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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열심

이사야 나무............... 조회 수 3281 추천 수 0 2009.03.23 15: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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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사9:1∼7 
설교자 : 이재철 목사 
참고 : 1997년 12월 25일 - (주님의교회)성탄절 주일 설교말씀 

방글라데쉬는 아시아의 대표적인 최빈국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에게도 찢어지게 가난한 시절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 곳의 가난은 우리와는 개념 자체가 틀리다고 합니다. 그 곳 사람들의 거처 안으로 들어가 보면 전 재산이란, 대개 식구의 수와는 상관없이 입고 있는 단벌 옷과 그릇 두 개가 고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먹을 것이 없으면 시도 때도 없이 굶기를 다반사로 한답니다. 온 국민의 태반이 그런 정도라니 실로 상상하기조차 어렵습니다. 사람이 생활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이 있기 마련인데, 국민의 태반이 그 기본적인 것조차 갖추고 있지를 못한다면 그것은 가난보다 더 비참한 상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비참한 땅에서 오랫동안 그곳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복음을 전하던 중 안식년을 맞아 귀국해 있는 동안 우리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다가, 다음 주초 다시 방글라데쉬 선교지로 출발하게 된 권병희·장성희 선교사님 부부와 식사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장성희 선교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워낙 아무것도 없는 방글라데쉬에서 오래 살다가 한국에 오니 모든 것들이 너무도 풍요로왔답니다. 방글라데쉬에서는 먹을 엄두도 낼 수 없는 음식을 먹을 수 있었고, 입을 수 없는 옷을 입을 수도 있었고, 감히 누릴 수 없는 문화 생활을 향유할 수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어느 날 불현듯 자신도 몰래 자신의 신앙이 퇴보하고 있음을 느꼈답니다. 방글라데쉬에서는 아예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무엇이든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할 수밖에 없었고, 매일 하나님과 대면하다 보니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적인 삶이 중단없이 지속될 수 있었답니다. 그러나 한국에 나와서는 모든 것이 풍족하기에 하나님께 애써 구하지 아니하여도 먹을 수 있고 입을 수 있기에 매일 애절하게 하나님과 대면할 필요가 없었고, 그와 같은 삶은 신앙의 낙후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답니다.

 

이처럼 자신의 신앙에 대하여 위기감을 느끼고 있을 무렵, 그 분은 신기한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갖고 또 갖추고 있는 여성도님들이 자신보다 훨씬 더 신실하게 주님을 섬기고 있는 모습의 발견이었습니다. 방글라데쉬에 비해 조금 삶의 여유가 생겼다고 자신의 신앙은 퇴보하고 있는데, 자기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유여한 삶을 사는 여성도님들이 교회의 구석구석에서 소리 없이 최선을 다해 봉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분은 이런 질문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저분들로 하여금 저토록 신실한 신앙의 소유자들이 되게 했을까?'

그것은 그 분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움이라고 했습니다. 그 분의 질문에 대하여 저는 이렇게 답변을 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총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신약 성경 에베소서 2장 8절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이것은 바로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그는 본래 예수님을 믿던 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돌로 쳐죽이는 일에 앞장서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처럼 불한당과도 같던 바울이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고꾸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옛사람이 죽고 전혀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전혀 바울의 노력이나 애씀의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총이었습니다. 그것을 깨달은 바울은 믿음이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요, 또 그 이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주님을 위하여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은, 그 귀한 선물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보답이었습니다. 그 선물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보답의 삶을 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란 이것이 단지 바울만의 고백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실은 우리 모두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결코 참되고 영원한 삶이 있을 수 없음을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그 분을 본받아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이 삶의 여정에 어떻게 나서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나 아닌 타인을 생각하며 봉사와 헌신의 길에 기꺼이 나가아게 되었습니까? 우리 노력의 결과였습니까?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기도 전에, 우리가 아직 죄와 죽음 가운데 빠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베풀어 주셨던 선물이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우리의 열심으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성취된 일이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700년 전에 이미 예수님의 오심을 예언하면서 예수님을 본문 6절을 통하여 이렇게 소개하였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여기에서 `어깨에 정사를 메었다'는 것은 통치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통치자와 구별하기 위하여 이사야는 예수님을 네가지의 호칭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첫째 `기묘자라 모사라'고 불렀습니다. 원문을 영어로 옮기면 `Wonderful Counselor'란 말이 됩니다. `위대한 교사' 혹은 `놀라운 상담자'란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만백성의 통치자시되 자기 마음대로 백성을 억압하고 호도하는 세상의 통치자와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분이야 말로 인간에게 참 생명의 도를 일깨워 주시는 위대한 교사요, 우리의 모든 하소연을 듣고, 우리에게 언제나 바른 해답을 제시해 주는 놀라운 상담자시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사야는 예수님을 가리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 불렀습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곧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셨던 바로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능치 못할 일이 없고, 장애물이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호칭은 `영존하시는 아버지'입니다. 이 땅에 오실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아버지시라는 것입니다. 그 분이 영원한 생명의 아버지시기에 죄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의 구원자 되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호칭은 `평강의 왕'이었습니다. 그 분은 이 세상의 통치자시되 칼과 창으로 세상의 평화를 깨트리는 파괴자가 아니라, 도리어 자신을 던져 인간을 섬기므로 이 세상이 결코 줄 수 없는 평강, 어떤 경우에도 깨어지지 않는 절대적 평강을 주시는 평강의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700년 전 이사야가 예수님에 대하여 행하였던 이 예언들은 한낱 이사야의 착각이나 망상에 불과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그로부터 700년 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때, 이사야의 예언은 단 한마디도 거짓되지 않았음이 예수님의 삶에 의하여 모두 증명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지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생의 바른 길과 해답을 얻고, 그 분의 전능하신 능력에 힘입어 세상을 이기며, 그 분 안에서 영원한 생명 영원한 구원을 누리고 절대적 평강을 구가할 수 있음은, 그분이야말로 `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오, `영존하시는 아버지'시오, `평강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유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같은 하나님께서 보잘 것 없는 인간의 모습으로 하잘 것 없는 인간들에게 오시어 인간들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고 인도하시는 동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본문7절이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어 당신의 평강과 공평과 정의로 당신의 나라를 일구어 가실 터인데, 그 모든 동인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되신 `여호와의 열심'이라는 것입니다.

생각을 해 보십시오. 우리가 노력했기 때문에 구원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까? 우리의 열심으로 인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까? 우리의 열성으로 인해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영원한 생명의 구원자가 되셨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빠져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열심으로, 하나님의 열성으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구원자로 오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2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이스라엘 갈릴리 주변에 사는 자들은 다 찢어지는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던 불쌍한 빈민들이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들과 더불어 사시면서 그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하시어 영화롭게 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의로왔고 진리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흑암 속에 행하고 사망의 그늘 속에 살던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열심으로, 당신의 열성으로 그 땅에 임하시사 당신의 생명으로 그들을 살리시고 구원하시고 영화롭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갈릴리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그리고 흑암과 사망의 그늘 속에서 살던 갈릴리 사람들이란 죄중에서 죽어가던 우리 자신들을 의미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와 같은 우리에게 생명의 빛, 구원의 빛, 진리의 빛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음을 기념하는 날이 바로 오늘, 성탄절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의 본문에 근거하여 성탄절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겠습니까?

성탄절이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살리시기 위해 친히 이 땅에 오셨던 하나님의 열심을 만나는 날입니다. 지금도 나를 위해 전능하신 당신의 능력으로 나와 함께 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재확인하는 날입니다. 오늘 내가 이런 모습으로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이 전적으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열심의 결과임을 알아 하나님의 그 열심에 깊은 감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만약 내가 지금 뜻하지 아니한 고통과 고난 속에 있다면, 그 고난의 풀무속에서 나를 정금같이 새로이 빚으시기 위해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믿고 다시 일어서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우신 열심에 우리의 열심으로 보답하기 시작하는 날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성탄절이 없어서는 안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날이 있기에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의 심령속에 각인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일 저녁 찬양 예배 시간에 음악부에서 주관하는 `성탄축하 열린 음악회'가 열렸었습니다. 몇 주전부터 음악회 당일 주최측에서 제게 노래를 시킬 것이란 정보를 입수하고 여러 경로를 통하여 그 계획을 철회할 것을 간청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노래 부르는 은사는 주시지 않았음을 제 자신이 잘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임기가 내년 6월이면 끝나는 관계로 이번 성탄절이 저의 입장으로 보면 성도님들과 맞는 마지막 성탄절이라는 이유로 제 요청은 거절되었고, 마침내 그 날 노래를 부르게 되었습니다. 노래를 다 부르고 앉았던 자리로 되돌아가자 제 곁에 앉아 있던 첫째와 둘째 아이들이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잠시 후에 아이들이 들어오더니 둘째가 저를 보자마자 대뜸 이렇게 꾸짖는 것이었습니다.

`아빤 왜 박자와 음정 그리고 가사를 아무렇게나 불러요?'
제가 물었습니다.
`너희들 어디 갔다 왔냐?'
그때 둘째가 대답한 내용을 아이의 용어 그대로 옮기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빠가 노래를 너무 못 부르시는 통에 쪽이 팔려서 화장실에 갔다 왔어요.'

제 노래가 시작되자 마자 음치 아빠의 노래가 너무 창피해서 혹시 누군가 자기들을 알아 볼까 봐 외투를 뒤집어쓰고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답니다. 그런데도 아빠의 음치 노래가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도저히 쪽이 팔려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어, 둘이서 함께 화장실에 가서 숨어 있다가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이의 말을 들으니 저보다 더 음치였던 선친 기억이 났습니다. 지독히도 음치였던 선친과 저 사이에 다른점이 있다면 저는 가능한한 공식석상에서 노래 부르기를 꺼려하는 반면, 선친께서는 기분만 나면 어디서나 노래 부르기를 마다치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친께서 공개 석상에서 노래를 부르실 때면 괜히 제가 부끄러워 얼굴이 싯뻘게지곤 했었습니다. 그런 경험이 있다 보니, 아이들이 제 노래 때문에 쪽이 팔려서 화장실에 가서 숨은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제가 이 노래 실력을 가지고 어디서나 노래를 부르려고 열심을 낸다면, 제가 노래 열심을 내면 낼수록 아이들은 더 쪽팔려 하고 말 것은 불을 보 듯 뻔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부모는 자식들을 얼마든지 부끄럽게 만들 수 있습니다. 부모가 열심을 내면 낼수록 자식들이 더 낭패스러워하고 더 망신스러워 하는 일들이 허다합니다. 세상의 부모는 모두 유한하고 부족하고 허물투성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열심은 결코 우리를 수치스럽게 만들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열심이 특심하실수록 우리는 더 큰 능력, 더 큰 평화, 더 큰 생명의 빛 속에 거하게 됩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당신의 열심을 다해 이 땅에 오신 우리 주님께서는 `위대한 교사'시오, `놀라운 상담자'시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오, `영존하시는 아버지'시오, `평강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뜻깊은 성탄절을 맞이하여 당신의 열심을 다해 우리를 찾아 오시고 당신의 열심히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이 열심을 만나는 자들이 되십시다. 우리가 불의와 거짓속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IMF라는 산타를 보내시사 우리를 진리위에 바로 세우고 계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깨닫는 자들이 되십시다. 작금의 경제적 한파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열심을 다해 우리의 불순물을 제거 하시고 우리를 정금같이 제련시키고 계심을 믿읍시다. 하나님의 열심속에 거하는 한 넘어져도 망하지 않을 것이요, 하나님의 열심속에 있는자의 넘어짐은 새로운 일어섬의 시작임을 확신하는 자들이 되십시다. 우리모두 하나님의 열심에 힘입어 다시 굳건하게 일어나 진리를 향한 우리의 열심으로 하나님의 열심에 응답하는 자들이 되십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열심 속에 거하는 한 우리의 가정과 일터, 이 사회에는 소망의 빛이 차고 넘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시려 함이 아니라 영화롭게 살리시고 바로 세워 주시기 위해 당신의 열심을 다해 이 땅에 우리를 찾아와 주신 예수 그리스도시오, 그 변함없는 열심으로 지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흑암에 행하고 사망의 그늘 속에 거하던 우리를 오직 주님의 열심으로 찾아 와 주셨음을 감사 드립니다. 주님의 열심을 다해 진리를 아는 영화로운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해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이 경제적 한파를 도구 삼아 우리를 보다 완전한 정금이 되게끔 열심히 제련해 주고 계심을 감사합니다. 귀한 이 성탄절 아침, 주님의 이 열심이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을 확인시켜 주셔서 더더욱 감사합니다.

주님의 이 열심에 진리를 향한 우리의 열심으로 응답하는 자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에게 주님의 소망과 평강이 넘쳐나게 하시며,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일터와 더불어 우리의 사회가 주님의 빛 가운데에 바로 그리고 굳건하게 세워지게 해 주시옵소서.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반드시 이 일을 이루실 것을 믿고 열심히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되게 해 주옵소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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