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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무개의 장자산책/삼인>을 읽고 밑줄친 부분을 쳤습니다.

 

1.공자왈 맹자왈

지구 전체를 동시에 읽는 컴퓨터 문명 속에 살면서, 새삼스레 기원전 4세기 중국의 한 철학자를 읽는 까닭이 무엇인가? 현란한 21세기 최첨단에서 '공자왈 맹자왈'이 우리에게 도대체 무슨 도움을 준단 말인가?
노자, 공자가 살았던 시대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생판 다른데, 그들의 낡은 생각이 오늘 우리에게 무슨 가르침을 줄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질문에 나는 대답한다. 연이 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오르는 것은 그 줄이 땅에 묶여 있기 때문이라고. 줄이 풀어지거나 끊어지면 연은 곧장 땅에 떨어질 것이라고. 장자의 생각이 수천 년 세월에도 사라지지 않은 까닭은 그 뿌리가 대지에 든든히 박혀있기 때문이요, 근본을 붙잡은 그의 생각을 우리가 잃는다면 21세기 눈부신 컴퓨터 문명에도 순식간에 곤두박질치고 말 것이라고. 시절이 급박하고 어지러울수록 더욱 근본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고.

2. 물고기와 새

새로 하여금 날게 하는 것은 날개인가? 바람인가? 그것을 말하는 사람인가? 펄럭이는 것은 깃발인가? 바람인가?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인가?
모든 것이 함께 움직이고 있다. 나뭇잎 하나가 흔들릴 때 우주가 함께 흔들리고있는 것이다. 새는 결코 저 혼자서 날 수 없다. '혼자'란 인간의 관념이지 실체가 아닌 때문이다.
예수님 말씀을 말씀으로 살아있게 하는 것은 '들을 귀 있는 자'다. 순천자(順天者)는 저만 사는 게 아니라 하늘도 살린다. 역천자(逆天者)는 저만 죽는 게 아니라 하늘도 죽인다. 예수의 십자가는 아버지(의 뜻)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었다. 아버지가 아들로 말미암아 살았다. 그래서 아들도 살았다. 모두 살았다.

3.사람이 무엇을 '안다'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사람 몸에는 여섯 문(六門)이 있어 그것들을 통해 이른바 바깥 세상과 만난다. 눈. 코. 귀. 혀 살갗과 생각이 그것이다. 줄이면 느껴서 아는 것(감각感覺)과 생각해서 아는 것(지각知覺)인데 이 두 가지가 막히면 사람으로 사람답게 살아갈 수가 없지만, 이것들만 의지했다가는 또한 사람으로 사람답게 살아갈 수가 없다. 그래서 알기는 알되 그 아는 것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보면서 그 보이는 것에 얽매이지 않고 알면서 그 아는 바에 갇히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참된 '앎'이다.
참된 앎은 이미 그 앎 속에 들어가 있기에 새삼 "내가 그것을 안다"고 말할 거리가 없다. 그런 경지에 들지 못한 자가 소지(小知)로 대지(大知)를 헤아리려 하는데, 바로 여기에서 모든 인생고(人生苦)가 비롯되는 것이다.

4.굳게 다물어진 입

욥의 진짜 고통은 친구들이 와서 논쟁을 벌이면서 비롯되었다. 그들의 변론은 욥의 아픔을 없애주기는커녕 더 크게 했다. 무슨 논리와 해명으로 인생고를 없앨 수 있으랴?
욥에게 나타나신 하느님은 "네가 과연 무엇을 아느냐?"고 따져 묻는다.
욥은 아무 대꾸도 할 수 없는 자기를 본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자기를 깨달은 것이다. 이때 자기 발견은 곧 하느님 발견이 된다. 욥은 문득 눈을 떠서 하느님을 뵙게 되고 그 결과는 '굳게 다물어진 입'이다.
"부질없는 말로 당신의 뜻을 가리운 자, 그것은 바로 저였습니다. 이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을 영문도 모르면서 지껄였습니다....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리하여 제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잿더미위에 앉아 뉘우칩니다." 

5.선행(善行)은 무철적(無轍迹)이라

선행(善行)은 무철적(無轍迹)이라, 무슨 일이든 제대로 하면 그 자취가 남지 않는다. 해가 서쪽으로 뜬다면 혹시 예수가 자신의 비석을 깎아 세울 수 있을까?
무기(無己), 무공(無功), 무명(無名)은 동일한 몸의 다른 얼굴이다. 무기는 무슨 일을 하는 주체가 없다기보다 그 주체의 '나'가 없음이요, 무공은 공(功)이 없다기보다 공의 '임자'로 나서지 않음이요, 무명은 이름이 없다기보다 스스로 제 이름을 내지 않음이다.
보잘 것 없는 공(功) 다툼으로 날이 새고 저무는 여름 매미들이 어찌 봉황이 강을 건너 남쪽으로 날아가는 뜻을 알겠는가?

6.격이 다른 사람들

예수께서 베푸신 기적을 보고 사람들은 '이분이야말로 세상에 오시기로 된 예언자이시다' 하고 저마다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달려들어 억지로라도 왕으로 모시려는 낌새를 알아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피해 가셨다.(요한복음6:14-15) 예수는 왜 사람들의 왕 되기를 거절하셨던가? 격이 다른 것이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른 것이다.
송인(宋人)이 은(殷)나라 관(冠)을 가지고 월(越)나라에 팔러 갔는데 아뿔사! 그곳 사람들은 머리를 깎고 사는 사람들이라 그만 관(冠)이 소용없게 되었구나. 격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아무리 비싼 관이라도 그냥 무용지물!
톨스토이의 바보 이반이 세운 왕국에서는 장군도 재벌도 도무지 무력하다. 악마가 엄청난 금화를 만들어 사람들을 다투게 하려고 했지만, 금화 두 세 개로 목걸이를 만들어 가지고 노는 것에 만족해버리는 바보들 앞에서는 아무효과가 없다. 격이 다른 사람들, 그러니까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한테는 세상 없는 악마도 손을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7.쓸모

혜자가 커다란 박을 보고 '저건 너무 커서 물을 담아 손으로 들 수 없기 때문에 쓸모 없는 박이다' 고 말했다. 장자가 '물을 담아서 손으로 들 수 없을 만큼 크다면 큰 술통으로 만들어 강물에 띄워놓고 물놀이를 하면서 즐기는데 쓰면 될 것 아닌가?'하고 대답했다.
혜자는 이미 마음속에 자기 중심적으로 쓸모를 정해 놓고 쓸모로 사물을 판단했고, 장자는 사물에서 쓸모를 찾아낸 것이다.
'집 짓는 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우리 눈에는 놀라운 일! 야훼께서 하신 일이다'(시편118:22-23)
바로 이것이다! 하느님보시기에 세상에 쓸모 없는 것은 없다. 인간이 버린 것을 주워다가 긴요하게 쓰시는 하느님의 알뜰살뜰한 솜씨에 대하여 시방 시편을 쓴 다윗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놀라고 있는 것이다. 

8.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은 '아무것도 없는 시골'이라는 뜻으로 읽는데 장자가 그린 이상향(理想鄕)이다. 향(鄕)은 시골이다. 도시가 있기 전부터 있던 곳이다. 도시가 인위(人爲)로써 건설되었다면 시골은 자연(自然)으로이루어졌다. 시골은 도시에 의해 끊임없이 짓밟히면서도 마침내 도시를 구원할 거룩한 어머니(聖母)이다. 성경에서 도시는 자주 불에 타고(소돔) 무너지며(바벨로니아) 도망쳐 나와야 할(예루살렘) 곳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그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는 곳은 언제나 다른 도시가 아니라 빈들이요 산이요 골짜기다. 오늘 우리의 성모님, 우리의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은 어디에서 죽어가는 당신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9. 하늘 소리

'하늘 소리'는 들리지 않는 소리요 내는 자가 따로 없는 소리다. 그 무엇에도 거리끼지 않으며 모든 것에 예속된 소리다. 있기는 분명히 있는데 "여기 있다" 또는 "저기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소리다. 말로 표현을 하면 그 표현으로 말미암아 숨어버리는 '말씀'이요 이름을 지어 부르면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라져버리는 '이름'이다. 곧이 서툴고 모자라는 언어로 표현하자면 무(無)로써 유(有)하는 소리인 것이다. 그것을 인간의 머리로, 언어로 찾아내어 밝힌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따져서 알고자 하지 말아라. 다만 그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그뿐이다. 하느님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그 무엇이 있다는 사실, 그것을 아는 것으로 넉넉하다. 땅 소리도 아니요 인간 소리도 아니면서 땅 소리, 인간 소리와 별개의 것도 아닌 그 어떤 소리, '하늘 소리'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밖에 없는 그 어떤 소리가 있음을 알면 된다.

 

10.어리벙벙함

보아도 보지 못하는 것을 이름하여 이(夷)라 한다.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을 이름하여 (希)라 한다.
잡아도 잡지 못하는 것을 불러 미(微)라 한다.
이 셋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섞이어 하나를 이룬다.
그 위는 밝지 않고 그 아래는 어둡지 않다. 이어지고 이어져 이름을 지을 수 없다. 다시 아무것도 없는 무(無)로 돌아가는지라, 모양 없는 모양이요 모습 없는 모습이라 하니 일컬어 어리벙벙함이라 한다.
맞이해서 보되 그 머리를 볼 수 없고 따라가며 보되 그 뒤를 볼 수가 없다.  (노자14장) 

11.시비란 무엇인가?

시비란 무엇인가? 분별이다. 이것이 옳고 저것은 그르다는 분별에서, 이것은 선이요 저것은 악이라는 분별에서 시비와 다툼이 생기는 것이다. 하늘이 준 온전한 마음을 사람이 제대로 모시지 못할 때, 하늘의 명(命)을 거역하고 제 뜻을 앞세울 때, 사람(아담)은 선과 악을 분별하게 되고, 나와 나를 가르게 되고, 거기서 범죄가 싹튼다. 돌이켜 하늘이 내린 온전한 마음을 제대로 모실 때, 제 뜻을 꺾고 하늘의 명을 따를 때, 사람은 세상의 모든 시비를 잠재우는 거대한 긍정(the great YES)에 이른다. 예수의 부활이 그것이다. 그것은 거대한 긍정이면서 동시에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거대한 부정(the great NO)이다. 어째서 그런가?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 그 모든 것이 땅에 충만한 그리고 사람을 통해 울리는 '하늘 소리'였기 때문이다.

12.참말은 찬 말이다.

사람의 삿된 마음(私心)이 작용할 때 그 소리는 참 소리가 아닌 가짜 소리로 된다. 말과 그 말에 담겨진 내용이 서로 다를 때 그것을 거짓말(가짜 말)이라고 한다. 반대로 말의 안팎이 같을 때 그것을 참 말(진짜 말)이라고 한다. 거짓말은 빈 말이다. 참말은 찬 말이다.
말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입이 말을 하는가? 속에 생각이 없는데도 말이 입에서 나오는가? 생각만으로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입이 있어야 한다. 입이 없으면  사람은 말을 하지 못한다. 말은 속에 생각이 있고 겉에 입이 있고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13.해뜨는 쪽

서양은 '자기'가 주인이 되어 '북'(北)을 본다. 동양은 '북'에서 '자기'를 본다. 그러기에 해뜨는 쪽이 서양에서는 오른쪽이고 동양에서는 왼쪽이다. 여기서 사물을 보는 관점이 나온다. 인간 중심으로 인간과 사물을 보는 관점이 서양식이라면 자연에서 인간과 사물을 보는 것이 동양식 관점리라고 하겠다. 서양에서 관찰자와 관찰 대상 사이의 '거리'가 전제되는 과학이 발달하고, 동양에서 관찰자와 관찰 대상 사이의 '합일'이 전제되는 종교가 발달한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4.인간의 인식 경험

참나무와 소나무는 둘만 놓고 볼 때 서로 다르게 보이지만 바위 앞에 놓으면 같은 '나무'다. 종(種)으로 보면 서로 다르고 유(類)로 보면 같다.
길이 본디부터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이나 짐승이 걸어서 생기듯이 소나무는 사람이 소나무라 해서 소나무인 것이다. 얼음은 차다 왜 찬가? 얼음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차다고 하니까 찬 것이다. 불은 차지 않다. 왜 차지 않은가? 불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차지 않다고 하니까 차지 않은 것이다. 똥은 더럽다. 사실은 똥이 더러운 게 아니라 사람이 더럽다고 하니까 더러운 것이다. 실제로 구더기들한테 똥은 아늑한 보금자리요 낙원이다. 숙녀들은 옥구슬을 어여삐 여겨 좋아하지만 참새들은 옥구슬을 던지면 무서워서 달아난다.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다는 온갖 판단과 평가가 결국은 인간의 인식 경험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유효하다는 얘기다.

15.시비(是非)의 조화(調和)

예수는 당신을 향해 칼을 휘두르는 자들에 대하여 칼로 맞서거나 등을 돌려 도망치거나 하지 않고 사랑으로 당당하게 대결했다. 시비(是非)를 화(和)하는 자세에 끝까지 머물러 있으면서 남는 것은 하늘에, 하늘 고름에 맡겼다. 시와 비를 나누지 않고 모두에게 똑같이 비를 내리시는(마5:45) 하느님의 온전하심에 자기를 맡기고 쉬는 것이다. 이를 일컬어 양행(兩行)이라고 한다. 시와 비가 조화를 이루어 어느 쪽도 막힘이 없이 자연스럽게 나아간다는 뜻이다. 어차피 사람들 살아가는 마당에 옳네 그르네는 있게 마련이다. 그것을 어떤 강압이나 회유로 없엘 방도를 찾을게 아니라 시비 그 자체로써 조화를 이루어 사람들 살림살이를 더욱 기름지고 건강하게 가꾸어나갈 길을 찾을 일이다.

16.성경(the Bible)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말로는 담을 수도 없고 닿을 수도 없는 하느님 말씀을 가리키는 화살표다. 성경을 읽지 않고서는 성경이 가리키는 하느님 말씀에 이를 수 없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요한의 말과 그 속에 담겨 있는 말씀은 하나면서 다르다. 서울 가는 길과 서울은 떨어질 수 없는 하나지만 서울 가는 길이 곧 서울은 아니다. 모든 강은 바다와 하나지만 강이 곧 바다는 아니다. 인간이 말과 그 말이 표현하는 진리의 관계 또한 이와 같다, 하고 말한 이것 역시 한 인간의 말이다.

 

17.나는 누구인가?

세상에는 생각건대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다.
첫째, 속에 구슬을 품지 않고 누더기를 입은 사람
둘째, 속에 구슬을 품지 않고 비단옷을 입은 사람
셋째. 속에 구슬을 품고 비단옷을 입은 사람
넷째, 속에 구슬을 품고 누더기를 입은 사람
나는 이 넷 가운데 누구인가?
하느님과 동등하신 분이 자기를 비우고 땅에 내려와 사람 몸을 입으셨다. 그를 불러 예수 그리스도라 한다. 그의 몸 속에는 오직 하느님 한 분이 계셨다. 하느님과 동등하신 분(하느님만으로 충만한 분)이 사람 몸을 입었다. 

18.시험삼아 하는 말이다. 말에 얽매이지 말 것!

사람이 무엇을 '안다'고 할 때 그것이 정말로 아는 것일까? 습기 찬 땅이 사람한테는 허리 병을 앓게 하는 곳이지만 미꾸라지한테는 안락한 침상이다. 나무 꼭대기는 사람한테는 아슬아슬한 곳이지만 원숭이한테는 편안한 곳이다. 사람은 가축을 먹고 사슴은 풀을 먹고 지네는 뱀을 먹고 올빼미는 쥐를 먹는다. 여희(麗姬)는 미인이라고 하지만 새들은 그를 보고 높이 날아 도망친다. 도대체 인간이 말하는 안락한 처소, 맛있는 음식, 아름다운 자태라는 게 과연 참으로 안락한 처소, 맛있는 음식, 아름다운 자태인가? 언제 어디 누구에게서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그 무엇은 없다. 저마다 제 눈에 안경이다. 사람과 짐승 사이는 물론이요 사람끼리도 그러하다.

19.예수는 누구와도 시비를 다툰바 없다

수많은 사람이 그에게 시비를 걸어왔으나 한번도 그들의 시비에 말려든 적이 없다.
질문: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시(是)인가, 비(非)인가?
대답: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질문: 간음한 여자에게 돌을 던질까 말까?
대답: 여기에 간음하지 않은 자, 누구냐?
질문: 네가 그리스도냐?
대답: 그것은 네 말이다.
질문: 진리가 무엇이냐?
대답:......
그러나 그 '말씀'은 한마디 한마디 그대로 거역 못할 시(是)가 되고 비(非)가 되어 사람들의 가슴을 찔렀다. 

20.착각 또는 무지

사랑의 감정이 눈을 가리면 상대방의 단점이 오히려 장점으로 보이게 마련이다. 욕심이 눈을 덮으면 사물의 실상이 보이지 않는다. 마음을 비우고 보지 않으면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하여 긴 세월 땅 속 어둠을 더듬어야 하는 뿌리가 보이지 않는 법이다.
꽃을 뿌리에서 단절시켜 볼 때 서슴없이 가위로 그 못을 자를 수 있다. 사람을 하느님의 생명 바다에서 단절시켜 볼 때 거침없이 그 가슴에 총칼을 박을 수 있다. 이 모두가 육안에 들어오는 모양을 사물의 전부로 아는 착각 또는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21.먹느냐 먹히느냐

사람이 술을 마시고 유쾌하게 즐기는 것은 얼마든지 좋다. 그러나 과음(過飮)은 곤란하다. 술을 마시되 지나치게 마시면 드디어 술이 사람을 마셔버리고 결과는 망신(亡身)이다.
"예수께서 이르셨다. '사람한테 먹히는 사자는 복이 있다. 사자가 사람으로 되니까. 사자한테 먹히는 사람은 화가 있다. 사람이 사자로 되니까.'"(도마복음, 말씀7)
이 말씀에서 '사자'를 '술'로 바꾸어 읽으면 이렇게 된다.
"사람한테 먹히는 술은 복이 있다. 술이 사람으로 되니까. 술한테 먹히는 사람은 화가 있다. 사람이 술로 되니까."

22.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눈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소경을 만나셨는데 제자들이 예수께 '선생님, 저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자기의 죄입니까? 그 부모의 죄입니까?' 하고 물었다"(요9:1-2)
쓸데없는 질문이요 고약한 질문이다. 소경으로 태어난 자의 '불행'에 아무 도움도 될 수 없는 이 질문은 묻는 자의 마음만 비뚤어지게 만드는 호기심에 지나지 않는다. 무지한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는 이렇게 대답하신다.
"자기 죄 탓도 아니요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엉뚱한 대답이다. 대답 아닌 대답이다. 소경의 '불행'을,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는 씨앗으로, 소재로 본 것이다. 이런 눈으로 세상을 보다니! 우리에게 만일 이런 눈이 있다면 모든 것이 얼마나 희망차고 아름답게 보일까?

23.장작과 불

장작을 떠나서는 불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장작이 곧 불은 아니다. 불은 장작보다 먼저 있고 장작보다 나중까지 있다. 장작은 불을 제한하지 못한다. 이 불의 모습을 아주 잘 그려낸 것이 호렙 산 가시덤불 속의 불(출애굽기3:2)이다. 그러나 그 불이 가시덤불에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유한과 무한의 공존, 그것이 우리의 삶이다. 장작을 따를 것인가? 불을 따를 것인가? 우리는 매 순간 선택해야 한다.

24.가장 아름다운 법은

가장 아름다운 법은 가장 단순한 법이다. 복잡다단한 유대의 율법을 예수는 '사랑하라'는 한마디로 환원시킨다. 극진한 말은 차라리 묵언(默言)이다.
그런데 복잡해지면 많아지고 뭐가 많고 보면,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날 없다고, 어지러워지고 어지러우면 근심이 생기니 근심이 있고서야 어찌 남을 구할 수 있으랴?
옛날 지인(至人)은 먼저 자기를 세우고 나서 남을 세웠다. 소경이 소경을 이끌면 둘 다 넘어질 뿐이다. 예수는 삼십 세쯤 세상에 모습을 나타냈고 석가도 스스로 부처 된 뒤에 제자들을 불렀다. 

25.말을 제대로 옮기기 위해서

말을 제대로 옮기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조심해서 피해야 한다.
첫째, 어떤 목적을 위하여(예를 들어 듣는 자의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하여 라든지) 없는 말을 꾸며서 하지 말 것. 말을 꾸며서 하면 결국 들통나게 되고 그러면 옮기는 자가 신의를 잃게 된다. 신의를 잃은 심부름꾼에게 돌아가는 것은 재앙뿐이다.
둘째, 말재간(기교)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자연은 기교를 부리지 않는다. 듣기 좋은 말을 납신거리는 것과 낯빛을 좋게 꾸미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재간을 부리는 것이 곧 기교다. 기교로써 상대를 이기려는 자는 처음에는 그럴 듯 하게 시작하다가도 나중에 가서는 본색을 드러내어 속임수와 억지를 부리게 된다. 그 결과 상대를 성나게 할 따름이다.

26.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매여 있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내가 유다인들을 대할 때에는 그들을 얻으려고 유다인처럼 되었고, 율법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나 자신은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얻으려고 율법의 지배를 받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법의 지배를 받고 있으니 실상은 하느님의 율법을 떠난 사람이 아니지만 율법이 없는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그들을 얻으려고 율법이 없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그들을 얻으려고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내가 어떤 사람을 대하든지 그들처럼 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중에서 다만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한 것입니다.(고린도전서9:19-22)
바울로는 모든 상대와 겉으로 어깨동무하고 속으로 동화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인이었다. 

27. 쓸모 없음(無用) 때문에

뛰어난 목수의 눈앞에 있는 거대한 상수리나무는 참으로 '쓸모 없음'이었다. 배를 만들 수도 없고 널을 짤 수도 없고 그릇이나 문이나 기둥으로도 쓸 수 없다. 그러나 상수리나무는 바로 그 무용(無用) 덕분에 저렇게 오래 산 것이다.
사람들이 사물을 자기의 '쓸모'라는 잣대로만 보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고 또 실제로 '진짜 쓸모'를 모르게 하는지 모른다. 바로 인간의 그 편견 때문에 여기 상수리나무는 오히려 천수를 누리며 살고 있다. 역설이다. 세상이 어두울수록 빛은 밝다. 거꾸로 볼 줄 아는 자에게는 세상의 어두움이 곧 빛이다. 

28. 별로 귀에 들어오지 않는 말

과일 나무는 과일을 맺는 바로 그 '쓸모' 때문에 가지가 찢기고 꺾이는 욕을 당한다. 세상일이 모두 그렇다. 유능할수록 신세만 고달프다. 그러나 아무나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유능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들, 예컨대 재물이나 명성이나 권력 따위를 티끌처럼 여기는 사람만이, 이기능(以基能)으로 고기생(苦基生)이라, 유능해서 고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고생을 무릅쓰고라도 재물과 명예와 권력 따위를 얻고자 하는 자에게는 이런 말들이 한낱 잠꼬대 같은 헛소리에 불과하리라.
상수리나무가 말한다. "나는 오랫동안 무용지물(無用之物)로 평가받기를 바라왔는데, 그 사이 몇 번인가 '쓸모 있다'는 인간의 판단 때문에 죽을 뻔했으나 오늘 드디어 목수로부터 '쓸모없음!'이라는 판정을 받았으니 이제 비로소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었노라"

29.발전이 인간을 소모품으로 만든다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는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처음부터 다른 어느 피조물의 '쓸모'가 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없다. 하나도 없다. 모두가 제 나름의 존재 이유를 지니고 있으며 저마다 하늘로부터 받은 천명을 누릴 권리가 있다. 인간이 무엇을 자신의 쓸모로 삼을 경우에도 이 대원칙을 허물지 않는다는 조건 안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런데, 이른다 인지(人智)가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두부를 만들어 먹기 위해 콩을 심고 젖과 고기를 먹기 위해 소를 기르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뽑혔고 젖을 내지 못하는 소는 도살되었다. 마침내 지구가 '인간'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것을 인간은 '발전'이라는 말로 부른다. 그러나 이 '발전'은 인간 아닌 다른 모든 피조물을 '소모품'으로 전락시킨 대가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30.유용과 무용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생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들, 그것을 인간의 마땅한 처세로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들, 그들의 고정관념에 대한 장자의 비판이 신랄하다.
밖으로 사람에게 쓸모 있음(有用)이 안으로 하느님에게 쓸모 없음(無用)이요, 밖으로 사람에게 쓸모 없음이 안으로 하느님에게 쓸모 있음이다. 남을 이용하는 자는 남에게 이용당하고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 자는 누구에게도 이용당하지 않는다.

31.접여(接與)의 노래

의(義)가 있으나 통할 틈이 없고 인(仁)이 있으나 뿌리내릴 곳이 없다. 성인조차 어쩔 수 없는, 위 아내 할 것 없이 모두 썩고 미치고 무너져 내린 세상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열심히 출세를 향해 달려간다. 그 길이 파멸로 이어지는 줄 모르고. 이런 시대일수록 복(福)은 오히려 깃털처럼 가벼워 마음 하나 먹으면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을 하지 못한다. 세상에 '쓸모'있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면 되는데 그걸 못하는 것이다. 화(禍)는 땅덩이처럼 무거워 누구나 쉽게 알아보고 피할 수 있는데 그러지를 못한다.
이름이 나면 그것이 곧 화근(禍根)이요 높은 자리에 오르면 그것이 곧 재앙인데 사람들이 유명해지고 높은 자리에 앉기를 끝내 피할 줄 모르는 것이다.

32.
"옛날의 배우는 사람은 자기를 위하여 마침내 남을 이루어 주었고, 요즘에 배우는 사람은 남을 위하다가 마침내 자기를 잃어버리고 만다"
'남을 위한다'는 것이 듣기에는 그럴 듯하나 결국은 자기를 남보다 위에 또는 앞에 놓겠다는 속셈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꿰뚫어보고 경계한 말씀이요, '자기를 위한다'는 것이 듣기에는 이기적인 듯하나 사실은 그것이 남을 위하여 그를 이루어주는 유일한 길이라는 얘기다.

33.오직 자기를 갈고 닦는 것이

오직 자기를 갈고 닦는 것이 예부터 수도자의 길이었다. 예수는 한평생 당신을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완성하는 것으로 양식(糧食)을 삼으셨다. 그분의 뜻을 이루는 일이란 당신의 몸과 마음을 몽땅 그분께 드리는 것이었고 그것은 또한 몸과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당신을 내어주는 것이었다. 그분이 십자가를 지신 것도, 뒷날 사람들이 해석한 것처럼 죄인을 대속하기 '위하여' 지신 것이라기보다 그 전날 밤의 마지막 기도에서 보여주셨듯이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에 복종한 것이었다. 이 순서를 뒤집어서는 안 된다. 그분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당신의 길'을 가신다.

34.고요한 마음!

상심(常心)이란 말 그대로 한결같은 마음이다. 외부의 상황 변화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옮겨 다니는 뜨내기 마음이 아니라 언제나 거울처럼 맑고 고요한 마음이다. 고요한 마음! 모든 사욕을 여윈 마음! 만물이 거기에서 나오고 거기로 돌아가는 마음. 이 마음을 지닌 사람을 일컬어 '깨달은 사람'이라 하고 '거듭난 사람'이라고 한다. 그는 일부러 무엇을 조작하지 않는다. 그냥 고요히 있을 뿐이다. 그런데 바로 그 고요함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게로 모여들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고요한 물에 제 모습을 비춰본다. 흐르는 물은 사물을 비춰주지 못한다. 자기의 모습을 보게 된 자는 스스로 조용해진다. 고요한 마음만이 흔들리는 마음을 고요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착하다. 저마다 하느님의 향상을 모시고 있다. 바로 그 착한 씨앗을 싹틔워주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우선 멈추어 고요해야 한다.

35빛

빛에 드러난 것은 밝고 눈부시고 뚜렷하다. 그러나 빛 자체는 결코 그 모습을 드러낸 바 없어 우리의 감각으로 잡을 수 없고, 그래서 어둡고 검고 아득하다. 

36.도둑질의 진짜 모습은 굶주림이다.

어떤 사람이 굶주린 끝에 도둑질을 했다. 그 경우 '도둑질한 아무개'는 '굶주린 아무개'의 겉모습이다. 도둑질한 아무개는 하나의 현상이요 굶주린 아무개는 그 현상의 진실이다. 굶주림이 도둑질의 진짜 모습인 것이다. 애태타(사람 이름)가 도둑놈 아무개와 짝이 되어 어울렸다면 그것은 그의 '도둑질'이 아니라 '굶주림'을 나누었다는 얘기다. 그와 더불어 함께 굶었다는 얘기다. 아무개와 짝이 되어 어울린다는 말은 그의 요구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되 그러나 우리가 바라는 대로는 아니하신다. 만일 그분이 우리의 요구를 우리가 바라는 대로 응답하셨다면 우리는 벌써 파멸하고 말았으리라.

37.재전(才全)

 살면 사는 대로 죽으면 죽는 대로 헐뜯기면 헐뜯기는 대로 떠받들리면 떠받들리는 대로 그것들을 잘 조화시켜 즐거워하며 모든 것에 막힘이 없어 기쁨을 잃지 않게 되고, 혹시라도 그것들이 들어와서 점령하는 일이 없도록 언제나 마음을 지켜 틈이 없게 하면 모든 사물과 더불어 봄(春)을 이루게 되니 이야말로 모든 것과 만나 그 마음에서 봄(의 조화)을 이루는 것이요, 이를 일컬어 '재전'(才全)이라 한다. \

38.덕불형(德不形)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덕(德)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을 말한다. 비유컨대 물이 그 고요함을 완벽하게 이루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아 모든 평면 가운데 가장 완전한 평면인 수평을 이루고 그래서 다른 모든 것의 기울기를 측정하는 기준이 될 수 있는 것과 같다. 만일 물이 출렁거려 겉으로 움직인다면 수평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겉으로 덕의 모양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말은 속으로 고요함, 또는 멈춤의 극치를 이루고 있음을 뜻한다. '자기'를 내세우거나 주장하지 않고 모든 대상과 '화'(和)를 이룬다. 그래서 스스로 평정(平靜)을 얻는 것이다. 덕불형(德不形)이란 화(和)를 완벽하게 이룬 상태를 달리 표현한 것이다.

39.먼저 보아야 할 것은

덕(德)은 속에 감추어져 있어서 얼굴이나 팔다리처럼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덕이 높으면 그로 말미암아 얼굴이나 팔다리는 오히려 잘 보이지 않게 된다. 사람이 마땅히 보이야 할 것은 얼굴이나 팔다리가 아니라 그 속에 감추어져 있는 덕이다. 왜냐하면 얼굴이나 팔다리는 시간과 더불어 사라지고 말 일시적인 현상이지만 덕은 시공간의 벽을 초월하여 영원의 세계에 뿌리내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덕을 보는 대신 얼굴을 본다. 잊어도 좋을 것, 잊어야 할 것은 잊지 않고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을 잊는다.\

40.세상에서 사람들이 갖추면 좋다고 여기는 것 네 가지

세상에서 사람들이 갖추면 좋다고 여기는 것 네 가지, 지(知)와 약(約)과 덕(德)과 공(工)을 성인(聖人)은 오히려 군더더기로 여긴다.
지(知)는 지식인데, 남보다 많이 아는 것을 사람들은 자랑으로 여기나 성인은 그것을 재앙으로 여긴다. 내가 남보다 많이 알면 그 때문에 남을 업신여기고 스스로 으스대게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모든 재난의 씨앗이기 때문이다. 성인은 부적(不積)이라, 도무지 쌓아두는 것이 없거니와 물론 지식도 쌓아두지 않는다. 그래서 성인은 알면서 모른다고 하는 것이다.

41 아교풀

약(約)이란 인의(仁義)로써 인심(人心)을 구속하는 것이다. 예의 범절에 흐트러짐이 없고 행동거지에 어긋남이 없으면 괜찮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데 성인은 영락없는 예의범절과 행동거지를 요구하는 모든 것을 아교풀(約)로 여긴다. 행동거지만 제약하는 게 아니라 그 생명력까지 고착시켜 마치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만든다고 보는 것이다. 바리사이파의 엄격함이 생명 자체를 억압할 때 예수는 그것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들의 철저한 율법주의야말로 닥치는 대로 모든 것에 들러붙어 고착시키는 아교풀이었기 때문이다.

42德과 工

성인은 덕(德)을 접(接)으로 여긴다고 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덕'이란 "조금 베풀어 인심을 사는 것"을 뜻한다. 접(接)은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이다. 뭘 조금 베풀어주는 행위를 사람들과 사귀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서 요컨대 성인은 그런 따위의 덕을 지니지 않는다는 얘기다.
공(工)은 교(巧)라고 했다. 잔재주를 부리는 것이다. 잔재주를 부리는 것을 성인은 장사 솜씨로 여긴다. 장사는 원칙상 이득을 목표로 한다. 성인의 길이 아니다. 어떤 꿍꿍이속을 감추고 말을 에둘러 퉁겨본다던가 얄팍한 속임수로 상대를 넘어뜨리려 한다던가 자신의 이익을 노려 잔재주를 피우는 예수의 모습을 상상이나마 할 수 있을까? 없다. 재주 많은 게 보통 사람들한테는 자랑거리가 되겠지만 성인은 오히려 재주 많은 것을 꺼린다. 진리의 길에는 결코 잔재주가 통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43.감정 따라 살지 말고

세상에 믿기 어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감정이다. 인간의 감정이야말로 칠면조의 깃털보다도 더 변덕스러운 물건이다. 그것에 휘말리기 시작하면 인생행로가 어지러워지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은 감정 때문에 상처를 입고 상처를 준다. 좋은 감정이든 싫은 감정이든 결과는 마찬가지다. 좋은 감정에서 집착이 생기고 싫은 감정에서 미움이 생기거니와 집착도 미움도 사람을 망치는 독이라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다.
목석처럼 되라는 게 아니라 자기 감정에 스스로 부림을 받지 말라는 것이다. 맑은 거울이 만상을 비추듯, 찬 것은 차게 더운 것은 덥게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게 이그러진 것은 이그러지게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응하되 대상을 붙잡지도 않고 대상에 붙잡히지도 않는다.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가? 

44.천지소이장치구자는 이기부자생이라...

하늘과 땅이 영원한 까닭은 그것들이 스스로 삶을 도모하지 않기 대문이다.(天地所以長치久者 以基不者生)노자7장
예수는 같은 내용을 좀 더 노골적으로 말했다. "누구든지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야겠다는 마음, 그 욕심 하나 버리지 못해서 매국노도 되고 짐승만도 못한 존재로 전락하기도 하는 것이다. 성인(聖人)에게 사람의 정이 없다는 말은 이런 마음 이런 욕심이 없다는 말과 같다. 그래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서였을까? 아니면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습관이 있어서였을까? 혜자가 다시 묻는다.
"살려고 하지 않는다면서 어떻게 그 몸뚱이는 유지하고 있는가?"
장자가 같은 말을 한번 더 반복한다.
"도(道)가 그에게 인간의 얼굴을 주었고 하늘이 그에게 인간의 꼴을 주었다!"

45.꽃은 꽃이니까 꽃이다

돌은 돌이니까 돌이요 꽃은 꽃이니까 꽃이다. 부서져서 흙으로 될 때가지 돌이요 썩어서 흙으로 될 때가지 꽃이다. 사람은 사람이니까 사람이요 죽어서 다른 몸으로 바뀔 때까지 사람이다. 다만 자신의 변덕스런 감정에 사로잡혀 제 몸에 상처를 입히지 말 일이다.
"시방 자네는 자네 몸 바깥에 정신을 쏟아 정기(精氣)를 고단하게 하고 그 결과 나무에 기대어 헛소리나 중얼거리다가 책상에 기대어 졸고 있으니, 하늘이 그대를 사람으로 지으셨거늘 어찌 궤변 따위나 늘어놓고 있단  말인가?"

46.인생이란 무엇일까?

사람이 태어나서 죽기까지 한순간도 쉬지 않고 움직이면서 도대체 그 하는 바가 무엇일까? 이 육신 하나 간수하느라고 실컷 고생하다가 멈추고 마는 게 인생이라면 그 뒤에 남은 허탈함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염세주의 철학자로 알려진 아무개씨의 말대로, 늙어서 죽는 것보다 젊어서 죽는 것이 더 좋고 젊어서 죽는 것보다 어려서 죽는 것이 더 좋고 어려서 죽는 것보다 아예 태어나지 않는 게 더 좋은 것이 '인생'인가? 그렇게 말했다는 아무개씨도 집에 불이 나자 먼저 몸을 피했고 아주 늙은 몸으로 죽었다던데. 

47.그것이 인생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살아가는 동안 자기가 해야 할 발를 제대로 안다면 그보다 다행한 일이 없으리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왜 사는 지도 모르면서 그냥 벌거숭이 육신을 허둥거리다가 사라져 가는가? 그런가 하면 "이것이 내 삶의 목표다!" 하고 팔뚝을 내두르며 용맹무쌍 달려가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가 정한 삶의 목표라는 것이 결국에 가서는 저와 남을 파멸로 몰아가버린 경우 또한 얼마든지 있다. 몰라도 탈이요 알아도 안심이 되지 않는다. 그것이 인생이다.

48.똑같은 말을 해도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자 군중은 그의 가르치심을 듣고 놀랐다. 그 가르치는 것이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기 때문이었다."(마7:28-29)
똑같은 말을 해도 저 가슴 깊은 데서 하는 말과 목구멍만 울려서 하는 말은 같을 수 없다. 군중은 어리석어 보여도 이미 알고 있다. 율법학자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볼작시면 마치 목구멍에 막혀 있는 것을 캑캑거리며 토해내는 것 같다. 말의 진원지가 저 발바닥이 아니라 목구멍인 것이다. 그래서 그의 말은 티끌처럼 가볍고 세상을 성가시게 할 따름이다.

49.횃불로 태양을 더 밝게 할 수는 없다.

사람이 자연을 보호한답시고 이런 저런 궁리를 하는데 그 발상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뱃속의 아기가 어떻게 어미를 보호한단 말인가? 사람이 자연을 보호할 만큼 능력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곧장 깨닫고 자연 앞에서 자신을 겸허하게 낮추어 그 한 부분으로 존재하기를 배우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50.죽기 싫어하는 마음

죽기 싫어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그러나 과연 옳은 것인가? 죽기 싫어하는 것이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가? 아니다.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불행과 비참의 씨앗일 뿐이다. 죽기 싫어하는 마음, 그것 때문에 삶이 지저분해지고 마침내 고해(苦海)로 되는 것이다. 생명은 참으로 좋은 것이지만 생명에 대한 집착은 그 좋은 만큼보다 훨씬 더 고약하다.

51.非想非非想

구약의 하느님이 당신의 형상을 만들지 말 것을 계명의 첫머리에 엄숙히 못박은 것은 그런 행위가 비록 하느님을 위해서라는 명분을 지닌다 해도 결국은 당신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결코 어떤 형(형)이나 상(상)에 갇힐 분이 아니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이 어떤 형상으로 당신을 나타내실 수는 없다고 못박아도 안 된다. 하느님은 가시덤불의 불꽃모양으로 당신을 나타내실 수도 있고 한 인간의 모습으로(예수) 나타나실 수도 있다. 상(상)으로써 하느님을 보려해도 안되지만 상을 떠난 어디에서 보려해도 안된다. 그래서 "상도 아니요 상 아님도 아니라(非想非非想)고 하는 것이다. 

52.吾聞道 - 나는 도(道)를 들었다

여기서 들었다는 말은 귀로 들었다는 뜻이 아니다. '들었다'는 말은 그것이 자기 속에 있어서 자기와 그것이 하나로 되었다는 말이다. 흰 천에 붉은 물감을 들이면 붉은 천이 되듯이. 그래서 바울로는 분명히 말할 수 있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들음(받아들임)에서 시작되어 들음(따름)으로 마치는 것. 그것이 믿음이다.
'하느님'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는 신학박사들이 하느님의 길과 거리가 먼 들판에서 헤매다가 생애를 마감하는 모습을 우리는 종종 본다. 문자옥(文字獄)을 끝내 깨치지 못한 채 바다 속 모래알만 헤아린다. 머리로 인식하는 것에서 도(道)를 알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태도를 버리지 않는 한 결코 도를 깨달아 알 수 없다.

53.길은 순서(order)다.

앞과 뒤가 있고 처음과 나중이 있다. 처음과 나중을 구별할 줄 알면 그는 도(道)에 가깝다. 구도(求道)에 순서가 있음을 모르고 함부로 설치는 자들이 있는데 참 스승을 모시지 못한 불행의 열매다. 처음과 나중을 모르니 중간 단계를 거칠 수가 없다. 중간 단계가 생략되니 엉터리가 되지 않을 수 없고 엉터리가 되니 저와 세상을 속이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앗을 뿌려 놓았다.... 처음에는 싹이 돋고 그 다음에는 이삭이 패고 마침내 이삭에 알찬 낟알이 맺힌다."(막4:26-28) '다음에'가 중요하다, 성급한 마음에 이를 무시하거나 생략하면 엉망이 된다. "그대가 그대를 변화시키려 하지 말라. 다만 그대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보라"(엔소니 드 멜로)

54갈고 닦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림을 그릴 수 있지만 모두 다 피카소일 수는 없다. 피카소가 지니고 태어난 그림 소질, 그런 것쯤으로 해두자. 그러나 아무리 소질이 있어도 닦지 않으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글씨 잘 쓰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 있고, 없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만일 재주만 믿고 서예를 닦지 않으면 사람을 감동시킬 만한 글이 나오지 않는다. 차라리 둔재가 성심으로 갈고 닦아서 쓴 글씨가 사람을 감동시킨다.

55.吾猶守而告之

예수는 인간들 사이의 시비분쟁에 휘말려들지 않았다. 오직 도리를 실천에 옮겼을 뿐이다. 그것이 시끄러운 시비 분쟁을 잠재울 수 있는 비결이요 스승의 바른 가르침이었다.
"군중 가운데서 어떤 이가 예수께 '선생님, 제 동기더러 저와 함께 유산을 나누라고 일러 주십시오' 하고 여쭈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에게 '이 사람아 누가 나를 그대의 재판관이나 재산 분배자로 세웠단 말인가?'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여러분은 온갖 탐욕을 주의하고 조심하십시오 사실 제아무리 부요하다 하더라도 사람이 자기 재산으로 자기 생명을 보장 받지 못합니다.' "(눅12:13-15)
이렇게 저들의 시비 분쟁에서 발을 빼는 대신 예수는 재물이 생명을 부장하지 못한다는 지극히 보편적이면서도 많은 사람들한테서 무시당하고 있는 '진리'를 선포한다. '나는 다만 도리를 몸에 지녀 잘 지키고 말 없는 말로 그에게 일렀다.'(吾猶守而告之) 이것이 모든 가르침 가운데 가장 높은 가르침이다.

56.천무사복(天無私覆)이요 지무부재(地無不載)라

예수의 말씀 "제 목숨을 얻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자는 얻을 것이다"
'삶을 죽인다'(殺生)는 말은 자살한다는 말이 아니라 살고자 하는 욕심에 부림을 당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삶을 살린다'(生生)는 말은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으려는 마음에 사로잡힘을 뜻한다.
삶과 죽음의 끈을 놓아버린 사람. 그는 모든 것을 보낸다. 혼연히 놓아준다. 붙잡지 않는다.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아울러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넉넉하게 모신다. 거부하지 않는다. 천무사복(天無私覆)이요 지무부재(地無不載)라, 하늘은 어떤 것을 가려서 덮어주지 않고 땅은 그 품에 실어주지 않는 것이없다. 아무것도 배타하지 않는다. 모든 물을 사양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바다처럼!

57.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자기를 해방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자기를 해방할 수 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물(物)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물을 잡으면 물에 잡힌다. 돈을 잡으면 돈의 노예가 되고 권력을 잡으면 권력의 시녀가 되고 명예를 잡으면 명예의 포로가 된다. 사물이 하늘을 이길 수 없음은 만고의 이치라. 무엇을 좋아한다거나 싫어한다는 것은 이미 그 무엇에 집착해 있음을 뜻한다.

58.대장장이가 쇠를 녹여 무엇을 만들고자 한다면

대장장이가 쇠를 녹여 장차 무엇을 만들고자 한다면 그것은 이미 결정된 바의 것이다. 이 대목에서 쇠가 '자기'를 주장할 수 는 없는 일이다. 대장장이는 쇠의 질(質)을 보고 거기에 맞는 물건을 생각한다. 대장장이의 생각을 쇠는 알 수 없다. 우리를 이런 모양으로 있게끔 한 '그분'의 뜻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철두철미 복종하는 것뿐이다. 여기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59.하지 중에서  않고서 한다

계곡 물이 흐르는 것은 무슨 '뜻'이 있어서가 아니다. 햇빛이 저렇게 쏟아지는 것은 무슨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러나, 바로 그래서, 물과 햇빛은 온갖 나무와 짐승을 먹여 살리는 것이다. 이를 두고, 하지 않고서 한다고 말한다. 벗 사이의 사귐도 그러한 것이어야 한다. 인간의 사랑도 그런 것이어야 한다. 그 사이에 아무리 하찮은 정도라도 '계산'이 오고간다면 그것은 우정도 사랑도 아니다. 관상수련(觀相修鍊)에서 강조하는 침묵(沈默)에는 말[言語]의 침묵도 있고 의지(意志)의 침묵도 있다. 자기 뜻을 스스로 비우는 것이다. 묵언(默言) 정진(精進)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의지(뜻, 생각, 계획, 판단 따위)를 침묵시키고 정진하기는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60.삶에서 깨어나기

당신의 생명이 시작되는 그 순간에 집중하십시오. 그것은 또한 당신의 죽음이 시작되는 순간이기도 하다는 것을 아십시오. 당신의 삶과 죽음은 동시에 생기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으며, 저것이 없었다면 이것도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신의 삶과 죽음은 서로 의지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십시오. 하나가 있기 때문에 다른 하나가 존재합니다. 당신이 삶과 죽음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아십시오. 이 둘은 적이 아니라 한 가지 실체의 두 가지 양상일 뿐임을 이해하십시오. -삶에서 깨어나기 

61.가어이물(假於異物)하여 탁어동체(託於同體)라

서로 다른 것들을 임시로 빌어다가 한 물건을 이룬다는 말이다. '나'는 나 아닌 다른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내 머리는 내가 아니다. 내 손도 내가 아니다. 내 이름도 내가 아니다. 내 의식도 내가 아니다. 내 마음도 내가 아니다. 나 아닌 것들의 집합이 지금 '나'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이 한 물건을 이루고 있다.

62.無事而生定

물고기가  물을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물이 물고기를 있게 한다. 사람이 道를 이루는 게 아니라 도가 사람을 이룬다.  물과 도가 本이요 고기와 사람이 末이다. 이 순서를 바로 세우면 '따로 하는 일 없이 평안한 삶'(無事而生定)에 이른다.
일이 없다 함은 다로 어떤 일을 만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그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일을 자연의 도리에 좇아서 한다는 말이다. 일을 일삼아 꾀하지 않으니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다. 기대가 없으면 낙심도 없는 법, 그 살아가는 모습이 언제 어디서나  定하여 평안하고 고요하다. 맹렬하게 돌아가는 바퀴도 중심 축에 이르면 움직임이 없어 고요하다.  道에 살아가는 사람은 언제나 그 중심을 놓치지 않기에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스스로 정(靜)하고 적(寂)하다. 조금도 흔들림이 없다.

63.성인은 사람들하고는 다르면서 하늘에 일치한 사람이다

성인은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는 것을 소중히 여기며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것을 하찮게 여긴다. 바울로는 깨닫기 전에 보물로 여기던 것을 깨달은 뒤에 오물처럼 여겼다. 성인은 사람들이 버린 것을 줍고 사람들이 줍는 것을 버린다. 세속 사람들과 정 반대의 길을 걷는다. 사람들에게는 부(富)가 복(福)이었지만 예수에게는 가난이 복이요 부는 오히려 화(禍)였다.

64.슬픔이든 기쁨이든

슬픔이든 기쁨이든 인간의 감정에 지나지 않고, 감정은 대상 없이 나오지 않는다. 대상이 감정을 유발한다. 대상이 사라지면 감정도 사라진다. 대상도 감정도 인생을 맡겨 좋을 만큼 미쁜 것이 아니다. 이를 꿰뚫어 아는지라 그 마음이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그 마음이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으니 좋고 나쁨이 따로 없으며 기쁨과 슬픔이 그를 사로잡지 못한다.  

65.중심에서 중심으로 중심을 보는 마음

예(禮)의 궁극 목표는 예를 넘어서는데 있다. 종교의 목표는 종교를 타고 저 자유의 언덕으로 건너가는데 있다. 인간에 의해 마침내 부정되기를, 버림받기를 모든 종교는 바라고 있다.
'나'를 놓아버리면 사방 천지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나'다. 중심에 들어가서 보면 보이는 모든 것이 중심 안니 게 없다. 온전한 동심은 중심에서 중심으로 중심을 보는 마음이다. 거기가 이미 하느님 나라인데 무슨 예절이니 충의니 하면서 거추장스런 인위의 넝마를 새삼스레 걸칠 것인가?

 

66.의인은 아무 이유 없이 사랑한다

"의로운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하되 이런저런 이유 때문이 아니라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랑한다. 그리고 만일 하느님께서 지혜나 당신 자신을 제외한 그밖에 당신이 주셔야 할 그 어떤 것을 사람에게 주신다 하더라도 의로운 사람은 그것을 쳐다보지도 않을 뿐 아니라 자기의 즐거움으로 삼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으며 무엇인가를 행함에 있어 그 어떤 이유도 갖고있지 않기에 동인(動因)을 갖지 않으시는 하느님께서 아무런 동인 없이 행동하시듯 의로운 사람도 아무런 동인 없이 행동하는 것이다." (에크하르트)

67.하느님의 강림

하느님은 어느 인간 손아귀에도 잡히지 않는 '늘 없음'이요 동시에 역사와 운명과 물질 우주의 운행에 동기적 원리로서 '미묘한'실체인 것이다. 시체인 양 몸도 마음도 미동하지 않고 쥐죽은듯이 고요한 중에 이 '늘 없는 미묘한 것', '태곳적 비움'의 강림을 뜨겁게 기다리고 버티어 있노라면 드디어 독수리가 내려오듯 인기척을 내려주신다는 것은 인류 선조들의 경험 법칙이요 또한 하느님 자신의 약속이라고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인간이면 죽기 전에 모두들 한번 해볼만한 실험이 아니겠는가? 한번 살고 한번 죽는 이 여정에 올라 우주의 출렁입과 더불어 춤추며 나아가는 자유는 그 뒤에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리라"(곽노순)

68.당신의 존재 자체가 햇볕을 내려줌, 곧 사랑이신 까닭이다

"성인은 언제나 무심하여 백성의 마음으로 자기 마음을 삼으매 착한 사람을 착하게 대하고 착하지 못한 사람을 또한 착하게 대하니 이는 덕(德)이 착한 때문이요 진실한 사람을 진실하게 대하고 진실하지 못한 사람을 또한 진실하게 대하니 이는 덕이 진실한 때문이다."(노자49장)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오복음5:45-48) 

69.밝히 보고 있으면

화를 내되 자기가 지금 화를 내고 있으며 그 까닭이 어디에 있는지를 밝히 보고 있으면 분노의 포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길을 가되 지금 자기가 길을 가고 있으며 어디로 가는 길에 어디쯤 와 있는지를 밝히 보고 있으면 그 길에 묻혀서 길을 잃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업을 하되 지금 자기가 사업을 하고 있으며 그 사업의 성격과 목적이 무엇인지를 밝히 보고 있으면 사업의 노예로 전락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심지어 욕심을 부리더라도 자기가 지금 욕심을 부리고 있으며 그 욕심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밝히 보고 있으면 욕심에 사로잡혀 마침내 패가망신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70.인과응보-심은대로 거둔다

"우레는 끌어당기지 않는 한 결코 어떤 집에 떨어지지 않는다. 집이 부서진 데는 우레만큼이나 그 집에도 책임이 있다. 황소는 찌르라고 불러들이지 않으면 결코 사람을 찌르지 않는다. 진정 황소 이상으로 그 사람 자신이 자기 피에 대한 책임이 있다. 살인당한 자는 살인자의 단도를 갈고 있다. 그리고 둘 다 치명적인 싸움을 불러들인다. 강탈당한 자는 강탈한자의 활동을 지도하고 있다. 그리고 둘 다 강탈을 범한다.
그렇다. 인간은 자신이 재난을 불러들였으면서도, 자기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초대장을 써보냈는지 완전히 잊어버리고서 손님에게만 강렬히 항의한다. 그러나 시간은 잊어버리지 않는다. 시간은 적당한 때, 적당한 장소에 초대장을 배달한다. 그리고 시간은 초대한 사람이 사는 곳에 손님을 보낸다."(미하일 나이미 21장) 

71.까닭은 있다

까닭을 알 수 없다고 해서 까닭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까닭은 있다. 다만 그것이 우리의 인식 능력으로 붙잡을 수 없는 영역에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것을 붙잡아 캐어 보려는 헛된 노력에 아까운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지 말고, 그런 것이 있음을 받아들여라. 그것을 이름하여 명(命)이라 하자. 사람의 명은 하늘에 있는 것!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순명(順命)이야말로 우리에게 허락된 유일한 대안이다.

 

72.먼저

바다 위를 걷고 손으로 강을 파고 모기 등에 산을 짊어지우려 한다는 얘기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을 시도한다는 뜻이다. 다스림이란 안에서 밖으로 나아가는 빛과 같은 것. 자기를 먼저 세우지 아니하고서 남을 세워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연은 질서요, 질서는 순서다. 순서를 어김은 자연을 등짊이요 그 결과는 자멸과 타멸 뿐이다.
"이 위선자야! '먼저'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눈이 잘 보여 형제의 눈에서 티를 뺄 수 있지 않겠느냐?"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이 두 문장에서는 '먼저'가 열쇠말이다. 중시의 잘못은 '먼저'를 무시한 데 있고 성인(聖人)의 성인 됨은 '먼저'를 지킴에 있다. '먼저'가 무시되면 모든 것이 뒤죽박죽, 아무리 동기가 좋았어도 결과는 사악하게 마무리되고 만다. ⓒ이현주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