 할 대상은 전도하는 것을 훼방하고 흉보는 자들입니다. (소극적인 훼방자)
26 절을 보면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여기서 저희는 그 앞 25 절에서 나옵니다.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그러니까 두려움을 이길 저희들이란 바로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고 하는 자들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 능력을 행한다고 빈정댔습니다.
누가복음 11:14-15 “예수께서 한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벙어리가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기이히 여겼으나,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바알세불을 귀신의 왕 이름입니다. 예수님의 능력 행함이 워낙 큰 기적들이라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 그리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귀신이 도왔다면 귀신끼리 내분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고작 귀신의 힘이겠습니까?
이것은 예수님을 조롱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기를 얻고 큰 능력을 행하는 것을 보고 시기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전도하면서 어려움을 겪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신 것은 그 고난의 정점입니다. 집 주인도 이런 고난을 겪는데 그 집 사람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여기서 집 주인은 예수님을 말하고, 집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보다 더 심한 방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지난주일 본문이었던 16 절에서도 제자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이 감당할 전도가 만만하지 않음을 다시 강조하고 있습니다.
전도는 쉽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 만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도를 하다가 보면 많은 어려움에 부딪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어려움을 잘 이겨내야 합니다.
전도에서 제일 어려운 문제는 무엇일까요? 전도자의 두려운 마음입니다. 낯선 사람에게 다가가 말을 붙이려고 하면 가슴이 쿵쾅댑니다. 게다가 전도를 했다고 핍박을 받는다면 그 두려움은 훨씬 클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은 전도하기도 전에 지례 겁을 먹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전도에 앞서 먼저 극복할 일은 이 두려움을 걷어내는 것입니다. 담대한 마음으로 맞서야 합니다.
예수를 믿으라고 하면 빈정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눈에는 예수를 믿는 것이 미련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주일 쉬는 시간에 교회를 가는 것이 헛수고로 보입니다. 거기다 교회에 가서 연보를 내는 일을 아주 어리석게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자기를 희생시키는 봉사 정신을 깎아 내립니다. 자기들이 못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시기심이 일기 때문입니다.
이 빈정대는 자들은 적극적인 방해자들이 아닙니다. 그저 변두리에서 빈정댈 뿐입니다. 그저 전도를 훼방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세력도 없고 힘도 없습니다. 이들은 단지 못 먹는 감 찔러보는 정도의 놀부 심보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전도를 하는데 옆에서 빈정대는 자가 있습니까? 무시하십시오. 저들은 세력이 아닙니다. 저들은 우리보다 훨씬 연약한 자들입니다. 겁이 많은 개가 짖는다고 합니다. 저들은 겁을 먹고 있기 때문에 개처럼 짖는 것입니다.
전도의 훼방자가 나타나면 기도하십시오. 전도할 때는 기도하면서 해야 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전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새 훼방자는 물러나고 돕는 천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두 번째 두려움을 이겨낼 대상은 전도를 적극적으로 핍박하는 자들입니다.
28 절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붙잡아 죽이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그만한 정치적인 세력이 있습니다. 이렇게 전도하다가 붙잡혀 죽는 것을 순교라고 합니다. 기독교 전도의 역사는 이 순교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올 때도 수많은 전도자의 피 값을 치렀습니다. 1866 년부터 대원군의 박해로 6 년 동안 죽은 천주교인이 만 명을 넘습니다. 이들은 재판도 없이 대부분 즉결 참수형으로 죽었습니다. 개신교 순교는 토마스 선교사가 평양 대동강에서 목이 베이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기독교가 독립운동과 3·1 운동을 주도하면서 많은 순교자를 낳았습니다. 또 신사참배와 배교를 강요받았지만 신앙의 절개를 지켰던 믿음의 선조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6·25 전쟁을 치르면서 종교를 탄압한 공산주의에 맞서다 순교를 당한 분들이 많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이런 순교자들의 핏자국 아래서 다시 세워진 교회입니다.
기독교 초기에는 로마 정부의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핍박을 받았습니다.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한 죄로 붙잡혀 십자가형을 받으셨습니다. 그 다음 두 번째 순교자는 스데반 집사입니다. 그 다음은 제자 야고보입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가 모두 차례로 순교를 당하며 죽었습니다. 그러나 순교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죽음을 두려워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들이 죽음을 넘어서 용기 있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그것은 몸은 죽여도 영혼까지는 죽일 수 없는 저들의 힘의 한계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죽음이 곧 멸망이 아닙니다. 영혼이 죽는 것을 멸망이라고 합니다. 영혼이 지옥불에 떨어지는 것이 곧 두 번째 사망 영원한 멸망입니다.
이 심판을 주관하시는 이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전도자들은 핍박하는 전도의 적극적인 방해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순교는 주님을 위해 죽는 가장 영화로운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순교를 오히려 간절히 원했습니다.
기독교는 박해를 받으면서 번성했습니다.
로마 정부는 10 차례에 거쳐서 기독교를 탄압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더욱 퍼져나갔습니다. 결국 로마 정부는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였습니다. 교황의 권위를 국왕 위에 두었습니다. 기독교는 이렇게 박해를 통해 오히려 자라는 독특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탄압하면 할수록 복음 전파가 활발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본문 27 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예수님은 핍박을 받을수록 더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숨어서가 아니라 더욱 드러나게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귓속으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외치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죽음을 넘어서는 종교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죽는 것을 오히려 영광으로 압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 더 이상의 적은 없습니다.
우리는 전도한다고 잡아 가두고 죽이는 세상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마음껏 복음 전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위험이 사라졌음에도 전도하지 않는다면 주님의 책망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도 전도가 금지된 공산국가가 있습니다. 여전히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전도하가 발각되면 죽거나 추방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순교 지역에 선교를 지망하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저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선교를 후원해야 합니다. 아직도 전도의 불모지가 널려 있습니다. 아직 전도자로 할 일이 쌓여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지붕 위에서 복음을 외친 믿음의 선배들의 모습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그리고 전도를 두려워하면서 주저앉아 있는 내 모습을 비통하게 여겨야 합니다.
세 번째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대상은 전도자의 변심에 대한 공포입니다. 전도하다가 붙들리면 바로 죽이지 않습니다. 심문의 과정을 거칩니다. 여기에는 모진 고문이 뒤따릅니다. 핍박하는 자들의 목적은 기독교를 이 땅에서 없애는 것입니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전도자를 잡아다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자를 배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전하던 입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전도를 할 만큼 열정이 있던 자의 입에서 주님을 부인하게 만들면 그것은 최고의 전리품이 됩니다. 변절자를 내세워 선전하면 기독교는 힘을 잃게 될 것입니다.
본문을 읽어보면 예수님은 그런 변심에 대한 두려움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심을 알게 됩니다.
본문 29 절부터 보겠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당시에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시리온에 팔리고 있습니다. 한 앗시리온은 로마 동전의 단위입니다. 앗시리온보다 10 배가 되는 단위가 드라크마입니다. 이 드라크마보다 16 배는 로마 은전 한 데나리온입니다. 이 데나리온이 하루 장정 품값입니다. 그러니 한 앗시리온은 한 데나리온의 160 분지 1입니다. 하루 품값을 십만 원으로 볼 때 한 앗시리온은 62 원입니다. 그러면 참새 한 마리는 31 원입니다.
이런 값 싼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땅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하찮은 참새까지도 관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30 절에서 하나님은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다고 했습니다.
보통 머리털이 10 만개 쯤 된다고 합니다. 머리숱이 많은 사람은 셀 필요가 없습니다. 몇 가닥 안 남은 사람은 세겠지요. 그러나 대머리라 해도 머리카락을 아끼겠지만 그것을 세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세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것 까지도 세심하게 관리하고 계십니다.
31 절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전도하다 붙잡히면 목숨이 위험하겠지요. 그러나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에게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귀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전도자들을 쉽게 죽이도록 내놓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화급한 위기가 닥쳐도 담대하라는 것입니다. 두려워 떨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때 아주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어떤 위협 앞에서도 떨지 말고 대답을 똑바로 해야 합니다. 어떤 모진 고문에도 주님을 부인하면 안 됩니다.
32 절과 33 절을 읽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목에 칼을 들이대고 예수를 부인하면 살려 준다고 합시다. 그런 위협 앞에서도 비굴하게 살려고 주님을 부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6·25 때 실제로 그런 일들이 있었습니다. 북한군이 예수님의 초상화를 바닥에 깔고 밟고 지나가면 살려주고 못 지나기면 죽인다는 위협을 했습니다.
2004 년에 이라크에 선교를 하기 위해 들어간 한 젊은이의 죽음을 기억합니다. 이라크의 무장단체는 김선일씨를 붙잡아 협박을 했습니다. 그리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김선일 씨의 동영상을 찍어서 공개했습니다. 요구조건을 들어주지 않으면 참수하겠다는 것입니다. 며칠 후 김선일 씨는 잔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저는 김선일 씨의 몸부림과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소리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오늘 이 본문을 읽고 생각해 봅니다. 그가 좀 더 당당하게 맞서지 못했을까? 이왕 이렇게 된 것 무당단체들을 향해 복음을 외치지 그랬나? 그러나 입장을 바꿔서 만일 내가 그런 일을 당한다면 나는 떳떳하게 맞설 수 있었을까? 여기 있는 어느 누구도 장담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시인하면, 예수님도 하늘에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시인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마다 우리를 시인해 주고 계십니다. 만약 주님이 거기서 우리를 부인하시면 어떻게 됩니까?
마7:23 말씀입니다.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지막이 중요합니다. 비록 붙잡혀 죽음의 위협 앞에 있어도 끝까지 주님을 시인해야 합니다. 잘 하다가 마지막에 가서 주님을 부인하면 이제까지의 모든 수고가 허사입니다.
어떤 크리스천은 죽음의 협박이 아니어도 쉽게 시인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직장에서 당당하게 나는 크리스천이라고 밝히지 못합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같은 지붕에 사는 이웃 앞에서 나는 예수를 믿는다고 밝히지 못합니다. 왜 그렇게 쭈그러든 모습으로 교회를 다닐까요? 불법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다고 당당히 밝히면 오히려 대접을 받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고 복된 시대입니까? 어떤 자리에서도 어떤 사람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밝히며 삽시다. 나는 크리스천입니다. 나와 함께 예수 믿으며 사십시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내가 죽는 그 순간까지 어떤 경우에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도록 지켜달라고… 죽는 그 순간까지 담대하게 주님을 증거하며 살게 해달라고…
(황금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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