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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씨와 도둑>은 최용우 개인 책방의 이름입니다. 이곳은 최용우가 읽은 책의 기록을 남기는 공간입니다. 최용우 책방 구경하기 클릭! |
정원의 <집회에서 흐르는 주님의 은혜>
1.제가 어제 받은 메시지는 이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아. 나는 너희를 원한다. 나는 너희와 교제하기를 원한다. 나는 너희에게 나의 치료와 안식을 주기를 원한다. 나는 너희에게 아무것도 유구하지 않는다. 다만 너희가 나를 누리며 내 안에서 안식하기를 원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을 더 깊이 알고 발견해가기를 원한다. 나의 자녀들아. 나와 교제하자. 나는 오랫동안 그러한 교제와 만남에 굶주려 왔다.
진정 너희가 나를 향해서 눈을 돌릴 때 나는 너희에게 나를 나타낼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새롭게 될 수 있을 것이다."
2. 주님이 우리를 만지실 때 많은 영적인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지혜와 깨달음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분은 우리를 인도하시며 보호하십니다. 주님을 구하고 그분의 임재가 당신에게 나타난다면 그것을 너무 두려워하거나 거부하지는 마십시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체험 자체가 아니라 당신 자신이 주님께 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좀 더 주님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좀 더 그분이 우리를 만지실 수 있도록
좀 더 우리의 영이 그분을 경험하도록 더욱 더 주님을 갈망하십시다.
주님은 사모하는 만큼 우리에게 임하시고 우리를 붙드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풍성하심을 맞볼 때 우리는 변화되어 갈 것이며 우리는 그것이 이 세상에 임하는 천국이며 영광인 것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3. 주님의 역사에는 빛의 역사와 바람의 역사, 그리고 불의 역사가 있습니다. 빛에는 영광과 거룩함의 임재가 있으며 바람에는 꿀이 흐르는 것 같은 달콤함이, 그리고 불에는 강함과 뜨거움이 있습니다.
집회는 사역자의 영적 준비와 상태에 따라 모임에 빛이 임하기도 하고 불이 임하기도 하고 꿀같이 달콤한 바람의 기운이 역사하기도 합니다. 사역자의 영적 상태가 청중에게 전달되는 것이지요.
4.예배의 주인은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실제적으로 임하셔서 예배하는 성도들을 만지실 수 있도록 주님을 예배에 초대하여야 하며 이를 위하여 많은 부분들이 세심하게 준비되어야 합니다.
현대의 교회는 사람에게는 온갖 편리를 제공하지만 주님께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소홀히 다루지요. 그래서 주님의 실제적인 임하심이 부족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열심히 와도 주님이 임하시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5.사람들은 예배를 드릴 때 주님을 초청하는 시간을 가지면 그것이 하나의 형식적인 순서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도자가 '오, 주님,.. 이 자리에 임하여 주십시오...'하고 기도를 해도 막상 눈앞에 어떤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저 하나의 의식을 행한 것으로 여기지요.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육체의 눈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지만 영적으로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납니다. 갑자기 공기가 달라지지요. 영적으로 예민한 이들은 그것을 감지하게 됩니다. 갑자기 어떤 선명한 기운이 움직이게 됩니다. 그것은 주님의 운행하심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을 터치하십니다.
주님의 영이 그 공간에 임재 하시고 운행하실 때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는 감동의 흐름이 있고 세상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놀라운 행복감의 흐름이 있습니다.
6.만약에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성도들의 영적 상태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니 예배를 인도하지 말라'고 하신다면 사역자가 주님의 뜻을 거슬러 억지로 예배를 인도할 수는 없습니다. 예배는 주님을 높이며 우리가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지 사람들의 기분을 즐겁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적당히 대충 집회를 인도하고 내려 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역자가 주님의 종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사람의 종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사역자가 사람의 눈치를 보고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가볍게 여기게 될 것입니다.
7 바른 사역자 -패션모델들의 사진을 보면 표정에 별로 웃음이 없고 좀 딱딱한 느낌이어서 왜 저럴까 하고 생각을 했었는데 어딘가에서 들으니까 모델들은 자기 자신보다 옷을 더 드러내야 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표정이 매력적으로 보이거나 튀는 것을 피한다고 하더군요.
주님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사람도 그래서 너무 드러나고 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습니다. 사람들이 '아, 누구에게 은혜를 받았다..' 하고 말한다면 그것은 사역의 실패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종종 주님은 사라지고 사람만 유명해져서 추종자가 생기니까요. 그래서 여기가 최고라는 식으로 분파가 생기곤 하지요. 그러므로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기도 모르게 사역자는 잊어버리고 주님의 향취에 빠져 들어가게 하는 것이 바른 사역일 것입니다.
8. 우리는 신비체험이 아니라 주님 자신을 추구합니다. 우리는 초능력을 얻고 신비한 힘을 얻기 위해서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우리가 주님의 소유가 되고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주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주님은 우리를 만져주시며 그것은 우리에게 놀라운 은총과 행복한 순간이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천국으로부터 온 것이며 기(氣)나 다른 미혹의 세력과 다른 것입니다.
이 좋으신 주님을 끝까지 갈망하고 사모하고 구하십시오. 주님이 임하셔서 우리의 심령을 아름답고 정결케 해 주실 때 우리는 그것이 천국으로부터 온 것임을 분명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죄에서의 해방, 영혼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순결한 기쁨, 사랑... 그것은 오직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영광의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9. 예배란 아버지 품안에서 자녀들이 뛰어 노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웃음과 즐거움과 사랑의 나눔과 포옹과 고백과 눈물이 있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예배란 주님과의 교통이며 동시에 지체들과의 교제와 연합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예배 가운데 나누는 포옹을 참 좋아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임에는 자주 포옹이 있지요. 주님의 임재와 기쁨이 충만할 때 옆의 지체들과 같이 포옹하고 사랑을 고백하며 기도를 나누는 시간을 자주 갖게 합니다.
만약 은혜가 충만하지 않은 상태라면 그것처럼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것이 없겠지요. 영의 흐름이 전혀 없는 집회에서 억지로 옆에 있는 사람들과 인사를 시키는 경우도 있는데 정말 죽을 맛입니다. 너무나 어색하고 쑥스러워서 다시는 그곳에 가고 싶지 않지요. 그러나 주님의 충만한 상태라면 사랑의 고백과 나눔은 정말 천국과 같은 기쁨을 우리에게 줍니다.
10. 시간이 되어 강단에 섰습니다. 목사님이 저를 소개하면서 '한국 교회 영성의 최고봉이신...'이런 식으로 소개를 하는데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웃으면서 목사님께 회개를 하시라고 이야기했지만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가슴에 깊이 무엇인가가 박히는 느낌이었습니다. 농담이라도 그러한 표현은 저에게 화가 될 것입니다. 제가 드러나고 영광을 받는다면 저에게 돌아올 것은 심판밖에 없겠지요. 그것은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오래 살려면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었지요.
11. 지금 우리가 부르고 있는 찬송가는 대부분 100년, 200년 전에 영국, 미국인들의 정서에 맞게 만들어지고 불려지던 찬송들입니다. 당시에 그 찬송을 통한 주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그 곡을 통하여 큰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에는 이 시대에 역사하는 주의 영으로부터 새로운 찬송의 영감을 받고 새 찬양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이 시대에 맞는 찬양이 필요합니다. 과거의 것들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라 다만 그것으로 만족하거나 주장하지 말고 이 시대에 역사하시는 영감 있는 곡과 가사와 노래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미 경험했던 익숙함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 다시 익힌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 지금 현실입니다. 과거에 임하셨던 주님이 아니라 오늘 이 시간에 임하신 주님을 위해 새 노래가 필요합니다.
12. 사람은 육체를 가지고 있는 영적인 존재이지요. 그래서 영혼은 영계와 교통하지만 육체는 물질계와 교통합니다. 바로 이 육체의 존재 때문에 살아있는 동안은 영계를 잘 감지하지 못합니다. 살아있는 동안은 영혼의 감각보다 육체의 감각이 더 선명하고 물질 세계를 중심으로 해서 살아가니까요.
장갑을 끼고 악수를 하면 상대방의 체온을 느낄 수 없듯이, 이 육체라는 완충지대의 존재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의 영혼이 지옥에 있고 지옥과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고통을 느낄 수 없습니다.
아니, 사실은 그들의 영혼은 고통을 느끼고 있지요. 다만 그들이 육체 중심으로 살기 때문에 육체에만 민감하고 영으로는 죽어있어서 자신의 안에서 고통하고 있는 영혼의 감각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13 은혜의 임하심과 영광의 임하심 - 은혜는 주님이 그분의 영광을 버리고 우리에게로 낮은 곳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영광을 감추시고 우리의 악하고 더러운 상태에 그대로 오셔서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는 것이지요. 영광으로 임하시는 것은 그분이 자신의 모습을 조금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 영광을 우리 각자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아주 조금만 보여주시는데 이 영광을 접하게 될 때 그분의 거룩하심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은혜의 주님을 경험하는 것과 함께 영광의 주님의 경험을 또한 조금씩 맛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영혼이 아름답게, 깊게 자라게 됩니다.
14.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시고 은혜를 주실 때 우리는 손톱만큼이라도 그것이 우리가 잘나서라는 의식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신앙이 좋은 것으로 여겨서는 안되며 다른 이들의 신앙을 판단해서도 안되며 오직 그분 앞에 엎드려져야 합니다.
15 우리는 쉽게 사람들을 판단하고 우리 자신의 신앙이 좋으며 우리가 특별히 선택받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지옥입니다. 우리가 마음속으로만 그렇게 판단하고 겉으로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주님은 아파하시고 슬퍼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눈으로 사람들을 보게 될 때 거기에는 사랑에 따르는 고통이 있지만 동시에 황홀한 기쁨이 있습니다.
참 이상한 일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정복하고 다스리는데서 기쁨을 얻지만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주님을 위한 학대받음과 굴복됨, 비천함, 쓰레기 더미에서 황홀과 천국을 느끼게 되니 말입니다.
16 스데반이 돌에 맞으면서 얼굴이 천사처럼 빛나고, 칼다싱이 복음을 전하다 몸이 찢겨 죽으면서도 기쁨으로 웃다가 죽고,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도저히 기쁨을 절제할 수가 없어서 찬송을 드렸으며, 썬다싱은 썩은 시체의 악취로 가득한 고문의 장소에서 천국의 기쁨 속에 잠겼으며, 잔느 귀용은 지하 감옥에서 10년 간 있으면서 그 열악한 환경에서 주님께 대한 애절한 사랑의 고백들을 남겼지요. 그 감옥에서는 오직 식사할 때만 한 자루의 촛불을 켤 수 있는 어두운 곳이었지요.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곳이 궁궐이었고 천국이었습니다. 주님이 바로 옆에 계셨기 때문에... 묘하지요? 역설의 기쁨인 것 같습니다.
17 신앙의 초기에 아직 영혼이 눈을 뜨기 전까지는 주님 자신을 구하지 않고 단순히 주님이 주시는 선물을 받고 만족하며 육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고 외적인 은사를 받습니다. 그 이상을 구하지 않지요. 그러나 점점 영혼이 깨어나고 눈이 열릴수록 주님이 주시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며 주님의 성분, 주님 자체를 먹으며 그 임재를 알고 누리는 것에 전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그 임재에 모든 생명이 있으며 열매가 있으며 풍성함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방법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풍성함이십니다. 그의 임재가 없을 때 사람은 돈과 편안함을 추구하게 되며 임재가 없을 때 사람의 사랑, 인정, 성공, 명예 등을 추구하게 됩니다. 임재를 모르는 이들은 허무한 것들을 구하게 됩니다.
주님의 임재는 사랑이며 생명이며 존재이며 의미이며 모든 것이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임재를 추구할 때만 생명의 방향을 얻습니다. 사람의 영혼이 병든 것도 임재의 부족이며, 돈을 의지하고 사람의 인정이나 사랑을 얻기 원하는 것도 임재의 부족이며, 외로움도, 그리움도, 허전함도, 불안도 오직 임재로만 치유됩니다.
18 사람의 영혼에는 그들의 미래가 녹음되어 있습니다. 물론 젊은 나이에 영혼의 눈이 빨리 뜨여지게 되면 당하지 않아도 되는 고통을 그리 많이 겪지 않게 되겠지요? 2주면 통과할 수 있는 광야를 40년이 걸려도 통과하지 못하고 다 죽은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가르치심의 의도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계획과 인도하심의 방향을 알게 되면 불필요하게 10년 20년 고생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러므로 영혼의 관점,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시각이 너무나 필요합니다.
젊은 시절에 중요한 것은 나아갈 목표와 방향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특히 사역을 하려고 하는 젊은이들이라면 더욱 중요하겠지요. 그것은 사역 자체보다 자신의 영혼이 깨어나고 주님을 알아 가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9 사람들은 그냥 주님을 사랑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자기 마음대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의 기능이 눈을 뜨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지요. 영혼이 눈을 뜨고 그 기능이 자라게 될 때 자연스럽게 주님의 영을 느끼게 되고 갈망하며 추구하게 됩니다.
영혼이 자라지 않으면 은사적이고 기능적인 능력은 많이 받고 체험할 수 있어도 주의 마음을 알지 못하며 아무리 능력이 많고 외적인 역사를 일으켜도 자기 중심의 동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삶과 인격이 변화되지 않고 참 자유와 행복을 맛보지 못합니다.
20.사람은 영혼과 육체를 가지고 있어서 육체를 통하여 이 땅과 교류하며 영혼을 통해서 영계와 교통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를 통하여 접촉하는 물질계는 모두가 다 동일하지만, 그러나 영계와의 교통은 영적 발전 수준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각 사람의 영혼이 좀 더 발전하고 영적으로 상승할수록 더 충만한 영계의 빛과 은총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사람이 낮은 골짜기에 있을 때에는 햇볕을 잘 받을 수 없지만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햇볕을 많이 받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와 같이 사람은 본인은 인식하지 못하지만 각자의 영적 발전 상태에 의해서 각자에게 맞는 영계에서 영적인 에너지와 메시지를 항상 받고 있습니다.
21.사람들은 악한 영들로부터 괴롭힘을 받을 때 그들을 대적하고 공격해서 그 악한 영을 쫓아내기 위하여 애를 씁니다. 그것은 물론 의미 있고 중요한 사역입니다. 그러나 악한 영들을 단순히 대적하고 공격해서 쫓아내는 것 자체에만 몰두한다면 그것은 본질적인 사역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악한 영들에게서 일시적으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르나 조금 후에 다시 공격을 받게 됩니다.
악한 영들이 주는 어두운 상념들, 두려움이나 불안이나 음란이나 탐심이나... 그러한 것들을 받아들임으로서 고통을 겪는 것은 물론 악령들이 악한 존재이기 때문이지만 또한 영혼이 그렇게 낮은 영역에 머물러 있는 본인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영혼이 그 낮은 영역에서 벗어나서 높은 곳으로 오르게 되면 낮은 영역에 거하고 있는 악령들은 계속하여 그를 괴롭힐 수 없을 것입니다.
22 오늘날 주를 모르고 영적 세계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나 부처나 다른 성인들이 서로 비슷하게 보일지 모릅니다. 물질계에서는 사람의 영이 보이지 않고 육체만 보이므로 비슷하게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영계에서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가 "예수..." 하고 부르는 순간에 즉시로 하늘 문이 열리고 빛이 쏟아집니다. 그것은 물질계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한 사실입니다. 예수의 이름은 구원의 이름이며 모든 은총의 이름입니다. 영적으로 깨어나고 민감해질수록 예수 이름을 통해서 오는 영계의 빛과 권능과 은총을 직접적으로 느끼고 경험하게 됩니다.
23 우리가 주님을 구할 때 주님은 아주 실제적으로 임하십니다. 주님이 임하실 때 우리의 신체에 구체적인 기름부음이 임하게 됩니다.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곳이 손입니다. 손은 영의 흐름에 가장 민감합니다. 주님의 임하심을 구하며 손을 들고 기다리면 손이 묵직해지는걸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능력이 임하시는 시작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손에 임하실 때, 그 손은 주님의 능력이 흘러가고 전달되는 통로가 됩니다. 악한 영을 대적할 때 손을 사용하고 신유사역을 할 때도 손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축복을 할 때도 손을 들어 사용합니다. 손에 능력을 많이 받으면 좀 더 강력한 능력과 은총이 흘러갈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24 우리는 은사를 한 가지씩 따로따로 받는다고 생각하는데 아기를 낳을 때 먼저 손을 낳고, 그 다음 발을 낳고, 코를 낳고, 손가락을 낳고.. 하지 않고 한번에 가기를 낳습니다. 그와 같이 은사가 하나씩 따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구하고 주님이 우리에게 임하실 때 우리 안에 은사의 모든 것이 되시는 주님이 오십니다. 그렇게 우리 안에 임하신 주님이 흘러나올 때 그것이 영의 흐름이며 은사가 되는 것입니다. 각 사람의 발전된 부분을 통해서 그 영의 흐름이 나타나게 됩니다.
손이 발전된 사람은 손을 통해서 그 기운이 나오므로 신유가 되는 것이며, 입을 통해 흘러나오면 예언이 됩니다. 눈을 통해 그 영적 기운이 나오면 투시와 같이 육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25 우리는 환경의 구원, 문제의 구원보다 영의 구원, 영의 변화, 의식 수준의 변화를 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환경을 보지 마십시오. 환경이 좋다고 너무 좋아하지 말며 환경이 나쁘다고 너무 낙망하지 마십시오. 그것들은 그림자와 같은 것이며 실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이 변화되고 발전하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입니다. 오직 예수를 구하고 바라고 사모하고 원해야 합니다. 오직 주를 붙잡을 때 우리의 영혼은 상승하고 발전합니다.
오직 예수의 빛.. 예수의 보혈.. 예수의 충만함.. 이것을 사모하십시오. 예수의 영광과 임재가 여러분들을 가득 채우도록 하십시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오직 주의 영광만 보이도록 하십시오.
26 주님은 수단이 아니고 목적입니다. 우리의 소원과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주님을 구하는 것은 초보적인 신앙이며 좋은 것이 아닙니다.
주를 추구하는 것과 주님이 주시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어떤 기쁨이나 성취나 좋은 것이 주어진다고 해도 그것이 주님과 상관없는 것이라면, 주님의 바깥에 있는 만족이라면 그것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영원한 곳에 기업이 없는 사람들은 이 땅에 속한 사람들이며 이 땅에서 만족을 누리기를 구하고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것은 외형적으로 보았을 때 성공같이 보이지만 비참한 삶입니다. 우리는 영원에 속하고 천국에 속하여 오직 주님을 얻고 주님으로 채워지고 주님께 속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 참된 목표와 만족을 구하여야 합니다.
27 우리는 하늘을 바라보며 무한하고 광대한 우주와 별의 모습을 보고 감탄하지요. 저 넓고 웅장한 우주를 보라.. 그에 비하면 우리 인간이란 얼마나 약하고 부족한 존재인가... 하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사실 우주.. 별.. 그거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보다 그렇게 위대한 존재가 아니에요. 모든 우주의 중심은 은간입니다. 우주가 우리보다 더 크다고 더 훌륭한 것이 아닙니다. 양과 크기와 숫자로 따지는 것은 물질적 사고관, 사고방식입니다. 그것은 이 땅에 속한 개념입니다. 이 땅이 유한하기 때문에 좀 더 넓은 땅, 넓은 집을 구하는 성향이 생긴 것이지요. 무한하다면 그런 것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천국은 규모와 크기의 개념이 없습니다. 관념적, 육체적 의식에 맞춘 천국 이해는 낮은 차원의 천국이해입니다. 천국은 물량적인 것이 아니라 속성이 있을 뿐입니다.
28 배에서 부두에 줄을 매고 당기면 부두가 배에게로 끌려오는 것이 아니라 배가 부두로 가까이 당겨져 가듯이 기도할수록 우리는 주님께로 가까이 가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 주님 자신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종이 아닙니다. 우리의 해결사도 아닙니다. 우리가 문제의 해결에만 마음이 집중되어 있다면 우리는 아직 주님을 사랑하는 신앙의 단계가 아닙니다. 그때 우리는 아직 본질적인 것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깨닫기 위하여 좀 더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정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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